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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혁 1 : 19세기의 역사풍경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176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평점 :
서론
"이 책은 한 시대의 초상화이다. 이 책은 세계사의 한 세기를 완벽하고도 백과전서식으로 다룬 것처럼 가장할 의도는 없으며, 상세한 자료를 갖춘 해설서로서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이 책과 베일리의 저서(『현대세계의 탄생』)는 다른 저서들보다 앞서서 지역을 국가, 문화 또는 대륙으로 나누는 방식을 버렸다. 두 저작은 다 같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이것에 관한 설명을 위해 별도의 장을 두지 않고 저서 전편을 통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두 저작은 다 같이 베일리가 그의 영문판 부제에서 언급한 '세계적 연결'(global connections)과 '세계적 비교'(global comparison)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없다고 가정한다. 두 가지는 서로 결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나아가 모든 비교가 엄격한 역사적 방법론을 통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결과 비교를 적절히 통합할 수 있다면 때로는─반드시는 아니지만─현실과 동떨어진 비교보다 훨씬 더 많은 수확을 가져올 수 있다."(30-1)
제1부 근경近景
1장 기억과 자기관찰 (19세기의 영구화)
"오늘날, 리스본에서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19세기에 지어진 오페라극장은 여전히 관중으로 넘쳐나고 그곳에서 상연되는 작품도 대부분이 19세기 작품이다. 19세기 중엽, 오페라는 세계 문화의 수도라고 불리는 파리에 '상륙'했다. 1830년 무렵 파리의 음악사는 바로 세계의 음악사였다. 파리 오페라극장은 수많은 경쟁자들이 몰려들어 음악가들의 '자석의 성'(Magnetstadt)이란 이름을 얻었다." "오페라는 바다 건너 식민지에까지 전해졌다. 프랑스문화의 우월성은 식민지에 세워진 당당한 오페라극장 건물을 통해 입증되었다. 가장 웅장한 건축은 1911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 하노이에 세워진 오페라극장이었다." "오페라가 북아메리카에 뿌리내린 시기는 좀 더 빨랐다. 1859년, 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 오페라하우스가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1883년에 완공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와서는 세계 정상급 오페라극장이 되었고 동시에 미국 상류사회의 자기과시 무대가 되었다."(76-7)
"19세기에 들어와서 이전의 어떤 세기보다도 기록물이 중요해졌다. 유럽에서 19세기는 국가가 모든 기록을 차지한 시대였다. 이런 목적으로 세워진 국가 기록보관소는 통치행위의 유적이 집중적으로 보관된 장소였다. 기록보관소와 함께 직업과 사회적 신분의 하나로서 기록 관리원과 전문적으로 문헌을 연구하는 공공기록 역사가가 등장했다." "기록보관소는 유럽인의 발멸품은 아니지만 19세기에 유럽만큼 문헌자료의 수집에 관심을 가졌던 다른 지역과 나라는 없었다. 중국에서는 문헌사료의 보존은 오랜 옛날부터 국가의 직무로 인식되어 왔으나 개인이 수장에 흥미를 보인 경우는 드물었다. 과거든 현재든 극소수의 비국가 단체만 자신의 기록보관소를 보유했다." "오스만제국의 통치자들은 국가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헌기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서 일찍부터 많은 양의 문자자료가 생산·보존되어 왔고 이를 관리 연구하는 전문가집단이 양성되었다."(82-4)
# 기록보관소와 유사한 사례로 공공도서관, 공공(혹은 국가)박물관, 백과전서 편찬 등이 있다.
"19세기 신발명품의 하나가 세계박람회였다. 이것은 파노라마식 시각과 백과전서식 기록의 가장 역동적인 결합이었다. 세계박람회의 시발은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만국공업박람회(1851)였다." "이런 대형 박람회가 세계에 미친 영향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났다. 하나는 박람회가 보여준 풍부한 상징성이다. 박람회는 세계평화와 사회의 조화를 추구하는 시대의 시작, 전 세계를 향하여 영국의 경제적·기술적 우월성을 확인시키는 기회, 야만과 혼란을 이긴 제국 질서의 개선곡 등으로 인식되었다. 다른 하나는 박람회에서 적용된 정확한 물품 분류법이다. 박람회는 전시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강(綱, class), 유(類, division), 아류(亞類, subdivision) 등으로 분류했다." "이 분류법의 배후에는 시간의 종적계층화(縱的階層化)란 개념이 숨겨져 있었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다 같이 높은 단계의 문명세계에 진입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박람회라는 기회를 이용해 펼치고자 하는 의도였다."(94-5)
"이 시기의 주요한 사상 유파─실증론, 역사론, 진화론─는 지식의 누적성과 비판성에 대해서는 일치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인식과 지식이 가진 공공적 의의에 대한 인식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지식은 교육의 기능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실용적 가치도 가져야 한다. 새로운 형태의 매체가 등장하자 새로운 사물과 낡은 사물이 서로 융합될 수 있었다.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문화에서도 학문이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발전한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일부 문명에서는, 예컨대 일본과 중국에서는 교육계의 엘리트들이 유럽의 새로운 이념과 제도가 전파될 때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더 나아가 주도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보태기도 했다." "19세기는 기억이 잘 보존된 시대였다. 지금도 19세기가 선명한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세기에 탄생한 수장과 전람의 제도와 기구는 그것들이 창설되던 당시에 설정된 여러 가지 목표와 제약을 넘어서 지금까지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99)
"19세기가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유산은 19세기 사람들이 그 시대에 관해 남겨놓은 방대한 서술과 해석이다." "사람들이 사회 저층의 생활조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사회보도'와 '실증조사'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가 등장했다. 보수적이거나 급진적이거나를 따질 것 없이 모든 학자가 부르주아지─대다수의 학자들 자신이 이 계급 출신이었다─를 비판의 확대경 아래에 놓았다." "사회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문학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파노라마식 관찰이다. 프랑스대혁명 전야에 세바스띠앙 메르시에가 내놓은 『파리화집』(파리의 도시생활을 묘사한 12폭의 화집)이 이런 관찰방식의 전범이 되었다. 메르시에는 철학적 방식으로 파리를 묘사하기를 거부했다. … 엥겔스는 1845년에 출판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황』에서 〈대영제국 무산계급의 전통적인 환경〉을 묘사했다." "엥겔스가 저서에서 묘사한 개인과 그들의 생활상황은 실명과 함께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신뢰성과 생동감을 더해주었다."(101-3)
# 사회보도와 유사한 사례로 사실주의 소설, 여행문학 등이 있다.
"지리학─무수한 여행과 끝없는 측량을 동반한─의 시야는 세계를 보면서 뿌리는 지역에 내려야 하는 과학이다. 지리학의 한 분파인 경제지리학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산업화 과정의 부산물로서 생겨났고 식민 지리학은 서방의 약탈적인 영토 확장의 동반자로서 생겨났다. 훨씬 더 중요한 자기관찰 기관으로서 최근애 생겨난 것이 사회학이다. 사회학은 이론적 바탕을 갖춘 문제 제기를 통해 이왕의 사회보도를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사회현상의 실증적 묘사와의 관련성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경제학의 영역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획기적인 저작 『국부론』(1776)이 나오기 전에 이런 관련성이 이미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추상적인 이론 모델을 수립하는 추세는 1817년 리카도의 저작에서 그 싹을 틔웠다. 진정한 의미에서 지배적 주류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주관적 효용을 표현하는 수학적 이론과 시장균형 이론이 오스트리아, 스위스, 영국에서 거의 동시에 제시된 1870년 이후에 나타났다."(115)
"19세기는 '현대' 통계학의 창립단계였다. 통계는 무작위적인 데이터의 집적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데이터를 수집하고 수학적인 처리를 거친 결과이다. 국가는 꾸준히 통계업무를 늘려왔다. 복잡한 통계업무를 처리할 조직적인 역량을 정부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계는 사회가 지속적으로 시행하는 자기감독(self-monitoring)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방면에서 인간이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일부 국가가 쌓은 통계지식은 학술과 행정 영역에서 실제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초과했다. 통계학은 이때부터 정치적 수사가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통계학자가 부득이한 상황에서 만들어낸 어떤 통계개념은 국가 관료의 손안에서 도구가 되었다. 기술적인 필요에서 만들어 냈던 사회통계의 범주─계급, 계층, 카스트, 인종─는 행정관서의 편의대로 사회의 모습을 빚어내는 권력이 되었고, 사실상 사회의 인식 자체를 규정짓는 권력이 되었다."(119, 126)
"19세기에 사실주의 소설, 통계학, 사회에 대한 실증적 연구보다 더 널리 퍼진 것이 신문이었다. 신문업이 뿌리를 내린 곳이면 그곳의 정치적 소통 환경에는 즉시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언론자유에 대한 요구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변혁을 추진하는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1789년의 '인권과 시민권 선언'은 〈사상과 관점의 자유로운 표현〉을 〈인류의 가장 귀한 권리의 하나〉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천이란 면에서 보자면 이 선언은 당시에는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2제국(1851-70년)에서 집권자들은 처음에는 신문·잡지와 서적 출판에 대한 통제의 강화와 탈정치적 개조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60년대 이후 국가가 준의회제로 전환되면서 출판물에 대한 통제는 점차 완화되었다. 제3공화국에 들어와 파리코뮌 실패(1871) 후의 국가테러 수준의 억압정책이 폐지(1878)되고 나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공공 공간이 탄생했다."(127, 131-2)
"마지막으로, 19세기는 표면적 세계에서 발생한 현상을 기록하기 위해 광학과 화학 기술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생생하고 진실한 영상기록이 세상에 나온 그 순간을 경계로 하여 전체 19세기는 둘로 나뉘어졌다. 1827년에 세상을 떠난 베토벤의 모습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1849년에 세상을 떠난 쇼팽의 수척한 모습을 사진을 통해 알고 있다. 슈베르트는 초상화로 후세에 모습을 남겼지만 로시니는 그보다 5년 연상인데도 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위대한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초상 사진을 남겼다." "이 시기에 회화와 사진은 대부분의 경우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찍은 생생한 사진들, 즉 살아 있거나 죽어가는 군인들의 실제 모습은 영웅주의를 주제로 한 전쟁 회화가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표지였다. 1888년에 값싸고, 휴대하기 쉽고, 조작도 간편한 코닥(Kodak) 필름 사진기가 나와 인류의 시각 기록을 위한 새로운 수단을 제공했다."(147-9)
# 뤼미에르 형제와 기술자 쥘 카르팡티에는 움직이는 영상 '시네마토그라프'를 1895년에 처음 공개했다.
2장 시간 (19세기는 언제인가?)
"나의 19세기는 몇 년 몇 월에 시작되어 몇 년 몇 월에 끝나는 시간의 연속적 통일체가 아니다. 내가 흥미를 갖는 역사는 백 년 또는 그보다 긴 시간에 걸쳐서 〈이리하여······그 뒤로······〉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서사적 선형적 과정이 아니라 다양한 전환과 변화의 과정이다." "모든 역사적 변화의 시작과 종결은 여러 시점에서 발생한다. 그 시간적 연속성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변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앞선 역사 발전단계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초기 근대'라고 하는 표현이 그 한 예다." "둘째, 19세기는 지금 이 시대의 '사전사'이다. 19세기에 시작된, 또는 19세기적 특징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역사적 변화가 1914년(또는 1900년)이 되자 일시에 멈춰버린 사례는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규범을 무시하고 시선을 20세기로 향할 것이며 때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까지 시야에 포함시킬 것이다. 19세기는 기나긴 역사의 발자취와 융합된, 역사 '속의' 19세기다."(196-7)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이 한 시대의 삶의 모든 양상을 표현한다는 신비스러운 관념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 역사적 시대구분은 '문화영역에서의 시간의 다양성'이란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사의 중대 사건과 경제사의 중요 전환은 시간적으로 겹치지 않는다. 예술사에서 하나의 예술사조가 시작하거나 끝나는 시점은 일반적으로 사회사에서 새로운 발전이 생겨났다고 생각되는 시점과 관련이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정치적 대사건이 줄 수 있는 도움은 미미할 뿐이다. 20세기 이전에는 전체 인류사에 획을 긋는 연도는 없었다. 역사를 뒤돌아 보건대 세계사적 영향을 미친 프랑스대혁명도 그 시대에 미친 영향을 보면 중간 규모 유럽국가의 군주가 왕위에서 쫓겨나 단두대로 보내진 사건이었을 뿐 세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혁명이) 외부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랑스 내에 국한된 혁명적 강령과 정책이 아니라 그 강령이 군사적 확장을 통해 전파되는 과정이었다."(211-3)
"1차 대전이 폭발했을 때도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서는 초기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1918년 전쟁이 끝났을 때 세계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더욱이 독감이 세계를 휩쓸자 형세는 완전히 바뀌었다. 겨우 몇 달 사이에 모든 대륙의 생산자와 판맨자가 뉴욕 주식시장의 폭락이 불러온 충격을 느꼈다. 처음에는 1937년 7월 중국과 일본에서, 다음으로는 1939년 9월 러시아 서쪽의 유럽지역에서(독일의 폴란드 침공),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1941년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고 일본이 미국을 습격했을 때야 2차 대전의 시작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라틴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 미친 영향은 1차 대전 때의 정도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1945년 이전에는 세계'정치'사에서 전체 인류가 동시에 근거리에서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특정한 날짜는 없었다. 1945년 이후가 되어서야 인류가 공유하는 세계사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213-4)
# 안장형 시기(Sattelzeit, 대략 1750년~1850년)의 특징
1. 유럽 정복국가의 등장으로 세계의 세력관계가 극적으로 변화
2. 서반구의 식민지 정착 사회에서 (캐나다를 제외하고) 정치적 독립운동이 결실을 맺음
3. 통합적인 사회적 연대의식과 시민적 평등이라는 새로운 이상 출현
4.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대중 참여의 확대(여성, 인디언, 흑인노예는 여전히 배제)
5. 신분사회에서 계급사회로의 점진적인 전환
6. 산업혁명이 영국의 국경을 넘어 보편적인 성장흐름으로 변모
7. 1830년 경은 유럽의 철학과 예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1827년 베토벤, 1828년 슈베르트, 1831년 헤겔, 1832년 벤담 사망)
# 빅토리아시대와 세기말을 이어주는 전환기(19세기 80년대)의 특징
1. 광물에너지가 생물에너지를 추월하면서 전 지구적 환경사가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
2. 산업화의 지리적 범위가 끊임없이 확대되었고, 수많은 과학적 발명품이 등장
3. 자본주의 내부의 구조개편(특히, 해외시장 개척)으로 세계경제의 연계성 확대
4. 제국주의 확장의 새로운 국면 전개(간접적인 영향력 행사에서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로 전환)
5. 정치 체제는 제각각이지만 세계 여러 강국들의 정치 질서가 안정기로 진입
6. 유럽의 문화적 부흥 시기(반 고흐, 세잔의 회화, 말라르메의 시, 드뷔시의 음악, 니체의 철학 등)
7. 비서방 세계에서는 강한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적 자아의식의 등장
"많은 역사적 증거가 보여주듯이 노예제도의 종결은 해방된 노예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치 새로운 시대가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생활 가운데서 '노예제도의 사망'은 길고도 험난하고 거듭되는 실망의 과정이었다. 프랑스대혁명에서부터 19세기 50년대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은 새로운 시간질서에 대한 열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혁명의 주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전통과 결별한 새로운 역법의 수립이었다." "18세기 말기 이후 시기의 특징은 시간 기록의 합리화와 그것을 근대세계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었다. 1792년의 프랑스, 1868년의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 1918년 2월의 러시아(볼셰비키 정권은 지체 없이 그레고리력을 도입했다)의 경우가 그랬다.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사람들이 세우려고 했던 이상국가에서도 그런 시도가 있었다." "그들의 새로운 세계에서 시간은 간단하고, 투명하며, 속임이 없었다."(256)
3장 공간 (19세기는 어디인가?)
"19세기는 지리학이 과학으로 전환해가던 '첫 번째' 단계이자 지리발견의 '마지막' 시대였다. 유럽인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는 곳, 지도 위에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곳, 고도의 위험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영웅적인 여행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지리발견의 마지막 시대─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긴' 19세기 개념과 기본적으로 중첩된다─는 쿡 선장이 첫 번째 세계일주 항해에 나선 1768년에 시작되었다. 이 항해에서 쿡 선장은 과학자 동료들과 함께 타히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다. 그 후로 영국 해군은 탐험활동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상을 보여주다가 프랭클린 탐험대의 조난(1847년)을 만나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1911년 12월,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착함으로써 지리발견의 찬란한 연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 후로도 산악·사막·해양탐험 활동은 여전히 활발했지만 인류가 발견해주기를 기다리는 땅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294-5)
"19세기에는 지리학의 중요 개념의 정의도 아직 유동적이었다. '라틴아메리카'란 개념도 그 의미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명료하지 않고, 특히 '스페인령 라틴아메리카' 지역과 '포르투갈어 사용지역'을 구분하려는 사람에게는 골치 아픈 문제이다. '서인도제도' 혹은 카리브해 지역을 라틴아메리카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를 두고 아직도 논란이 있다." "시몬 볼리바르 세대는 '남부아메리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라틴아메리카'란 명칭은 1861년에 범라틴주의(pan-Latinism)를 지지하던 프랑스의 생시몽주의자들이 만들어냈고 곧바로 정치가들이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색채가 강해졌다." "그래도 '라틴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 오래된 지역 개념이다. 지역 개념으로서 '동남아시아'는 1차 대전 기간에 일본에서 등장했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동남아시아인'에게는 문화적 동질감이 없었다. 이 지역 전체에 관한 첫 번째 역사서가 나온 것도 1955년 이후의 일이었다."(299-301)
"초기 근대사 지도에서 아시아대륙의 중간 부분은 경계가 모호하게 표시된 채 명칭도 '타타리'(Tartary)라고만 표기된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이곳을 '내륙아시아' 또는 '중앙아시아'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모호한 명칭은 아직도 개념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동방'(Orient)이란 아랍인, 터키인, 이란 무슬림이 거주하는 땅─오스만제국 치하의 발칸반도를 포함하여─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문화적인 개념이었다." "19세기 말이 되자 '근동'(Near East)이란 명칭이 외교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명칭이 가리키는 지역은 오스만제국과 한때는 오스만제국의 영토였으나 당시에는 실질적으로 그 통치를 벗어난 북아프리카(이집트와 알제리)였다." "'중동'은 미국 해군장교이자 군사학자인 알프레드 마한이 1902년에 만들어낸 개념이다. 중동이란 명칭에는 역사적·문화적 의미가 전혀 없었고 영국과 제정 러시아가 서로 차지하려고 힘을 겨루는 페르시아만 이북 지역을 가리켰다."(301-3)
"오래전부터 유럽은 세계에서 독보적으로 단일성과 함께 다양성을 유지해왔다는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다양성은 어떻게 조직되어 있으며 그 요소들은 무엇인가? 헤르더가 제시했고 19세기 초에 성행했던 낭만주의 민족학의 '3원론'은 유럽을 '라틴─게르만─슬라브' 3대 지역으로 나누었다. 많은 사람이 이 학설을 추종했고 심지어 1차 대전에서는 선전 주제로 이용했다. 훗날 나치는 이런 관점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부활시켰다." "서유럽이란 개념은 (1차 대전 이전에는 형성되지 않았던) 영국과 프랑스의 연대를 전제로 한다. 외교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1904년 이후의 일이었다. 민주주의-입헌주의란 가치관의 각도에서 볼 때 두 나라 사이에 동질성이라고 할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영국의 정치엘리트 계층은 나폴레옹 3세의 '독재정권'을 늘 불신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19세기에 관한 한 '서유럽'이란 곤혹스러운 지역개념이다."(339-41)
"19세기의 공간은 사실상 고도로 획일적이고 연속적이었고, 이는 정부가 개입한 결과였다. 미국의 토지법이든, 여러 나라(네덜란드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의 체계적인 토지측량과 소유권 등기든, 지금까지 강력한 통치를 경험한 적이 없는 지역에 대한 식민통치이든 국가는 공간을 철저하게 동질화하는 활동을 해왔다. 특히 1860년 이후 국가통치를 단순히 전략적 거점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지역 세력에 대한 상시적인 개입으로 보는 시대적 추세가 나타났다. 이런 추세는 근대 초기부터 시작된 점진적인 '영토주권화' 또는 '영토권 형성'의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유럽 특유의 현상은 아니었다." "영토권은 현대국가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군주정치의 한 형식이었다. 예컨대, 19세기의 이란에서 통치자의 업적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는 새로운 영토의 탈취이거나 최소한 기존 영토의 방어 여부였다. 이런 업적이 없는 군주는 왕위를 노리는 왕자들이 반역할 수 있는 좋은 표적이 되었다."(355-6)
제2부 전경全景
4장 정주와 이주 (유동성)
"19세기의 인구 재난은 세계의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이 경험한 재난은 분명히 적었다. 아일랜드는 19세기 유럽의 불운아였다. 이 나라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국가였다. 1780년 무렵 아일랜드는 인구 고속성장기에 진입했으나 1846-52년의 대기근으로 인구 상황은 철저하게 바뀌었다."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유럽 인구감소의 원인으로서 전쟁과 내란의 중요도는 18세기와 훗날 20세기 때보다 크게 떨어졌다." "1815년부터 크리미아전쟁─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발생한 군사충돌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의─이 발발한 1853년까지 유럽에는 어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1500년 이후 대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한 10차례의 강대국 간 전쟁 가운데서 1815-1914년에 발생한 전쟁은 하나도 없었다." "전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유럽의 비중을 감안하면 18세기에 발생한 전쟁의 전사자 수는 19세기의 8배나 됐다."(417-8)
"해외이민은 이미 근대 초기의 유럽을 구분하는 중요한 표지였다. 중국과 일본의 통치자들이 자기 백성들이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을 때 유럽인은 전 세계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인구대비 해외이민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영국의 이민 목적지는 주로 아메리카 신대륙이었고 네덜란드의 경우는 아시아였다.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한 나라는 스페인이었고, 러시아 이서(以西)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던 프랑스는 이민배출국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19세기 사회사를 연구할 때는 반드시 그 직전 시대의 이민 활동의 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고대의 '민족 대이동'이 아니라 17세기와 18세기의 이민이 수많은 사회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사회는 세 가지 요소─약탈과 잇따른 바이러스의 침공으로부터 살아남은 원주민, 유럽 이민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로부터 성장해 나온 젊은 사회였다."(426-9)
"19세기 이민사에서 대중의 주의를 끄는 제도는 정치적 반대자들은 곤궁, 고독, 극단적으로 열악한 기후조건에 노출시키는 징벌적 식민지이다. 시베리아는 1648년에 이미 제정러시아의 유배지가 되었고, 표트르 대제 통치 시기에도 전쟁포로를 격리시키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12월당(Dekabrists)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부터 시베리아는 정치범의 중요한 유배지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848년과 1851년의 동란을 평정한 후 정치범들을 추방했다. 파리코뮌의 봉기를 진압한 후 프랑스 정부는 3,800명 이상의 반란가담자들을 19척의 배에 실어 (1853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로 보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유배지였다. 해양 패권을 두고 프랑스에게 밀릴 수 없다는 전략적 동기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1780년대 중반 영국 감옥의 심각한 과밀현상 때문에 생긴 위기가 없었더라면 죄수들을 수만 리 떨어진 먼 섬으로 유배하자는 발상은 선택되지 않았을 것이다."(435-9)
"20세기와 비교할 때 19세기의 (정치적 망명 혹은) 난민은 (최소한 19세기 60년대 이전까지는) 익명의 집단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분명히 식별되는 부유하고 좋은 교육 배경을 가진 난민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1776년에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자 캐나다와 카리브해 지역으로 도피한 약 6만 명 가량의 영국왕실에 충성하는 사람들, 1789년에 부르봉 왕조에 충성했던 망명자들, 1848-49년 유럽 각지의 혁명이 실패한 후 진압당한 피해자들이 있었다." "법률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대한 사건은 1839년의 '7월 혁명'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서유럽, 특히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에서 정치적 망명─정치범의 송환금지─을 법으로 보호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1848-49년 유럽의 혁명 시기에 대부분의 국가가 이 원칙을 받아들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국가재정으로 정치적 망명자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 했고 그 때문에 정치적 망명자의 행동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441-2)
"정치적 이민과 영웅적인 망명이 19세기의 표지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집단적으로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삶을 도모하는 수많은 가난한 난민의 모습은 '전면전'(totaler Krieg)과 인종적 편견을 배경으로 하는 극단적 민족주의가 범람한 시대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 행위가 촉발한 국경을 넘는 난민의 물결은 19세기에도 없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몇 차례 중대한 행동, 혹은 국가행동의 배후에는 잔혹한 현실이 숨겨진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그래서 서둘러 마련된 민족국가의 이념은 이민족을 융합하거나 배척하는 기준이 되었다. 대체적으로 각국의 이민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이었다. 유출되는 이민의 규모는 새로운 시민을 받아들이는 유입이민의 규모와 평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다수 정부는 이민 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많은 유입이민을 경계했다. 다른 나라에 와 있는 통합주의 소수집단은 언젠가는 합병 주장을 지지하고 민족주의 외교정책의 유용한 도구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447, 452-3)
"노예무역이 폐지되면서 아프리카는 더 이상 대륙 간 이민체계의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달리 말해 세기말의 유럽, 남아시아, 중국과는 달리 아프리카는 더 이상 장기적이며 정기적인(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노동력을 공급하지 않게 되었지만, 이 대륙으로의 식민 이민은 주목받아야 한다. 1차 대전이 폭발하기 직전, 구세계 유럽의 이민이 집중된 곳은 오래된 문명과 많은 인구를 가진 아시아의 식민지가 아니라 아프리카였다. 알제리의 76만 명의 유럽인(2/3가 프랑스인이었다)은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가장 규모가 큰 식민지 정착민 집단이었고, 인도의 최대 17만 5,000명(온갖 부류를 다 포함해도)의 유럽인 집단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같은 시기에 남아프리카에는 약 130만 명의 백인 주민이 있었다." "모든 형태의 거주자를 다 합하여 대략 240만의 '백인' 또는 유럽 혈통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고 대부분이 1880년 이후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473-4)
"19세기에 비유럽 국가 출신의 새로운 이민도 등장했다. 이런 이민의 '추동요인'(pull faktor)은 대영제국과 영국의 지배를 받는 지역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그러나 이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노동력 부족이었다. 그 경제적 동력은 제조업보다는 자본주의의 세 가지 신흥영역─플랜테이션, 기계화된 채광업, 철도산업─에서 나왔다. 양적인 면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 수요처는 도구의 기계화와 작업의 조직화를 농업 원재료의 생산과 가공에 적용한 (농업과 산업혁명이 결합된 산물인) 플랜테이션이었다. 새로 노동시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예외 없이 유색인종이었다." "그들의 사생활에 제도적으로 개입하는 '주인'이나 사회적 낙인은 없었다. 그들의 고용 기간은 특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자녀는 법률상으로 고용관계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민자의 생각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노예들은 노예제 폐지를 전적으로 지지했지만 계약노동자들의 경우는 상황이 분명치 않았다."(483-5, 489)
5장 생활수준 (물질적 생존의 안전과 위험)
"1800년 무렵 세계인구의 기대수명은 30세에 지나지 않았고 아주 드문 특수 상황하에서 35세나 그보다 약간 더 올라갔다.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성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취미생활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일과가 끝난 뒤의 '퇴근'이란 없었고 직업적 생애를 마감한 뒤의 '은퇴'란 것도 없었다. 가장 흔한 사망원인은 감염에 의한 질병이었다. 사망은 오늘날보다 '더 날쌔게' 찾아왔다."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인류의 수명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추세를 보인 적은 없었고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산업화 초기(대략 1780년-1850년)에 영국의 기대수명은 하락했을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시대에 도달한 적이 있는 정점에도 미치지 못했다. 총체적으로 볼 때 영국 노동자의 물질생활 수준은 1780-1850년 기간에 개선되지 않았다. 이 시기가 지난 뒤 임금 증가의 속도가 분명하게 물가의 상승폭을 초과했고 예상 평군수명도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540-2)
"대략 1850년부터 각국 정부는 공중위생 체계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각국은 질병의 전염원에 대한 전통적인 통제와 격리─예컨대, 예전부터 시행해오던 지중해와 흑해지역 항구의 검역소─에서 출발하여 질병의 온상이 되는 환경 자체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기초 시설투자로 나아갔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유럽인들은 공중의료가 교회나 자선사업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정부 직무의 하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1849년 영국의 의사 존 스노의 발견 덕분에 식수를 정화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스노는 콜레라의 전염 경로가 공기나 인체 접촉이 아니라 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공중 위생체계 수립을 위한 수자원 정책의 전제는 수자원의 공공재적 속성을 인정하고, 물에 관한 권리를 정의하여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물의 소유와 사용(산업적 사용을 포함하여)에 관한 온전한 법체계를 갖추는 것은 복잡하고도 긴 과정이었다."(543-4)
"전 세계의 공중위생 사업의 학문적 기반은 루이 파스퇴르의 미생물 이론이었다. 19세기 80년대에 그의 이론은 유럽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파스퇴르의 이론은 존 스노 등 실천가들의 관찰 작업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해주었고 또한 위생 정책 수립이 정당정치의 정략에 이용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초기의 공중위생 사업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학문적 기초 때문에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생물 이론이 등장하면서 청결이 최고의 준칙으로 공인되었다. 세균학의 산물인 '건강인'(homo hygienicus)란 개념은 이렇게 탄생했고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지위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론가로 상승했다. 질병은 이때부터 이전의 생태, 사회, 정치, 종교적 맥락과 결별했고 건강이 최고의 가치로 숭상되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지역에서 위생 조건의 개선이 사망률을 낮추는 데 기여한 효과는 여전히 간편하고 저렴한 기술로 같은 효과를 기대했던 다른 지역보다 훨씬 컸다."(551)
"사망률이 떨어지게 된 두 번째 요인은 질병예방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등장이었다. '인구 과도기'가 그랬듯이 전염병학의 과도기도 시간의 차이를 두고 세계 각지에서 등장했다. 총체적으로 보아서 19세기에는 전염병이 발생하여 대규모 사망─인구통계학자들이 '사망률의 위기'라고 부르는─으로 이어질 확률은 크게 줄었다. 서북유럽에서 전염병의 발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첫 단계는 1600년 무렵에 시작하여 1670-1750년에 정점에 이르게 되는데, 페스트와 티푸스의 발병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성홍열, 디프테리아, 백일해에 감염되어 사망에 이르는 사례가 크게 줄었다. 대략 1850년 무렵에 시작되는 세 번째 단계에서는 폐결핵을 제외한 호흡기 질환의 심각성이 점차 낮아졌다. 마지막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오늘날 유럽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망률의 구조─심혈관계 질환과 암이 사망의 주요 원인─가 점차 정착되었다."(555)
"19세기는 여러 면으로 의학발전사에서 구시대에 속하면서 동시에 구시대 종말의 시작이었다. 어느 사회나 고위험 집단이 존재했고 어느 나라나 첫 번째로 위험에 노출되는 집단은 군대였다. 뉴질랜드 정복 전쟁이 19세기에 일어난 전쟁 가운데서 전투나 사고로 사망한 병사가 질병으로 사망한 병사보다 더 많은 유일한 전쟁일 것이다. 이와 정반대의 극단이 1895년의 마다가스카르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대략 6,000명의 프랑스 병사가 말라리아로 죽었고 전사자는 20명 뿐이었다. 의학사의 새로운 시대는 유럽 밖에서 1904-05년의 러일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사전에 병사들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우수한 의료장비를 확보함으로써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전체 병력 손실의 1/4로 낮출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 낙후한 일본 군국주의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부족한 물질적 인적 자원을 아끼고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588-9)
"(공중위생의) 위대한 대표 인물들은 대부분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연구자가 아니라 사회개혁가와 의료 위생의 실천자였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이란 19세기 중엽에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시작했고 얼마 후 세계 기타 지역에서 최소한 국부적으로라도 영향을 미친 위생운동을 가리킨다.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논증되기 전부터 깨끗한 식수와 양호한 오수 배출 체계, 이와 더불어 조직적인 쓰레기 처리와 거리 청소 체계가 갖추어지면 도시의 생활이 더욱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이 보여주었다." "근본적으로 태도의 변화를 결정하는 것은 유럽에서 도입된 최신 과학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니라 문화적 배경이었다. 도시의 보건위생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희망과 의지(또는 능력)를 갖고 있고, 그것을 위해 재정을 투입한 사회가 얻은 것은 더 긴 수명과 증강된 군대의 전투력 그리고 확대된 사회적 활력이었다. 전염병에 대응해본 경험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의 비중이 달라졌다."(590)
"기근은 간단하게 주기적 기근(장기적 식품부족)과 높은 사망률이 뒤따르는 돌발적 기근으로 나눌 수 있다. 기근의 위기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의 특징이었다. 위대한 의학 발전의 세기, 기대수명이 두 배로 늘어난 20세기는 또한 역사상 기근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 세기이기도 했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나폴레옹전쟁의 연대에 유럽의 많은 지역이 기근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에서 실제로 굶어 죽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민중에게 일상으로 익숙한 물건들─예컨대 밀가루나 보리 같은 식료품─이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비싸졌다." "어느 집이건 여인과 어린이의 희생이 더 컸던 것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와야 하는 가장과 남성의 체력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의 양식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1816-17년 이후 유럽 대륙에서는 생존 위기의 망령은 사라졌다. 역사적으로 기근이 자주 발생하던 지역, 예컨대 발칸반도에서 18세기 80년대 이후 기근은 드문 현상이 되었다."(601-3)
# 아일랜드 대기근(1845-49)은 완전한 식량부족의 직접적 결과였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사례이다.
"아일랜드 대기근이 덮친 1846년, 미국의 농업이 역사상 기록적인 풍년을 맞은 가운데, 당시 영국 정부의 대응책은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의 관점에서는 간섭은 토지 소유자의 이익과 자유무역을 손상시키는 행위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감자 경작을 위주로 하는 농업경제의 붕괴는 농업의 현대화와 구조조정을 위한 좋은 기회이며 그 결과 농업은 '자연적인 평형'을 실현할 것이란 주장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감자 경작의 위기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사회의 여러 가지 불공정을 바로 잡으려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지주계급의 적대 관계도 정부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국 정부가 볼 때 아일랜드 지주계급의 금전적 탐욕과 농업 개조에 대한 무관심이 이때의 위기를 불러온 원인이었다. 영국 정부로서는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나서야 할 이유가 없었다."(606)
"1891-92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기근이 주로 볼가강 유역에서 80만의 인명을 앗아갔다. 이때 러시아는 특별한 구호조처 없이 두 차례의 기근을 극복했다." "1891-92년의 대기근은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대기근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찾아온 '반동이' 시기를 종식시키고 러시아 사회를 혼란의 시대로 몰아넣었는데, 혼란은 결국 1905년의 혁명으로 귀결되었다. 총체적으로 볼 때 러시아 정부가 재난구조 활동에서 보여준 성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정치의 영역에서는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당시의 러시아 민중이 볼 때 기근이란 아일랜드, 인도, 중국 같은 '미개한' 식민지나 반(半)식민지 국가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명국가'에게 기근이란 일종의 수치였다. 1890-92년에 발생한 시대에 뒤떨어진 대기근은 러시아와 번영·발전하는 서방 국가 사이의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는 격차를 다시 한번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607-8)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에 발생한 인도의 대기근은, 우매한 인도인이 발전에 반대하는 저항심의 표현─당시에 적지 않은 유럽인이 이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었다─이 아니라 근대화 초기의 부정적인 증상의 표출이었다. 철도와 운하는 원래는 구호물자를 실어나를 수 있는 편리한 기초시설이었지만 동시에 농촌지역에서 농산품 투기사업을 펼치기에 적절한 조건도 만들어냈다. 요컨대, 식량의 유입도 쉬워졌지만 식량의 유출 또한 쉬워졌다. 수확의 감소는 불가피하게 식량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졌다. 매점매석과 투기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때의 사태에서 드러난 새로운 면은, 모든 농촌의 전통적인 비축식량이 전국 또는 국제시장의 교역품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농산물 수확의 미세한 변동도 식량가격의 두 배로 높여놓을 수 있다. 그 결과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하는 농촌 주민이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다."(613-4)
"미국의 부자들이 보유한 부의 규모는 세계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등장하기 전에 어느 누구도 그처럼 방대한 물질적 부를 축적한 적이 없었다. 19세기 말, 미국의 부호들이 석유, 철도, 철강업에서 끌어모은 부는 유럽의 산업화 시기에 가장 부유했던 면방업계 거두들이 보유했던 자산 규모보다 몇 배나 많았다." "미국 최고 부자의 자산은 1860년에 2,500만 달러이던 것이 20년 뒤에는 1억 달러로 늘어났고 다시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는 10억 달러가 되었다. 1900년이 되자 미국 최고의 부자는 유럽 최고의 부자(영국의 귀족이었다)보다 20배나 많은 자산을 보유했다." "이제는 전통적인 금권정치가 등장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내부에서 분열했다. 부자들 사이에서 보수파 또는 우파 자유주의 정당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부자와 초부자가 모두 보수적 가치관의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자유주의자 부호'란 말은 모순된 개념이 되었다."(6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