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3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 지음, 박수민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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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종종 승전국은 패전국에 보상금(indemnity)을 부과했다. 가까운 사례로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뒤 신생국가인 독일이 프랑스에 보상금을 부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1차대전 당시 대부분의 전투와 그에 따른 파괴는 독일 바깥에서 벌어졌다. 따라서 1919년 파리 강화회의의 강화조약 작성자들은 배상금(repa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뒤이은 협상과 논의에서 패배에 따른 벌금을 내는 대신에 독일은 자국이 입힌 피해에 대한 복구비를 지불하게 되었다." "독일 정부는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기 위해 1923년 고의적으로 인플레이션을 통해 화폐 가치를 훼손했고, 1931~32년에는 급격한 디플레이션에 의지했다. 그에 따라 독일은 극히 적은 배상금을 지불했다. 승전국은 복구비를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했고, 국력을 더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독일 내부에서는 정부에 대한 엄청난 불만과 국가사회주의자가 지지하는 다른 형태의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22)


"1차대전에서 패배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수 군인과 일부 정치 지도자들은 독일이 전선에서 진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비롯한 이른바 체제전복 세력들에 의해 등뒤에서 칼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이 초래한 패배의 수혜자였던 이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새로운 시스템에는 다수 정당으로 인한 국론 분열도 설 땅이 없다.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서는 유일 정당의 단일한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가 승리를 보장할 것이다. 이런 메시지로 차츰 지지를 받은 정당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국가사회주의당이었다." "히틀러는 독일이 미래로 가는 길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잃은 자투리땅을 되찾는 것, 자신이 '그렌츠폴리티커(Grenzpolitiker)' 즉 '국경정치인'이라고 부른 이들이 옹호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라움폴리티커(Rarumpolitiker)' 즉 '공간정치인'이 요구한 것처럼 거대한 '레벤스라움(Lebensraum)' 즉 '생활공간'을 확보하는 전쟁에 달렸다고 주장했다."23-4)


2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여러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독일 공군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기갑부대가 동원된 작전은 적진을 신속하게 돌파해 진격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폴란드 특유의 지형과 열악한 도로 및 비행장 탓에 군용 장비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이것은 독일군 수뇌부가 폴란드 침공을 준비할 때 고려하지 못한 점이었다. 독일군은 야포 운반을 비롯해 부상자 운송까지 각종 수송을 말에 크게 의존했지만,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독일 육군의 기계화를 강조하는 선전 영화 때문에 이런 상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공격 전 독일군에는 폴란드의 성직자와 권력 집단 대부분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최종적으로는 전체 폴란드 인구를 독일인 이주자로 대체할 예정이어서, 저항 세력을 조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가능하면 빨리 제거해야 했다. 독일군이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일제 검거 작전을 시작하면서 어마어마한 수의 폴란드 국민과 상당수 유대인이 살해당했다."(39-41)


"독일군의 해상 작전을 지원한 스탈린은, 독일이 우선은 유럽 대륙 북부, 다음에는 서부, 뒤이어 남부에서 연합군을 몰아내는 것을 지원하는 활동이 결국 동부에서 소련이 홀로 독일을 상대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지원으로 침몰한 연합국 선박을 소련이 독일군의 공격을 받은 뒤 바다에서 들어올려 보급품 수송에 이용할 수 없을 것임을 알지 못했다. 결국 스탈린은 독일로부터 일부 해군 장비와 건조가 완료되지 않은 순양함을 얻는 대신에 독일 해군이 무르만스크항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 또한 무르만스크 서쪽 북극해에 해군 기지 하나를 제공했으며, 독일군 보조순양함이 태평양에 진입해서 연합국 선박을 격침시키도록 시베리아 북쪽 항로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독일군의 전쟁 활동에서 더 중요한 것은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철도 운행이 중단될 때까지 석유와 비철금속, 고무를 비롯한 중요 물자를 동아시아에서 철도를 이용해 공급하는 일이었다."(45)


3 서부 전선: 1940년


"프랑스 정부는 1차대전 때처럼 남서부 항구 도시인 보르도로 소재지를 옮겼다. 필리프 페탱 원수와 피에르 라발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프랑스 해군을 동원해 식민지 제국을 기반으로 싸움을 계속하기보다는 전쟁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스페인을 통해 독일에 휴전 제안을 했다." "히틀러는 프랑스에 관한 무솔리니의 요구를 거부하고 프랑스의 모든 해협과 대서양 연안을 포함한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일부 지역만 임시로 페탱의 통솔 아래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었다. 페탱은 독일이 장악한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독일은 새 프랑스 정권과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페탱은 그런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1940년 6월 24일 밤 독일-프랑스 및 이탈리아-프랑스 휴전 협정이 발효되었다. 100만 명이 넘는 프랑스 병력이 독일에 포로로 잡혔다. 소수의 프랑스인이 당시 갓 진급한 샤를 드골 장군의 '자유프랑스운동' 활동에 합류했다."(66-7)


"독일의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가 히틀러로 하여금 1941년 영국 침공을 미루게 했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1940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미루게 했을 것이다. 대규모 독일군 병력이 서부에서 독일 동부와 이미 점령된 폴란드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장비는 수리하고 추가로 확보해야 했다. 서부 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조치하고 항공기, 전차를 비롯한 무기도 교체하거나 수리해야 했다.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고 동쪽으로 진격할 군대에 물자를 공급해야 할 동부 지역에서는 운송 및 저장 시설도 꼭 개선해야 했다." "1940년 8월 독일의 이같은 준비에 따른 외교적 입장도 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쳤다. 독일은 핀란드에 대한 정책을 수정했다. 이제는 핀란드를 흡수하는 대신에 소련 공격 때의 지원을 기대했다. 독일은 헝가리와 루마니아 사이의 영토 분쟁도 해결했다. 그 결과 루마니아의 영토를 보장하고 독일군을 파병했으며, 대신에 루마니아가 소련 침공에 참여할 것을 기대했다."(73-4)


"한편, 롬멜은 3월 말에 리비아를 공격해서 서둘러 영국군을 이집트로 후퇴시켰다. 4월에 이라크에서 일어난 친추축국 반란은 주로 인도에 주둔하는 영국군에 의해 5월에 진압되었다." "독일이 이라크의 반란 세력에 제공할 수 있는 작은 지원은 비시 정부가 독일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프랑스 위임통치령인 시리아를 통해 제공되었다. 이 일 때문에 영국군은 6월 8일 시리아를 침공했다." "작전상 곧이어 진행할 소련 침공에 집중하던 독일군은 제대로 된 지원을 할 수 없었다. 독일군의 계획상 중동 지역 장악은 소련을 침공한 뒤에 진행할 예정이었다. 영국은 이 지역에 대한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가 임박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시리아를 드골에게 넘겼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국군의 승리가 가져온 중요한 효과는 소련으로 가는 남부 보급로가 된 지역이 연합국의 손에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남쪽에서 캅카스를 위협하는 추축국의 기지가 되었을 터였다."(82-3)


4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의 소련 침공


"독일이 소련 침공 계획을 수립하던 1940년 여름과 가을, 그리고 1941년 초에 독일군 수뇌부의 전쟁 계획은 여러 가지 가정을 기반으로 했는데 그 대부분이 오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1939년에서 1940년 사이의 겨울에 핀란드군을 상대로 보여준 소련군의 실망스러운 전투력은, 소련군의 대규모 병력이 악조건 속에서 싸움을 지속했을 뿐 아니라 독일과 그 동맹이 상대할, 이전에는 과소평가된 소련군 전력이 이제는 한층 강력해진 사실을 가렸다." "독일군은 많지도 않고 대체로 상태가 좋지 않은,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작전에 필요할지도 모르는 온갖 종류의 기갑차량이나 트럭을 위한 예비 부품과 수리 장비 같은 보급 문제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소련을 조기에 제압한 뒤 중동으로 진출할 생각이어서 보충용 전차는 소련군을 물리친 뒤에야 동부에 있는 부대에 보낼 예정이었고, 따라서 이런 전차는 사막용 위장 칠이 되어 있었다."(86-7)


"독일군이 진격하고 점령하던 처음 몇 개월간 독일이 취한 정책의 주요 특징은 해당 지역 소련 주민들에게 아주 명확하고 중요해졌다. 그런 사실은 소문으로 돌거나 여러 수단을 통해 전달되어 다른 지역의 소련 국민들에게도 똑같이 분명해졌다. 독일군은 소련 국민을 대량으로 살육했다. 전쟁 포로를 조직적으로 굶겨 죽였고, 병원과 정신 진료 기관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졌다. 포로에게 음식과 물을 주는 주민도 총살했다. 소련 국민들은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는 점을 즉각 상기했다." "주민들이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든지 상관없이 대개는 자신이 다음 차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42년 봄 개전 첫 7개월 동안 200만 명이 넘는 소련군 전쟁포로가 살해되거나 독일측에 수감된 채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그것은 하루 평균 1만 명에 달하는 수치였다." "독일은 스탈린을 혐오스럽고 두려운 독재자에서 인자한 보호자이자 소련인들의 구원자로 바꿔놓았다."(96-8)


5 일본, 중국과의 전쟁을 확대하다


"1941년 7월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남부를 점령했다. 이것은 남태평양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있는 네덜란드·영국·미국 영토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조치로, (역설적으로) 중국과의 전쟁에 집중하는 것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토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말레이반도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필리핀을 비롯한 태평양 내 미국령 섬을 공격할 세부적인 준비도 진행되었다. 도쿄의 일본 지휘부는 동남아시아에서 빼앗은 유전이나 광산, 고무 농장에서 나온 자원을 일본 본토로 옮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땅을 차지하는 것일 뿐, 물자는 타국에서 빌린 배의 도움 없이 일본 선박으로만 본토로 옮겨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일본이 싸움을 시작할 시점에 매우 중요한 점은 자국의 제한된 선박 운송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거나 잠수함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진지한 준비가 없었다는 사실이다."(111)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중단시켰고, 8월의 과달카날에서는 미군이 반격할 길을 열었다." "다만 전반적인 전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실은 일본군의 진격은 비록 중단되었지만 미국이 '유럽 우선' 전략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는 대신에 작전 가능한 전력 다수를 새로 동원해 1942년 내내 그리고 1943년 초반 몇 개월까지 태평양 전역에 투입시킨 점이다. 이 때문에 지중해와 유럽 전역에서 미군의 작전이 지연되었다. 하지만 추축군은 작전 조율에 실패함으로써 미군의 이런 상황을 활용할 수 없었다. 일본이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전투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패한 사실을 일본인들이 미완성 상태의 독일 항공모함 그라프체펠린을 구입해 태평양에 투입하기를 바랐을 때에야 독일이 비로소 알아차린 점은 양국 간 조율의 실패를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된 통신 활동을 감청한 미국은 독일이 일본의 요청을 거부한 사실에 실망했을 것이다."(125)


6 전세 역전: 1942년 가을~1944년 봄


"1943년 7월 5일 독일은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소련군을 괴멸시키고 동부 전선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치타델 작전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며칠간 전선 양 부분에서 격전을 벌인 뒤 앞으로 치고나가 소련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지만 여전히 돌파하지는 못했다. 사상자 수에서 독일군은 비록 소련군에 비해 적었지만 손실된 전력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의미 있는 돌파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작전상 큰 실패를 뜻했다. 독일군이 쿠르스크 돌출부를 공격한 뒤 실행된 소련군의 오룔 지역 공세뿐 아니라 서방 연합군의 시칠리아섬 상륙 소식 때문에 독일군의 공세 종료 시점은 앞당겨졌다. 이때부터 소련군이 주도권을 쥐었고,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이 독일 본토와 지중해에 분산되어 전력이 약해진 전장에서 제공권을 장악하며 유리한 상황을 활용했다. 소련군의 일련의 대규모 공세로 중부 전선의 독일군은 후퇴해 우크라이나까지 밀려났다. 그해 말에는 레닌그라드 포위도 뚫렸다."(135-7)


"1942~43년에 영미 양국은 독일과 독일이 장악한 유럽에 대한 공습을 대폭 늘렸다." "독일이 대공 방어를 위해 자원을 전용한 사실은 1943년 가을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한 공중전에서 전세를 역전시킬지도 몰랐다. 대공포와 더불어 독일군의 전투기 다수는 공격해 오는 폭격기에 점점 더 큰 손실을 입혔다. 손실률이 높은 수준에 이르자 연합군은 작전을 바꿔야 했다. 서유럽에서 완벽한 제공권 장악은 독일의 영국 침공만큼이나 중요한 연합국의 서유럽 공략의 필요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폭격기가 목표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전투기가 호위할 필요성이 F-51 머스탱 전투기의 성공적인 역할과 1944년 2~3월 대규모 공중전까지 이어진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후 유럽의 전황은 두 가지 사실에 큰 영향을 받았다. 우선은 독일이 1943년 6월 바다에서 패배를 뒤엎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연합국 공군이 그해 가을 직면했었던 문제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142-3)


"모든 전역에서 연합국이 전세를 뒤집은 확실한 표식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전쟁 초기에 장악했다가 그때껏 유지하던 지역에서 저항 운동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뿐 아니라 서유럽과 동남부 유럽이 그런 지역이었다." "전세의 확실한 전환은 그때까지 중립을 유지하던 일부 국가의 행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터키는 독일로의 크롬 반출을 줄이고 1945년 2월에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포르투갈은 대서양 전투에서 연합국이 아조레스제도를 이용하는 상황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전세 변화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연합국이 적어도 각국의 활동을 조정하려는 의지였다. 회담에서, 그리고 외교적이고 군사적 임무에서 각국은 잦은 논쟁과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했다." "반면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전력을 조율하거나 동맹국과 정보를 공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연합국은 때때로 비밀 정보까지 공유했지만, 추축국은 그러지 않았다."(151-2)


7 각국의 국내 상황과 기술·의료 분야의 발달


"폴란드는 전쟁으로 인해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나라였다. 독일은 세계 곳곳에 있는 유대인을 모조리 죽이기로 결정했는데, 그에 따라 300만 명이 넘는 폴란드 유대인이 살해당했고, 결국 숨거나 추방당한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소련은 많은 유대인을 그냥 추방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가 죽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중앙아시아로 쫓겨났기 때문에 독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독일은 폴란드에서 그리스도교인을 완전히 제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독일군이 쫓겨나기 전, 폴란드 그리스도교인 약 300만 명이 이런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결국 이 지역에는 독일계 이주민만 거주하게 되었다. 반면에 소련은 그리스도교든 유대교든 상관없이 모든 폴란드인을 충실한 스탈린 공산주의자로 바꾸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수십만 명이 죽거나 추방되는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이런 조치를 1939~41년에 시작했고, 1044~45년 독일군을 내쫓은 뒤 재개했다."(156-7)


"소련도 전쟁으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소련인 2500만 명이 살해되거나 질병과 기아로 사망했다. 국내 소수민족 수백만 명이 침략자에게 부역했거나 부역했을 것이라는 의혹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소련 정권이 국민 단합을 위해 전쟁 기간에 허용한 일시적인 통제 완화는 확대되기보다는 철회될 터였지만, 국제 관계에서 소련이 얻은 새로운 위상에 의해 국민 다수에게는 전반적으로 상쇄되었다. 소련인들에게는 엄청난 경제적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극심한 고난을 겪은 고국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정부 기관에서 일하던 이들은 이전 전쟁에서 러시아가 처했던 운명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 데서 어떤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영토를 잃기는커녕 얻었고, 유럽의 이웃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지 않고 동유럽과 남동 유럽을 장악했다. 게다가 1905년 일본에 빼앗긴 동아시아의 일부 영토도 되찾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거나 신경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165-6)


8 연합국의 승리: 1944~45년


"1944년 12월 중순에 마지막 예비전력을 동원해 아르덴에서 미군을 공격했다. 벨기에 북부 앤트워프(안트베르펜)의 주요 항구를 탈환하는 가운데 미국 측이 대규모 패배의 충격으로 국내 전선이 무너지면서 유럽 전쟁에서 발을 빼길 기대한 작전이었다. 또한 독일은 영국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나고 그에 따라 동부 전선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수 있기를 바랐다. 벌지 전투로 알려진 독일군의 공세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고 일시적으로 미군을 후퇴시켰다. 하지만 미군은 버텼고, 독일군이 병력과 장비를 크게 잃으면서 전세는 대패로 뒤바뀌었다. 1945년 2월 서방 연합군은 대공세를 재개했는데, 독일군이 라인강 서안에 집중하면서 병력 다수를 잃자 연합군은 곧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장애물을 넘어 독일로 향했다."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자 권력을 넘겨받은 되니츠 제독은 5월 8일 무조건 항복을 명령했다. 사소한 예외도 있었지만 독일의 모든 육해공군 부대는 항복 명령에 따랐다."(182-3)


"일본 수뇌부는 미군의 대규모 공습에도 꿈쩍하지 않았지만, 두 번의 핵공격이 벌어지자 어전회의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내부 동요의 가능성과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 가능성을 우려하는 조언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히로히토 일왕은 직접 항복 지시를 내렸다." "연합국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가 더 수월하도록 해주었다. 비록 연합국의 통제를 받을 테지만 일본이 원한다면 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겠다고 천명했고, 영국의 제안으로 일왕 대신에 지정된 관료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허용했다. 대신에 히로히토는 왕족을 포함한 특사를 보내 야전의 일본군 지휘관들이 항복하는 것을 돕도록 했다. 일본에서는 도쿄가 구역으로 나뉘는 점령지 분리도 없었다. 미군과 영연방군이 일본을 점령했지만 정부와 행정은 일본인의 손에 남았고, 연합국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감독을 받으며 개혁을 했다. 극소수의 일본군이 1970년대까지 저항했지만 대체로 일왕의 항복 명령은 이행되었다."(190-1)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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