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팔레스타인 토착 사회의 해체는 새로 만들어진 영국 위임통치 당국(유대인 정착민들의 자치 구조 구성을 도운)이 지지하는 가운데 대규모로 유입된 유럽계 유대인 정착민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영국의 지배에 맞선 1936~1939년 아랍 대반란이 철저히 탄압을 받으면서 원주민 인구는 한층 더 감소했다. 영국이 10만 명 규모의 병력과 공군을 동원해서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진압하는 가운데 당시 성인 남성 인구의 10퍼센트가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거나 투옥되거나 추방당했다. 한편 독일 나치 정권의 박해에 따라 유대인 이민자가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가 1932년 총 18퍼센트에서 1939년 31퍼센트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리하여 1948년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에 필요한 인구학적 임계점과 군 병력이 마련되었다. 이후 시온주의 민병대에 이어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인구의 절반 이상을 쫓아냄으로써 시온주의의 군사적·정치적 승리가 완성되었다."(24-5)


"남북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아시아, 오스트랄라시아 (또는 아일랜드) 등 어디서든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지배하려 한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은 특유의 언어로 언제나 원주민을 경멸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통치한 결과로 토착민들이 더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식민주의의 이론적 근거와 나란히, 유럽의 시온주의 식민화가 도래하기 전에 팔레스타인은 황량하고 아무도 살지 않으며 후진적인 땅이었음을 입증하는 데 골몰하는 수많은 문헌이 존재한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오직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들이 앞장서서 땀 흘려 일한 덕분에 이 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꽃피는 정원으로 바뀌었고, 오로지 그들만이 이 땅에 일체감과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이 주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이즈라엘 쟁윌 같은 초기 시온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을 지지한 기독교인들까지 소리 모아 외친 구호로 요약된다. 「사람 없는 땅을 땅 없는 사람들에게 주자.」"(26-8)


1 첫 번째 선전포고, 1917~1939


"20세기의 첫 번째 10년간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문화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나 기독교인과 무척 비슷했고 서로 꽤 편안하게 공존했다. 유대인은 대부분 초정통파이자 비시온주의자였고, 미즈라히(동방 출신 유대인)나 세파르디(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의 후예)였으며, 중동이나 지중해 출신의 도시인으로 대게 제2언어나 제3언어라 할지라도 아랍어와 터키어를 구사했다. 유대인과 이웃들은 종교로 뚜렷이 구분되었지만,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었고 유럽인이나 외부에서 온 정착민도 아니었다. 그들은 무슬림이 다수인 원주민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유대인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남들도 그렇게 보았다. 게다가 다비드 벤구리온이나 이츠하크 벤츠비(훗날에 각각 이스라엘 총리와 대통령이 된다) 같은 열렬한 시온주의자를 포함해서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일부 젊은 유럽계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처음에 현지 사회에 어느 정도 통합되려고 했다."(40)


"벨푸어 선언은 부드럽고 기만적인 외교의 언어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데 찬성한다는 모호한 구절을 담았다. 이 선언으로 영국은 사실상 팔레스타인 전체에 유대 국가를 세워 주권을 확보하고 이민을 통제한다는 테오도어 헤르츨의 목표를 지지한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벨푸어는 압도적 다수의 아랍 주민들(당시 약 94퍼센트)에 대해서는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라고 애매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존재로 서술되었고, 확실히 한 민족이나 집단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67개 단어로 이루어진 선언문에는 〈팔레스타인인〉이나 〈아랍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압도적 다수의 주민들은 정치적·민족적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종교적 권리〉만을 약속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벨푸어는 당시 이 땅에 거주하는 주민의 6퍼센트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칭하면서 민족적 권리를 부여했다."(46-7)


# 벨푸어 선언(1917. 11. 2) :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이러한 목적을 신속하게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으며, 그로 인해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나 정치적 지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대중적 신화는 팔레스타인인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집단적 의식이 부재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정체성과 민족주의는 유대인의 민족 자결에 대한 터무니없는 반대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시온주의와 마찬가지로 여러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으며, 근대의 정치적 시온주의와 거의 정확히 동시에 나타났다.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에 기름을 부은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처럼, 시온주의의 위협 역시 이런 자극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여러 민족 정체성은 근대적이고 우연한 현상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의 상황에서 생겨난 소산이다.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시온주의가 원주민에게 이득을 준다는 헤르츨의 식민주의적 견해와 일맥상통하며, 벨푸어 선언과 그 후속 조치들로 그들의 민족적 권리와 민족의식을 삭제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55-6)


"1922년, 새롭게 구성된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발포하여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했다. 위임통치령은 밸푸어 선언을 원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령 문서는 〈일부 공동체〉에 대해서는 〈독립국가로서의 존재를 임시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국제연맹 규약 22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계속해서 문서에는 벨푸어 선언의 조항들을 지지한다는 국제적 약속이 제시되어 있다. 이 후속 문구에 분명하게 담긴 함의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 민족 한 집단에게만 민족적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중동의 다른 모든 위임통치령에서는 규약 22조가 전체 인구에 적용되어 결국 이 나라들에 일정한 형태의 독립이 허용된 것과 대비를 이룬다." "한 민족의 땅에 대한 권리를 뿌리째 뽑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땅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위임통치령 세 번째 문단에는, 오직 유대인만이 팔레스타인과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60)


"1937년 7월, 필 경의 지휘 아래 팔레스타인 소요 사태─1936년에 6개월간 진행된 총파업─를 조사하는 책임을 맡은 왕립위원회가 나라를 분리해서 영토의 약 17퍼센트에 작은 유대 국가를 형성하고 이 지역에서 200만이 넘는 아랍인을 추방할 것(추방expulsion 대신에 〈이동transfer〉이라는 완곡한 단어가 사용되었다)을 제안하자, 이런 개입의 실망스러운 결과가 드러났다. 이 계획에 따르면, 나라의 나머지는 계속 영국이 통치하거나 영국에 예속된 트랜스요르단의 아미르 압둘라에게 양도할 예정이었다. 팔레스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아무 변화도 없는 셈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팔레스타인인들은 민족적 실체나 집단적 권리가 전혀 없는 것처럼 대우를 받았다. 비록 팔레스타인 전체는 아니더라도, 팔레스타인인을 제거한다는 시온주의의 기본 목표가 충족되고, 팔레스타인 쪽이 열렬하게 바라는 자결권이라는 목표가 부정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봉기를 한층 더 전투적인 단계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73)


"숱한 희생이 벌어지고 반란이 잠깐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만 남았다. 영국의 야만적인 탄압과 수많은 지도자의 죽음과 유형,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방향을 잃고 분열되었고, 1939년 여름에 반란이 진압될 무렵에는 경제도 허약해졌다." "하지만 1939년 유럽에서 전운이 확대되는 가운데 영제국에 새롭게 제기된 중대한 전 지구적 도전이 아랍의 반란과 결합되어 런던 당국의 정책에 대대적인 변화가 생겼다. 앞서 시온주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던 입장이 바뀐 것이다." "제국의 핵심적인 전략적 이해의 측면에서 보자면, 영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한편 대반란Great Revolt을 강제로 진압하는 것에 대한 아랍 각국과 이슬람 세계의 분노를 다독이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특히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잔학 행위에 대해 추축국이 중동 지역에 선전 공세를 퍼붓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78-9)


"1939년 봄, 네빌 체임벌린 정부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인도 무슬림의 분노한 여론을 달래려는 시도로 백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의 전폭적 지지를 대폭 삭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유대인 이민 유입과 토지 판매를 엄격하게 제한할 것(아랍의 주요한 두 가지 요구였다)을 제안하였고, 5년 안에 대의 기관을 마련하고 10년 안에 자결권을 주겠다(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구였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백서를 발표했을 당시 체임벌린 정부는 임기가 몇 달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고, 체임벌린 후임으로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은 영국 정게에서 아마 가장 열렬한 시온주의자였을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도,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고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미국이 참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진정한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가운데 바야흐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참이었다. 이제 이 세계에서 영국은 기껏해야 이류 강대국일 뿐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이제 영국의 수중을 벗어날 터였다."(79-81)


2 두 번째 선전포고, 1947~1948


"전쟁 이후 연달아 일어난 두 가지 결정적인 사건은 팔레스타인인들 앞에 어떤 장애물이 놓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여러 아랍 정권들과의 관계는 이미 불안했다." "영국의 후원으로 아랍 6개국이 아랍연맹을 결성한 1945년 3월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회원국들이 아랍연맹의 창립 성명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고 팔레스타인 대표자에 대한 선택권을 계속 자신들이 갖기로 결정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쓰라린 실망감을 느꼈다." "더욱 원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1946년 구성된 영국-미국 조사위원회였다. 영국과 미국 정부가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긴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검토하기 위해 세운 기구였다.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유럽의 난민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미국과 시온주의가 선호하는 방안은 이 불운한 사람들이 곧바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는데(미국이나 영국이나 그들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사실상 1939년 백서의 취지를 부정하는 방안이었다."(96-7)


"주로 이라크의 누리 알사이드와 영국의 지원을 받는 그의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아랍청은 결국 다른 아랍 국가들을 소외시켰다. 특히 범아랍권의 지도부를 자처하는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소외시켰다. 양국 지도자, 그리고 시리아와 레바논의 지도자는 아랍청 창설이 이라크가 지역 차원에서 야심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아마도 정확하게─의심했다." "한편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최대한 넓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채 이 나라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놓고 시온주의자들 및 영국의 지지자들과 타협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쪽으로 옮겨 가자 국왕은 협정 체결에 대한 기대를 품고 비밀리에 유대인기구 지도자들과 거듭 회동했다." "따라서 이라크의 누리와 달리, 압둘라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팔레스타인의 독립 지도부가 필요 없었고, 팔레스타인의 외교 부서 역할을 할 아랍청 같은 기구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106-7)


"1947년 애틀리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새로 만들어진 유엔에 맡겼고, 유엔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해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SCOP를 만들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유엔을 지배하는 미국과 소련을 향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반면,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후 국제적 힘의 재조정은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의 활동과, 소수의 유대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제안한 다수 의견 보고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고서의 제안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의 56퍼센트가 유대인의 몫이었는데, 1937년 필위원회 분할안에서 제안한 유대 국가의 규모가 훨씬 작은 17퍼센트였던 것과 대비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 제181호가 통과된 것은 새로운 국제적 세력 균형이 반영된 결과였다.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넓은 유대 국가와 좁은 아랍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국제적인 분할체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111)


"나크바─1947년 말부터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인을 강제 이주, 추방하고 심지어 말살하려는 목적에서 행한 집단 학살 행위를 가리킨다─는 마치 열차 사고가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몇 달에 걸쳐서 펼쳐졌다. 1947년 11월 30일부터 영국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하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수립될 때까지의 첫 번째 단계에서 하가나Haganah와 이르군Irgun을 비롯한 시온주의 준군사 집단은 무장과 조직력이 형편없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을 도우러 온 아랍 지원병들을 잇따라 물리쳤다. 이 첫 단계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는 1948년 봄 플랜 달렛Plan Dalet이라고 명명된 전국 차원의 시온주의의 공세에서 정점에 달했다. 플랜 달렛은 4월과 5월 전반에 아랍의 양대 도시인 야파와 하이파, 그리고 서예루살렘의 아랍인 구역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랍 도시와 소읍, 마을을 정복하고 주민들을 쫓아내는 결과를 낳았다."(112-3)


"추방을 피해 이스라엘로 바뀐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을 수 있었던 16만 명 정도의 소수 팔레스타인인은 이제 그 국가의 국민이었다. 무엇보다도 새롭게 다수가 된 유대인을 위해 전력을 다한 이스라엘 정부는 이 남아 있는 팔레스타인인을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잠재적 제5열로 바라보았다. 1966년까지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은 엄격한 계엄령 아래서 살았고, 가진 땅을 대부분 빼앗겼다. 이스라엘 국가가 합법으로 간주한 수용을 거쳐 가로챈 이 땅은 경작 가능 지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는데, 유대인 정착촌이나 이스라엘토지공사에 양도되거나 유대민족기금에 통제권이 넘어갔다. 유대민족기금의 차별적 헌장에 따르면, 이런 토지는 유대인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자기 나라와 종교에서 상당한 다수의 지위에 익숙해져 있던 그들은 갑자기 적대적 환경에서 멸시받는 소수로 생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스스로를 절대 전체 국민의 국가로 정의하지 않은 유대 정치체의 피지배자가 되어야 했다."(126-7)


"아랍 국가들과 국제사회가 1948년의 재앙적 결과를 뒤집으려는 의지나 능력을 보이지 않자, 나크바 이후의 황량한 상황 속에서 팔레스타인의 행동주의가 여러 형태로 되살아났다. 소규모 집단들이 이스라엘에 맞서 무기를 집어들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현재 상태를 바로잡으려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시도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대에 대처하는 것 외에도 아랍의 난민 수용 국가, 특히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등의 정부와 대결해야 했다. 유대 국가에 비해 군사력이 크게 뒤지는 상황에서 이 나라들은 이웃에 대한 공격을 묵인하기를 대단히 꺼렸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운동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에도 그들은 일부 아랍 국가가 이런 운동을 자기들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게 활용하려는 시도를 물리쳐야 했다. 1964년 이집트의 요청에 따라 아랍연맹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창설한 것은 이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독립적 팔레스타인 행동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아랍 국가들이 이 운동을 통제하려는 가장 중요한 시도였다."(136-7)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 때문에 종종 이스라엘이 가자를 어떻게 표적으로 삼았는지가 가려졌다. 강대국이 직접 참여하는 국가 간 충돌이 더 많은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가자 지구는 1948년 이후 자기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이 벌이는 저항의 용광로였다. 파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창립한 지도자 대부분이 이 기다란 해안 지대의 비좁은 동네에서 등장했다. 또한 전투적인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은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을 그곳에서 끌어모았고, 나중에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에 맞서 가장 끈질기게 무장투쟁을 주창한 이슬람지하드와 하마스의 탄생지이자 요새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나크바로 겪은 충격과 굴욕에도 불구하고, 자기 땅을 빼앗긴 것을 묵인하지 않고 저항하자, 자국 문제에 정신이 팔린 채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의지나 각오가 전혀 없었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대결로 이끌려 들어갔고, 이 대결은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었다."(143-4)


3 세 번째 선전포고, 1967


"벨푸어 선언과 위임통치가 한 강대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인을 상대로 발표한 첫 번째 선전포고였고,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에 관한 유엔 결의안이 두 번째 선전포고였다면, 1967년 전쟁의 결과는 세 번째 선전포고─안보리 결의안 SC 242의 형태로─를 낳았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242조는 이스라엘의 영토 획득을 용인하고 있다. 결의안 문안은 대부분 영국 상임 대표 캐러돈 경이 작성했지만, 사실상 미국과 이스라엘의 견해를 압축한 내용으로 6월의 압도적인 패배 이후 아랍 각국과 그들의 후견인인 소련의 입지가 약화된 사정이 반영되었다. 결의안 제242호에는 〈전쟁을 통한 영토 획득을 용인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철수하기만 하면 아랍 국가들과 강화 조약을 맺고 안전한 국경을 확립할 수 있음이 언급되어 있었다.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직접 교섭하는 것을 꺼리는 상황에서 사실상 이 말은 이스라엘의 철군은 어떤 것이든 조건이 붙고 지연될 것임을 의미했다."(152, 156-7)


"게다가 결의안 제242호에는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공인된 안전한 국경의 창설과 연계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정하는 대로 안보 기준 충족을 위해 국경을 확장할 가능성을 허용한다는 조항이 실렸다. 핵무장을 갖춘 이 지역 강대국은 그 후 이 조항을 이례적으로 폭넓고 유연하게 해석해 왔다. 마지막으로, 결의안 제242호의 모호한 언어는 이스라엘이 방금 전에 점령한 영토를 계속 보유할 수 있는 또 다른 허점을 열어 주었다. 결의안의 영어 원문은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그 영토from 'the' territories occupied〉가 아니라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한다withdrawal from territories occupied〉고 규정한다." "그 후 반세기 동안 미국이 지원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점령지를 식민화할 수 있게 만든 이런 언어상의 허점을 한껏 활용했다. 실제로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의 경우에 수십 년간 간헐적으로 직간접적 교섭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전면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157)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결의안 제242호가 사실상 1949년의 휴전선(그 후 1967년 국경이나 그린라인이라고 불렸다)을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국경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로써 1948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대부분 지역을 정복한 것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194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핵심적 쟁점들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보상을 받을 권리가 무시되는 결과로 이어져 그들의 열망은 다시 타격을 받았다." "결의안 제242호는 이런 탁월한 날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점령당하고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2년이 지난 1969년에야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팔레스타인인 같은 건 없었고,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전에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유명한 선언을 했다. 그리하여 총리는 정착민-식민주의 기획에 특징적인 존재 부정을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원주민이라는 건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159)


"1950년대에 실지회복주의를 주창하며 생겨난 소규모 전투적 집단들을 창설한 것은 중간계급과 하층 중간계급의 젊은 급진주의자들로서 대부분은 셰이크 이즈 알딘 알카삼의 후예를 자처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사망해 1936년 반란을 촉발함으로써 여전히 영웅적인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기려지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1956년 이후에도 팔레스타인의 권리와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이런 시도는 두 가지 주요한 추세 속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하나는 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창설한 범아랍 조직으로 1967년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을 창설한 아랍민족주의자운동이 이끌었다. 나머지 하나는 1959년 쿠웨이트에서 공식 설립되어 1965년에 공개적으로 파타Fatah라는 이름을 밝힌 집단이 주도했다. 두 집단은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갔는데, 당시 최초의 지도자들은 대학생이나 최근에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었다."(166-7)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가까워서 학생과 식자층, 중간계급, 특히 좌파 정치에 이끌리는 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또한 난민촌에서 헌신적인 추종자들이 있었다. 인민전선의 급진적 메시지가 가장 고통을 받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강하게 공명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타는 공공연하게 팔레스타인 좌파를 표방하는 그룹과 비교할 때 정치적 입장에서 확실히 이데올로기와 무관했다. 창립 당시 파타는 아랍민족주의자운동이나 바트당 같은 아랍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들과, 공산주의, 좌파, 팔레스타인 같은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앞서 우선 사회 변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슬림형제단 같은 이슬람주의 단체 양쪽 모두에 대한 반발을 상징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직접,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파타의 호소,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폭넓은 입장이야말로 파타가 순식간에 최대의 정치 집단으로 부상할 수 있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170)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1967년 이후 외교와 선전에서 (제한적이나마) 잇따라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런 성공이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매번 여러 적수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이 여러 차례 항공기를 납치하고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세력이 폭력 사태를 일으키자, 하심 가문 정권과 파국적인 대결이 벌어졌다. 저항 운동 쪽에 승산이 없는 대결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에 직면하고 대중적 공감도 일부 상실한 저항 운동은 그해에 검은구월단 사건 속에서 암만에서 밀려났고, 1971년 봄에 요르단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요르단 와해 사태를 거치면서 저항 운동의 일부 요소들, 특히 팔레스타해방인민전선이 그 시점까지 유지하던 성공적인 역동성의 아우라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무모하게 적들을 도발하고, 의지처가 되는 나라들을 소외시키며, 결국 쫓겨나게 되는 저항 운동의 이런 양상은 11년 뒤 베이루트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되었다."(180-1)


"1970년대 초를 시작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성원들은 이런 압력─아랍 국가들이 점차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존재론적 차원이 아니라 국경을 놓고 국가들끼리 벌이는 대결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제한적 관점─에, 특히 소련의 촉구에 부응하여 이스라엘과 나란히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든다는 구상, 사실상 두 국가 해법을 내놓았다. 이 방식은 특히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1969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에서 떨어져 나온 조직이다)이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단체들과 함께 주창한 것으로, 파타 지도부도 조심스럽게 권장했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과 파타의 일부 간부들은 일찍부터 두 국가 해법에 저항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아라파트를 필두로 한 지도자들이 이 방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민주국가라는 최대주의적 목표와 여기에 담긴 혁명적 함의에서 벗어나 이스라엘과 나란히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좀 더 실용적인 목표로 나아가는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 과정의 시작이었다."(187)


"카터 시절 미국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권리와 교섭 참여를 거의 지지했지만, 양쪽 사이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멀어졌다. 캠프 데이비드와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조약은 미국이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가장 극단적인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신호였고, 이 제휴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베긴과 리쿠드당의 후임자들인 이츠하크 샤미르, 아리엘 샤론, 베냐민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나 주권 확보, 점령지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의 지배권 회복에 철저히 반대했다. 제에브 자보틴스키의 이데올로기적 상속자인 그들은 팔레스타인 전체가 오직 유대인의 땅이라고 믿었다. 〈현지 아랍인들〉에게 주어진 자치권은 땅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을 뿐이다." "향후 이뤄지는 교섭은 무한히 연장할 수 있는 과도기를 위한 자치 조건에 제한되었고, 주권, 국가 수립, 예루살렘, 난민의 운명, 팔레스타인의 토지와 물과 대기에 대한 관할권 등에 관한 논의는 죄다 배제되었다."(202-3)


4 네 번째 선전포고, 1982


"1982년 레바논 침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1948년 5월 15일 이래 아랍 각국 군대가 아니라 주로 팔레스타인인이 관여해서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팔레스타인 페다인은 1960년대 중반부터 줄곧 요르단의 카라메에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레바논 남부, 특히 1978년 리타니 작전에서, 그리고 1981년 여름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을 가로지르는 격렬한 포격전 등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대결했다. 하지만 존재 자체를 없애려는 거듭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정치적·군사적으로 레바논에서 굳건한 입지를 구축해 놓은 까닭에 비교적 제한된 성격의 군사 작전으로는 최소한의 영향만 미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대레바논 침공을 이끈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시리아 무장 세력을 레바논에서 축출하고 베이루트에 말 잘 듣는 동맹 정부를 만들어 그 나라의 상황을 바꾸기를 원했지만, 주요한 목표는 팔레스타인 자체였다."(209)


"원래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벌이는 활동은 공식적인 틀─1969년 채택된 카이로 협정─안에 제한되어 있었다. 이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 남부의 많은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통제하고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중무장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의 여러 지역에서 점차 지배권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는 세력이 되었다. 레바논의 보통 사람들은 내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렇게 억압적인 팔레스타인 세력이 더욱 강화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레바논에 세운 일종의 미니 국가는 궁극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군사 행동에 자극받은 이스라엘이 레바논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분노가 들끓었다. 이스라엘을 겨냥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공격은 종종 민간 목표물을 대상으로 삼았고,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대의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라도 진척시키는 데 가시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222)


"1982년 전쟁이 낳은 가장 중요한 지속적인 결과는 레바논에서 헤즈볼라가 부상한 것과 레바논 내전이 격화되고 장기화된 것이었다. 이 내전은 훨씬 더 복잡한 지역적 분쟁으로 비화했다. 1982년 침공은 여러 가지로 최초의 사건이었다. 1958년 미군이 잠깐 레바논에 파병된 이래 미국이 최초로 중동에 군사 개입한 사례였고, 이스라엘이 아랍 세계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강제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사례였다. 이 사건들 때문에 많은 레바논인과 팔레스타인인, 아랍인 사이에서 다시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훨씬 격렬한 반감이 생겨나면서 아랍-이스라엘 분쟁이 한층 악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이 1982년 전쟁을 개시하면서 내린 선택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결과였다." "또한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의 정교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베이루트에서 고통에 시달리는 민간인들의 끔찍한 이미지가 널리 퍼져 나갔고, 그 결과 세계 속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지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38-9)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하자 팔레스타인의 대의는 심각하게 약해진 듯 보였고, 샤론은 핵심 목표─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축출하는─를 전부 달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사태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다시 시작된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의 무게중심이 이웃 아랍 나라들로부터 점차 팔레스타인 내부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5년 뒤인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가 발발한 곳도 팔레스타인으로, 이스라엘과 세계의 여론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수십 년 전에 나크바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뼈아픈 패배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을 겨냥한 다면적인 전쟁에 맞서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일으켰다. 샤론과 베긴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물리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사기를 꺾음으로써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점령지를 흡수하기 위해 침공에 착수했지만, 오히려 팔레스타인인들이 저항을 자극하고 팔레스타인 내부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40)


"미국 입장에서 보면, 중동 외교를 독점하려 하고 이스라엘의 야심을 부추긴 것은 자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벌어진 상황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레바논의 혼란 상태에서 자라난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적이 되었다. 헤즈볼라의 부상을 검토하면서, 이 운동을 창설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표적을 겨냥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 많은 젊은이들이 1982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나란히 싸운 이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젊은이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투사들이 떠난 뒤에 남아서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인들과 나란히 자신들과 같은 시아파 수백 명이 학살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국 대사관 폭발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 병영에서 목숨을 잃은 해병대원들, 그리고 베이루트에 납치되거나 암살당한 많은 미국인들은 대개 나중에 헤즈볼라가 된 그룹들의 공격에 희생되었는데, 미국과 이스라엘 점령자들이 공모한 대가를 그들이 치른 셈이다."(241-2)


5 다섯 번째 선전포고, 1987~1995


"이른바 1차 인티파다는 점령지 전역에서 자생적으로 폭발했다. 이스라엘 군용 차량이 가자 지구의 자발랴 난민촌에서 트럭과 충돌해서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봉기는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가자 지구가 용광로였고 이후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데 가장 애를 먹은 지역으로 남았다. 인티파다를 거치면서 마을과 소읍, 도시와 난민촌에서 광범위한 지역 조직이 생겨났고, 비공개 조직인 통일민족지도부가 이끌게 되었다. 인티파다 시기에 결성된 유연하고 비밀스러운 풀뿌리 네트워크들은 군사 점령 당국이 진압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인티파다 시기 내내 팔레스타인의 젊은 시위대가 병력 수송 장갑차와 탱크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 군대를 상대로 시가전을 벌이는 광경이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장면에 주목했다. 영원한 피해자라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팔레스타인의 다윗과 싸우는 골리앗으로 바뀌었다."(246-7)


"인티파다는 누적된 좌절감을 바탕으로 아래에서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난 저항 운동이었고,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의 공식적 정치 지도부와 아무런 연계가 없었다. 1936~1939년 반란과 마찬가지로, 인티파다가 장기간 광범위하게 지속된 것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누렸다는 증거다. 봉기는 또한 유연하고 혁신적이었다. 활동가들도 남성과 여성, 엘리트 전문직과 사업가, 농민, 마을 사람, 도시 빈민, 학생, 자영업자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집단을 아울렀다." "1936~1939년 반란과 달리, 인티파다는 폭넓은 전략적 전망과 통일된 지도부에 따라 진행되었고,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을 악화시키지 않았다. 인티파다가─1960년대와 1970년대의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과 대조적으로─팔레스타인을 단합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고 대체로 총기와 폭발물을 사용하지 않은 덕분에 국제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서 결국 이스라엘과 세계 여론에 심대하고 오래가는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252-3)


"1982년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패배한 뒤, 이 조직은 튀니스를 비롯한 아랍 각국 수도에서 별 성과 없는 망명 활동에 갇혀 힘을 잃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풀뿌리가 주도하는 봉기가 발발하자 깜짝 놀라면서 곧바로 이 봉기를 조직으로 흡수하고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문제는 튀니스에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자들이 근시안적 시각과 제한된 전략적 전망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지도자들 대다수는 이스라엘의 지배가 20년이 흐른 뒤 점령 체제의 본성이나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처한 복잡한 사회적·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점차 인티파다를 튀니스에서 원격 통제 방식으로 관리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침을 발표하고 상황을 관리하면서 애초에 봉기를 시작해서 성공적으로 이끈 이들의 견해와 우선순위를 종종 무시했다."(254-5)


"아라파트는 하페즈 알아사드의 고압적인 시리아 정권에 오래전부터 격한 반감을 품고 있었고, 반사적으로 균형추를 모색했다. 이집트가 한때 아사드 정권이 행사하는 압력에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했지만, 사다트가 독자적으로 이스라엘과 평화를 이룬 뒤에는 이제 그런 역할이 가능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가능한 다른 균형추는 필연적으로 시리아의 경쟁자인 이라크였다." "이렇게 의존하게 되자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라크의 정책에 순응하라는 강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라크 정권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다잡아 두기 위해 걸핏하면 응징했다." "무지몽매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서 정보부장 아부 이야드만이 예외였다. 그는 걸프전을 앞두고 이라크를 지지한다는 아라파트의 결정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아부 이야드가 내다본 대로 상황이 펼쳐졌지만,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공세가 시작되기 3일 전인 1991년 1월 14일 튀니스에서 암살당했다."(265-8)


"아라파트가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 결과가 나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웨이트가 해방된 뒤 팔레스타인인 수십만 명이 쫓겨나는 비극이 시발점이었다. 페르시아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한 모든 재정 지원을 중단했고, 1982년 베이루트에서 철수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부를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던 나라들까지 일부 포함해서 많은 아랍 나라가 이 기구를 추방했다. 그리하여 1990~1991년 걸프전 이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아라파트와 그의 동지들이 올라탄 빙산은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고, 그들은 단단한 땅에 뛰어내리고자 필사적으로 애썼다. 공교롭게도 이런 위기 상황과 동시에 미국은 이라크에서 승리를 거두고 소련이 종언을 고하면서 의기양양한 순간을 누리고 있었다." "1991년 10월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평화회담이 차질을 빚은 것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애초에 쿠웨이트에 대해 심각하게 오산을 한 탓이 컸다."(268-9)


"샤미르 정부 대신 노동당이 주도하는 연정이 들어선 뒤, 총리가 된 라빈은 시리아 경로와 팔레스타인 경로 가운데 무엇을 우선시할지 망설였다. 언제나 전략가였던 그는 시리아와 먼저 협상을 타결하면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지를 약화시켜서 그들과의 교섭이 용이해지는 이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양쪽은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갈릴리호 동쪽 연안에 있는 몇 평방마일의 전략적 땅의 처분을 둘러싸고 불거진 견해차가 주된 요인이었다. 골란고원에서 조금이라도 철수를 하는 것에 대해 이스라엘의 몇몇 집단(과 미국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스라엘에서 정권이 교체되어도 실질적인 입장 변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팔레스타인 대표단 내부와 튀니스에서는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1995년 10월, 크네셋에서 라빈은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조직체〉가 만들어지더라도 〈국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지 않아 그는 암살당했다."(279-81)


"1993년 6월, 오슬로에서 양측이 서명한 내용은 점령지의 한쪽 땅에서 아주 제한된 형태로 자치를 하고 땅과 물, 경계선, 그 밖에도 많은 부분에 대해 통제권이 없는 것이었다. 이 협정과 이후 여기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협정들은 오늘날까지 약간의 수정을 거친 채 시행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온갖 특권을 유지하면서 사실상 땅과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셈이다. 주권의 속성들도 대부분 이스라엘 손에 있다."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아예 합의를 이루지 못하더라고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오슬로 합의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다. 어쨌든 점령은 계속되었을 테지만, 팔레스타인의 자치라는 포장이 없고 이스라엘이 수백만 명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재정적 부담을 더는 일이 없으며, 이스라엘 식민 정착민들이 점점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군사 정권 아래 사는 불만에 찬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속하는 데 팔레스타인 자치당국PA이 이스라엘을 돕는 〈안보 협력〉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289-90)


"1995년 양쪽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관한 잠정 협정, 일명 오슬로 협정Ⅱ에 합의하면서 오슬로 협정Ⅰ의 파괴적인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 협정으로 두 곳이 악명 높은 누더기 지역들(A, B, C)로 쪼개졌고, 전체의 60퍼센트가 넘는 C지역이 완전하고 직접적이고 제한받지 않는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은 18퍼센트에 해당하는 A지역의 행정·치안권, 22퍼센트인 B지역의 행정권을 부여받은 한편, B지역의 치안권은 여전히 이스라엘 손에 있었다. A지역과 B지역을 합치면 면적으로는 40퍼센트였지만 팔레스타인 인구로 따지면 87퍼센트 정도였다. C지역은 한 곳을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 정착촌이었다. 이스라엘은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의 진입과 출입에 대해 계속 전면적인 권한을 가졌고 인구 등록의 배타적인 권리도 갖고 있었다." "마침내 요르단강 서안은 수십 곳의 군사 검문소와 수백 마일에 해당하는 장벽과 전기 울타리 때문에 점점이 박힌 섬들처럼 고립되었다."(292-3)


"오슬로 협정 이후 사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상황은 흔히 거의 동등한 세력, 즉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이라는 준국가의 충돌이라고 그릇되게 묘사되어 왔다. 이런 묘사는 변함없이 불평등한 식민지적 현실을 가린다." "오슬로 협정Ⅰ은 또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점령의 하청업자로 끌어들이는 결정을 수반했다. 라빈이 아라파트와 끌어낸 안보 합의의 실제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고, 1993년 6월 나와 동료들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이 합의에 관해 발표했다. 핵심은 언제나 이스라엘, 즉 점령과 정착민을 위한 안보였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복종시키는 비용과 책임은 팔레스타인 쪽에 떠넘겨졌다." "오슬로 협정은 사실 100년 묵은 시온주의 운동의 기획을 진척시키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국제적 승인 아래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발표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47년이나 1967년과 달리,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적들과 공모하는 쪽을 선택했다."(295-7)


6 여섯 번째 선전포고, 2000~2014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새롭게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인 하마스 입장에서 보면, 오슬로가 팔레스타인 쪽 지지자들이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한다는 증거는 오히려 이익이 되었다.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 초기에 창설된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가 발전한 조직이었다. 점령 당국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을 분열시키는 데 유용했기 때문에, 하마스를 너그럽게 방치했고 이들은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인티파다 시기에 하마스는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할 것을 고집하면서 통합민족사령부에 합류하지 않았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보다 전투적인 이슬람주의 대안 세력으로 자신을 홍보하면서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가 1988년 독립 선언에서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외교로 전환한 것을 비난했다. 그리고 무력 사용을 통해서만 팔레스타인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에 대한 권리를 다시 주장했다."(302-3)


"오슬로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이 악화되고, 국가 수립의 가능성이 점점 멀어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하마스의 경쟁이 격화되어 가다가 결국 2000년 9월 2차 인티파다로 분출했다. 인티파다가 불붙는 데는 성냥불 하나면 충분했다. 아리엘 샤론이 보안 요원 수백 명에 둘러싸여 하람알샤리프를 도발적으로 방문한 것이 성냥불 역할을 했다. 하람─유대인들이 성전산Temple Mount 이라고 부르는 곳─은 최소한 1929년의 유혈 사태 이래로 양쪽 모두에 민족주의적·종교적 열정이 집중되는 장소였다. 당시 수정주의적 시온주의 극단론자들이 이웃한 서쪽 벽Western Wall에서 깃발을 흔들며 떠들썩한 시위를 벌이자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나 양쪽에서 수백 명씩 사상자가 발생했다." "2차 인티파다 시기에 사망한 이스라엘인의 대다수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내에서 벌인 자살 폭탄 공격의 민간인 피해자였으며, 전체 사망자의 3분의 1에 약간 못 미치는 332명은 이스라엘 군경이었다."(306-8)


"2차 인티파다의 끔찍한 폭력 때문에 1982년 이래 팔레스타인인들이 1차 인티파다와 평화교섭을 통해 쌓아 온 긍정적인 이미지가 지워졌다. 연이어 벌어지는 자살 폭탄 공격의 소름끼치는 광경이 세계 각지로 전송되자 (그리고 이런 보도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지는 훨씬 더 거대한 폭력이 가려지자), 이스라엘은 이제 압제자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으로 괴롭히는 세력의 희생자라는 익숙한 역할로 돌아갔다." "민간인을 겨냥한 이런 공격이 치명타가 되어 이스라엘 사회를 와해시킬 수 있다는 사고도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이론은 이스라엘이 뿌리부터 분열되어 있는 〈인위적인〉 정치 체제라는, 널리 퍼져 있지만 치명적 결함이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한다. 이 분석은 한 세기가 넘도록 명명백백한 성공을 거둔 시온주의의 민족국가 건설 노력뿐만 아니라 많은 내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회가 가진 응집력을 무시한 것이다."(310-2)


"하마스와 파타의 분열은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잠재적인 재앙이었고, 이런 우려의 정서는 여론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006년 5월에 파타, 하마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이슬람지하드 등 이스라엘 교도소에 갇혀 있는 주요 조직의 지도자 다섯 명이 〈수감자 문서〉를 발표했다. 두 국가 해법을 토대로 삼은 새로운 강령에 기반해서 정파 분열을 끝내자고 호소하는 문서였다." "연립정부를 구성하려는 이런 노력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두 나라는 하마스가 자치당국 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서구와 아랍의 재정 지원자들이 파타에게 하마스를 멀리하라고 가한 압력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에 속한 파타의 베테랑들에게 톡톡히 효과를 발휘했다. 애당초 그들은 라말라의 금박 거품 속에서 누리는 물질적 혜택이나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훨씬 강력한 적에 맞서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위험에 내맡기기보다는 팔레스타인 정치 체제가 분열로 무너지는 쪽을 선호했다."(316-8)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장악하자 이스라엘은 전면적인 포위에 나섰다. 가자 지구에 들어오는 물자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고, 정기적인 수출은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연료 공급이 차단되었고, 가자 출입은 극히 드물게 허용되었다. 가자는 사실상 지붕 뚫린 감옥이 되었다. 2018년에 이르면 200만 팔레스타인인 가운데 최소한 53퍼센트가 빈곤 상태에서 살았고, 실업률은 무려 52퍼센트로, 청년과 여성은 훨씬 높은 수치였다. 국제사회가 하마스의 선거 승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시작된 사태는 팔레스타인의 파국적인 분열과 가자 봉쇄로 이어졌다. 이런 사태의 연속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새로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앞으로 벌어질 공공연한 전쟁을 국제적으로 은폐하는 가림막을 제공했다." "세 차례의 대규모 공격(2008, 2012, 2014년)에서 나타난 43:1이라는 일방적인 사상자 비율과, 이스라엘 사망자의 대부분이 군인인 반면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대다수가 민간인이라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다."(319)


"팔레스타인 문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이 양보할 수밖에 없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화해에 관한 한, 미국의 주요한 전략적·경제적 이해가 전혀 없어 보이고, 또한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반대를 상쇄할 아무런 수단이 없는 듯하다. 트루먼부터 도널드 트럼프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은 이런 반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기를 원치 않았고, 따라서 대체로 이스라엘이 진행 속도를 정하고 심지어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인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미국의 입장까지 결정하도록 놔두었다." "게다가 중동은 오랫동안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집중된 독재 정권의 통치를 받아 왔다. 이런 비민주적 정권들은 역사적으로 방위, 항공, 석유, 금융, 부동산 산업을 지원하는 미국을 비롯한 소중한 후원자들에게 영합했다. 그들은 대체로 자국의 친팔레스타인 여론을 무시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식민화를 지원하는 미국이 어떤 역풍도 맞지 않도록 도와주었다."(332)


결론


"수십 년간 시온주의자들은 종종 국가의 독립 선언을 언급해 가며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이면서 민주국가〉일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고 주장했다. 이 정식화에 내재한 모순들이 한층 더 분명해지자 이스라엘의 일부 지도자들은 만약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유대 국가가 우선이라고 인정했다(실제로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2018년 7월, 크네셋은 헌법에 그런 선택을 명문화하면서 〈유대 민족국가에 관한 기본법〉을 채택했다. 오로지 유대인에게만 민족 자결권을 부여하고 아랍어의 지위를 격하하며, 유대인 정착촌을 다른 요구보다 우선시하는 〈민족적 가치〉로 선언함으로써 이스라엘 시민들 사이에 법적 불평등을 제도화한 법이다. 유대인의 우월성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면서 이 법의 발의한 전 법무장과 아옐레트 샤케드는 법안이 표결에 부쳐지기 몇 달 전에 솔직하게 이런 주장을 펼쳤다. 「유대 국가라는 이스라엘 국가의 성격을 확고히 유지해야 하는 장소들이 있는데, 때로는 이를 위해 평등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350)


"상황이나 시대가 달랐다면, 18세기나 19세기라면, 원주민을 몰아내는 게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이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데 대해 오랫동안 저항한 사실을 보면,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말처럼 시온주의 운동은 〈너무 늦게 도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특유의 분리주의 기획을 이미 앞서 나가고 있는 세계에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세워지면서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력한 민족운동과 번성하는 새로운 민족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원주민을 완전히 밀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시온주의는 최종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정착민-식민주의와 원주민의 대결은 세 가지 결과 가운데 하나로 끝났을 뿐이다. 북아메리카에서처럼 토착민이 제거되거나 완전히 정복되는 경우, 극히 드물지만 알제리에서처럼 식민주의가 패배하고 쫓겨나는 경우,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아일랜드에서처럼 타협과 화해의 맥락에서 식민주의의 패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343-4)


"이스라엘이 자신의 기획을 지속하면서 누려 온 이점은 대다수 미국인과 많은 유럽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대결이 기본적으로 식민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들 눈에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민족국가로 보인다. 비타협적이고 종종 반유대적인 무슬림들(많은 이들은 기독교인이 있든 말든 팔레스타인인을 무슬림으로 뭉뚱그린다)의 비이성적인 적대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이런 이미지가 확산된 것이야말로 시온주의가 거둔 위대한 업적이며 시온주의가 살아남은 비결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시온주의가 성공을 거둔 한 가지 이유는 〈관념과 재현, 언어와 이미지가 문제가 되는 국제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탈식민적 미래는 이런 잘못된 생각을 무너뜨리고 분쟁의 진정한 성격을 분명히 드러낼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3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2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3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 지음, 박수민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론


1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종종 승전국은 패전국에 보상금(indemnity)을 부과했다. 가까운 사례로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뒤 신생국가인 독일이 프랑스에 보상금을 부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1차대전 당시 대부분의 전투와 그에 따른 파괴는 독일 바깥에서 벌어졌다. 따라서 1919년 파리 강화회의의 강화조약 작성자들은 배상금(repa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뒤이은 협상과 논의에서 패배에 따른 벌금을 내는 대신에 독일은 자국이 입힌 피해에 대한 복구비를 지불하게 되었다." "독일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기 위해 1923년 고의적으로 인플레이션을 통해 화폐 가치를 훼손했고, 1931~32년에는 급격한 디플레이션에 의지했다. 그에 따라 독일은 극히 적은 배상금을 지불했다. 승전국은 복구비를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했고, 국력을 더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독일 내부에서는 정부에 대한 엄청난 불만과 국가사회주의자가 지지하는 다른 형태의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22)


"1차대전에서 패배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수 군인과 일부 정치 지도자들은 독일이 전선에서 진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비롯한 이른바 체제전복 세력들에 의해 등뒤에서 칼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이 초래한 패배의 수혜자였던 이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새로운 시스템에는 다수 정당으로 인한 국론 분열도 설 땅이 없다.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서는 유일 정당의 단일한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가 승리를 보장할 것이다. 이런 메시지로 차츰 지지를 받은 정당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국가사회주의당이었다." "히틀러는 독일이 미래로 가는 길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잃은 자투리땅을 되찾는 것, 자신이 '그렌츠폴리티커(Grenzpolitiker)' 즉 '국경정치인'이라고 부른 이들이 옹호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라움폴리티커(Rarumpolitiker)' 즉 '공간정치인'이 요구한 것처럼 거대한 '레벤스라움(Lebensraum)' 즉 '생활공간'을 확보하는 전쟁에 달렸다고 주장했다."23-4)


2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여러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독일 공군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기갑부대가 동원된 작전은 적진을 신속하게 돌파해 진격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폴란드 특유의 지형과 열악한 도로 및 비행장 탓에 군용 장비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이것은 독일군 수뇌부가 폴란드 침공을 준비할 때 고려하지 못한 점이었다. 독일군은 야포 운반을 비롯해 부상자 운송까지 각종 수송을 말에 크게 의존했지만,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독일 육군의 기계화를 강조하는 선전 영화 때문에 이런 상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공격 전 독일군에는 폴란드의 성직자와 권력 집단 대부분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최종적으로는 전체 폴란드 인구를 독일인 이주자로 대체할 예정이어서, 저항 세력을 조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가능하면 빨리 제거해야 했다. 독일군이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일제 검거 작전을 시작하면서 어마어마한 수의 폴란드 국민과 상당수 유대인이 살해당했다."(39-41)


"독일군의 해상 작전을 지원한 스탈린은, 독일이 우선은 유럽 대륙 북부, 다음에는 서부, 뒤이어 남부에서 연합군을 몰아내는 것을 지원하는 활동이 결국 동부에서 소련이 홀로 독일을 상대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지원으로 침몰한 연합국 선박을 소련이 독일군의 공격을 받은 뒤 바다에서 들어올려 보급품 수송에 이용할 수 없을 것임을 알지 못했다. 결국 스탈린은 독일로부터 일부 해군 장비와 건조가 완료되지 않은 순양함을 얻는 대신에 독일 해군이 무르만스크항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 또한 무르만스크 서쪽 북극해에 해군 기지 하나를 제공했으며, 독일군 보조순양함이 태평양에 진입해서 연합국 선박을 격침시키도록 시베리아 북쪽 항로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독일군의 전쟁 활동에서 더 중요한 것은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철도 운행이 중단될 때까지 석유와 비철금속, 고무를 비롯한 중요 물자를 동아시아에서 철도를 이용해 공급하는 일이었다."(45)


3 서부 전선: 1940년


"프랑스 정부는 1차대전 때처럼 남서부 항구 도시인 보르도로 소재지를 옮겼다. 필리프 페탱 원수와 피에르 라발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프랑스 해군을 동원해 식민지 제국을 기반으로 싸움을 계속하기보다는 전쟁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스페인을 통해 독일에 휴전 제안을 했다." "히틀러는 프랑스에 관한 무솔리니의 요구를 거부하고 프랑스의 모든 해협과 대서양 연안을 포함한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일부 지역만 임시로 페탱의 통솔 아래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었다. 페탱은 독일이 장악한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독일은 새 프랑스 정권과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페탱은 그런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1940년 6월 24일 밤 독일-프랑스 및 이탈리아-프랑스 휴전 협정이 발효되었다. 100만 명이 넘는 프랑스 병력이 독일에 포로로 잡혔다. 소수의 프랑스인이 당시 갓 진급한 샤를 드골 장군의 '자유프랑스운동' 활동에 합류했다."(66-7)


"독일의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가 히틀러로 하여금 1941년 영국 침공을 미루게 했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1940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미루게 했을 것이다. 대규모 독일군 병력이 서부에서 독일 동부와 이미 점령된 폴란드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장비는 수리하고 추가로 확보해야 했다. 서부 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조치하고 항공기, 전차를 비롯한 무기도 교체하거나 수리해야 했다.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고 동쪽으로 진격할 군대에 물자를 공급해야 할 동부 지역에서는 운송 및 저장 시설도 꼭 개선해야 했다." "1940년 8월 독일의 이같은 준비에 따른 외교적 입장도 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쳤다. 독일은 핀란드에 대한 정책을 수정했다. 이제는 핀란드를 흡수하는 대신에 소련 공격 때의 지원을 기대했다. 독일은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의 영토 분쟁도 해결했다. 그 결과 루마니아의 영토를 보장하고 독일군을 파병했으며, 대신에 루마니아가 소련 침공에 참여할 것을 기대했다."(73-4)


"한편, 롬멜은 3월 말에 리비아를 공격해서 서둘러 영국군을 이집트로 후퇴시켰다. 4월에 이라크에서 일어난 친추축국 반란은 주로 인도에 주둔하는 영국군에 의해 5월에 진압되었다." "독일이 이라크의 반란 세력에 제공할 수 있는 작은 지원은 비시 정부가 독일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프랑스 위임통치령인 시리아를 통해 제공되었다. 이 일 때문에 영국군은 6월 8일 시리아를 침공했다." "작전상 곧이어 진행할 소련 침공에 집중하던 독일군은 제대로 된 지원을 할 수 없었다. 독일군의 계획상 중동 지역 장악은 소련을 침공한 뒤에 진행할 예정이었다. 영국은 이 지역에 대한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가 임박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시리아를 드골에게 넘겼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국군의 승리가 가져온 중요한 효과는 소련으로 가는 남부 보급로가 된 지역이 연합국의 손에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남쪽에서 캅카스를 위협하는 추축국의 기지가 되었을 터였다."(82-3)


4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의 소련 침공


"독일이 소련 침공 계획을 수립하던 1940년 여름과 가을, 그리고 1941년 초에 독일군 수뇌부의 전쟁 계획은 여러 가지 가정을 기반으로 했는데 그 대부분이 오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1939년에서 1940년 사이의 겨울에 핀란드군을 상대로 보여준 소련군의 실망스러운 전투력은, 소련군의 대규모 병력이 악조건 속에서 싸움을 지속했을 뿐 아니라 독일과 그 동맹이 상대할, 이전에는 과소평가된 소련군 전력이 이제는 한층 강력해진 사실을 가렸다." "독일군은 많지도 않고 대체로 상태가 좋지 않은,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작전에 필요할지도 모르는 온갖 종류의 기갑차량이나 트럭을 위한 예비 부품과 수리 장비 같은 보급 문제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소련을 조기에 제압한 뒤 중동으로 진출할 생각이어서 보충용 전차는 소련군을 물리친 뒤에야 동부에 있는 부대에 보낼 예정이었고, 따라서 이런 전차는 사막용 위장 칠이 되어 있었다."(86-7)


"독일군이 진격하고 점령하던 처음 몇 개월간 독일이 취한 정책의 주요 특징은 해당 지역 소련 주민들에게 아주 명확하고 중요해졌다. 그런 사실은 소문으로 돌거나 여러 수단을 통해 전달되어 다른 지역의 소련 국민들에게도 똑같이 분명해졌다. 독일군은 소련 국민을 대량으로 살육했다. 전쟁 포로를 조직적으로 굶겨 죽였고, 병원과 정신 진료 기관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졌다. 포로에게 음식과 물을 주는 주민도 총살했다. 소련 국민들은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는 점을 즉각 상기했다." "주민들이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든지 상관없이 대개는 자신이 다음 차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42년 봄 개전 첫 7개월 동안 200만 명이 넘는 소련군 전쟁포로가 살해되거나 독일측에 수감된 채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그것은 하루 평균 1만 명에 달하는 수치였다." "독일은 스탈린을 혐오스럽고 두려운 독재자에서 인자한 보호자이자 소련인들의 구원자로 바꿔놓았다."(96-8)


5 일본, 중국과의 전쟁을 확대하다


"1941년 7월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남부를 점령했다. 이것은 남태평양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있는 네덜란드·영국·미국 영토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조치로, (역설적으로) 중국과의 전쟁에 집중하는 것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토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말레이반도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필리핀을 비롯한 태평양 내 미국령 섬을 공격할 세부적인 준비도 진행되었다. 도쿄의 일본 지휘부는 동남아시아에서 빼앗은 유전이나 광산, 고무 농장에서 나온 자원을 일본 본토로 옮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땅을 차지하는 것일 뿐, 물자는 타국에서 빌린 배의 도움 없이 일본 선박으로만 본토로 옮겨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일본이 싸움을 시작할 시점에 매우 중요한 점은 자국의 제한된 선박 운송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거나 잠수함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진지한 준비가 없었다는 사실이다."(111)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중단시켰고, 8월의 과달카날에서는 미군이 반격할 길을 열었다." "다만 전반적인 전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실은 일본군의 진격은 비록 중단되었지만 미국이 '유럽 우선' 전략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는 대신에 작전 가능한 전력 다수를 새로 동원해 1942년 내내 그리고 1943년 초반 몇 개월까지 태평양 전역에 투입시킨 점이다. 이 때문에 지중해와 유럽 전역에서 미군의 작전이 지연되었다. 하지만 추축군은 작전 조율에 실패함으로써 미군의 이런 상황을 활용할 수 없었다. 일본이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전투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패한 사실을 일본인들이 미완성 상태의 독일 항공모함 그라프체펠린을 구입해 태평양에 투입하기를 바랐을 때에야 독일이 비로소 알아차린 점은 양국 간 조율의 실패를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된 통신 활동을 감청한 미국은 독일이 일본의 요청을 거부한 사실에 실망했을 것이다."(125)


6 전세 역전: 1942년 가을~1944년 봄


"1943년 7월 5일 독일은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소련군을 괴멸시키고 동부 전선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치타델 작전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며칠간 전선 양 부분에서 격전을 벌인 뒤 앞으로 치고나가 소련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지만 여전히 돌파하지는 못했다. 사상자 수에서 독일군은 비록 소련군에 비해 적었지만 손실된 전력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의미 있는 돌파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작전상 큰 실패를 뜻했다. 독일군이 쿠르스크 돌출부를 공격한 뒤 실행된 소련군의 오룔 지역 공세뿐 아니라 서방 연합군의 시칠리아섬 상륙 소식 때문에 독일군의 공세 종료 시점은 앞당겨졌다. 이때부터 소련군이 주도권을 쥐었고,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이 독일 본토와 지중해에 분산되어 전력이 약해진 전장에서 제공권을 장악하며 유리한 상황을 활용했다. 소련군의 일련의 대규모 공세로 중부 전선의 독일군은 후퇴해 우크라이나까지 밀려났다. 그해 말에는 레닌그라드 포위도 뚫렸다."(135-7)


"1942~43년에 영미 양국은 독일과 독일이 장악한 유럽에 대한 공습을 대폭 늘렸다." "독일이 대공 방어를 위해 자원을 전용한 사실은 1943년 가을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한 공중전에서 전세를 역전시킬지도 몰랐다. 대공포와 더불어 독일군의 전투기 다수는 공격해 오는 폭격기에 점점 더 큰 손실을 입혔다. 손실률이 높은 수준에 이르자 연합군은 작전을 바꿔야 했다. 서유럽에서 완벽한 제공권 장악은 독일의 영국 침공만큼이나 중요한 연합국의 서유럽 공략의 필요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폭격기가 목표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전투기가 호위할 필요성이 F-51 머스탱 전투기의 성공적인 역할과 1944년 2~3월 대규모 공중전까지 이어진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후 유럽의 전황은 두 가지 사실에 큰 영향을 받았다. 우선은 독일이 1943년 6월 바다에서 패배를 뒤엎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연합국 공군이 그해 가을 직면했었던 문제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142-3)


"모든 전역에서 연합국이 전세를 뒤집은 확실한 표식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전쟁 초기에 장악했다가 그때껏 유지하던 지역에서 저항 운동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뿐 아니라 서유럽과 동남부 유럽이 그런 지역이었다." "전세의 확실한 전환은 그때까지 중립을 유지하던 일부 국가의 행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터키는 독일로의 크롬 반출을 줄이고 1945년 2월에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포르투갈은 대서양 전투에서 연합국이 아조레스제도를 이용하는 상황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전세 변화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연합국이 적어도 각국의 활동을 조정하려는 의지였다. 회담에서, 그리고 외교적이고 군사적 임무에서 각국은 잦은 논쟁과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했다." "반면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전력을 조율하거나 동맹국과 정보를 공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연합국은 때때로 비밀 정보까지 공유했지만, 추축국은 그러지 않았다."(151-2)


7 각국의 국내 상황과 기술·의료 분야의 발달


"폴란드는 전쟁으로 인해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나라였다. 독일은 세계 곳곳에 있는 유대인을 모조리 죽이기로 결정했는데, 그에 따라 300만 명이 넘는 폴란드 유대인이 살해당했고, 결국 숨거나 추방당한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소련은 많은 유대인을 그냥 추방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가 죽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중앙아시아로 쫓겨났기 때문에 독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독일은 폴란드에서 그리스도교인을 완전히 제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독일군이 쫓겨나기 전, 폴란드 그리스도교인 약 300만 명이 이런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결국 이 지역에는 독일계 이주민만 거주하게 되었다. 반면에 소련은 그리스도교든 유대교든 상관없이 모든 폴란드인을 충실한 스탈린 공산주의자로 바꾸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수십만 명이 죽거나 추방되는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조치를 1939~41년에 시작했고, 1044~45년 독일군을 내쫓은 뒤 재개했다."(156-7)


"소련도 전쟁으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소련인 2500만 명이 살해되거나 질병과 기아로 사망했다. 국내 소수민족 수백만 명이 침략자에게 부역했거나 부역했을 것이라는 의혹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소련 정권이 국민 단합을 위해 전쟁 기간에 허용한 일시적인 통제 완화는 확대되기보다는 철회될 터였지만, 국제 관계에서 소련이 얻은 새로운 위상에 의해 국민 다수에게는 전반적으로 상쇄되었다. 소련인들에게는 엄청난 경제적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극심한 고난을 겪은 고국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정부 기관에서 일하던 이들은 이전 전쟁에서 러시아가 처했던 운명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 데서 어떤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영토를 잃기는커녕 얻었고, 유럽의 이웃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지 않고 동유럽과 남동 유럽을 장악했다. 게다가 1905년 일본에 빼앗긴 동아시아의 일부 영토도 되찾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거나 신경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165-6)


8 연합국의 승리: 1944~45년


"1944년 12월 중순에 마지막 예비전력을 동원해 아르덴에서 미군을 공격했다. 벨기에 북부 앤트워프(안트베르펜)의 주요 항구를 탈환하는 가운데 미국 측이 대규모 패배의 충격으로 국내 전선이 무너지면서 유럽 전쟁에서 발을 빼길 기대한 작전이었다. 또한 독일은 영국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나고 그에 따라 동부 전선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수 있기를 바랐다. 벌지 전투로 알려진 독일군의 공세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고 일시적으로 미군을 후퇴시켰다. 하지만 미군은 버텼고, 독일군이 병력과 장비를 크게 잃으면서 전세는 대패로 뒤바뀌었다. 1945년 2월 서방 연합군은 대공세를 재개했는데, 독일군이 라인강 서안에 집중하면서 병력 다수를 잃자 연합군은 곧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장애물을 넘어 독일로 향했다."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자 권력을 넘겨받은 되니츠 제독은 5월 8일 무조건 항복을 명령했다. 사소한 예외도 있었지만 독일의 모든 육해공군 부대는 항복 명령에 따랐다."(182-3)


"일본 수뇌부는 미군의 대규모 공습에도 꿈쩍하지 않았지만, 두 번의 핵공격이 벌어지자 어전회의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내부 동요의 가능성과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 가능성을 우려하는 조언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히로히토 일왕은 직접 항복 지시를 내렸다." "연합국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가 더 수월하도록 해주었다. 비록 연합국의 통제를 받을 테지만 일본이 원한다면 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겠다고 천명했고, 영국의 제안으로 일왕 대신에 지정된 관료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허용했다. 대신에 히로히토는 왕족을 포함한 특사를 보내 야전의 일본군 지휘관들이 항복하는 것을 돕도록 했다. 일본에서는 도쿄가 구역으로 나뉘는 점령지 분리도 없었다. 미군과 영연방군이 일본을 점령했지만 정부와 행정은 일본인의 손에 남았고, 연합국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감독을 받으며 개혁을 했다. 극소수의 일본군이 1970년대까지 저항했지만 대체로 일왕의 항복 명령은 이행되었다."(190-1)


결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회학 - 원서 전면개정판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4
스티브 브루스 지음, 강동혁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사회학의 위상


"좋은 과학 이론은 내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이를 통해 일상적 추론과 과학적 이론이 즉시 구분된다." "좋은 과학 이론은 증거와 합치해야 한다. 뻔한 소리인 것 같지만, 이런 면에서 과학자들이 마땅히 요구하는 기준은 일반인들이 습관적으로 수용하는 수준에 비해 훨씬 더 엄격하다." "과학적 발견이 절대적·영구적으로 참인 경우는 결코 없다. 과학적 발견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늘 개선의 여지가 있다." "좋은 과학은 주제와 관련된 '광범위한' 자료의 수집을 어떤 설명을 다른 설명으로 대체할 때의 핵심 요건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런 구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엽기적인 생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믿어야 할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훨씬 더 강력한 검증 방법은 믿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다. 좋은 과학에서 가장 설득력 있다고 여기는 개념들은 곧 틀렸음을 입증하려는 반복적인 시도에도 살아남는 개념들이다."(13-5)


"사회과학은 선택에 따라 행위하는, 지각 있는 존재들을 연구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자유로운지에 대한 익숙한 논쟁에 발목 잡힐 필요가 없다. 인간 행위의 획일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든 그 근원들이 전면적인 구속력을 지니는 건 아니라는 점만 인정하면 된다. 아주 억압적인 체제는 우리가 가진 선택지를 순응 아니면 죽음 두 가지로 축소시킬 수 있겠지만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이처럼 자연과학의 대상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물은 가열되더라도 증발성을 높이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 없다. 압력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한, 물은 나흘 동안은 섭씨 100도에서 끓다가 닷새째에는 그러기를 거부할 수 없다. 인간은 그럴 수 있다. … 화학자는 실험을 통해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내면 탐색을 끝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자에게 그건 시작일 뿐이다. 특정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이 항상 특정한 뭔가를 한다는 걸 알아내더라도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할 것이다."(26-7)


"신념이나 가치관, 동기, 의도에 대한 사회학자의 관심에는 자연과학 분야에는 없는 우려가 딸려온다. 바로 인간을 이해하려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그들 자신의 시각이나 진술을 어떤 식으로든 얻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러한 주장은 한 단계 전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 사회학자는 어떤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해할 만한 사회적 행위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동기에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순간을 규명하기 위해 액체의 정신 상태를 참고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위는 관찰만으로는 알 수 없다. 즉, 물리적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자신과 같은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보이는 단순한 행동들에 대해서는 종종 그 의미를 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의 의미를 단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그 사람에게 〈뭐하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것뿐이다. 행위를 알아보는 데만도 의도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28-9)


"하지만 질문을 던지고 받는 행위는 그 자체로 사회적 상호작용의 일부다. 사람들이 내놓는 진술은 고의적 허위일 수 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한다." "물론 사회학에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불순물에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정보를 걸러내는 간단한 마법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법원은 이따금씩 진실에 도달하고, 유능한 심문자들은 모호한 변론에서 구멍을 찾아내며, 연인들은 기만행위를 알아차리고, 여론조사원들은 소위 '순응효과'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낸다. 예컨대 〈다음 중 지난 주말에 한 행동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스포츠, 쇼핑, 친지 방문, 영화 관람 등이 들어간 긴 목록 안에 종교 활동이라는 항목을 끼워넣으면 〈지난 주말에 종교 활동에 참여하셨습니까?〉라고 직접 물을 때마다 종교 활동을 했다는 응답이 적어진다. 사람들의 말에서 진실을 추출하는 단 하나의 확실한 기술이 없다고 해서 예상되는 문제들을 피할 창의적인 방법들을 고안하지 못한 채 늘 실패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29, 34-5)


2 사회적 구성


# 사회학의 기본 전제 : 현실이란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우리의 행동에는 숨겨진 사회적 원인이 있고, 사회적 삶의 많은 부분은 본래 모순적이다.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때) 생물학에서 출발하는 게 유용하다면, 그건 동물은 삶의 대부분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데 비해 인간은 그렇지 '않은' 정도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물학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개인 차원에서는 자기관리의 문제가, 집단 차원에서는 협동의 문제가 생긴다." "아르놀트 겔렌의 말마따나 인간은 '본능의 결핍' 때문에 생긴 틈을 메우기 위해 사회적 틀을 만들어낸다. 그런 틀 중 일부는 형식법으로 정해질 수 있지만 많은 부분은 관습으로 남는다. 그 어떤 법률도 관리직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짙은 색 정장을 입어야 한다고 규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위직 임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옷 입는 방법을 알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경우, 구속복은 외부의 신체만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에까지 입혀진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사회화되고, 이에 따라 문화의 중요한 요소들이 우리의 성격에 새겨진다."(42-6)


"세상을 실제적인 부분과 상상된 부분으로, 객관적인 외부의 현실과 주관적인 내면의 풍경으로 나누는 건 매력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영역들은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이다. 상상에 참여하는 사람이 충분히 많다면 그 상상은 객관적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 지속적이고 억압적이기까지 한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윌리엄 토머스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이라고 정의하면 그 결과는 현실이 된다고 했다. 집에 불이 났다고 믿는 사람은 집에서 도망칠 것이다. 집이 불타 무너지지 않으면 그가 틀렸다는 사실이 입증되겠지만, 그의 행위를 이해할 때 중요한 건 그의 생각이지 진실이 아니다." "단,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공유되는 한에서만 사회적 구성도 효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어낸 것이든 아니든 모두가 그것을 믿는다면 그건 더이상 신념이 아니다. '세상의 이치'다. 소수만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그런 견고함을 획득하지 못하고 믿음으로만 남아 있다."(53-5)


"인간은 자신이 속한 문화의 외적 윤곽을 자신의 정신과 성격 속에 복제할 때에 비로소 사회적 존재가 된다."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배우들이 자기 배역을 그냥 대본대로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배우들은 실제로 그 배역에 몰입해 살아가는 '메소드 연기자'다. 대본과 무대 지시, 대사 일러주기 등 외부의 도움은 더이상 필수적이지 않다. 배우들은 등장인물 자체가 된다. 사회학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상당 부분 관련되어 있다. 사회학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은 타인이 그를 보는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를 서로 맞물린 역할들의 체계라고 설명하면서, 먼저 이 현상을 거시적으로 살펴보았다. 아버지가 되려면 아들이나 딸이 필요하다. 교사가 되려면 학생이나 제자가 필요하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자녀들이 그를 좋은 아버지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배우자, 자녀의 조부모, 친구, 이웃들)이 그런 관점을 공유해야 한다."(75-6)


"사회적 상호작용이 정체성 형성에 끼치는 중요한 영향 중 한 가지는 누군가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시도가 '자기충족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소녀가 방 정리, 약속시간 지키기, 과제 준비물 챙기기 등에 자주 실패하면 그때마다 아버지가 그녀를 '바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이름표 붙이기가 일상적으로 반복되면, 소녀는 자신에 대한 그런 이미지를 내재화할 수 있다. 소녀는 자신을 무능하다고 여기고 그 배역을 점점 더 충실히 연기한다." "그렇지만 이름표가 붙게 되는 사람도 그저 수동적으로 반응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체성은 '협상'된다. 소녀는 아버지의 뇌리에 박힌 자신의 상을 그냥 받아들이고 거기에 함축된 예상에 부응하는 것 외에도 달리 반응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더구나 소녀와 상호작용하는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동등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아이에게는 부모(혹은 부모의 대리인)가 가장 중요한 타자가 되겠지만, 연상의 친구들이나 다른 친척들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77-8)


3 원인과 결과


"사회학이 상식과 다른 한 가지 측면은 우리가 하는 생각과 행위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만족스러운 자아상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행동을 설명하려면 그가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도 규칙적 패턴이 있어야 하고, 그 패턴은─최소한 부분적으로─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난,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외부의 힘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어야 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유와 제약 사이에서 빚어지는 이런 역설을 〈우리는 운명을 만들어나가지만, 우리가 선택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나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깔끔하게 표현했다. 예컨대 나는 일요일 오후에 어디로 차를 타고 갈지 정할 수 있지만, 내가 운전하는 방식은 교통법규나 다른 운전자들의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에 더해 우리의 정체성이나 행위의 상당 부분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회적 원인이 있다. 사회학자는 규칙적 패턴을 탐색하고 여러 세계를 체계적으로 비교하여 그러한 원인을 조명할 수 있다."(86-7)


"현대인들에게는 부와 교육, 직업을 근거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행위가 진정한 감정에 대한 배신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배우자의 여러 특성을 분석해보면, 사랑과 애정에 근거해 내렸다는 결정들이 정작 선명한 '선택 결혼'의 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의식하거나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종교, 인종, 계급, 교육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결혼한다. 부분적으로는 기회의 차이에서 생기는 결과다. 우리는 우리와 유사한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묘한 세뇌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속한 사회집단은 우리를 사회화하여 특정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태도, 말투, 억양, 어휘 등을 다른 것에 비해 더 매력적이라고 느끼게 한다. 선택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지(혹은 어떤 사람을 멀리할지)를 결정하는 요소들은 성실한 중매인이 짝을 맺어줄 때 고려할 법한 요소들과 거의 같다."(88-9)


"사회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또 한 가지 요소는 비의도적 결과다.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즈가 간결하게 표현했듯, 〈쥐들과 인간들이 최선을 다해 세운 계획은 자주 잘못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겠다고 작정하지만, 작동 중인 힘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늘 예상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아주 다른 무언가를 달성하게 된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독일에서 좌파 정치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로베르트 미헬스는 좌파 노동조합과 정당들이 진화할 때 나타나는 공통적 패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런 조직들은 모두 세상을 재구성하겠다는 급진적 시도로서 시작되지만 점차 보수화되어 현실과 화해했다." "겉보기에는 다른 영역이지만, H. 리서츠 니버가 보수주의 개신교 분파들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발견했다. 18세기 후반의 감리교 운동은 급진적이었다. 초기에 이들은 세상의 재건을 설교했지만 점차 사회적으로 보수화됐다."(93-4)


"이런 사례들은 인간의 성찰적 사고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곤 한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을 때, 혹은 변화가 불가능하거나 변화하고 싶지 않을 때 자신을 위로할 목적으로 사회학적 설명을 동원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실수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을 통해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미헬스의 결론은 흔히 과두제의 철칙이라 불리고 니버의 주장은 사회 진화의 기본 법칙을 미헬스와 비슷하게 발견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이것들은 자연과학적 법칙이 아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무정부주의자들은 타협과 사회적 존중을 향한 인력(引力)을 회피할 수 있다. 급진적 정치운동은, 결과적으로 그 운동의 파멸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최초의 에토스에 계속 충실을 기할 수 있다. 분파들은 종파로서의 체면을 향한 인력에 저항할 수 있다." "브롬화물은 항상 부롬화물이 작용하는 방식대로 작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엇을 할지 생각할 수 있다."(98-100)


4 현대


"사회학은 관찰 대상이 되는 세계와 거리를 둔 객관적 학문인 동시에, 자신이 설명하는 대상의 징후이기도 하다. 과학에 청교도들이 끼친 영향을 연구한 로버트 머튼은 처음에는 유대교가, 다음에는 기독교가 합리화를 이끈 힘이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게 행동할 때가 많은) 여러 신들 대신에 단 하나의 신만 상정하되 그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결국 종말로 이끌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는 별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제한을 둠으로써, 세상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고 가정하고 물질세계에 대한 과학적 태도를 허용했다. 더욱이 체계적인 연구를 저해하는 방식으로 물질세계 자체를 신성시하지도 않았다.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권위가 거부된 이후, 과학자들은 종교적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학문을 추구할 수 있었다. 머튼에 따르면, 현대 과학이 가능해진 것은 기계사용에서의 기술적 진보보다(이 역시 중요하긴 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덕분이었다."(102-3)


"사회학이 하필 이 시기에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다. 14세기 아랍 철학자 이븐 할둔과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 및 역사 관련 저술을 하면서 사회학적 관찰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을 통해 현대 사회학자들이 승인할 수 있는 학문적 업적이 확인된 것은 18세기 말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애덤 퍼거슨에 이르러서야 일어난 일이다." "일관적·총괄적인 문화, 소수이지만 강력한 사회 제도, 그 제도들을 신의 권위로 떠받치는 종교가 있는 전통 사회에서는 세상을 사회적 구성물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 문화가 아주 다른 외국으로 여행을 간 사람들도 일부 있었지만, 이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사회적 세계가 너무 견고해서 상대주의적 사고는 억제되었다. 전통의 약화, 종교적으로 정당화되는 사회 질서의 쇠퇴, 사회적 다양성의 증대는 모두 사회학의 필수적 전제조건이었다."(103-4)


"로버트 머튼에 따르면, 사회에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두 영역, 즉 문화와 사회 구조가 있다. 문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지시한다. 구조는 권력, 부, 지위를 배분한다. 전통 사회는 구조가 위계적이었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쪽은 소수였고 대부분은 무력하고 가난했으며, 문화는 그런 격차를 정당화했다.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삶에서 아주 다른 것들을 기대하고 각자의 분수에 맞는 방식으로 행동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얻는 것은 균형을 이루었다." "현대 사회 체제의 핵심에 갈등이 뿌리내리게 되는 건 문화와 사회 구조가 더이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민주적이다. 물질적 성공이라는 목표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만 열망의 평등은 기회의 평등과 어우러지지 않는다. 실력주의라는 수사는 모두에게 같은 것을 원하도록 장려하지만, 계급 구조의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적법하게 목표를 이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127-8)


"안정적인 사회들은 대부분의 일이 '마땅히 되어야' 하는 방식대로 돌아간다는 합의를 깔고 있다. 사회적 절차를 하나하나 세세하게 정당화하는 단일한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보편적이고 열정적으로 수용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응분의 보상을 정당하게 받는다는 전반적인 느낌은 어느 정도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현대 세계의 중심적 특징인 평등주의적 충동은 눈에 띄는 삶의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한다. 실력주의가 현실이라기보다 소망으로만 남아 있는 한, 어떤 해우이에 동참하라고 독려받았으되 받아야 할 몫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응당 자기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취하게 된다." "인간 욕망의 무한성을 감안하면, 모든 것을 가진 사람도 여전히 좀더 많은 것을 원할 수 있다. 세속적인 성공을 강조하는 동시에 개인의 권리를 공동체의 이득보다 우선시하는 문화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객관적 지위와는 별개로 박탈감을 느끼게 만든다."(132-3)


"포스트모더니티는 새로운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발전상을 가정한다. 즉, 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요성 하락과 개인적 선호 및 정체성의 중요성 증가다." "일부 사람들에게 개인적 선호는 객관적이고 상호주관적인 현실을 능가하는 카드로 여겨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민족국가가 무력해졌다고도 가정한다. 무역과 금융이 세계화되면서, 경제를 통제하는 국가의 능력은 감소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에서는 고착되고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중요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설명은 심각하게 과장되었다." "위성과 인터넷 덕분에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보는 드라마는 디킨스의 소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사실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이 우리 시대의 디지털 콘텐츠를 상당 부분 제공한다." "민족국가는 여전히 건재하다. 국가가 무너지는 건 대체로 국가적 정체성이 약회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종교-민족적 소수자들이 그들만의 국가를 원하기 때문이다."(136-9)


5 사회학이 아닌 것


"사회학이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혹은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사회학을 비판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으며, 사회학 분야에 속한 사람들도 이를 모르지는 않는다. 이해할 만하지만 그래도 잘못된 생각이다. 이해할 만한다고 말한 것은 사회학의 발전에 기여한 초기 학자들 중 다수가 사회적 세계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들은 사회학에 필수적인 가치(정직성, 명확성, 성실성 등)와 제쳐두어야 하는 학문 외적 관심사를 구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에만 생산적인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사회학 강의를 하다보면 학생들이 사회적 문제와 사회학적 문제를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이 흔히 보인다. 연구 프로젝트의 주제를 선택하라고 하면, 학생들은 거의 틀림없이 세계의 어떤 나쁜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노숙자나 알코올 중독이나 가정폭력에 대해 '뭔가 하고' 싶어한다. '한다'는 탄력 없는 동사야말로 설명과 개선을 혼동하는 뚜렷한 증상이다."(148-51)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는 원칙을 벗어나면 특히 쉽게 무너진다. 핵심적 원칙을 오해하면 틀림없이 당파성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현실이 인간의 산물, 즉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면 인지와 객관적 현실 사이의 확고한 연결이 약화되고 우리 자신이 하는 진술과 설명에 대해 취하는 입장도 의문시하게 된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이 사태를 보는 방식도 그들의 공통적인 이해관계에 엄청나게 좌우된다는 점을 지적하게 된다. 이는 (밀접하게 연관될 수는 있겠지만) 정직성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거짓말보다 미묘한 뭔가에 관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신봉자들이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점에서 시치미떼기와 구별된다. 청소년 임신율이 높아진 건 무신론자들이 공립학교에서의 기도를 금지한 결과라고 주장하는(일단 이런 주장이 오해라고 해보자) 미국의 보수주의 기독교도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신념에서 영향을 받아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 된 것이다."(157-8)


"자신의 시각을 정확한 것으로, 타인의 시각을 이데올로기로 여기고 싶은 충동이 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사회학은 이데올로기가 갈수록 많은 사회집단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밝혀냄으로써 그런 충동을 방해한다. 1960년대에는 의사나 변호사 등이 장기간의 훈련을 통해 전문성을 획득하고 외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우며(동료가 임무를 태만히 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의사뿐이다) 직업상의 신규 진입을 통제할 수 있고 높은 수준의 보상을 누린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전문직을 여타 직업과 구별하기 일쑤였다. 전문직과, 마찬가지로 접근을 제한하여 보상을 높이려는 다른 형태의 (기계공업 같은) 숙련노동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그어졌다. 전문직 종사자들은 어떤 높은 차원의 사회적 선(예컨대 보건이나 정의)에 봉사한다는 이유로 그런 행위를 해도 정당화되었다. 엔지니어들이 그런 행위를 하면 직업에 대한 부당한 제약으로 여겨졌고, 많은 국가에서는 그런 행위를 불법화했다."(158-9)


"당파주의자들을 변호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은 민족 연구와 여성학 분야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 분야에서 주장하는 것은 객관성의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설령 그 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객관성이 사회학적 기획을 방해한다는 얘기다. 그들은 설명하려면 일단 이해해야 하고 이해하려면 일단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흑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오직 흑인만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고, 오직 여성만이 다른 여성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의심하게 되는 타당한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주장이 공평하게 제기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회학자들은 오직 귀족만이 귀족정을 유용하게 연구할 수 있다거나 파시스트만이 파시즘을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의 특별한 주장은 연구자 자신에 의해서거나 연구자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만 제기된다. 많은 경우 이는 그저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방법일 뿐이다. 미덕을 과시하는 일이다."(161-2)


"이데올로기적 오염의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응답이 노골적인 당파성이라면 또다른 응답은 상대주의이다." "문화연구에서 상대주의가 인기를 얻은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작가나 화가로서의 전문적 기술을 비교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제인 오스틴이 애거서 크리스티보다 좋은 작가이고 존 컨스터블이 잭 비트리아노보다 나은 화가인지는 대체로 취향에 달린 문제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위계가 취향의 위계를 만들어낸다. 특정 계급이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결정한다. 1950년대 영국에서는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안다〉는 표현이 교육 수준이 낮은 전형적인 하위 계급 사람들을 모욕하는 일종의 농담이었다. 1990년대에는 이것이 숭고한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표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사고와 사회과학의 가능성을 믿는다면, 모든 이에게 믿고 싶은 것을 믿을 권리를 부여하는 동시에 어떤 믿음은 틀렸다고 주장할 권리도 주어야 한다."(168-70)


"상대주의에 대한 종합적 반박은 창조와 발견을 구별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다. 설명과 이론이 사회적 구성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설명이나 이론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사실은 창조해낸 것들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뉴턴은 '중력'을 발견했지만, 그의 지적 활동 전에도 사람들은 지표면에 발을 붙이고 사는 데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중력을 발견한 것이다. 또다른 반격은 사회적 설명들이 한낱 내러티브일 뿐이라는(또한 모든 내러티브는 동등하다는) 상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사회학자들은 증거에 대해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합의 자체가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뭔가에 합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저 바깥에 진짜 세계가 우리의 믿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못해도 개인적 선호를 표현하는 것 이상의 방식으로 그 세계를 탐사하고 싶은 열망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171)


"문화적·사회적 경계를 넘어서는 이해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상대주의에 대한 이런 반응이 어려운 것은 교전수칙 자체를 거부하는 상대주의자들이 이런 응답에도 별다른 감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전면적 거부를 넘어 합의에 이르는 최선의 응답은, 상대주의자들에게 그들 자신은 한결같이 그들이 공언한 철학적 입장에 걸맞게 행동하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분명 그들은 그렇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책을 쓰고 강연을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주장을 전하려고 애쓴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그들 스스로 처방한 약을 약효가 발휘될 만큼 충분히 복용했다면, 그들은 장사를 집어치워야 한다. 어떤 책도 다른 책보다 낫지 않다면, 왜 그런 주장을 펴겠다고(그것도 누차) 나무를 베는가? 오류로부터 진실을 구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시각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가?"(17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8
벤체 나너이 지음,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미학을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술가와 음악가, 하물며 철학자들까지. 이것은 미학의 대상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며 그런 오해를 바로잡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미학의 영역은, 고급·저급에 관계없이 예술의 영역보다 훨씬 넓으며 우리가 살면서 관심을 기울이는 많은 것을 아우른다." "미학은 어느 예술품이 훌륭한지 말해주지 않는다. 어느 경험이 가치 있는지, 가령 거리에서 쇼팽을 듣는 경험이 가치 있는지 아니면 연주회에서 쇼팽을 듣는 경험이 가치 있는지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험이 당신에게 가치 있다면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 경험은 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미적 쾌감을 얻는 것은 당신에게 달렸다. 미학은 어느 경험이 용인되는지를 가르쳐주는 휴대용 도감이 아니다. 미적 쾌감을 찾도록 안내해주는 지도도 아니다. 미학은 가치 있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석하는 방편이다. 미학은 판단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10-11)


2 섹스와 마약, 로큰롤


"미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경험은 어찌 보면 각양각색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경험뿐 아니라 유튜브에서 '극장골' 장면 모음을 보거나 신고 나갈 구두를 고르는 경험, 커피 메이커를 조리대 어디에 둘지를 결정하는 경험도 미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 모든 경험의 공통점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 범위가 너무 포괄적이서도 안 된다. 철학자들은 예술에 대한 경험을 마약을 통한 경험이나 성적 흥분의 경험과 (또 '로큰롤rock 'n' roll'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대로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것과 같은 쾌락 경험 일반과도) 곧잘 구분한다. 이런 전통적 미학관에 따르면 우리는 미적인 것과 비非미적인 것 사이에 어떻게든 선을 그어 섹스와 마약은 배제하고 헤어스타일과 음악은 용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 "미학에 접근하는 기존 방법들을 우리가 살펴보면 미적인 것과 비非미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18-9)


"미학에 대한 가장 뿌리 깊은 통념은 그것이 아름다움을 다룬다는 생각이다. 요컨대 어떤 것은 아름답고, 또 어떤 것은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면 미학은 우리가 그것들을 구분하게 도와주고, 나아가 아름다운 것이 왜 아름다운지도 설명해줄 것이다. 나는 이것을 '미용실 접근법'이라고 부르는데, 미용 산업에서는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아름답지 않은지의 개념이 상당히 명확하기 때문이다." "미용실 접근법은 섹스와 마약, 로큰롤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한다. 미적 경험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다. 하지만 마약을 통한 경험이나 성적 경험, 로큰롤의 경험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경험들은 미적으로 여겨질 수 없다." "미용실 접근법의 진짜 문제는 고상한 척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로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런 경계선을 긋는다는 사실 자체다. 아름다움은 시대와 맥락, 관찰자가 바뀌어도 늘 한결같은 대상의 특성이 아니라는 말이다."(20-1)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의 차이를 따질 때 자주 등장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즐거움이다. 요컨대 미학은 즐거움을 다룬다." "심리학자는 즐거움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중 첫째는 불쾌한 것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안도의 즐거움'이다. 안도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불쾌한 상황이 끝났을 때의 즐거움은 안도의 순간을 나타낸다. 그리고 안도의 즐거움은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즐거움은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가 될 수는 있어도 우리가 그 일을 더 하도록 북돋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북돋는 즐거움'은 지금 하는 일을 우리가 계속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이런 즐거움은 안도의 즐거움과 달리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다." "이것은 섹스와 마약, 로큰롤의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임을 시사한다. 어떤 성적 활동이나 마약을 통한 활동은 북돋는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섹스와 마약을 무차별로 거부하고 그것들을 미적 활동이라는 엘리트 범주에서 몰아낼 수 없다."(25-7)


"미적 영역을 규정하는 셋째 방법은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요컨대 미적 경험은 곧 감정 경험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감정이 수반하는가? 미적 참여를 할 때 촉발하는 감정은 모두 늘 같은 종류인가? 아니면 우리가 무엇에 참여하고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인가?" "미적 참여의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다양하다는 데 있다. 가령 그랜드캐니언의 경치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에 대한 미적 경험은 각기 매우 다른 감정을 수반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경우에 우리가 느끼는 단 하나의 두루뭉술한 감정을 찾겠다는 것은 결국 미학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은폐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미적 참여가 꼭 감정적이기만 할까? 포르투갈의 시인이자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신의 미적 경험을 〈사고나 감정 없이 표류하면서 내 감각에만 주목〉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감정이 뒤서는 친숙한 한 형태의 미적 참여를 가리키는 듯하다. 적어도 이떤 경우의 미적 경험에서는 감각이 감정에 앞선다."(29-33)


"수전 손택은 미적 경험을 초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감정뿐 아니라 분노와 찬동, 나아가 현실적 관심사로부터 초연함, 이것은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을 구분해줄 마지막 유력 후보로, 미적 참여가 (단지 미적 쾌감) '그 자체를 목적'하는 참여임을 뜻한다."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이루려고 그 활동을 하는가, 아니면 오직 그 활동 자체를 위해 그 활동을 하는가? 문학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나는 다른 어떤 목적(시험 통과)을 이루려고 어떤 활동(소설 읽기)을 하는 것이다. 반면 단지 소설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이 활동은 미적 영역에 더 가깝다. 하지만 미적 경험은 문학 수업 때문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더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경우 나는 순전히 소설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닌데도 그 활동에 미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참여가 덜 미적일 수밖에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중도의 사례들은 '그 자체를 목적하는 것'이 미학의 성배(聖杯)가 아님을 보여준다."(33-5)


3 경험과 주목


"미적인 모든 것의 공통성은 아주 단순한 데 있다. 바로 주목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약을 통한 환각이나 성적 흥분을 경험할 때도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걸작을 응시할 때라고 해서 쉽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예술품을 감상할 때 으레 예술품의 일부 특성만 주목하고 나머지는 무시한다. 가령 그림을 볼 때 물감의 균열은 무시하고 그 밖의 표면적 특성에만 주목한다. 균열은 고려 대상에서 배제한다. 바로크 시대에 재건축한 로마네스크양식의 교회를 볼 때는 그 중세적 구조를 완상하기 위해 바로크적 요소는 무시하려고 할 것이다. 이 또한 예술품의 특성 일부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품의 어떤 특성을 주목해야 하고, 어떤 특성을 무시해도 되는지 혹은 적극적으로 배제해도 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정답이나 손쉬운 방법은 없다. 미적 향유의 성패는 주목에 달렸다." "우리는 자신이 미적 참여를 할 때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주목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42, 50-1)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주목한다고 해서 미적 경험을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좋은 출발점은 될 수 있다. 제임스 본드는 시한폭탄을 해체하지 못해 초조해한다. 폭탄의 어느 부분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 이때 본드는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주목한다."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에 대한 주목은 자유롭고 제한이 없어야 한다. 궁지에 몰린 제임스 본드는 시한폭탄 해체 방법을 찾으려고 폭탄의 이쪽저쪽을 굉장히 집중해서 주목한다. 본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본드는 여러 특성에 주목하지만 그 모든 특성에 대한 그의 주목은 극도로 예민하다.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이와 정반대 방식으로 주목한다. 특정한 어떤 것도 찾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이 마주한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풍경(화)의 다양한 특성에 주목하지만 어떤 개별적 특성이나 일단의 특성에도 집중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유롭고 제한 없이 주목하는 것이다."(58-9)


"우리가 단일 대상의 여러 특성으로 주목을 분산할 때, 단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염두에 두지 않을 때 나는 이런 주목 방식을 '제한 없는 주목'이라고 부르겠다. 고정된 주목은 결국 심신을 지치게 한다. 반면 제한 없는 주목은 정신을, 적어도 지각계(知覺界)를 이완하는 휴식과 같다. 몸이 근력 운동을 하지 않고 쉬어야 할 때가 있듯 지각계도 고정된 주목을 하지 않고 쉬어야 할 때가 있다." "미적 경험이 지각계의 휴식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지각계에 무리가 가면 미적 경험도 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일 뿐이다. 제한 없는 주목은 특별하다. 제한 없이 주목할 때 우리는 한 그림 속의 무관해 보이는 두 형태를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독립된 두 멜로디가 한 곡에서 멋진 대비를 이루어나가는 방식도 추적할 수 있다. 또 한 요리에 들어간 재료들의 차이점이나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 적어도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은 이런 주목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60-1)


"미적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이 보는 대상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 질(質)에도 주목한다. 나아가 양자의 관계에도 주목하는데 이 점이 중요하다." "권위에 한번 호소해볼까 한다. 페르난두 페소아도 이와 매우 유사한 견지에서 미적 경험을 묘사했는데, 그에 따르면 〈참된 경험은 현실과의 접촉을 줄이는 동시에 그 접촉에 대한 분석을 심화하는 데 있다.〉 여기서 경험 대상과의 접촉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는 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경험 대상과 경험 질의 관계에 대한 주목이다." "제한 없고 통제받지 않는 주목이 중요한 이유 하나는 우리가 지각 대상의 특성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 특성에도 자유롭게 주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힘들여 등산길에 오른 당신은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발아래 펼쳐진 들판과 강 등 전망에 주목할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전망에만 주목할 것 같았으면 아까운 시간을 들여 등산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당신은 성취감에 젖은 자신의 경험에도 주목할 것이다."(65-7)


"산스크리트 미학에서 예술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모든 감각 양상에 몰두하는 다중양상의 경험이다. 산스크리트 미학의 핵심 개념인 라사(Rasa)에서는 미적 주목을 예술 작품에 대한 우리 경험의 대단히 중요한 요소 가운데 꼽는다." "미적 경험을 미적으로 만들어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은 바로 주목 방식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아름답게 보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는 특수한 형태의 주목이다. 그런데 주목은 감정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를 주목함'에 초점을 맞춘 견해에서 초연함과 제한 없음이 미적 영역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배웠으며, 그 중요성을 금지 구역이 거의 없는 자유롭고 제한 없는 주목의 견지에서 정당화할 수 있다." "당신이 먹고 싶어서 토마토를 바라보는 경우라면, 토마토 자체에 주목할 것이다. 하지만 미적 경험을 하는 경우라면 당신은 토마토뿐 아니라 그 토마토에 대한 자신의 경험에도 주목한다. 나아가 양자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따라서 미적 경험은 투명하지 않다."(68-70)


4 미학과 나


"'서양' 미학 대부분은 박식한 미적 판단의 문제를 다루었다. 미적 판단은 (보통은 스스로, 때로는 타자에게) 특정 대상이 아름답다거나 우아하다, 흉하다, 역겹다고 언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적 참여 대부분은 전혀 이와 같지 않다." "우리가 미적 판단을 내리는 데서 (가령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의 순위를 SNS에 게시하는 데서) 어떤 즐거움을 얻는다면, 이 즐거움은 판단을 공유하는 것과 더 관계있지 실제로 판단을 내리는 것과는 별로 관계없을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친구와 그 영화에 대해 길고 열띤 논쟁을 벌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에 반해 미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험의 시간적 펼쳐짐은 재미있고 가치 있으며 우리 각자가 모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 펼쳐짐이 미적 판단의 형태에 이를 때도 있는데, 이 때문에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판단보다 경험에 초점을 맞출 때의 큰 이점은 미적인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갖는 개인적 중요성과 절실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데 있다."(76-7)


"더 박식한 미적 판단을 내린다고 해서 더 강렬하고 더 가치 있는 미적 경험을 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은, 강렬하고 가치 있으며 우리 개인에게 소중한 미적 경험을 미학에 대한 논의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미적 판단에만 골몰하느라 그런 경험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판단에 앞서는 것은 오히려 경험이다." "많은 그림이 걸린 전시실에 들어가 주위를 쓱 한번 둘러보라. 전시작 일부는 마음에 들고 나머지는 그저 그럴 것이다. 당신은 어느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모르며, 따라서 아무런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어느 그림에 다가갈지, 어느 그림을 살펴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초기의 호감이다. 우리가 모든 사항을 고려해 박식한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우리가 일찍이 어떤 예술품에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특정 예술품에 참여하고 있는 이유다."(83)


5 미학과 타자


"우리는 사회적 존재며 사회적 측면을 완전히 결여한 미적 상황은 거의 없다. 안타깝게도 '서양' 미학사에서 이루어진 미학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미적 의견 일치와 미적 의견 충돌이라는 한 가지 사안에만 치중했다." "의견 충돌을 해결하는 데 주어진 선택 사항은 딱 두 가지다. 첫째는 서로가 의견 충돌을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좋아하고 나는 저것을 좋아한다. 누구도 옳지 않다. 아니 우리 둘 다 옳다. 둘째는 우리 가운데 한 명은 명백히 그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선택 사항의 적합성은 어느 사례를 고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문제는 미적 의견 충돌이 (같은 그림을 보면서) '네모나냐 세모나냐'의 의견 충돌에 더 가까운가, 아니면 '각자의 할머니를 상기시키느냐 아니냐'의 의견 충돌에 더 가까운가다. 그런 까닭에 '서양' 미학의 주요 문헌들 일부는 순전히 '주관적인'(할머니와 관련된) 의견 충돌과 순전히 '객관적인'(모양과 관련된) 의견 충돌을 중재하는 위치에 서려고 시도했다."(92-5)


"이렇듯 미적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규범성(normativity)이다. 규범성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과 관계있다. 우리의 미적 삶도 어떤 점에서는 매우 규범적인 측면이 많다. 나는 지금까지 미학이 어째서 '서양'에 특권을 주어서는 안 되는지 꽤 규범적인 주장을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느 정도 규범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서는, 가령 한 악곡의 연주가 일정한 악곡을 (정해진 음대로) 연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연주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규범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서는 확립된 미적 관행을 이야기하기 곤란할 것이다. '해야' 한다는 표현은 우리가 미적 영역을 논하는 대목 곳곳에서 불쑥불쑥 등장한다. 하지만 미학은 규범적 학문이 아니며 이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윤리학의 하위 분야 일부는 실제로 규범적 주장을 다루는 듯하다. 하지만 미학은 다르다. 본래 미학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루지 않는다. 우리가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하는가를 다룬다."(96-7)


"어떤 경험이 미적이게 되는 것은 그 경험이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험이어서가 아니다. 그 경험이 미적이게 되는 것은 당신이 주목하는 방식 때문이다. 주목 방식에는 정확하고 말고가 없다. 경험은 정확하거나 부정확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을 미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정확성과 하등 관계 없다." "당신과 나는 같은 예술품이나 풍경을 보더라도 서로 아주 다른 경험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차이를 의견 충돌로 규정하는 것은 (미적 경험보다) 미적 판단을 은근슬쩍 우위에 두는 것이거나 우리에게 미용실 접근법만 강요하는 것과 같다. 당신과 내가 같은 예술품이나 풍경 앞에서 각자 다른 경험을 할 때 발생하는 차이는 중요하다. 그림의 모양에 대한 의견 충돌이나 그림이 누군가의 할머니를 상기시키는지에 대한 의견 충돌보다 훨씬 중요하다. 미적 참여의 사회적 측면을 미적 의견 충돌의 문제로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미학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일상의 사회적 상호 작용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깨닫기 힘들다."(99-101)


"비교적 겸허한, 그러나 결코 해가 없지 않은 규범성에의 호소는 미적 평가의 보편적 호소와 관계있다. 이것은 일정한 예술품이 당신에게 일정한 반응을 보일 것을 단순히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어떤 미적 반응을 보일 때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당신과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고, 혹은 어쨌든 그래야 한다고 암암리에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견해로, '서양' 미학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칸트 철학의 지적 성취에 경외심을 갖고 공손히 말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이것은 미학의 역사상 가장 오만한 발상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반응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가정하는 것은 인류의 다양성과 그들이 나고 자란 문화 배경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폄하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 일이 보편적 호소력 혹은 보편적 전달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은 유혹이 들라치면, 멈춰 서서 내가 '미적 겸손'이라고 부르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102-3)


6 미학과 삶


"19세기에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삶'이라는 발상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많다. 예술 작품을 대하는 방법도 많으며, 그 방법 간에 애당초 우열은 없다. 따라서 자기 삶을 예술 작품으로 바꾸라고(혹은 예술 작품처럼 대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도 안 되고 딱히 의미도 없다." "미학과 우리 삶을 관련짓는 또하나의 인기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자기 삶과 예술 작품을 대할 때 초연한 관객이 되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19, 20세기에 널리 유행했다." "이런 주목 방식은 역사적·지리적으로 매우 특정한 유형의 미적 경험을 설명해주며, 이런 미적 경험은 관조로 불리는 경험과 상당히 잘 부합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적 경험의 한 형태일 뿐이다. 그것이 유럽에서, 가령 20세기 전반기에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적 경험은 초연할 필요도, 관조적일 필요도, 제한 없는 주목을 수반할 필요도 없다."(119-21)


"예상은 우리가 예술에 참여할 때 중대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상에 주목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순수한 놀라움에 내맡기는 어느 정도의 개방성과 자발성이다." "예술품이나 풍경 앞에서 강렬한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을 마치 처음 보듯 바라본다. 실제로, 적어도 어떤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경험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데 특징이 있다. 설령 이전에 여러 번 보았더라도 우리가 정말로 감동할 때 그것은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전에 그것을 한 번도 제대로(really)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처음 본다'라는 이 말이 고리타분한 상투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는 그 이상이다. 무언가를 처음 볼 때 당신은 그것을 관습적이고 판에 박은─자신과 관련된 특성들을 가려내고 나머지는 무시하는─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특성들도 유의미할 수 있으므로 두루 주목한다. 이렇듯 무언가를 처음 볼 때 당신은 제한 없이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128-31)


"무언가를 처음 본다고 느끼는 것은 당신이 그것을 바라보는 관습적이고 틀에 박힌 모든 방식에서 벗어났음을 뜻한다. 이것이 내 흥미를 끄는 차이, 즉 무언가를 바라보는 틀에 박히고 습관적인 방식과 그것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다." "십대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노래를 기억하는가? 그 노래는 당신에게 언제나 감동을 주었다. 음, 그 감동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당신은 그 노래를 완전히 소진해버리고 그 노래에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것 같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날 때마다 나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래도 다행히 이런 경험은 종종 다시 할 수 있다. 그 노래를 한동안 듣지 않다가 몇 달 뒤에 다시 들으면 이전보다 훨씬 벅찬 감동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이때 당신은 그 노래를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듣는다. 습관과 관성은 사라진다." "습관은 당신을 무뎌지게 한다. 하지만 당신은 예술의 도움으로 습관을 버리고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다."(132-3)


"미적인 것은 또다른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미적 경험은 지속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이 효과는 아직 탐구가 덜 이루어진, 예술 항유의 한 가지 독특한 측면이다. 예술 향유는 지속한다. 온종일 미술관에 있다가 나중에 집으로 돌아갈 때 당신 눈에는 칙칙한 버스정류장이 그 미술관에서 본 어느 그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연주회나 극장에서 멋지 작품을 감상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흉하고 우중충하고 지저분한 거리 풍경이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미적 참여에서 주목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의 이점 하나는 이 수수께끼 같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술은 당신이 주목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 심적 주목 상태는 돌연 중단되지 않는다. 지속한다." "다시 말해 예술은 당신에게 본다는 것의 순수한 즐거움을 되찾아줄 수 있다. 무엇을 보는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볼 수 있게 해준다."(134-6)


7 범세계 미학


"전통적 미학관에 따르면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보편자를 다룬다. 다시 말해 미학은 우리가 예술품과 그 밖의 미적 대상에 참여하는 방식을 우리의 문화 배경과 무관하게 탐구한다는 것이다. 미학자들이 미술사가들에게 곧잘 비난받는 것은 바로 이런 문화 보편주의 때문이다. 신경 과학에 오염된 최신 유행의 미학 연구는 미학의 이런 보편주의를 한층 더 강력히 밀어붙이는데, 그 목적은 다양한 형태의 미적 감상 가운데서 신경 상관자(neural correlates)를 찾아내는 것이다. 단, 감상 주체의 문화 배경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마음의 경험 과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이로부터 얻는 실질적 가르침은 문화 보편주의를 완전히 단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각에 미치는 풍부한 하향식 영향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과 신념이 우리가 어떤 문화와 어떤 시대에서 성장했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의 지각도 우리가 어떤 문화와 어떤 시대에서 성장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140)


"문제는 지각에 미치는 하향식 영향이 어떻게 작용하고 어떤 과정에 따라 매개되느냐다. 나는 그 매개 기제로 두 가지를 들 텐데, 하나는 주목이고 또 하나는 심상이다. 주목과 심상은 둘 다 신념이나 지식과 같은 우리의 고차적 정신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한편 양자는 모두 우리의 지각과 미적 참여에 영향을 준다. 달리 말해 주목과 심상에는 문화 간 편차가 있다. 따라서 미적 참여에서 주목과 심상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이것은 미적 참여에도 틀림없이 문화 간 편차가 있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한 우리는 보편주의 노선을 택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미적 참여가 현지의 인공품 제작자가 의도한, 또 그 사용자가 행한 참여와 같으리라고 가정할 수 없다." "즉, 인공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무엇을 주목하는지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은 인공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커다란 문화 간 편차가 있음을 뜻한다."(140-1)


"낯선 문화와 그 문화의 예술 제작 양식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낯선 문화를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그 문화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미적 경험의 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타 문화의 한갓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더 겸손한 미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늘 자신이 견지하는 문화적 관점을 의식하고 자신의 미적 평가를 겸손하게 다루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나의 평가는 매우 특수한 문화적 관점에서 기인한 하나의 평가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미학과 관련해 오만한 태도를 취하기 쉬운데 이것은 미학이 우리 개인에게 갖는 중요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미적 평가를 내릴 때 한층 더 신중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더 많은 미적 겸손이 필요하다."(16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메시스 현대사상의 모험 28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오디세우스의 흉터


"호메로스의 시 작품 속에서 서스펜스의 요소는 극히 희박하다. 시의 스타일 전체를 통해서 독자나 청중의 숨을 죽이게 하도록 피해진 것은 없다. 샛길로 접어든 이야기─가정부 에우리클레이아가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오디세우스의 흉터를 알아보는 순간, 흉터의 기원을 서술하는 대목이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독자에게 서스펜스를 일으키기보다는 긴장을 완화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줄거리의 진행을 늦춤으로써 서스펜스를 증가시키려는 삽화는 이야기의 현재를 완전히 채워 버려서는 안 된다. 그 해결이 기다려지고 있는 위기를 완전히 독자의 마음에서 벗어나게 해서 서스펜스 자체를 파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위기와 서스펜스는 계속되어야 하며 배경에서 줄곧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배경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그때그때 유일한 현재이고 그것이 무대와 독자의 마음을 완전히 채우고 있다."(45)


"오디세우스의 흉터의 기원에 관한 탈선적 객담은 새로 등장한 인물이나 새로 나타난 물건이나 도구조차 비록 싸움이 한창일 때라도 그 성질이나 기원 등을 서술하는 많은 대목들과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 혹은 한 장면이 등장할 때 그가 그전까지 어디 있었으며 거기서 무엇을 했고 어떤 경로로 해서 그 자리에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들려주는 대목과도 다를 바가 없다." "호메로스의 느낌은 흉터가 조명되지 아니한 과거의 어둠으로부터 나타나는 대로 허용해 두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환하게 드러나야 하고 그와 함께 주인공의 소년시절의 일부도 드러나야만 한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호메로스 문체의 기본적 충동에 놓여 있었음에 틀림 없다. 즉 현상을 충분히 구체화된 형태로 묘사하고, 모든 부분이 뚜렷하게 보이고 감촉할 수 있도록, 또 시간 관계나 공간 관계를 완전히 고정시켜서 묘사하려는 충동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심리 과정에서도 숨겨져 있거나 표현되지 아니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47)


"호메로스 문체의 특질은 이와는 다른 형식의 세계에 속하지만 똑같이 고대의 것이며 똑같은 서사시 문체인 다른 보기와 비교해 보면 명백해진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려고 그에게 말하였다. 아브라함! 하고 그는 말씀하셨다. 보십시오. 여기 있습니다.〉(창세기 22:1) 호메로스를 읽고 난 후 이삭의 희생 이야기를 읽으면 이 서두조차 우리를 놀라게 한다. 두 존재의 대화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들이 지상의 어느 한곳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 점 역시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는 사실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히브리 말로는 〈나를 보십시오〉 정도의 뜻일 뿐이다." "즉 그를 부른 신에게 '여기서 나는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49-51)


"똑같이 고대의 것이며 똑같은 서사시인 이들 두 개의 문체보다 더욱 대조적인 문체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한쪽으로는 구체화되고 균등하게 조명되었으며 시간과 장소가 일정하게 명시되어 있으며 늘상 전경 속에서 아무런 틈서리도 없이 연결되어 있는 현상들이 있다. 생각과 감정은 완전히 표현되어 있으며 사건은 서스펜스 없이 느릿느릿 일어난다. 다른 한쪽에는 이야기의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현상만이 구체화되어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만이 강조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시간과 장소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해석을 필요로 한다. 생각과 감정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침묵과 단편적인 대화에 의해서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중층적이며 훨씬 착잡히 얽혀 있다. 몹시 긴박한 서스펜스로 차 있고 단일한 목표(그리고 그러한 한에서는 훨씬 통일적인)를 지향하고 있는 전체는 불가사의하고 '배경을 내포하고' 있다."(55-6)


2 포르투나타


"호메로스의 스타일과 다른 특징, 페트로니우스의 잔치의 가장 의미심장한 특징을 살펴보자. 그것은 고대로부터 전수되어 온 어떤 것보다 이 글이 사실적 묘사에 대한 현대적 개념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렇다는 것은 소재의 비속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사회 환경을 정확하고 완전히 비도식적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리말키오의 잔치에 모인 손님들은 1세기 남부 이탈리아의 속량된 신흥 부자들이다. 그들의 견해는 이런 부류의 전형적인 견해이고 그들의 언어는 거의 아무런 문학적 세련을 가하지 않은 시정의 언어 그대로이다. 이와 같은 것은 다른 데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페트로니우스의 문학적 야심은, 현대 사실주의 작가들처럼, 무작위적이고 일상적인 당대의 생활 환경을 사회 배경 속에서 그려 내며 등장인물로 하여금 문체의 유형화 없이 그들 자신의 언어로 말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대 리얼리즘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극한점을 이룬다."(79-80)


"고대 저작과 초기 기독교 저작 사이에 존재하는 스타일상의 차이는 이들 저작의 관점과 대상 독자가 다르다는 사실에 의하여 규정된다. 여러 가지 점에서 페트로니우스와 타키투스는 서로 다른 필자라고 하지만, 그들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다. 타키투스는 사건과 일의 전폭을 조망할 수 있는 고지에 서서 글을 쓴다. 그는 가장 높은 지위와 가장 높은 교양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것들을 분류하고 판단한다. 그가 무미건조하고 비시각적인 데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천재 때문만이 아니고 고대 자체가 시각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더없이 성공적으로 도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대상 독자로 삼았던, 그에 대등한 지위의 사람들은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라도 오랜 전통이 고상한 취미라고 정해 놓은 것의 한계 속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했다. 페트로니우스도 자기가 그리고 있는 세계를 위로부터 내려다본다. 그의 책은 가장 높은 교양의 소산이다."(100)


"이에 대하여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 대체로 『신약 성서』 거의 전부는 바야흐로 대두되는 성장의 복판으로부터 직접 보통 사람을 대상으로 쓰였다. 여기에는 넓은 조망도 없고 조리에 맞는 구성도 없고 예술적 의도도 없다. 여기에 나타나는 시각적인 것, 감각적인 것은 의식적인 모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따라서 완전히 형상화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야기되어야 하는 사건에 붙어 있는 것이기에, 크게 동요된 사람들의 몸짓과 말에 드러나기에 그것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하게 손질하는 데 노력할 필요가 없다." "타키투스와 페트로니우스는 감각적 인상을, 전자는 역사 사건의, 후자는 특정한 사회 계층의 감각적 실감을 주려고 노력하며 그런 가운데 특정한 심미 전통의 한계를 존중한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지 않았고 그러한 전통을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별 노력 없이 순전히 자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의 내적인 움직임만을 통해서 이야기가 시각적인 구체성을 띠는 것이다."(101-2)


"유대인 세계의 독자나 청자는 실제 일어난 감각의 사건에서 눈을 돌려 그 의미를 생각하고록 요구받았다. 가령, 아담이 잠든 사이 그의 갈비뼈를 가지고 최초의 여자 하와를 만들었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극적인 사건이다. 한 병사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이야기도 시각적으로 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주석을 통해 맺어져서, 아담의 잠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잠의 상징이고, 아담의 옆구리 상처로부터 육신으로 본 인류의 원초적 어머니인 하와가 태어났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로부터 정신으로 본 모든 사람의 어머니인, 교회가 태어난다는 교의가 될 때, 감각적 사건은 상징적 의미의 세력 앞에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에 비해 그리스 로마의 실례들을 보면, 역사관이 제한된 채로 그 감각적 실체성은 완전한 것이 되어 있다. 이들은 감각적 외양과 의미의 갈등을, 초기 기독교의 현실관, 아니, 기독교 전체의 현실관에 배어 있는 이 갈등을 알지 못한다."(102-3)


3 페트루스 발보메레스의 체포


"제정 시대의 첫 번째 세기말로부터 갑갑하고 편편치 못한 것, 생활 분위기의 암흑화가 나타난다. 그것은 세네카 속에 의심할 바 없이 나타나 있으며 타키투스의 역사책의 암울한 가락은 곧잘 주목되어 왔다. 그러나 암미아누스에게서는 이 과정이 불가사의하고 감각적인 비인간화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는 음산하다. 그것은 미신과 피비린내 나는 광란과 탈진과 죽음의 공포, 무시무시하고 불가사의하게 뻣뻣한 동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상쇄하려는 것으로는 한결 더 어렵고 한결 더 절망적인 일을 성취하려는 똑같이 음산하고 측은한 결의, 즉 외부로부터 위협받고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제국을 보호하려는 결의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결의는 암미아누스의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강력한 인물들에게도 유연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련적인 초인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예컨대 그가 율리아누스의 말이라고 전하는 '선 채로 죽는다'란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107, 111-2)


"고전 문학의 기준으로 판단해 본다면 이 문체는 과도히 세련되고 과도히 감각적이다. 그 효과는 강력하지만 왜곡되어 있다. 그 효과는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현실만큼이나 왜곡되어 있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정상적인 인간 세계의 희화(戱畵)인 경우가 많으며 하나의 악몽과 같은 경우도 허다하다. 단순히 그 속에서 반역, 고문, 박해, 고발과 같은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러한 일들은 거의 모든 시대와 장소에 널리 퍼져 있으며 삶이 한결 견딜 만한 시대란 그리 흔치 않은 법이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를 그렇듯 숨 막히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이들을 상쇄하고 균형을 유지할 그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끔찍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끔찍한 것이 언제나 정반대되는 것을 낳으며 잔혹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대에도 인간 정신의 위대한 생명력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나 암미아누스의 세계에서는 이런 것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116-7)


"이목을 끄는 회화적 리얼리즘이 숭고한 문체 속으로 잠식해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암미아누스에게서 볼 수 있으며 또 그것은 고전 문학의 스타일 분리 법칙을 점차로 와해시키게 되는데 이러한 잠식은 기독교 저자들 사이에서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특히 철학과 수사학에서 철저한 훈련을 받은) 교부들에게서도 화려한 수사와 현란한 현실 묘사의 혼합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특히 히에로니무스는 이 점에 있어서 극단적인 본보기가 되어 주고 있다.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를 뺨치는 그의 풍자적 희화는 지극히 회화적이다. 스스로에게 예의나 관습에 대한 경의를 조금도 과하지 않고 먹기와 마시기, 신체의 돌봄(혹은 소홀함)과 성적 절제에 이르는 사소한 사항까지도 세세히 다루고 있는 금욕적 격언을 적고 있는 대목에서는 특히나 더욱 회화적이다." "그러나 감동적인 서정의 높이에까지 올라가게 할 수 있었던 히에로니무스의 희망조차도 현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의 불꽃도 음산한 불꽃이다."(121-4)


"당대 현실의 암울한 특징을 아무리 많이 드러내 보인다 할지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절은 암미아누스의 작품이나 히에로니무스의 구절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첫눈에 다른 원전과 구별이 가는 것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극적인 인간의 투쟁의 열기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스타일과 전혀 다르게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인간 생활을 생생하게 실감하고 직접적으로 그려 보여 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눈앞에 살아 있다." "〈그는 이제 들어올 때의 그가 아니었으며 그가 섞여 있게 된 군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내용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나 고전 고대의 산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문장이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갈등을 보이면서 한편 연합되어 있는 내면의 제력(諸力)이란 현상, 그 제력의 관계와 결과에 있어서의 대립과 종합의 교체를 그보다 더욱 정열적으로 추구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128-30)


4 시카리우스와 크람네신두스


"로마 제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땅 위의 모든 소식이 국가적인 의의에 따라서 수납, 분류, 정리되는 그러한 장소에 있지 않다. 그는 일찍이 존재했던 뉴스원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 뉴스가 보고되는 방법을 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는 갈리아 지방 전체를 개관하지 않는다. 그의 저술 대부분은, 이것이 가장 값있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자기의 교구 내에서 직접 본 것이거나 이웃 지역에서 전해 들은 것을 담고 있다. 그의 자료는 근본적으로 그의 눈앞에 가져와진 일에 한정된다. 그는 옛 의미의 정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에게 정치적인 관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이해관계의 관점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의 시야는 제한되어 있다. 그는, 그의 저술이 그 전체성을 불가피하게 드러내게 될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하나의 총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 내용에 있어서나 생각에 있어서나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다."(144-5)


"그레고리우스의 언어는 사실을 조직화하는 데에는 불충분한 준비밖에 없는 언어이다. 복합적인 사건이 일정한 단순의 도를 넘어서면, 그는 이를 일관성 있게 기술하지 못한다. 언어를 졸렬하게 조직화하거나 또는 전혀 조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사건의 구체적 측면에 살고 사건 속의 인물들과 말하고 그들 속에서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즐거움, 고통, 경멸, 분노 또는 그때그때 그들의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각종의 격정에 표현을 준다." "그레고리우스는 부릴 수 있는 연장이 문법적으로 혼란스럽고 구문상에 있어서 빈약해진, 거의 초보적인 라틴어밖에 없다. 그는 특별 효과를 낼 만한 재간도 없고 신기한 자극제나 문체상의 변주로 관심을 끌 만한 독자층도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다. 그는 이 이야기들을 토착방언으로 듣는다." "그가 전하는 것은 그 자신의, 그의 유일한 세계이다. 그에게 그 밖의 다른 세계는 없으며, 그는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151-2)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6세기에 이르러 교회의 활동은 실제적인 일과 조직에 관계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변화는 그레고리우스에 의하여 생생하게 예시되어 있다. 그는 수사학적 소양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교리 논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교리 회의의 결정은 한번 정해진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것, 즉 상상력의 밥이 되어 줄 성인의 전설, 유물, 이적, 폭력과 압제에 대하여 보호를 제공해줄 수 잇는 것들, 미래에 있을 보상을 내걸어 쉽게 받아들여지게 한 소박한 도덕적 교훈, 이런 모든 것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함께 살고 있던 민중들은 교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믿음의 신비에 대해서는 극히 조잡한 관념밖에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탐욕과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것들은 서로에 대한 공포심 그리고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공포심에 의해서만 다소 제어되는 것이었다."(153)


"그레고리우스는 많은 무서운 것들을 이야기한다. 모반, 폭력, 살인은 항다반사이다. 그러나 그의 기록이 보여 주는 소박하고 실제적인 활달성은 후기 로마의 저술가들에게 느껴지는, 그리고 기독교의 저술가들까지도 벗어나지 못한, 울적한 분위기의 형성을 막아 준다. 그레고리우스가 붓을 들었을 때, 이미 파국은 일어났고, 로마 제국은 붕괴하고, 그 조직은 와해되고, 고대 문화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긴장은 이미 해소된 다음이었다. 이제 해낼 수 없는 과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현실이 될 수 없는 과대한 야심에 괴롭힘을 당함이 없이, 그레고리우스의 영혼은 좀 더 자유롭고 직접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그 안에서 실제적인 삶을 영위할 용의를 갖추고 살아 있는 현실을 마주보았다."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문학적인 라틴어를 써 보겠다는 그레고리우스의 야심 속에 옛 전체의 자취가 남아 있을 뿐이다. 토착 방언은 아직은 활용할 수 있는 문학의 매체가 되지 못했다."(157-8)


5 롤랑 대 가늘롱


"〈신이 빛이 있으라 하였다. 하니 빛이 있었다.〉(창 1:3) 이 문장 속의 숭고성은 기복 진 도미구문의 장엄함이나 풍부한 비유의 화려함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상적인 간결성 속에 담겨 있다. 이 인상적인 간결성은 그 무한한 내용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듣는 자에게 섬뜩한 외경심을 불어넣어 주는 모호한 어조를 지니고 있다. 인과 관계의 연결사가 없이 일어난 일을 수식 없이 진술하고 있는 것이 이 문장에 숭고함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롤랑의 노래』의 주제는 협소하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있어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 그 어떠한 것도 문제성 있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현세와 내세의 모든 범주는 경직하게 규정되어 있어 모호함이 없이 딱 고정되어 있다. 합리적 이해가 그들에게 직접 끼어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관찰일 뿐, 이 시와 당대의 청중들은 이러한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경직하고 협소한 기정 질서 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산다."(175-6)


# 도미문掉眉文 : 주절의 완결을 끝에 둠으로써 서스펜스의 효과를 내는 문장


"『알렉시우스의 노래』 같은 11세기의 로맨스어 종교 원전에서 우리는 이와 똑같이 한정되어 있고 확고하게 굳어 있는 우주와 마주치게 된다." "『롤랑의 노래』에서와 같이 봉건 제도라고 하는 동일한 사회 구조와 동일한 기풍이 기독교도 사이에서건 이교도 사이에서건 한결같이 지배적이다. 세계는 아주 작아지고 좁아졌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의문을 두고 경직되어 있고 변함없이 회전하고 있다. 그 의문은 미리 대답이 주어졌고 그 물음에 올바르게 대답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인 것이다. 그는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그에게 열린 길은 하나가 있을 뿐이며 딴 길은 없다. 그는 또한 자기가 세 거리 갈림길에 이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유혹자가 왼쪽으로 가라고 꾈지라도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한한 가능성과 형태와 계층을 지니고 있는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의 광막한 무한 전체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은 사라져 버렸다."(177-9)


"경직하고 협소하고 문제성이 없는 도식화는 원래 기독교의 현실관에는 생소한 것이다. 현실 사건의 비유적 해석은 기독교가 공인되고 전파됨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져 갔으며 실제 사건을 취급할 때 그 현실적 내용을 용해시켜 그 의미 내용만을 남겨 놓게 되었다. 기독교 교의가 확립되고 교회의 소임이 점점 더 조직의 사항이 되며, 기독교의 원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설복하는 것이 문제가 됨에 따라 비유적 해석은 불가피하게 단순하고 경직된 도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직화 과정의 문제는 전체적으로 보다 깊은 곳에 미쳐 있다. 그것은 고대 문화의 쇠퇴와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가 경직화 과정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경직화 과정으로 끌려들어간 것이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그것이 구현하고 있던 질서의 원리가 붕괴함에 따라 전 세계의 내적 일관성도 무너졌다. 새 세계는 그 분할과 산산조각으로부터만 재건될 수 있었다. 그것은 젊은 세대와 노년 사이의 충돌이었다."(187)


"무공시 특히 『롤랑의 노래』는 인기 있었다. 무공시들이 봉건 사회 상류 계층의 공적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일반 민중에게 또한 호소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1~13세기의 청중들에게 있어 영웅 서사시는 역사였다. 그 속엣는 지난 시대의 구전 역사가 살아 있었다. 적어도 이러한 청중들이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구전도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지방어 연대기는 1200년경에 이르러 비로소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 연대기는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대 사건의 목격자의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사시 문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고 사실 영웅 서사시는 역사이다. 적어도 그것이 실제의 역사 상황을 상기시키고(아무리 그것을 왜곡하고 단순화한다 하더라도) 그 등장인물들이 역사적,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는 한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요소를 궁정 소설은 방기해 버린다. 그 결과 그것은 객관적 현실 세계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190-1)


6 궁정 기사의 출정


"궁정 사실주의는 한 계층─당대의 다른 계층으로부터 멀찌감치 있으면서 다른 계층으로 하여금 때로 다채로우면서도 기껏해야 희극적이거나 괴이한 장식물로서 등장하는 것을 허용하는 하나의 계층의, 극히 화려하고 풍미 있는 생활도를 제공해 준다. 그리하여 한쪽으로 중요한 것, 의미 있는 것, 높은 것과 다른 한쪽으로, 낮고 기괴하고 희극적인 것 사이의 계급적 구분은 소재에서 엄격하게 유지되어 있다. 앞쪽의 범위에 들어선 것은 봉건 계층뿐이다." "궁정 로맨스의 리얼리즘의, 계급적 제약보다 더 큰 제약은 그 동화적 분위기에서 온다. 궁정 로맨스의(특히 브르타뉴 연속물의) 성과 궁성과 싸움과 모험은 동화 세계의 것들이다. 그 결과 당대 현실의 다채롭고 생생한 그림은 땅에서 솟아난 듯, 즉 동화의 땅에서 솟아난 듯 나타난다. 그것은 모든 현실적, 정치적 바탕을 결하고 있다. 그 근거가 되는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는 결코 설명되지 아니한다. 그것은 매개됨이 없이 동화와 모험에서 직접 나온다."(202-3)


"알려진 세계를 넘어서 먼 미지의 땅으로 방황해 들어가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경이로운 일과 위험의 환상적 묘사는 옛날부터 있었다. 지리적으로 알려진 세계 안에서도 신들과 귀신과 요괴와 또다른 마술적 세력들의 작용을 통하여 사람을 위협하는 신비스러운 위험에 대한 표상과 이야기도 있었다. 궁정 문화 훨씬 이전에도 힘, 덕, 꾀, 신의 도움으로 그러한 위험을 이겨 내고 다른 사람들을 구출해 낸, 두려움 없는 영웅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성기에 있는 한 계층 전체가 그러한 위험을 이겨 내는 일을 그들의 고유한 임무, 이상의 관점에서 배타적인 임무로 생각한다는 것, 이 계층이 여러 전설의 유산, 그중에도 브르타뉴의 전설을 받아서 그들 고유의 그들을 위한 기사적 경이의 세계를, 마치 어셈블리 라인에서 공급되어 나오듯 환상적 해후와 위험('아방튀르'(aventure)라고 불리는 모험)이 기사를 향해서 줄지어 나오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러한 사태는 궁정 로맨스의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물이다."(205-6)


"궁정 로맨스는 기능적인 것, 역사적·현실적인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실을 묘사하는 경우, 단지 현란한 표면만이 묘사될 뿐이다. 피상적이 아닐 때는 시의 대상과 목표는 현실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의 인정을 요구하고 인정을 받은 계급 윤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두 개의 특징에 기초한 커다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모든 세간적인 우연성을 넘어서는 절대성과 그것에 승복하는 사람들에게 선택된 자의 공동체, 즉 다수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공동 집단에 속한다는 귀속감이다. 그리하여 봉건 윤리, 완전한 기사에 대한 이상화된 표상은 매우 크고 오래 지속된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기사와 더불어 생겨난 이상들, 즉 용기, 명예, 충성, 상호 존중, 귀족적 예의, 여성 존중 등은 문화가 전혀 달라진 시기의 사람들까지도 사로잡았다. 훗날의 도시 부르주아 계층은, 이것이 계급적이고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을 채택하였다."(207-8)


"궁정 로맨스에 있어서 사랑은 영웅적 행위를 위한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정치적, 역사적 맥락을 통한 행동의 동기 부여가 없는 마당에 이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기사적 완성의 본질적이며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서의 사랑은 여기에 결여되어 있는 다른 동기 가능성에 대한 대처물이 된다. 이와 더불어, 귀부인의 총애를 위하여 벌어지는 허구적인 사건이 핵심을 이루는 이야기의 배열 질서가 기본적으로 주어진다. 동시에 유럽 문학에 있어서 사랑이 시적인 소재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놓이게 되는 중요한 관습이 여기서 시작된다. 고대 문학은 사랑을 기껏해야 중간 정도의 값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비극에 있어서나 대서사시에 있어서나 사랑은 소재로서 지배적인 것이 아니었다. 궁정 문화에 있어서의 사랑이 차지했던 중심적 위치는 유럽의 지방어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높은 스타일의 원형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랑의 승화 작용이 비롯되고, 이것은 신비주의와 여성 숭배의 예절로 나아간다."(213-4)


7 아담과 이브


"기독교 구제극(救濟劇)은 작자와 관중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숭고한 주제이다. 그러나 연출은 민중의 취향에 맞기를 희구한다. 옛적의 숭고한 사건은 현재적이고 즉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어느 때나 일어날 수 있고 모든 관중이 상상할 수 있고 친숙한 당대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당대 프랑스인 누구나의 마음과 심정 속에 깊이 뿌리박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담은 자신이나 혹은 이웃 사람의 집에서 친숙한 투로 말하고 행동한다. 강직하기는 하나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남편이 파렴치한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간 허영심 많고 야심 많은 아내 때문에 어리석고 운명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만 어떤 시민의 집안이나 농부의 집안에서 일어나듯이 꼭 그렇게 매사가 진행된다. 아담과 이브 사이의 대화, 즉 세계사적인 중요성을 지닌 이 최초의 남녀 사이의 대화는 가장 단순한 일상 현실의 장면으로 바뀌어 있다. 숭고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순하고 격이 낮은 문체로 이루어진 장면이 되는 것이다."(225)


"숭고와 겸손의 대조적 융합은 성서의 특징으로서 일찍이 교부 시대부터 강조되었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은 신이 이러한 것을 지혜롭고 신중한 이들에게 숨기고 어린이들에게 제시했다는 성서의 원문(마태 11:25, 누가 10:21)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지위와 학문 있는 이들보다는 어부나 세금징수원이나 그같이 지체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사실(고전 1:26 이하)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이교도들은 자기네 안목으로는 말할 수 없이 조야한 언어로 양식상의 범주에 전혀 무지한 채 쓰인 글 속에 가장 높은 진실이 담겨 있다는 주장에 대경실색하였다." "바로 이 같은 비판은 성서의 특징이 되어 있는 참다운 위대함에 교부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 즉 성서가 일상적인 것과 격이 낮은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종류의 숭고성을 창조하여 내용이나 문체에 있어 가장 격이 높은 것과 가장 격이 낮은 것을 직접 연결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227-8)


"중세의 기독교 연극은 완전히 이 전통에 속해 있다. 본래 연극적 요소를 지니고는 있으나 예배 의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성서의 일화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중세의 기독교 연극은 소박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숨어 있는 진실로 이들을 인도하려 하였다." "아담과 이브 사이에 벌어지는 장면은 겸손한 문체로 마음이 가난한 소박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된다. 숭고한 사건을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 집어넣어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 나타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제가 숭고한 것임을 잊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가장 단순한 현실로부터 직접 가장 드높고 가장 은밀한 신과 관계되는 진실로 옮아간다." "이들 장면을 에워싸고 있는 틀의 정신은 역사의 비유적 해석의 정신이다. 이것은 일상적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동시에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과 관련된 세계사적 맥락의 일부이며 따라서 항구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초시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30-1)


8 파리나타와 카발칸테


"중세에 지방어로 쓴 저작들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는 오늘날 약간의 재능이라도 있는 저작자뿐만 아니라 약간의 언어적 훈련을 받은 서간문 필자라면 어려움 없이 사용하는 문장 구조를 끌어내어, 구태여 특출한 것으로서 추켜세우는 것에 의아한 마음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단테 이전의 저술가로부터 출발하여 본다면, 단테의 언어는 거의 불가해한 기적이다. 그들 중에는 대시인도 있었건만, 이들에 비교해 볼 때 단테의 언어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풍부성, 실감, 힘,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어형을 사용하고, 다양하기 짝이 없는 사상과 내용을 비교할 수 없이 확실한 힘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야말로 그의 언어를 통하여 세계를 새로 발견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이런저런 표현 형식이 나왔는가 하는 것은 증명되거나 추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증명이나 추정은 그의 언어 능력의 천재성에 대한 경탄을 높일 뿐이다."(264-5)


"대체로 『신곡』의 스타일상의 의도가 숭고미를 겨냥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시의 모든 행에서, 구어적인 시행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에게 모델을 제공해 준 것이 고대의 시인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테의 숭고미의 개념이, 언어 표현에서나 소재에 있어서 고대의 귀감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신곡』이 보여 주는 소재와 사상들은 고대의 관점에서는 기괴하달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높은 것과 낮은 것을 뒤섞어 놓고 있다. 그의 등장인물에는 조금 앞 시대나 당대의 역사에서 나온, 그리하여 흔히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 자의적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흔히 낮은 현실의 일상 세계에서의 모습 그대로 가차 없이 묘사된다.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단테는 일상적이고 기괴하고 불쾌한 것을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함에 어떤 한계를 두지 아니한다. 고대적 의미에서 숭고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던 것이, 단테의 손에 의하여 숭고한 것이 된다."(266-7)


"프로방스의 시인들과 '신체시'의 시인들에게는 지고의 사랑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테마였다. 단테는 『지방언어론』에서 세 가지 테마(무공(salus), 사랑(Venus), 덕(virtus))를 들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테마는 대부분의 서정시(canzoni)에서 사랑의 테마에 종속되었거나 사랑의 알레고리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신곡』에서도 이 틀은 베아트리체의 존재와 기능을 통해서 유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 틀은 굉장히 범위를 포괄한다. 『신곡』은 무엇보다도 백과사전적인 교훈시로서, 물리적, 우주론적, 윤리적, 역사적, 정치적 세계 질서를 묘사한다. 나아가 그것은 생각될 수 있는 모든 현실의 구역을 다 나타내고 있는, 현실 묘사의 예술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숭고한 장대성과 낮은 통속성, 역사와 전설, 비극과 희극, 인간과 지리가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신곡』은 개체적 인간의, 즉 단테 자신의 발전사이며 구원의 역사이다. 그럼으로써 또 인간 일반의 구원에 대한 비유가 된다."(272)


"단테는 그의 역사성을 피안에까지 가지고 간다. 그의 죽은 자들은 현세의 현재성과 변화로부터 차단되어 있지만, 추억과 뜨거운 참여는 그들을 너무나 강하게 충동하여 피안의 세계는 그것으로 가득 찬다. 연옥과 천국에서는 이것이 그처럼 강하지는 않다. 거기에서는 눈길이 지옥에 있어서처럼 뒤를 돌아보며 현세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앞과 위로 향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그는 현세적 생존을 신을 향하는 종착점과 더불어 보게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상의 삶은 살아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신의 심판과 영원한 영혼의 상태의 기초가 된다. 이 영혼의 상태는 참회자나 복자의 특정한 집단에 배치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생의 지상적 삶의 본질과 하느님의 구도 가운데 그것이 차지하는 일정한 자리를 의식 속에 새기는 일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전생의 지상적 삶의 성격을 완전히 연출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심판을 이루는 것이다."(277-8)


9 수사 알베르토


"감각적 현상의 세계가 최초로 정복되고 의식적인 예술적 구상에 따라서 조직되고 언어로 포착된 것은 보카치오에게서이다. 그의 타고난 성향은 자연스럽게 감각적이었고 관능성에 차 있는 우아하고도 매력있게 움직이는 형식을 창조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숭고한 문체보다는 중간적 문체가 어울렸다. 고전 고대 이후 최초로 그의 『데카메론』은 당대의 생활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품위 있는 소일거리가 될 수 있는 특정한 문체 수준을 고정시켜 놓았다. 이야기가 이제 도덕적 범례 구실도 하지 않게 되고 또 웃고 싶다는 평민들의 소박한 욕망에 보비위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야기와 설화는 이제 삶의 관능적 놀이에서 즐거움을 찾고 감각과 취향과 판단력을 지닌 신사 숙녀와 상층 계급의 행실 좋은 젊은이들에게 즐거운 소일거리 구실을 하게 되었다. 보카치오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액자'를 창조해 낸 것은 그의 설화 문학의 이러한 목적을 공표하기 위해서였다."(307-9)


"보카치오가 단테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관찰력이나 표현력이 아니다. 이러한 품성은 보카치오가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단테의 그것과는 전혀 성질을 달리한다. 보카치오의 관심은 단테가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던 현상과 감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단테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자기의 재능을 거침없이 구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지가지 인물들로 하여금 각자의 특정한 조건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의 말을 할 수 있게 한 단테의 역량이 보카치오로 하여금 그의 등장인물을 위해 똑같은 결과를 성취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세계를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과 공존하는 것은 추상적인 도덕적 해석 없이 모든 현상에 제각기 특정한 그리고 세밀히 구별된 도덕적 가치를 배당하는 확고하면서도 유연한 시각의 비판 의식이다. 이 비판 의식은 도덕적 가치가 현상들 자체로부터 솟아나게 하는 종류의 것이다."(313-4)


"보카치오의 책은 중간적 문체로 되어 있는데 그 경박스러움과 우아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확고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데카메론』에 반영되어 있는 가장 특징적이고 중요한 태도, 중세 기독교적 윤리에 정반대되는 것은 비록 가벼운 어조로 표현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차 있는 사랑과 자연의 교의이다. 기독교의 교리와 그 삶의 형태에 대한 근대인의 반향이 성도덕의 영역에서 그 실천력과 선전적 효과를 성공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독교의 초기 역사와 그 본질적 성격에 뿌리박고 있다. 성도덕의 영역에서 세속적인 삶에의 의지와 삶의 기독교적인 묵인 사이의 갈등은 세속적인 삶에의 의지가 자의식을 성취하면서부터 날카로워진다." "『데카메론』은 사랑할 수 있는 권리에 뿌리박은 완전히 실제적이고 세속적이며 확연한 도덕률을 발전시키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반기독교적이다. 그것은 교의적 타당성에 대한 강력한 주장 없이 우아하게 제시되어 있다."(321-3)


10 마담 뒤 샤스텔


"리얼리즘의 발전은, 중세 말엽에 특히 북부 프랑스와 부르고뉴 지방에 강하게 대두한 대(大)부르주아 문화의 융성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이 문화는 아직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현실 관계에 상응하는 '제3계급'이 이론적으로 분화될 때까지 이러한 상태는 오래 지속되었다). 이 계급은 그 상당한 부와 힘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와 생활 양식에 있어서 오랫동안 대부르주아적이기보다는 소부르주아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방 예술에 신변적이고 가정적인 모티프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가정적이고 경제적인 상황과 문제의 묘사와 마찬가지로 보기 좋은 실내 공간의 모티프가 가능해졌다. 사사로운 삶의 가정적이고 신변적이고 일상적인 것은 봉건적, 귀족적, 군주적 인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상황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그리하여 예술과 문학은, 봉건적 의식의 화려함에 대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중세 초기보다 한결 더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다."(346)


"어쨌든 중세 말기의 몇 세기에 구조적 이론적 사고의 피폐와 불모가, 특히 실제적 삶의 질서와의 관련에서 두드러져 나타나게 되고, 그리하여 기독교적 인간학의 육신적, 인간적 측면, 번뇌와 무상에 내던져져 있는 측면이 조잡하고 노골적인 형태로 강조되어 나타나게 된다. 고대적, 고전적 인간상에 날카롭게 대조되는 이 극단적으로 육신적인 인간상의 특징은 세간적 신분의 의상에 많은 존경심을 보이면서도 그 의상을 벗는 순간 그 사람에 대한 아무런 존경심도 갖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신분의 의상 밑에는, 나이와 병이 상하게 하고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체 이외에 아무 다른 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극단적인 인간 평등론인데, 적극적이고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모든 인생의 가치 절하라는 의미에서의 평등론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추구하는가는 전혀 의미 없다. 그의 본능이 그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고 현세적 삶에 집착하게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격도 없다."(347)


"이 문화권의 어떤 작가도 단테가 하였듯이 또는 보카치오 정도로도, 그 시대의 세계 현실 전체를 조감하고 제어하지 못한다. 각자가 각자의 영역을 알 뿐이다. 이 영역은, 앙투안 드 라살과 같이 여행을 많이 한 사람과 경우에도 매우 좁다. 어린 샤스텔의 죽음이나 왕자 가스통 드 푸아의 죽음은 젊음과 기구한 사연과 고통스러운 죽음의 구체적 경험 이상의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것이 끝났을 때, 독자에게 남는 것은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감각적인, 거의 육감적인 경악뿐이다. 작자는 그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거기에는 중요한 판단도 관점도 의도도 없다. 나아가 때로는 매우 강력하게 직접적이고 특수한 것에 초점을 맞춘 심리 묘사까지도 개체적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육신적, 인간적이다. 이들 작가들은 감각적 경험을 필요로 하긴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넘어가고자 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각자의 인생권은 육신적, 인간적 운명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제공했던 것이다."(357)


11 팡타그뤼엘의 입 안의 세계


"라블레는 그의 거인의 나라를 처음 유토피아(Utopia)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16년 전에 나왔던 토마스 모어의 책에서 빌린 것이다. 이 주제는 르네상스와 그 뒤를 잇는 2세기 간의 모티프의 하나로서 정치, 종교, 경제, 철학상의 혁명에 지렛대 구실을 했다. 그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나타났다. 첫째, 작가가 줄거리를 아직도 태반은 미지로 남아 있는 신세계에 배치하는 것인데 그 까닭은 유럽의 환경보다 한결 순수하고 한결 원시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국의 상황을 비판하는 데 효과적이면서 동시에 통쾌하게 은밀한 방법을 제공하는 하나의 방책이 된다. 또 하나는 생소한 이방인을 유럽 세계에 데려와 유럽의 기성 질서에 대한 비판이 그의 순박한 놀라움과 그가 구경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으로서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 어느 경우든 이 주제는 기성 질서를 뒤흔들고 그것을 보다 넓은 맥락 속에 배치하여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혁명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367)


"조야한 우스개 농담, 인간 육체의 동물적 파악, 성 문제에 있어서 절도와 유보의 결여, 리얼리즘과 풍자적 교훈적 내용의 혼합, 다루기 어렵고 때로는 난해한 박학의 어마어마한 축적, 우의적 비유의 사용 등과 이외의 많은 것이 중세 후기에 발견된다." "중세 후기의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우주론적으로, 종교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일정한 뼈대 안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은 한번에 사물의 한 국면만을 제시한다. 다양한 사물과 국면을 취급해야 할 때는 일반적인 질서라는 일정한 뼈대 속에 이들을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라블레의 전체적인 노력은 사물이나 사물의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국면과의 희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완전한 혼란상을 띠고 있는 현상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현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하여 비록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세계의 큰 바다로 독자를 꼬여 내는 데 힘쓴다."(375)


"라블레에게서 동물적 리얼리즘은 육체와 그 기능의 활력론적, 역동적 승리라는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에게는 벌써 원죄나 최후의 심판이 없으며 이에 따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공포도 없다. 자연의 일부로서 사람은 자기의 숨쉬는 삶, 신체의 기능, 지적 능력을 즐기며 자연 속의 다른 피조물처럼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인간과 자연의 숨쉬는 삶은 온통 라블레의 사랑, 지식에 대한 갈증 그리고 언어를 통한 표현 능력을 불러들여 사용한다. 그것은 그를 시인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는 시인이며 비록 감정은 결여되어 있으나 진정 서정시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리얼리스틱하고도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미메시스를 야기시키는 것은 의기양양한 현세의 생활이다. 그리고 그의 미메시스는 완전히 반기독교적이다. 그것은 중세 말의 동물적 리얼리즘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사고의 범위와 아주 반대되기 때문에 라블레의 중세로부터의 소외가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바로 문체의 중세적 특징 속에서이다."(376)


12 인간 조건


"몽테뉴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단순히 실천적 도덕적 요청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인식론적 요청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도, 아무런 신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아 인식의 우선적 위치는 인간의 도덕적 연구에서만 적극적으로 인식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임의적인 자신의 삶을 탐구함에 있어서 몽테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인간 조건 일반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가까운 주변 사람의 행동이든 또는 멀리 있는 정치적 역사적 영역의 행동이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평가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분별 있게 또는 무분별하게, 항시 사용하는 방법적 원칙을 그는 여기에서 드러내 보여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의 삶과 우리 자신의 내적 체험이 제시해 주는 척도를 적용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간 이해, 역사 이해는 우리의 자아 인식의 깊이와 우리의 도덕적 지평의 넓이에 의존하게 된다."(408-9)


"과학적 작업에는, 중세에 보다 훨씬 더 전문화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전적으로 대조되는 것이 전면적이고 고르게 완성된 인간의 이상적 표상이다." "그리하여 발생한 것이, 직업적 목표를 갖지 않는, 매우 적극적으로 사회적(사교적)이고 유행적인 형식의 일반 지식이다. 그것은 물론 백과사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것은 말하자면 모든 지식의 발췌, 그중에도 문학적이며 일반적으로 취미적인 것을 선호하는 발췌였다. 인문주의(Humanismus)는 바로 그 대부분의 자료들을 모아다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여기에 나중에 '교양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계층이 생겨났다." "이들에게는 전문 분야에 묶여 있는 전문지식인, 직업에 묶여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전문 분야의 사실적 지식에 빠져 있으면서 그의 행동과 말씨에 있어서 그것이 드러나는 사람은 희극적이고, 열등하며 비천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태도가 완전히 발전한 것은 17세기 프랑스의 절대주의 시대에서이다."(417-8)


"이러한 전개에 있어서, 몽테뉴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능한 사람〉, 〈무지할 때까지도 어느 면에서나 능한〉 사람은, 몰리에르의 연극의 후작들처럼, 일체의 것에 확실한 시체적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배울 필요가 없었던, 저 〈신사〉의 선구자임에 틀림이 없다. 결국 몽테뉴는 방금 이야기한 교양인층을 위하여 글을 쓴 최초의 저술가이다. 『에세』의 성공을 통하여 교양 독자가 처음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몽테뉴는 어떤 특정 신분층, 어떤 특정 전문 영역, '민중'(das volk), 기독교도들을 위하여 쓰지 아니한다. 그는 어떤 정파를 위하여 쓰지 아니한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는 최초의 세속적인 자기 성찰의 책을 쓴 것이다. 그러자 놀랍게, 자기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으로 느낀 사람들, 남녀가 나타난 것이다. … 그리하여 그가 저 최초의, 아직도 귀족적인, 아직도 전문화된 일을 강요받지 않은 교양인층에 알맞는 표상들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418-9)


13 지쳐 빠진 왕자


"중세의 몇 백 년 동안에 걸쳐 비극적인 것의 개념은 밋밋하게 발전하지를 못하였다. 이것은 고대의 비극 작품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 고대의 이론이 잊혀졌거나 오해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전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이러한 사실 때문인 것은 전혀 아니다. 기독교의 비유적인 인간 생활관이 비극적인 것이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지상의 삶의 사건이 아무리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라 해도 그 위로는 예수의 출현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위엄 있는 단일한 사건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비극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마침내는 흘러 들어가게 마련인 여러 사건의 복합체의 비유이거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즉 타락과 예수의 탄생과 수난, 그리고 최후의 심판 등 여러 사건의 복합체의 비유이거나 그림자였다는 말이다. 이것은 중심(重心)이 지상의 삶으로부터 저 건너 세상으로 옮겨지고 그 결과 비극이 이 세상에서 끝을 맺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431-2)


"그러다가 16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의 비유적인 도식(圖式)이 거의 유럽 전역에서 뒤흔들리게 되었다. 저세상에서의 결말은 완전히 저버려지지는 않았으나 의심할 바 없는 확실성은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시에 고대의 모범과 고대 이론이 뚜렷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고대에선 인생의 극적 사건들이 주로 사람의 바깥쪽에서 위로부터 달겨드는 행운의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비극의 최초의 근대적 형태인 엘리자베스 시대의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개인 성격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보다 큰 역할을 한다." "고대 비극의 경우 운명은 주어진 비극의 복합체, 즉 특정한 시기에 특정 인물이 말려 들어간 당면한 사건의 그물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추이는 비극적 갈등이 사건 추이만을 다루지 않고 즐거리가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 대화나 장면이나 등장인물 등을 보여 준다. 그래서 여기서의 운명은 주어진 갈등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432-4)


"셰익스피어의 윤리적 지적 세계는 고대 세계의 그것보다 훨씬 동요되고 층이 많으며 어떤 특정한 극의 줄거리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훨씬 극적이다.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고 사건이 일어나는 기반 자체가 한결 불안정하고 내적인 동요로 말미암아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으로서의 안정된 세계가 없고 갖가지 힘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고대 비극에서는 철학적 사색의 말은 극에 걸맞지 않았다. 그것은 격언 같고 아포리즘에 가깝고 줄거리에서 추상되어 일반화되어 있고 등장인물이나 그의 운명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셰익스피어 극에서 철학적 사색의 말은 사사로운 것이 된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당장의 상황에서 직접 나온 것이며 그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사건에서 얻은 경험의 결과가 아니며 사이를 두고 벌어지는 대화 속의 재치 있는 대답도 아니다. 그것은 행동의 적절한 방식이나 순간을 찾거나 그러한 것을 찾아낼 가능성을 의심하는 극적인 자기 검토이다."(440-1)


14 마법에 빠진 둘시네아


"돈키호테는 아마디스도 롤랑도 아닌 정신 나간 시골의 작은 신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감정은 진실하고 깊다. 둘시네아는 진정 그가 사모하는 아씨이다. 그는 스스로 인간의 최고의 의무라 여기고 있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진정 진실하고 용감하며 일체를 희생할 차비가 되어 있다. 이렇듯 절대적인 감정, 이렇듯 절대적인 결심은 비록 어리석은 환상에 비탕을 둔 것이라 할지라도 탄복을 자아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탄복을 거의 모든 독자가 돈키호테에게 아끼지 않아 온 것이다. 위대한 이상이란 생각을 돈키호테와 함께 연상하지 않는 문학 애호가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고 황당하며 그로테스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이상적이고 절대적이고 영웅적이다. 이러한 생각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세르반테스의 의도는 아니었다는 문헌학적 비평의 모든 기도를 물리치고 있다."(462-4)


"난점(難點)은 돈키호테의 고정관념 속에서 고상한 것, 무구(無垢)한 것, 취할 만한 것이 형편없는 어리석음과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상적이고 소망스러운 것을 위한 비극적인 투쟁은 무엇보다도 실제 현실 속에 뜻 깊게 개입해서 그것을 뒤흔들어 놓고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뜻 깊은 이상은 타성이나 째째한 심술, 질투 혹은 보다 보수적인 관점에서 나온 똑같이 뜻 깊은 저항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이상주의는 현세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있다. 돈키호테는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나 그의 고정관념의 이상주의가 그를 사로잡자마자 그 이해는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러한 상태 속에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완전히 무의미하고 현존 세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저 희극적인 혼란을 낳을 뿐이다. 그것은 성공할 가망성이 없을 뿐 아니라 현실과 접하는 바도 없고 그저 진공(眞空) 속에 널려 있을 뿐이다."(464)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이 결정적으로 '세르반테스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그 '어떤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교훈적인 목적의식도 아니다. 몽테뉴나 셰익스피어의 경우에서처럼 인간 존재의 불확실함이나 운명의 힘에 의해서 동요되고 있는 실존도 아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용감성과 마음의 평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하나의 태도(세계에 대한, 곧 자기 예술의 주제에 대한 태도)이다. 다채로운 감각의 희롱에서 그가 감득하게 되는 기쁨 말고도 그에게는 어떤 남국적인 과묵함과 오기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그 희롱을 아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게 된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형성한다. 그는 그것을 재미나 한다. 그것은 또한 독자들에게 세련된 지적 재미를 주게끔 의도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그는 중립이다. 그가 심판하지 않으며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는 재판을 하는 법도 없고 심문을 하지도 않는다."(480)


"세르반테스에게는 훌륭한 소설은 세련된 오락, 정직한 오락(honesto entretenimiento) 이상의 것이 아니다." "소설(小說)의 스타일이 그것이 최고의 소설이라 할지라도 우주의 질서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세르반테스의 염두에는 떠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작가로서의 자기 직업에 관계되는 문제에 한해서 판단을 내리려 든다. 세속 세계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며 악을 벌하고 선을 포상하는 것은 신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이곳 지상에서는 개관할 수 없는 현상의 질서는 놀이나 희롱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현상을 개관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미쳐 버린 라만차의 기사 앞에서 그것은 유쾌하고 재미있는 혼란의 춤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일상의 현실을 그림에 있어서, 그렇듯이 보편적이고 다층적이며, 그렇듯이 무비판적이고 문제성이 없는 유쾌함이 시도된 일은 유럽 문학에서는 다시는 없었다. 언제 또 어디에서 시도될 수도 있었을까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483-5)


15 가짜 독신자


"라신의 비극 「베레니스」와 「에스더」의 인물들은 자신의 왕공으로서의 신분을 너무나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잠시도 그 신분을 떠나는 일이 없다. 가장 깊은 불행, 가장 격렬한 감정 속에 있을지라도 라신의 비극적 인물은 그들의 신분을 통해서만 자신을 생각한다. 그들은 〈불쌍한 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공자(公子) 나!〉라고 말한다." "에스더는 기절하는 순간 〈딸들아, 너희의 죽어 가는 여왕을 부축해 다오······.〉하고 외친다. 이 비극적 인물들의 왕공으로서의 지위와 그에 따르는 고양화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어 그들의 인격에서 완전히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서, 하느님이나 죽음에 나아가면서도 타고난 왕공으로서의 자세를 지킨다. 이것은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서 보는 태도와는 전혀 대조되는 인간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낭만주의자들이 때로 그랬듯이 이들에게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면이 있음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505)


"비극적 인간과 언어적 표현에 대한 고전주의의 이념은, 지극히 복합적이며 다층적인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어떤 시대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것 없이 일상생활로부터 초연하게 있는 심미적 세련화의 소산이다." "17세기가 라신의 예술을 거장적인 솜씨와 강력한 효과를 가진 것이라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성적이며 상식적이며 자연스럽고 그럴싸하다고 보았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당대인들은 라신 이전의 작가들이 이상한 모험적인 사건들을 잔뜩 늘어놓았던 데 대하여 라신의 비극은 단순하고 분명한 상호 관련을 가지고 있는 사건들로 이루어졌다고 관찰하였다. 또 바로 앞 세대의 유행이 지나치게 영웅적이고, 미묘하고 황당무계한 갈등(코르네유의 영향이 컸다)과 '화사파'의 영향으로 과도하게 감상적이고 현학적인 로망스를 즐겼던 데 대하여 라신의 인물들이 겪게 되는 심리 상황과 갈등은 모범이 될 만하게 일반적인 타당성을 가진 것이었다."(518-9)


# 화사파 : 17세기 초 화사한 수사와 세련된 예의에 주력한 문학과 사회의 한 경향을 나타낸 사람들


"무엇이 가장 자연스러운가에 대하여 라신 시대는 나중 시대하고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문명과 대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시 문화, 순수한 민중성, 탁 트이고 막힘 없는 들판으로 이어지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그것은 행동을 우아하게 가지며 사회생활의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도 거기에 쉽게 맞아 들어갈 수 있는 교육 있고 닦인 인간형과 일치시켜 생각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교양이 많은 사람의 자연스러움을 높이 이야기하는 경우에 비슷한 것이다. 어떤 것을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이치에 맞는다 하고 보기 좋다고 하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조화, 이성, 자연스러운 품성의 함양의 요소를 크게 가졌던 고대 문명의 황금기에 17세기는 스스로 대응되는 것이라고 느꼈다. 루이 14세 아래의 프랑스인들은 대담하게 그들의 문화가 고대인들의 문화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본보기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견해를 유럽 전체에 부과하였다."(520-1)


16 중단된 만찬 1 ─계몽주의 시대의 리얼리즘


"18세기 문학에서는 눈물이 그 전엔 한 독립된 모티프로서 지니지 못하였던 중요성을 지니게 되기 시작한다. 영혼과 감각의 경계에서 눈물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으로 활용되었고 또 당시 유행했던 정감과 에로티시즘이 뒤섞인 감흥을 만들어 내는 데 각별히 효험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미술과 문학에서 점점 인기가 있게 된 것은 특히 쉽게 감동되고 쉽게 정열이 타오르는 미녀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거나 혹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었다. 눈물은 이를테면 하나나 지켜보는 대상이요 또 맛보는 대상이었다." "18세기에는 또한 여성의 옷차림의 '어지러움'이 이전보다 강조되고 있다. 훼방받은 목가(牧歌), 갑작스러운 바람, 넘어짐, 뛰어오름, 그리고 그 사이 여체(女體)의 가리운 부분이 드러나거나 흔히 '매력적인 어지러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제 색정적이고 감상적, 친밀함이 뒤섞여 색정적인 요소는 철학 및 과학의 계몽주의가 남긴 삽화에조차 나타나게 된다."(530-1)


"여기서 미덕이라는 것은 색정적 감정의 장치 전체와 떼어 놓고 생각될 수가 없다." "성적 자극은 항시 감상적이고 윤리적인 언어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것이 환기하는 훈기는 감상적인 윤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남용되고 있다. 이러한 혼합은 18세기에 자주 발견된다. 디드로의 윤리적 태도는 색정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열띤 감상성 속에 뿌리 박고 있으며 루소조차도 그 흔적을 여전히 보여 주고 있다. 점증하는 사회의 시민적 경향, 18세기 내내 유지되었던 정치적 사회적 안정, 중간 계층 및 부유층의 안온한 생활, 이에 따라 이러한 사회 계층의 젊은 세대 사이에 정치상·직업상의 근심이 없어지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당대의 많은 글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미적 형식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이 사회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무너졌을 때 그 문제성 있는 성격이 누구에게나 분명해졌지만 새로이 형성된 혁명적인 사상은 시민층의 감상주의를 흡수했고 이 감상주의는 그대로 남은 채 19세기로 넘어 들어갔다."(534)


"계몽주의의 선전 목적에 봉사하는 리얼리스틱한 구절의 스타일 수준은 생판 다르다. 그러한 보기는 섭정 시대 이후에 눈에 띄고, 더욱 빈번해지고 또 점점 논쟁적이며 공격적이 된다." "선전 방책으로 애용되는 '탐조등 수법'은 폭넓은 복합체의 한 작은 부분을 과도하게 조명하는 한편 강조된 부분을 설명하고 그 근원을 밝히고 또 균형이 잡히도록 나머지 부분을 보충할 만한 다른 모든 것을 눈에 띄지 않도록 한다. 그 결과 진실을 말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말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왜곡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전면적인 진실과 함께 여러 요소의 적절한 상호 관련을 갖추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생활 형식이나 사회 집단이 생명을 다했거나 혹은 그저 애호나 지지를 잃어버렸을 때 선전가들이 그것을 부당하게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의 부당성은 사실대로 부당한 것으로 반(半)의식적으로 느껴지기는 하나 사람들은 그것을 가학적인 희열을 느끼며 환영한다."(535-8)


"선전상의 방책으로 더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은 모든 문제의 극단적인 단순화이다. 이 단순화는 우선 문제를 정반대되는 하나의 대조로 좁혀 놓음으로써 성취된다. 그리고 이 대조는 검정과 하양, 이론과 실천 등등이 분명하고 단순하게 대립되어 있는 어지럽고 실속하고 기운찬 얘기 속에 제시되어 있다." "날카로운 대조법에 의한 문제의 단순화, 문제를 삽화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어지럼증 나는 급한 속도와 함께 소설 「캉디드」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연이어서 불행이 일어나는데 이 불행은 필요한 것이며 그럴 만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치에 맞는 것이고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서 최상의 세계에 값하는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설명되어 있다. 이리하여 냉정한 성찰은 웃음 속이 파묻히고 말아 흥이 난 독자는 볼테르가 라이프니츠의 논의나 형이상학적인 우주조화관 전반을 정당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거나 보게 되더라도 가까스로 겨우 보게 되는 것이다."(541-2)


17 중단된 만찬 2 ─18세기 프랑스의 리얼리즘


"루이 드 생시몽 공작은 17세기보다는 그가 실지로 회고록을 썼던 시대(18세기)에 분명히 소속하고 있다. 루이 14세의 궁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는 되풀이해서 17세기 사람으로 취급되어 왔지만 말이다. 그것도 60년대나 70년대의 궁정이 아니라 90년대의 궁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침투해 들어갔던 90년대도 그가 글을 썼을 때는 이미 머나먼 과거가 되어 있었다. 18세기의 전반은 많은 뒷날의 발전을 예고하고 그들 자신의 시대에 있어서 독보적인 개인과 사상과 운동의 수많은 예를 보여 주고 있다. 누가 비코를 17세기에 집어넣을 것이겠는가? 비코는 생시몽(1675년생)보다 7년 앞서 태어났고 그의 주요 작품도 몇해 앞서서 써내었다. 비코는 반(反)데카르트파였다. 마찬가지로 생시몽은 위대한 국왕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들 서로 다른 동시대인들에게는 외관상으로가 아닌 보다 더한 유사성이 있다. 취향이나 정신 성향에 있어서 두 사람은 모두 그들의 살아생전에 벌써 낡아져 버린 과거로 되돌아간다."(572)


"두 사람 모두 절박한 내적 충동이 그들의 언어에 무엇인가 비범한 것, 때로는 사납고 지나치리만큼 표현적인 것을 부여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당대의 취향에 호소했던 쉬움과 쾌적함과는 상극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인간을 그리는 과정에서 충동적으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역사 진행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사변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이들 두 사람은 인간이 그의 존재의 역사적 사실 속에 깊숙이 뿌리 박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당대의 합리주의적이고 비역사적 태도와는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생시몽이 회고록을 쓰고 있을 당시에 최초의 흐릿한 싹이 보이고 있었던 역사주의가 설정하였던 종류의 역사 이론의 흔적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개인을 넘어서 있으면서도 개성화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역사의 힘은 생시몽의 원근법 밖에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살아 있는 역사는 순전히 행동하는 개인과 특수한 심리 및 이에 따라 생겨난 여러 관계와 대립에 대한 통찰이다."(573)


18 음악가 밀러


"'중산 계급의 비극'이라는 장르는 사사로운 일, 가정사, 애처로운 일, 감상적인 것에 묶여 있어서, 이런 것들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 따르는 어조와 스타일로 하여 사회 무대를 확대하고 일반적인 정치 사회 문제를 포함시키는 데는 부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정치와 사회 일반의 문제에로의 새로운 진로가 트였다. 이제는 애처롭고 근본적으로 사사로운 사랑의 관계가 비협조적인 일가, 부모, 보호자 또는 사사로운 도덕적 장애에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공적(公敵), 사회의 부자연스런 계급 구조와 부딪치게 된 것이다." "'질풍노도' 시대의 혁명가들은 루소의 선례를 따라, 관능적이고 애처롭고 감상적인 상태의 사랑에 가장 높은 비극적 위엄을 부여하면서도 부르주아적이고 현실주의적이며 감상적인 요소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무릇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감정으로 생각되고 어떤 인생, 어떤 상황에서도 숭엄한 것이 되었다."(582)


"당대 독일의 상황은 넓게 사실적인 묘사를 쉽게 허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상은 잡다한 것이었다. 삶은, 지배 군주주의 혈통과 정치적인 사정의 우연으로 하여 생겨난 '역사적 영토' 속의 혼란된 무대에서 영위되었다. 이 작은 영토 내에서 억압적이고 때로는 숨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공손한 순종과 역사적인 전통성의 수용과 병존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태는 사변, 내성(內省), 명상 그리고 지방적인 기벽(奇癖)의 발달을 조장하는 데 적당한 것이지, 보다 넓은 관련과 넓은 영역을 의식하면서 단호하게 행동과 현실을 겨누는 데는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독일 역사주의의 기원은 그 형성기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헤르더는 역사를 가장 넓고 일반적인 의미의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동시에 깊은 특수성 속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의 역사 이해에는 구체성이 없었기 때문에 현실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들의 저작은 독일의 역사주의가 오래 지니게 될 두 가지 근본적인 경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586-7)


"즉, 한편으로는 특수주의와 민중적 전통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변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 두 가지 경향은 다 같이 구체적인 미래의 가시적인 징후들보다는 초시간적인 역사의 정신, 현재의 완전한 진화 완성에 그 관심의 초점을 둔다. 카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입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게 유지된 데에는, 18세기 말엽부터 점점 거스릴 수 없게 국외에서 밀려오는 구체적인 미래가 지도적인 독일인 대부분에게 가공할 만한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힘입은 바 있다. 프랑스 혁명이 그 영향력을 확산하고 뒤이어 사회적 격변을 가져오고 모든 반대 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으로 발전되어 나오는 새 사회 구조의 조짐들을 가져오는 동안, 독일은 혁명에 대하여 수동적이거나 수세적이거나 무반응의 태도만을 보여 주었다. 혁명을 적대시한 것은 위협을 당한 수구 세력만이 아니었다. 보다 젋은 지식인의 운동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괴테도 그런 위치에 있었다."(587)


19 라 몰 후작댁 1 ─스탕달의 비극적 리얼리즘


"스탕달의 리얼리스틱한 문학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의 세계에서의 그의 편편치 못함, 자기가 그 세계에 소속해 있지 않으며 그 속에 자기 자리가 없다는 의식에서 나왔다. 주어진 세계 속에서의 편편치 못함, 그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없는 무력은 확실히 루소 류의 낭만주의의 특색이다. 스탕달은 '폭풍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또 자기 배를 위한 적절하고 안전한 피난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자기 설명의 지점, 리얼리스틱한 문학의 지점에 도달하였다. 지쳐 빠졌거나 낙심해 있는 것은 아니나 젊은 날의 성공적인 이력이 이제 먼 옛일이 되어 버린 가난하고 외로운 40의 사나이로 자기가 아무 데도 소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의식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변의 사회 현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자기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느낌, 그때까지는 별 고통 없이 자랑스럽게 지녀 왔던 느낌이 이제 그의 의식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 되고 마침내는 그의 문학 활동의 되풀이되는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605)


"그러나 루소와는 달리 스탕달은 실제적인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어진 삶의 관능적 향락을 열망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실제적 현실에서 물러선 것이 아니었다. 또 처음부터 실제적 현실을 전적으로 비난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것을 정복하려고 하였고 처음엔 이에 성공하기도 했다. 물질적인 성공과 향락이 그의 소망이었다." "스탕달의 관심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관심은 있을 수 있는 사회의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상적으로 주어진 사회 속의 변화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시간적 원근법은 그가 시야에서 잃어버린 일이 없는 요소이며 삶의 형태와 양식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생각은 그의 사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사건의 세계를 포착하고 그것을 내적 연관과 함께 묘사하려는 스탕달의 태도에는 역사주의의 영향을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주의는 당시에 벌써 프랑스로 침투해 갔으나 스탕달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605-8)


"우리는 그에게서 합리주의적 경험적 관능적 모티프를 보지만 낭만주의적 역사주의의 모티프는 거의 볼 수 없다. 절대주의, 종교, 교회, 신분의 특권을 그는 여느 계몽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미신, 속임수, 그리고 책략 등이 얽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체로 교묘하게 꾸며진 음모가 정열과 함께 그의 작품 구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밑에 깔려 있는 역사의 동력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정치적 관점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정치적 관점은 그것만으로도 그를 낭만주의적 역사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샤토브리앙 같은 작가들의 과장된 양식에 그는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한편 그의 정치관에 따르면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사회 계급조차도 극히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낭만주의가 민중이란 말에 첨가해 놓은 감정적 가치를 추호도 섞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의 '공화주의적 미덕'에는 몸서리를 친다."(609)


"루소의 사상과 이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다음 세대는 현실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성공적인 저항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을 완전히 부숴 버린 새 세계에서 편편치 못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가장 강렬하게 루소에게 매혹되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세계에 반대하고 나서거나 외면하거나 하였다. 그들은 루소에게서 내부의 분열, 사회에서 도망치려는 경향, 물러나서 혼자 있으려는 요구를 물려받았다. 루소의 다른 측면, 즉 혁명적 전투적 측면을 그들은 잃어버렸다. 프랑스에 있어서의 지적 생활의 통일과 문학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파괴하였던 외적 상황도 이러한 발전에 기여하였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기까지의 시기에 나온 중요한 문학 작품 가운데서 당대 현실에서 도망하는 징후를 보이지 않는 작품은 거의 없다." "루소주의 운동이 겪은 엄청난 환멸로 인해, 이제 역사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포착되지도 않은 18세기 류의 삶의 묘사는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613-4)


20 라 몰 후작댁 2 ─두 개의 리얼리즘


"발자크는 스탕달처럼 그의 이야기의 인간들을 정확하게 규정된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 정립할 뿐만 아니라 이 연계 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에게는 모든 환경은 정신적 물리적 분위기가 되어 풍경과 주거 그리고 가구, 연장, 의복, 체격, 성격, 생활 주변, 생각, 활동, 운명에 삼투해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일반적인 역사의 상황은 여러 다른 환경들을 감싸는 대기가 된다(발자크의 분위기의 리얼리즘). 그가 이러한 묘사의 솜씨를 가장 능숙하게 또 진실되게 발휘한 것은 파리의 중간 또는 하류의 부르주아지나 지방의 사회를 묘사할 때였다. 그런 데 대하여 상류 사회의 묘사는 흔히 멜로 드라마적이고 사실에 어긋나고 또 작자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희극적인 것이었다. 다른 데에 멜로 드라마의 억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중간이나 하류층을 그릴 때에는 이것이 전체적인 진실을 손상시키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발자크는 상류 사회의 분위기 또 지성 사회의 분위기를 진실되게 그리지는 못했다."(620)


"스탕달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시대에 대항하며 생각하고 느낀다. 그들은 경멸을 가지고 나폴레옹 이후 시대의 권모술수의 세계에 내려간다. 구식의 관점으로 보면 희극적인 특성을 지닌 요소들이 언제나 섞여 있기는 하지만, 스탕달이 비극적 공감을 가지고 있고 또 그의 독자에게 그러한 공감을 요구하는 인물은 위대하고 대담한 생각과 정열을 지닌 진짜 영웅이어야 했다." "발자크는 그의 주인공들로 하여금 시대의 제약적인 조건 속으로 보다 깊이 뛰어들게 한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발달하게 된바, 현대의 현실을 객관적인 심각성을 가지고 대하는 관점을 아직 얻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무것이나 얼크러진 사건이면 비극이고 또 아무 충동이나 위대한 정열이라고 허세적으로 마구 덤비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인생 도처에 악마적인 세력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언어 표현을 멜로 드라마로 과장하는 것은 발자크의 격정적이고 비판할 줄 모르는 기질과도 맞고 낭만주의적인 인생 태도와도 맞는 것이었다."(631)


"플로베르의 서술법을 스탕달과 발자크의 서술법과 비교해 보면, 서론적으로 현대 리얼리즘의 두 특징이 벌써 나타나고 있다." "스탕달과 발자크에서 우리는 작자가 인물과 사건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끊임없이 듣는다. 때로 발자크는 그의 이야기에 계속적인 감정적, 풍자적, 윤리적, 역사적, 경제적 주석을 붙인다. 또 흔히 우리는 등장인물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듣게 되고 이런 경우 작자는 인물 자체와 자기를 일치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두 가지 면은 플로베르에게는 없는 것들이다." "플로베르에게 작자의 기능은 사건을 고르고 이것을 언어로 옮기는 일에 한정된다. 이것은 어떤 사건이든지 순정하고 완전하게 표현되기만 하면, 거기에 붙여지는 어떠한 의견이나 판단보다도 사건과 거기에 관련된 인물을 보다 훌륭하고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 책임과 솔직과 주의를 가지고 사용한 언어가 진실을 나타낸다는 깊은 믿음 위에 플로베르의 전 예술이 기초해 있다."(636-7)


"이렇게 하여 소재는 완전히 작자를 사로잡는다. 작자는 몰아 상태가 되어 그의 마음은 다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는 작용을 할 뿐이다. 가열한 참을성으로 이러한 상태가 이루어지면 그때그때의 소재를 작자는 완전하게 흡수하게 되고 여기에 따라 그것을 저울질하는 완전한 표현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 소재는 마치 하느님이 내려다 보듯이, 그 참다운 본질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고 생각된다."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어떤 소재나 본질적으로 심각한 면과 희극적인 면, 위엄과 저속함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그것을 적절하고 확실하게 재현한다면 그것에 알맞는 스타일을 적절하고 확실하게 찾아낼 수 있다. 소재를 그 위엄의 정도에 따라서 구분하는 '스타일의 높이'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도 필요 없고 바른 이해와 정확한 분류를 위한 사후적 분석을 시도할 필요도 없다. 소재 자체를 묘사하는 데에서 이 모든 것이 연유되어 나올 수 있다─플로베르의 생각은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637-8)


"플로베르의 스타일은 간단히 '객관적 심각성'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 심각성은 인간 생활의 격정과 얼크러짐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감동하지 않고 또는 감동한다는 표시를 드러내지 않고 냉정함을 유지한다." "삶은 밀어 올라오고 부글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 느리게 흐르는 것이다. 당대의 평범한 삶의 핵심은 플로베르에게 질풍노도의 행동과 격정, 마력에 사로잡힌 사람과 세력, 이런 것에 있지 않고 거죽은 공허한 일상번사지만 밑에는 보이지 않게 끊임없이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는 전반적이고 만성적인 상태 속에 있었다. 이 상태에서 정치 경제, 사회의 표토는 비교적 안정된 것 같으면서 실상은 터질 것 같은 긴장으로 차 있다. 사건들은 거의 움직이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플로베르가 그려 내는 개인적 사건과 시대 전체의 모습의 구체적인 결에는 무엇인가 숨은 위협이 드러난다. 시대에는 폭탄 장치처럼 어리석은 밀폐가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642-3)


21 제르미니 라세르퇴 1 ─없는 사람들과 심미주의


"19세기의 최초의 위대한 리얼리스트들, 스탕달과 발자크 그리고 플로베르에게서조차 하층 계급, 즉 본래의 민중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등장하는 경우에도 그들 자신의 터전 위에서나 그들 자신의 생활 속에서 포착되지 않고 위쪽에서 바라본 대로 그려져 있다. 플로베르에게 있어서조차도 민중은 대체로 하인이나 배경 인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탕달과 발자크가 도입한 리얼리즘의 스타일의 혼합은 제4계급 앞에서 전진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발전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리얼리즘은 당대 문명의 현실 전체를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시민 계급이 지배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대중들도 그들 자신의 힘과 기능을 더욱 의식하게 됨에 따라서 위협적으로 밀고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하층 계급 사람들은 진지한 리얼리즘의 주제로 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쿠르 형제의 말은 옳았고 그들의 정당성은 증명되었다."(650)


# 공쿠르 형제 에드몽과 줄르는 1864년에 간행한 소설 「제르미니 라세르퇴」 서문에서, 문학의 대상이 되기에 너무나 저속한 불행의 형태는 없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제4계급 권리의 최초의 옹호자들은 거의 모두가 제4계급 사람이 아니고 시민 계급에 속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을 제4계급에게 연결해 준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소설은 거의 모두 그들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했다. 이들 소설 속에는 하층 계급의 환경뿐 아니라 상류 시민 계급, 대도시의 암흑가, 갖가지 예술인 집단의 환경도 등장한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이든 간에 취급된 주제는 언제나 기이하고 예외적인 것이며 병적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의 여행, 당대의 예술가, 18세기의 여성과 미술, 일본 예술 등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들은 감각의 인상 특히 기이함이나 신기함을 위해 가치 있는 감각의 인상을 수집하고 묘사하였다. 그들은 흔하디 흔한 것에 식상한 까다로운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적합한 미적 경험, 특히 병적인 미적 경험을 발견하고 재발견하는 직업인이었다. 하층 계급이 문학의 주제로서 그들의 흥미를 끈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였다."(650-1)


"이제 당대의 실제적인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며 도덕적, 정치적, 그렇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인간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경향을 회피하며, 유일한 의무라고는 문체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있을 뿐이라는 문학관, 문학 이상이 생겨났다. 이러한 문학관이나 문학 이상은 취급된 주제가 감각적 생기를 띠고 뚜렷한 특성을 보여 주는 새롭고 낡아 빠지지 않은 형태 속에 나타나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태도에 의하면 예술의 가치, 즉 완벽하고 독창적인 표현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며 상충되는 철학이나 이론의 충돌에 참여하는 것은 무엇이고 불신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과 예술 일반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들은 숭배의 대상, 거의 종교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리하여 본래 표현을 감각적으로 즐기는 것이었던 쾌락은 너무나 높은 지위를 떠맡게 되어 쾌락(delectation)이란 말(아주 하찮고 쉽게 이를 수 있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말)은 이제 충분치 못한 것처럼 보였다."(658)


"물론 처음부터 개인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고 미적 향락을 위해서 인상과 그 예술적 재구성에 완전히 몰두하는 파괴적인 자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단계가 있지만 이런 태도는 19세기 후반기에 계속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당대의 문명과 당대의 사회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에는 속절없는 무력감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들로 하여금 당대한 문제를 외면하도록 강력히 작용하였다." "본능적인 혐오와 불가피한 밀착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 있으나 동시에 의견의 영역, 가능한 주제 선택, 생활과 표현의 형태 면에서 개인의 특이성을 발전시키는 일 등에 있어서는 거의 무질서한 자유를 누리면서 오만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의 수요가 많고 또 벌이가 좋은 대중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작가들은 순수 미학의 영역에서 고집불통의 독불장군이 되거나 혹은 작품을 통해서 시대의 문제에 실제로 개입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659)


22 제르미니 라세르퇴 2 ─졸라와 그의 동시대인들


"에밀 졸라는 플로베르와 공쿠르 형제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어깨를 밟고 서 있으며 그들과 공통점이 많다. 그도 또한 신경쇠약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심미적 리얼리스트의 무리 가운데서 뚜렷하게 달라 보인다." "졸라 예술을 혐오스럽고 누추하고 외설스럽다고 하면서 몹시 분격하였던 그의 적수들 가운데엔 전 시대의 가장 거칠고 상스러운 형태의 그로테스크하며 희극적인 리얼리즘조차를 태연히 때로는 기꺼이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틀림없이 많았다. 그들을 그토록 분격시켰던 것은 졸라가 자기 예술을 '저속한 스타일'의 것이기는커녕 희극적인 것으로도 내세우지를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적었던 모든 글줄은 모든 것이 가장 진지하고 또 도덕적으로 의도되었음을 나타내었다. 그의 글의 총계(總計)는 오락이나 예술적 실내 유희가 아니라 졸라가 본 대로의 그리고 독자들이 작품 속에 보도록 촉구된 당대 사회의 참다운 초상이었다."(662, 665-6)


"거칠고 참담한 쾌락, 이른 나이의 타락과 급속히 닳아 없어지는 육체, 방탕한 성생활, 성교가 돈이 안 드는 유일한 낙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생활 조건에 비해 너무 높은 출산율, 이러한 모든 것의 배후에서 적어도 가장 정력적이고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서 폭발하려는 혁명적인 적개심, 이러한 것이 소설 「제르미날」(1888)의 주제이다. 이들은 서슴없이 감각적인 말로 번역이 되었고 가장 뚜렷한 말이나 가장 추악한 장면 앞에서도 주저할 줄 모른다. 이 스타일의 기술은 인습적인 의미로서의 즐겁게 하는 효과를 낳을 것을 전적으로 포기하였다. 반대로 그것은 불쾌하고 답답하고 볼품없는 진실에 봉사한다. 그러나 이 진실은 동시에 사회 개혁을 위한 행동에의 소환장이기도 하다." "졸라는 스타일의 혼합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앞 세대의 순수하게 심미적인 리얼리즘을 넘어섰다. 그는 시대의 대문제(大問題)를 재료로 작품을 창조하였던 극소수의 19세기 작가의 한 사람이다."(667-8)


"러시아인들은 일상적인 사물들을 진지하게 구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저속한' 것이란 문학상의 범주를 진지한 문학적 취급에서 제외해 버리는 고전주의 미학은 러시아에서 단단히 뿌리박지도 못했던 것 같다. 또 러시아 리얼리즘이 19세기에야 그것도 19세기 후반기에야 비로소 본때를 보여 주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사회적 지위나 계급과 관계없이 모든 개개 인간이 신(神)의 창조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는 기독교적이며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근대 서양의 리얼리즘보다는 고대 기독교의 리얼리즘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 및 지적인 주도권을 장악한 활동적이고 개명(開明)된 시민 계급은 러시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시민 계급은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없으며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속에서조차 발견할 수 없다."(678-9)


"이 크나큰 민족의 집안에서 19세기 동안 줄곧 가장 강력한 성질의 내면 운동이 크게 퍼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 시대에 산출된 문학 작품을 보면 틀림없이 확인된다." "러시아 리얼리즘 속에 드러나 있는 내면 운동의 본질적인 특징은 묘사된 작중 인물들의 절대적이며 무한하고 격정적인 경험의 강렬성이다. 그것이 서구 독자들이 받는 가장 강력한 인상인데 누구보다도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에 그렇지만 톨스토이나 기타 작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인들은 19세기의 서구 문명에서는 희귀한 현상이 되어 버린 경험의 직접성을 유지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 강력한 실제적, 윤리적, 혹은 지적인 충격은 즉각 그들의 본능의 깊은 부분에서 그들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조용하고 거의 식물적인 존재로부터 실제적인 혹은 정상적인 문제에서 무시무시한 극단으로 옮아간다. 그들의 활력, 행동, 사고, 감정의 그네추는 유럽의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폭넓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680-1)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심하지만 다른 작가에서도 발견되는 사랑에서 미움, 다소곳한 헌신에서 짐승스러운 잔학성, 진리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쾌락에 대한 가장 속된 욕정, 경건한 순진성에서 잔인한 시니시즘에로의 변화에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요소가 있다. 이러한 변화가 흔히 동일 인물 속에서 과도기도 없이 어마어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진동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인물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그의 말과 행위는 과학적 초월, 형태 감각, 예의 범절에 대한 경의 때문에 서구 제국의 작가들이 가차 없이 표현할 수가 없었던 종류의 혼돈스러운 본능의 심층을 드러내 보여 준다.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 특히 도스토옙스키가 중구(中歐) 및 서구(西歐)에서 알려지게 되었을 때, 놀란 독자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어마어마한 정신의 잠재 가능성과 표현의 직접성은 리얼리즘과 비극의 혼합이 마침내 그 진정한 완성에 도달했음을 보여 주는 것처럼 여겨졌다."(681)


23 갈색 스타킹─새로운 리얼리즘과 현대 사회


# 새로운 리얼리즘의 특징 : 의식의 다인적(多人的) 묘사, 시간층의 개념, 외부적 사건의 비연속성, 관점의 이동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를 향하여」(1927)에는 몇 개의 중요한 스타일상의 특징이 발견된다.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화자라는 자격의 저자가 완전히 사라져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거의 모든 진술은,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고의 과정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램지 일가의 여름 별장이나 스위스인 하녀의 경우,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작가적 상상력의 대상인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들이 아니라, 소설의 등장인물 램지 부인이, 어떤 특정한 순간, 사람, 물건 또는 상황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 것, 또는 느끼게 된 것의 묘사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가 램지 부인의 인물됨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전연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램지 부인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소설 가운데 나오는 다른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그 여자의 인상과, 그들에게 끼치는 그 여자의 영향을 통하여서만 얻어진다."(699)


"한 방울의 눈물에 대하여, 어떤 가정들을 설정하는,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는 존재들, 그 여자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추측하는 인간들, 그리고 뱅크스 씨 등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만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의 현실 말고도 또다른 객관적 현실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 듯한 인상을 우리는 거기에서 받게 된다. 그런 객관적 현실에 대한 표시는, 기껏, 어떤 행위의 외부적 틀에 대한 짤막한 언급, 즉 〈램지 부인은 눈을 들면서 말했다〉 라든가, 〈언젠가 부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뱅크스 씨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1부 5장의) 마지막 문단에 이르면, 우리는 저자가 램지 부인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중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이 그 여자의 상황 그리고 그 여자의 행동이나 말에 대하여 가질 법한 그런 의심증과 궁금증 같은 것을 가지고 램지 부인을 관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699-700)


"프루스트는 객관성을 목표로 하며, 사건의 본질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써, 그는 그 자신의 의식을 길잡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의식은 특별한 종류의 의식이다. 그것은 아무 때나 움직이는 의식이 아니라 사물을 기억할 때 작용하는 그런 의식만을 가리킨다. 그것은 과거의 현실들을 모두 살아나게 하는 힘을 가진 의식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그러한 현실들의 현장이었던 과거에 그것이 처해 있던 상태에서 이미 오래전에 벗어났으며 이 새로운 상황에서 과거의 사실들을 (적절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면서 새로 정리해 보는 것이다. 이 의식은 단순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식과 현저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단히 과거의 일들을 서로 대면도 시키고, 또 그것들이 일어났던 과거의 어떤 특정한 때의 한계 내에서 그것들이 가졌던 편협한 의미, 또는 그것들의 내부적 시간의 연속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을 하게 된다."(710-1)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에서 외부적으로 중대한 인생의 전환점 또는 큰 재난 같은 것은 마치 별로 중요치 않은 사건들인 것처럼, 인물들에 대하여 아무런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할 자격이 없는 사실들인 것처럼 취급된 반면,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어떤 단편적 시간은 인간의 전 인생을 포용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펼쳐 보여 줄 능력을 가진 것으로, 즉 신용할 만한 정보의 출처처럼 취급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들, 즉 일상의 소재들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 어떤 주제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연대순에 따라, 외부적으로 중대한 사건이라든가 사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인생의 큰 전환점 같은 것에 큰 강조를 주며 충실하게 설명하려 드는 방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관점은 일상이 소재의 통합적인 묘사의 표현력을, 외부적인 사건이나 사실 중심인 연대 순서 표시의 표현력보다 더 신용하고 있다는 말이다."(718-9)


"사실상 나의 이 저서도 이런 방법을 예증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다. 나는, 가령 유럽에 있어서의 사실주의 발달사 같은 것은 도저히 쓸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방대한 자료 속에서, 나는 이런저런 시대의 한계를 정하는 일, 또 그 각 시대에 이런저런 작가들을 배치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실주의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 등에 관한 끝없는 논의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완전을 기하기 위해 나는 내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한 문제들을 다루어야 했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별도로 그런 문제를 다룬 자료들을 읽음으로써 급작스런 지식과 정보를 거두어들였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되는 방법, 즉 오랜 시일을 두고 특별한 목적이 없이 발견해 낸 몇 개의 모티프로 하여금 나를 이끌게 하고, 이것들을 내가 평소에 자연스러운 연구 활동을 통하여 친숙히 알게 되고 의미 깊게 생각하게 된 원전(原典)과 배합시켜 보는 방법은 성공과 소득의 전망을 가진 것으로 나는 본다."(719-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