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 현대사상의 모험 28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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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디세우스의 흉터


"호메로스의 시 작품 속에서 서스펜스의 요소는 극히 희박하다. 시의 스타일 전체를 통해서 독자나 청중의 숨을 죽이게 하도록 피해진 것은 없다. 샛길로 접어든 이야기─가정부 에우리클레이아가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오디세우스의 흉터를 알아보는 순간, 흉터의 기원을 서술하는 대목이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독자에게 서스펜스를 일으키기보다는 긴장을 완화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줄거리의 진행을 늦춤으로써 서스펜스를 증가시키려는 삽화는 이야기의 현재를 완전히 채워 버려서는 안 된다. 그 해결이 기다려지고 있는 위기를 완전히 독자의 마음에서 벗어나게 해서 서스펜스 자체를 파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위기와 서스펜스는 계속되어야 하며 배경에서 줄곧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배경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그때그때 유일한 현재이고 그것이 무대와 독자의 마음을 완전히 채우고 있다."(45)


"오디세우스의 흉터의 기원에 관한 탈선적 객담은 새로 등장한 인물이나 새로 나타난 물건이나 도구조차 비록 싸움이 한창일 때라도 그 성질이나 기원 등을 서술하는 많은 대목들과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 혹은 한 장면이 등장할 때 그가 그전까지 어디 있었으며 거기서 무엇을 했고 어떤 경로로 해서 그 자리에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들려주는 대목과도 다를 바가 없다." "호메로스의 느낌은 흉터가 조명되지 아니한 과거의 어둠으로부터 나타나는 대로 허용해 두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환하게 드러나야 하고 그와 함께 주인공의 소년시절의 일부도 드러나야만 한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호메로스 문체의 기본적 충동에 놓여 있었음에 틀림 없다. 즉 현상을 충분히 구체화된 형태로 묘사하고, 모든 부분이 뚜렷하게 보이고 감촉할 수 있도록, 또 시간 관계나 공간 관계를 완전히 고정시켜서 묘사하려는 충동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심리 과정에서도 숨겨져 있거나 표현되지 아니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47)


"호메로스 문체의 특질은 이와는 다른 형식의 세계에 속하지만 똑같이 고대의 것이며 똑같은 서사시 문체인 다른 보기와 비교해 보면 명백해진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려고 그에게 말하였다. 아브라함! 하고 그는 말씀하셨다. 보십시오. 여기 있습니다.〉(창세기 22:1) 호메로스를 읽고 난 후 이삭의 희생 이야기를 읽으면 이 서두조차 우리를 놀라게 한다. 두 존재의 대화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들이 지상의 어느 한곳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 점 역시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는 사실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히브리 말로는 〈나를 보십시오〉 정도의 뜻일 뿐이다." "즉 그를 부른 신에게 '여기서 나는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49-51)


"똑같이 고대의 것이며 똑같은 서사시인 이들 두 개의 문체보다 더욱 대조적인 문체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한쪽으로는 구체화되고 균등하게 조명되었으며 시간과 장소가 일정하게 명시되어 있으며 늘상 전경 속에서 아무런 틈서리도 없이 연결되어 있는 현상들이 있다. 생각과 감정은 완전히 표현되어 있으며 사건은 서스펜스 없이 느릿느릿 일어난다. 다른 한쪽에는 이야기의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현상만이 구체화되어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만이 강조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시간과 장소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해석을 필요로 한다. 생각과 감정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침묵과 단편적인 대화에 의해서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중층적이며 훨씬 착잡히 얽혀 있다. 몹시 긴박한 서스펜스로 차 있고 단일한 목표(그리고 그러한 한에서는 훨씬 통일적인)를 지향하고 있는 전체는 불가사의하고 '배경을 내포하고' 있다."(55-6)


2 포르투나타


"호메로스의 스타일과 다른 특징, 페트로니우스의 잔치의 가장 의미심장한 특징을 살펴보자. 그것은 고대로부터 전수되어 온 어떤 것보다 이 글이 사실적 묘사에 대한 현대적 개념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렇다는 것은 소재의 비속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사회 환경을 정확하고 완전히 비도식적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리말키오의 잔치에 모인 손님들은 1세기 남부 이탈리아의 속량된 신흥 부자들이다. 그들의 견해는 이런 부류의 전형적인 견해이고 그들의 언어는 거의 아무런 문학적 세련을 가하지 않은 시정의 언어 그대로이다. 이와 같은 것은 다른 데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페트로니우스의 문학적 야심은, 현대 사실주의 작가들처럼, 무작위적이고 일상적인 당대의 생활 환경을 사회 배경 속에서 그려 내며 등장인물로 하여금 문체의 유형화 없이 그들 자신의 언어로 말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대 리얼리즘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극한점을 이룬다."(79-80)


"고대 저작과 초기 기독교 저작 사이에 존재하는 스타일상의 차이는 이들 저작의 관점과 대상 독자가 다르다는 사실에 의하여 규정된다. 여러 가지 점에서 페트로니우스와 타키투스는 서로 다른 필자라고 하지만, 그들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다. 타키투스는 사건과 일의 전폭을 조망할 수 있는 고지에 서서 글을 쓴다. 그는 가장 높은 지위와 가장 높은 교양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것들을 분류하고 판단한다. 그가 무미건조하고 비시각적인 데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천재 때문만이 아니고 고대 자체가 시각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더없이 성공적으로 도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대상 독자로 삼았던, 그에 대등한 지위의 사람들은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라도 오랜 전통이 고상한 취미라고 정해 놓은 것의 한계 속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했다. 페트로니우스도 자기가 그리고 있는 세계를 위로부터 내려다본다. 그의 책은 가장 높은 교양의 소산이다."(100)


"이에 대하여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 대체로 『신약 성서』 거의 전부는 바야흐로 대두되는 성장의 복판으로부터 직접 보통 사람을 대상으로 쓰였다. 여기에는 넓은 조망도 없고 조리에 맞는 구성도 없고 예술적 의도도 없다. 여기에 나타나는 시각적인 것, 감각적인 것은 의식적인 모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따라서 완전히 형상화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야기되어야 하는 사건에 붙어 있는 것이기에, 크게 동요된 사람들의 몸짓과 말에 드러나기에 그것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하게 손질하는 데 노력할 필요가 없다." "타키투스와 페트로니우스는 감각적 인상을, 전자는 역사 사건의, 후자는 특정한 사회 계층의 감각적 실감을 주려고 노력하며 그런 가운데 특정한 심미 전통의 한계를 존중한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지 않았고 그러한 전통을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별 노력 없이 순전히 자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의 내적인 움직임만을 통해서 이야기가 시각적인 구체성을 띠는 것이다."(101-2)


"유대인 세계의 독자나 청자는 실제 일어난 감각의 사건에서 눈을 돌려 그 의미를 생각하고록 요구받았다. 가령, 아담이 잠든 사이 그의 갈비뼈를 가지고 최초의 여자 하와를 만들었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극적인 사건이다. 한 병사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이야기도 시각적으로 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이 주석을 통해 맺어져서, 아담의 잠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잠의 상징이고, 아담의 옆구리 상처로부터 육신으로 본 인류의 원초적 어머니인 하와가 태어났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로부터 정신으로 본 모든 사람의 어머니인, 교회가 태어난다는 교의가 될 때, 감각적 사건은 상징적 의미의 세력 앞에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에 비해 그리스 로마의 실례들을 보면, 역사관이 제한된 채로 그 감각적 실체성은 완전한 것이 되어 있다. 이들은 감각적 외양과 의미의 갈등을, 초기 기독교의 현실관, 아니, 기독교 전체의 현실관에 배어 있는 이 갈등을 알지 못한다."(102-3)


3 페트루스 발보메레스의 체포


"제정 시대의 첫 번째 세기말로부터 갑갑하고 편편치 못한 것, 생활 분위기의 암흑화가 나타난다. 그것은 세네카 속에 의심할 바 없이 나타나 있으며 타키투스의 역사책의 암울한 가락은 곧잘 주목되어 왔다. 그러나 암미아누스에게서는 이 과정이 불가사의하고 감각적인 비인간화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는 음산하다. 그것은 미신과 피비린내 나는 광란과 탈진과 죽음의 공포, 무시무시하고 불가사의하게 뻣뻣한 동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상쇄하려는 것으로는 한결 더 어렵고 한결 더 절망적인 일을 성취하려는 똑같이 음산하고 측은한 결의, 즉 외부로부터 위협받고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제국을 보호하려는 결의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결의는 암미아누스의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강력한 인물들에게도 유연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련적인 초인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예컨대 그가 율리아누스의 말이라고 전하는 '선 채로 죽는다'란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107, 111-2)


"고전 문학의 기준으로 판단해 본다면 이 문체는 과도히 세련되고 과도히 감각적이다. 그 효과는 강력하지만 왜곡되어 있다. 그 효과는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현실만큼이나 왜곡되어 있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정상적인 인간 세계의 희화(戱畵)인 경우가 많으며 하나의 악몽과 같은 경우도 허다하다. 단순히 그 속에서 반역, 고문, 박해, 고발과 같은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러한 일들은 거의 모든 시대와 장소에 널리 퍼져 있으며 삶이 한결 견딜 만한 시대란 그리 흔치 않은 법이다. 암미아누스의 세계를 그렇듯 숨 막히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이들을 상쇄하고 균형을 유지할 그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끔찍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끔찍한 것이 언제나 정반대되는 것을 낳으며 잔혹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대에도 인간 정신의 위대한 생명력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나 암미아누스의 세계에서는 이런 것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116-7)


"이목을 끄는 회화적 리얼리즘이 숭고한 문체 속으로 잠식해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암미아누스에게서 볼 수 있으며 또 그것은 고전 문학의 스타일 분리 법칙을 점차로 와해시키게 되는데 이러한 잠식은 기독교 저자들 사이에서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특히 철학과 수사학에서 철저한 훈련을 받은) 교부들에게서도 화려한 수사와 현란한 현실 묘사의 혼합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특히 히에로니무스는 이 점에 있어서 극단적인 본보기가 되어 주고 있다.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를 뺨치는 그의 풍자적 희화는 지극히 회화적이다. 스스로에게 예의나 관습에 대한 경의를 조금도 과하지 않고 먹기와 마시기, 신체의 돌봄(혹은 소홀함)과 성적 절제에 이르는 사소한 사항까지도 세세히 다루고 있는 금욕적 격언을 적고 있는 대목에서는 특히나 더욱 회화적이다." "그러나 감동적인 서정의 높이에까지 올라가게 할 수 있었던 히에로니무스의 희망조차도 현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의 불꽃도 음산한 불꽃이다."(121-4)


"당대 현실의 암울한 특징을 아무리 많이 드러내 보인다 할지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절은 암미아누스의 작품이나 히에로니무스의 구절과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첫눈에 다른 원전과 구별이 가는 것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극적인 인간의 투쟁의 열기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스타일과 전혀 다르게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인간 생활을 생생하게 실감하고 직접적으로 그려 보여 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눈앞에 살아 있다." "〈그는 이제 들어올 때의 그가 아니었으며 그가 섞여 있게 된 군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내용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나 고전 고대의 산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문장이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갈등을 보이면서 한편 연합되어 있는 내면의 제력(諸力)이란 현상, 그 제력의 관계와 결과에 있어서의 대립과 종합의 교체를 그보다 더욱 정열적으로 추구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128-30)


4 시카리우스와 크람네신두스


"로마 제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땅 위의 모든 소식이 국가적인 의의에 따라서 수납, 분류, 정리되는 그러한 장소에 있지 않다. 그는 일찍이 존재했던 뉴스원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 뉴스가 보고되는 방법을 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는 갈리아 지방 전체를 개관하지 않는다. 그의 저술 대부분은, 이것이 가장 값있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자기의 교구 내에서 직접 본 것이거나 이웃 지역에서 전해 들은 것을 담고 있다. 그의 자료는 근본적으로 그의 눈앞에 가져와진 일에 한정된다. 그는 옛 의미의 정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에게 정치적인 관점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이해관계의 관점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의 시야는 제한되어 있다. 그는, 그의 저술이 그 전체성을 불가피하게 드러내게 될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하나의 총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 내용에 있어서나 생각에 있어서나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다."(144-5)


"그레고리우스의 언어는 사실을 조직화하는 데에는 불충분한 준비밖에 없는 언어이다. 복합적인 사건이 일정한 단순의 도를 넘어서면, 그는 이를 일관성 있게 기술하지 못한다. 언어를 졸렬하게 조직화하거나 또는 전혀 조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사건의 구체적 측면에 살고 사건 속의 인물들과 말하고 그들 속에서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즐거움, 고통, 경멸, 분노 또는 그때그때 그들의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각종의 격정에 표현을 준다." "그레고리우스는 부릴 수 있는 연장이 문법적으로 혼란스럽고 구문상에 있어서 빈약해진, 거의 초보적인 라틴어밖에 없다. 그는 특별 효과를 낼 만한 재간도 없고 신기한 자극제나 문체상의 변주로 관심을 끌 만한 독자층도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다. 그는 이 이야기들을 토착방언으로 듣는다." "그가 전하는 것은 그 자신의, 그의 유일한 세계이다. 그에게 그 밖의 다른 세계는 없으며, 그는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151-2)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6세기에 이르러 교회의 활동은 실제적인 일과 조직에 관계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변화는 그레고리우스에 의하여 생생하게 예시되어 있다. 그는 수사학적 소양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교리 논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교리 회의의 결정은 한번 정해진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것, 즉 상상력의 밥이 되어 줄 성인의 전설, 유물, 이적, 폭력과 압제에 대하여 보호를 제공해줄 수 잇는 것들, 미래에 있을 보상을 내걸어 쉽게 받아들여지게 한 소박한 도덕적 교훈, 이런 모든 것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함께 살고 있던 민중들은 교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믿음의 신비에 대해서는 극히 조잡한 관념밖에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탐욕과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것들은 서로에 대한 공포심 그리고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공포심에 의해서만 다소 제어되는 것이었다."(153)


"그레고리우스는 많은 무서운 것들을 이야기한다. 모반, 폭력, 살인은 항다반사이다. 그러나 그의 기록이 보여 주는 소박하고 실제적인 활달성은 후기 로마의 저술가들에게 느껴지는, 그리고 기독교의 저술가들까지도 벗어나지 못한, 울적한 분위기의 형성을 막아 준다. 그레고리우스가 붓을 들었을 때, 이미 파국은 일어났고, 로마 제국은 붕괴하고, 그 조직은 와해되고, 고대 문화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긴장은 이미 해소된 다음이었다. 이제 해낼 수 없는 과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현실이 될 수 없는 과대한 야심에 괴롭힘을 당함이 없이, 그레고리우스의 영혼은 좀 더 자유롭고 직접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그 안에서 실제적인 삶을 영위할 용의를 갖추고 살아 있는 현실을 마주보았다."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문학적인 라틴어를 써 보겠다는 그레고리우스의 야심 속에 옛 전체의 자취가 남아 있을 뿐이다. 토착 방언은 아직은 활용할 수 있는 문학의 매체가 되지 못했다."(157-8)


5 롤랑 대 가늘롱


"〈신이 빛이 있으라 하였다. 하니 빛이 있었다.〉(창 1:3) 이 문장 속의 숭고성은 기복 진 도미구문의 장엄함이나 풍부한 비유의 화려함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상적인 간결성 속에 담겨 있다. 이 인상적인 간결성은 그 무한한 내용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듣는 자에게 섬뜩한 외경심을 불어넣어 주는 모호한 어조를 지니고 있다. 인과 관계의 연결사가 없이 일어난 일을 수식 없이 진술하고 있는 것이 이 문장에 숭고함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롤랑의 노래』의 주제는 협소하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있어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 그 어떠한 것도 문제성 있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현세와 내세의 모든 범주는 경직하게 규정되어 있어 모호함이 없이 딱 고정되어 있다. 합리적 이해가 그들에게 직접 끼어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관찰일 뿐, 이 시와 당대의 청중들은 이러한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경직하고 협소한 기정 질서 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산다."(175-6)


# 도미문掉眉文 : 주절의 완결을 끝에 둠으로써 서스펜스의 효과를 내는 문장


"『알렉시우스의 노래』 같은 11세기의 로맨스어 종교 원전에서 우리는 이와 똑같이 한정되어 있고 확고하게 굳어 있는 우주와 마주치게 된다." "『롤랑의 노래』에서와 같이 봉건 제도라고 하는 동일한 사회 구조와 동일한 기풍이 기독교도 사이에서건 이교도 사이에서건 한결같이 지배적이다. 세계는 아주 작아지고 좁아졌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의문을 두고 경직되어 있고 변함없이 회전하고 있다. 그 의문은 미리 대답이 주어졌고 그 물음에 올바르게 대답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인 것이다. 그는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그에게 열린 길은 하나가 있을 뿐이며 딴 길은 없다. 그는 또한 자기가 세 거리 갈림길에 이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유혹자가 왼쪽으로 가라고 꾈지라도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한한 가능성과 형태와 계층을 지니고 있는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의 광막한 무한 전체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은 사라져 버렸다."(177-9)


"경직하고 협소하고 문제성이 없는 도식화는 원래 기독교의 현실관에는 생소한 것이다. 현실 사건의 비유적 해석은 기독교가 공인되고 전파됨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져 갔으며 실제 사건을 취급할 때 그 현실적 내용을 용해시켜 그 의미 내용만을 남겨 놓게 되었다. 기독교 교의가 확립되고 교회의 소임이 점점 더 조직의 사항이 되며, 기독교의 원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설복하는 것이 문제가 됨에 따라 비유적 해석은 불가피하게 단순하고 경직된 도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직화 과정의 문제는 전체적으로 보다 깊은 곳에 미쳐 있다. 그것은 고대 문화의 쇠퇴와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가 경직화 과정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경직화 과정으로 끌려들어간 것이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그것이 구현하고 있던 질서의 원리가 붕괴함에 따라 전 세계의 내적 일관성도 무너졌다. 새 세계는 그 분할과 산산조각으로부터만 재건될 수 있었다. 그것은 젊은 세대와 노년 사이의 충돌이었다."(187)


"무공시 특히 『롤랑의 노래』는 인기 있었다. 무공시들이 봉건 사회 상류 계층의 공적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일반 민중에게 또한 호소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1~13세기의 청중들에게 있어 영웅 서사시는 역사였다. 그 속엣는 지난 시대의 구전 역사가 살아 있었다. 적어도 이러한 청중들이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구전도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지방어 연대기는 1200년경에 이르러 비로소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 연대기는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대 사건의 목격자의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사시 문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고 사실 영웅 서사시는 역사이다. 적어도 그것이 실제의 역사 상황을 상기시키고(아무리 그것을 왜곡하고 단순화한다 하더라도) 그 등장인물들이 역사적,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는 한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요소를 궁정 소설은 방기해 버린다. 그 결과 그것은 객관적 현실 세계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190-1)


6 궁정 기사의 출정


"궁정 사실주의는 한 계층─당대의 다른 계층으로부터 멀찌감치 있으면서 다른 계층으로 하여금 때로 다채로우면서도 기껏해야 희극적이거나 괴이한 장식물로서 등장하는 것을 허용하는 하나의 계층의, 극히 화려하고 풍미 있는 생활도를 제공해 준다. 그리하여 한쪽으로 중요한 것, 의미 있는 것, 높은 것과 다른 한쪽으로, 낮고 기괴하고 희극적인 것 사이의 계급적 구분은 소재에서 엄격하게 유지되어 있다. 앞쪽의 범위에 들어선 것은 봉건 계층뿐이다." "궁정 로맨스의 리얼리즘의, 계급적 제약보다 더 큰 제약은 그 동화적 분위기에서 온다. 궁정 로맨스의(특히 브르타뉴 연속물의) 성과 궁성과 싸움과 모험은 동화 세계의 것들이다. 그 결과 당대 현실의 다채롭고 생생한 그림은 땅에서 솟아난 듯, 즉 동화의 땅에서 솟아난 듯 나타난다. 그것은 모든 현실적, 정치적 바탕을 결하고 있다. 그 근거가 되는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는 결코 설명되지 아니한다. 그것은 매개됨이 없이 동화와 모험에서 직접 나온다."(202-3)


"알려진 세계를 넘어서 먼 미지의 땅으로 방황해 들어가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경이로운 일과 위험의 환상적 묘사는 옛날부터 있었다. 지리적으로 알려진 세계 안에서도 신들과 귀신과 요괴와 또다른 마술적 세력들의 작용을 통하여 사람을 위협하는 신비스러운 위험에 대한 표상과 이야기도 있었다. 궁정 문화 훨씬 이전에도 힘, 덕, 꾀, 신의 도움으로 그러한 위험을 이겨 내고 다른 사람들을 구출해 낸, 두려움 없는 영웅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성기에 있는 한 계층 전체가 그러한 위험을 이겨 내는 일을 그들의 고유한 임무, 이상의 관점에서 배타적인 임무로 생각한다는 것, 이 계층이 여러 전설의 유산, 그중에도 브르타뉴의 전설을 받아서 그들 고유의 그들을 위한 기사적 경이의 세계를, 마치 어셈블리 라인에서 공급되어 나오듯 환상적 해후와 위험('아방튀르'(aventure)라고 불리는 모험)이 기사를 향해서 줄지어 나오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러한 사태는 궁정 로맨스의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물이다."(205-6)


"궁정 로맨스는 기능적인 것, 역사적·현실적인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실을 묘사하는 경우, 단지 현란한 표면만이 묘사될 뿐이다. 피상적이 아닐 때는 시의 대상과 목표는 현실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 세계에서의 인정을 요구하고 인정을 받은 계급 윤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두 개의 특징에 기초한 커다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모든 세간적인 우연성을 넘어서는 절대성과 그것에 승복하는 사람들에게 선택된 자의 공동체, 즉 다수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공동 집단에 속한다는 귀속감이다. 그리하여 봉건 윤리, 완전한 기사에 대한 이상화된 표상은 매우 크고 오래 지속된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기사와 더불어 생겨난 이상들, 즉 용기, 명예, 충성, 상호 존중, 귀족적 예의, 여성 존중 등은 문화가 전혀 달라진 시기의 사람들까지도 사로잡았다. 훗날의 도시 부르주아 계층은, 이것이 계급적이고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을 채택하였다."(207-8)


"궁정 로맨스에 있어서 사랑은 영웅적 행위를 위한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정치적, 역사적 맥락을 통한 행동의 동기 부여가 없는 마당에 이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기사적 완성의 본질적이며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서의 사랑은 여기에 결여되어 있는 다른 동기 가능성에 대한 대처물이 된다. 이와 더불어, 귀부인의 총애를 위하여 벌어지는 허구적인 사건이 핵심을 이루는 이야기의 배열 질서가 기본적으로 주어진다. 동시에 유럽 문학에 있어서 사랑이 시적인 소재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놓이게 되는 중요한 관습이 여기서 시작된다. 고대 문학은 사랑을 기껏해야 중간 정도의 값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비극에 있어서나 대서사시에 있어서나 사랑은 소재로서 지배적인 것이 아니었다. 궁정 문화에 있어서의 사랑이 차지했던 중심적 위치는 유럽의 지방어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높은 스타일의 원형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랑의 승화 작용이 비롯되고, 이것은 신비주의와 여성 숭배의 예절로 나아간다."(213-4)


7 아담과 이브


"기독교 구제극(救濟劇)은 작자와 관중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숭고한 주제이다. 그러나 연출은 민중의 취향에 맞기를 희구한다. 옛적의 숭고한 사건은 현재적이고 즉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어느 때나 일어날 수 있고 모든 관중이 상상할 수 있고 친숙한 당대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당대 프랑스인 누구나의 마음과 심정 속에 깊이 뿌리박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담은 자신이나 혹은 이웃 사람의 집에서 친숙한 투로 말하고 행동한다. 강직하기는 하나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남편이 파렴치한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간 허영심 많고 야심 많은 아내 때문에 어리석고 운명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만 어떤 시민의 집안이나 농부의 집안에서 일어나듯이 꼭 그렇게 매사가 진행된다. 아담과 이브 사이의 대화, 즉 세계사적인 중요성을 지닌 이 최초의 남녀 사이의 대화는 가장 단순한 일상 현실의 장면으로 바뀌어 있다. 숭고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순하고 격이 낮은 문체로 이루어진 장면이 되는 것이다."(225)


"숭고와 겸손의 대조적 융합은 성서의 특징으로서 일찍이 교부 시대부터 강조되었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은 신이 이러한 것을 지혜롭고 신중한 이들에게 숨기고 어린이들에게 제시했다는 성서의 원문(마태 11:25, 누가 10:21)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지위와 학문 있는 이들보다는 어부나 세금징수원이나 그같이 지체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사실(고전 1:26 이하)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이교도들은 자기네 안목으로는 말할 수 없이 조야한 언어로 양식상의 범주에 전혀 무지한 채 쓰인 글 속에 가장 높은 진실이 담겨 있다는 주장에 대경실색하였다." "바로 이 같은 비판은 성서의 특징이 되어 있는 참다운 위대함에 교부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 즉 성서가 일상적인 것과 격이 낮은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종류의 숭고성을 창조하여 내용이나 문체에 있어 가장 격이 높은 것과 가장 격이 낮은 것을 직접 연결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227-8)


"중세의 기독교 연극은 완전히 이 전통에 속해 있다. 본래 연극적 요소를 지니고는 있으나 예배 의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성서의 일화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중세의 기독교 연극은 소박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숨어 있는 진실로 이들을 인도하려 하였다." "아담과 이브 사이에 벌어지는 장면은 겸손한 문체로 마음이 가난한 소박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된다. 숭고한 사건을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 집어넣어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 나타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제가 숭고한 것임을 잊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가장 단순한 현실로부터 직접 가장 드높고 가장 은밀한 신과 관계되는 진실로 옮아간다." "이들 장면을 에워싸고 있는 틀의 정신은 역사의 비유적 해석의 정신이다. 이것은 일상적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동시에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과 관련된 세계사적 맥락의 일부이며 따라서 항구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초시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30-1)


8 파리나타와 카발칸테


"중세에 지방어로 쓴 저작들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는 오늘날 약간의 재능이라도 있는 저작자뿐만 아니라 약간의 언어적 훈련을 받은 서간문 필자라면 어려움 없이 사용하는 문장 구조를 끌어내어, 구태여 특출한 것으로서 추켜세우는 것에 의아한 마음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단테 이전의 저술가로부터 출발하여 본다면, 단테의 언어는 거의 불가해한 기적이다. 그들 중에는 대시인도 있었건만, 이들에 비교해 볼 때 단테의 언어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풍부성, 실감, 힘,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어형을 사용하고, 다양하기 짝이 없는 사상과 내용을 비교할 수 없이 확실한 힘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야말로 그의 언어를 통하여 세계를 새로 발견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이런저런 표현 형식이 나왔는가 하는 것은 증명되거나 추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증명이나 추정은 그의 언어 능력의 천재성에 대한 경탄을 높일 뿐이다."(264-5)


"대체로 『신곡』의 스타일상의 의도가 숭고미를 겨냥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시의 모든 행에서, 구어적인 시행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에게 모델을 제공해 준 것이 고대의 시인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테의 숭고미의 개념이, 언어 표현에서나 소재에 있어서 고대의 귀감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신곡』이 보여 주는 소재와 사상들은 고대의 관점에서는 기괴하달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높은 것과 낮은 것을 뒤섞어 놓고 있다. 그의 등장인물에는 조금 앞 시대나 당대의 역사에서 나온, 그리하여 흔히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 자의적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흔히 낮은 현실의 일상 세계에서의 모습 그대로 가차 없이 묘사된다.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단테는 일상적이고 기괴하고 불쾌한 것을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함에 어떤 한계를 두지 아니한다. 고대적 의미에서 숭고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던 것이, 단테의 손에 의하여 숭고한 것이 된다."(266-7)


"프로방스의 시인들과 '신체시'의 시인들에게는 지고의 사랑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테마였다. 단테는 『지방언어론』에서 세 가지 테마(무공(salus), 사랑(Venus), 덕(virtus))를 들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테마는 대부분의 서정시(canzoni)에서 사랑의 테마에 종속되었거나 사랑의 알레고리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신곡』에서도 이 틀은 베아트리체의 존재와 기능을 통해서 유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 틀은 굉장히 범위를 포괄한다. 『신곡』은 무엇보다도 백과사전적인 교훈시로서, 물리적, 우주론적, 윤리적, 역사적, 정치적 세계 질서를 묘사한다. 나아가 그것은 생각될 수 있는 모든 현실의 구역을 다 나타내고 있는, 현실 묘사의 예술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숭고한 장대성과 낮은 통속성, 역사와 전설, 비극과 희극, 인간과 지리가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신곡』은 개체적 인간의, 즉 단테 자신의 발전사이며 구원의 역사이다. 그럼으로써 또 인간 일반의 구원에 대한 비유가 된다."(272)


"단테는 그의 역사성을 피안에까지 가지고 간다. 그의 죽은 자들은 현세의 현재성과 변화로부터 차단되어 있지만, 추억과 뜨거운 참여는 그들을 너무나 강하게 충동하여 피안의 세계는 그것으로 가득 찬다. 연옥과 천국에서는 이것이 그처럼 강하지는 않다. 거기에서는 눈길이 지옥에 있어서처럼 뒤를 돌아보며 현세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앞과 위로 향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그는 현세적 생존을 신을 향하는 종착점과 더불어 보게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상의 삶은 살아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신의 심판과 영원한 영혼의 상태의 기초가 된다. 이 영혼의 상태는 참회자나 복자의 특정한 집단에 배치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생의 지상적 삶의 본질과 하느님의 구도 가운데 그것이 차지하는 일정한 자리를 의식 속에 새기는 일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전생의 지상적 삶의 성격을 완전히 연출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심판을 이루는 것이다."(277-8)


9 수사 알베르토


"감각적 현상의 세계가 최초로 정복되고 의식적인 예술적 구상에 따라서 조직되고 언어로 포착된 것은 보카치오에게서이다. 그의 타고난 성향은 자연스럽게 감각적이었고 관능성에 차 있는 우아하고도 매력있게 움직이는 형식을 창조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숭고한 문체보다는 중간적 문체가 어울렸다. 고전 고대 이후 최초로 그의 『데카메론』은 당대의 생활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품위 있는 소일거리가 될 수 있는 특정한 문체 수준을 고정시켜 놓았다. 이야기가 이제 도덕적 범례 구실도 하지 않게 되고 또 웃고 싶다는 평민들의 소박한 욕망에 보비위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야기와 설화는 이제 삶의 관능적 놀이에서 즐거움을 찾고 감각과 취향과 판단력을 지닌 신사 숙녀와 상층 계급의 행실 좋은 젊은이들에게 즐거운 소일거리 구실을 하게 되었다. 보카치오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액자'를 창조해 낸 것은 그의 설화 문학의 이러한 목적을 공표하기 위해서였다."(307-9)


"보카치오가 단테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관찰력이나 표현력이 아니다. 이러한 품성은 보카치오가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단테의 그것과는 전혀 성질을 달리한다. 보카치오의 관심은 단테가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던 현상과 감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단테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자기의 재능을 거침없이 구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지가지 인물들로 하여금 각자의 특정한 조건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의 말을 할 수 있게 한 단테의 역량이 보카치오로 하여금 그의 등장인물을 위해 똑같은 결과를 성취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세계를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과 공존하는 것은 추상적인 도덕적 해석 없이 모든 현상에 제각기 특정한 그리고 세밀히 구별된 도덕적 가치를 배당하는 확고하면서도 유연한 시각의 비판 의식이다. 이 비판 의식은 도덕적 가치가 현상들 자체로부터 솟아나게 하는 종류의 것이다."(313-4)


"보카치오의 책은 중간적 문체로 되어 있는데 그 경박스러움과 우아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확고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데카메론』에 반영되어 있는 가장 특징적이고 중요한 태도, 중세 기독교적 윤리에 정반대되는 것은 비록 가벼운 어조로 표현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차 있는 사랑과 자연의 교의이다. 기독교의 교리와 그 삶의 형태에 대한 근대인의 반향이 성도덕의 영역에서 그 실천력과 선전적 효과를 성공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독교의 초기 역사와 그 본질적 성격에 뿌리박고 있다. 성도덕의 영역에서 세속적인 삶에의 의지와 삶의 기독교적인 묵인 사이의 갈등은 세속적인 삶에의 의지가 자의식을 성취하면서부터 날카로워진다." "『데카메론』은 사랑할 수 있는 권리에 뿌리박은 완전히 실제적이고 세속적이며 확연한 도덕률을 발전시키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반기독교적이다. 그것은 교의적 타당성에 대한 강력한 주장 없이 우아하게 제시되어 있다."(321-3)


10 마담 뒤 샤스텔


"리얼리즘의 발전은, 중세 말엽에 특히 북부 프랑스와 부르고뉴 지방에 강하게 대두한 대(大)부르주아 문화의 융성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이 문화는 아직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현실 관계에 상응하는 '제3계급'이 이론적으로 분화될 때까지 이러한 상태는 오래 지속되었다). 이 계급은 그 상당한 부와 힘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와 생활 양식에 있어서 오랫동안 대부르주아적이기보다는 소부르주아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방 예술에 신변적이고 가정적인 모티프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가정적이고 경제적인 상황과 문제의 묘사와 마찬가지로 보기 좋은 실내 공간의 모티프가 가능해졌다. 사사로운 삶의 가정적이고 신변적이고 일상적인 것은 봉건적, 귀족적, 군주적 인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상황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그리하여 예술과 문학은, 봉건적 의식의 화려함에 대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중세 초기보다 한결 더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다."(346)


"어쨌든 중세 말기의 몇 세기에 구조적 이론적 사고의 피폐와 불모가, 특히 실제적 삶의 질서와의 관련에서 두드러져 나타나게 되고, 그리하여 기독교적 인간학의 육신적, 인간적 측면, 번뇌와 무상에 내던져져 있는 측면이 조잡하고 노골적인 형태로 강조되어 나타나게 된다. 고대적, 고전적 인간상에 날카롭게 대조되는 이 극단적으로 육신적인 인간상의 특징은 세간적 신분의 의상에 많은 존경심을 보이면서도 그 의상을 벗는 순간 그 사람에 대한 아무런 존경심도 갖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신분의 의상 밑에는, 나이와 병이 상하게 하고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체 이외에 아무 다른 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극단적인 인간 평등론인데, 적극적이고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모든 인생의 가치 절하라는 의미에서의 평등론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추구하는가는 전혀 의미 없다. 그의 본능이 그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고 현세적 삶에 집착하게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격도 없다."(347)


"이 문화권의 어떤 작가도 단테가 하였듯이 또는 보카치오 정도로도, 그 시대의 세계 현실 전체를 조감하고 제어하지 못한다. 각자가 각자의 영역을 알 뿐이다. 이 영역은, 앙투안 드 라살과 같이 여행을 많이 한 사람과 경우에도 매우 좁다. 어린 샤스텔의 죽음이나 왕자 가스통 드 푸아의 죽음은 젊음과 기구한 사연과 고통스러운 죽음의 구체적 경험 이상의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것이 끝났을 때, 독자에게 남는 것은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감각적인, 거의 육감적인 경악뿐이다. 작자는 그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거기에는 중요한 판단도 관점도 의도도 없다. 나아가 때로는 매우 강력하게 직접적이고 특수한 것에 초점을 맞춘 심리 묘사까지도 개체적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육신적, 인간적이다. 이들 작가들은 감각적 경험을 필요로 하긴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넘어가고자 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각자의 인생권은 육신적, 인간적 운명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제공했던 것이다."(357)


11 팡타그뤼엘의 입 안의 세계


"라블레는 그의 거인의 나라를 처음 유토피아(Utopia)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16년 전에 나왔던 토마스 모어의 책에서 빌린 것이다. 이 주제는 르네상스와 그 뒤를 잇는 2세기 간의 모티프의 하나로서 정치, 종교, 경제, 철학상의 혁명에 지렛대 구실을 했다. 그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나타났다. 첫째, 작가가 줄거리를 아직도 태반은 미지로 남아 있는 신세계에 배치하는 것인데 그 까닭은 유럽의 환경보다 한결 순수하고 한결 원시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국의 상황을 비판하는 데 효과적이면서 동시에 통쾌하게 은밀한 방법을 제공하는 하나의 방책이 된다. 또 하나는 생소한 이방인을 유럽 세계에 데려와 유럽의 기성 질서에 대한 비판이 그의 순박한 놀라움과 그가 구경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으로서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 어느 경우든 이 주제는 기성 질서를 뒤흔들고 그것을 보다 넓은 맥락 속에 배치하여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혁명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367)


"조야한 우스개 농담, 인간 육체의 동물적 파악, 성 문제에 있어서 절도와 유보의 결여, 리얼리즘과 풍자적 교훈적 내용의 혼합, 다루기 어렵고 때로는 난해한 박학의 어마어마한 축적, 우의적 비유의 사용 등과 이외의 많은 것이 중세 후기에 발견된다." "중세 후기의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지리적으로, 우주론적으로, 종교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일정한 뼈대 안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은 한번에 사물의 한 국면만을 제시한다. 다양한 사물과 국면을 취급해야 할 때는 일반적인 질서라는 일정한 뼈대 속에 이들을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라블레의 전체적인 노력은 사물이나 사물의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국면과의 희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완전한 혼란상을 띠고 있는 현상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현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하여 비록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세계의 큰 바다로 독자를 꼬여 내는 데 힘쓴다."(375)


"라블레에게서 동물적 리얼리즘은 육체와 그 기능의 활력론적, 역동적 승리라는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에게는 벌써 원죄나 최후의 심판이 없으며 이에 따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공포도 없다. 자연의 일부로서 사람은 자기의 숨쉬는 삶, 신체의 기능, 지적 능력을 즐기며 자연 속의 다른 피조물처럼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인간과 자연의 숨쉬는 삶은 온통 라블레의 사랑, 지식에 대한 갈증 그리고 언어를 통한 표현 능력을 불러들여 사용한다. 그것은 그를 시인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는 시인이며 비록 감정은 결여되어 있으나 진정 서정시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리얼리스틱하고도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미메시스를 야기시키는 것은 의기양양한 현세의 생활이다. 그리고 그의 미메시스는 완전히 반기독교적이다. 그것은 중세 말의 동물적 리얼리즘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사고의 범위와 아주 반대되기 때문에 라블레의 중세로부터의 소외가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바로 문체의 중세적 특징 속에서이다."(376)


12 인간 조건


"몽테뉴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단순히 실천적 도덕적 요청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인식론적 요청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도, 아무런 신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아 인식의 우선적 위치는 인간의 도덕적 연구에서만 적극적으로 인식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임의적인 자신의 삶을 탐구함에 있어서 몽테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인간 조건 일반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가까운 주변 사람의 행동이든 또는 멀리 있는 정치적 역사적 영역의 행동이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평가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분별 있게 또는 무분별하게, 항시 사용하는 방법적 원칙을 그는 여기에서 드러내 보여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의 삶과 우리 자신의 내적 체험이 제시해 주는 척도를 적용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간 이해, 역사 이해는 우리의 자아 인식의 깊이와 우리의 도덕적 지평의 넓이에 의존하게 된다."(408-9)


"과학적 작업에는, 중세에 보다 훨씬 더 전문화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전적으로 대조되는 것이 전면적이고 고르게 완성된 인간의 이상적 표상이다." "그리하여 발생한 것이, 직업적 목표를 갖지 않는, 매우 적극적으로 사회적(사교적)이고 유행적인 형식의 일반 지식이다. 그것은 물론 백과사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것은 말하자면 모든 지식의 발췌, 그중에도 문학적이며 일반적으로 취미적인 것을 선호하는 발췌였다. 인문주의(Humanismus)는 바로 그 대부분의 자료들을 모아다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여기에 나중에 '교양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계층이 생겨났다." "이들에게는 전문 분야에 묶여 있는 전문지식인, 직업에 묶여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전문 분야의 사실적 지식에 빠져 있으면서 그의 행동과 말씨에 있어서 그것이 드러나는 사람은 희극적이고, 열등하며 비천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태도가 완전히 발전한 것은 17세기 프랑스의 절대주의 시대에서이다."(417-8)


"이러한 전개에 있어서, 몽테뉴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능한 사람〉, 〈무지할 때까지도 어느 면에서나 능한〉 사람은, 몰리에르의 연극의 후작들처럼, 일체의 것에 확실한 시체적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배울 필요가 없었던, 저 〈신사〉의 선구자임에 틀림이 없다. 결국 몽테뉴는 방금 이야기한 교양인층을 위하여 글을 쓴 최초의 저술가이다. 『에세』의 성공을 통하여 교양 독자가 처음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몽테뉴는 어떤 특정 신분층, 어떤 특정 전문 영역, '민중'(das volk), 기독교도들을 위하여 쓰지 아니한다. 그는 어떤 정파를 위하여 쓰지 아니한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는 최초의 세속적인 자기 성찰의 책을 쓴 것이다. 그러자 놀랍게, 자기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으로 느낀 사람들, 남녀가 나타난 것이다. … 그리하여 그가 저 최초의, 아직도 귀족적인, 아직도 전문화된 일을 강요받지 않은 교양인층에 알맞는 표상들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418-9)


13 지쳐 빠진 왕자


"중세의 몇 백 년 동안에 걸쳐 비극적인 것의 개념은 밋밋하게 발전하지를 못하였다. 이것은 고대의 비극 작품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 고대의 이론이 잊혀졌거나 오해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전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이러한 사실 때문인 것은 전혀 아니다. 기독교의 비유적인 인간 생활관이 비극적인 것이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지상의 삶의 사건이 아무리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라 해도 그 위로는 예수의 출현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위엄 있는 단일한 사건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비극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마침내는 흘러 들어가게 마련인 여러 사건의 복합체의 비유이거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즉 타락과 예수의 탄생과 수난, 그리고 최후의 심판 등 여러 사건의 복합체의 비유이거나 그림자였다는 말이다. 이것은 중심(重心)이 지상의 삶으로부터 저 건너 세상으로 옮겨지고 그 결과 비극이 이 세상에서 끝을 맺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431-2)


"그러다가 16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의 비유적인 도식(圖式)이 거의 유럽 전역에서 뒤흔들리게 되었다. 저세상에서의 결말은 완전히 저버려지지는 않았으나 의심할 바 없는 확실성은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시에 고대의 모범과 고대 이론이 뚜렷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고대에선 인생의 극적 사건들이 주로 사람의 바깥쪽에서 위로부터 달겨드는 행운의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비극의 최초의 근대적 형태인 엘리자베스 시대의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개인 성격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보다 큰 역할을 한다." "고대 비극의 경우 운명은 주어진 비극의 복합체, 즉 특정한 시기에 특정 인물이 말려 들어간 당면한 사건의 그물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추이는 비극적 갈등이 사건 추이만을 다루지 않고 즐거리가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 대화나 장면이나 등장인물 등을 보여 준다. 그래서 여기서의 운명은 주어진 갈등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432-4)


"셰익스피어의 윤리적 지적 세계는 고대 세계의 그것보다 훨씬 동요되고 층이 많으며 어떤 특정한 극의 줄거리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훨씬 극적이다.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고 사건이 일어나는 기반 자체가 한결 불안정하고 내적인 동요로 말미암아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으로서의 안정된 세계가 없고 갖가지 힘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고대 비극에서는 철학적 사색의 말은 극에 걸맞지 않았다. 그것은 격언 같고 아포리즘에 가깝고 줄거리에서 추상되어 일반화되어 있고 등장인물이나 그의 운명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셰익스피어 극에서 철학적 사색의 말은 사사로운 것이 된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당장의 상황에서 직접 나온 것이며 그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사건에서 얻은 경험의 결과가 아니며 사이를 두고 벌어지는 대화 속의 재치 있는 대답도 아니다. 그것은 행동의 적절한 방식이나 순간을 찾거나 그러한 것을 찾아낼 가능성을 의심하는 극적인 자기 검토이다."(440-1)


14 마법에 빠진 둘시네아


"돈키호테는 아마디스도 롤랑도 아닌 정신 나간 시골의 작은 신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감정은 진실하고 깊다. 둘시네아는 진정 그가 사모하는 아씨이다. 그는 스스로 인간의 최고의 의무라 여기고 있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진정 진실하고 용감하며 일체를 희생할 차비가 되어 있다. 이렇듯 절대적인 감정, 이렇듯 절대적인 결심은 비록 어리석은 환상에 비탕을 둔 것이라 할지라도 탄복을 자아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탄복을 거의 모든 독자가 돈키호테에게 아끼지 않아 온 것이다. 위대한 이상이란 생각을 돈키호테와 함께 연상하지 않는 문학 애호가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고 황당하며 그로테스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이상적이고 절대적이고 영웅적이다. 이러한 생각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세르반테스의 의도는 아니었다는 문헌학적 비평의 모든 기도를 물리치고 있다."(462-4)


"난점(難點)은 돈키호테의 고정관념 속에서 고상한 것, 무구(無垢)한 것, 취할 만한 것이 형편없는 어리석음과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상적이고 소망스러운 것을 위한 비극적인 투쟁은 무엇보다도 실제 현실 속에 뜻 깊게 개입해서 그것을 뒤흔들어 놓고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뜻 깊은 이상은 타성이나 째째한 심술, 질투 혹은 보다 보수적인 관점에서 나온 똑같이 뜻 깊은 저항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이상주의는 현세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있다. 돈키호테는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나 그의 고정관념의 이상주의가 그를 사로잡자마자 그 이해는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러한 상태 속에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완전히 무의미하고 현존 세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저 희극적인 혼란을 낳을 뿐이다. 그것은 성공할 가망성이 없을 뿐 아니라 현실과 접하는 바도 없고 그저 진공(眞空) 속에 널려 있을 뿐이다."(464)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이 결정적으로 '세르반테스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그 '어떤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교훈적인 목적의식도 아니다. 몽테뉴나 셰익스피어의 경우에서처럼 인간 존재의 불확실함이나 운명의 힘에 의해서 동요되고 있는 실존도 아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용감성과 마음의 평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하나의 태도(세계에 대한, 곧 자기 예술의 주제에 대한 태도)이다. 다채로운 감각의 희롱에서 그가 감득하게 되는 기쁨 말고도 그에게는 어떤 남국적인 과묵함과 오기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그 희롱을 아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게 된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형성한다. 그는 그것을 재미나 한다. 그것은 또한 독자들에게 세련된 지적 재미를 주게끔 의도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그는 중립이다. 그가 심판하지 않으며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는 재판을 하는 법도 없고 심문을 하지도 않는다."(480)


"세르반테스에게는 훌륭한 소설은 세련된 오락, 정직한 오락(honesto entretenimiento) 이상의 것이 아니다." "소설(小說)의 스타일이 그것이 최고의 소설이라 할지라도 우주의 질서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세르반테스의 염두에는 떠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작가로서의 자기 직업에 관계되는 문제에 한해서 판단을 내리려 든다. 세속 세계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며 악을 벌하고 선을 포상하는 것은 신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이곳 지상에서는 개관할 수 없는 현상의 질서는 놀이나 희롱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현상을 개관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미쳐 버린 라만차의 기사 앞에서 그것은 유쾌하고 재미있는 혼란의 춤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일상의 현실을 그림에 있어서, 그렇듯이 보편적이고 다층적이며, 그렇듯이 무비판적이고 문제성이 없는 유쾌함이 시도된 일은 유럽 문학에서는 다시는 없었다. 언제 또 어디에서 시도될 수도 있었을까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483-5)


15 가짜 독신자


"라신의 비극 「베레니스」와 「에스더」의 인물들은 자신의 왕공으로서의 신분을 너무나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잠시도 그 신분을 떠나는 일이 없다. 가장 깊은 불행, 가장 격렬한 감정 속에 있을지라도 라신의 비극적 인물은 그들의 신분을 통해서만 자신을 생각한다. 그들은 〈불쌍한 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공자(公子) 나!〉라고 말한다." "에스더는 기절하는 순간 〈딸들아, 너희의 죽어 가는 여왕을 부축해 다오······.〉하고 외친다. 이 비극적 인물들의 왕공으로서의 지위와 그에 따르는 고양화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어 그들의 인격에서 완전히 떼어낼 수 없는 것으로서, 하느님이나 죽음에 나아가면서도 타고난 왕공으로서의 자세를 지킨다. 이것은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서 보는 태도와는 전혀 대조되는 인간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낭만주의자들이 때로 그랬듯이 이들에게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면이 있음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505)


"비극적 인간과 언어적 표현에 대한 고전주의의 이념은, 지극히 복합적이며 다층적인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어떤 시대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것 없이 일상생활로부터 초연하게 있는 심미적 세련화의 소산이다." "17세기가 라신의 예술을 거장적인 솜씨와 강력한 효과를 가진 것이라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성적이며 상식적이며 자연스럽고 그럴싸하다고 보았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당대인들은 라신 이전의 작가들이 이상한 모험적인 사건들을 잔뜩 늘어놓았던 데 대하여 라신의 비극은 단순하고 분명한 상호 관련을 가지고 있는 사건들로 이루어졌다고 관찰하였다. 또 바로 앞 세대의 유행이 지나치게 영웅적이고, 미묘하고 황당무계한 갈등(코르네유의 영향이 컸다)과 '화사파'의 영향으로 과도하게 감상적이고 현학적인 로망스를 즐겼던 데 대하여 라신의 인물들이 겪게 되는 심리 상황과 갈등은 모범이 될 만하게 일반적인 타당성을 가진 것이었다."(518-9)


# 화사파 : 17세기 초 화사한 수사와 세련된 예의에 주력한 문학과 사회의 한 경향을 나타낸 사람들


"무엇이 가장 자연스러운가에 대하여 라신 시대는 나중 시대하고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문명과 대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시 문화, 순수한 민중성, 탁 트이고 막힘 없는 들판으로 이어지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그것은 행동을 우아하게 가지며 사회생활의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도 거기에 쉽게 맞아 들어갈 수 있는 교육 있고 닦인 인간형과 일치시켜 생각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교양이 많은 사람의 자연스러움을 높이 이야기하는 경우에 비슷한 것이다. 어떤 것을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이치에 맞는다 하고 보기 좋다고 하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조화, 이성, 자연스러운 품성의 함양의 요소를 크게 가졌던 고대 문명의 황금기에 17세기는 스스로 대응되는 것이라고 느꼈다. 루이 14세 아래의 프랑스인들은 대담하게 그들의 문화가 고대인들의 문화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본보기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견해를 유럽 전체에 부과하였다."(520-1)


16 중단된 만찬 1 ─계몽주의 시대의 리얼리즘


"18세기 문학에서는 눈물이 그 전엔 한 독립된 모티프로서 지니지 못하였던 중요성을 지니게 되기 시작한다. 영혼과 감각의 경계에서 눈물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으로 활용되었고 또 당시 유행했던 정감과 에로티시즘이 뒤섞인 감흥을 만들어 내는 데 각별히 효험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미술과 문학에서 점점 인기가 있게 된 것은 특히 쉽게 감동되고 쉽게 정열이 타오르는 미녀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거나 혹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었다. 눈물은 이를테면 하나나 지켜보는 대상이요 또 맛보는 대상이었다." "18세기에는 또한 여성의 옷차림의 '어지러움'이 이전보다 강조되고 있다. 훼방받은 목가(牧歌), 갑작스러운 바람, 넘어짐, 뛰어오름, 그리고 그 사이 여체(女體)의 가리운 부분이 드러나거나 흔히 '매력적인 어지러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제 색정적이고 감상적, 친밀함이 뒤섞여 색정적인 요소는 철학 및 과학의 계몽주의가 남긴 삽화에조차 나타나게 된다."(530-1)


"여기서 미덕이라는 것은 색정적 감정의 장치 전체와 떼어 놓고 생각될 수가 없다." "성적 자극은 항시 감상적이고 윤리적인 언어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것이 환기하는 훈기는 감상적인 윤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남용되고 있다. 이러한 혼합은 18세기에 자주 발견된다. 디드로의 윤리적 태도는 색정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열띤 감상성 속에 뿌리 박고 있으며 루소조차도 그 흔적을 여전히 보여 주고 있다. 점증하는 사회의 시민적 경향, 18세기 내내 유지되었던 정치적 사회적 안정, 중간 계층 및 부유층의 안온한 생활, 이에 따라 이러한 사회 계층의 젊은 세대 사이에 정치상·직업상의 근심이 없어지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당대의 많은 글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미적 형식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이 사회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무너졌을 때 그 문제성 있는 성격이 누구에게나 분명해졌지만 새로이 형성된 혁명적인 사상은 시민층의 감상주의를 흡수했고 이 감상주의는 그대로 남은 채 19세기로 넘어 들어갔다."(534)


"계몽주의의 선전 목적에 봉사하는 리얼리스틱한 구절의 스타일 수준은 생판 다르다. 그러한 보기는 섭정 시대 이후에 눈에 띄고, 더욱 빈번해지고 또 점점 논쟁적이며 공격적이 된다." "선전 방책으로 애용되는 '탐조등 수법'은 폭넓은 복합체의 한 작은 부분을 과도하게 조명하는 한편 강조된 부분을 설명하고 그 근원을 밝히고 또 균형이 잡히도록 나머지 부분을 보충할 만한 다른 모든 것을 눈에 띄지 않도록 한다. 그 결과 진실을 말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말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왜곡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전면적인 진실과 함께 여러 요소의 적절한 상호 관련을 갖추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생활 형식이나 사회 집단이 생명을 다했거나 혹은 그저 애호나 지지를 잃어버렸을 때 선전가들이 그것을 부당하게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의 부당성은 사실대로 부당한 것으로 반(半)의식적으로 느껴지기는 하나 사람들은 그것을 가학적인 희열을 느끼며 환영한다."(535-8)


"선전상의 방책으로 더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은 모든 문제의 극단적인 단순화이다. 이 단순화는 우선 문제를 정반대되는 하나의 대조로 좁혀 놓음으로써 성취된다. 그리고 이 대조는 검정과 하양, 이론과 실천 등등이 분명하고 단순하게 대립되어 있는 어지럽고 실속하고 기운찬 얘기 속에 제시되어 있다." "날카로운 대조법에 의한 문제의 단순화, 문제를 삽화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어지럼증 나는 급한 속도와 함께 소설 「캉디드」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연이어서 불행이 일어나는데 이 불행은 필요한 것이며 그럴 만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치에 맞는 것이고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서 최상의 세계에 값하는 것이라고 되풀이해서 설명되어 있다. 이리하여 냉정한 성찰은 웃음 속이 파묻히고 말아 흥이 난 독자는 볼테르가 라이프니츠의 논의나 형이상학적인 우주조화관 전반을 정당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거나 보게 되더라도 가까스로 겨우 보게 되는 것이다."(541-2)


17 중단된 만찬 2 ─18세기 프랑스의 리얼리즘


"루이 드 생시몽 공작은 17세기보다는 그가 실지로 회고록을 썼던 시대(18세기)에 분명히 소속하고 있다. 루이 14세의 궁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는 되풀이해서 17세기 사람으로 취급되어 왔지만 말이다. 그것도 60년대나 70년대의 궁정이 아니라 90년대의 궁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침투해 들어갔던 90년대도 그가 글을 썼을 때는 이미 머나먼 과거가 되어 있었다. 18세기의 전반은 많은 뒷날의 발전을 예고하고 그들 자신의 시대에 있어서 독보적인 개인과 사상과 운동의 수많은 예를 보여 주고 있다. 누가 비코를 17세기에 집어넣을 것이겠는가? 비코는 생시몽(1675년생)보다 7년 앞서 태어났고 그의 주요 작품도 몇해 앞서서 써내었다. 비코는 반(反)데카르트파였다. 마찬가지로 생시몽은 위대한 국왕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들 서로 다른 동시대인들에게는 외관상으로가 아닌 보다 더한 유사성이 있다. 취향이나 정신 성향에 있어서 두 사람은 모두 그들의 살아생전에 벌써 낡아져 버린 과거로 되돌아간다."(572)


"두 사람 모두 절박한 내적 충동이 그들의 언어에 무엇인가 비범한 것, 때로는 사납고 지나치리만큼 표현적인 것을 부여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당대의 취향에 호소했던 쉬움과 쾌적함과는 상극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인간을 그리는 과정에서 충동적으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역사 진행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사변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만 이들 두 사람은 인간이 그의 존재의 역사적 사실 속에 깊숙이 뿌리 박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당대의 합리주의적이고 비역사적 태도와는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생시몽이 회고록을 쓰고 있을 당시에 최초의 흐릿한 싹이 보이고 있었던 역사주의가 설정하였던 종류의 역사 이론의 흔적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개인을 넘어서 있으면서도 개성화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역사의 힘은 생시몽의 원근법 밖에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살아 있는 역사는 순전히 행동하는 개인과 특수한 심리 및 이에 따라 생겨난 여러 관계와 대립에 대한 통찰이다."(573)


18 음악가 밀러


"'중산 계급의 비극'이라는 장르는 사사로운 일, 가정사, 애처로운 일, 감상적인 것에 묶여 있어서, 이런 것들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 따르는 어조와 스타일로 하여 사회 무대를 확대하고 일반적인 정치 사회 문제를 포함시키는 데는 부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정치와 사회 일반의 문제에로의 새로운 진로가 트였다. 이제는 애처롭고 근본적으로 사사로운 사랑의 관계가 비협조적인 일가, 부모, 보호자 또는 사사로운 도덕적 장애에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공적(公敵), 사회의 부자연스런 계급 구조와 부딪치게 된 것이다." "'질풍노도' 시대의 혁명가들은 루소의 선례를 따라, 관능적이고 애처롭고 감상적인 상태의 사랑에 가장 높은 비극적 위엄을 부여하면서도 부르주아적이고 현실주의적이며 감상적인 요소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무릇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감정으로 생각되고 어떤 인생, 어떤 상황에서도 숭엄한 것이 되었다."(582)


"당대 독일의 상황은 넓게 사실적인 묘사를 쉽게 허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상은 잡다한 것이었다. 삶은, 지배 군주주의 혈통과 정치적인 사정의 우연으로 하여 생겨난 '역사적 영토' 속의 혼란된 무대에서 영위되었다. 이 작은 영토 내에서 억압적이고 때로는 숨막힐 것 같은 분위기가 공손한 순종과 역사적인 전통성의 수용과 병존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태는 사변, 내성(內省), 명상 그리고 지방적인 기벽(奇癖)의 발달을 조장하는 데 적당한 것이지, 보다 넓은 관련과 넓은 영역을 의식하면서 단호하게 행동과 현실을 겨누는 데는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독일 역사주의의 기원은 그 형성기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헤르더는 역사를 가장 넓고 일반적인 의미의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동시에 깊은 특수성 속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의 역사 이해에는 구체성이 없었기 때문에 현실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들의 저작은 독일의 역사주의가 오래 지니게 될 두 가지 근본적인 경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586-7)


"즉, 한편으로는 특수주의와 민중적 전통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변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 두 가지 경향은 다 같이 구체적인 미래의 가시적인 징후들보다는 초시간적인 역사의 정신, 현재의 완전한 진화 완성에 그 관심의 초점을 둔다. 카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입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게 유지된 데에는, 18세기 말엽부터 점점 거스릴 수 없게 국외에서 밀려오는 구체적인 미래가 지도적인 독일인 대부분에게 가공할 만한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힘입은 바 있다. 프랑스 혁명이 그 영향력을 확산하고 뒤이어 사회적 격변을 가져오고 모든 반대 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으로 발전되어 나오는 새 사회 구조의 조짐들을 가져오는 동안, 독일은 혁명에 대하여 수동적이거나 수세적이거나 무반응의 태도만을 보여 주었다. 혁명을 적대시한 것은 위협을 당한 수구 세력만이 아니었다. 보다 젋은 지식인의 운동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괴테도 그런 위치에 있었다."(587)


19 라 몰 후작댁 1 ─스탕달의 비극적 리얼리즘


"스탕달의 리얼리스틱한 문학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의 세계에서의 그의 편편치 못함, 자기가 그 세계에 소속해 있지 않으며 그 속에 자기 자리가 없다는 의식에서 나왔다. 주어진 세계 속에서의 편편치 못함, 그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없는 무력은 확실히 루소 류의 낭만주의의 특색이다. 스탕달은 '폭풍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또 자기 배를 위한 적절하고 안전한 피난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자기 설명의 지점, 리얼리스틱한 문학의 지점에 도달하였다. 지쳐 빠졌거나 낙심해 있는 것은 아니나 젊은 날의 성공적인 이력이 이제 먼 옛일이 되어 버린 가난하고 외로운 40의 사나이로 자기가 아무 데도 소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의식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변의 사회 현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자기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느낌, 그때까지는 별 고통 없이 자랑스럽게 지녀 왔던 느낌이 이제 그의 의식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 되고 마침내는 그의 문학 활동의 되풀이되는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605)


"그러나 루소와는 달리 스탕달은 실제적인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어진 삶의 관능적 향락을 열망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실제적 현실에서 물러선 것이 아니었다. 또 처음부터 실제적 현실을 전적으로 비난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것을 정복하려고 하였고 처음엔 이에 성공하기도 했다. 물질적인 성공과 향락이 그의 소망이었다." "스탕달의 관심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관심은 있을 수 있는 사회의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상적으로 주어진 사회 속의 변화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시간적 원근법은 그가 시야에서 잃어버린 일이 없는 요소이며 삶의 형태와 양식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생각은 그의 사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사건의 세계를 포착하고 그것을 내적 연관과 함께 묘사하려는 스탕달의 태도에는 역사주의의 영향을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주의는 당시에 벌써 프랑스로 침투해 갔으나 스탕달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605-8)


"우리는 그에게서 합리주의적 경험적 관능적 모티프를 보지만 낭만주의적 역사주의의 모티프는 거의 볼 수 없다. 절대주의, 종교, 교회, 신분의 특권을 그는 여느 계몽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미신, 속임수, 그리고 책략 등이 얽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체로 교묘하게 꾸며진 음모가 정열과 함께 그의 작품 구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밑에 깔려 있는 역사의 동력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정치적 관점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정치적 관점은 그것만으로도 그를 낭만주의적 역사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샤토브리앙 같은 작가들의 과장된 양식에 그는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한편 그의 정치관에 따르면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사회 계급조차도 극히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낭만주의가 민중이란 말에 첨가해 놓은 감정적 가치를 추호도 섞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의 '공화주의적 미덕'에는 몸서리를 친다."(609)


"루소의 사상과 이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다음 세대는 현실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성공적인 저항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을 완전히 부숴 버린 새 세계에서 편편치 못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가장 강렬하게 루소에게 매혹되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세계에 반대하고 나서거나 외면하거나 하였다. 그들은 루소에게서 내부의 분열, 사회에서 도망치려는 경향, 물러나서 혼자 있으려는 요구를 물려받았다. 루소의 다른 측면, 즉 혁명적 전투적 측면을 그들은 잃어버렸다. 프랑스에 있어서의 지적 생활의 통일과 문학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파괴하였던 외적 상황도 이러한 발전에 기여하였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기까지의 시기에 나온 중요한 문학 작품 가운데서 당대 현실에서 도망하는 징후를 보이지 않는 작품은 거의 없다." "루소주의 운동이 겪은 엄청난 환멸로 인해, 이제 역사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포착되지도 않은 18세기 류의 삶의 묘사는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613-4)


20 라 몰 후작댁 2 ─두 개의 리얼리즘


"발자크는 스탕달처럼 그의 이야기의 인간들을 정확하게 규정된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 정립할 뿐만 아니라 이 연계 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에게는 모든 환경은 정신적 물리적 분위기가 되어 풍경과 주거 그리고 가구, 연장, 의복, 체격, 성격, 생활 주변, 생각, 활동, 운명에 삼투해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일반적인 역사의 상황은 여러 다른 환경들을 감싸는 대기가 된다(발자크의 분위기의 리얼리즘). 그가 이러한 묘사의 솜씨를 가장 능숙하게 또 진실되게 발휘한 것은 파리의 중간 또는 하류의 부르주아지나 지방의 사회를 묘사할 때였다. 그런 데 대하여 상류 사회의 묘사는 흔히 멜로 드라마적이고 사실에 어긋나고 또 작자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희극적인 것이었다. 다른 데에 멜로 드라마의 억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중간이나 하류층을 그릴 때에는 이것이 전체적인 진실을 손상시키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발자크는 상류 사회의 분위기 또 지성 사회의 분위기를 진실되게 그리지는 못했다."(620)


"스탕달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시대에 대항하며 생각하고 느낀다. 그들은 경멸을 가지고 나폴레옹 이후 시대의 권모술수의 세계에 내려간다. 구식의 관점으로 보면 희극적인 특성을 지닌 요소들이 언제나 섞여 있기는 하지만, 스탕달이 비극적 공감을 가지고 있고 또 그의 독자에게 그러한 공감을 요구하는 인물은 위대하고 대담한 생각과 정열을 지닌 진짜 영웅이어야 했다." "발자크는 그의 주인공들로 하여금 시대의 제약적인 조건 속으로 보다 깊이 뛰어들게 한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발달하게 된바, 현대의 현실을 객관적인 심각성을 가지고 대하는 관점을 아직 얻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무것이나 얼크러진 사건이면 비극이고 또 아무 충동이나 위대한 정열이라고 허세적으로 마구 덤비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인생 도처에 악마적인 세력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언어 표현을 멜로 드라마로 과장하는 것은 발자크의 격정적이고 비판할 줄 모르는 기질과도 맞고 낭만주의적인 인생 태도와도 맞는 것이었다."(631)


"플로베르의 서술법을 스탕달과 발자크의 서술법과 비교해 보면, 서론적으로 현대 리얼리즘의 두 특징이 벌써 나타나고 있다." "스탕달과 발자크에서 우리는 작자가 인물과 사건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끊임없이 듣는다. 때로 발자크는 그의 이야기에 계속적인 감정적, 풍자적, 윤리적, 역사적, 경제적 주석을 붙인다. 또 흔히 우리는 등장인물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듣게 되고 이런 경우 작자는 인물 자체와 자기를 일치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두 가지 면은 플로베르에게는 없는 것들이다." "플로베르에게 작자의 기능은 사건을 고르고 이것을 언어로 옮기는 일에 한정된다. 이것은 어떤 사건이든지 순정하고 완전하게 표현되기만 하면, 거기에 붙여지는 어떠한 의견이나 판단보다도 사건과 거기에 관련된 인물을 보다 훌륭하고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 책임과 솔직과 주의를 가지고 사용한 언어가 진실을 나타낸다는 깊은 믿음 위에 플로베르의 전 예술이 기초해 있다."(636-7)


"이렇게 하여 소재는 완전히 작자를 사로잡는다. 작자는 몰아 상태가 되어 그의 마음은 다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는 작용을 할 뿐이다. 가열한 참을성으로 이러한 상태가 이루어지면 그때그때의 소재를 작자는 완전하게 흡수하게 되고 여기에 따라 그것을 저울질하는 완전한 표현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 소재는 마치 하느님이 내려다 보듯이, 그 참다운 본질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고 생각된다."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어떤 소재나 본질적으로 심각한 면과 희극적인 면, 위엄과 저속함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그것을 적절하고 확실하게 재현한다면 그것에 알맞는 스타일을 적절하고 확실하게 찾아낼 수 있다. 소재를 그 위엄의 정도에 따라서 구분하는 '스타일의 높이'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도 필요 없고 바른 이해와 정확한 분류를 위한 사후적 분석을 시도할 필요도 없다. 소재 자체를 묘사하는 데에서 이 모든 것이 연유되어 나올 수 있다─플로베르의 생각은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637-8)


"플로베르의 스타일은 간단히 '객관적 심각성'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 심각성은 인간 생활의 격정과 얼크러짐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감동하지 않고 또는 감동한다는 표시를 드러내지 않고 냉정함을 유지한다." "삶은 밀어 올라오고 부글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 느리게 흐르는 것이다. 당대의 평범한 삶의 핵심은 플로베르에게 질풍노도의 행동과 격정, 마력에 사로잡힌 사람과 세력, 이런 것에 있지 않고 거죽은 공허한 일상번사지만 밑에는 보이지 않게 끊임없이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는 전반적이고 만성적인 상태 속에 있었다. 이 상태에서 정치 경제, 사회의 표토는 비교적 안정된 것 같으면서 실상은 터질 것 같은 긴장으로 차 있다. 사건들은 거의 움직이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플로베르가 그려 내는 개인적 사건과 시대 전체의 모습의 구체적인 결에는 무엇인가 숨은 위협이 드러난다. 시대에는 폭탄 장치처럼 어리석은 밀폐가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642-3)


21 제르미니 라세르퇴 1 ─없는 사람들과 심미주의


"19세기의 최초의 위대한 리얼리스트들, 스탕달과 발자크 그리고 플로베르에게서조차 하층 계급, 즉 본래의 민중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등장하는 경우에도 그들 자신의 터전 위에서나 그들 자신의 생활 속에서 포착되지 않고 위쪽에서 바라본 대로 그려져 있다. 플로베르에게 있어서조차도 민중은 대체로 하인이나 배경 인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탕달과 발자크가 도입한 리얼리즘의 스타일의 혼합은 제4계급 앞에서 전진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발전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리얼리즘은 당대 문명의 현실 전체를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시민 계급이 지배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대중들도 그들 자신의 힘과 기능을 더욱 의식하게 됨에 따라서 위협적으로 밀고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하층 계급 사람들은 진지한 리얼리즘의 주제로 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쿠르 형제의 말은 옳았고 그들의 정당성은 증명되었다."(650)


# 공쿠르 형제 에드몽과 줄르는 1864년에 간행한 소설 「제르미니 라세르퇴」 서문에서, 문학의 대상이 되기에 너무나 저속한 불행의 형태는 없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제4계급 권리의 최초의 옹호자들은 거의 모두가 제4계급 사람이 아니고 시민 계급에 속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을 제4계급에게 연결해 준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소설은 거의 모두 그들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했다. 이들 소설 속에는 하층 계급의 환경뿐 아니라 상류 시민 계급, 대도시의 암흑가, 갖가지 예술인 집단의 환경도 등장한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이든 간에 취급된 주제는 언제나 기이하고 예외적인 것이며 병적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의 여행, 당대의 예술가, 18세기의 여성과 미술, 일본 예술 등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들은 감각의 인상 특히 기이함이나 신기함을 위해 가치 있는 감각의 인상을 수집하고 묘사하였다. 그들은 흔하디 흔한 것에 식상한 까다로운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적합한 미적 경험, 특히 병적인 미적 경험을 발견하고 재발견하는 직업인이었다. 하층 계급이 문학의 주제로서 그들의 흥미를 끈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였다."(650-1)


"이제 당대의 실제적인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며 도덕적, 정치적, 그렇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인간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경향을 회피하며, 유일한 의무라고는 문체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있을 뿐이라는 문학관, 문학 이상이 생겨났다. 이러한 문학관이나 문학 이상은 취급된 주제가 감각적 생기를 띠고 뚜렷한 특성을 보여 주는 새롭고 낡아 빠지지 않은 형태 속에 나타나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태도에 의하면 예술의 가치, 즉 완벽하고 독창적인 표현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며 상충되는 철학이나 이론의 충돌에 참여하는 것은 무엇이고 불신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과 예술 일반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들은 숭배의 대상, 거의 종교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리하여 본래 표현을 감각적으로 즐기는 것이었던 쾌락은 너무나 높은 지위를 떠맡게 되어 쾌락(delectation)이란 말(아주 하찮고 쉽게 이를 수 있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말)은 이제 충분치 못한 것처럼 보였다."(658)


"물론 처음부터 개인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고 미적 향락을 위해서 인상과 그 예술적 재구성에 완전히 몰두하는 파괴적인 자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단계가 있지만 이런 태도는 19세기 후반기에 계속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당대의 문명과 당대의 사회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에는 속절없는 무력감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들로 하여금 당대한 문제를 외면하도록 강력히 작용하였다." "본능적인 혐오와 불가피한 밀착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 있으나 동시에 의견의 영역, 가능한 주제 선택, 생활과 표현의 형태 면에서 개인의 특이성을 발전시키는 일 등에 있어서는 거의 무질서한 자유를 누리면서 오만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의 수요가 많고 또 벌이가 좋은 대중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작가들은 순수 미학의 영역에서 고집불통의 독불장군이 되거나 혹은 작품을 통해서 시대의 문제에 실제로 개입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659)


22 제르미니 라세르퇴 2 ─졸라와 그의 동시대인들


"에밀 졸라는 플로베르와 공쿠르 형제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어깨를 밟고 서 있으며 그들과 공통점이 많다. 그도 또한 신경쇠약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심미적 리얼리스트의 무리 가운데서 뚜렷하게 달라 보인다." "졸라 예술을 혐오스럽고 누추하고 외설스럽다고 하면서 몹시 분격하였던 그의 적수들 가운데엔 전 시대의 가장 거칠고 상스러운 형태의 그로테스크하며 희극적인 리얼리즘조차를 태연히 때로는 기꺼이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틀림없이 많았다. 그들을 그토록 분격시켰던 것은 졸라가 자기 예술을 '저속한 스타일'의 것이기는커녕 희극적인 것으로도 내세우지를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적었던 모든 글줄은 모든 것이 가장 진지하고 또 도덕적으로 의도되었음을 나타내었다. 그의 글의 총계(總計)는 오락이나 예술적 실내 유희가 아니라 졸라가 본 대로의 그리고 독자들이 작품 속에 보도록 촉구된 당대 사회의 참다운 초상이었다."(662, 665-6)


"거칠고 참담한 쾌락, 이른 나이의 타락과 급속히 닳아 없어지는 육체, 방탕한 성생활, 성교가 돈이 안 드는 유일한 낙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생활 조건에 비해 너무 높은 출산율, 이러한 모든 것의 배후에서 적어도 가장 정력적이고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서 폭발하려는 혁명적인 적개심, 이러한 것이 소설 「제르미날」(1888)의 주제이다. 이들은 서슴없이 감각적인 말로 번역이 되었고 가장 뚜렷한 말이나 가장 추악한 장면 앞에서도 주저할 줄 모른다. 이 스타일의 기술은 인습적인 의미로서의 즐겁게 하는 효과를 낳을 것을 전적으로 포기하였다. 반대로 그것은 불쾌하고 답답하고 볼품없는 진실에 봉사한다. 그러나 이 진실은 동시에 사회 개혁을 위한 행동에의 소환장이기도 하다." "졸라는 스타일의 혼합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앞 세대의 순수하게 심미적인 리얼리즘을 넘어섰다. 그는 시대의 대문제(大問題)를 재료로 작품을 창조하였던 극소수의 19세기 작가의 한 사람이다."(667-8)


"러시아인들은 일상적인 사물들을 진지하게 구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저속한' 것이란 문학상의 범주를 진지한 문학적 취급에서 제외해 버리는 고전주의 미학은 러시아에서 단단히 뿌리박지도 못했던 것 같다. 또 러시아 리얼리즘이 19세기에야 그것도 19세기 후반기에야 비로소 본때를 보여 주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사회적 지위나 계급과 관계없이 모든 개개 인간이 신(神)의 창조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는 기독교적이며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근대 서양의 리얼리즘보다는 고대 기독교의 리얼리즘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 및 지적인 주도권을 장악한 활동적이고 개명(開明)된 시민 계급은 러시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시민 계급은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없으며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속에서조차 발견할 수 없다."(678-9)


"이 크나큰 민족의 집안에서 19세기 동안 줄곧 가장 강력한 성질의 내면 운동이 크게 퍼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 시대에 산출된 문학 작품을 보면 틀림없이 확인된다." "러시아 리얼리즘 속에 드러나 있는 내면 운동의 본질적인 특징은 묘사된 작중 인물들의 절대적이며 무한하고 격정적인 경험의 강렬성이다. 그것이 서구 독자들이 받는 가장 강력한 인상인데 누구보다도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에 그렇지만 톨스토이나 기타 작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인들은 19세기의 서구 문명에서는 희귀한 현상이 되어 버린 경험의 직접성을 유지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 강력한 실제적, 윤리적, 혹은 지적인 충격은 즉각 그들의 본능의 깊은 부분에서 그들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조용하고 거의 식물적인 존재로부터 실제적인 혹은 정상적인 문제에서 무시무시한 극단으로 옮아간다. 그들의 활력, 행동, 사고, 감정의 그네추는 유럽의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폭넓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680-1)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심하지만 다른 작가에서도 발견되는 사랑에서 미움, 다소곳한 헌신에서 짐승스러운 잔학성, 진리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쾌락에 대한 가장 속된 욕정, 경건한 순진성에서 잔인한 시니시즘에로의 변화에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요소가 있다. 이러한 변화가 흔히 동일 인물 속에서 과도기도 없이 어마어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진동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인물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그의 말과 행위는 과학적 초월, 형태 감각, 예의 범절에 대한 경의 때문에 서구 제국의 작가들이 가차 없이 표현할 수가 없었던 종류의 혼돈스러운 본능의 심층을 드러내 보여 준다.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 특히 도스토옙스키가 중구(中歐) 및 서구(西歐)에서 알려지게 되었을 때, 놀란 독자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어마어마한 정신의 잠재 가능성과 표현의 직접성은 리얼리즘과 비극의 혼합이 마침내 그 진정한 완성에 도달했음을 보여 주는 것처럼 여겨졌다."(681)


23 갈색 스타킹─새로운 리얼리즘과 현대 사회


# 새로운 리얼리즘의 특징 : 의식의 다인적(多人的) 묘사, 시간층의 개념, 외부적 사건의 비연속성, 관점의 이동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를 향하여」(1927)에는 몇 개의 중요한 스타일상의 특징이 발견된다.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화자라는 자격의 저자가 완전히 사라져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거의 모든 진술은,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고의 과정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램지 일가의 여름 별장이나 스위스인 하녀의 경우,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작가적 상상력의 대상인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들이 아니라, 소설의 등장인물 램지 부인이, 어떤 특정한 순간, 사람, 물건 또는 상황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 것, 또는 느끼게 된 것의 묘사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가 램지 부인의 인물됨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전연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램지 부인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소설 가운데 나오는 다른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그 여자의 인상과, 그들에게 끼치는 그 여자의 영향을 통하여서만 얻어진다."(699)


"한 방울의 눈물에 대하여, 어떤 가정들을 설정하는,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는 존재들, 그 여자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추측하는 인간들, 그리고 뱅크스 씨 등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만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의 현실 말고도 또다른 객관적 현실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 듯한 인상을 우리는 거기에서 받게 된다. 그런 객관적 현실에 대한 표시는, 기껏, 어떤 행위의 외부적 틀에 대한 짤막한 언급, 즉 〈램지 부인은 눈을 들면서 말했다〉 라든가, 〈언젠가 부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뱅크스 씨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1부 5장의) 마지막 문단에 이르면, 우리는 저자가 램지 부인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중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이 그 여자의 상황 그리고 그 여자의 행동이나 말에 대하여 가질 법한 그런 의심증과 궁금증 같은 것을 가지고 램지 부인을 관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699-700)


"프루스트는 객관성을 목표로 하며, 사건의 본질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써, 그는 그 자신의 의식을 길잡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의식은 특별한 종류의 의식이다. 그것은 아무 때나 움직이는 의식이 아니라 사물을 기억할 때 작용하는 그런 의식만을 가리킨다. 그것은 과거의 현실들을 모두 살아나게 하는 힘을 가진 의식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그러한 현실들의 현장이었던 과거에 그것이 처해 있던 상태에서 이미 오래전에 벗어났으며 이 새로운 상황에서 과거의 사실들을 (적절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면서 새로 정리해 보는 것이다. 이 의식은 단순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식과 현저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단히 과거의 일들을 서로 대면도 시키고, 또 그것들이 일어났던 과거의 어떤 특정한 때의 한계 내에서 그것들이 가졌던 편협한 의미, 또는 그것들의 내부적 시간의 연속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을 하게 된다."(710-1)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에서 외부적으로 중대한 인생의 전환점 또는 큰 재난 같은 것은 마치 별로 중요치 않은 사건들인 것처럼, 인물들에 대하여 아무런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할 자격이 없는 사실들인 것처럼 취급된 반면,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어떤 단편적 시간은 인간의 전 인생을 포용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펼쳐 보여 줄 능력을 가진 것으로, 즉 신용할 만한 정보의 출처처럼 취급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들, 즉 일상의 소재들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 어떤 주제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연대순에 따라, 외부적으로 중대한 사건이라든가 사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인생의 큰 전환점 같은 것에 큰 강조를 주며 충실하게 설명하려 드는 방법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관점은 일상이 소재의 통합적인 묘사의 표현력을, 외부적인 사건이나 사실 중심인 연대 순서 표시의 표현력보다 더 신용하고 있다는 말이다."(718-9)


"사실상 나의 이 저서도 이런 방법을 예증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다. 나는, 가령 유럽에 있어서의 사실주의 발달사 같은 것은 도저히 쓸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방대한 자료 속에서, 나는 이런저런 시대의 한계를 정하는 일, 또 그 각 시대에 이런저런 작가들을 배치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실주의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 등에 관한 끝없는 논의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완전을 기하기 위해 나는 내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한 문제들을 다루어야 했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별도로 그런 문제를 다룬 자료들을 읽음으로써 급작스런 지식과 정보를 거두어들였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되는 방법, 즉 오랜 시일을 두고 특별한 목적이 없이 발견해 낸 몇 개의 모티프로 하여금 나를 이끌게 하고, 이것들을 내가 평소에 자연스러운 연구 활동을 통하여 친숙히 알게 되고 의미 깊게 생각하게 된 원전(原典)과 배합시켜 보는 방법은 성공과 소득의 전망을 가진 것으로 나는 본다."(7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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