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과학, 인문학 서양 역사와 문명 총서 1
이종흡 지음 / 장미와동백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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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한 인간에게서 태어난 어떤 이론이 다른 인간에 의해 성숙되고 결실을 맺는 과정, 즉 문제 제기로부터 해결로 이어지는 역사는 그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형성되던 17-18세기에, 그 형성을 주도한 사상가들이 '선구적' 이론을 만들고자 하였던가? 그들에게 〈근대적〉인 합리성이나 진보를 정초定礎하려는 의도가 있었던가? 코아레가 지적하듯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다른 사람의 '선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역사가가 어떤 이론의 함축이 뒤 시대에 실현되는 진보의 역사를 기술하려면 이론적 '선구자'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문제는 역사가에 의해 미리 결정된 틀에 선구자를 끼워 맞춘다는 데 있다." "베이컨이 근대 과학의 선구자냐 마술사냐, 비코가 19세기 역사주의의 선구자냐 르네상스 인문학의 뒤늦은 상속자냐에 관한 길고도 뜨거운 논쟁의 와중에서 희생당한 장본인은 바로 베이컨과 비코였다."(15-6)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필자가 설정한 '담론 상황'은 대화의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논제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며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상황이다. 그들은 유사한 논증과 수사학적 장치를 사용하며, 그들이 논증에서 사용하는 논거는 중복된다. 이 상황에서는 과학의 방법이나 이론의 보는 바에 따라 양편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실제로 토론되는 논제는 과학 이론의 역사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어쩌면 그것은 '비학적' 논제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우리는 주류 과학철학과 과학사가 이론의 형성을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과학자 개인의 시적이고 직관적인 재능 덕택으로 돌려 온 측면을 비판하였다. 방벙이나 이론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던 탓에, 방법이나 이론이 형성되는 실제 과정은 생략되거나 개인적 재능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담론 상황'에 관한 연구는 그 같은 '재능'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상황적인 것임을 전제한다."(28-9)


"필자는 '연속성 수준의 분석'을 통해 근대 초 유럽의 비학과 과학의 관계를 비학적 담론 상황과 과학적 담론 상황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담론 상황의 연속은 비학의 상징 구조와 과학의 표상 구조 사이의 차이를 전제로 하지만, 두 구조 중 어느 하나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가정하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과학의 형성'이라는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구조가 모든 담론적 실천과 담론 상황을 장악한다면, 새로운 것의 '형성'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설정한 연속성의 영역은 과학적 관점에서도 파악될 수 있고 비학적 관점에서도 파악될 수 있는 유연한 공간이다. 그렇지만 어떤 관점을 채택하든지, 우리가 휘그적 역사학으로 되돌아갈 염려는 없다. 첫째는 우리가 비학의 지속이나 과학의 소급을 수행할 수 있는 '구조적' 경계선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두 조류가 공존하면서 상호 작용하는 양상을 비교적 중립적인 견지에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34)


"인간의 노력 없이 언어 스스로가 변화할 리는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상징의 언어 구조 내에서 그것이 '표상'에 부적합함을 자각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담론을, 구조적 갈등의 원인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담론을 두 계열로 구분한다. 하나는 과학적 표상을 만들어 가는 담론의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그 같은 과학적 노력의 의미를 분석하는 담론의 계열이다. 전자는 언어를 가능한 한 사물에 일치시키고자 하며, 후자는 언어와 사물의 본질적 불일치, 즉 사물에 대한 언어의 비유적 본성을 전제하면서 사물에 일치하는 언어의 본성을 들여다본다. 대체로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전자는 '자연과학'의 담론이 취했던 방향이요, 후자는 '인문학'의 담론이 취했던 메타적 방향이다. 이 두 계열은 상호작용하면서, 전통적인 상징체계를 대체할 새로운 근대적 표상 체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위의 두 계열을 모두 '과학적 담론'의 범주로 묶었다."(36)


"근대 초 지적 담론의 지형을 비학·자연과학·인문학 등 세 영역에 의해 가늠하려는 이 연구는, 다음 두 가지 관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이 세 영역은 원래부터 각기 '폐쇄된' 지식 영역으로 구획되어 있었다기보다는, '열린' 창문을 통해 서로를 마주 보면서 상호 작용하였다. 둘째, 세 영역을 차별화하는 기준은 담론의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오히려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것들은 각자에 고유한 지식이며 인식 방법론에 의해 구분된다기보다는, 지식을 전달하고 사회적으로 정당화하여 사회적 권력으로 만드는 방식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여 준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 영역의 차이는 각자에 고유한 '수사학'을 통하여 충실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단순한 '꾸밈'의 기술이 아니라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술로서의 '수사학'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비학적 상징의 수직성과 자폐성, 과학적 표상의 수평성과 강압성, 인문학적 표상의 총체성 등 각 영역의 차별적 특징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37-8)


제1부


1장 르네상스 비학의 인식체계


"우리가 르네상스 시대의 신플라톤주의를 '새로운' 현상이었다고(비록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는, 그것이 '외부'로부터 서방 라틴 세계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고대 말에 제설혼합주의syncretism 형식으로 형성된 신플라톤주의는, 중세에는 주로 비잔틴 지역에서 존속되었다." "그렇다면 비잔틴 세계가 서방에 전해 준 신플라톤주의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문제의 해답은 비잔틴 세계가 아랍 문명으로부터 수용한 '태고 신학prisca theologia'의 전통에서 실마리를 구할 수 있다." "태고 신학에 따르면, 서방-이집트 전통은 하늘의 빛과 지혜를 간직하고는 있었지만 빛과 지혜를 거의 감춘 채 조금만 드러낸 것임에 반하여, 동방-페르시아 전통은 신과 천상의 신비를 빛과 어둠의 교의에 의해 공개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천명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동방-페르시아의 '태고 신학'은 서방-이집트의 그것보다 오래되었고 우월하다는 것이었다."(43-5)


"비잔틴 세계에서는 '태고 신학'의 전통이 그리스도교 교의와 결합하였다. 이곳에서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플라톤 철학을 융합하였던 초대 교부들의 전통이 여전히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들의 견해는 크게 아우구스티누스(350-430) 계열과 락탄티우스(약 260-340)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유대 민족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지혜만이 참된 것이었다." "반면 락탄티우스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호하고 은폐적인 형식으로나마 이교도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플라톤 및 그리스 철학뿐만 아니라 칼데아, 이집트, 시리아, 유대 등 여러 민족의 고대 전통으로부터 '태고 신학'의 계보를 작성하려는 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논거로 사용되었다."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이미 11세기에 프셀로스(1018-1078)는 조로아스터·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로부터 플라톤에게로 이어지는 '태고 신학'의 계보를 작성할 수 있었다."(45-6)


"르네상스 비학은 창조와 창조된 세계의 비밀을 논의함에 있어, '두 권이 책'을 전제하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은 넓은 의미의 성전聖典들을 묶어서 부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은 물론, 이교 민족의 많은 태곳적 문헌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처럼 여러 권의 책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신적 창조의 비밀이 성서(특히 모세의 「창세기」)뿐만 아니라, 이교 세계의 태곳적 문헌에도 계시되었다는 '태고 신학'의 전통, 곰브리치의 표현을 빌리면, 〈복수적 계시의 교의〉 전통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 권의 책은 '자연'을 지칭한다.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직접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저자'의 의도를 담은 '책'으로 읽힐 수 있었다. '성전들'과 '자연'에서 모두 신적 계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새로운 관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곳적 문헌 속에서 저자의 의도를 해독하는 방식을 그대로 자연에 적용하여, 조물주의 의도나 의지를 '읽으려는' 시도는 중세에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현상이었다."(62-3)


"마술을 '신성한 것'에 대한 최상의 지식과 기술로, 주술을 정령에 의존하는 타락한 지식과 기술로 구분하는 태도는 15-16세기 사이의 마술사들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마술사'의 태곳적 의미는 '철학자' 혹은 '현자'였다는 것, 마술은 자연철학의 정점이요 완성이라는 것, 마술을 타락시킨 미신적이고 불경한 주술사는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 등의 주장은 당시의 마술 문헌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이러한 주술 비판은 중세 교회의 '마술' 비판을 닮은 면이 있다. 9세기나 10세기에 편찬된 『교구법령』은 '마술'을 정령이나 악마에 의지하는 기술이요 우상 숭배라고 규정하였던바, 이러한 태도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중세의 스콜라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르네상스 마술사들은 '주술'을 비판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비판은 웹스터가 지적하였듯이, '주술'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한다는 점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수행된 것들이었다."(87-8)


"비학의 인식론은 수직적이다. 인식론적 수직축에 의해 한 마술사는 다른 마술사를 열등한 적(주술사)으로 규정한다. 누가 우월하고 열등한가, 수직적 상승에서 누가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였는가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옛날이든 지금이든 비학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이다. 외부적 조건이 달라져도 이러한 특징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비학이 숨은 것을 추구하며, 결국은 볼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진리'를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비학은 상징으로 가득 찬 '두 권의 책'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상징의 가시적 이미지에 머무는 자를 열등한 적으로 규정한다. 비학은 상징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진리를 향하지만, 종국적 진리는 그것을 파악한 사람 혼자만이 알 수 있다. 그를 광신적으로 추종하는 무리조차도 무엇이 진리인지는 모른다. 그들은 진리를 추종한다기보다, 진리를 파악한, 혹은 파악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추종할 따름이다."(91-2)


"이 시대의 많은 연금술 문헌은 연금술의 실제 작업 과정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 대속代贖 등 영적 과정과 유비하였다." "이러한 유비나 대입을 가능하게 한 근본 조건은, '성육화Incarnation'에 대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곰브리치가 말했듯, 그리스도교 전통은 〈성육화의 비밀이며 계시의 교의에 따라 말씀Logos이 육신이 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은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말씀'의 육화로 간주되었다. 연금술은 이 육화된 실체로부터 역으로 '말씀'을 추적하는 작업이었다. 요컨대, 예수가 육체적 시련과 죽음을 거쳐 부활과 대속이라는 창조주의 의지를 드러낸 방식은, '철학자의 돌'이 불의 시련과 재를 거쳐 결국 연금액(본질)으로 바뀌는 방식의 모형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연금술에 대한 기대는 보다 일반적인 종교적 심성에서 배양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4-5)


2장 비학의 상징체계


"비학의 언어에서 수나 도형이나 이름 같은 '형상'은 그것에 어울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덕이나 '약' 같은 숨어 있는 성질은 그것에 적절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어떤 형상의 성질은 그 형상에 따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사물의 형상은 그것에 내재된 성질을 지배하기 때문에, 비슷한 형상은 비슷한 성질이나 효능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형상이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형상이 더 높은 세계로부터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에서 단어나 이름에도 덕과 성질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의 '올바른' 이름은 '아담의 언어'(신성어)처럼 그 사물의 덕을 간직한다. 아담이 동식물을 올바르게, 각 동식물의 본성에 어울리게 명명함으로써 지배할 수 있었듯이, 마술사는 올바른 '이름'으로 그 이름에 의해 기호화된 사물을 지배할 수 있을 터였다. 비학의 인식론이 '두 권의 책'에 대한 해독일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기이한 언어-사물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98-9)


"르네상스 마술사들은 언어의 두 '층위'를 구분하였다. 암호화된 사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사물의 본성은 계시의 도움을 받아 섬광처럼 해독자의 정신에 새겨진다. 피치노가 〈사물의 힘은 먼저 정신 안에서 파악된다〉고 말하면서 의도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수준에서 정신에 형성되는 '이미지'는 사물의 본질과 거의 일치한다." "다른 한 층위는 음성과 철자에 의한 표현의 수준이다. 이 '표헌적' 수준에서 정신에 새겨진 이미지는 언어에 의해 가시화된다." "아그리파는 히브리어의 22철자 중 단철자 12개는 12궁에, 복철자 7개는 7행성에, 3개의 모자母字는 3원소(水, 土, 火)에 상응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표현적 수준에서의 '언어'도 정신적 이미지를 운반하는 매개자로서, 지시된 사물을 변화시키는 위력을 갖는다. 아그리파가 말하듯이, 표현된 단어는 그것을 듣는 사람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지지 않은 사물도 변화시킨다. 그러나, 표현된 단어가 정신에 새겨진 이미지와 일치할 수는 없다."(107-8)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는 헤르메스주의에 내포된 그리스도교적 '육화의 관념'이 조물주의 적극적 수사나 '시험'과 결합하는 하나의 계기를 예시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계시하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유사한 것으로 유사한 것을 표상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유사하지 않은 것으로 유사한 것을 표상하는 길이다. 전자는 보다 높은 세계가 아름다움이며 빛이며 '금金' 같은 비유를 통해서 상징화되는 방식이며, 후자는 신비하고 기괴한 비유에 의해 상징화되는 방식이다. 성서의 텍스트가 겉보기에 부적합한 상징과 비유로 자주 구성되는 이유는, 하늘의 존재(별)가 〈신 같은 인간이거나 빛나는 의복을 걸친 형상〉(우상)으로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취하는 수수께끼처럼 기괴한 이미지(거지나 비둘기의 모습 같은)는 인간에 대한 시험이다. 그것은 비입문자에게는 신성한 비밀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막는 자물쇠이지만 입문자에게는 신성한 비밀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열쇠이다."(117)


"수사학에서 '표현'이란 단순한 전달보다는 '효과적' 전달을 지향하며, 이 효과의 크기는 '설득력'을 기준으로 가늠될 수 있다. 설득에 성공하였다는 것은 움직이고movere(감동시키고), 가르치며docere, 이끈다delectare(어떤 곳으로 향하게 한다)는 수사학의 세 가지 목표가 달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문맥에서 스칼리제르는 모든 담론의 목적이 '설득'에 있으며, '진리야말로 설득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수단은 무엇인가? 르네상스 수사학은 '비유figure 혹은 trope'에 주의를 기울였다." "(비유법의 한 종류인) 은유는 화자나 저자의 편에서는 명료한 정신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한 자연적·효과적 수단이요, 청자나 독자의 편에서는 그것을 감각에 명료히 새겨서 저자나 화자의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상징적 표현이 효과적인 전달 수단이라는 가정은 비학에서뿐만 아니라 비학을 경멸한 에라스뮈스 같은 인문주의자에게서도 발견된다."(124-5, 129)


"겉으로는 16세기 비학과 17세기 과학이 인식론적으로 상당한 유사성을 가진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양자의 담론 형식 사이에는 구조적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 특히 우리는 비학적 유비의 자폐성이 의사소통 상황에서 연장되고 정당화되고 강화되는 방식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수사학(표현법) 일반에서 그러하였듯이, 비학적 유비도 역시 감각적인 효과를 중시한다." "그러나 지식의 효과적 전달을 목표로 하는 저자(화자)라면, 독자(청자)가 '감각이라는 문' 앞에 서성이기만 하는 것을 원할 리 없다." "따라서, 정말로 '지식의 전달'을 목표로 하는 저자라면, 독자의 감각에 호소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신의 지식이 독자의 '정신'에서 올바르게 판단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다. 비학의 유비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배려'를 결여한 것이다. 그것은 '감각이라는 문'을 사용할 뿐, 독자들을 그 '문'으로부터 정신적 판단을 향하도록 배려하고 이끌어 주지 않는다."(138-9)


"비학은 저자가 '진리'를 인식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뿐, 그 진리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다." "비학적 유비의 수직 구조에서 '테너tenor'(의미)는 항상 숨어 있다. 우주의 비밀을 꿰뚫었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많은 사례를 동원하여 독자를 유혹할 뿐이다." "비학의 인식론은 항상 숨은 저자와 숨은 의미를 상정한다. 모델은 조물주의 창조이다. 피조물의 숨은 형상은 조물주의 창조의 말씀이다. 우주의 가시적인 혼돈 뒤에는 신성한 통일성과 조화가 숨어 있다. 이 숨은 형상이며 조화를 발견한 태고적 현자는 '상징', 즉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유사성에 의해 연걸되는 언어로 창조의 비밀을 기록하였다. 르네상스 비학은 이처럼 '자연'과 '성전들'을 구성하는 '상징'을 뚫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창조의 비밀을 인식하고, 그리하여 '태고 신학'을 계승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비학적 유비에서 '감춤과 드러냄'의 수사적 전략은, 지식의 축적보다는 반복을, 지식의 개선과 진보보다는 손상되지 않은 계승을 의도한다."(142-4)


제2부


3장 17세기 자연과학에서 비학적 논제의 연속성


"17세기에 과학의 새로운 '방법'이 비학의 낡은 '방법'을 개선하는 과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학의 '기계론'은 비학의 '애니미즘'을 대체하였고, 귀납법이며 연역법 같은 체계적 '방법'이 비학의 조잡한 경험과 관찰을 대신하는 과정은 실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적 교체(진보)의 과정은 그것을 확인하겠다고 미리 결심하고 나서 17세기에 접근하는 역사가에게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컨이며 보일이며 뉴턴 같은 17세기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과학의 기계론과 비학의 애니미즘이 20세기의 우리에게 그러한 것처럼 대립적인 이론이나 방법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기계론이 '승리'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17세기의 지적 분위기가 애니미즘 대 기계론의 '혈전'으로 점철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역사학적으로 오류이다. '자연이라는 책'은 17세기 자연 연구에서도 현저한 상투어였다. 자연지식에 관한 담론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상징'을 해독하는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147-8)


"숨은 저자의 '책'을 해독하겠다는 르네상스 비학의 논제는 17세기 자연지식의 담론에서도 인식 대상과 방법에 관한 일반 범주를 형성하고 있다." "자연의 기하학적 상징은 무한한 속성을 내포하는 조물주의 전언이다. 조물주의 정신에서는 그 모든 속성이 단 하나의 정의에 의해 한꺼번에 파악되지만, 인간은 명제로부터 명제로 이행하는 담론적 추론을 통해 그 속성을 하나씩 '해독'할 수밖에 없다. 기하학적 상징은 신적 정신에서는 명료한 전언이지만, 인간의 정신에서는 '암호'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갈릴레오가 〈자연에서 조물주의 작용 양상modus perandi을 해명하고 조물주의 입법가적 의도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소유하기 위해 '자연의 수학적 법칙'을 정립하려 하였다는 추론이 무리가 아닐 것이다. 갈릴레오가 '수학적 법칙'에 헌신하던 17세기 초는 파라켈수스파의 전성기이기도 하였다. 이언 해킹의 용어를 빌리자면 파라켈수스파의 '저급 과학'은 르네상스 비학을 대부분 수정 없이 계승한 것이었다."(148-50)


"파라켈수스적 예언과 17세기 말의 예언 사이에는 분명히 방법론적 '차이'가 있었다. 1531년과 1682년에 출현한 동일한 혜성(핼리 혜성)을 관찰함에 있어서, 파라켈수스는 그 혜성이 주기적 궤도를 몰랐지만, 17세기 말의 뉴턴이나 휘스턴이나 핼리(1656-1742)는 그것을 알았다. 파라켈수스에게는 막연히 대재앙의 전조였던 혜성이, 휘스턴이나 뉴턴에게서는 대홍수의 과학적 원인으로 '설명'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구와 인류의 동시적 종말은 양자의 공통 논제였다. 휘스턴은 혜성의 인력이 지구의 수분을 모두 빼앗아 가면 지구는 내부의 불의 분출로 인하여 최후의 대화재를 맞이할 것이라고 계산하였다. 매뉴얼이 지적하듯이, 뉴턴은 〈행성의 형성과 행성 운동의 규칙성이 시간적 기원을 갖는 것처럼, 세계는 계시록에 예언된 대로 소진될 운명에 있다〉고 믿었다. 뉴턴의 과학적 '법칙'은, 모세가 전한 세계 창조와 세례 요한이 예언한 세계의 최후 사이에서 시한부로만 작용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167)


"그렇지만 16-17세기 동안 진행된 종말론적 논의를 오늘날 점성술사의 대재앙에 대한 예언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점성술사는 '예언'에 그치지만, 근대 초 유럽의 자연 연구에서 종말론적 논의는 '예언된 미래에 맞춰 세상을 바꾸려는 실천'에 헌신하였다." "실낙원 이후 심하게 변형되고 왜곡된 자연을 태초의 완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조물주의 몫이지만, 왜곡된 자연 조건 속에서 태초의 낙원을 재건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이었다." "이렇듯 16-17세기의 많은 저술에서 마술적 권력과 유토피아적 계획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였다. 아마도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 다양한 논의가 공유한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은 '과학'의 목표가 '위대한 부흥Great Instauration'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인물이었다. 그의 '위대한 부흥'은 〈인간[아담]이 태초에 소유하였던 주권과 권력〉을 회복하는 작업이었다."(167-9)


4장 과학적 담론의 형성


"원래 르네상스 비학은 주술과의 차별화를 통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였다. 주술은 우상 숭배인 반면, 마술은 참된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이었다. 조물주의 종국적인 전언을 해독하지 못한 채 중도에 머무는 '주술'에 대한 비판은, 마술이 종교적 목표를 표방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어떤 마술사가 그의 '기술'로 인간 조건의 개선을 약속하였을 때, 그는 인간의 육체적·물질적 조건과 인간의 영적·정신적 조건을 동시에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물질적 효용과 영적 용도의 결합은 원래부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마술사는 환자의 영적 구원보다 돈벌이에 전념할 수도 있었고, 이단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었다." "부르주아 세력의 성장은 비학의 물질적 효용을 강화하였을 것이며, 영적 구원을 독점하려는 기성 교회는 비학의 영적 용도를 억압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틈새' 혹은 긴장은 과학과 비학을 차별화하려는 노력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179-81)


"그렇지만 윤리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지식의 효용에 대한 베이컨의 강조가 교회나 부르주아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오히려 베이컨은 자연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자 집단'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려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새로운 아틀란티스』에 등장하는 유토피아적 왕국 벤살렘Bensalem의 중심은, 〈사물의 원인과 비밀스러운 운동〉을 탐구하는 과학자 집단, 즉 '솔로몬의 집'이다. '솔로몬의 집'은 벤살렘 왕국의 〈등불〉이다." "이처럼 독립된 과학자 집단은 이웃 사랑과 박애의 대가로 기존의 정치·종교 엘리트 집단이 갖고 있던 것에 버금가는 '사회적 권력'을 얻는다." "따라서 '지식이 권력'이라는 베이컨의 개념은 두 가지(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어떤 대상에 관한 지식이 그 대상을 지배하는 '권력'을 준다는 의미요, 다른 하나는 어떤 지식의 사회적 효용이 그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사회적 권력'을 제공한다는 뜻이다."(182-3)


"베이컨은 비학적 상징의 '감춤과 폭로'의 수사학을 수용하는 동시에 변형하였다. 입문자와 비입문자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입문자는 과학 전문가요, 비입문자는 과학의 아마추어이거나 문외한이다. 베이컨은 아마추어로부터 전문가로의 상승 가능성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입문자와 비입문자는 깊이 절연된 채,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 대중은 '파편적' 지식을 사용하며, 보답으로 과학자를 더욱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게 된다. 과학자는 사회적인 권위를 확보하여 외부로부터의 위해危害를 받지 않은 채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다." "베이컨의 수사학은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입문자에게든 비입문자에게든 지식을 가능한 한 명료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지식의 명료한 전달만이 문외한으로 하여금 과학의 파편적 지식에 '경탄'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요, 과학자로 하여금 지식의 부족함을 인식하여 보다 심원한 연구를 수행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196)


"'과학적 담론'에 적합한 언어가 무엇인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플러드와 케플러는 똑같이 이중적 표상과 이중적 전달을 의도하였다. 플러드에게 상징은 일상 언어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자연의 비밀을 표상하고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더 나아가, 상징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넘어서 이중의 독자, 즉 입문자와 비입문자를 차별화하는 동시에 입문자의 영적 계도를 의도한 것이었다. 물론 케플러의 상징도 이중의 독자를 구분하였다. 케플러의 경우에도 〈과학은 일상 언어나 감각에 호소하는 피상적 언어와는 구분되는 특수한 비밀의 언어〉로 구성되었다. 이 같은 '비밀의 언어'로서 수학이나 기하학 과학에 적합한 언어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는 결코 '영적 계도'를 표방하지 않았다. 비록 '수학적 상징'도 접근 가능한 자와 불가능한 자를 구분하지만, 이제 차별화는 영적 우월자와 열등자 사이에서 진행되기보다, 오직 지적 엘리트와 무식한 대중 사이에서만 진행된다."(213-4)


"1661년에 로버트 보일은 파라켈수스파의 연금술사들을 비난하면서, 특히 〈그들이 가르치겠다는 것을 표현하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과 그들의 〈애매한 표현〉을 비난의 주된 표적으로 삼았다. 파라켈수스파의 표현 방식은 〈독자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들의 기예를 더욱 신비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위한 것이든, 독자에게 지식을 감추기 위한 것이든〉, 독자를 혼동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왕립학회의 또다른 회원인 그랜빌도 웹스터 같은 마술사들은 〈아담의 언어를 복원〉하기는커녕, 〈은유, 천박한 비유, 광신적 어구, 환상적인 언어 체계〉로 인하여, 오히려 바벨의 혼란을 증폭시킬 뿐이라고 공격하였다. 홉스 역시 『리바이어던』에서 〈명석한 정의〉에 따라 사용되는 〈정확한 어휘야말로 인간 정신의 등불〉이라고 말하면서, 은유를 비롯한 애매한 표현을 〈어리석은 등불〉과도 같다고 지적하였다. 은유에 의존한 유비는 〈여러 모순 사이를 방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로크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224-5)


"윌킨스가 추구하였던 '실물 상징'은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념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언어를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사물의 질서'와 '말의 질서'를 일치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반면에 로크에게 말의 질서는 〈자의적〉이다. 〈사람이 말을 그의 관념에 대한 기호로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특정한 분절적 음성과 어떤 관념 사이에 자연적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언어만이 존재할 것이다. 어떤 단어는 자의적인 부여에 의해 자의적으로 어떤 관념의 표지가 된다. 따라서 단어의 용도는 관념에 대한 감각적 표시로 국한되며, 단어가 지시하는 관념이야말로 그 단어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의미이다.〉 이제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관념을 지시하는 '자의적' 기호일 뿐이다. 언어는 사람 사이의 규약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될 뿐, 사물이나 관념과는 어떠한 자연적·필연적 관계도 없다. 로크의 주장은 소쉬르의 규약적·자의적 언어관을 피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226-7)


"자연에 대한 담론은 더 이상 저자(화자)의 정신과 혼동되지 않으며, 자연 그 자체와도 혼동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저자의 책을 비판하는 행위는, 사물에 대한 그의 표상을 비판하는 것이지, 그의 전인성을 모독하고 우주를 뒤바꾸는 것은 아니다. 모자이크처럼 폐기될 것을 폐기하고, 수정될 것은 수정되고, 수용될 것은 수용되어도 '전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러한 지식의 체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전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게 된다. '전체'가 모든 파편의 결합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누가 모든 파편을 모아서 '전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언어가 사물에 대한 투명한 표상이기를 포기하고 언어와 사물이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이러한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다. 이상적 언어가 포기되는 순간부터, 인간 정신은 끊임없이 불화하고 반목하는 언어와 사물 사이를 중개하려고 노심초사하지만 한 번도 중재에 성공하지 못한 불행한 주인(주체)이 되었다는 말이다."(230)


제3부


5장 근대 인문학에서 비학적 논제의 연속성


"17세기 자연지식 담론에서 논제가 토론되는 방식은 '구조적으로' 변화하였다. 여기서 '구조적 변화'란 바로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념을 이어 주던 비학적 상징의 매개성이 파괴되었고, 언어가 인간의 정신적 관념을 '표상'하는 기능만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17세기 중반 이후로 '성전들'에 대한 논의는 태곳적 현자의 관념이며 지식이 그 속에서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르네상스 비학이 '조물주의 전언'을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던 '태고 신학'의 언어는, 이제 단순히 세계에 대한 고대인의 지식이나 지혜의 수준을 전해 주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제는 태곳적 기록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종류의 지식이나 지혜를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문학적 사색이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또한, 태고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적 경과가 진보로서든 퇴보로서든 하나의 '연속체'로 파악되면서, '전체로서의 역사'의 의미가 '새롭게' 논의될 수 있었다."(233-4)


"17-18세기에 '태곳적 지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고대인의 '원시성'이나 '단순함'이 다방면으로 논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기원전 1세기경에 루크레티우스는, 원시 인류가 농업이나 직조 기술도 없고 성적 통제도 없이, 거의 동물적인 야만 상태에서 살다가 점차 문명화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었다." "기원전 300년경에 유헤메로스는, 신화란 거의 동물적 격정과 상상력에 사로잡힌 시민을 무력과 간계를 이용하여 통치한 정치가나 영웅이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서 조작한 결과물이라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신화를 원시인의 조야한 상상이나 정치적 간계의 산물로 해석하는 '루크레티즘'이나 '유헤메리즘'은 르네상스 시대에 모두 부활하였고, 그 이후의 신화 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로, 특히 17세기부터는 신화 해석에 고대에는 없었던 요소가 새로이 첨가되었다. 고대 신화의 원시성에 대한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와 미묘한 긴장을 이루었다."(239-40)


# 고대인의 원시성 테제에 관한 논제

1. 라페이레르 : 아담 이전에도 선민과 이교도가 구분되지 않은 채 〈더럽고 야수적으로 살고〉 있었으며, 아담 이후로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2. 홉스 :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능력은, 피조물을 명명할 수 있는 능력(이성)일 뿐, 모든 피조물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나 추상화의 능력이 아니다.

3. 스피노자 : 모세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지만, 그들의 기록이 심오한 보편적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이들은 당시 정통 교리의 투사들로부터 '악마 삼총사'라고 비난받았다.


"아담이나 모세, 나아가서는 헤르메스가 어떤 종류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느냐는 문제가 학문적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로서도 퍽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태곳적 지혜'를 토론하는 동안, 그것의 시간적·역사적 성격은 점차 뚜렷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헤르메스 저작과 그리스도교 성서의 '알레고리적' 의미가 동시에 폭로되었으며, 그것들이 제한된 시공간적 조건에 어울리는 담론이라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이른바 '고대파Ancients와 현대파Moderns의 논쟁'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고대인의 지혜와 언어는 현대인의 그것보다 우월한가? 우열을 가릴 수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태곳적 지혜를 그것이 현대인의 지식보다 우월하든 열등하든 하나의 역사적 산물로 만드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러빈 교수가 지적하듯이, 〈그 논쟁은 한 차례의 대규모 전투라기보다, 수많은 작은 전투로 이어진 긴 전쟁〉이었다."(248-9)


"현대파의 승리를 위해 전기를 마련한 것은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이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언어의 '자연적' 기원과 '인위적' 발전은 인류가 야만 상태로부터 문명 상태로 진보하는 과정으로 빈번하게 해석되었다." "행동(제스처)과 그림('상형어')은 오늘날의 입말과 글말처럼 동전의 앞뒷면이다. 행동으로 말하고 그림으로 기록하는 시대에, 인간은 감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상형어'는 심오한 지혜를 감추기 위한 의도적 알레고리가 아니라 자연적·감각적 '필요'의 산물인 '조야한 언어'로 고정된다. 분절적인 음성과 알파벳적 기록에 의해서야 비로소 인간은 추상적 관념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헤르메스, 모세, 종국적으로는 아담의 '신성한' 언어가 조잡한 원시 언어로 고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대파의 승리도 점진적으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성사聖史'와 '이교사異敎史'의 태곳적 지혜가, 태고의 언어와 현대의 언어가 꾸준히 비교되었다. 비코는 바로 이러한 논쟁적 담론 상황에 속한다."(254-6)


"비코는 '성사'와 '이교사'를 완전 분리하여 '이교사'에 대해서만 야수적 기원 즉 '바바리즘'을 적용하였다. 성사와 이교사를 구분한 것이 이단 혐의를 피하면서 인류 문명의 기원이라는 위험한 주제에 접근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태곳적의 '심오한 지혜'를 부정한 것은 데카르트파를 위시한 현대파로부터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코는 '야수-인간'의 테제를 수용하되, 카조봉처럼 그리스도교적 지혜가 이교적 야만성보다 우월함을 입증하려 하지 않았다. 데카르트파처럼 '고대인'보다 '현대인'이 우월함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역사학적인 것'이었다." "비코가 보기에 '야수-인간'의 무리는 감각이나 본능에 따라 결속되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감각이나 본능에 따라 최초의 문명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 『새로운 과학』 완성판(1744)의 주제인 '시적 지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비코가 내놓은 가장 충실한 답변이었다."(265-6)


"'시적 형이상학'은 태곳적에 살았던 사람 누구에게나 '선천적으로 주어진 능력'이다. 태곳적 인간이면 누구나 '시인'이다. 태곳적 시인들은, 〈그들 자신의 관념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지순至純한 예지에 따라 사물을 인식하며 인식함에 의해 창조하지만, 태곳적 사람들은 그들의 강건한 무지로 인해 오직 육체적 상상에 따라 사물을 창조하였다.〉 태곳적의 '시적 지혜'는 심오하거나 신성한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시적 형이상학'에 의해 형성되며, 그것의 요체는 '육체적 상상'이다." "비코는 〈모든 시적 표현〉은 〈언어는 빈곤〉하지만 〈설명하고 이해시킬 필요〉가 있는 조건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은유가 바로 그러하다. 어떤 것을 설명할 필요는 있는데, 그것에 합당한 어휘를 결여하고 있을 때 은유가 사용된다는 말이다. 이교 태고 문명이 발하는 찬란한 빛은 은유나 우화로부터 방출된 빛이요, 따라서 지식이 아닌 무지의 소산이다."(272-3)


"'공통 감각sensus communis'은 섭리의 장소이다. 섭리는 늘 인간이 의도하는 '좁은 목적'보다 '넓고 우월한 목적'을 실현한다. 섭리는 '공통 감각'에 맞추어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비코가 말하는 섭리의 작용은 '상형어'의 기능에 상응한다. '상형어'는 '야수-인간들'의 육체적 상상에 의해 형성되지만, 다시 그들의 감각과 상상을 사로잡는 '이상적 초상肖像'으로 작용하여, 그들의 모든 경험과 사고를 규율하며 질서 짓는다. '상형어'의 기능은 단순히 담론적 수준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기예와 제도가 '상형어'의 기능을 수행한다. 비코의 표현을 빌리면, 기예나 제도도 말이 아닌 사물로 구성되는 일종의 〈시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곳적 이교도들이 '만든' 모든 것은, 아우어바흐가 '마술적 형식주의'라고 부른 기능을 수행하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감각과 상상을 사로잡아 그들의 경험을 강제하고 규율하는 '상징'으로 기능하였던 것이다."(281-2)


6장 인문학에서 '과학적' 담론의 형성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벽두부터 자연 및 섭리에 대한 인간적 인식의 한계를 폭로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최초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는 '신이 만든' 자연을 연구하는 자연철학이나 의학이 과연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을 제기하였다. 물론 아직 페트라르카에게는 인간이 자신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창조하는 세계야말로 진리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의 살루타티는 과학의 토대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요소란 인식 대상의 존재론적 높낮이가 아니라, 인식 주체의 지적 능력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동시대의 자연철학을 공격하였으며, '신의 과학'(신학)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인간적 과학'(인문학)이라는 개념에 도달하였다. 인간이 신이 만든 피조물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없지만, 그 자신이 창조한 것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정 '인간적인' 과학의 대상은 자연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인 법과 제도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297-8)


"페트라르카는 자유 기예liberal arts가 기계적 기예mechanical arts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윤리적·영적 영역에 한하여 '인간이 만든 것'의 진리성을 인정한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방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르네상스 비학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적 기예와 신적 기예, 신이 만든 자연과 인간이 만든 세계 사이의 간극을 거의 제거하고, '인간이 만든 것'의 진리성을 넓은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학은 인간의 영적인 구원과 육체적 구원을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기계적 기예와 자유 기예 사이의 해묵은 갈등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술적 유토피아론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인간이 만든 것'은 자연과 섭리의 승인하에서만 진리가 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역사 세계는 종말론적 시간표 안에서만 가능한 세계였으며, 그 안에서 지상至上의 과제는 원래 아담에게 주어진 자연 지배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298-9)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데카르트가 논리적·수학적 필연성을 존재론적 필연성에 대입하여, 자연 세계의 '확실한' 인식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것은 가히 지적 분수령이라 할 만한 변화였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논리적·수학적 질서나 패턴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나아가서는 그러한 것만이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므로 세계상이 '기계화'된다는 것은, 단지 세계를 '기계'처럼 바라보게 된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실물로든 상상으로든 인간에 의해 구성된 어떤 기계 모델이 실재에 부과되어 그 모델과 일치하는 실재의 질서만을 과학적 진리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기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비록 유한한 능력만을 가지지만, 적어도 '인간이 만든 것'에 대해서만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은 17세기 중반 이후로 유럽 전역의 지성계에서 눈에 띄게 진전되고 있었다."(299-300)


"비코의 『지혜』는 '진리'가 '만들어진 것'과 의미론적으로 교환 가능하다는 테제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비코는 어떤 것을 만드는 조건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토마스주의의 입장을 계승하였다기보다는, 그 역으로 어떤 진리를 인식하는 조건은 그것을 만드는 것이라는 키케로(혹은 둔스 스코투스)의 고전적 명제를 계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혜』에서 개진된 '베룸-팍툼'의 원리는 데카르트나 홉스가 제시하였던 진리 규준과는 다르다. 데카르트나 홉스에게는 '인간이 기하학을 만들었다는 것'이 '기하학의 증명 가능성(진리)'을 보증하는 '조건'인데 반하여, 비코에게는 그것 자체가 진리의 '기준'이 되고 있다. 데카르트나 홉스가 '명석판명함'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았다면, 비코는 '만들었다는 것' 자체를 진리의 기준으로 정립하였다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 『지혜』에서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진리 기준이 수학과 기하학에 적용되지만, 『새로운 과학』에서는 그 기준이 '역사 세계' 전체로 확장된다."(303-5)


# 베룸-팍툼verum(진리)-factum(만들어진 것)의 원리


"비코가 '상상적 보편자'(상형어)에 주목하였던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참이냐 거짓이냐를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우스'는 '천둥 번개'의 표상이었다는 식으로 그것이 '무엇'을 표상하였던가라는 문제도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비코의 진정한 관심은, 왜 고대에는 '상상적 보편자'(상형어)가 '확실한' 전언으로 '통용되었는가'를 구명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처럼 언어를, 그것이 정립된 시점에서의 사회적 용도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그것에 의해 말하는 사람이 생각하였던 것(관념)과 만들었던 것(사회관계나 제도)의 본성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비코는 문헌언어학의 두 분과를 '언어의 역사'와 '사건의 역사'로 구분하였다. 문헌언어학은 〈사물의 역사를 참조함으로써 언어의 역사에 확실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문헌언어학적 '확실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려면, 특정한 언어와 그것을 사용한 시대의 사회적·제도적 조건을 동시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었다."(313)


"비코의 '영원한 원형적 역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인간사에 대한 문헌언어학적 이해를 결합한 개념이었다. 역사의 변화는 인간 관념의 '철학적' 패턴을 따르지만, 철학적 패턴은 구체적인 '역사적 변양變樣' 속에서만 확인된다." "'factum'은 인간이 만드는 현실의 역사로, 'certum'은 문헌언어학에 의해 확인되는 그 역사의 확실성으로, 'verum'은 철학에 의해 증명되는 그 역사의 일정한 패턴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은 감각이나 영혼이나 이성을 통해 '시민 사회의 역사'를 전개하는바, 각 시대의 본성은 침묵어나 영웅어나 분절적 언어에 의해 확실하게 인식되며, 역사의 순환적 패턴에 의해 인간의 역사란 인간이 만든 것 이상일 수 없다는 진리가 증명된다. 실제로 '시민 사회의 역사'는 감각이 지배하는 시대로부터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까지 한 차례의 순환을 완결하고 나면, 다시 이 순환을 반복한다. '감각의 바바리즘'으로부터 출발하여 '반성(이성)의 바바리즘'에서 종결되는 순환을 반복하는 것이다."(316-7)


"인간 본성이 역사의 순환적 패턴을 결정한다는 관념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물론 보댕이나 스페로니, 베이컨 등 17세기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답습되고 있던 해묵은 유산이었다. '베룸-팍툼'의 원리며 '야수-인간' 테제도 이미 17세기 중반에는 전 유럽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고대와 현대의 언어적 차이에 의해 각 시대의 본성을 해명하려는 시도는 '현대파와 고대파의 논쟁'에서 핵심 주제였다. 비코의 어원 연구는 로렌초 발라를 위시한 르네상스 문헌언어학의 잔영이었다." "그러나 비코는 '과학' 자체가 하나의 '문제'로 부상하던 담론 상황에 속해 있었다. 비코에게 '유리한 고지advantage point'를 제공한 것은 바로 '시대'였다. 이 유리한 고지에서, 비코는 순환론이라는 '해묵은' 관념을 '새로운' 담론 상황에 응용하여, 시의 시대(감각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이성의 시대)를 동시에 반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비코는 '과학에 대한 과학', 즉 '메타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의 위상을 정립하는 새로운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317-8)


"비코의 언어관을 '자연적' 아니면 '규약적'인 것이라고 양자택일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오히려 비코는 고대에든 현대에든 언어는 늘 '자연적인 동시에 규약적'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수 있다." "비코는 인간의 약속 없이도 언어가 성립할 수 있다는 자연적 언어관을 배격하는 동시에, 오로지 약속에 의해서만 언어가 성립할 수 있다는 규약적 언어관도 수정하고 있다. 각 시대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의 시대에 언어는 자연적 특징이 강하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통용될 수 있지만, 인간의 시대에 언어는 '사물에 대응하는' 정의에 따라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시대에 어떤 어휘가 어떤 사물에 대응하는가는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 규약에 의존하게 된다." "비코에게 언어는 고대든 현대든 '인간이 만든 것'이다. 고대에는 자연적-상징적 언어가 지배적이었고, 비코 당시에는 자의적-규약적 언어가 지배적이었을 따름이다."(333-4)


"반성력(이성적 추론 능력)에 의존하여 사물에 대한 엄밀한 표상을 추구하는 가운데, 인간의 정신 한구석에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거나, 진리를 가장하여 거짓을 말하는) '진리의 가면을 쓴 반영'이 동시에 형성된다." "이와 관련하여 비코가 '반성(반영)의 바바리즘'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은 참으로 흥미롭다. 비코는 두 상태의 '바바리즘'을 가정한다. 우선 그는 홉스가 만인 대 만인이 투쟁을 벌이는 '자연 상태'를 가정한 것처럼, '감각의 바바리즘'을 상정한다. 인류의 역사는 이 '감각의 바바리즘'으로부터 출발하여 '반성(반영)의 바바리즘'에서 한 차례의 순환을 완결한다. '감각의 바바리즘'은 '야수-인간'이 아직 상상적 보편자(상형어)를 정립하기 이전의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공통 감각에 의해 언어의 의미를 규약할 수도, 서로 의사소통을 수행할 수도 없다. 반면에 '반성(반영)의 바바리즘'은 인간이 이성적 동의에 의해 의미를 규약할 수도, 따라서 서로를 믿고 의사소통할 수도 없게 된 상태이다."(341-2)


"청년 시절부터 비코는 일관되게 과학적 진리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과학적 진술의 참·거짓의 문제를 떠나, 과학적 담론의 이면을 들여다보았다. '오류의 낌새'마저 제거하려는 과학의 계획은 그것이 원래 의도한 바와는 달리 참·거짓의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반성의 바바리즘'을 초래한다. 삶의 공동체는 파괴된다. 비록 고대의 시인들이 만든 '상형어'는 미신의 산물이었지만, 그들은 '상형어'의 '빛나는' 이미지로 최초의 시민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상형어'가 야수처럼 방황하던 인류의 '감각'을 사로잡은 덕택이었다. 그러나 이제 활짝 만개한 인간의 '이성'을 무엇이 제어할 수 있는가? 과학적 진리로는 부족하다. 참·거짓을 따지는 담론 상황에서는 참을 가장한 거짓이 침투하기 마련이요, 이야기된 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코는 인간 이성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비코는 현재의 과도한 이성을 '누그러뜨리는' 것을 최선의 처방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344-5)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의 동시대적 담론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비코의 '새로운 과학'은 단순한 반反과학도, 르네상스 비학의 부활도 아니었다. 오히려 비코는 과학적 담론이 야기한 질병을 치료하는 데,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는 데 관심이 있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관심을 가린의 용어를 빌려 '새로운 인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새로운 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의 형성에는 비코 외에도 적지 않은 동시대인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근대 과학이 '생활 세계'에 야기한 영향을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자각한 중요한 실례에 해당한다." "비코의 수사학은 한 시대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그 시대에 고유한 '확실성'으로(그 시대에 확실하다고 믿어진 것으로) 환원한다. 이렇듯 한 시대를 좁은 수사의 권역에 묶어둠으로써, 비코는 우리에게 과학적 담론의 권역을 넘어서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격을 선물한다."(352-3)


결론


"피치노가 『헤르메스 전서』를 번역한 1464년부터 비코의 『새로운 과학』(3판)이 출판된 1744년까지 대략 3세기는 서구 '근대성modernity'의 형성기였다. 근대적 국민 국가, 근대적 자본과 시장이 형성된 시대였다. 국가와 자본이 생활 세계를 두루 장악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빈발하였으며, 그 와중에서 합리성과 '계몽'이라는 새로운 가치 기준이 정립되고 있었다. 일찍이 비코는 한 시대의 언어를 통해 그 시대 전체를 두텁고 촘촘하게 기술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언어와 정치 제도, 언어와 종교 의식儀式, 언어와 경제적 교환 방식, 언어와 심성mentality, 언어와 일상 문화를 입체적으로 엮어 냈다." "3세기에 걸쳐 공통의 논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하는 '담론 상황'에서, 비학과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각자에 적합한 담론 영역을 구축하였다. 비학이 지식의 수직성(질과 깊이)을 유지하는 담론 형식을 유지하였다면, 과학은 지식의 수평성(양과 너비)을 강화하였으며, 인문학은 지식의 입체성thickness을 추구하였다."(360-1)


"포스트모던론자들은 '차이'와 '차별화'를 권력이 침투하는 틈새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틀린 판단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비록 차별화 과정에서 논쟁이 발생하고 승패가 결정될 수도 있지만, 지식의 진정한 다원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 담론의 지형을 어림잡기 힘든 조건에서는, 비학이 과학을 오히려 '과학적으로' 공격하고, 과학적 담론의 위력에 의해 인문학이나 비학의 특수성이 말살되고, 인문학과 비학이 자주 혼동되는 상황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지식의 분화는 끊임없이 발생하겠지만 지식의 진정한 다원화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이 책은 서구 지식 담론의 지형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서 제시된 것이다." "서구의 비학·과학·인문학을 각자에 고유한 '방법론'에 따라 차별화하는 작업보다는 각자에 고유한' 수사학'에 비추어 이해하는 작업이 더욱 풍요로운 결실을 약속할 것이다. 경험이 추상에 선행하듯이, 수사는 언제나 방법에 선행하기 때문이다."(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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