대변혁 3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8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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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국가 (최소정부, 통치자의 업적, 미래의 철창)


"정치권력 조직의 역사에서 19세기는 다양성에서 단순성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였다. 또한 19세기는 20세기에 들어와 세계적 추세를 형성하게 되는 네 가지 주요 발전과정─국가의 형성, 관료화, 민주화, 복지국가의 출현─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적 시각으로 회고해보면 19세기는 국가발전의 황금시대로 보일 수밖에 없다. 북아메리카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을 통해 국가와 공공복지의 원칙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고, 국가는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동시에 국가는 광범위한 민중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14년 이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군사적 잠재력의 증가를 억제했다. 요컨대, 국가는 이전에 경험한 바 있는 두 가지 극단적인 정치형태─폭정과 무정부상태─의 출현을 막아냈다." "이런 추세가 모두 유럽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일례로, 현대적 입헌국가는 북아메리카에서 태어났고, 군주제 이후의 독재통치는 남아메리카에서 성행하기 시작했다."(1585-6)


"물리력의 독점은 '근대' 국가를 정의하는 자연스러운 속성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시도하여 획득한 역사발전의 예외적 상황일 뿐이다. 혁명의 시대에 폭력의 독점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18세기 내내 중국정부는 민중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고 또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1850년 이후로 태평천국혁명 시기에 수백만 명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청조정에 저항했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무기를 드는 일은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중앙정부가 호전적인 엘리트와 대다수 민중에게 법과 질서를 지켜낼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을 때 폭력의 독점은 유지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 폭력의 시장이 열리고 사유화된 폭력이 사회화된 폭력을 빠르게 대체한다." "국가는 언제나 이성과 객관성을 향해 발전해간다는 믿음은 극히 왜곡된 이상일 뿐이다. 국가는 사회를 만들어 내고 동시에 국가도 혁명과 전쟁에 의존하고, 재력을 생산하는 경제에 의존하고, '하인'의 충성에 의존한다."(1587-8)


# 1900년 무렵에 존재한 정치질서의 유형들

1. (개인) 전제정체 : 차르 통제하의 러시아, 오스만제국

2. 독재정체 : 호앙 카를로스의 포르투갈,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멕시코,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의 아르헨티나

※ 독재정은 전제정과 비교해 전통, 왕조의 합법성, 종교적 축성(祝聖) 같은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

3. 입헌군주제 : 독일제국, 일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4. 의회책임제 :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제3공화국

5. 충성관계 또는 후견관계 : 유럽 식민주의에 복속된 여러 지역의 정치체제들


"프랑스대혁명 발생 후 오랜 시간이 지난 19세기 중반에도 군주제는 여전히 세계적인 범위에서 주류 국가형식이었다. 유럽에서 근대초기와 혁명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공화국은 '군주화'의 마지막 물결과 함께 사라졌다." "1815년 직후 스위스는 유럽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유일한 비군주국이었다. 군주제에 대한 호의적인 정서는 머나먼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퍼져 있었다." "'군주제' 또는 '왕국'이란 표지의 배후에는 수많은 정치조직의 형식이 숨겨져 있었다. 조직구조가 비슷한 정체라 할지라도 군주제 문화의 침투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로마노프왕조가 종결될 때까지 전제적인 통치를 해온 러시아의 차르는 신성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민중에게 종교적인 수준의 감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왕에게 1830년 이후로 남은 것은 부르주아 국왕으로서 일상적인 역할 뿐이었다."(1597-8)


"군주제와 민족국가의 결합은 19세기의 세계적 추세 가운데 하나였다. 일부 국가는 군주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는 사실상 1805년에 수립되었으나 왕위의 세습을 인정하는 이스탄불 술탄의 칙령은 1841년에 반포됨으로써 비로소 근대적인 민족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근대 샴(태국)을 만든 사람도 개명 전제군주 출라롱코른(라마 5세라고도 불렀다)이었다." "확장 중인 제국이든(러시아) 판도가 축소되는 제국이든(합스부르크제국, 오스만제국) 다민족국가의 통치자들은 분리주의에 맞서 민족과 국가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해내야 하므로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군주와 국가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현상은 원래 유럽이 아니라 일본에서 나왔다. 메이지 천황의 손자인 쇼와 천황(1926-89년 재위) 통치하에서 군주와 국가는 혼연일체가 되었고 이러한 결합은 2차 대전 동안에 아시아에 재난을 가져왔다."(1619-20)


"1900년 무렵의 세계에서 백 년 전에 비해 더 많은 민중이 정치적 운명의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서유럽과 미국의 상황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했겠지만 식민주의로 인한 계량화할 수 없는 정치적 참여의 제약은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자의 의지는 어떤 제약도 없이 표현되어야 하며, 원칙적으로 인민은 어떤 형태의 정부든 교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인민주권의 이상은 일단 개념이 적립되자마자 곧바로 모든 정치체제가 어떻게든 지켜야 할 표준이 되었다. 이것은 19세기의 진정한 신생 사물이었으며, 정치적 기대의 혁명이자 정치적 공포의 혁명이었다. 정치제도를 둘러싼 투쟁은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통치자의 '정당성'과 그가 속한 신분집단의 오래된 권리를 어떻게 지켜낼지는 더 이상 정치의 핵심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공동선에 관한 의사결정에 누가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 하는지가 정치의 핵심문제가 되었다."(1623-4)


"19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징세정책의 혁신 가운데 하나는 소득에 대한 직접적인 정률 소득세였다. 영국은 1842년 이후로 줄곧 이 세수정책을 시행해왔는데, 중상층 소득집단의 부의 증가분을 조심스럽게 재분배하는 효과가 입증되었다. 1861-1900년, 많은 유럽 국가가 이 정책을 도입했다. 그러나 영국의 소득세는 사회복지를 개혁하기 위한 재분배 정책의 수단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유무역을 중시하는 새로운 정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자유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관세를 폐지함으로써 생긴 세수 손실을 소득세라는 새로운 세목을 설치해 보완했고 반대로 자유무역은 소득의 증가를 촉진했다. 세수제도, 특히 서방과 일본의 세수제도는 그 현대성이 최소한 평화시에는 납세자들이 국가의 갑작스럽고 자의적인 특별세 징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서 최종적으로 구현되었다. 법률이 적용되는 지역과 시간의 범위는 명확하게 규정되었다. 세금을 징수하는 국가와 법치는 상호 보완관계였다."(1663-4)


"19세기 유럽에서 국가는 일찍부터 요란스러운 공개 처벌을 피했다. 국가는 더 이상 처형 의식으로 공포의 무대를 연출하지 않았다. 인도주의 사상이 성장하면서 이런 방식은 점차로 용납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에서 이런 행위는 자취를 감추었다(독일민족의 국가에서는 1863년 이후로, 영국에서는 1868년 이후로). 숙련 장인이자 연예인으로서 직업적 사형집행인이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처형장면이 증오의 대상이 된 데는 시장의 요인도 작용했다. 많은 도시에서 형장 가까운 곳에 산다면 상승세에 있던 주택가격이 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었다. 비치명적 국가폭력이 존재한 시간은 좀더 길었다. 1845년,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채찍형의 공개적인 집행을 금지시켰지만 실제로는 인도주의자와 (문명국으로서의 러시아의 명성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한) 민족주의자들이 요란스럽게 항의하기 시작한 세기 말까지 널리 행해졌다."(1669-70)


"사회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치안기관은 노골적인 위협 수단과는 다른 권력의 도구였다. 경찰제도는 19세기에 창설되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중앙정부가 관할하는 전문 경찰기구를 설치한 국가이며 그 시기는 17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1829년부터 경찰제도를 갖게 되었고, 베를린 경찰은 1848년부터 제복을 지급받았다." "일본은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경찰의 직업화와 훈련을 중시했다. 경찰은 메이지시대의 각종 개혁을 관철시키는 가장 중요한 국가기구였다." "19세기에 거의 모든 유럽 식민지에 최소한 가장 기본적인 현대 경찰체계가 (특히 도시지역에) 도입되어 있었다." "영국의 많은 보수파는 영국 정부도 민주화를 주장하는 논조와 행동에 대해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해 좀더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민주의는 줄곧 종주국 수도의 자유주의 사상에 도전했고 더 강한 경찰력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반복적으로 들려왔다."(1670-3)


"미국은 프랑스나 영국 같은 전국적인 경찰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지역별로 경찰력 분포의 편차가 컸다. 사설 탐정기구가 그 빈틈을 메웠다. 가장 유명한 사설탐정 회사는 1850년에 앨런 핑커튼이 세운 회사였다. 핑커튼 탐정회사의 첫 번째 업무는 철도와 우편마차를 경호하는 것이었으나, 1890년대가 되자 노동자 파업 진압으로 이름을 날렸다. 미국을 제외하면 국가의 불완전한 폭력독점 때문에 사법적 감독이 쉽지 않은 사설 경찰력에 그토록 넓은 업무공간을 남겨준 나라는 없었다. 미국에 경찰은 '국가'기관의 위계 안에 포함되는 기관이 아니라 지방자치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프랑스나 일본의 제도와는 정반대였고 영국의 제도와도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19세기 말의 영국 경찰은 자신이 보통법과 비성문 헌법을 대표한다고 인식했다. 반면에 미국 경찰은 자신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정의를 대표한다고 인식했다. 미국 서부의 '보안관'(marshall)은 이런 유형의 명백한 화신이었다."(1674)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유럽에서는 '세 가지 복지국가 모형'이 등장했다. 첫째, 스칸디나비아반도 모형은 소득의 재분배를 통해 조성된 재원으로 사회안전을 보장했다 둘째, 영국 모형은 세수에 의존하여 기본적인 사회보장을 유지함으로써 빈곤을 해소했다. 셋째, 유럽대륙 모형은 개별적인 보험료를 통해 재원을 마련했는데 앞의 두 모형과 대비되는 점은 사회적 신분에 따라 보험료의 액수가 다르게 정해진다는 것이었다(예컨대, 공무원은 특수한 대우를 받았다). 복지제도를 수립한 경로는 다르지만 세계에서 유럽,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사회단체, 자선기관, 교회, 정부의 빈민구제 활동이 자체 동력이 되어 국가 기능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전환된 경우는 흔치 않았다. 미국에서는 개인의 기부는 선행으로 찬양받았지만 빈민구제에 투입되는 세금은 낭비로 인식되었다. 1947년에야 실업보험 제도를 도입한 일본은 이 제도를 실시한 마지막 공업대국이었다."(1679-80)


제3부 주제


12장 에너지와 공업 (누가, 언제, 어디서 프로메테우스를 풀어놓았는가?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발생한, 특히 중요한 요인들을 꼽아보자면, 첫째, 18세기를 통틀어 영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국내시장에서는 생활필수품과 사치품 사이에 끼어 있는 '비교적 고품질 상품'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점진적으로 형성된 중산층이 소비의 주력군이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런 소비층이 아직도 귀족계급과 상업 엘리트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둘째, 18세기 초, 영국은 어떤 나라보다도 강성했고 해외 무역량은 네덜란드를 초과했다. 생산량이 늘어나는 상품을 영국 국내시장에서 소화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특히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가 중요한 소비시장이 되었다." "셋째, 영국에서는 '이론가' 집단과 '실천가' 집단이 더 활발하고 긴밀하게 접촉했다. 이렇게 영국에서 처음으로 산업화 개념의 또 하나의 표지가 등장했다. 그것이 기술혁신의 표준화였다. 이전 시기와 다른 점은 이때의 혁신 물결은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1739-40)


"사람들은 산업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월한 자연조건 이외에 다른 요소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토지개혁이었다. 토지개혁은 농민을 비경제적 요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또 하나는 '인력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투자였다. 교육사업은 문맹퇴치 운동에서부터 국가연구기관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양호한 교육을 받은 노동력은 토지와 광물자원의 부족을 보완해 줄 수 있었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한 몇몇 유럽 국가와 일본은 19세기 말의 수십 년 동안에 모범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산업화 생산방식의 큰 장점은 최소한 어느 면에서는 혁명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하나의 공장에 집중되는 대기업은 당시 세계에서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대량생산 방식이 여러 분야로 확산되어 가는 상황에서 '탄력적 생산'이라 불리는 생산방식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집중 방식과 분산 방식이 결합된 곳에서는 산업화의 성과가 탁월했다."(1746-7)


"에너지원은 19세기라는 음악의 주선율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에게 익숙한 에너지원은 (주로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힘이었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효능을 발휘하는 힘,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여러 가지 기능과 작용을 하는 힘이 되었다. 19세기에 자연과학의 이상은 더는 근대 초기의 기계장치가 아니라 역동적인 에너지원과의 상호관계에 있었다." "1870년 이후로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물리학을 흉내 내어 에너지원의 개념을 대대적으로 차용했다. 동물이 신체를 이용하여 얻어낸 에너지가 경제적인 의미를 잃어가고 있던 바로 그때에 얄궂게도 인체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고전적 정치경제학의 '노동력'이란 표현은 열역학의 영향을 받아 '인체발동기'로 바뀌었다. 근육과 신경의 결합체인 인체발동기는 계획적인 작업 과정에 응용될 수 있었고 에너지의 투입-산출 비용은 실험을 통해 정확하게 계량될 수 있었다."(1755)


"광물에너지원을 기초로 한 에너지경제가 수립된 유럽은 비서구세계와 마주할 때, 〈에너지가 넘쳤다.〉 이 시대의 문화 영웅들은 무위도식하는 명상가, 고행승, 과묵한 학자가 아니라 정력이 넘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vita activa) 실천가, 피로를 모르는 정복자, 두려움을 모르는 여행가, 지칠 줄 모르는 탐색자, 독재적이고 오만한 기업 경영자였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개인적인 패기와 활력을 통해 서방세계 힘의 본질을 보여줌으로써 찬탄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서방의 현실적인 우위는 태생적인 속성처럼 비쳤고 나아가 인종적 우위를 보여주는 표지로 인식되었다. 이 시기의 인종주의는 피부색만을 따지지 않았고, 인간의 '종류'를 육체적 에너지와 지적 에너지의 잠재적인 크기에 따라 구분했다. 그러므로 세기가 바뀔 무렵 비유럽 세계는 서방의 전형적인 특징은 '젊다는 것'이지만 비유럽 세계 자신의 전통과 통치자는 '늙고' 수동적이며 무기력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1764-5)


"사회구조('카스트'제도)와 국민성 또는 종교적 성향('힌두교는 노동을 적대시한다')이 인도의 자주적 발전과 외부세계로부터의 학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주장하는 문화결정론의 논조는 서방 사회학계에서 오랫동안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인도가 보여준 첨단기술 분야의 성공은 이런 주장의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마찬가지로, 이익을 좇지 않는다는 '유교사상'의 경제관이 19세기와 그 이전 세기에 중국의 '정상적인' 경제발전을 가로막은 장애물이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 싱가포르, 타이완 등 중국어 사용권 국가─최소한 간접적으로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일본과 한국을 포함하여─와 지역이 놀라운 경제성장의 성과를 보여준 뒤로 이런 낡은 논조는 조용히 사라졌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인도와 중국 같은 나라는 왜 '당연히' 따랐어야 할 모형대로 발전하지 않았는지 질문하지 않는다."(1777)


13장 노동 (문화의 물질적 기초)


"구체적인 노동자와 노동과정은 사회 계층의 특징을 대표한다. 권력과 지배의 관계가 노동의 자율성과 타율성의 정도를 결정한다. 노동과정의 표준화와 기본적으로 노동을 통해 정의되는 의식이 서로 결합했을 때 그 결과가 '직업'이다. 직업에서 정체성을 찾는 노동자는 고용주로부터 인정받기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자신의 직업을 평가한다. 그러나 그 기준은 집단적으로 정의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직업의 영역을 통제하거나 때로는 독점한다. 그들은 〈시장을 우회하여〉 진입을 제한하고 흔히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이런 방식을 통해 생겨난 폐쇄적 직업조직(장인조합, 동업조합 등)은 그 자체가 수익을 창출하는 자본이 된다." "모든 (또는 대부분의) 문명에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노동에 대한 관념은 기대치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결국은 노동자를 어떻게 '공정하게' 대우하느냐와 관련이 있다."(1820-2)


"19세기에 농업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취업영역이었다. '윤리적 경제'의 관점에 따르면 농민은 자급자족적이고 시장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으며, 집단소유제와 개인소유제 사이에서 집단소유제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집단으로서 농민의 대외적 행위는 방어형과 위험 회피형이다. 그들의 이상은 전통의 틀 안에서의 정의와 상호부조─후원자로서의 지주와 수혜자로서의 소작인의 관계를 포함하여─이다. 이때 토지의 매각은 최후의 수단(umtima ratio)이 된다. '합리적 선택'의 관점에 따르면 농민은 최소한 잠재적인 소규모 기업가다. 농민은 반드시 이윤의 최대화를 목표로 하지는 않으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존의 물질적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집단의 단결과 상호부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기 위해 시장의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 알고 있다. 또한 이 학파는 자본주의가 전파되면서 애초에는 동일한 사회적 상황에 처해 있던 농민들 사이에 차이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1825)


# 19세기까지 존속한 농촌생산(생활) 방식

1. 장원경제(자급자족 노동과 영주에게 제공되는 무상 노동이 결합된 형태)

2. 가족 임차영농(지대를 수취하는 지주와 농민의 대립)

3. 비교적 안정적인 소유권을 가진 소규모 가족영농

4. 플랜테이션(비현지 노동력을 사용하여 자본집약적 작물을 생산하는 형태)

5. 대규모 자본주의 영농(토지 소유주가 임금노동자를 고용)


"운하공사는 한 시대를 대변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운하건설은 새로운 시장이자, 고도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활동이었다. 지구는 더 이상 농민과 광산노동자의 세상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동맥이 지구 곳곳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운하공사는 노동의 세계가 직면한 새롭고도 가혹한 경험이었다. 수공업 공방에서 공장으로 가는 길이 19세기의 유일한 길은 아니었다. 매우 다양한 배경의 비숙련 노동자 군단이 미국의 운하 건설공사장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들은 농촌에서 일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 새로운 이민자, 노예, 자유인 신분의 흑인, 여성과 아동이었다. 이들은 권력도 지위도 갖지 못했고 작업조건을 선택할 힘도 없었다. 이들이 연대하고 상호 부조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운하건설 작업에서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형성될 수 없었다. 지리적인 분포만 하더라도 운하건설 노동자의 작업 장소는 변방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공사 현장과 임시 숙소가 전부였다."(1849)


"수십만 명의 아랍 노동자들이 사막에서 삽으로 운하를 파고 있을 때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철도 궤도가 놓이고 기차역이 세워지고 있었다." "철도부설에는 운하건설과 마찬가지로 삽, 도끼, 쟁기를 사용하는 원시적 육체노동은 물론이고 증기 크레인 같은 현대적 장비도 필요했다. 미국의 동서횡단 철도는 수에즈 운하가 완공된 1869년에 완공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대형 철도공사는 다국적 성격이었다. 1860년 이전에는 철도건설에 참여한 자본은 영국과 프랑스 자본이 주류였다. 1860년 이후로는 보조적이었던 민족자본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든 대륙에서 철도건설 공사가 벌어지는 곳이면 지역의 경계를 넘어선(흔히 국제적인) 새로운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 많은 대형 공사가 아시아 농촌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노동력 비축기지로부터 비숙련 노동력을 조달했다. 반면 철도 운영에는 높은 수준의 기술인력─기관사, 열차장, 철도 순시원, 철도 수리공 등─이 필요했다."(1854-7)


"19세기 경제학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오늘날의 자유주의 경제학 이론은 노동은 자유로우며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을 따른다고 말한다. 인간을 노동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 인간은 '동기부여'가 있을 때 노동한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노동은 노동자의 시민으로서의 자유 또는 신체적 자기결정권이 제약받지 않는 상황에서 행해지는 노동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19세기 전반에─서구 일부 국가에서는 그 기간이 더 길었다─수백만 명의 노동조건은 같은 시기에 자유주의가 찬양하던 도덕적·경제적 이상인 '자유로운' 노동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노동한 부문은 각 국가의 경제에서 원시적이고 낙후한 부문이 아니었다. 이미 증명되었듯이 영국이 노예제를 폐지하기 직전의 카리브해 지역이건 아니면 내란이 일어나기 전의 미국 남부의 각 주이건 노예제 플랜테이션은 모두가 효율성과 수익성이 높았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생산방식이었다."(1865-70)


"사회발전은 새로운 보편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농노제(특히 17세기에 새로 건설된 동유럽의 '2차' 농노제)는 신대륙의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노동력 결핍에 대한 반응이었다. 19세기 유럽 인구의 빠른 증가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 동시에 도시발전과 초기 산업화가 농촌에서 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취업의 기회를 제공했다. 노동시장은 더 유연해지고 반면에 강압적인 노동안정은 이념적으로 점점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농민해방으로 유럽의 농민은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유농민이 되지는 않았다. 유럽의 농민이 영주와의 관계에서 누리던 '옛' 자유는 농촌에서 사라지고 19세기의 '새로운' 자유는 국가가 설정한 틀을 깰 수 없었다. 가장 강인한 자유주의자도 그 어떤 시장보다도 농업시장이 정책적 통제와 개입을 요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리하여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농업정책이 탄생했다. 유럽 농민의 생존은 이때부터 이 정책에 의존해왔다."(1879-80)


"세기 말에 등장한 새로운 요소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었다. 집단으로서의 노동자가 강대한 자본소유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조건이 점차 형성되어갔을 때 노동시장의 불균형이 교정되었다. 그러나 국가입법으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담판(단체교섭, Collective bargaining)이 가능해졌을 때 노동운동은 비로소 돌파구를 찾았다. 여기서 여러 장애를 넘어온 자유로운 노동의 발전은 하나의 역설과 마주쳤다. 노동자 쪽에서 담판을 독점하는 조직을 형성하여 시장의 자유를 제한해야만 노동자 개인은 노동력을 구매하는 쪽이 갖고 있는 통제수단─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를 서로 경쟁시키고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농촌에서도 '자유로운 임금노동'은 의심스러운 개혁이었다. 그에 따른 '무산계급화'는 사회적 지위의 하락이었다. 산업부문은 달랐지만 비대칭적 노동시장에서 완벽한 개인의 자유에 대해 의문을 품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뿐만이 아니었다."(1885-7)


14장 네트워크 (작용범위, 밀도, 틈)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문제를 사고하는 방식은 19세기의 새로운 진전이었다. 17세기에 영국의 윌리엄 하비가 인체는 하나의 순환계통이란 사실을 발견했고, 18세기에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케네가 이 모형을 경제와 사회현상에 응용했다. 그다음 단계가 네트워크였다. 1838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전국적인 철도교통망인 '전국운수체계'를 설계했다. 이것은 미래를 내다본 대담한 구상이었다. 1850년 이전에는 유럽대륙의 어떤 국가도 진정한 의미의 철도망을 갖추지 못했다. 리스트를 이 구상을 실행할 기초 설계도를 확정했다. 철도가 완공되고 실제 운행에 들어가자 비판자들이 철도망을 상징하는 거미줄 그림을 보여주며 철도를 곤충을 질식시켜 죽이는 거미에 비유했다. 그 뒤로부터 거미줄은 '미로', (특히 미국에서) '격자'(格子, grid)와 함께 도시의 모습을 상징하는 그림이 되었다. 사회의 자기 이미지로서 네트워크는 그러므로 19세기에 시작되었다."(1910-1)


"범선과 비교했을 때 증기선은 환경적 요소의 제약으로부터 크게 벗어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연안, 풍랑이 없는 내륙호수, 하천, 운하 항행에 적합했다. 더 이상 변화무쌍한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자 역사상 처음으로 항행시각표를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고 수로 운수의 네트워크화는 새로운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각종 관계는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예측 가능해졌다." "새로운 수송능력과 새로운 새로운 운송수요는 상호작용을 했다. 예컨대, 미시시피강과 멕시코만의 증기선 운수의 확장은 노예노동에 기반을 둔 플랜테이션의 면화생산 확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세기 전반의 빠른 기술진보 덕분에 19세기 중반 이후 증기선으로 브리스톨에서 뉴욕까지 가는 데는 14일이면 충분했고 이 항행시간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다시 한번 크게 단축되었다. 대규모 이민의 물결이 신대륙을 향해 흐르기 시작하면서 전례 없는 규모의 여객운송 수요가 생겨났다."(1915-7)


"해저케이블이 세계를 이어주면서 19세기의 세 번째 사반세기에 세계를 포괄하는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사용자의 개인생활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면에서 보자면 전보는 그 뒤에 등장한 전화나 인터넷에 비해 영향력이 적었지만 상업, 군사, 정치적 활동에서 전보의 중요성은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이제 개별 시장 상호 간의 반응은 빨라졌고 가격 수준은 근접했다. 주문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많은 업종이 대량의 재고를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정치적 영향도 피할 수 없었다. 전보는 해외 현지에 나가 있는 외교관은 물론이고 내각과 수도의 의사결정 기구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중시켰다. 국제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반응속도는 더 빨라졌고 대형 회의의 회기는─꼭 이 원인 때문만은 아니지만─단축되었다. 암호를 사용한 전보는 해독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하거나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다. 염려와 공포는 통신의 광채를 가렸고 검열이라는 새로운 기회가─때로는 실행하기 어려웠지만─열렸다."(1926-31)


"19세기의 국제 화폐체계는 처음으로 몇몇 국가가 협력하여 1540년대 이후로 전 세계에서 유통되어오던 귀금속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경제(와 기타)방면에서 대외관계를 엄격하게 제한하던 국가─일본 그리고 특히 중국─도 이런 화폐의 유통을 수용했고, (원인을 알지 못한 채) 화폐와 금속의 세계적 유통이 가져온 통화팽창 또는 통화긴축의 피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과는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1839-42년)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은 문제였다." "중국의 조처는 단순히 영국이 중국 인민에게 끼치는 해독에 대한 대응 이상의, 더 넓은 세계경제의 맥락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의 비단과 차 수출시장이 위축되면서 1820년 이후로 중국의 은 유입량이 줄어들었고 동시에 남아메리카의 은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은의 국제가격이 올라갔다. 두 요인이 합쳐져 중국 은의 대외 유출을 자극했던 것이다."(1951-3)


"정부와 투자자들은 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안전한 금을 사들였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 영국정부는 금본위제 시행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19세기 70년대 초 이전에는 영국이 유일하게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모든 국가에서 금본위제의 실시여부를 두고 대토론이 벌어졌다. 이론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생긴 곳은 프랑스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1879년부터 (논란이 많은) 금본위제를 시행했지만 의회가 정식으로 승인한 때는 1900년이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다량의 불태환화폐를 발행했던 러시아는, 1897년에 금본위제의 실시를 선언했다. 일본은 1895년에 중국으로부터 받은 거액의 전쟁배상금으로 중앙은행의 비축 금을 확충한 그 해에 바로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당시 일본의 여러 정책이 그러했듯이 이 조처는 '문명세계'에 합류하려는 시도와도 관련이 있었다." "금본위제의 채택은 국제사회에서의 존경을 의미했고 서구식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인다는 의사표시였다."(1954-5)


# 불태환화폐(Fiat currency) : 발행한 정부가 그 가치를 보증하는 명목화폐


"우리는 영국 중심의 이 체계의 내재적인 위험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식민지는 물론이고 세계경제의 비식민지 주변부도 이 체계에 (간접적으로든 미약한 정도로든) 통합되지 않았다. 금본위제는 일종의 도덕적 질서였다. 금본위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가치─자기책임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 신뢰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한 경제활동 환경, 개입을 최소화하는 정부─를 전파했다. 금본위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참여국이 이런 규범을 지키고 이 규범의 바탕이 되는 철학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뒤집어 말한다면 성공적인 금유질서는 자유주의 세계관이 생활의 실제적 목표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금본위제는 자연적(경제적) 요인에 종속적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이전의 조건에서 수립되었다. 1848년 이후 세 대륙의 프런티어에서 대량의 금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이 제도의 최종적인 형태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1959)


"자본흐름의 기존 구조를 네트워크로 상상한다면 실상을 오해할 수 있다. 무역과 달리 이 영역은 호혜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자본은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이전되었다. 채무국과 투자 목적국에서 돌아 나오는 자금은 대출자본이 아니라 이윤으로서 자본 점유자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1825년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새로운 유형의 위기(국가채무위기)는 아무리 늦어도 19세기 70년대부터 일종의 지역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위기는 대부분 라틴아메리카 국가 정부와 유럽 민간 채권자 사이의 충돌이었지만 정치적 또는 외교적 문제를 남기지 않고 해결된 적은 거의 없었다. 쌍방 정부가 담판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다만 한 세기 가까이(1820-1914) 국제 금융네트워크에는 개입을 통해서도 복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신용의 붕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 붕괴는 20세기의 특징적 현상이었다."(1962, 1970-1)


15장 등급제도 (사회적 공간의 수직적 차원)


"19세기는 가장 오래된 사회집단인 귀족이 중요한 역할을 한 마지막 시대였다. 18세기에 유럽 귀족의 〈사회적 지위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였으나 1920년 무렵에는 그런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때는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귀족에게 튼튼한 정치적 세력이나 중요한 문화적 영향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유럽 귀족의 몰락은 한편으로는 18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혁명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와 권위의 원천이던 토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귀족이란 사회제도가 유럽에서 쇠락한 것은 대체로 1789-1920년의 비교적 짧은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귀족의 세력이 직선으로 하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라인강 이동지역의 귀족정치의 상황은 급격한 변화가 없었다.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19세기도 귀족에게는 여전히 '좋은 시절(belle epoque)'이었다."(1997-8)


"영국의 귀족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귀족과는 분명히 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계층이었다. 그들이 가진 법률상의 특권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정치와 사회 권력의 중심을 차지했다. 계승법에 규정된 장자계승권은 부의 집중을 보장했다." "그러나 영국 귀족이 가진 특권은 많지 않았다. 법률로 규정된 가장 명확한 특권은 세습귀족으로서 의회에서 상원의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상층 귀족이 차지한 상원 의석수는 1830년 무렵 300여 개, 1900년 무렵에는 500여 개였다." "영국귀족은 왕실에 의존하지 않았다. 빅토리아시대에 궁정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몇몇 사회영역에서 지도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반대급부로서 사람들의 감사와 복종을 누렸다." "영국이 다른 국가와 대비되는 점은 귀족은 확정된 법률상의 지위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기질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끄는 자신감이었다."(2002-3)


"중국의 신사(紳士, gentry)는 유럽과 일본의 군사귀족과는 달랐다. 신사는 혈통이 아니라 재능 덕분에 관리로 선발되었다. 개별 집안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한 집안이 흥했다 쇠퇴하는 과정이 단지 몇 세대 안에 일어났다." "유럽 귀족과 마찬가지로 신사는 비교적 평온하게 19세기를 넘겼다. 1864년에 태평천국의 위협이 지나간 후 그들이 사회 내부에서 직면했던 경쟁은 유럽에 비해 적었다. 중국 신흥 중산계층이 신사가 지닌 통치지위에 도전했지만, 이는 유사한 상황에서 유럽이 보여준 격렬함에 훨씬 못 미쳤다. 중국에서 위협의 주요 출처는 농민혁명과 외국 자본주의였다. 프랑스 귀족이 종점에 도달한 때는 1790년이었고, 일본 사무라이의 경우는 1873년, 독일 귀족은 1919년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신사계층이 종점에 도달한 때는 1905년이었다. 신사는 또한 가장 마지막으로 몰락한 토지를 기반으로 한 엘리트 계층이자 세계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엘리트 계층이었다."(2014)


"부르주아는 토지와 혈통에 의존하여 신분을 획득한 봉건영주가 아니며, 종속적 지위의 육체노동자가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부르주아'의 범주는 어떤 사회적 개념보다 넓다." "'부르주아계층'이란 개념의 기만성은 부르주아계층의 생활방식에서 나왔다. 부르주아는 (계층) '상승'을 추구하면서 그 반대─빈곤 속에 떨어지고 경멸의 대상이 되는─의 경우를 가장 두려워한다. 귀족은 몰락해도 귀족이지만 몰락한 부르주아는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낙오자일 뿐이다. 성공한 부르주아는 자립심과 자기노력으로 지위를 획득했다고 인정받는다. 그에게는 태어나면서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부르주아에게 사회란 사다리다. 부르주아는 그 사다리의 중간 어디 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위로 올라가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귀족이나 성직자 같은) 비부르주아 엘리트가 존재하는 한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라도 사회 등급의 최정상에 설 수 없다."(2018-9)


"귀족은 명예를 중시했고 전형적인 부르주아는 사회적 존경에 집착했다." "〈존경받을 만한 품성〉은 영국 신사의 성격 모형에서 보듯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학습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문화적 이상이었다. 예컨대, 19세기 남아프리카의 도시에서 백인과 흑인 중산계층은 사회적 존중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정서적으로 서로 근접해 있었다(인종주의가 고개를 들면서부터는 이런 동질성이 발전하기는 점차 어려워졌지만). 아랍, 중국, 인도의 상인도 육체노동을 멀리하고, 가정 내부의 미덕을 중시했다(일부다처제에서도 특수한 방식으로 이 미덕을 실천했다). 또한, 행동할 때 통찰력을 중시했으며 그 명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했다. 따라서 20세기의 마지막 1/3세기에 일본, 인도, 중국, 터키에서 등장한 수억을 헤아리는 중산계급을 서방 사회형태의 수입품이라고만 설명해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현지의 기반이 없이는 이런 일은 상상할 수가 없다."(2024-5)


"이 지점에서 세계사회사 연구는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분명히 부르주아와 부르주아적 가치는 근대 초기 서유럽 도시문화와 장거리 무역의 산물이며 19세기에 산업자본주의와 혁명적 평등사상의 영향 아래서 한걸음 더 진화한 모습이 되었다. 더 나아가 '부르주아 사회'의 이상과 실현된 현실의 일부는 (서)유럽 근대사의 특수한 경로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면이기도 하다." "많은 아시아 국가의 (준) 부르주아계급과 정부의 친밀도는 서유럽보다 높았다. 그렇기에 이들 부르주아계급은 중앙집권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관점을 지지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 뒤에는 독자적인 상업적 성공의 역사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오스만제국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정부의 보호와 지지를 받는 소규모의 상업집단이었다. 19세기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민간시장이 조절하는 자주적인 체계가 수립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2026-30)


16장 지식 (증가, 농축, 분포)


"'지식'은 특별히 생명이 짧은 실체다. 지식에 대한 여러 가지 철학적 정의와는 별도로 사회적 요소로서 지식은 역사가 백 년도 채 안되는 지식사회학이란 학문의 발명품이다. 지식사회학은 독일 이상주의 철학이 '정신'(Geist)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회의 중심에 놓고 실제 생활이나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킨다. 온갖 것을 포괄하는 '문화'라는 개념과 비교할 때 '지식'의 외연은 상대적으로 좁다. 이때의 지식은 종교와 예술을 포함하지 않으며, 현실세계에서 문제해결과 생활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이용되는 인지자원을 가리킨다." "지식은 당연히 유용해야 한다. 지식은 대자연을 지배하는 인류의 능력을 높여주어야 하고 기술 운용을 통해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켜주어야 하며, 사람들의 세계관을 미신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요컨대 지식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면에서 쓸모 있어야 한다. 유럽 엘리트의 눈에 진보는 시대의 표지였고, 지식의 확대와 증가만큼 인간의 진보를 분명하게 나타내는 척도는 없었다."(2079)


"읽고 쓰는 데 통달한 사람만 고상한 문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해력의 보급은 농민을 위한 역서(曆書)에서부터 싸구려 소설에 이르기까지 통속적인 서적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엘리트들이 문해력 보급에 대해 보인 반응은 이율배반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읽기와 모범적인 문화생활을 통해 '보통사람'을 계몽시켜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위로부터의 '문명화'와 근대화의 실천방식이며 민족통합의 촉진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문화의 해방에 대한 의심과 염려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중문화의 해방은─얼마 안 가 노동자 단체가 보여주었듯이─동시에 대중의 사회적·정치적 지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것과 맞물려 있었다. 권력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이런 불신은 현실적인 근거가 없지 않았다. 읽고 쓰는 능력의 대중화는 일반적으로 명예와 권력의 등급질서의 변혁을 유발하거나 현존질서를 건드릴 수 있었다."(2098-9)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사람들은 사회 내부의 지식학습과 도덕교화에 관련된 모든 형식을 교육체계로 인식하고 실제 교육체계로 조직해냈다." "국가가 청년의 공식교육을 독점적으로 통제한다는 구상은 19세기의 혁명적인 혁신이었다. 사회저층과 중산계층의 자녀들이 처음으로 차별 없이 국립학교 입학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부유한 집안의 자녀가 가정교사로부터 배우는 시간이 갈수록 줄었으며 학교에 등교하는 시간은 더 많아졌다. 역사학자 토마스 니퍼다이는 독일 제후국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국가는 '학교국가'(Schulstaat)가 되었고 사회는 '학교사회'(Schulgesellschaft)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세계 각국 정부는 공공교육을 확대하는 정책을 수립하면서 각자의 목표와─민중에 대한 기율교육, '모범국가'를 만들기 위한 '모범시민'의 양성, 군사적 효율성의 제고, 균질적인 민족문화의 창조, 제국의 문화적 통합, '인력자본'의 소질과 기능의 배양을 통한 경제발전 촉진 등─우선순위를 갖고 있었다."(2108-9)


"야망과 열정이 가장 적은 곳이 식민정부였다. 식민정부는 교육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거나 교육에 관해서는 완전히 선교사에게 주도권을 내어주었다. 1960년대 비식민화가 시작되었을 때 콩고자유국(1908년 이후로 벨기에령 콩고)에는 80년 동안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후에도 유럽식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엘리트계층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나이지리아(1851/62년부터 영국이 통치)와 세네갈(1817년부터 프랑스가 통치)의 상황은 이보다는 나았지만 지속적인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학교는 매우 드물었다." "인도의 식민정부는 1차 대전 이전부터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지원했지만, 각 대학에서는 '인문학'(즉, 유럽의 고상한 문화) 이외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영국인의 교육 목표는 식민행정에 동원할 수 있는 문화적으로 영국화된 인도인 계층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소수의 개혁파 인사들이 수십 년 동안 대다수 관리들의 '인문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맞서 싸웠다."(2110-1)


"긴 19세기 동안 전 세계 지식 유통의 경로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더 일방통행이었다. 서방의 자연과학은 세계 기타 지역의 자연과 관련된 지식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동방과 서방 사이에서 쌍방향으로 이동한 것은 미학과 종교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어 보편적이며, 검증 가능한 연구와 과학적 비판과정을 거쳐 이미 입증된 지식이 아니라 영성과 새로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찾는 서방에게 보여준 아시아(훗날에는 아프리카)의 반응이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와 자연과학의 이성적 세계관이 다 같이 위기에 빠졌다고 느끼고 있을 때 마르지 않는 '동방의 지혜'가 그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지혜를 응용하여 서방이 공급한 정신적 자양분에 맞섰다." "아무런 구분 없이 구원종교의 발생지(fons et origo)로 인식되던 '아시아'는 이렇게 비이성주의의 상징이 되어 서방의 이성주의와 논쟁적으로 맞서게 되었다."(2139-43)


17장 문명화와 배제


"'문명'은 그 대립물인 '야만'이 있어야 존재가 부각된다. 세상에서 '야만'이 사라진다면 자만심에 빠진 문명인이 타인을 공격할 때 또는 조잡함과 쇠락에 빠진 우월한 문명의 운명을 한탄할 때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방어막이 없어진다. 문명의 대극장에서 문명의 정도가 비교적 낮은 집단은 관중의 입장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문명인은 다른 집단으로부터 되도록이면 찬양과 존경 그리고 암묵적인 감사의 형식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집단의 선망과 질투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동기가 '문명포교'(Zivilisierungsmission)의 자양분이 된다. 여기서 '포교'(Mission)는 반드시 종교적 신앙의 전파를 가리키지는 않으며 자신의 규범과 제도를 타자에게 주입하려고─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타자가 받아들이도록 강압하려고─자임한 사명감을 일컫는다. 이 모든 것의 전제는 자신의 생활방식이 우월하다는 문명인의 확신이다."(2187-8)


"'문명화'의 개념은 19세기에 사회 내부에도 적용되었다. 예컨대, 스코틀랜드 고지대에 남아 있던 고대 씨족사회 구조의 잔재는 남쪽에서 온 관광객 눈에는 민속으로 비쳤다. 18세기 70년대에 스코틀랜드의 발견이 북방의 아프리카를 발견한 것과 같았다고 한다면 런던에서 세계 박람회가 열린 1851년에 스코틀랜드는 야외 사회사박물관이 되었다. 이탈리아인이 사르디니아, 시칠리아, 메초죠르노를 바라보는 눈길은 영국인이 스코틀랜드를 바라보는 눈길보다 더 냉혹했다. 민족국가 형성 이후 북부 이탈리아는 변경지역을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이에 실망을 느낄수록 변경지역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표현은 아프리카를 언급할 때 드러나는 인종주의적 논조에 가까웠다. 공업화된 대도시의 사회 저층도 외래 '종족', 비슷하게 취급되었다. 그들은 국가와 시장, 개인적인 자선행위, 종교적 설득을 통해 최소한의 문명화된 행동방식, 다시 말해 시민계급의 행동방식을 가르쳐야 할 대상이었다."(2191-2)


"시장경제, 법률, 종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영국의 문명포교 사업을 떠받친 세 개의 기둥이었다. 프랑스식의 문명포교는 여기에다 식민국가의 고급문화를 동화시킨다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집단 생활방식의 개혁 사업으로서 문명포교는 두 가지 극단적인 불간섭주의의 중간에 자리했다. 한쪽에는 유럽 인도주의의 도덕적 태도와 함께 '야만인'은 멸종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숙명론자의 냉정하고 오만한 태도가 병존하고 있었다." "1846-50년에 발생한 아일랜드 대기근을 지나치게 고집스러운 경제학자들은 불가피한 적응성의 위기라고 해독했다. 다른 한쪽에는 모든 유럽 식민세력이 특수한 조건하에서 기꺼이 실행한 간접통치─달리 말해 현지 사회의 구조에 깊이 개입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정책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구조와 생활방식을 철저하게 개조하려는 문명포교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권력균형과 문화적 타협을 교란할 뿐이었다."(2201-3)


"노예제 폐지는 아이티혁명으로 촉발된 충격파가 서방 식민지 세계를 덮친 지연된 도미노효과였다. 영국이 선구적 행동을 보인 후 '문명국'으로 비치기를 원했던 유럽국가 가운데서 어느 나라도 노예제 폐지운동 흐름의 바깥에 머물 수가 없었다. 러시아의 1861년 농노해방도 전체 유럽의 발전 추세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보기에 농노제는 러시아의 국제적 위신을 손상시키는 오점이자 러시아 사회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제도였다." "노예제도를 제외하면 역사에는 단지 세 차례의 가혹한 인종차별 제도가 존재했다. 19세기 90년대부터 20세기 2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미국 남부, 1948년 이후의 남아프리카, 1933년 이후의 독일과 2차 대전 기간의 독일 점령지가 그것이다." "20세기 들어 미국과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노예제는 백인 우월주의로 대체되었고, 피부색 하나만으로 규정된 집단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폭력과 비국가 폭력이 동원되었다."(2221, 2235)


"서구에서 노예제 폐지에 이르는 모든 과정은 기독교와 인도주의 사상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자유시장이란 조건하에서 해방노예들이 긍정적인 자극에 반응할 것이며 수출농업 분야에서 예전만큼 생산적으로 일할 것이란 희망이었다.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은 노예해방을 거대한 실험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중산계급 개혁가들은 해방노예들이 반드시 중산계급의 이상적인 가정생활을 모방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실망했다. 여기에서 아프리카 흑인은 시장의 합리적인 수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류학적 특징을 갖고 있으며 개인적인 생활방식도 '문명'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이것이 인종주의의 근원은 아니었지만 인종주의의 추세를 강화시켜주었다. 노에해방이라는 거대한 실험을 주도한 자유주의자들이 품었던 환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희망의 큰 부분은 실현되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2239-40)


"1900년 무렵, '인종'이란 단어는 세계의 수많은 언어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였다. 세계 각지 여론의 분위기는 인종주의로 넘쳐났다." "1900년 무렵, '인종'은 '백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에서 핵심 화제였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지배자의 지위에 있던 소수 '백인'은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열등' 인종이 백인의 절대적인 지위를 위협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일본과 중국에서 지식인 집단이 유럽의 '인종학'(Rasselehre)이란 용어를 학습하고 응용하고 있었다. '인종'은 진지한 과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졌다. 이 용어는 일부 인접 학파에도 전파되었다. 특히 생물학자와 민족학자들이 '인종'이란 용어를 빈번하게 언급했다. 인접 학과에서 '인민'(Volk, 영어의 people)이라고 할 때는 수십 년 전에는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민중'(demos)을 가리켰지만 이제는 갈수록 생물학적인 공통의 혈연집단으로서의 '인종'(ethnos)을 가리키는 경향이 강해졌다."(2241-2)


# 인종주의의 종류

1. 하층계급을 만들어내는 '억압형 인종주의'

2. 제한구역을 만들어내는 '격리형 인종주의'

3. 국가의 국경을 봉쇄하는 '배척형 인종주의'

4. 특정 집단을 '적'으로 지목하여 제거하는 '멸종형 인종주의'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에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 과학적 연구방법으로서 분류와 비교가 유행했다. 인류를 '유형'으로 분류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여기에 비교해부학과 두개골 용량의 측량으로 인종의 지적 수준을 추론하는 골상학이 과학의 색채를 덧씌워 주었다." "1800년 이전에 만들어진 인종분류는─'황인종'(yellow race), '흑인'(negro), '코카서스인'(Kaukasier)─완고하게 유지되었다." "19세기의 인종학은 혁명 이후 시대의 특징을 띠고 있었다. 기독교의 구속력은 느슨해졌고 등급제도는 신의 질서 또는 자연적 질서의 일부라는 인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이런 배경하에서 형성된 인종학은 영국보다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모습을 더 많이 드러냈다. 영국의 정치사상은 평등을 강조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느끼는 이론상 약속된 평등과 현실에서의 불평등 사이의 괴리는 독립선언과 인권선언을 발표한 국가에서 느끼는 만큼 강렬하지 않았다."(2246-7)


"대략 1815년 이후 새로운 인종학의 생성이 가능해졌다. 거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었다. 하나는, 환경조건이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인체의 표현 형질의 변화에도 항구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환경론과의 결별이었다. 이때 인종학 사상에서 '개량'의 관념은 사라졌다가 그 세기의 마지막 1/3세기에 우생학이란 생명공학으로 모습을 바꾸어 돌아왔다. 이때부터 인종학은 문명포교의 주장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전제는, 계몽운동 말기의 자연과학자와 비교할 때 새로운 인종이론가들은 명성을 좇았다는 것이다. '인종'은 역사철학의 핵심 범주로 떠올랐고, 역사와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만능열쇠가 되었으며, '계급' '국가' '종교' 또는 '민족정신' 등과 직접 경쟁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인종사상의 특징은─토크빌은 그것을 일찍부터 인식한 인물이었다─결정론에 대한 강한 경향성, 그로 인한 정치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역사의 주변화였다."(2247-8)


"왕조시대의 중국은 각종 '야만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익숙하게 알고 있었고 제국의 변경에서 만나는 여러 유형 인종의 외모 특징을 기록해두었다. 중국인은 야만인이 문화적으로 열등한 것은 개인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며, 그러므로 야만인은 교화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다. 전통 중국사상에서는 문화가 다르면 반드시 인종도 다르다는 관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19세기 말이 되자 서방과의 접촉으로 상황이 변했다." "국제질서 속에서 중국의 새로운 위치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찾는 과정에서 지식인 사회의 선두 집단은 인종 간의 투쟁이란 관점에 매료되었고 유럽을 모방하여 인종등급표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확산의 전제는 인종주의 담론이 범람했던 세기 말의 특수한 여론 분위기였다. 당시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와 (전형적인) 범아프리카주의자도 자동적으로 인종적 차이의 관점에서 사고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방안으로서 '흑인종'의 단결을 고취했다."(2257-9)


18장 종교


"19세기는 흔히 '세속화'의 시대─특히 서유럽에서─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세속화가 종교적 상징물을 공공의 공간으로부터 치우는 것을 의미한다면 유럽과 아시아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최소한도라도 종교적 승인에 의지하는 군주정체가 존재하는 한 국가적 의례는 종교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혁명이 군주통치를 소멸시킨 곳이라면 이런 유형의 권력신성화도 종말을 고했다. 1912년 이후로 중국에서는 황제가 천단(天檀)에서 거행하는 제사의식은 없어졌다. 술탄 칼리파의 통치가 종결된 후 케말주의 공화국 정권의 세속주의 상징이 지난 왕조의 종교적 표현을 대체했다." "1826년 이후 오스만 개혁으로 실제로 시작된 국가의 세속화가 이슬람세계의 핵심 화제가 되었다. 케말 아타튀르크 치하의 터키공화국을 시작으로 제국주의 이후 시대의 국가는 20세기에 대부분 세속주의 정권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1979년의 이란혁명(호메이니 혁명)은 이 과정이 역전될 수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2312-3)


"대혁명 이후 (최소한 개신교 국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경건함과 기독교 도덕문화는 중산계급의 특징이었고, 그 부산물 가운데 하나가 성공적인 반노예제 운동이었다. 이러한 추세의 선봉인 영국에서 등장한 종교적 역동성은 (영적·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평가를 받던) 국교인 성공회 밖에서 개신교 복음파의 혁신운동으로 집약되었고 뒤에 가서는 성공회 내부의 반대파도 여기에 합류했다." "19세기 초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은 북아메리카인의 대규모 기독교 귀의로 발전했다. 유럽과는 달리 이 운동은 공식적인 교회조직으로 진화하지 않았고 시종 유동적인 교회와 교파의 형태로 역동성을 유지했다. 1780-1813년에 미국 인구가 8배로 증가하는 동안에 기독교 교구는 2,500개에서 5만 2,000개로 21배 발전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영속적인 부흥운동은 미국을 기독교 신앙이 깊고 도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도 이미 '문명국'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믿는 국가로 바꾸어놓았다."(2313-5)


"일본의 신도(神道)는 메이지시대 민족통합의 도구로서, 국가가 규정한 신흥종교였다. 신도는 추종자의 신앙이나 '경건함'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을 통해 밝혀지는 올바른 신념(Orthodoxy)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올바른 행동(Orthopraxy)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도는 대각성 운동과는 정반대로 종교적 감성을 냉각시키는 데 적합했다. 다른 한편으로 신도는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또는 '세계종교')가 아니라 일본의 국교였기 때문에 현대종교의 다양성 개념과 충돌했다. 국가목표에 완전히 종속된 신도는 종교는 개인의 신앙문제이며 여러 사회영역 가운데 하나라는 관점의 반면(反面)이었다. 이러한 일본과 중국을 대비해보면, 청제국 말기와 중화민국 시기에 중국이 종교에 거의 투자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1949년 이후의 30여 년 동안 국가마르크스주의(또는 '마오쩌둥주의')가 기능적인 면에서 국가신도와 대등했다는 점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2320)


"언제나 제국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식민지의 종교지형과 등급제도에 개입해왔지만 근본적으로 이를 변화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신의 식민지가 아닌 지역에서, 종교적으로 소수파에 속하는 현지 기독교도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선 경우는 흔히 고의적인 도발의 핑계였다. 러시아는 오스만제국 내 그리스인을, 프랑스는 레바논 산악지역의 기독교도를 보호한 적이 있지만(반대로 술탄 압뒬하미트 2세는 기독교도 통치하에 있는 모든 무슬림의 보호자임을 선포했다) 두 경우 모두 국제분쟁과 전쟁을 유발했다. 적대적인 제국이 서로 상대 내부의 종교적 소수파, 소수민족, 또는 고개를 들고 있는 민족주의 소수파 인구를 상대로 벌이는 선동공작은 1차 대전 중에 독일이 영국제국을 겨냥한, 영국제국이 오스만제국을 겨냥한 전략─『아라비아의 로렌스』─으로 최종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전략은 19세기의 영국-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서 이미 실전응용을 마쳤다."(2324-5)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라고도 불리는 모르몬교는 1830년에 미국의 한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창설했다." "태평천국의 주장을 『성경』의 원래 뜻과는 멀리 떨어졌지만 현지화된 기독교 교리라고 해석한다면 창시자가 기록한 자기들만의 성서를 가진 모르몬교도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리가 현지화 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르몬교를 '기독교'로 분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쟁이 있다. 일부다처제의 특징 때문에 모르몬교는 창설되던 시대의 동시대인에게는 '미국의 이슬람교'처럼 낯선 종교였다. 그러나 모르몬교는 『성경』에는 왜 미국이 언급되지 않느냐는 의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모르몬교는 구약시대에 미국을 목적지로 하는 대규모 이민이 있었으며 그것은 미국 땅을 구원대상에 포함시키려는 성서적 계획이라는 대담한 추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르몬교는 미국의 모든 종교 가운데서 가장 미국적인 종교다."(2337)


"이란 시아파의 한 이단 분파인 바브운동은 『쿠란』의 가르침을 대체하는 전능자와의 직접 교류를 기본교리로 삼았다. 창시자인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 쉬라지는 신이 선택한 선지자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신성한 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주장했고 끝내는 자신이 선지지라고 주장했다. 창시자가 1850년에 총살형으로 처형된 후에는, 알리 누리(일명 바하올라)가 임무를 이어받았다. 그는 때때로 세계의 구세주, 다시 태어난 예수와 마디와 조로아스터가 한 몸으로 합쳐진 존재로 자처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이 종파의 교리를 현대세계의 표현에 맞추어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1892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창시자가 내세웠던 시아파 메시아주의는 현대적인 바하이(Bahai)교로 발전해 있었다. 1910년 이후로 이 종교는 유럽과 미국으로 전파되었고 지금은 그 정신적 조직적 중심지가 이스라엘의 하이파이다. 이 종교는 19세기에 타생한 종교 가운데서 모르몬교, 인도의 시크교와 함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종교다."(2339)


맺음말


"단순히 유럽에 대한 관찰만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19세기는 어떤 모습일까? 먼저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은 19세기는 18세기 80년대부터 1차 대전까지 이어지는 긴 세기라는 관점이 유익한 가설이자 보조적인 구상이기는 해도 당연하거나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역사형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시원스럽게 1789년과 1914년을 유럽의 19세기의 시작과 끝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몇몇 국가와 지역의 역사는 이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례로, 중국의 정치사에서 건륭황제가 퇴위한 1796년과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사이의 시기는 긴 19세기라는 구분방식과 시간적으로는 어느 정도 일치하지만 내부 발전의 결과일 뿐이지 유럽이 동아시아에서 벌인 활동과 연관시킬 수는 없다. 일본의 경우 1853년의 문호개방과 1945년 제국의 붕괴 사이의 시기는 완전한 하나의 역사주기를 구성한다. 더 많은 국가가 다른 시대구분법을 따르고 있다."(2364-5)


"그래도 이 책이 서술하는 여러 가지 내용과 단서를 하나로 모으면 몇 가지 현실적인 답안이 나온다. 18세기 60년대, 전체 대서양지역의 복합적인 정치위기,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 새로운 생산기술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서서히 막을 올렸다. 20세기 20년대에 이르러 1차 대전의 각종 결과가 드러나고(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도 좋은 결과가 나왔다) 세계의 모든 식민지와 서방으로부터 기타 형태의 압박을 받는 지역에서─아프리카 열대지역 제외─민족독립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시대는 종결되었다. 세계혁명을 추구하던 소비에트정권이 새로운 소련제국으로 변한 것도 영향력이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광활한 영토 위에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현실비판 정신을 담은 사상인 사회주의가 싹을 틔워 역사에 전례가 없는 기이한 제도를 실현함으로써 세계정치 무대에 새로운 극(極)이 등장했고, 이 체제는 초기에는 새로운 세계혁명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2366)


# 긴 19세기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규정하기

1. 19세기는 생산효율─노동생산성, 기술혁신, 농업혁명(토지개발), 군사혁신, 국가관료기구의 행정력 확대 등─이 '비대칭적으로 상승한' 시대였다.

2. 19세기는 유동성─급격한 인구이동, 생산량 증가를 초월하는 세계무역, 국제자본시장, 모든 형태의 이동수단의 기술혁신 등─이 증가한 시대였다.

3. 19세기는 상호관계 강화의 비대칭성─외부지향성이 양적으로 늘어났고, 서방이 세계의 표준문화로 단극화(單極化) 되는─이 두드러진 시대였다.

4. 19세기는 평등─각종 차별의 제거와 법률상 평등의 실현─과 등급제도─유럽 5대 강국이 국제무대를 좌우하는 체제 성립─가 대립한 시대였다.

5. 마지막으로, 19세기는 해방─(민족)국가들의 독립, 노예제 폐지, 농민 처지 개선, 노동자 권리(선거권 포함) 쟁취, 여성해방은 물음표─의 시대였다.


"19세기는 1914년 8월에 갑자기 끝나지 않았고, 1916년 베르됭전투 이전에 끝나지도 않았고, 레닌이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도착한 1917년 4월에 끝나지도 않았다. 역사는 막이 갑자기 내려오는 연극무대가 아니다. 그러나 1918년 가을에 많은 사람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어제의 세계'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19세기는 1914년 이후 발생한 재난을 위해 길을 닦아 놓았다. 한나 아렌트 등은 19세기는 이 때문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가 받들었던 일부 전통과 사상, 예컨대 자유주의, 평화주의, 노동조합주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1945년 이후에도 폐기되지 않았고 또한 추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1950년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1910년─버지니아 울프는 인류의 본성이 바뀐 해라고 탄식했다─은 아득히 먼 시점이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본다면 1910년은 가장 최근에 겪은 전쟁의 공포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었다."(23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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