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사회 - 서구 사회사상의 재해석: 1890~1930 개마고원 서구 지성사 3부작 1
스튜어트 휴즈 지음, 황문수 옮김 / 개마고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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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몇 가지 예비적 고찰


"인간 정신에는 지성의 영역과 구별되는, 분명하지 않은 감정과 상투적인 경제 과정의 영역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토대substratum'라고 불렀다. 마르크스의 경우, 토대에 대해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은 인간의 생활을 가차없이 제약하는 생산제도의 성격이었다. 그다음 세대의 위대한 사회사상가들의 경우에는, 인간 감정의 비합리적이고 사실상 변하지 않는 성질─프로이트가 흔히 '충동drives'이라고 부르고, 파레토가 '잔여residues'라고 부른 것, 인간 행위를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것─에 결정적인 관심을 가졌다." "인간이란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여러 방안 중에서 자유롭게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각적이며 이성적인 존재라는, 18세기 또는 19세기 초의 인간상을 그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환상이라면서 포기했다. 인간의 자유는─물리적 환경에 의해서든, 또는 정서적 조건에 의해서든─불가피하게 제한을 받게 마련이라는 이러한 확신은,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현대 사회과학의 대전제가 되었다."(18-9)


# 파레토는 잔여를 개인의 행위를 추동하는 명예, 미덕, 조국과 같은 이상 속에 표현된 감상과 느낌의 현시로 정의했다. 그는 잔여를 어떤 객관적 실체도 가지지 않은 기본적인 심적 상태로 보았다.


"역사의 본질은 '변화'이다. 그리고 변화는 최소한 일부라도 자각적 정신활동의 결과여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로 결단했음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거대한 비개인적인 힘'은 단지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통계학적인 의미에서는 수많은 선택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대체로 각자의 선택이 자유롭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사상적 용어와 범주에도 이러한 확신이 내포되어 있다." "반복되는 것, 비합리적인 것, 준準본능적인 것이 역사의 토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자체의 주제일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한정된 시간적 계기繼起에서 정연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만이 역사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서 행위와 사상은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뒤얽혀 있다. 지성의 역사는 이러한 공통된 자료를 행위의 관점에서보다는 오히려 사상의 관점에서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을 말한다."(20-1)


"이 연구는 일련의 지적 전기傳記가 결코 아니다. 목차를 살펴보더라도, 개별 사상가의 저술에 대한 분석이, 보다 일반적인 개념 구조의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시대를 통해 한 관념이 어떠한 부침浮沈을 겪었는가를 보여주는 지도를 작성하려는 것은 위험한 장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때에나 사물을, 단절도 불확실한 점도 없는 탄탄한 유형에 따라 배열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개개의 사례들을 살펴봐야 한다. 결국 개인이야말로 역사연구의 궁극적 단위이다. 관념 자체는─사상의 '경향' '운동' '조류'와 마찬가지로─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념은 아무리 충실하더라도 개인의 사상을 탄생시키지 못한다(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상상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한 개인이 어느때 어느 곳에서 자기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관념을 산출할 때까지, 관념은 전혀 현실성을 갖지 못한다."(39)


2장 1890년대의 10년 : 실증주의에의 반항


# 여기서의 실증주의는 자연과학에서 유추한 방법론을 가지고 인간의 행동을 논하려는 경향 전체를 가리키는 느슨한 규정이다.


"1890년대의 주요 지적 혁신자들은 인간 행동의 비합리적 동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비논리적인 것, 비문명적인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의 재발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거의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비합리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위험할 정도로 모호하다. 이것은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관용, 심지어는 편애까지도 암시한다. 사실 그 반대가 진실이었다. 1890년대의 사상가들은 비합리적인 것을 제거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비합리적인 것에 천착함으로써 그들은 이를 길들여 인간의 건설적 목표를 위해 사용하려고 했다." "매우 한정된 의미 이외에, 그들을 비합리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그 대신 '반주지주의자'라는 말이 때때로 사용되어왔다. 이러한 규정은 유동적이고 포괄적이다. 이는 관념론과 선험a priori 철학, 곧 1세기 반 전의 추상적 사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암시하며, 바로 이 점이 모든 점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뒤르켐과 소렐 같은 저술가들을 결합시켰다."(52-3)


"원래의 18세기적 또는 공리주의적 형태에서 실증주의는, 사회에서 인간의 문제는 쉽게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한 주지주의적 철학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다윈주의의 영향 아래 실증주의적 신조는 그 합리주의적 특색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곧 '유전'과 '환경'이 인간 행동의 주요한 결정 요인으로서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선택을 대신하게 되었다. 홉스적인 자연상태(이제는 '생존경쟁'이라고 불리게 된)는 인간과 인간관계의 특성을 파악하는 견해로서 품위 있는 사회질서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일종의 과학적 운명론이었다. 그것은 18세기 철학자들 또는 19세기 전반 영국 공리주의자들의 특징이었던 쾌활한 낙관적 태도와 대립하는 것이었다. 실증주의의 궁극적인 아이러는 극단적인 주지주의로서 출발한 것이 결국은 철저한 반주지주의 철학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1890년대의 젊은 사상가들은 '비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 탐구의 권리를 옹호하려고 노력했다."(55)


"전쟁 전에는 자유주의적인 독일의 지성인들마저 거의 모두가 의심의 여지없는 애국자였다. 독일의 국력 향상을 그들은 교의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아버지 세대는,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 문제를 해결한 방식에 국가적 가치를 위한 자유주의적 가치의 희생이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의 방식을 항의도 없이, 오히려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베버나 마이네케 같은 사람들이 성장한 분위기였다. 순응주의자였던 그들은 몹시 망설이면서 그들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대한 정당한 반대에 나섰다." "저명한 지성인들은 거의 모두 빌헬름 치하의 독일의 사회적 분위기─그 허풍, 벼락부자적인 속물근성, '비잔틴주의'라고 불리는 아첨─에 어떤 형태로든 반발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무수한 실(絲)에 의해 그 사회 안의 지배 세력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교수로서 상위 중산계급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철저하게 반대하던 헌법하에서 조직된 정부의 관리였다."(65-6)


"그들의 학문적 진지성과 인간적 품위에도 불구하고, 독일 교수들은 그들의 높은 신분의 포로였다. 일반 민중은 그들을 존경하고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거의 기적으로 보일 만큼 열렬한 관심으로 그들의 추상적 논의에 따르면서도, 그들을 채용한 대부분의 정부와 마찬가지로 교수들에게서 국가 공동체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태도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수들도 순응하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일부 교수들은 체제의 '국내적' 성격에 대해서는 격렬한 비판을 했겠지만, 외교정책의 영역에서는 사실상 모두가 민족주의의 틀 속에 남아 있었다." "베버는 독일 대학 생활의 위선─짐멜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미헬스는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대학 강단에서 추방된 상황에서 참된 학문의 자유를 말해도 소용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했다." "따라서 우리는 1890년에서부터 1914년까지의 독일에서 상보적이면서도 모순되는 두 과정─문화적 부활과 '지식인의 이탈'의 시작─을 볼 수 있다."(67-8)


"프랑스의 지적 생활을 독일의 지적 생활과 비교해볼 때, 우리는 두 가지 뚜렷한 차이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문화적 활동의 중앙 집중과 상당히 비판적 정신을 가진 지성인들의 자기 나라 정부에 대한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이다. 아마도 이 두 가지 사항은, 이 연구의 등장인물 중에는 독일인보다는 프랑스인이 많으면서도 프랑스인 중에는 베버나 프로이트 같은 거물이 없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1890년대와 1900년대 초의 프랑스 생활의 외적 환경은 정신생활에 유리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당국의 압박과 지역적 고립이 독일에서처럼 사상에 대한 심각한 장애가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태와 대결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프랑스의 지성인은 국가의 자유주의적 태도와 동료들의 우정이 뒷받침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프랑스에서 외로운 천재란 독일에서처럼 특징적인 문화적 소산이 아니었다."(70-1)


"이 연구에 나오는 프랑스의 주역들은 모두 어떠한 의미에서든 공화주의자였다. 자기가 그 아래에서 살고 있는 제도를 열렬히 지지한 사람은 뒤르켐뿐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밖의 사람들도 모두 어느 정도는 조건부로 공화국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시인하고 있었다(소렐의 변절도 세기가 바뀐 다음의 일이었다). 1890년대 말 드레퓌스 사건의 와중에서 공화국이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듯했을 때, 그들은 모두 힘을 합쳐 공화국을 옹호했다." "이렇듯 어떤 경우에 공화국은 열렬하게 옹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특히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해당되었다. 유대인들에게는 국가적 모토인 '평등'이라는 말이 공허한 상징 이상이었다. 그들의 경우 공화국에 대한 애국심은 충심의 감사로부터 우러나오는 당연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저술가나 학자들은 프랑스가 문명세계의 중심이며 프랑스어가 지적 소통을 위한 가장 완벽한 수단이라고 확신했다. 프랑스의 지성인들은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72-5)


3장 마르크스주의 비판


"1890년대의 마르크스 비판자들은 마르크스 이론의 중심에 있는 계시적 견해에 이르러, 사회사상가로서의 마르크스와 정치선동가로서의 마르크스 사이에 놓인 잘 알려져 있는 대조를 발견했다." "그것은 1890년대의 비판자들이 의식적이기보다는 암암리에 제기한 의문이었다. 사회과학자로서의 마르크스는 분명히 계몽주의의 합리적 전통에 속해 있었다. 학자의 입장에서 그는 관대하고 공정했으며, 적들─자본주의자들과 산업부르주아지들─의 저술도 공평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예언자로서의 마르크스는 분노한 사람이었고 논쟁에서는 반대론자들에게 악의에 찬 조소를 퍼부었다. 후자의 입장에서 그의 저술은 우파에 의해서도 좌파에 의해서도 계몽주의의 무덤을 파는 인부의 교과서로 이용되었다. 18세기 유럽 유산을 재평가하는 것이 1890년대 새로운 사상가들의 중심 과제의 하나여야 한다면, 마르크스를 어느 정도까지 계몽주의의 소산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본질적인 과제였다."(89)


"뒤르켐─그는 관점과 지향성에서 보면 실증주의자였으나 콩트나 스펜서가 물려준 실증주의적 전통에 만족하지 않았다─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에서 추상적 사변이 아니라 경험적 자료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학의 지적 가능성을 발견했다. 파레토─역시 실증주의자였으나 마르크스에게 보다 적대적이었고 마르크스를 주로 전문적 경제학의 관점에서 판단했다─는 사회주의의 신화를 파괴함으로써 사회 갈등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이론을 처음으로 구상하게 되었다. 반쯤은 19세기의 과학자이고 반쯤은 20세기의 예언자였던 소렐은 때로는 지적 명석성을 위해서, 때로는 도덕적 향상을 위해서 거듭하여 마르크스에게로 되돌아갔다. 크로체의 경우, 마르크스주의는 실증주의자를 때릴 몽둥이를 제공하는 동시에 문학과 예술을 모델로 한 그의 관념론적 역사관을 수정해주었다. 이들은 모두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과학적' 타당성이라는 결정적인 문제에 심취해 있었다."(92-3)


# 마르크스주의 비판

1. 뒤르켐 : 사회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전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고, 따라서 '참된 과학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

2. 파레토 : 민중의 지도자란 현실 권력에 접근할 길이 없다고 느끼는 불만분자로서, 대혁명은 옛 엘리트와 새로운 엘리트들의 투쟁에 불과하다.

3. 크로체 : 마르크스의 이론은 '특정한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것'인데, 마르크스는 그 기점을 넘어서서 '이상적이고 도식적인' 정의에 도달했다.

4. 소렐 : 사회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상징적 형식으로 표현된 '사회시社會詩'이다. 이 도덕운동의 본질은 직접 참여하고 공감해야 이해할 수 있다.


"가장 광범한 관점에서 말하다면, 1890년대의 비판자들이 이루어놓은 일은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의 핵심적 강조점을 근본적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그들은 경제학으로부터 사회생활의 도덕적·문화적 측면으로 강조점을 옮겨놓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마르크스의 가르침에서, 그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만든 정치운동의 전술적 필수요건이라는 면을 넘어서서 일반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 면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따라서 그들은 마르크스의 저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혁명적 교훈과 일반적 사회이론을 분리하는 본질적인 과제를 달성했다. 일단 이렇게 '정화'되고서야 마르크스주의는 유럽 사회사상의 주류에 흡수될 수 있었다. 1900년 이후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정당활동을 고무했고, 또 한편으로는 과학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최초의 포괄적 사회이론으로서 경험적 사회과학의 기준에 대한 최초의 시금석을 마련했다."(115)


"그람시의 관심을 끈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 나타날 새로운 문화의 성격이었다. 그리고 특히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자신과 같은 지성인들의 역할이었다. 그러므로 그람시는 주요 공산주의 지도자들 중에서 거의 혼자, 낡은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옮겨가는 결정적 변화가 될 '자유로의 도약'이라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그람시는 종교개혁이나 계몽주의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적 성격〉의 〈새로운 통합적 문화〉를 창조할 임무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람시의 논의는 결국 순환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설적 방식을 암시한다. 그람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관념론적 시발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람시는 위대한 사회적 이념의 기원이 지성인의 의식 속에만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러한 이념은 물질적 조건과 경제적 관계로부터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념과 민중의 의식과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도 자동적인 것도 아니었다."(120-3)


4장 무의식의 회복


"프로이트 사상의 이원성과 양극성은 어린 시절의 갈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었다. 말년에 그는 이원론적 관점에서 자기 사상을 표현했다. 이러한 양극성은 그의 창조적 충동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정열과 예술적 창조에 대한 정열이라는 두 충동에 의해 분열〉되어 있었다." "〈젊었을 때, 나는 사변에 강한 매력을 느꼈으나 이러한 경향을 무자비하게 억제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는 아주 천천히 최초의 관심─문화사의 세계와 〈인간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대문제〉─으로 되돌아갔고, 말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의사로서의 경력이 단지 엄청난 우회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사변적 추상에 대한 경향이 너무나 강렬해서 이 경향에 지배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구체적인 과학적 자료를 연구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147-8)


"프로이트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그때까지 개인 연구를 통해 획득한 통찰들을 인간 공동체의 세계에 적용하기 시작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줄곧 사회에 대해 써온 것이다. 그는 '가족 속의' 개인에 대해 썼기 때문이다. 곧 어린아이와 부모의 관계, 형제와 자매의 관계는 그의 성격 형성 이론의 기초에 놓여 있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문명의 소산인 보다 광범한 공동체로 나섰다. 이 이행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러므로 사회이론에 관한 그의 최초의 책, 『토템과 터부』가 원시 종족에 관한 연구였던 것은 논리적인 결과였다. 사회의 기반에 대한 추상적 우화로서 이 책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검증할 수 있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고, 저자의 사회적 전망의 한계를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원시 종족에게 (···) 유럽 중산계급 가족의 온갖 편견과 부조화와 까다로운 성미를〉 부여하고 〈이들을 선사시대의 정글에 풀어놓아 가장 매력적이지만 환상적인 가설 속을 날뛰며 돌아다니게 했다.〉"(164)


"오늘날 프로이트 학파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스승의 〈인류학적 사변은 (···) '상징적' 가치〉를 가질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임상적·경험적 자료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썼으며 초기의 속박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궁극적 목적은 현실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원래 그의 목표는 인간의 무의식의 이해였다. 후대의 연구자들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의 보다 포괄적인 야심이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플라톤, 헤겔 등 위대한 체계 수립자의 대열에 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표면상의 경험주의에도 불구하고─자연과학의 엄밀한 방법에 대한 신앙에도 불구하고─보다 깊은 차원에서 프로이트는 인간 존재의 마지막 수수께끼를 정연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형이상학과 우주론을 갈망했다. 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원초적 죄라는 상호 관련된 비유를 더욱더 강력하게 강조했고, 마침내 자신의 상像─입법자 모세의 상─을 드러냈다."(150-1)


"분명히 프로이트는 (인류의 운명에 대한 회의와 희망 사이에서) 거의 환상을 갖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환자들의 무의식을 너무나 깊이 조사했기 때문에 인간이 선을 행할 가능성에 대해 관습적인 신뢰를 가질 수 없었다." "프로이트는 환상 없이 세계를 바라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인도주의적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인간은 가장 착할 때에도 가장 악할 때에도 공통된 방식에 따라 설명될 수〉 있고 〈선과 악은 공통된 과정을 통해〉 생긴다고 프로이트는 생각했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동시에 인간을 경멸한 만한 것으로 만들지 않고 이해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 인간상을 제시했다.〉 그는 이성과 실재론과 인간애를 현명하게 결합해 존재라는 현실과 직면했다. 그는 종교의 위안을 거부하는 용기를 가졌고, 더 나아가 순수하게 세속적인 자신의 신념을 솔직하게 발표하는 보다 큰 용기를 갖고 있었다. 그는 말년에 끊임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삶을 견뎌내고 싶거든 죽음을 준비하라〉고 권고했다."(170-2)


"융은 보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프로이트의 정신에서 간과한 역사, 종교, 신화에 관한 일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거의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조이스와 헤세의 경우에는 프로이트 이상으로─현대의 창조적인 문필가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광범한 이해력은 그에게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확실한 형태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그의 저술은, 거기서 관념의 논리적 연관성을 찾아내려는 사람에게는 시련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들을 하나씩 분류하려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또한 무익하기도 하다." "그는 정신분석이론이 점령한 모든 전진기지로부터 후퇴했다. 그는 정신분석의 최소한의 원리인 '무의식, 유아, 성욕, 억압, 갈등, 전이轉移'라는 개념을 포기하거나 완전히 완화했다. 그의 비판자들은 이렇듯 확고한 토대 위에서 그를 '반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79)


5장 소렐의 현실 탐구


"소렐의 핵심적이고 창조적인 시기의 가장 인상적인 저술인 『폭력론』은 보통 그의 이름과 연결되는 사상에 고전적 공식을 부여하고 있다. 그 사상이란 '증오도 없이 복수심도 없이' 정화하는 힘으로서의 폭력의 개념, 역사적 '신화', 특히 총파업이라는 생디칼리슴적 신화를 자력으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대중을 일치된 행동에 나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전투상像'으로 규정한 것, 이러한 신화에 의한 사고를 보다 역설적으로 현대 과학의 방법론에 도입한 것 등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그 후의 사회사상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보다 정돈된 형태로 적용하고 활용한 사상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들은 소렐이 여기저기에 뿌려놓은 엄청나게 많은 암시 중에서 극히 일부를 대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폭력론』은 소렐의 자기 모순의 범위나 힘에 대해 적절한 관념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복잡함으로 가득 찬 소렐의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다른 저술들과 견주지 않으면 안 된다."(186)


"20여 년 간 기술자로 일한 소렐은 세상의 '만드는 사람들'과 '행동하는 사람들'을 존경했다. 〈그가 가장 신뢰한 지각의 방법은 손에 의한 것이었고, 그가 가장 신뢰한 사람들은 손을 사용해 세계와 관계하는 사람들─일하는 사람들과 예술가─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기계도 존중했다. 반면에 그는 자연의 세계를 두려워하고 믿지 않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는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현실의 혼돈에 부과하는 '인공적 자연'과 대립되는, 그가 말하는 이른바 '자연적 자연'을 싫어했다. 자연 자체의 불가해한 신비와, 인간이 길들일 수 있는 유일한 것, 따라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과학의 인공적 구성물 사이의 구별은 소렐 사상의 절대적인 중심이었다." "'질서 있는 인공적 세계'의 창조─이것이 소렐의 기본적이고 변함없는 목표였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정치적 신화라는 개념조차,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기술자적 사고 구조와 전적으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신화도 인공적 구성물이었기 때문이다."(190)


"모럴리스트로서 소렐은 구식이었고 수줍기조차 했다. 성性문제에 대한 그의 엄격성은 매우 각별했다. 그의 동시대인들 중에서 그처럼 〈세계는 보다 정숙해지는 정도에 따라 더욱 공정해질 것〉이라고 아주 진지하게 주장한 사상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윤리적 엄격성은, 그의 혁명적 폭력의 강조와는 극단적으로 모순되는 듯한 소렐 사상의 보수적 측면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윤리적 문제에도─이번에는 생명 없는 자연이 아니라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인간성에─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소렐의 목표였다." "그러므로 평생에 걸친 그의 탐구는 '회귀ricorso'─고대의 영웅적 가치들의 회복에 의한 인류 역사의 쇄신─를 찾는 것이었다. '회귀'─글자 그대로 '재상영rerunning'─라는 개념은 소렐이 비코에게서 끌어낸 것으로, 그는 크로체보다 앞서서 비코를 발견했다." "회귀의 탐구는 어처구니없는 그의 정치적 변절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그는 끊임없이 추구하고 끊임없이 실망했던 것이다."(190-2)


"소렐의 연구에 포함되어 있는 비합리적이고 공상적이고 가증스러운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부드러운 마음'의 가장 큰 오류에 빠지게 된다. 소렐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보는 것─그를 단지 추상적 사상가로만 보고, 어떤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매우 정열적으로 '참여'해 행동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오해이다." "소렐은 문제해결보다는 문제제기 때문에 중요한 사상가가 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위대한 문제제기자들, 일반적으로 받아들인 기성의 통념을 교란시키는 위대한 사람들, 예컨대 아벨라르와 니체 그리고 소크라테스 같은 인물들의 전통에 속한다." "또한 소렐은 '비판적' 사상가로서 가장 유능했다. 정열적이고 개인적인 현실 참여, 집념, 전향, 무정견無定見─'광신주의'로 불리는 감정적 복합체 전체─으로 말미암아 그는 지적 기만을 분쇄하는 비판적 자세를 갖게 되었다. 바로 그의 시각의 난시적亂視的인 성질 때문에 이러한 자세는 더욱더 날카로웠다."(199-201)


# 영원한 상 아래에서sub specie oeternitatis : 스피노자가 한 말로,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본다는 의미이다.


6장 신관념론의 역사관


"1770년부터 1840년에 이르기까지 독일 철학자들과 작가들은 유럽의 교사들이었다. 곧 그들로부터 프랑스인과 영국인과 이탈리아인은 단지 주지주의적인 설명에 만족하지 말고, 생생하면서도 발전하는 역사와 사회 자체의 소재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독일의 역사적 관념론의 영향을 받아 사회연구의 기준은 무한하게 풍요해졌다. 그러나 '응용된' 지혜라는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이 실제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즉 19세기의 커다란 정치적 변혁들은 전 세기로부터 이끌어낸 전제들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그 전제들은 철학적 의미에서는 이미 시대에 뒤진 것이었다. 188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시기에 다시 한 번 독일에서 부활의 숨결이 일어났다. 니체와 딜타이처럼 서로 다르고 독립되어 있으며 상호 모순되는 인물들이 1890년대의 지적 부활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새로운 가르침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니 그 이상으로 나쁜 상태를 불러왔다고 할 수도 있다."(205-6)


"역사와 사회의 연구에서 헤겔의 지배는 극적이었으나 시간적으로는 짧았다. 19세기 중반 이후로 그는 기억에 남아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오직 마르크스주의적 계승자들을 통해 그는 살아 있는 힘으로서 남아 있게 되었다. 보다 항구적인 영향은 헤겔보다 25세 어린 역사가 랑케의 영향이었다." "랑케는 헤겔보다 훨씬 더 낭만주의적 정신세계에 가까웠다. 세밀한 연구방법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랑케의 사고는 낭만주의자들의 사고 범주와 비슷했다.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경험적으로 검증되거나 논리적으로 분석된 확고한 개념보다는 오히려 거의 신비적인 방식으로 '직관'되고 '관조'된 정신적 실재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랑케의 방법은 독일 관념론의 전형이었다. 역사와 경제학에서도, 사회학과 법률에서도 독일의 사회사상은 매우 단순한 소수의 원리에 기초를 두었다. 그런데 이 원리는 방법과 영역의 모든 차이를 넘어서 놀라울 만큼 획일적이었다."(206)


"관념론적 사회사상은 현상세계와 정신세계, 자연과학의 세계와 인간적 활동의 세계 사이에는 근본적인 분열이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독일인은 'Naturwissenschaft' 곧 자연과학과 'Geisteswissenschaften' 곧 '문학과학' 또는 '정신과학'─이른바 인문학이라고 불리는 것과 우리가 역사 또는 사회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하는─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이러한 까닭에 정신과학은 실증주의자들이 주장했듯이 자연과학을 모범으로 삼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 활동에 대한 관념론적 관심은 주요한 두 방향─한편으로는 자세하고 구체적인 역사, 또 한편으로는 역사철학─으로 갈라지는 경향이 있다.〉 미세한 점까지 애써서 연구하는 것은 분명히 독일적 전통의 본령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헤겔처럼 형이상학에 바탕을 둔 광대한 역사체계의 수립자나, 딜타이 또는 리케르트처럼 역사적 사고 자체에 대한 야심찬 비평자들도─그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독일 전통의 요소였다."(207)


"신新칸트 학파에 속하는 리케르트의 이론은 가치라는 개념만을 전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역사적 지식이라는 개념을 철저하게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사회적·역사적 세계에서의 가치는, 검증될 수 있는 어떠한 과정에 의해서도 도달될 수 없고 오직 '직관'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타당성을 보증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궁극적으로 역사가는 자신의 가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형이상학의 길뿐이었다. 리케르트가 마지막으로 택한 길도 이 길이었다. 즉 그는 인간의 '규범 의식'을 전제로 두고 역사가의 가치체계의 절대적 타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이어야만 했다. 그 전제에는 가치란 개별적인 역사가의 의식 밖에서, 역사가를 넘어서 있는 독립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들은 용기와 상상력을 가지고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을 구별하는 문제에 접근했지만, 영원히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했다."(211-2)


# 신칸트 학파는 정신과학은 자연과학처럼 '일반법칙'을 형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사건'을 이해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딜타이의 의의는, 처음으로 역사와 실증주의 및 자연과학을 철저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대결시킨 점에 있다." "형이상학의 도움을 거부하고 딜타이는 과학적 탐구의 타당성을 분명하게 인정했다. 실제로 실증주의에 대한 그의 가장 효과적인 관찰의 하나는 실증주의가 스스로 배척한 관념론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이라는 비난이었다. 곧 실증주의의 추상 개념물은 의미의 제시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과학과 과학적 방법에 대해 딭타이는 이의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목적은 당시의 자연 세계와 인간 활동 세계의 혼동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딜타이가 보기에, 두 영역은 모두 과학적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지만, 문화·사회·역사의 세계를 다루는 과학은 보통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는 다른 '유형'의 과학이었다." "역사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자신이 놓여 있는 시대와 문화의 상황, 그리고 역사가가 그의 개인적 세계에서 내리는 능동적인 결정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다."(214-5)


"딜타이는 어떤 사람도─특히 19세기의 3분기에 정신이 형성된 사람은 누구든지─완성할 수 있으리라고 바랄 수 없는 계획을 세웠다. 베버와 마찬가지로─그리고 베버보다는 덜 성공적으로─그는 인간 정신에 대해 너무나 벅찬 종합을 시도했다." "특히 그는 그 자신의 사상에 함축된 회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요소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론은 없었더라도, 딜타이의 업적은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에 대한 그의 구별은 역사가의 기준이 되었고, 역사가의 경우보다는 덜하지만 사회과학자들에게도 기준이 되었다. 딜타이 이후로 역사가들은 그들 학문의 '비과학적' 성격 때문에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곧 그들은 역사학의 방법이 자연과학의 방법과 전적으로 동일할 수 없는 까닭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 지성의 역사 전통─마이네케가 가장 뛰어난 대표자인─은 당연한 일이지만 딜타이가 확립한 철학적 사회연구의 기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218-9)


7장 마키아벨리의 후계자들 : 파레토, 모스카. 미헬스


"파레토가 선보인 엘리트의 기원과 구성에 대한 개념은 지도층 형성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와 비교한다면 매우 조잡했다. 파레토는─모스카, 미헬스도 마찬가지이지만─개개인의 '우월성'은 선천적이고 그 사람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뛰어난 기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조직적 훈련이 필요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성공을 보증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재난을 초래하는 이러한 기능들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뛰어난 사람들의 권력에의 갈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지난날 흔히 권력에의 충동을 헛되게 만든 다른 동기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파레토의 기본 전제는 확고했다. 현대의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는 정치운동이란 능동적 소수자가 하는 일에 지나지 않고 인류의 대부분은 그들을 통치하고 있는 정부의 형태가 아무리 '민중적'이더라도 권력투쟁의 수동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중심 원리로 거듭해서 되돌아가곤 했다."(272-3)


"지배적 소수자의 개념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밝힌 사람은 사실은 모스카였다." "그는 『통치이론』과 『정치학 원리』에서 정치 과정을 한정된 자기보존적 파벌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그러나 정치적 논의의 표면 뒤에서 모스카는 광범한 사회적 적용의 길을 보여주었다. 대의제도가 올바른 기능을 발휘한다면 모두가 그 나름의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갖게 될 '사회적 세력들'에 대해 말했을 때, 그는 경제적 계급에 바탕을 둔 정치이론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 그는 사회적 세력이라는 말로 실업가와 농업가, 지성인과 군인으로 구성되는 주요한 공공의 이해관계를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들 중에서 그는 그 자신의 '세력'─중간 소득의 지식인들─을 위해 '무의식적인 대변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모스카에게는 일종이 '잠재적 마르크스주의'가 있었다. 그로 하여금 결국은 민중의 통치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한 '잠재적 민주주의'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273-4)


"모스카의 이론을 현대의 특징이 되고 있는 대중조직─모스카가 정치계급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어냈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조직─에까지 확대시키는 것은 미헬스에게 남겨진 일이었다. 파레토와 마찬가지로 미헬스도 사회주의를 통해서 사회학에 도달했다. 『정당사회학: 근대 민주주의 과두적 경향에 관한 연구』이라는 제목의 연구─모스카의 『통치이론』보다 4반세기 후에 간행된 ─에서 미헬스는 엘리트라는 개념을, 그동안 성장해왔고 그가 잘 알고 있는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에 적용했다. 그가 '과두제도의 철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개인적 경험을 통해 발견한 진리─정치조직은 규율과 관리의 계속성에 대한 내적 필연성 때문에 불가피하게 폐쇄적이고 자기 보존적인 과두제도가 된다는 어렵게 얻은 확신─의 집대성이었다. 이 책의 신뢰성은 대부분 서구 대륙 3대국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저자 자신의 직접적 경험을 생생하게 반영한 데서 비롯되었다."(270-5)


8장 베버의 사회학 : 실증주의 및 관념론의 극복


"뒤르켐은 준準실증주의적 입장의 도움을 받아 사회학과 인류학의 결합에 성공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독일의 신관념론자들은 사회과학의 세계와 역사적 경험의 세계를 사실상 융합시키고 있었다. 이 두 결합의 체계는 아직은 합류되지 않았다. 역사와 철학에 대한 독일적 감각과 과학적 엄격성에 대한 영국-프랑스적 개념을 결합하는 것이 베버 스스로가 설정한 과제였다." "베버는 어떤 사상가들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합류점에 서 있다. 곧 관념론과 과학적 방법, 경제학과 종교,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 정치적 관여와 사회과학의 '객관성'의 주장 등에 맞서서 그는 이를 합류시킨 것이다. 베버는 개인적인 확신에서는 민주주의자이면서도 파레토와 모스카가 시작한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에 공헌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20세기의 여러 조건 아래에서 계몽주의가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여러 사건에 대한 기질적 반응에서는 오히려 '계몽주의적' 성격을 보였다."(306-8)


"뒤르켐을 '아노미'라는 개념과 관련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베버를 '관료제도'와 '카리스마'라는 개념과 관련시켜 생각한다. 이 두 개념은 서로 모순되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고, 이 개념에 대한 베버의 태도도 흡인과 반발을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현대 서구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경향은 공적 활동의 모든 국면에서 관료화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베버는 스스로 합리주의자로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계승자로서 이러한 경향을 찬양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관료제도가 개인의 지적 자유─이것은 그가 마음속 깊이 소중히 여기던 또 하나의 가치였다─에 일으킨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탈출구를 마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베버는 언제나 '지배자' 개념에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자유에 대한 위협은 뚜렷했다. 베버는 이 용어에 따르는 원초적이고 위협적인 요소들─주술사, 예언자, 약탈자, 전쟁의 지휘자 등─을 모두 암시하고 있다."(308)


"베버는 역사적·사회적 연구에서 인과적 설명의 범위를 엄격하게 한정하려고 한 점에서는 크로체나 관념론자들과 입장이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인과적 설명을 전적으로 제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서, 베버는 '가설적 분석'이라는 가장 정교한 도식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연구에서 인과적 설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그것을 제외하면 주어진 사건의 계기에 결정적인 차이를 일으킬 요인, 다시 말해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가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없는 요인을 찾아내는 것뿐이라는 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가설적인 인과적 설명의 방법을 제기하면서, 베버는 당면한 문제의 결정적인 요인은 '개별적인 연구자의 관점으로부터'만 결정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이러한 요인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가치체계에 기초를 둔다는 의미였다. 여기까지 베버의 논의는 리케르트의 논의를 밀접하게 따르고 있다."(324-5)


"그러나 베버는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적 뒷받침을 거부하고 과학적 추구에서의 '객관성' 또는 '윤리적 중립성'을─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주장하면서 리케르트와 갈라섰다. 베버는 독일의 교수가 공공연하든 은밀하든 선전가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고, 강단에서 일종의 사회적 메시지를 설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독일의 대학교수는 학생이나 동료로부터 공격받을 두려움 없이 공적 문제에 대해 거만하게 말할 때,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버는 이러한 신념을 억압할 뜻이 없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서 이러한 신념과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는 이러한 신념은 사회과학 분야에서의 창조적 활동에 불가결한 것이라고 암시했다. 과학적으로 중요한 선택은 바로 이러한 확신의 일종의 승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도덕적 무관심의 태도는 과학적 객관성'과는 관계가 없다〉고 베버는 주장했다."(325-6)


# 연구 대상의 선택은 주관적(가치 판단)으로, 연구 대상의 분석은 객관적(사실 판단, 제한된 인과적 설명)으로 하려는 노력


"인과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 (소렐의 '분리' 개념과 흡사한) 베버의 '이념형' 정의이다. 사실상 이념형은 인과적 설명의 단일한 복합체이자 온갖 종류, 온갖 차원의 추상물이다." "일반적으로 베버가 제시한 구체적인 예는 두 가지 주요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유개념─'정부'나 '교회' 등 사회현상의 계급─이다. 둘째는 '이상화된' 개별적인 현상복합체─예컨대 '자본주의'─로서, 여기에는 단 하나의 순수형만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베버는 자신의 구성물을 단지 이해를 위해 만들어낸 인공적인 도구로서, 언젠가는 보다 잘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에 의해 대체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사회과학의 역사는 현실을 개념의 구성물에 의해 분석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과학적 지평선의 확대와 변화에 의한, 이와 같이 구성된 분석적 구성물의 해소─이고 이렇게 변화한 기반에 바탕을 둔 개념들의 새로운 재구성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과정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베버는 생각했다."(330-2)


9장 유럽의 상상력과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자체를 회고해보면, 1905년은 가장 분명한 분수령을 보여준다. 전쟁에 대한 거의 끊임없는 경계 상태에서 살았으므로, 1905년의 세대는 아버지의 세대들보다 성급했다. 그들은 선배들을 존경했다. 이 점에서는 보통의 젊은 세대의 상像과는 달랐다. 그러나 그들은 선배들이 제공하는 것보다는 좀 더 인상적이고 좀 더 극적인 것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선배들이 이룩한 발견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을 그들은 보다 난폭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1890년대의 저술가들은 이성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에는 자제심을 발휘했으나, 1905년의 젊은이들은 공공연하게 비합리주의자, 심지어는 반反합리주의자가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그들의 선배들의 점잖고 초연한 태도에 만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독일에서는 젊은 세대들이 니체의 가르침을 직접적 행동의 의미로 응용하기 시작했고, 그들 자신을 니체가 〈청년의 왕국〉을 수립하도록 요구한 〈용을 죽이는 전사의 제1세대〉라고 생각했다."(355-7)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의 취향에 따라 베르그송을 해석했다. 그들은 베르그송의 사상에서 베르그송 자신의 확신과는 분명히 대조적인 직접적 행동 정치의─보통은 우익의─사상을 읽었고, 베르그송이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독단적 종교 사상을 읽었다." "아버지들은 드레퓌스의 무죄를 위해 싸웠고, '반동'과 성직자의 권력에 맞서 싸웠다. 이 새로운 세대가 아버지들보다도 더욱 보수적이었다는 것은 기묘한 현상이었다." "프랑스의 교육받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의 영향이 쇠퇴한 또 하나의 이유는 드레퓌스파의 승리를 횡령한 데 있었다. 승리한 급진파는 1901년부터 이데올로기적 복수의 정치를 시작했다. 이것은 1905년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단 한 사람이라도 인종과 종교 때문에 수난을 겪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온 나라를 벌컥 뒤집어놓은 바로 그 사람들〉이 이제 〈성직자를 추방하고 모든 종교적인 것에 선전포고를 한〉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358-60)


"상상적 문학에서는 사회이론가들이 저지하려고 노력한 상대주의적 가능성이 마음대로 활개칠 수 있었다. 20세기 초의 소설과 희곡에서 상대주의는 거의 상투어였다. 윤리와 철학은 일관성 없는 것이라는 인식은 곧 현대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설가와 극작가는 사회이론가들이 맞서 싸우거나 외면하고 있던 일을 완성했다. 책임없는 자의 순진성을 지닌 채, 작가들은 철학자와 사회학자들이 받아들이기를 망설이고 있던 최종적 결론을 아주 쉽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지드와 만의 초기 작품, 헤세와 피란델로의 성숙기 작품에서 그들이 '부도덕한 것'을 생명력과 창조의 원천으로서 태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윤리적 입장을 제시한 경우에도, 그것은 종교적으로 (또는 실용적으로) 기초된 지상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의한 의식적인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각자의 의식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감각은 사회사상과 문학의 또 하나의 연관성을 보여준다."(383)


"또한 20세기 초 문학에서의 '실재reality' 개념도 극단적으로 문제가 많은 것이었다. 당시 '실재'라는 말은 겉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 동일한 현실의 모순되는 해석, 설명할 수는 없으나 의식이 고양된 순간에 섬광처럼 나타나는 보다 깊은 진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처럼 심층을 탐색하는 기술은 상상적 문학에 가장 분명하게 반영된다. 그리고 동일한 과정에 의해서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의 저장고로서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20세기 초의 소설에 거듭해서 나타난다. '지속'─경험으로서의 시간의 질質─에 대한 강박관념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실제로 살아온 시간에 대한 감각, 이 시간을 연장시키고 원근遠近을 정하는 무의식의 작용에 대한 감각, 무의식의 왜곡과 기만에 대한 감각은 알랭-푸르니에의 『대장 몬』, 만의 『마魔의 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독특한 맛을 준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프루스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초의 대표적인 소설로 꼽히게 되는 것이다."(383-4)


"딜타이와 베버는 역사의 자료 자체에서 최종적 진리나 도덕적 가치의 어떤 근거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날카롭게 자각하고 있었다. 역사가나 사회과학자는 결국 그들 자신의 가치체계를 확인하는 입장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임을 그들은 자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상대주의자였다. 동시에 그들은 적어도 부분적인 '객관성'에 도달하고 이와 함께 이질적인 가치에 대한 공감적인 이해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서구의 몰락』에서 슈펭글러는 이 두 가지 일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 사회의 가치체계는 다른 문화의 구성원들에게는 닫혀진 책과 같은 것이고, 역사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자신의 에토스ethos를 눈에 거슬리는 자신감을 갖고 모든 외래인으로부터 옹호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역사연구의 근원으로서의 정열과 이를 보다 광범한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판단으로 승화시킨 것 사이의 구별을 제거해버렸다."(394)


10장 1920년대의 10년 : 전환기의 지성인


"신新실증주의자들은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 대해 확고한 인과관계의 고리를 만들어놓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과관계를 믿는 것〉은 〈미신〉이고 〈이른바 자연법칙〉이 〈자연현상의 설명〉이라고 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사실상 이러한 생각의 의문을 품고 있었다. 자연에서의 유일한 필연성은 〈논리적 필연성〉뿐이었다. 그러므로 콩트, 스펜서, 텐 또는 그밖의 사람들이 원래 과학적 연구의 범위로 삼고 있던 분야 중에서 대부분을 포기한 다음에야 비로소 20세기의 신실증주의자들은 철학에 과학적 방법을 다시 도입할 수 있었다.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온 문제들을 거의 다 가치 또는 형이상학의 문제로서 제거해버리고 그들은 논리적 또는 상징적 언어로 모호하지 않게 공식화할 수 있는 문제들만을 다루었다." "20세기의 시와 그림과 음악이 더욱 비교적秘敎的이고 '난해'해진 것처럼, 이제 철학도 똑같은 과정을 밟게 된 것이다."(420)


# 신新실증주의자들 : 『논리-철학 논고』(1921)를 발행한 시절의 비트겐슈타인과 프레게와 카르납 같은 빈 학파의 젊은 과학철학자들


"1920년대에도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는 '정상적'인 것처럼 생각하며 생활하고 철학하는 것이 아직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즐겁게 배회할 수 있는 범위는─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상당히 좁아져 있었다. 전쟁을 통해 서유럽과 중부유럽 사람들 사이에서 문화적 가치의 취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볼셰비즘의 대두는 러시아를 자유주의적 지성인의 공동체로부터 분리시켰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승리는 반세기 동안에 처음으로 서양의 주요한 나라를 자유로운 사색에 대해 거침없이 적의를 보이는 정부 밑에 놓이게 함으로써 볼셰비즘과 마찬가지로 양심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 새로운 체제에 반대하는 지성인이었던 크로체와 모스카가 1920년대 중반에 어느 길을 가야 할지 망설인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크로체가─후에는 독일의 마이네케가─역사가는 정치적 논쟁으로부터 초연해야 한다는 이전의 주장을 버리고 결국은 전투적 태세로 자유제도를 옹호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421)


"1920년대가 끝날 무렵, 대공황과 국가사회주의의 위협이 닥치자, 이러한 절충적 입장조차도 전혀 용납되지 않는 것 같았다. 1930년대가 되자, 더 많은 유럽 지성인들이 정치적 가담만이 단 하나의 가능한 선택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주) 소수가 파시즘을 선택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 중에서는 하이데거와 융만이 나치 정권과 타협적인 관계를 맺었다. 유럽의 지적 지도자들 대부분은, 망명을 했든 인민전선의 긴요성을 주장했든, 또는 말없이 '국내에서의 은거'를 감수했든,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운명적인 미래라고 선언한 것에 저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경제적 파멸, 정치적 격동, 전쟁의 위협─이 모든 것은 그들의 생존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치적 공포로 가득 차고 전쟁이 임박한 새로운 유럽에서 자유롭게 떠도는 지성인들을 위해 어떤 장소가 있었을 것인가? 자유롭게 사색하는 지성인들은 18세기 및 19세기의 무용지물이 된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리라."(422-3)


"이성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면서, 20세기 초의 사회사상가들은 면도날 위를 걷는 듯한 위험에 직면했다. 한쪽에는 18세기와 실증주의적 전통이라는 지난날의 잘못이 있었다. 또 한쪽에는 비이성과 감정적 사고라는 장차의 잘못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심리학적·역사적 발견이 쌓아놓은 철저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이 한계 때문에, 이성을 신뢰할 수 있는 좋은 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곧 '직관'이나 자유연상이나 그밖의 비정통적인 탐구방식이 사회사상의 증명의 기준을 아무리 넓혀 놓았다 하더라도, 마지막 통제를 하고 결재를 하는 것은 이성뿐이었다." "(실증주의와 관념론 사이의 좁은 길 위에서) 베버만이 동요없이 이성과 비非논리는 '모두' 인간세계의 이해에 불가결하다는 주장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그와 그의 세대가 이성과 정서적 가치 사이에 위태로운 균형이나마 이루어놓으려고 노력한 것은 겨우 10년 내지 20년 동안뿐이었다. 이 두 가지가 곧 별개의 것으로 갈라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4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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