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혁 2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7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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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도시 (유럽 모형과 세계적 특색)


"19세기 중엽부터 유럽 대륙의 모든 국가에서 잇따라 등장한 대도시는 기왕의 도시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단절되었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경제학자들은 대도시는 '사회'가 결집되고 사회적 기준이 형성되는 곳이란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대도시는 경제순환의 동력원으로서, 사회적 유동성의 증폭기로서 기능했다. 대도시에서 가치는 (농촌에서처럼) 오로지 생산을 통해서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증가했다. 상품의 신속한 회전이 부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근대적 대도시의 본질은 순환, 다시 말해 교통기술의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속도가 빨라지는 도시 내부 또는 도시와 주변지역 사이의 사람, 가축, 교통수단, 상품의 이동이란 점을 점차 깨달아갔다. 비판적인 사람들은 대도시 생활의 빠른 속도에 대해 끝없이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냈지만 반대로 도시의 개혁자들은 근대도시의 핵심인 원활한 순환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구상했다."(765)


"도시의 급격한 양적 성장과 급속한 현대화가 같은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탈도시화'가 (더러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위기와 정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18세기 공업화 시초 단계에서 대도시 인구의 외부유출 현상이 나타났다. 실제로 탈도시화는 1800년 이전 유럽의 여러 지역, 예컨대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남유럽 도시의 쇠락은 유럽 도시문화의 중심이 남쪽에서 북쪽과 대서양으로 옮겨가는 추세의 반영이었다. 1840년 무렵이 되어서야 남쪽 옛 도시의 쇠락이 멈추었다. 발칸은 하나의 예외였다. 경제발전 수준이 비슷한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발칸의 도시화 정도는 꽤 높았다. 이것은 19세기 특유한 발전 추세의 결과가 아니라 오스만제국의 도시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존중과 각 요새도시의 중요한 지위 때문이었다. 오스만제국의 통치가 끝난 후 많은 발칸 국가가 탈도시화의 과정을 경험했다."(787)


"동아시아에서 탈도시화는 다른 원인 때문에 일어났다. 대략 1750년 이후 상업이 번성하면서 각지의 도시가 빠르게 팽창했다. 19세기 초, 방콕의 인구는 태국 전체 인구의 1/10을 넘어섰다. 버마와 말레이시아 각 주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1850년대 쌀 경작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농촌화' 현상이 나타났고 농촌인구가 상대적으로 증가했다. 1815-90년에 자바에서는 주민 2,000명 이상인 도시에 사는 인구의 비중이 7퍼센트에서 3퍼센트로 떨어졌다. 이것은 현지의 경제가 수출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생긴 직접적인 결과였다." "식민통치가 도시화를 촉진하는지, 방해하는지 또는 후퇴시키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랐다." "영국은 인도를 정복해나가던 1765-1818년 현지에 원래 있던 도시체계를 보존하고 유지시켰다. 이런 방식은 식민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다. 그러나 식민전쟁 중에 도시 내부, 또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기간시설이 많이 파괴되었는데, 유명한 인도의 국도가 여기에 포함되었다."(788-9)


"미국의 도시화 과정에서 운하와 철도의 역할은 유럽의 경우보다 훨씬 컸다. 콜로라도주 덴버시는 수로로는 연결되지 않는 도시였지만 순전히 철도 덕분에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철도산업 덕분에 고립된 개별 도시의 기초 위에서 종횡으로 연결된 도시체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식민지시대 초기에 형성된 대서양 연안의 정착지가 집결된 동북부지역에서 철도망이 확산되자 새로운 도시가 잇달아 생겨났다. 이로 인해 한층 더 종횡으로 확장된 도시체계가 나타났다. 미국 서부에서는 이러한 도시체계가 19세기 중엽에 갑자기 형성되었다. 그 첫 번째가 시카고였다. 이 도시의 인구는 불과 40년 만에 (1850년의) 3만 명에서 110만 명으로 폭증했다. 시카고와 중서부 지역의 기타 도시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변경이 서부로 확장되면서 하나씩 생겨난 도시는 유럽의 모형을 따르지 않고 주변지역이 농업지역으로 개발되기 전에 기반을 잡은 교역의 중심지로서 발전해나갔다."(791-2)


# 단일 기능의 도시 유형들 : 성지(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인도의 바라나시 등) 도시, 휴양지(벨기에의 스파Spa, 프랑스의 비쉬, 크리미아의 얄타 등) 도시, 광산(볼리비아의 포토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미국 콜로라도주의 애스펀Aspen 등) 도시


"19세기에 경제적 성공은 내부적으로는 통합되면서도 등급이 분명하고 외부적으로는 개방된 도시체계를 갖춘 나라에서 나타났다. 민족국가에서는 도시체계가 없어서는 안 되지만 도시는 제대로 작동하는 민족국가의 틀에 반드시 의존적이지는 않았다." "민족국가가 이미 형성된 지역에서는 국가가 점차 국가경제의 조직자로 진화해갔고, 도시의 산업화는 국가경제 안에서 역할의 중요도가 높아졌다.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성장 잠재력이 높은 도시가 세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중앙정부가 나선 조정(調整)은 법적·재정적 통일성을 높였고, 교환과 통신의 표준을 제시했다. 또한, 공공 목적의 도시 기반시설을 설계할 때 기준을 제시했으며 건설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도시체계의 형성과 건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민족국가시대'에도 개별 국가가 반드시 대도시보다 '강대'하지는 않았다. 대도시는 (국가자본을 포함한) 자본의 집적과 분배를 담당하고 동시에 '국가 간' 연결의 기반 역할을 했다."(795-6)


"1870년 무렵에 기차를 타고 유럽의 어느 도시에 도착한 사람이라면, 도시에 오기까지는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는 기술을 이용했지만 일단 도시의 기차역 밖으로 나서는 순간 말이 끄는 운송수단에 의존해야 했다." "걸어 다녀야 하는 도시에서 일터와 집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 수는 없었다. 주거 밀도가 높은 빈민가가 형성된 이유가 이것이었고 빈민가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또한 이것이었다. 저소득 인구도 감당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을 찾아내는 일은 도시발전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다. 공업화 시대 이전의 교통기술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공업시대'로 진입한 뒤에도 전통적 교통수단이 오랫동안 활용되었다. 마차는 도시교통에서 중요한 초기의 발명품이었다.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노선을 정해진 가격으로 운행하는 교통수단으로서의 마차는 미국인의 발명품이었고 1832년에 처음으로 뉴욕 거리에 나타났다. 그로부터 24년 후에 도시 여객마차가 파리의 거리에 등장했다."(878-9)


"마차와 마차철도는 사회공간의 분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차버스의 요금과 교통노선 주변의 지가 상승을 감당할 수 있는 중산계급은 일터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으로 집을 옮길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사회학에서 말하는 작업장 공동체가 해체되었다."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마차교통은 철도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도시 교통의 여러 문제가 마침내 해결된 것은 궤도전차가 도입된(1888년 미국) 뒤의 일이었다. 기술적인 면에서 보자면 전차는 전기적 에너지를 회전구동력으로 전환시킨 기계장치였다. 궤도전차의 등장은 도시의 시내 교통에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가져왔다. 궤도전차의 속도는 마차철도보다 두 배나 빠르면서도 요금은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집 앞에서 전차를 타고 공장으로 출근하는 일이 현실이 되었다. 운임 하락의 파장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수십 년 전에 대서양을 건너는 우편 증기선의 운임이 떨어졌을 때와 거의 같았다."(880-3)


"단거리 대중교통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혁신은 지하철이었다. 지하철이 가장 먼저 건설된 곳은 런던이었다. 지하철은 철도기술과 하수도 공사를 통해 터득한 터널기술이 결합된 산물이었다." "1860년에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고, 3년 뒤에 첫 번째 지하철 노선─길이 6킬로미터의 '메트로폴리스 라인'(Metropolis Line), 세계적으로 지하철의 통칭인 '메트로'(Metro)가 여기서 나왔다─이 개통되었다. 지하철은 깊이 15-30미터의 지하에 건설되었는데 진정한 의미의 지하터널(tube) 방식은 아니었다. 지하 굴착기술이 성숙한 1890년에 이르러서야 터널방식의 지하철이 등장했다. 이때부터 지하철 역이 땅속 더 깊은 곳에 설치될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지하철의 동력도 전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하철 노선망의 점진적 확대는 도시의 통합과 교외지역의 개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지하철 운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운영자의 입장에서도 지하철은 수지가 맞는 사업이었다."(885-6)


7장 프런티어 (공간의 정복, 유목생활에 대한 침입)


"19세기에 들어온 이후로 도시에 대칭되는 극단은 더는 '농촌'(토지에 의존하는 농민의 생활권)이 아니라 '프런티어'(자원개발 과정에서 이동하는 영역)이다. 프런티어는 공간적으로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확산된다. 프런티어는 확장자가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말하듯 그렇게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이동영역이 자기 쪽으로 접근하여 오는 모양을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프런티어는 침략자의 창끝이다." "도시와 프런티어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도시도 프런티어도 19세기 인구이동을 끌어당긴 거대한 자석이었다. 그곳은 꿈의 실현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기회를 제공했다. 도시와 프런티어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사회적 조건의 삼투성(渗透性)과 가소성(可塑性)이다. 가진 것이 재능뿐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었다. 기회가 많다는 것은 동시에 위험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프런티어에서 카드의 패는 다시 뒤섞여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945)


"프런티어의 식민화 과정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한 가지 기본적인 요소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토지침탈의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비유럽 민족이 침입에 저항하여 일정 정도의 승리를 거둔 소수의 사례─예컨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Maoris)─가 있기는 하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볼 때 원시 생존방식에 대한 공격은 거의 모두 원주민의 패배로 마감되었다. 토착사회는 전통적인 생존의 기반을 상실했고 동시에 원래 자신의 소유였던 땅에 등장한 새로운 질서 가운데서 뿌리내릴 근거를 찾을 수도 없었다. 무자비한 박해와 처형을 피한 원주민일지라도 '문명화'와 개조 과정은 피해갈 수 없었다. '문명화'의 근본 내용은 토착문화에 대한 완벽한 멸시였다." "피해자인 소수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1945년 이후의 외부세계의 점진적인 인정은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생활방식의 주변화란 기본적인 사실은 바꿀 수가 없었다."(948-9)


"프런티어에서 '국가'는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제국의 경계가 전형적인 프런티어이다. 제국이 확장을 멈추는 순간 프런티어도 더 이상 잠재적인 병합의 대상이 아니라 외부 위협을 막아내는 노출된 측면으로 바뀐다. 프런티어는 제국의 방어선 바깥에 있는 통제되지 않는 공간, 마지막 초소 넘어 저쪽의 게릴라와 비적(bandit)이 수시로 출몰하는 위협적인 공간이 된다." "프런티어에 대한 제국의 태도는 구조적으로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프런티어는 지속적으로 혼란스러우므로 제국의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위협이다. 정복을 완성한 후 제국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무기를 지니고 순종하지 않는 개척민은 (식민지를 포함하여) 근대국가가 추구하는 무력의 독점을 위협하는 존재이다. 식민지의 변경에 위치한 프런티어는 그러므로 '임시적인'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곳은 '아직' 제국에 병합되지 않았거나 '머지않아' 제국에서 이탈할 지역이다."(955-6)


"미국의 프런티어는 언뜻 보기에 토지를 끝없이 공급해줄 것 같았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 비교적 평등한 분배와 보편적 번영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하층계급이 없는 위대한 사회─를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다." "이 지점에서 미국을 캐나다와 아르헨티나와 비교해보면 하나의 의미 있는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캐나다와 아르헨티나에서 프런티어의 토지는 처음에는 공공의 재산으로 인식되었다. 캐나다에서는 유동성이 높고 모험심이 강한 소농이 국가가 공급하는 토지를 흡수했고 그래서 투기는 초기단계에서부터 나타났다. 아르헨티나에서 토지는 대지주의 손에 떨어졌다. 대지주가 소작인에게 좋은 조건으로 토지를 임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런티어의 균등주의 정신을 믿었던 사람들은 절망의 제물이 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원인의 하나는, 아르헨티나 정부는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추구했지만 캐나다는 균형 잡힌 사회질서를 중시한 차이였다."(960-1)


"전쟁과 폭력의 경계는 모호했다. 교전 쌍방의 살육행위와 방어수단이 없는 평민 거주구역에 대한 공격과 학살은 구분되지 않았다. 쌍방은 무장하고 있었고 폭력은 프런티어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이것은 18세기 말에 벌어진 식민전쟁이 남긴 유산이었다. 다른 문명 사이의 폭력사용과 프런티어 사회의 유럽계 아메리카인의 일상생활 가운데 보편적으로 퍼져있던 폭력이 뒤엉켜 있었다. 생활 속의 분쟁을 권총이나 소총으로 해결하는 '거친 서부'의 개척민은 전 세계에서 최고의 무장을 갖춘 집단이었다. 내전시기에나 통하던 '총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평화시의 사회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폭력은 남성의 명예를 지키는 궁극적인 방식이었다. 미국 동부의 도시에서는 알지 못하는 이 방식은 충돌을 완화하기보다는 격화시켰다('비후퇴의 의무'). 서부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때로는 목숨까지 거는 자살형 '용기'를 숭배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980-1)


# 비후퇴의 의무(No Duty to retreat) :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성(castle), 즉 보호구역이 있고 그곳에 침입해 자신을 위협하는 자에게는 무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미국 형법의 원칙


"서부의 중요한 특징은 자경단주의(vigilantism)였다. 법의 권능이 미치지 못할 때 혁명적인 무력으로서 자경단이 등장하여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거칠게 해석된 자위권 사상과 인민주권(Popula sovereignty)의 원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리처드 브라운의 분석에 따르면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으로서 자경단은 정규적인 법체계에 비해 인력소모는 많아도 비용은 적게 드는 방식이다. 1865년에 내전이 끝난 뒤로 약 40년 동안 권총을 든 영웅들이 만들어낸 공포의 심각성과 보편성은 정점에 다다랐다. 브라운은 이런 상태를 일종의 소규모 '내전'이라고 표현했다. 200-300 명의 악명 높은 전문살인자들(여기에 더하여 이보다 지명도가 낮은 수많은 전문살인자들)이 대지주의 지시를 받고 소규모 목장주와 자경농민을 상대로 대지주의 이익을 관철시켰다. 이들은 정의감이 강하고 보통사람을 돕는 협객이 아니라 계급투쟁에서 상층부의 대리인이었다."(981)


"1874년 특허를 획득한 철조망이 대규모 생산을 통해 보급되자 '열린 서부'에서 개인의 토지소유권은 분명한 선으로 표시되었다. '황야'는 분할되고 식민화되었으며 '유랑하는 야만인'(이것은 당시의 표현이다)은 생존공간을 잃어버렸다. 단일한 측량방식이 미국영토 전체에 적용되었고 프런티어를 넘나드는 생존방식은 불가능해졌다. 전술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은 최후의 패배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인디언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은 인디언조차도 〈지금까지의 존재양식과 완전히 배치되는 다른 존재로 바뀌라는 끊임없는 압력에 포위당한 종족이 되었다.〉 19세기 80년대에 마지막 전투적인 인디언 부족이 무장해체를 당하고 국가의 피보호자 신세로 전락했다. 1871년 정부는 앞으로 인디언과는 어떤 협정도 체결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때부터 인디언국가는 더 이상 담판의 대상으로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988)


"남아프리카와 북아메리카 프런티어의 발전사에는 놀라울 정도로 공통점이 많았다. 두 곳에서 유럽이민과 토착민 사이의 첫 번째 접촉은 모두 17세기에 발생했고, 두 나라에서 19세기 30년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미국에서는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등장하여 남부의 인디언을 축출하는 정책을 펼쳤고 남아프리카에서는 보어인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남아프리카의 독특한 점은 영국인이 희망봉을 점령한 뒤 백인집단이 분열했다는 것이다. 이후 남아프리카에서는 17세기 네덜란드 이민의 후예인 보어인 외에는 비교적 적은 숫자의 영국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영국인 공동체는 영국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중요한 결정권을 독점했다." "보어인은 두 개의 공화국을 세웠다(트란스발 공화국(1852)과 오렌지자유주(1854))." "그러므로 19세기의 남아프리카에는 미국정부의 연방 '인디언정책'과 상응하는 '흑인정책'을 수립할만한 통일된 국가가 없었다."(1000-2)


"북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에서도 프런티어의 핵심집단은 자급자족의 방식으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무장한 개척민이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프런티어에서는 수출수요를 겨냥한 대기업형 생산이 일찍부터 등장했다. 18세기에 담배와 면화 플랜테이션이─대부분이 프런티어 지역에 있었다─광역 무역망의 일부를 형성했다. 19세기를 통틀어 프런티어는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현상으로 변해갔다.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은 내륙으로의 대이주 후에 이전보다 세계시장에서 더 멀어졌다. 보어인들이 세운 두 개의 공화국에서 국가기구의 기능은 온전하지 못했고 재정은 불안정했다. 교회를 제외하고는 '시민사회'를 통합할 시스템은 없었다. 그러나 보어인이 세운 두 공화국의 영토 안에서 19세기 60년대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금광이 발견되자 자족형 농업과 병행해 (세계시장으로 연결된) 광업 프런티어가 형성되었다."(1002-3)


"남아프리카의 지배층은 특정한 구역을 흑인(프롤레타리아)의 집중주거지로 지정했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거주구역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고향'(homelands)이란 명칭을 붙인 흑인 보호구역은 인디언 보호구역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뒤에 생겨났고(1951년 이후), 경제적인 기능을 상실한 인구집단을 격리시킬 목적에서 만든 야외감옥이라기보다는 흑인 노동력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고 경제 분야로 유도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흑인 보호구역은 두 가지 원칙 위에서 세워졌다. 하나는 보호구역 내의 모든 흑인 가정이 경작을 통해 자급자족하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하여 물리적 재생산 비용이 최소 수준에 머물게 된) 남성 노동자를 신흥 경제영역으로 유입시킨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은 아직도 존재한다. 남아프리카의 '고향'은 지도 위에서 이미 사라졌고 다만 토지소유권의 분배에서는 아직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1004-5)


"미국이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는 달리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중앙집권적인 계층제 구조의 제국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정치체제였다. 제국은 크게 보아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기마 유목민이 통치하며 주변의 정주형 농업사회에 기생적인 초원 제국이다. 다른 하나는 자국 농민으로부터 직접 징세를 주요 재원으로 하는 제국이다. 두 유형 사이에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오스만제국은 초기에는 구조적으로 몽고제국과 유사하게 군사지도자 사이에 맺어진 느슨한 연맹으로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번째 유형의 제국으로 변했다." "청제국은 1760년대까지 거침없이 성장하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확장하는 러시아제국을 만나게 되었다." "18세기 말, 한때는 군사적으로 강성했던 유목민이 세운 오래된 나라들이 모두 대제국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런 상태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다가 중앙아시아의 여러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끝이 났다."(1015-6)


"프런티어는 파멸의 장소이면서 새로운 사물이 탄생하는 장소다. 파괴와 건설은 흔시 변증법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 프런티어는 폭력적 무정부주의의 무대이면서 동시에 현대 정치와 사회의 요람이었다." "20세기초,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인구과잉에 따른 자원부족의 위험을 피할 충분한 '생존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며 열등한 민족이 적절치 못하게 '경작하는' 토지를 빼앗는 것은 강대국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주장이 극우단체와 여론 주도층 내부에 자리 잡았다. 이런 생존공간 전략을 실행한 나라는 대부분 20세기 30년대에 일어선 신흥제국─이탈리아 파시스트정권은 리비아에서(에티오피아도 점령했지만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다), 일본은 1931년 이후 만주에서, 나치 독일은 2차 대전 때 단명으로 끝난 동부제국(Drang nach Osten)에서─이었다. 이 세 가지 사례는 프런티어전쟁을 통해 민족의 세력을 증명하고, 토지약탈을 통해 민족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상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1033-4)


8장 제국과 민족국가 (제국의 지구력)


"국제정치의 핵심적인 문제는 전쟁과 평화─전쟁의 부재상태─이며, 전쟁을 피하는 것은 지고의 선이었다. 19세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제관계가 탄생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최근 미국과 소련 사이의 '양극' 핵 대치상황이 종결되면서 냉전과 양차 세계대전 이전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여러 가지 전쟁방식과 국제관계의 행태가 생겨났기 때문에 이런 분석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국제관계의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1945년 이후로 국가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 발동하는 전쟁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침략전쟁은 더는 합법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이미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 19세기와는 달리, 침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더 이상 '현대성의 증명'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물론 일부 아시아 국가의 핵무기 보유의 상징적 의미는 다른 범주의 얘기다."(1098-9)


# 19세기에 이루어진 국제관계의 발전과 변화 양상

1. 국민개병제 확립 : 군대는 더 이상 통치자의 도구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정치적 의지의 화신으로 인식되었다.

2. 국가이익 지상주의 : 통치자나 왕실이 아니라 추상적 관념인 '(민족)국가'의 이익이 국제정치에서 핵심이 되었다.

3. 기술발전 : 민족국가들은 기술 발전 덕분에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파괴 능력을 확보되게 되었다.

4. 산업생산력 증대 :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산업생산력의 격차가 확대되고 이는 군사기술상의 격차로 이어졌다.

5. 국가체제의 세계화 : 유럽 제국주의와 비유럽 강대국(미국 및 일본)의 부상은 세계적 국가체제를 정착시켰다.


"19세기의 세계지도를 살펴보면 제국이 더 많고 민족국가는 잘 보이지 않는다. 1900년 무렵에 제국의 시대가 머지않아 끝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3대 제국─오스만, 호엔촐레른, 합스부르크의 세 다민족국가─은 사분오열되었지만 그래도 제국의 시대는 계속되었다. 서유럽의 모든 식민제국은 물론이고 필리핀 한곳만 식민지로 갖고 있던 소형 식민제국 미국은 흔들림이 없었다. 종주국 자신의 발전상을 보자면 20세기 20, 30년대에 이들 제국은 경제와 정신면에서 최고점에 도달했다. 신생 소비에트정권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러시아제국 말기에 정복했던 카프카스지역과 중앙아시아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회수했다. 일본, 이탈리아, (단명했던) 나치독일은 옛 제국을 모방해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 탈식민화의 물결이 일어난 뒤에야 (1956년의 수에즈운하 위기에서부터 1962년의 알제리전쟁 종결까지) 제국의 시대는 종말을 향해 다가갔다."(1123)


"19세기가 '민족국가의 시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두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는 19세기에 하나의 새로운 사유체계와 정치적 신화로서 민족주의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민족주의는 강령과 정책으로서 받들어졌고 민중의 정서를 자극해 동원하는 도구로서 작용했다. 민족주의는 시발점에서부터 강력한 반제국주의의 색채를 드러냈다. 나폴레옹시대에 프랑스의 '이민족통치'를 받은 경험이 독일의 민족주의를 자극했고 여러 곳에서─러시아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만제국, 아일랜드를 가릴 것 없이─새로운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저항운동의 목표가 예외 없이 민족국가 수립은 아니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서구에 맞서 생겨난 '반식민침략운동' 역시 독립된 민족국가 수립이 목표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세기에 진입한 후, 엘리트들이 민족해방이란 명분의 동원능력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이차적 저항'이 일어났다."(1123-4)


"19세기 유럽에서 제국의 세계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새로운 민족국가의 수는 손가락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독립된 정치적 실체의 숫자는 역사에 전례가 없는 속도로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18세기 중엽, 아프리카, 무굴제국이 해체된 뒤의 인도, 자바섬, 말레이반도에서 각종 형태의 정치체제─왕국, 토후국, 술탄국, 부족연맹, 도시국가 등─는 그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가 불가능했다." "분명한 것은 1800년 무렵 여전히 수천 개를 헤아리던 정치적 실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한 세기가 지난 뒤에는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독일, 벨기에 등이 통치하는 40개 가까운 식민지로 정리되었다. 식민지 열강의 이른바 아프리카 '분할'은 아프리카의 시각으로 보자면 정반대였다. 그것은 분할이 아니라 통치지역의 강제적인 합병과 집중, 떠들썩한 정치 기반의 대청소였다. 당시 아프리카 전체에서 민족국가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1149-50)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안정된 민족국가 대 불안정한 제국'이란 관점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념의 뿌리는 민족은 자연스러우며 본원적이지만 제국은 인위적인 권력관계로서 민족이 이탈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는 민족주의 사상이다. 고대의 중국과 서방 양쪽에서 제국의 흥망성쇠는 주기성을 갖고 있다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표면현상의 착각이었다." "19세기 유럽인은 승리자의 자세로, 멸시와 애석함의 감성으로 아시아 대륙 제국의 쇠락에 대해 예언을 쏟아냈다. 그들은 국제적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아시아제국은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예언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스만제국의 해체는 최종적으로 1차 대전 이후에야 발생했다." "중국에서는 1911년에 왕조제도가 붕괴했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혼란을 경험한 뒤 중국공산당은 1949년에 제국의 재건을 성공적으로 실현했다."(1152-3)


"다른 제국과 비교할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는 식민지란 개념이 적용되기 어려웠다. 이 제국에는 심지어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처럼) 차별받는 '내부' 식민지도 없었다." "이 제국은 통일성이 결여된 다민족 제국, 역사적 연원이 다른 많은 지역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독자성이 강한 지역과 민족은 헝가리였다. 1867년, 헝가리는 반(半)자치왕국의 지위를 인정하는 헌법체제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이중군주제' 제국에 합병되었다. 헝가리는 자신의 양원제 의회와 정부를 가졌다. 이중제국에서 헝가리의 지위는 영국제국 내에서 캐나다 자치령의 지위와 대체로 동일했다(캐나다 자치령도 1867년에 수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내부통일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은 문화를 통일시키고 동질감을 강화하기 위해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한 적이 없었고 수평방향의 사회통합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제국의 단결은 군주란 상징과 다민족 장교단을 통해 최고 계층에서만 유지되었다."(1180-1)


"비록 단명하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제국은 제국의 가장 전형적인 두 가지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폴레옹은 짧은 시간 안에 제국의 우수한 엘리트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들을 각지로 파견했고 순환근무제를 통해 이들을 관리했다." "나폴레옹제국은 극도로 국가통제주의적인 정치체제였으며,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현대적 직능을 갖추었으나 신민에게는 제도화된 발언이나 정치참여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다른 제국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제국도 피정복 사회의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토착 지배자와 토착 엘리트와의 협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영국 모델에서는 허용된) 최저한도의 형식적인 대표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음으로, 나폴레옹의 확장계획 전체가 강렬한 문화적 우월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우월감의 바탕에는 혁명시대 이후 세속화된 프랑스 사회가 계몽사상과 문명의 정점을 대변한다는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1184-5)


"1900년 무렵, 식민행동의 방식에 변화가 발생했다. 세기가 교체될 무렵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정복은 기본적으로 완결되었다. 평화의 시기에 식민열강은 식민통치의 체계화, 비교적 폭력을 적게 사용하는 식민정책의 단계를 열어갔다. 목표는 하나, 프랑스의 식민 이론가가 말한 '가치안정화'(mise en valeur)였다.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제국에서, 특히 동아프리카에서 1905년 이후의 시기를 당시의 식민상 베른하르트 데른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데른부르크시대'라고 부른다." "같은 시기에 '가치안정화'가 가장 철저하게 시행되어서 다른 식민열강의 모방의 대상이 된 곳이 인도네시아였다." "모든 식민세계가 그렇듯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식민정부는 현지 민중의 교육과 훈련을 중시하지 않았고 1901년 이후의 개혁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력자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은─'부족'이란 유럽과 비교했을 때의 표현이다─어쩌면 유럽 식민주의의 최대의 죄악인지 모른다."(1196-8)


"대형 플랜테이션과 특허 회사의 활동 지역은 통상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일종의 '사적인 제국'에서는 엘베강 동쪽의 융커의 장원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법률은 간접적으로만 작용했다.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심지어 법률로 보호받는 영지를 세울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특허회사가 아시아에서 철저하게 몰락한 뒤로(1858년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아시아에는 새로운 반(半)관영 식민 대리기구가 생겨났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남만철, SMR)였다. 남만철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에 만주의 남단(요동반도)과 러시아가 부설한 현지 철도의 남단을 부분 소유했다. 이 회사는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는 식민권력이 되었다. 이 회사가 세운 유사 이래 경제적으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철도 식민지가 중국 동북의 경제 핵심지역이었으며 이곳은 또한 동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공업 기지이기도 했다."(1201)


"19세기에 영국제국은 영토의 면적이나 인구의 규모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가장 큰 제국이었다. 영국제국은 본질적으로 다른 제국과 달랐다. 영국은 제국형 민족국가라 할 수 있었다. 내부 상황을 보더라도 제국시대 이전부터 영국은 정치적으로 통일되고 확정된 영토를 가진 민족국가였다. 영국의 정치가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민족의 이익을 제국의 이익으로, 또는 제국의 이익을 민족─네 개의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연합체이기는 하지만─의 이익으로 정의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어느 정도는 민족주의가 없는 민족국가였다. 영국은 제국적 민족주의라는 역설로 가득하다." "19세기를 통틀어 영국과 나머지 세계의 관계는 문명의 전파자라는 강렬한 사명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전제적인 권력의 압박을 받으면서 미신에 휘둘리고 있는 비기독교 민중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같은 관용적인 수사(修辭)는 언제나 수많은 지지자를 불러 모을 수 있었다."(1213-5)


"영국은 인도주의적 개입이란 이념의 출생지였다. 영국인─특히 존 스튜어트 밀─이 만들어낸 인권문제에 관한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논제로서 시의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 대표적이고 중요한 사례가 바로 노예무역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투쟁이었다. 1807년, 노예제 폐지파는 영국 의회에서 마침내 승리했다. 그 뒤 30년 동안 제3국의 노예운반선을 나포하여 실려 가는 노예를 석방하는 일이 영국 해군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런 포괄적 개입주의는 영국의 전략적 이익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일종의 부대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슘페터는 영국의 목적은 해상 패권의 쟁취가 아니라 〈해상의 교통경찰〉이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영국이 세계를 향해 지니고 있던 태도의 이념적 핵심은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었다. '문명화의 사명'은 유아독존적 광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수단을 통해 행동으로 옮겨졌다."(1215)


"영국제국이 로마제국·18세기 청제국과 다른 점은 문명 세계 전체(orbis terrarum)를 통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제외하면 영국은 어떤 대륙에도 대적할 자가 없는 독점적 제국을 형성하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든 영국은 기타 강대국의 도전과 경쟁을 마주해야 했다. 영국제국은 동질적인 영토적 집합이 아니라 중추형밀집점(中樞形密集点)과 통제하기 어려운 중간지대가 함께 어우러져 구성된 체제였다. 2차 대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미국과 다른 점은 미국은 기술적으로 지구상의 어느 곳이든 폐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19세기의 영국제국은 지구의 어느 곳이든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군사적 개입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1849년, 영국의 일부 민중이 헝가리혁명을 돕기 위해 개입하라고 호소했으나 당시로서는 개입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영국은 어느 정도는 해상의 헌병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세계경찰'이 될 수 없었다."(1232)


9장 강대국체제, 전쟁, 국제주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19세기 말에 상호 대립적인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모든 국제관계는 단일한 세계체제의 한 요소로 보아야 한다는 확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유럽 정치와 주변부를 개념적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전부터 내려오는) 주장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세계 여러 장소─아프리카의 모든 지역, 중국,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심지어 1902-1903년 겨울에는 베네수엘라─에서 부딪쳐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제국의 충돌은 모두 해결될 수 있었거나 그 영향이 충분히 억제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제국주의 열강이 불문율인 '놀이규칙'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 '놀이규칙'이란 어떤 제국주의 국가의 야심이 좌절되었을 때 그 국가가 다른 지역에서 '보상'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거나 용인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충돌과 대립은 유럽 각국 사이에 항구적인 불신감을 낳았지만 어떤 충돌도 유럽에 주는 영향이 직접적으로 전쟁을 촉발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1291)


"1차 대전이 폭발하기 전 수십 년 동안 유럽의 국제체제가 흔들린 것은 외부 영향 때문이 아니었다." "테오도르 쉬더는 1914년 이전 반세기 동안 다섯 강대국으로 구성된 유럽의 국제체제가 하나의 집합체로서 '세계의 패권'이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중요한 해외 이익의 균형은 모두가 예외 없이 쌍방의 협조하에 실현되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집단행동은 오직 한 차례뿐이었다. 1900년 여름, 8국 연합군이 의화단에게 포위된 공사관 구역을 포위망을 뚫고 구조했다. 연합군 군대 가운데서 일본과 미국 군대가 주도 작용을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참여는 이 제국의 역사에서 최초의 가장 야심찬 외교행동이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유럽의 제국주의는 개별 제국주의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다. 5대 강국이 대륙을 초월한 강국이 아니라 유럽의 강국으로서 등장했을 때 유럽의 국제체제는 5대 강국 사이에서 작동했다. 이 체제는 '국제정치'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1291-2)


"남아메리카에서 각국이 독립한 뒤에도 정치지도는 큰 변화가 없었다. 지역 전체에 별다른 특징이 없는 국가들이 분포되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국가로서의 위상을 찾고 있었다. 어느 국가도 (포르투갈 배경을 갖고 있어서 다른 나라와는 구분되는 브라질을 포함하여) 남아메리카 대륙의 패권국가로 올라설 능력이 없었다." "열강과 이들 국가 중의 개별국가는 후견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것이 좀더 넓은 범위의 질서로 발전하여 패권적 지위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지나간 독립전쟁 시기에 지녔던, 미국의 모형을 본받아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연방을 만들겠다던 꿈을 기억하고 다시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라틴아메리카 세계에 진정한 강대국이 없었다는 것은 약점이라기보다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라틴아메리카 세계에는 (세기말에) 점차 강대해지고 있던 미국에 맞설 군사적 능력을 가진 나라가 없었다."(1298)


"중국제국은 수백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를 만들고 이 질서를 정치적으로 효율적으로 운용해왔다. 이 세계질서는 근대 유럽이 다중심 국제체제와는 달리 고도로 발달한 단일중심체였다." "이 세계질서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구성원과 구성원 상호 간에 지켜야 할 명확한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질서는 광의의 국제체제였다. 그러나 이 체제는 전체 배치가 완전히 중국 조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럽의 국제체제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개별 구성원은 주권과 평등한 관계를 제약 없이 누린다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등급의식은 중국인의 국가인식 속에 깊이 자리 잡아서 종주국-속국 관계를 관리하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행동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 인도인, 말라야인과 비교했을 때 중국인은 19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국제질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1303-4)


"20세기 후반과 비교할 때 19세기에 강대국의 지위와 군사적 성취는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일본처럼 경제적 거인이 사실상 군사적 비중을 갖지 못하는 경우는 1900년 무렵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은 내전이 끝나고 경제가 빠르게 발전할 때에 외교적 위신이 크게 올라갔지만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야 강대국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1895년의 전쟁에서 중국을 이기자 일본은 동아시아의 지역적 강국으로서 존중받았지만 1905년 러시아를 꺾은 뒤에야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문화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던 독일은 1871년에 들어와 갑자기 강대국으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열거한 사례와는 반대로, 중국, 오스만제국, 스페인은 군사적 재난을 겪은 후 세계로부터 존경받던 강대국의 자격을 상실했다." "이렇게 세계를 선도하던 국가의 명단에 변화가 생긴 배후에는 조직된 폭력의 역사의 보편적 추세가 자리 잡고 있었다."(1307-8)


"19세기 유럽의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이론 중의 하나는 일정한 규칙과 질서하의 세계평화란 관념에 뿌리를 둔 좀더 오랜 이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이기적 이성의 원칙에 뿌리를 둔 이론이었다. 1814-15년의 빈체제는 이 두 가지 논리를 교묘하게 결합하여, 국제체제 안에서 상호 합의된 충돌 억제절차를 통해 개별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19세기 유럽의 확장 과정에는 영국의 '보호국' 법제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보호국 제도란 한 국가가 종주국에게 외교관계의 후견인 역할을 요청하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 식민과정에서 보호국의 설치는 〈일종의 은폐된 형식의 병합〉이었다. 이런 법률형식이 환영받은 이유는 종주국으로서는 각종 경로를 통해 보호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면서도 피점령국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은 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3국(즉, 다른 하나의 종주국)이 보호국 관계의 수립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면 국제법상 장애는 아무것도 없었다."(1327, 1343)


"1815-70년이란 시기는 외교문제에 있어서는 좁은 범위의 귀족 엘리트 전문가 집단이 독점한 고전적인 권력 개입의 시기였다고 인정되고 있다. 그전에는 왕조의 이익이 '현실주의' 외교정책의 길목을 막고 있었고 외교의 전문직업화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그 후에는 신문매체와 유권자의 정서가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나폴레옹 3세는 대중의 정서를 조작하는 위기를 조성하고 식민지(베트남)를 점령함으로써 국내의 사기를 높였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누구의 간섭과 비평도 허락하지 않았던 비스마르크도 때로는 대중동원이란 카드를 사용했다. 예컨대,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프로이센을 상대로 한 선전포고는 비스마르크에게 애국주의의 이름을 빌려 독일인을 단결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어디서나 민족주의와 언론매체가 개입하는 상황에서 대중의 정서적 반응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어갔다."(1344-5)


10장 혁명 (필라델피아로부터 난징시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른 어떤 시기와 비교하더라도 19세기의 정치는 혁명적 정치였다. 19세기의 정치는 '오래된 권리'를 보호하지 않았으며, 미래를 바라보며 국부적인 이익(특수 '계층' 혹은 계층 연맹의 이익)을 민족 전체의 이익 또는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이익으로 끌어올렸다 유럽에서 '혁명'은 정치사상의 핵심적인 이념이 되었으며 처음으로 '좌익'과 '우익'을 나누는 잣대가 되었다. '긴' 19세기 전체가 혁명의 시대였다." "미국이 태어난 1783년은 국가의 새로운 형태의 초석이 놓인 해였다. 이런 결과를 가져온 혁명의 물결은 일찍이 18세기 60년대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본질을 말하자면 혁명의 시대는 바로 이때 막을 열었다. 그렇다면 19세기는 한 차례의 혁명이 시대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졌을까 아니면 여러 차례의 혁명이 발생한 시대였을까. 어느 쪽 해석도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역사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관점은 단수의 혁명을 선호하고 구조를 중시하는 관점은 복수의 혁명을 지지한다."(1389-90)


"미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을 경험했거나 주도한 사람은 새로운 혁명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1776년과 1789년 필라델피아와 파리에서 발생한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식민지 13개 주가 영국 왕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국민제헌의회를 구성했다. 이렇게 역사는 전례가 없는 연동상태를 연출했다. 이전의 폭력적 변혁이 새로운 병에 오래된 술을 담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래서 결국 이전으로의 복귀였다고 한다면,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시대의 경계를 부수고 직선형 진보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혁명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지역적 사건이다. 더 나아가 1776년과 1789년의 혁명이 우연히 발생했기 때문에 혁명이념이 태어났다. 이후의 모든 혁명은 이러한 이념의 자양분을 흡수하며 자라났다. 달리 말해 혁명은 모두가 모방이었다."(1390-1)


"혁명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정의는 협소한 관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의 목적과 그 철학적 근거를 따지거나 역사철학에서 말하는 '대혁명'의 특수한 작용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관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실제적인 결과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우리는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많은 혁명을 만날 수 있다. 혁명은 특수한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인 항의 사건이며 이전 정권의 집권자 그룹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정치제도의 변경이다. 사회과학자의 신중한 표현을 빌려서 정의한다면 혁명은 〈신엘리트가 성공적으로 구엘리트를 전복시키고(통상적으로 상당한 폭력과 대중 동원을 통해) 정권을 탈취한 후 사회구조와 함께 권위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건이다. 이 정의는 역사철학의 시각에서 혁명을 논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속에 근대성의 열정은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어느 시기에나 이런 의미의 혁명은 있었다."(1391-2)


"역법 상의 19세기(1800-1900년)는 통상적인 혁명사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세기에 북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혁명의 성과가 나타났지만 '대'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1800년 무렵 혁명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은 영웅적인 시작의 모방이거나 무기력한 복습이었다. 또는 비극이 끝난 뒤의 광대극이거나 1789-94년에 진행되었던 위대한 봉기를 소란스러운 소규모로 흉내낸 것에 불과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역사는 1917년 러사이에서 다시 한번 전례가 없는 극을 연출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19세기는 혁명의 시대라기보다는 반항의 세기였다. 19세기에 저항은 보편적으로 발생했으나 국가라는 정치무대에서 임계점을 넘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1849-1904년(즉, 1차 러시아혁명 기간)에는 유일한 예외인 1871년의 실패한 파리 코뮌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혁명적 상황'은 결국 '혁명적 행동'으로 전환되지 못했다."(1394)


"그러나 19세기에는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히 존재했다." "1868년의 메이지유신은 가장 급진적인 '위로부터'의 혁명적 실험이면서 혁명이란 명칭을 거부했다." "메이지유신은 대다수 유럽 정치평론가들의 시야 밖에서 일어났고, 그와 관련된 지식은 유럽인의 혁명과 개혁에 관한 이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일본의 엘리트들은 천황 직접통치의 외피를 걸친 정치체제 개혁을 합법화하기 위해 현실에서 현존 제도를 철저히 타파하려는 일련의 조처를 '유신' 또는 '회복'으로 위장했다." "이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예방하거나 보편적인 원칙을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빠른 시간 안에 효율을 높이려는 혁신 방식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은 미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각자의 발원지에 미친 영향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은 불공정과 언론자유 결핍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부국강병'을 통해 전 지구적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 성장 중인 국가의 목표였다."(1397)


"대략 1765-1830년 무렵에는 몇몇 지역에서 혁명적 사건들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기를 혁명 밀집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그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건의 여파는 모든 대륙에 미쳤다. 이처럼 상호 영향을 미치는 혁명의 발원지는 미국과 유럽대륙에 있었다. 그래서 '혁명적인 대서양지역'이란 개념이 합당한 것이다. 혁명이 두 번째로 집중적으로 발생한 때는 1847-65년이었고 이 기간 중에 유럽혁명(1848-51년), 중국의 태평천국운동(1850-64년), 인도의 민족봉기(1857년), (특별한 사례로서) 미국의 내전(1861-65년)이 있었다." "세 번째 혁명의 물결─1905년 러시아, 1905년 이란, 1908년 터키, 1911년 중국─이 유라시아대륙을 휩쓴 때는 세기가 바뀐 뒤였다. 1917년 2월에 세계대전이란 특수한 형세에서 태어난 제2차 러시아혁명도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세기 중반과 비교할 때 이 시기 개별 사건 사이의 상호 영향은 좀더 커졌다."(1402-3)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포한 아이티혁명은 자료도 부족한 데다 화제가 될 만한 극적인 사건도 알려진 게 없어서 오랫동안 혁명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노예해방 주장을 제외한다면 아이티혁명에서 비롯된 보편적 호소력을 갖는 정치사상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령 카리브해 지역이 처음부터 전체 대서양 지역의 혁명담론인 자유란 주제를 공유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일부는 계속 노예를 소유했고, 1787년의 미국 헌법은 물론이고 그 후 헌법수정안에서도 노예제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처음에는 인종차별 금지가, 이어서 노예해방의 강령이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완고한 착취제도의 피해자로서 흑인과 유색인종은 프랑스대혁명의 관념, 이상, 상징을 받아들였고 나아가 1794년의 선언이 밝힌 대로 '피부색을 나누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서 시민의 신분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1422-3)


"1778년 이후의 북아메리카 반란자들과는 달리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자유투사들은 외부로부터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얻을 수 없었고 미국의 지지도 없었다. 아이티혁명 과정에 있었던 일시적인 외부 강대국의 직접적인 개입도 없었다. 대서양 해역 전체를 장악한 영국 해군이 보호막의 역할을 해주고는 있었지만 다른 혁명과는 달리 크레올인과 복원된 스페인 왕조 대표 사이의 결정적인 군사적 충돌에 제3자의 개입은 없었다. 그러나 가볍게 보아서 안 될 것은, 처음(즉, 1810년 무렵)에 프랑스가 스페인 식민지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스페인 왕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기꺼이 나폴레옹의 백성이 되고자 했던 라틴아메리카인은 없었다. '개인적인' 지지가 중요한 군사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 해적은 정부의 묵인하에 스페인 함선을 공격했다. 영국 상인은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장기적인 투자였다."(1430-1)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혁명이 끝나자 곧바로 1830-31년의 유럽혁명이 이어졌다. 혁명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과거를 돌아보면서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았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혁명이 혁명시대의 종결로 분류된다고 한다면 1830-31년의 유럽혁명은 혁명시대의 한 부분으로 분류된다. 1830년 7월 말 파리에서 발생한 수공업자들의 폭동으로부터 촉발된 혁명적인 상황이 프랑스 전역, 네덜란드 남부(이 사건이 끝난 후 이 지역은 독립국 벨기에가 된다), 이탈리아, 폴란드, 독일연방의 일부 가맹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었다. 유럽에서 상승세를 탄 왕정복고 세력은 1815년 이후 각처에서 약화되었으나 정치적으로 패배한 곳은 프랑스뿐이었다. 그런 프랑스에서조차도 정치적 활동공간을 넓힌 주요 사회세력은 '저명인사'라고 부를 수도 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라고도 부를 수 있는 집단이었으며 이들이 7월혁명 이전 엘리트계층의 핵심을 형성했다."(1433-4)


"영국도 1830년의 유럽혁명운동에 참여했다. 1830년 여름, 국왕 조지 4세가 세상을 떠난 직후 프랑스로부터 7월혁명의 소식이 들려왔다. 1832년 7월, 극단적으로 대립을 겪으면서 의회는 일련의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시기에 영국은 19세기 이래 가장 심각한 내정의 위기를 경험했다. 영국이 혁명 앞에서 가장 취약했던 시기는 1790년대나 1848년이 아니라 20년 넘게 지속된 전쟁이 종결된 뒤의 15년 동안이었다. 나폴레옹전쟁이 남긴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초기 공업화의 후유증이 현행 체제에 대한 불만을 극대화시켰다." "최종적으로 휘그당 출신의 찰스 그레이 수상이 웰링턴 공작의 도움을 받아 통과시킨 개혁 법안은 남성 투표권자의 범위를 조심스럽게 확대하고 신흥 공업도시의 의석수를 늘렸다. 그러나 법안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래로부터의 혁명보다 먼저 발생했던 것이다."(1440-1)


"경제사학자들이 공업화의 시대를 19세기까지 연장한 뒤로 혁명의 시대는 거대한 역설을 보았다. 에릭 홉스봄이 앞장서서 퍼뜨린 이중혁명─프랑스의 정치혁명, 영국의 산업혁명─이라는 놀라운 이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치적 근대는 혁명시대의 위대한 문건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독립선언」(1776), 미국의 「헌법」(1787),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 프랑스의 식민지 노예제 폐지법령(1794), 볼리바르의 앙고스투라─앙고스투라 회의는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독립전쟁 중에 시몬 볼리바르가 소집하여 1819년 2월 15일에 앙고스투라(현 베네수엘라의 시우다 볼리바르)에서 열린 회의다─연설(1819)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건들이 등장했을 때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아직 혁명적인 충격을 주고 있지도 않았다. 대서양혁명의 동력은 공업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충돌이 아니았다. 대서양혁명이 '부르주아'적 특징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특징은 공업화와는 무관한 것이다."(1444)


"1900년 이후 유라시아에서 발생한 네 혁명의 목표는 서유럽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는 구식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러시아와 아시아에는 법률로서 권력을 제한하는 전통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서유럽과 비교할 때 이 지역 국가에서 그런 전통의 발전은 매우 빈약했다. 귀족과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집단의 세력은 서유럽(또는 일본) 봉건제도처럼 통치자의 절대권력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던 적이 없었다. 이 지역 각 국가의 정치체제에서 군주의 지위는 루이 16세나 영국의 조지 3세보다 더 굳건했다. 본질적으로 이 지역 국가의 정치체제는 통치자가 신분대표회의나 의회의 의견을 고려할 필요 없이 최종적인 발언권을 갖는 전제체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통치자가 실제로 권력을 행사할 때 언제나 독단으로 전횡하지는 않았다. 다른 체제와 비교할 때 이런 체제에서 권력의 행사는 많은 부분이 왕좌에 앉은 인물의 개인적 품성과 소양에 따라 결정되었다."(1482)


# 유라시아의 네 혁명

1. 러시아 혁명(1904-07)

2. 헌정(憲政)혁명이라 불리는 이란혁명(1905-06)

3. 청년터키당이 주도한 오스만제국혁명(1908)

4. 중국의 신해혁명(1911)


"혁명가들이 현행 통치제도에 맞설 때 사용하는 무기─또한 각국 혁명가들의 공통자산─는 입헌주의 사상이었다." "네 혁명은 각자의 성문헌법을 만들어냈다. 서방의 표본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본국 정치문화의 특성에 맞는 헌법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입헌제는 결코 유럽에 대한 단순하고 기회주의적인 모방이 아니었다." "널리 찬양받는 표본은 1889년에 제정된 일본의 헌법이었다. 이 헌법은 외국의 경험을 참조하고 본국의 현상을 결합한 표본적인 헌법이었다. 일본은 한 국가가 흥기하는 과정에서 헌법이 국가통일의 정치적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헌법은 국가기구의 조직체계에 관한 계획일 뿐만 아니라 인민이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문화적 성취이기도 하다. 일본은 헌법 내용에서 유럽의 인민주권주의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일반적으로 말해 유럽과 흥기하는 아시아 국가의 새로운 헌법전통의 가장 큰 차이가 이것이었다."(1484-5)


"네 혁명의 발생은 모두 국제 환경과 관련이 있었다. 네 나라의 당시 정권은 한결같이 심각한 군사적 패배 또는 외교적 실패를 겪고 있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참패했고, 중국은 1900년 의화단운동으로 8국 연합군의 침입을 맞고 있었고, 오스만제국은 발칸지역에서 다시 좌절을 겪고 있었고, 이란에서는 영국과 러시아가 이란 영토 안에서 각자 세력권을 넓히고 있었다. 이들 네 나라는 다 같이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혁명가들은 개혁을 통해서, 더 나아가 현존 정치체제의 폐지를 통해서 경제적 빈곤을 탈피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민중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혁명가들은 민족적 자신감을 회복하고, 열강과 일부 자본주의 국가의 무리한 요구를 물리치기 위해 강대한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러시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구상이었다. 러시아는 나머지 세 나라와 비교할 때 그 자신이 호전적인 제국이었던 것이다."(1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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