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세계체제 3 -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거대한 팽창의 두 번째 시대 1730-1840년대, 제2판 근대세계체제 3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인중 외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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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업과 부르주아지


"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주로 잉글랜드에서 일련의 혁신이 새로운 면직물 공업의 번성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공업은 새로운 그리고/또는 개량된 기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공장에서 조직되었다. 동시에 또는 그후 즉시 철강 공업에서 면직물 공업과 비슷한 팽창과 기계화가 있었다. 이 과정이 생산에서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떠한 일련의 혁신들과 연관된 과정과도 달랐다고 이야기되는 것은 그것이 〈점증적이고 연쇄적인 변화의 과정을 촉발시켰다〉는 점이다. 이 후자의 개념은 실제로 사용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시점을 정하는 것에도 논쟁의 여지가 많다. 반면, 이 책의 중심 태제는 예컨대 축적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라는 형태의 점증적이고 연쇄적인 변화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탄생한 16세기 이후로 줄곧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중심 모티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17세기의 장기적 침체가 이러한 점증적 과정의 중단이기는커녕 그것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해왔다."(40)


"(영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은 그것을 시간적으로 연장하거나, 두 단계의 과정으로 나누거나, 점진적인 양적 증가와 질적인 획기적 진전을 구분하는 따위의 미봉책으로는 결코 구제해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세계경제의 틀 내부에서의 상대적인 위치의 배열인데도 불구하고,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은 영국의 〈이점〉을 설명해주는 것은 절대적인 특징들의 배열이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영국이 프랑스나 기타 다른 나라들보다 (그만큼) 앞서나갔는가가 (그리고 그 '앞섬'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 전체로서의 세계경제가 특정한 시간(여기서 우리가 잡은 시기는 1730-1840년이다)과 장소에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발전했으며, 왜 이 시기에 다른 국가들이 아닌 특정한 국가에서 가장 이윤이 높은 경제적 행위들이 더 집중되는 (그리고 왜 보다 많은 자본이 이곳에서 축적되는) 결과가 나타났는가이다."(55-6)


"〈최초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대충 시간적으로 겹치는 사건시기(event-period)를 나타낸다. 이 시기는 자주 주목을 받아왔고, 〈혁명들의 시대〉라는 표현이 이 시기를 지칭하기 위해서 때때로 사용되었다. 시간적인 연관관계는 개념적인 연관관계에 의해서 사실상 강화되었는데, 개념적인 연관관계는 시간적인 연관관계보다 덜 자주 논의되었다. 확실히, 많은 저자들은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이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변화와 급격한 공업적 변화의 〈매우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그 역도 또한 사실이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산업혁명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근대 세계의 모든 정치적 열망을 구현하고 있으며,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그것의 유일한 실질적 경쟁자인 러시아 혁명보다도 아마 더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는가라는 문제에 집중할 것이다."(56-7)


"소불은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지를 권력과 경제의 지배자로 만든 오랜 경제적, 사회적 변화의 결과일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매우 인습적으로 잉글랜드 혁명은 프랑스 혁명보다 〈훨씬 덜 급진적〉이었으며, 프랑스 혁명은 모든 부르주아 혁명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참으로 〈고전적인 부르주아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홉스봄의 〈거대한 모순〉에 부딪친다. 즉 〈이론적으로〉 프랑스는 〈자본주의 발전에 이상적으로 적합했고〉 따라서 그 경쟁자들을 훨씬 앞질렀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스의 경제발전은 다른 나라들, 무엇보다도 특히 영국에 비해서 〈더 느렸다.〉 홉스봄은 이렇게 설명한다 : 〈프랑스 혁명은······그것이 국민의회의 손으로 이루어낸 것들의 대부분을 로베스피에르의 손으로 없애버렸다.〉" "그렇다면 참으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이며, 설령 부르주아적이라고 해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혁명이란 말인가?"(61-2)


"프랑스 혁명은 분명히 (얼마간은) 반봉건주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상층 부르주아는 적어도 1870년까지 귀족 타이틀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들은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출현 이후에 성공한 부르주아가 지녀온 것과 같은 형식적인 사회적 지위의 표시들을 계속 추구해왔다." "물론 무엇인가가 1789년에 변화했고 1791-93년에는 더욱이나 그러했다. 앤더슨이 말하듯이, 〈서양의 전 이데올로기적 세계가 변화되었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오래 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국가기구의 변화는 200년 동안 계속되어온 과정의 연속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토크빌이 옳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은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도 아니었고,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도 아니었다. 차라리 프랑스 혁명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측면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마침내 경제적 토대를 따라잡은 순간이었다. 그것은 이행의 원인이나 이행이 일어난 순간이 아니라 이행의 결과였다."(82-4)


2 핵심부에서의 투쟁─국면 3 : 1763-1815년


"17세기의 장기적 정체기에 핵심부 국가들은 자본주의적 이윤의 중요한 모든 원천을 그들의 국경선 안에 집중시키려고 노력하는 반응을 보였고, 그래서 세계시장은 곡물 생산, 새로운 야금과 직물부문, 새로운 운송수단의 기간시설 그리고 대서양 중계무역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다소 이에 성공했다." "핵심부 내에서의 생산과정의 느린 재편은, 우리가 〈국내〉 수요의 약간의 증가와 세계경제의 경계선의 또 한번의 팽창의 불확실한 시작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각 국가 내부에서의 소득의 약간의 재분배를 가져왔다. 요컨대 1750년 이후의 시기와 연관되어 있는 대부분의 과정(농업과 공업의 기술적 변화, 지리적 팽창, 핵심부 내의 수요 증가)은, 비록 1750년 이후보다 느린 속도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 시기에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경제적 팽창과 더불어 재개된 생산의 지리적 분화(전문화 또는 특화)와 핵심부에서의 증가된 기계화(〈산업혁명〉)가 일어났다."(92-3)


"파리 조약(1763)이 7년전쟁을 종식시켰을 때, 잉글랜드가 경제적으로 프랑스와 크게 다른 수준에 있었는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각국이 상업에서 서로 다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의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점차 약세였고, 이러한 침체를 〈해외〉에서의 영국의 상대적 지위 향상으로 보충하고 있었다. 7년전쟁에서 프랑스가 추구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막는 것, 즉 잉글랜드가 〈공해상에서 전제적인 권력〉을 창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통찰력 있는 네덜란드인 저자 아카리아 드 세리온은 1778년에 쓴 글에서 영국의 어려움은 국내가격과 임금의 상승으로 영국의 생산품이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그리고 홀란트)와 경쟁하기에는 너무 비싼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의 어려움은 세계의 다른 곳에서의 영국의 〈승리〉와 물론 유럽 안에서 영국의 경쟁적 지위를 즉시 재부여한 혁실들을 추진하도록 영국을 몰아세웠다."(109)


"공업의 규모에서 18세기에 보다 〈규모가 큰 생산단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80-1840년의 시기에 영국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희생시키면서 그리고 가장 직접적으로는 프랑스를 희생시키면서 보다 규모가 크고, 상대적으로 더 기계화된, 비교적 높은 이윤의 세계경제의 공업부문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가? 유명한 〈기계장치의 물결, 즉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더 높았던 물결의 결과로─1780년대에 면직물 공업 생산에서 영국의 상대적인 효율성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굳이 원한다면, 우리는 이것이 더 위대한 〈창의력〉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될 수 있게끔 분명히 도움을 주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이 시점에서 영국이 시장 접근에 유리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영국이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국가기구라는 사실도 이점으로 작용했다."(121-3)


"1763년의 전환점으로 되돌아가 살펴보면, 프랑스는 스스로를 영국에 〈뒤처진〉 것으로 인식했다. 해결책으로 논의된 것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였다 : 재정적, (지리적이든 혹은 계급에 기반을 둔 것이든 간에 원심력에 대해서) 사회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프랑스의 국가를 강화하거나, 또는 경제적으로 국가를 〈개방하는〉 것. 이 두 가지는 〈개혁〉 운동으로 여겨졌다. 하나는 프랑스의 경제적 지위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국가의 자원을 이용하여 기업가들을 지원하자는 제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자원을 이용하여 기업가들이 보다 〈경쟁력을 가지도록〉 압력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국론(國論)은 19세기에 익숙한 국론이 되었다. 이것은 보호주의적 간섭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 간섭주의자들 간의 논쟁이다. 1763년 이후의 프랑스는 빈약한 결과만을 낳으면서 이 양자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고, 그래서 정치적 폭발의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실제로 폭발했다."(124-5)


"미국 독립전쟁은 프랑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었고, 여러 가지 점에서 사실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영국의 수출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영국 식민지의 분리를 뜻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전쟁은 해외무역의 〈급격한 중단〉과 해외무역 총액의 감소를 초래함으로써 영국에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로서 그것은 하나의 〈보복전쟁〉이었고,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함의는 무시되었다. 영국이 미국 독립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이점은 환상으로 판명되었다. 평화가 도래하자마자 〈잉글랜드인과 미국인들은, 초대받지 않고 개입해온 저 외국인들(라틴인과 로마 가톨릭 교도)의 등뒤에서, 가족간의 분쟁을 청산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머리를 맞대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탈식민지로서는─기존의 상업적, 사회적, 문화적 연결망을 통해서─(다소 변형된 형태로) 그들의 옛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그 관계를 다른 핵심부의 국가들로 이전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단하기 때문이었다."(127-8)


"그러나 탈식민지화가 영국에게 안겨준 이러한 이점은 일차적으로 영국이 1763년에 이미 달성한 세계무역에서의 지배적인 지위 때문에 존속했다. 영국령 북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유지하는 것은 모든 영국 관리들이 당시에는 즉각 깨닫지 못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이득이 없는 하나의 부담이었다. 돌이켜볼 때(단지 돌이켜볼 때에만 그럴까?) 〈상업적으로 식민지의 분리는 거의 본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가 바란 대로라면 〈영국의 위대함의 조종(弔鐘)〉이어야 했던 미국 독립전쟁은 그리하여 그 대가를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치르도록 끝을 맺었다. 프랑스의 국가부채는 전쟁의 결과, 두 배가 되었다. 5년 만에 왕정은 〈더 이상 재정적으로 신용할 수 없게〉 되었다. 1788년에 미불금이 예산의 50퍼센트에 달했다. 국가는 〈도산〉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1763년 이후 세계경제에서 영국이 갖춘 축적된 이점은 1780년대에 증가했고 1815년에 이르러서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129-32)


"무엇이 프랑스로 하여금 1786년의 영불 통상조약에 서명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조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서게 만들었을까? 프랑스측의 교섭자들은 영국 제조업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손해를 본 프랑스 제조업자들을 보상해줄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빴던 것은 그들이 프랑스에 주어진 새로운 반(半)주변부로서의 역할을 환영하는 듯이 보였다는 점이다." "조약이 프랑스에 미친 경제적 영향은 거의 즉각적으로 느껴졌는데, 특히 (1788년 프랑스 정부의 비망록이 지적하듯이) 〈고급 의류〉와 대비되는 〈일반 의류〉, 즉 〈부유한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민중〉의 소비에 쓰인 온갖 종류의 의류 부문에서 그랬다. 조약은 영국으로부터 면제품(그리고 기타 다른 제품)의 대량 수입, 〈명실공히 대홍수〉를 초래했다. 그것은 하나의 〈경제 혁명〉, 〈프랑스 공업사에서의 전환점〉의 하나였다. 프랑스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채 5년이 걸리지 않았다."(134-40)


"경제적 콩종크튀르와 국가기구 특히 국가재정 적자 증가의 콩종크튀르라는 두 개의 객관적인 콩종크튀르가 프랑스 혁명의 발발에 대한 〈설명〉으로 널리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개의 콩종크튀르들이 이야기의 전부라면, 여러 종류의 프랑스 혁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의 중심성은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 간 투쟁의 중심성의 한 결과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투쟁에서 프랑스의 임박한 패배감에 뒤이어 그리고 그것의 한 결과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헤게모니 투쟁에서 패배했던 바로 그 나라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쳤던 바와 같은 영향을 세계체제에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승리의 물결을 뒤집어엎으리라고 기대했던 프랑스 혁명은 반대로 지속적인 영국의 승리를 확인시켜주는 데에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지경학적 패배 때문에, 프랑스 혁명가들은 실제로 그들의 장기적인 이데올로기적 목표들을 달성했다."(145-6)


#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부르주아를 포함한) 특권 계급에 맞서 봉기한 다수 민중(농민과 상-퀼로트들)의 직접적 압력이 이끌어간 혁명이고, 따라서 그런 압력이 강했을 때에만 급진적 조치들을 밀고 나아갈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모두가 깊게 맞물려 있는 세 개의 것이었다. 첫째로, 그것은 다양한 자본주의적 지배계층 그룹이 영국이 세계경제에서 헤게모니적 지위로 올라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절실하게 요구되는 프랑스 국가의 개혁을 강행하려는 비교적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이러한 것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 개혁은 이루어졌으나 영국의 헤게모니를 막아낸다는 목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실제로 프랑스의 혁명과정은 영국의 우세를 아마도 강화시켰다. 둘째로, 프랑스혁명은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에서 최초로 의미 있는 반체제(즉 반자본주의적) 운동, 즉 프랑스 〈민중〉의 운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공공질서가 붕괴되는 상황을 창출했다. 반체제 운동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은 물론 실패였지만, 그 자체는 그 이후의 모든 반체제 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이 정확히 아니기 때문이다."(170-1)


"셋째로, 프랑스 혁명은 근대 세계체제 전반에 걸쳐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영역이 마침내 경제적, 정치적 현실과 합치되게끔 하는 데에 필요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첫 세기들은 주로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의상을 걸치고 살았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것도, 예상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지체는 정상적인 것이고 진정 구조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고,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런 의미에서 프랑스 혁명은 〈서양 세계혁명〉의 일부(그러나 핵심 부분)일 뿐이다─은 봉건적 이데올로기가 마침내 무너지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증거는 버크와 메스트르의 지적 반동에 있다. 사람들이 〈보수주의〉 사상을 노골적으로 옹호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의문의 대상이 되고 더 이상 다수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 이르러서이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자본주의 시대의 시작이 아니라 완전한 성숙의 순간을 가리킨다."(171)


"나폴레옹 전쟁의 종료와 함께 영국은 세계체제에서 마침내 진정한 헤게모니를 쥐었다. 그것은 일련의 해상기지를 확보함으로써 영국의 세계권력을 공고하게 만들었는데, 이 해상기지들은 영국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들과 합쳐져서 영국으로 하여금 이제 지구를 전략적으로 둘러싸게 했다." "더욱이 영국은 전쟁과정에서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서의 네덜란드의 역할을 종식시켰다. 상업 및 금융 지배를 통해서 영국은 이제 통계에 잡히지 않는 대규모의 돈─보유 상선 선원의 벌이, 상업 수수료, 기술자와 해외 식민지 관리의 송금, 투자 소득─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영국의 수출무역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존재했던 지속적이고 심지어는 팽창하는 무역적자를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영국은 국제수지 흑자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영국은 또한 자신의 높은 보호주의적 장벽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업적 유럽의 교사〉로서의 그의 새로운 역할도 시작했다."(187-8)


3 새로운 거대 지역권들의 세계경제로의 병합 : 1750-1850년


"(대략) 1733-1817년 시기의 경제팽창(그리고 통화 인플레이션)의 재개과정에서 유럽 세계경제는 장기 16세기에 자신이 만들어놓았던 경계들을 깨버리고 새로운 거대 지역권들을 자신이 포괄하고 있는 효율적인 노동분업 속으로 병합하기 시작했다. 이는 16세기 이래 이미 유럽 세계경제의 외곽지대(extenal arena)에 놓여 있었던 지역권들─특히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인도 아대륙,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그리고 서아프리카─을 병합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병합은 본질적으로, 최소한 일정한 한 지리적 장소의 몇몇 중요한 생산과정들이 현재 진행중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노동분업을 구성하는 다양한 상품연쇄에 필수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병합은 어떤 지역권을 사실상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세계경제의 궤도에 〈거는 것(hooking)〉을 의미하고, 주변부화는 종종 자본주의 발전의 심화라고 언급되는 방식으로 그 지역의 세세한 구조들을 계속 변형시켜나가는 것을 의미한다."(197-9)


"위 네 지역권들은 환금작물 농업(그리고 그와 유사한 형태의 1차 산업 부문 생산)을 창출하거나 이를 상당히 확대해나갔고, 동시에 지방의 제조업 생산활동은 줄이거나 제거해나갔다." "점점 더 높은 비율의 토지가 〈수출〉용 특수작물을 재배하는 데에 특화함에 따라서 다른 토지단위들은 이 토지단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팔 식량을 재배하는 것으로 특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재산소유자의 권한으로 경제적 합리성이 노동력 계서제의 창출 쪽으로 움직이자 또다른 지역들은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토지단위와 식용작물을 재배하는 토지단위들 모두에서 노동할 사람들을 수출하는 것으로 특화하기 시작했다. 한 지역권 내에 세 개의 층으로 된 공간적인 특화가 출현했다는 것─〈수출용〉 환금작물, 〈지방시장용〉 식량작물 그리고 이주노동자라는 〈작물〉─은 이전에는 세계경제의 외곽지대였던 곳이 이제는 당시의 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노동분업 속으로 병합되었음을 나타내는 징표였다."(210-1)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론자들을 위대한 인도주의자들로 보는 권위 있는 전통 해석─쿠플랜드의 고전적 저작(초판 1933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바 있는─과 대결을 벌인 에릭 윌리엄스(1944)는 노예무역 금지의 밑바탕에 깔린 경제적 동기를 주장함으로써 과도하게 자기만족적인 그 해석의 정체를 폭로하려고 했다." "즉 대체로 미국 독립전쟁과 산업혁명의 결과로서 서인도 제도의 영국령 설탕 생산 식민지들은 〈영국 자본주의에 점차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영국 자본가들은 세 가지 연속적인 개혁을 이루는 데에 성공하게 되었다─1807년에 노예무역, 1833년에 노예제 그리고 1846년에 설탕 관세에 반대하는 개혁. 〈이 세 사건은 분리할 수 없다.〉 이러한 조치들이 취해진 이유는 영국인 서인도에 대한 〈독점〉과 경쟁상의 우위를 상실함에 따라서 주요 문제로 떠오른 것이 설탕의 〈과잉생산〉이었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이 법령들이었기 때문이다."(219-20)


"기본적으로 병합기 동안 서아프리카로부터 유럽 세계경제로 이루어졌던 수출의 양상은 세 시기를 거쳤다 : (1) (특히) 1750년경부터 1793년 사이로, 절대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어쩌면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노예 수출이 증가하고 이에 계속 집중한 시기, (2) 1790년대부터 1840년대까지로, 소위 합법적 무역의 꾸준한 증가와 함께 노예 수출이 중요하게 유지되는 시기, (3) 1840년대부터 1880년대의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 초기까지로, 대서양 노예무역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1차 산물(특히 야자유와 땅콩)의 수출이 꾸준히 팽창하는 시기. 실제로 노예 약탈과 환금작물의 생산은, 그 두 가지가 결합되면 노동력의 이용을 둘러싸고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야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수출품은 동시에 번성할 수 있었고 대략 30-40년 동안 실제로 그러했다."(224)


"특정 지역권이 세계경제에 병합될 때 이는 종종 그 이상의 인접 지역권을 세계경제의 외곽지대로 끌어들인다. 인도가 병합되었을 때는 중국이 외곽지대의 일부가 되었다. 발칸 국가들, 아나톨리아, 이집트가 병합되었을 때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와 마그레브가 외곽지대로 들어왔다. 유럽 쪽 러시아가 병합되었을 때 중앙 아시아(그리고 심지어는 중국)가 외곽지대 안으로 들어왔고 서아프리카 연안이 병합되었을 때 서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이 외곽지대로 되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외곽지대란,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그 지역의 상품을 원하지만 역으로 그 지역은 매뉴팩처 상품을 수입하는 것에 (아마도 문화적으로) 저항을 하며 자신의 기호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역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의 병합은 영국에게 영국 자신에게는 더욱 좋고 중국으로서도 받아들일 만한 몇몇 대안─대표적으로 인도-중국-영국의 삼각무역─을 제공했다."(254-5)


# 처음에는 면화 무역으로 출발했으나, 이후 아편 무역으로 변질된다.


"세계경제로의 병합은 필연적으로 정치구조들이 국가간 체제에 삽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 지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국가들〉이 〈국가간 체제 내의 국가들〉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든가, 그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구조에 의해서 대체되든가, 아니면 이미 국가간 체제 내에 속한 다른 국가들에 흡수되든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병합과정의 막바지에 이르면, 내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생산과정에 직접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력한 관료기구를 두고 있으면서 외적으로는 국가간 체제의 표준적인 외교망, 유통망과 연결되어 있는 국가들을 보게 될 수 있다. 즉, 한 지역권이 세계경제에 병합되면서 그 지역의 국경간 무역은 세계경제에 대해서 더 이상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 된다. 무역은 커다란 위험이 걸려 있는 어떤 것에서 국가간 체제에 의해서 장려되고 보호받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네 지역들에서 병합의 마지막 결과물들은 처음보다 차이가 덜한 것으로 드러났다."(260-1)


# 네 지역에서 진행된 병합의 마지막 결과물

1. 오스만 제국 : 제국의 위세와 영토는 터키 공화국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도처─발칸 지역, 초승달 지대,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지역 권력이 부상했다.

2. 인도 아대륙 : 무굴 제국뿐만 아니라 그보다 작은 모든 정치구조들이 해체되고, 인도라는 단일한 행정단위─최종적으로 세 개의 주권국가─로 재편되어갔다.

3. 러시아 제국 : 남동유럽, 흑해, 카프카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면서, 자신의 〈후진성〉을 보장하고 증진하는 방식으로 서유럽 하의 세계경제에 편입되었다.

4. 서아프리카 : 위 세 지역에 비견되는 세계제국이 부재한 상태에서, 서유럽에 유리한 〈무정부 상태〉, 곧 병합에 저항할 수 있는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추구되었다. 


4 이주민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탈식민화 : 1763-1833년


"18세기 중반에 아메리카 대륙의 절반 이상의 영토가 법적인 측면에서 유럽 국가들, 즉 주로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그리고 포르투갈의 식민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머지 영토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국가간 체제 바깥에 놓여 있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사실상 이곳의 거의 모든 식민지들이 (이전의 행정체들간의 일정한 결합과 분열이 있은 후에) 독립 주권국가들로 변형되었다. 더구나 당시 이 신생국가들은 그 반구의 나머지 영역들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관할권을 주장했다. 이는 국가간 체제의 외형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이 〈탈식민화〉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이주되어온 흑인들은 모두 배제된 채 유럽계 이주민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다. 이 신생 주권국가들 중 많은 곳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흑인들이 인구 수의 상당 부분(심지어 다수)을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나의 예외가 바로 아이티이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7년전쟁을 마무리하는 파리조약이 체결된 1763년에서 시작된다."(291)


"영국 정부는 세계경제에서의 권력 증대로 인해 이전보다 더 폭넓은 이해관계들을 고려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것이 딜레마를 야기했다." "즉, 영국 국내의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백인 이주민들이 새로 주장하기 시작한 요구들을 조정할 수 있는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0세기의 영연방(영국 본국과 영국의 과거 식민지들로 구성된 주권국가의 자유로운 연합체) 식의 해결책은 채택은 고사하고 고려하는 것 자체도 영국으로서는 아직 너무 이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영국 왕의 힘은 영국 내에서 여전히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또한 의회가 권력 행사를 통해서 수많은 압력집단들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이익집단들의 시대〉로 영국이 이제 접어들 때까지,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이주민들은 다른 많은 경쟁적 이익집단들에 비해서 그 힘이 약했다. 〈북아메리카의 정치적 영향력은 결코 그 경제적 중요성에 필적하지 못했다.〉"(303-5)


"카리브 해 지역의 경우 식민지와 영국의 관계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제불황기를 경험하고 있던 영국령 북아메리카와는 달리 서인도 제도는 주요 수출품인 설탕 붐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1766년의 자유무역항법(Free Port Act)은 그 뿌리가 1751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서인도 제도의 무역불황을 타개하는 데에 성공했다. 서인도 제도의 상업은 한 세기 이상 대규모 밀무역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영국령 섬의 설탕 생산은 영국에는 충분한 공급량이었지만 대륙으로 재수출하기 위한 수요를 충족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영국은 프랑스령 섬 지역의 불법적 수출에 영국령 서인도 항구들을 개방했고 또 이로써 프랑스령 섬 지역의 설탕은 영국을 경유해서 대륙으로 수출되었는데, 그 결과 영국은 사실상 식민행정에 필요한 정치적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무역 및 운송 이윤을 챙기는 등 꿩 먹고 알 먹는 결과를 얻었던 것이다."(320-1)


"7년전쟁 이후 카를로스 3세의 첫 개혁조치는 군사적인 것으로서, 〈아메리카 대륙 재정복(Reconquista de Americas〉이라고 불린 행정명령이었다. 그러나 가장 급진적인 변화들은 민간행정에서 일어났다. 이는 총감찰(visita general) 제도, 즉 조사와 집행권을 가진 최고위 관리를 마드리드에서 파견하는 제도의 부활과 관련된 것이다. 개혁과정의 핵심 인물, 돈 호세 데 갈베스는 원래 1765년에서 1767년 사이에 신에스파냐의 최초의 총감찰관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1776년 인도부 장관으로서 그의 첫 활동들 중 하나는 라 플라타에 부왕령(Viceroyalty)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16세기에는 신에스파냐와 페루 두 곳만이 부왕령이었다. 1739년, 세번째로 뉴그라나다가 세워졌다. 갈베스는 왜 1776년에 네 번째 부왕령을 만들었는가? 1775년이라는 시점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영국령 북아메리카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시기는 영국과 그 연합국인 포르투갈에 반기를 들기에는 최고의 호기였던 것이다."(327-8)


"북아메리카의 전쟁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왔다. 에스파냐는 식민지 반란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데에 망설였다. 프랑스는 더욱 강렬히 에스파냐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고 1779년 아란훼스 조약에서 에스파냐에게 대가를 지불했다. 그 대가란 영국을 공동으로 공격하는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 에스파냐는 이를 〈지나치게 확장되어 취약해진 자신의 식민제국〉이 공격받기 전에 전쟁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에스파냐는 미국이 아닌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했다. 너무도 분명히 그 목적은 미노르카와 지브롤터를 되찾는 것이었고, 그와 동시에 〈카리브 해의 모든 거점들에서 영국인들을 몰아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생명과 재산상으로〉 큰 대가를 치렀다. 전쟁의 결과 사실상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와 에스파냐는 그 유대의 최초 단절─그 뒤에도 계속되었다─을 경험했다(전비 부담을 짊어지게 된 아메리카 이주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330-1)


"에스파냐의 〈마지못한〉 아메리카 독립전쟁 참여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두 번의 중요한 반란, 즉 페루의 투팍 아마루 반란과 뉴그라나다의 농민(코무네로) 반란이 바로 이때 발생했다." "반란은 원초적 저항이기는커녕 무엇보다도 인디오들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연루된 결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연루는, 단지 바로 얼마 전에야, 〈중앙행정부의 권력을 보다 강화시키는〉 여러 조치들에 의해서 더욱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투팍 아마루 개인의 사회적 동기들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치 못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일으킨 사회적 반향이다. 봉기의 핵심은 지방의 인디오 주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르윈의 말처럼, 일반적으로 말해서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는 당시 서로 다른 두 개의 혁명운동, 즉 크리오요와 인디오의 혁명운동이 각기 존재했다. 〈그들의 길은 때로는 교차했고······또 때로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도 했다.〉"(332-5)


"결국 에스파냐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일부 엘리트와 평민들, 즉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 사이의 잠정적인 동맹은 성립 불가능한 동맹이었다." "이제 크리오요의 독립운동은 두 가지 자극제를 가지게 되었다─이베리아 반도인에 대한 크리오요의 불만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인과 크리오요 모두가 유색 하층민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분명히 크리오요들이 생각한 대로 식민 본국 정부의 〈자의성〉이었고 또 에스파냐 정부의 눈에 비친 크리오요들의 〈어리석음과 수상쩍은 불충〉이었다. 영국령 북아메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상호간의 의심이 느리기는 했지만 꾸준히 증대했다. 그러나 더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는 흑백(또는 백인과 비백인)의 단순한 분리 대신에 복잡하게 분류된 계서제가 존재했다. 3세기 이상 내려오는 유성생식상의 체질의 실제가 의미하는 바는 이베리아 반도인은 〈순수 백인〉이지만 크리오요들은 〈약간만 백인〉이라는 것이다."(338-41)


"그리하여 이제 1763년의 파리 조약 이후 20년도 못 되어서 (모든) 아메리카 대륙은 불가피하게 일련의 이주민 독립국가 건설의 도정에 들어선 것처럼 보였다. 그후 50년은 그 전반적 개요가 세밀하지는 않지만 이미 그려져 있는, 한 유형의 전개에 불과하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두 종류의 인기 있는 주장들─이주민들이 〈자유〉를 위해서 바친 다소간의 영웅적 행위 또는 식민 본국 열강들의 몇몇 판단 〈오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주민들의 독립 시도는 일단 가동되기만 하면 집단적 이해관계라는 보다 협소한 계산을 종종 넘어서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그 자신의 추진력을 만들어냈다. 그 궁극적 결과는 영국인들과 남북 아메리카 이주민들에게 동시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로운 것이었다." "이득을 본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진 사실상의 장기 동맹은 세계체제에 가장 직접적인 정치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것이었고 그럼으로써 그것은 또 전 세계적 자본 축적을 위해서는 최상의 것이었다."(343)


"1812년 전쟁(1812-14년)은 아무래도 미국의 이주민 탈식민화의 마지막 장이었다. 미국은 1783년 이후 영국과 까다로운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진실로 관계를 끊은 적은 없었다. 영국은 미국을 경쟁자가 아니라 시장으로서 원했다. 미국은 세계경제에서 자신의 지위를 개선시키고자 했다. 영불전쟁은 미국에게 하나의 기회이자 분통 터지는 일이기도 했다. 대륙에서 전쟁이 재발했을 때 미국이 영국을 압박할 기회 그리고 아마도 캐나다를 정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어떤 의미에서 미국은 전쟁에서 신통치 못했다. 영어 사용자이든 불어 사용자이든 간에 캐나다인들 사이에는 미국으로의 합병에 대한 열정이 당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캐나다는 영국령으로 남았다." "헨트 조약에서 영국이 양보한 것은 서부와 남부 지역으로의 팽창에 대한 미국의 권리의 막연한 재승인 그리고 다가올 아메리카 대륙 탈식민지화의 전개시 인정될 발언권(최소한 하급 발언권)이 전부였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결정적이었다."(380-1)


"1815년의 빈 회의는 정통성과 절대주의에 대한 지지를 기반으로 유럽에 평화를 확립하고자 함으로써, 즉 뒤틀린 방식으로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대한 에스파냐의 권리 주장을 약화시켰다. 유럽 주요 열강들은 에스파냐의 압제 조치가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고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서 독립을 낳는 혁명들은 유럽에서 〈자유주의 혁명을 부채질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파냐가 식민지들에 〈양보하기〉를 강력히 원했다. 나아가 이는 영국으로 하여금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신의 상업적 이익을 챙기도록 해주었다. 특별히 그곳은 영국에게 면직물 판매의 주요 팽창 지역권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에스파냐 제국의 해체 과정이 시작되자 이전에는 독립에 회의적이었던 많은 크리오요들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국가들은 차례차례로 모호한, 폭력적인, 또는 보수적인 혁명들로 독립을 향해 나아갔지만, 미국과 달리 여기에 군사적 투쟁의 통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382-4)


"그리하여 50년간에 걸쳐 서서히 백인 이주민들은 서반구 전역에서 국가간 체제의 일부가 된 여러 국가들을 건설했다. 그 국가들은 모두 이런저런 방식으로 새로운 헤게모니 열강인 영국의 정치경제적 후견하에 들어왔다. 비록 미국이 영국의 부관 그래서 또한 잠재적이고 궁극적인 경쟁자의 역할로 자신을 부각시킬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유일한 예외는 아이티였고, 아이티는 배척당했다.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어떤 역할로부터도 사실상 배제되었다. 그리고 흑인들과 인디오들도 그러했다. 유럽의 헌법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고대 아스텍을 국민(nation)의 진정한 기원으로〉 주장하며 하나의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모렐로스의 꿈은 허망한 꿈에 그쳤다." "18세기 말의 대혁명들─이른바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 아메리카 대륙의 이주민 독립─중 그 어느 것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 체제의 계속적인 공고화와 견고화를 보여주었다."(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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