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코 자서전 - 지성사의 숨은 거인
잠바티스타 비코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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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소년기(1668~1686)


"비코는 제수이트회의 또다른 신부 주세페 리치의 지도 아래 다시 철학으로 돌아갔다. 리치 신부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둔스 스코투스 학파에 속했지만 밑바닥에서는 제논주의자─엘레오의 제논이 아니라 키티온의 제논을 가리킨다─였다. 비코는 리치 신부로부터 〈추상적인 실체〉가 유명론자 발조 신부가 말하는 〈양태modi〉보다 더 큰 현실성을 갖는다는 가르침을 기꺼이 배웠다. 이것은 비코가 언젠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철학에서 즐거움을 찾게 될 것임을 예견해준 것이었는데, 스콜라 철학의 어느 누구도 스코투스만큼 플라톤 철학에 근접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비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제논의 〈논점〉에 대해 논했던 것을 따라했지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심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비코의 눈에는 리치 신부가 존재와 실체 사이의 형이상학적 차이를 설명하려는 데에만 너무 오랫동안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새로운 앎을 원했다."(23-4)


"펠리페 아쿠아디아에게 법학을 배운 비코는 종종 시민법의 좋은 문구들을 되뇌어보면서 두 가지 일을 대단히 즐겨 했다. 첫째는 명석한 해석자들이 법을 요약하면서 법학자들과 황제들이 공정한 재판을 위해 행했던 형평성과 관련하여 개별적으로 고려한 사항을 어떻게 일반적인 격률로 추출해내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코로 하여금 고대의 해석자들에게 이끌리도록 만들었는데, 훗날 그는 이들이 자연적 형평성의 철학자라고 인식하고 판단하게 되었다. 둘째는 법학자들 스스로가 얼마나 공을 들여 자신들이 해석하던 법과 의회의 포고령과 집정관의 칙령의 언어를 검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박식한 해석자들을 향하게 만들었는데, 훗날 그들을 로마의 시민법을 다루는 순수한 역사가로 인식하고 평가하게 되었다. 그 두 가지 즐거움은, 하나는 보편법의 원리를 탐구하기 위해 그가 쏟아부은 온갖 노력의 징표요, 다른 하나는 라틴어의 연구로부터 얻은 혜택의 징표였다."(27-8)


2 바톨라 시기의 자기완성을 위한 공부(1686~1695)


"바톨라 성에 머무는 동안, 교회법에서 교리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튼 것에 힘입어 그는 어느덧 은총에 대해 기술한 가톨릭 교리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특별히 소르본의 신학자 리카르두스의 책을 정독함으로써 일어난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아버지의 서점에서 그 책을 챙겨갔던 것이다. 리카르두스는 기하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성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가 캘빈과 펠라기우스라는 두 극단은 물론 그 두 극단을 따르는 다른 견해들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이려 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민족들의 자연법의 원리에 대해 숙고하도록 만들었는데, 그것은 로마법의 기원은 물론 다른 모든 민족들의 시민법을 역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시도에 발판이 되어주었으며, 도덕철학과 관련된 은총에 대한 올바른 교리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로마의 법학자들이 우아한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비난한 로렌조 발라는 키케로부터 시작하여 라틴어 능력을 배양하도록 이끌었다."(36-8)


"비코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모두의 도덕철학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둘 모두가 고독자들의 도덕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자신들만의 작은 정원에 갇혀 있는 게으른 사람들이었고, 스토아학파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명상가들이었다. 또한 애초에 비코가 논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건너뛴 것은 이후 그로 하여금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 마지막으로는 르네 데카르트의 물리학을 경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이래로 그는 플라톤이 따랐던 티마이오스의 물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세상이 수數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에 수긍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세상이 점点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스토아학파의 물리학도 경멸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둘 사이에 어떠한 실체적인 차이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그는 에피쿠로스나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물리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둘은 모두 그릇된 전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43-4)


3 나폴리로 귀환: 초기 비코 철학의 형성(1695~1707)


"비코는 모든 지식인들 중에서 단 두 명에게만 찬사를 보냈는데, 그들은 플라톤과 타키투스였다. 견줄 바 없는 형이상학적 정신으로 타키투스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플라톤은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관조했기 때문이다. 또한 플라톤이 보편적인 지식을 통해 이데아를 아는 인간(철학자)을 구성하는 덕성의 모든 부분을 널리 알렸듯, 타키투스는 행운과 악운의 무한히 불규칙적인 사건들 속에서 실천적인 지혜를 가진 인간(정치가)이 줄 수 있는 혜택을 조언 하러 내려왔다고 보았다. 이 두 명의 위대한 작가에 대한 비코의 찬사는 그가 훗날 공들여 만들 계획의 전조였다. 그 계획이란 모든 시간에 걸친 보편적 역사가 밟아가는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를 말하는데, 그것은 인간사의 영원한 속성에 따라서 모든 민족이 흥기하고 정체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겪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명한 사람이란 플라톤처럼 숨겨진(철학적) 지식도 알아야 하고, 타키투스처럼 범속한(실천적) 지식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이 뒤따른다."(81)


"마침내 비코는 베룰람 경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는 범속한 지식과 숨겨진 지식 모두에 있어 그 누구보다 능통한 사람으로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드문 철학자였다." "플라톤이 지혜의 제왕이지만 그리스인들에게 타키투스가 없듯이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는 베이컨이 없다. 또한 그는 단 한 사람의 존재가 학문의 세계에 결여된 많은 것들을 얼마나 새롭게 발견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얼마나 많고 다양한 결함이 개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게다가 가톨릭교를 침해했던 몇몇 사례를 제외한다면 그는 특정 직업이나 분파에 대한 편견 없이 모든 학문을 존중하면서 각 학문마다 보편적인 문필 공화국을 구성하는 전체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제 비코는 언제나 무엇을 성찰하거나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세 명의 뛰어난 저자들을 눈앞에 두고 있듯이, 창의력에 대한 저작에 몰두하여 최종적인 결과로 『보편법의 한 원리』를 탄생시켰다."(81-3)


4 비코 철학의 두번째 형성(1707~1716)


"후고 그로티우스의 『전쟁과 평화의 법』(1635)을 읽고난 후에, 비코는 그로티우스를 네번째 저자로 추가하였다. 플라톤은 호메로스의 민중적 지혜로 자신의 심원한 지혜를 확인하였다기보다는 장식하였다. 타키투스는 자신의 형이상학과 윤리학과 정치학을 아무런 체계도 없이 분산되고 혼돈되어 자신의 시대까지 전해져 내려온 사실들로 채웠다. 베이컨은 자신의 시대의 인간과 신에 대한 지식의 총체가 보충되고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을 직시했지만 법과 관련해서는 모든 도시와 모든 시간에, 즉 모든 민족을 포괄하는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그로티우스는 보편법의 체계 속에서 철학과 문헌학 모두를 포용한다. 그는 문헌학을 이루는 두 부분인 역사와 언어에 모두 능통했는데, 실제의 역사이건 신화의 역사이건 사실과 사건을 다루는 역사는 물론 기독교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의 가장 수준 높은 세 언어였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잘 알았던 것이다."(117-8)


5 비코 철학의 결정적인 형태와 1723년의 공채(1717~1723)


"이러한 공부와 이러한 인식과 어느 누구보다도 찬양했던 이 네 명의 저자와 가톨릭 종교에 기여하고 싶다는 간절함과 더불어 비코는 마침내 최고의 철학, 즉 플라톤의 철학을 기독교 신앙에 종속시키려고 고안된 체계가 문필의 세계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철학은 문헌학과 조화를 이루며, 그 문헌학은 언어의 역사와 사물의 역사라는 두 분야에서 학문적 필연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719년 연례 연설에서 다음의 논지를 제시했다. 〈첫째, 모든 학문의 원리는 신으로부터 온다. 둘째, '인식(nosse), 의지(velle), 능력(posse)'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한 영원한 진리의 신성한 빛은 모든 학문에 스며들어 그들 서로 간에 긴밀하게 결합되는 순서에 따라 처리하며 그들의 근원으로서 신에게 연결시킨다. 셋째, 신과 인간에 대한 지식의 원리에 대해 지금까지 그 어떤 것이 씌어져왔고 말해져왔든 그것이 [신으로부터 온] 그 원리와 일치하면 옳고 일치하지 않으면 그르다는 것을 논증하도록 하자.〉"(121-3)


6 『새로운 학문』 초판본(1723~1724)


"인류의 형이상학이란 민족들마다 갖고 있는 자연신학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인간이 갖는 신을 향한 어떤 자연적 본능을 통해 그들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신에 대한 두려움은 민족 최초의 창건자들로 하여금 어떤 여인들과 삶의 영원한 반려로 결합하도록 이끌었고, 그것이 혼례에 의한 최초의 인간사회였다. 그렇게 비코는 이교도 신학의 대원리와 신학적 시인들이 쓴 시의 대원리를 발견했던 것인데, 그들은 이교도 문명 최초의 시인이자 세계 최초의 시인이었다. 비코는 이러한 형이상학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공통적인 도덕과 정치를 발견했고, 그 위에 인류의 법학을 근거시켰다. 민족들마다 그들 본성에 대한 관념을 펼쳐내고, 그에 따라 그들 정부의 형태도, 법학도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 최종적인 정부의 형태는 군주제인데 여기에서 민족들마다 마침내 본성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비코는 아시리아의 니노스 왕국에서부터 시작되는 세계사에 남겨져 있던 큰 공백을 메웠던 것이다."(149-50)


"언어를 다룬 부분에서 비코는 노래와 시 모두를 포함하는 시학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는 노래와 시 모두 초기의 모든 민족에게 균일한 본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 원리를 따라서 그는 영웅(귀족)들의 '임프레제(위업)'의 원리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초기의 민족들이 분절된 언어를 형성하지 못했을 시기에 사용했던 묵음의 언어였다. 거기에서 그는 문장학紋章學의 새로운 원리도 발견하였다." "언어의 기원의 발견이 초래한 다른 결과들 중에는 모든 언어들에 공통적인 어떤 원리들이 있고, 그 예로서 라틴어의 참된 기원을 찾았다. 그 예가 다른 모든 언어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비코는 보여주었다. 먼저 모든 토착어에 공통적인 어원의 관념을 제시한 뒤 외래어의 어원의 관념을 제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어원의 관념을 펼쳐낸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민족의 자연법을 적절하게 논의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언어의 과학이었다."(150-1)


"이러한 관념의 원리와 언어의 원리, 즉 인류의 철학과 문헌학과 함께 그는 섭리의 관념에 근거하고 있는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를 전개시킨다. 그에 따라서 민족들의 자연법이 제정되었음을 비코는 저작 전체를 통해 논증한다. 이런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에 따라 시간 속에서 출현하고 발전하고 성숙하고 쇠퇴하다가 종말을 맞는 과정을 특정한 민족들의 역사마다 밟아간다. 이렇듯 비코는 그리스인들을 고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고 말하며 조롱했던 이집트인들로부터 고대의 중요한 파편 두 조각을 받아들여 활용하게 되었다. 하나는 이전의 시간 전체를 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 셋으로 구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이집트인들이 이전에 말했던 언어를 세 가지로 나눈 것이다. 첫번째는 신성한 언어로서 상형문자 또는 신성문자를 통한 묵음의 언어이다. 두번째는 영웅의 언어로서 그것은 상징이나 은유를 사용한다. 세번째는 서간체 언어로서 일상적인 삶의 용도를 위해 사용한다."(151)


7 부차적 저술들(1702~1727)


8 〈반론〉과 『새로운 학문』 재판본(1728~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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