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들의 망명 - 사회사상의 대항해: 1930~1965 개마고원 서구 지성사 3부작 3
스튜어트 휴즈 지음, 김창희 옮김 / 개마고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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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대이주


"사실 이탈리아 출신의 망명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탈리아계 유대인들을 빼고 나면 망명자들 가운데 중요한 지식인으로 꼽을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탁월한 인물들 가운데 대다수는 정치적 행동주의자─가능한 한 유럽 대륙에 머무르고 싶어했던─로서 그들의 조국을 지배하고 있는 (무솔리니)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중부 유럽 출신 망명객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구대륙 문화의 신대륙으로의 전반적인 이식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망명자들이 사회사상 분야에 남긴 업적들의 대부분이 파시즘 그 자체의 비판에 국한된다는 사실도 그리 놀라운 일이 못 된다. 보르게세 같은 탁월한 문학비평가나 살베미니 같은 역사가가 미국에 와서 자신의 분야로 삼은 것은 파시즘 분석이었다. 무솔리니에 대해 판단을 내리겠다는 논쟁적인 과제가 보다 추상적인 그의 관심사들을 밀어젖혔으며 그의 저술들에 엄격한 실천적 목표를 부여했던 것이다."(26-7)


"파리가 보다 아름답고 런던이 보다 세련되었다고 한다면, (확신과 공포가 엇비슷하게 혼재되어 있던) 베를린은 미학적인 새로움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 논조의 예리함, 정신의 기민성, 대립되는 양식들의 공존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재능 있는 사람들은 베를린의 빈약한 외관과 사교상의 괴로움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독일 문화의 분열상은 이미 뚜렷해졌고 사실상 19세기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열광적이고도 다양한 지적 생활 속에서 민족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세계주의적인 공감을 표시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기본적인 격차가 있었다. 회고해볼 때, 이 중에서 후자가 바이마르 문화의 보다 전형적인 경우라면 전자는 비록 독창성이나 우수함에서는 후자에 뒤떨어졌지만 항상 수적으로 우세였고 대중적인 지지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주의적인 성향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고뇌의 원천이기도 한 바로 그 민족적 특성의 표현을 놓고 매우 자랑스러워했다."(28-31)


"독일 지식층의 반항아들이 종종 무계급적 혹은 '보헤미안'적 생활방식을 표방하기도 했던 데 반해, 그들의 지도적인 사회사상가들은 여전히 '부르주아적'이었다." "묵시록적인 시기에 '부르주아적 휴머니즘'의 생존가능성에 관한 문제는, 그 휴머니스트들이 망명지까지 가지고 간 성가시면서도 상호 관련된 두 가지 문제 중에서 첫번째 것이었다. 두번째 문제는 '정신Geist'의 문제였다." "'정신'을 경외하는 점에서는 대다수 독일적인 지식인들과 소수의 세계주의적 지식인들 간의 차이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독일의 작가와 교수들은 '정신'의 공급자로서 농민대중에게 궁극적인 가치를 규정해주는 일종의 '사제직'을 주장해왔다. 1930년대에 현실세계에서 받은 타격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착실히 성장해 나갔고,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와 같이 문화적 혁명가를 자처하던 사람들은 헤겔의 가르침에 아주 밀착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는 숨어 있는 모순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35-6)


"망명자들 중 창조적인 작가들과 사회사상가들은 각각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전자는 계속 자신들의 모국어를 고수하면서 번역자를 매개로 해서만 미국의 대중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사상가들은, 물론 출중한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작가들과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영어로 집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새 언어를 완전히 습득한 사람들은 제일 어리거나 적응력이 강한 사람들에 한정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길을 택함으로써 그들이 잃어버리고 만 것들─사고와 느낌의 차원이 의미전달의 기술로 대치되면서, 많은 부대적 의미, 다의성과 시적인 관념, 무의식적인 표현과 침묵의 의미까지도 놓치게 되는─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망명자들은 자신들이, 만약 고전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고대 그리스의 '코이네koine'와 동일시할 수도 있을 그런 영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44-5)


"베버는 1920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뒤를 이을 아무런 조직적인 학파도 남겨놓지 않았다. ('가치 중립적인' 사회 연구를 지향하는) 베버의 유산이 사회사상의 주된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비로소 미국에 건너와서의 일이었다." "더욱이 영국이나 미국으로 이주한 사회학자들과 사회학적 역사가들은 보다 덜 관습적이었고 보다 실험지향적이었다. 그중에는 만하임과 그의 제자들 외에, 베버에게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배운 방법론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망명지까지 간직하고 간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서는 별로 발달하지 못했던 기술들을 미국의 사회학자들에게서 기꺼이 배우고자 했다. 그래서 대서양 양편의 종합이 처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특히 이 사회학적 전통의 종합에서 독일인들이 이론을 제공했다면 미국인들은 경험적 탐구를 위한 재능과 열정을 제공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제적인 사회학의 기원이다."(46-8)


"프로이트의 경우, 그의 딸 안나가 영국에 계속 머무르면서 그의 연구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계승자들은 대부분 대서양을 건너갔다. 이런 결단이 실제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분석학이 이미 미국의 풍토에 정착해 있어 1933년(히틀러 집권)이나 1938년(오스트리아 병합) 이후에 건너간 연구자들도 쉽게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의 환경은 그들이 떠나온 곳의 환경보다는 훨씬 더 호의적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덜 폐쇄적이었고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온 메시지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들이 미국에 도착한 시기는 바로 경제공황으로 말미암아 세속화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광범위하게 회의를 불러일으키면서 미국인들이 '그들 자신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대안적 사고방식을 갈망하고 있을 때였다. 정신분석학은 1930년대의 감정상의 주저 속에서도 최소한 보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기회를 제대로 잡았던 것이다."(49)


"비트겐슈타인이 1929년 케임브리지에 도착해서 같은 해 미국으로 친구 슐리크를 방문했던 일은 빈의 논리적 분석과, 영국·미국에서 이미 형성되고 있던 이에 필적하는 철학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중요한 국면의 서막을 이루었다." "카르납과 빈 학파의 다른 학자들 역시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철학의 지배적인 경험적 분위기는 우호적인 수용을 약속했고, 그것의 실용주의적이고 도구주의적인 접근방식도 비교적 엉성하게나마 빈 학파의 발견들과 유사했다. 중부 유럽 출신의 논리학자들은 그들의 정교한 방법, 자연과학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탁월한 명징성 등을 통해 새로운 영어권의 제자들에게 접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가능한 한 모호성이 배제된 상징언어를 통해 그들의 가르침을 전달하려 했기 때문에 다른 망명자들을 괴롭히던 번역의 문제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다. 한 세대도 지나가기 전에 영어는 자연스럽게 독일어를 대신해 논리적 분석의 전용어가 되었다."(50-1)


2장 영국의 철학 : 대이주의 서곡


"영국의 분위기와는 좀 걸맞지 않은 '외국 수입품'이었던 헤겔의 관념론적 사유방식을 청산하는 동시에 영국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20세기적 사고방식을 수립하는 일은 별개의 두 집단에 속한 저술가들에게 맡겨졌다. 첫째 집단은 경제학의 마셜과 사회학의 월러스로 대표되는 실용주의적이며 명목론적인 사회과학자들이었다. 마셜과 월러스 같은 사람들은 보편적인 이론에 대한 19세기적인 열망을 포기하고 개별적인 현상들에 주목했다. 그들은 또한 사회개혁 등과 같이 그들의 이념을 실제로 적용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목적에서 동시대의 대륙인들보다 훨씬 온건했기 때문에 1900년 전후의 독일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급박해 보였던 인식론적 문제들을 비교적 담담하게 대했다. 영국의 사회사상가들은 사변보다는 측정을, 인식의 문제보다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선호했던 것이다. 그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업적은 다음 세대에 케인스의 새로운 경제학으로 나타났다."(55-6)


"절대적 관념론을 뒤엎은 두 번째 사상가 집단은 케임브리지의 철학자 무어와 러셀이었다." "(실증주의와 헤겔을 모두 논박한) 무어의 주장은 이른바 〈선善〉이라는 것 그 자체는 〈매우 특이한 종류〉에 속하기 때문에 〈사실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치의 영역을 사실(혹은 과학)의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입장은 거의 동시대에 나온 베버의 방법론적 주장과 흡사하다. 이 영국인과 독일인은 각자의 마음속에,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불안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독자들에게 아무런 주의도 없이 과학적 주장과 윤리적 주장 사이를 무분별하게 오고가는 '실증주의자'들의 태도에 대해 공격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정신의 영역에서는 그 두 가지 형태의 진술이 거대한 종합에 도달하리라는 '헤겔적 관념'을 공격했다. 무어의 표현처럼, 진리를 희생시킨 채 〈통일〉과 〈체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철학의 할 일이 아니었다."(56)


"언어는 비트겐슈타인이 투쟁의 장소로 잡은 영역이었다. 언어에 대한 그의 공격은 '인간생활에서 말이 작용하는 방식'에 관한 보다 폭넓은 탐구의 일부분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쓴 이후에 그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해명하고 있었다. 『논고』를 쓸 무렵에 그는 실재reality에서 언어가 도출된다고, 다시 말해 실재세계real world의 구조가 언어의 구조를 결정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이제 그 역逆이 진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즉, 실재를 이해하는 도구로서의 언어는 우리가 그 현실을 보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철학적 분석이 언어의 논리적 구조의 기저에 놓여 있는 제일성齊一性, uniformity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었다. 그런 제일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한히 다양한 언어의 용례를 검토함으로써 보다 심원한 언어의 성질을 밝혀내는 것뿐이다."(74-5)


# 제일성 : 같은 조건에서 같은 현상을 되풀이하여 일으키도록 하는 질서의 원리나 공리


"사회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방법─독립적·객관적인 지지점도 없고 '의미와 필연성'도 그것을 구현하고 있는 언어행위를 통해서만 보존되는─에는 큰 이점이 있었다. 즉, 러셀과 빈 학파가 거의 막아버릴 뻔했던 전망을 다시 열어놓았던 것이다. 철학은 다시 구체적인 사례로, 현실적인 삶의 과정으로 돌아왔다. '언어를 생각하는 것'은 곧 '삶의 형식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간주했다. 철학자들은 일상적인 담론의 부정확성 그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고, 인간의 일상적인 관심사들의 모습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그 관심사들을 논의할 수 있었다. 카르납과 그의 동료들이 염려했던 것처럼 그 방법은 과학을 손상시킨다기보다는 통상 과학적 분석의 틀을 벗어나 있으면서도 과학적 분석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 인간 사고와 행위의 거대한 영역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빈의 추종자들을 당황케 하는, 비트겐슈타인 사상의 예술적·신비적 측면이었다."(82)


"사회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그가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값진 측면은 1920년대─한편엔 분석철학과 논리실증주의, 다른 한편엔 현상학과 실존주의─분리되었던 사유양식들을 하나의 지적인 세계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전망을 마련했다는 데에 있다. 논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신비론자이기까지 했던 그는 하이데거와 무어를 동일한 관점에서 읽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었다. 더욱이 언어에 대한 그의 태도를 통해, 그는 필연적으로 어휘가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 분야의 연구자들을 다시 진지한 사상가들의 대열 속에 영입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역사를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엄밀한 정의에 대한 혐오와 사건이 발생하는 전체 맥락에 대한 강조를 통해 전문 역사가의 유동적이고 관대한 언어 사용법에 접근해갔다. 언어에 관한 그의 조작 개념은 아주 엄격한 방법이 사용될 수 없는 탐구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존중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90-1)


3장 파시즘 비판


"지적 소양이 압도적으로 문학에 편중되어 있던 보르게세의 파시즘 비판은 생생하고 인상적이었다. 그의 저서는 충격 효과, 유익한 일화, 유창한 언어구사 등으로 넘쳐흘렀다. 그래서 바로 그 연극적 기질을 십분 발휘해 그는 의식적으로 예술적 표현을 하기에 적합한 파시즘의 여러 측면들─즉, 파시즘 집권 과정의 우여곡절, 파시즘의 문화적·역사적 맥락 등을 강조할 수 있었다. 보르게세는 무솔리니 통치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탈리아 민중이 그것을 수용했던 이유는 주로 성격상의 나약함에 있다고 확신했다. 즉, 파시즘 특유의 요소들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것이었으며, 그것은 처음에는 마음속에 나타난 현상이었다가 나중에 가서야 대중사大衆史의 사실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 "파시즘은 '변혁'이 '실체'이며, '정열'이 '덕'이라고 가르쳤다. 힘이 곧 정의正義를 만들어낸다는 믿음과, 정의의 이념을 힘의 이념으로 대치하는 과정 속에서 파시즘은 하층 중산계급의 신조가 되었다."(97-8)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헤겔주의자들, 즉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과 마찬가지로 만하임은 권위주의적 통치의 출현을 합리성의 부식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그런 과정의 위험성은 바로 대규모 산업사회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미 베버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런 사회는 최고도로 합리적 계산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그에 상응해서 감정상의 만족에 대한 일련의 억압·단념에 의존하는 행동체계를 만들어냈다. 그 사회는 아주 정밀한 사회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비합리적 혼란도 매우 광범위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또 동시에 그 사회는 '승화되지 못한 심리적 에너지도 축적'해 왔기 대문에 그것은 결국 정교한 사회생활의 기구를 분쇄할 정도의 위협으로 작용했다. 기술적 합리성과 대중감정 간의 운명적인 이율배반─즉, 정교한 장치와 그 속에 내재하는 야만주의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서 만하임은 파시즘 운동의 심리학적 차원을 간파할 수 있었다."(103)


"정신분석가로 훈련을 받았던 프롬은 순수히 심리학적이기만 한 설명에 만족을 못 느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의 어떠한 기본적인 도식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시즘의 호소에 대한 장기적인 역사적 평가 속에서 이 양자의 요소들을 결합하고자 했다." "프롬의 저서에서 가장 독창적인 특징은 종교개혁기의 독일이 바이마르 시대와 나치 시대의 사회사를 예시하고 있다는 단순하고도 무시대적인 지적이었다. 추론은 계속된다. 각각의 경우에 급작스런 경제적 변동은 사회의 전통적인 구조를 뒤흔들어놓았다. 그래서 개인들의 무력감과 고독감은 증가했고, 모든 전통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는 더욱 현저해졌지만 개인적인 성취의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각 개인은 거대 세력들로부터 위협을 느꼈다. 20세기에서처럼 16세기에도 그 결과는 〈강제적인 확실성 추구〉 〈불안으로부터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지도자, 즉 루터나 히틀러의 품 안으로의 절망적인 도피〉였다."(106)


"무솔리니가 오랫동안 '조합국가'라고 부르던 것에 마침내 실체를 부여한 1934년 '조합' 창설의 요란한 선포는 살베미니의 저서 『파시즘의 위협 아래에서』가 출현하는 데 직접적인 자극제가 되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군수뇌, 고급관료 , 대기업가, 당지도자 등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는 일종이 '집단과두체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네 집단의 연동적인─상호 보강적인─이해관계가 정권에 내적인 응집력과 안정성을 부여했다." "궁극적으로는 파시스트의 지도자들이 조정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들의 권력─그리고 총통 자신의 권력─도 과두체제의 다른 구성원들의 필요와 압력에 의해 제한되었으며 결국 그들과의 협조관계 속에서만 존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통은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면서 이 행동준칙을 잊어버렸다. 그가 평소에 아끼던, 그리고 그를 지원해오던 이탈리아 사회의 자산가들은 하나씩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며, 마침내 1943년 여름, 그는 자신의 당 지도자들에 의해 타도되었다."(124-6)


"노이만 역시 독일의 지배계급은 이해관계가 얽히고 상호보완적이기도 한 네 개의 집단─즉 대기업, 당, 관료, 군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독일의 기업이 카르텔화되어 가는 과정과, 공식적으로 인정된 지역적·기능적 집단들이 대규모 콘체른에 지배되어 가는 과정 등을 추적함으로써, 독일노동전선의 기만책과 노동계급의 '원자화' 과정을 밝혀내게 되었다. 그의 가장 노련한 분석이었던 이 작업에서, 그는 계급화해라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허울좋은 가면을 체계적으로 벗겨냄으로써 노동문제 전문변호사라는 그의 옛 직업으로 되돌아갔다. 더욱이 그는 나치 경제체제의 이른바 당 부문이라는 것도 나치 수령들의 합법화된 강도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은 점점 더 대자본가들과 공생 상태에 돌입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폭력을 휘두르던 자들은 점점 기업가로 변신해가고 있으며, 기업가들은 점점 폭력을 휘두르는 자로 변화해가고 있다〉고 그는 결론지었다."(136-7)


"1951년 초에 출판된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과장이 심한 데다가 대단히 편향되어 있고 자료로 뒷받침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한 해석을 잇달아 전개하고 있다." "가령, 그녀는 공산주의가 나치즘과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갖는다고 독자들에게 제시하면서도,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는 아무런 적절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는 기본적으로 전체주의를 광기와 동일시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실천 가운데 경제적 합리성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서문에서 아렌트는 그 책이 집필되던 시기의 환경, 즉 '두 강대국 간의 제3차 세계대전'을 예견하면서 생활하던 경험에 대해 언급했다. 1950년경만 해도 그런 파국적인 예상은 그리 신기한 것이 아니었지만, 5년이 채 못 되어 그것은 이미 지나친 과장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일종의 '이념형'으로써의 전체주의는 1950년대 말 단순한 도식적인 분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이데올로기적 상황 속에서 점점 효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156-8)


"전 산업적 가치─다시 회복된 공동체 내에서의 계급 간 화해─가 파시즘의 기본목표 중의 하나였다면, 그것을 성취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살베미니와 노이만이 이미 제시했던 데로 간단히 답변하자면, 그 이유는 대규모 산업자본 세력이 분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파시즘 권력이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면, 결국 그들이 요구하는 경제적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중공업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요 기업가들은 그들 자신이 필요불가결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군사적 준비와 전 산업공동체의 가치에로의 귀환은 양립할 수 없는 목표들이었으며,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목표의 서열상 그 가운데 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파시스트 체제에서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성이라는 주장은 마침내 기묘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즉, 경제의 현상질서는 유지되었던 반면, 그 운동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165)


4장 대중사회 비판


"대중들의 위협에 대한 경고는 서구의 사회사상에서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19세기엔 니체와 부르크하르트, 토크빌과 애덤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지적한 불길한 예감도 있었고, 20세기의 첫 세대에선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향수어린 명상과 이탈리아의 3인조인 크로체, 모스카, 파레토 등의 보다 체계적인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사회적 지위와 지적인 입장에서 귀족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중이 선거권을 행사하게 되면서부터 나타날 통속성 혹은 취향과 견해의 '평준화'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의 대중사회 비판은 그 안에 민주주의적 열망을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1950년대 미국에 관한 글을 썼던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도덕적 목적은 지위와 문화적 특권에 기초를 둔 사회로부터 아직까지 남아 있는 부분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상실된 것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대중 자신을 그들의 해방의 열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171)


"그래서 19세기에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경제적' 비판으로 성립되었던 것이, 이제는 망명한 대중사회 연구자들의 손에서 대규모 산업이 만들어낸 기업문명에 대한 '문화적' 비판으로 변형되었다. 단순한 풍요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는 가정이 그 분석 속에 함축되어 있었다." "인간이 그들의 일(그리고 놀이)을 '소외된 것' 혹은 '물화物化된 것'으로 인식하는 한─소외Entfremdung와 물화Verdinglichung를 본질로 하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그 자신의 사물로의 변환을 감수하는 한─생산수단의 소유권을 단순히 기술적으로만 이전하는 데 희망을 건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소련이 그 적절한 실례였다." "기술적 합리성과 현대 대중의 미적·도덕적 가치 사이에서 연관관계를 발견하는 일은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에게 맡겨진 과제였다. 이들이 볼 때, 파시즘도 자유민주주의의 대극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산업화된 서구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한 경향─비합리적 지배의 경향─의 '가장 극단적인 실례'였다."(172-3)


"망명자들의 대중사회 비판 뒤에 숨어 있던 대전제는 미국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생소한 세계관─즉, 자신의 원천인 헤겔로 다시 되돌아감으로써 면모를 일신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었다." "루카치는 물론, 그와 관계가 소원했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역시 1920년대부터 1960년까지의 기간에 걸쳐 마르스크주의에 고양된 새로운 철학적 입장을 부여했던 주관주의적 재해석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람시는 20세기 신新마르크스주의─19세기 말의 과학적 가면을 벗어버리고 19세기 초의 헤겔적 토대로 되돌아간 마르크스주의─를 이탈리아에서 고독하게 구현한 선구자이며, 메를로-퐁티는 신마르크스주의에 자유주의적 색채를 입혀 뒤늦게나마 프랑스에 선전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이런 성향의 이데올로그들에게는 '소외'라는 개념이 사회분석의 관건이 되었으며, 다양한 사상가들을 한데 묶어주는 핵심적인 용어이기도 했다."(175-6)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이란, 일련의 강력한 집중포화에 의해 주제가 선명히 부각되거나 간파될 때까지 부정에 부정을 계속해 나가는 사유양식을 의미했다. 비판이론은 그 정의定義와 실제에서 비체계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폐쇄적인 철학에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비판이론이 헤겔에게 빚을 졌다면 그것은 비판이론의 최종적인 형태라기보다는 공격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비판이론은 부정의 과정을 부단히 전개시켜 나가는 가운데 헤겔 자신의 체계까지도 능가하여 그것과 적대되는 위치에 서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는 방법론적으로 마르크스의 변증법보다도 더 파괴적인 새로운 형태의 변증법, 즉 '종합의 계기를 갖지 않는 변증법'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론은, '사물'이 인간의 지각에 우선한다는 단호한 주장과, 세련되기는 했지만 극도로 추상적인 표현양식 사이에 불안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이 중 후자의 의미에서 그들은 여전히 관념론적이고 형이상학적 틀 속에 머물러 있었다."(181-2)


"『계몽의 변증법』에서 본격적으로 탐구되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목적은 '왜 인류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상태에 돌입하지 못하고 새로운 야만상태로 떨어졌는지' 그 이유를 발견해내는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들의 목적은 계몽주의가 왜 자기 파멸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저자들은 이 계몽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할 때, 18세기의 진보적인 사상이라는 뜻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 즉 베버가 고전적으로 정의해놓은 바와 같은 합리화rationalization와 각성disenchantment의 전과정이라는 뜻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신화를 분쇄하려 노력했다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주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것은 다시금 또 하나의 신화─거짓 명석성의 신화─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완전히 배반당하지 않기 위해, 계몽의 개념을 다시 음미해봄으로써 과거의 희망을 구출해내는 일은 바로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맡겨진 과제였다."(196-7)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의 대중성이란 것이 사실은 가식이며 조작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대중문화를 의식적으로 하나의 산업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것은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못하고 지배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과거의 위대한 예술은 일종의 '부정적인 진리'를 구현하고 있었던 반면─고전음악조차 '완전무결한 양식'의 명령을 검증해보기도 했던 데에 반해─현대의 문화산업은 예술을 '절대적 모방'으로 환원시켜버렸다. 그것은 모든 것에 동일한 각인을 남긴다. 그것은 비극을 포기하고 '인간의 자조自嘲' 혹은 '인간성의 풍자'를 장난스런 모습으로 보여줌으로써 누구에게나 쉽게 접근한다." "그들이 『계몽의 변증법』을 쓸 당시 그들은 할리우드 근처에 살면서, 오락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독일 망명자들과 어울리곤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생활이 관리받는 세계'에서의 암묵적인 강제성의 적절한 실례로 그들에게 인식될 수 있었다."(199-200)


"1964년에 『일차원적 인간』을 내놓은 마르쿠제는 미국─선진산업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한 곳─에서 부드럽고 합리적이며 민주적인 부자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선진산업사회란 모든 부문에서 과학 기술이 승리를 거둔 사회, 복지국가와 전쟁국가의 경향이 외적으로는 아무런 모순도 없이 공존하는 사회, 여러 가치들의 보편적인 평준화로 시민들이 자신의 현실적인 선택권의 박탈을 깨달을 수 없게 된 사회, 국민들이 통치자의 말은 믿지 않으면서도─혹은 노골적으로 불신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그 말에 따라' 행동하는 사회, 현상이 일체의 초월을 거부하기 때문에 사회적 규제를 목적으로 더 이상 파시즘이 요구되지 않는 사회, 마르크스주의가 아직도 이론적으로는 적용될 수 있지만 역사적 행위자를 상실한 사회,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미하나마 유일한 희망은 하층의 국외자들이 내보이는 분노와 버젓한 삶에 대한 열망에서밖에 찾을 수 없는 사회라고 보았다."(224)


# 다만 이러한 사회분석은 당시 미국 출신 비판자들의 시각과 크게 다르거나 그 수준을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산업화되기 이전의 독일 정신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점에서 마르쿠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이 정말 이해하고 있던 것은 헤겔적인 청년 마르크스였다. 자본주의의 산물에 대한 그들의 정열적인 항의는, 자본주의의 합리성을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로 진전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단계로 보는 후기 마르크스의 평가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들에게 경제적 합리화의 과정은 무엇보다도 계몽주의가 조작으로 타락해간다는 중요한 징후로 이해되었다. 놀랍게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생각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상의 적들이 생각하는 '또 다른' 독일관─즉, 전원적 가치와 공동체적 연대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시대착오적이고 낭만화된 독일─에 공명했다. 다시 말해 따뜻하고 직접적인 인간관계로 이루어진 사회에 대한 열망 및 문학·예술을 통해 나타나는 고급 문화와 세련된 취향을 유기체적이면서도 더불어 함께 이해하려는 열망이 대단히 흡사했던 것이다."(232)


5장 자아심리학의 출현


"프로이트 자신은 그가 초기에 발견한 사항들─무의식의 우위성과 유아기의 성욕(및 그에 수반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을 정통성의 최소한의 요건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지형학적 사고방식과 (충동과 자아의 방어 메커니즘을 다루는) 역동적 사고방식을 정신분석 운동에 소속되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설명방식, 즉 심리적 에너지의 저장과 소비에 관한 '경제적' 용어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프로이트의 해석방식 가운데 가장 모호하고 가장 낡은 것으로 취급되어왔으며 사실 19세기 기계론적 가정의 흔적을 아주 뚜렷하게 담고 있었다." "그러나 망명자들과 미국 태생의 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유산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문제의 결정적인 중요성에 대해서만은 동의할 수 있었다. 즉, 사회에 대한 개인의 관계, 특히 집단생활의 환경에 적응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개인적 변화의 문제가 그것이었다."(238-9)


"프로이트 좌파로 분류되는 마르쿠제는 직접 정신분석의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으며 임상경험을 이용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단지 프로이트가 고안해낸 치료법의 함축적인 의미를 고찰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외의 두 사람─라이히와 로하임─은 모두 정식으로 훈련받은 임상가들이었으며, 동시에 마르쿠제의 급진주의를 그대로 따르면서 정신분석학 내부에 좌익의 맹아를 만들어냈다. 마르쿠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경우에서도 급진주의는 3중의 것이었다. 즉, 성적, 정치적, 문체상의 급진주의를 모두 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性에의 열광'과 성적 쾌락이 인간 행복의 궁극적인 척도라는 신념에다가, 정치와 성의 문제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본능의 억압은 정치적 지배의 중요한 무기로 작용한다는 신념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문체의 측면에서 볼 때 이 세 사람은 모두 극단적인 형태의 진술을 즐겨 사용했으며 주어진 논의를 궁극적인 지점에 이르기까지 추구해 나갔다."(241)


"좌파가 프로이트 이상으로 성의 우위성을 강조했다면, 신프로이트 학파는 성의 문제에 관한 프로이트의 보다 단호한 진술들을 수정하려고 노력했으며, 성적 요소 이외의 것들이 정신분석이론에서 보다 큰 중요성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려 했다. 주로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프로이트 우파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모두 일률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망명학자들은 미국이라는 환경에 대해 그리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들이 그 무렵 베를린이나 빈에서 가졌던 체험들 때문에 결코 그들은 정치적 현상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받아들여준 나라가 지금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처럼 불안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결국 미국 식민주의의 신조와 실제를 그들의 정신분석 작업의 전제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보수주의로의 전향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241-3)


"원초적인 충동이라는 단순한 도식에 대한 불만은 단지 신프로이트 학파의 수정주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소장정신분석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환원주의적임을 발견했으며, 보다 복잡한 동기화의 이론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일종의 동의가 이루어졌다. 즉, 충동이 점차 길들여져 가는 현상을 설명해줄 수 있는 일종의 동기체계에 대해 언급하는 경향과, 안정되어 있고 일상적이며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사유·행동의 패턴을 내포하는 퍼스낼리티 기능관을 채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하면서도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원칙들에 충실하기란 고도의 이론적인 숙련이 필요한 일이었다. 무의식을 고수하면서 그 위에 세련된 설명구조를 마련하는 것─즉, 환원주의를 포기하면서 본말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1923년, 프로이트가 『자아와 이드』에서 공표한 구조적 3분법─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은 이들 프로이트 중도파에게 일종의 행동방침이었다."(245-6)


"하르트만은 일반 심리학, 다시 말해 정신생활에 대한 일반 이론을 확립하고자 했으며, 이때 '정신분석학과 그 이외의 심리학의 합류 지점'이 바로 자아심리학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자아의 역할'을 규정하면서 프로이트 부녀의 정식을 훨씬 넘어서려 했다. 그는 프로이트가 자아의 '체계화' 기능이라고 부른 것을 확대하면서, 그리고 자아의 적응작업을 '현실지배'로 특징지으면서 내적 갈등에 대한 고전적 정신분석학의 강조를 현저하게 축소시켰다. 하르트만은 환경에의 모든 적응 혹은 모든 학습과 성숙과정이 갈등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발달과정에서 나타는 수많은 현상들─지각, 의도, 대상이해 등─은 그가 자아의 '갈등없는 영역'이라고 명명한 것 속에서 일어난다. 이 영역은 자아의 힘이라는 특수한 영역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는 이 힘을 '성격'과 '의지'라는 전통적인 도덕적 용어로 설명하는 가운데 위험스럽게도 수정주의적 어휘에 접근해갔다."(253)


"하르트만은 〈자아〉라는 용어가 〈정신분석가들 사이에서조차 매우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자아'의 정신분석학적인 의미를 그것이 대중적 용법 혹은 철학적 용법에서 획득한 여타의 의미로부터 구별해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부정적인 용어로 정의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었다. 즉, 프로이트적인 치료법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퍼스탤리티personality 혹은 개인individual과 동의어가 아니며, 경험의 객체object에 대립되는 주체subject와도 합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단순한 인식 혹은 감정도 분명히 아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자아는 매우 다른 질서를 갖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퍼스낼리티의 하부구조〉이며 〈그 자체의 기능에 의해 정의된다.〉 이 기능은 무수히 많기 때문에 나열하기가 곤란하다(물론 이드나 초자아의 기능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몇 가지 들자면 현실에의 적응, 행동, 사고 등과 안나 프로이트가 연구했던 방어를 들 수 있다."(256)


"정신분석학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갈등'을 설명함으로써 사회학적 인식에 기여할 수 있었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이미 익숙해 있었지만, 하르트만의 관찰에 의하면, '인간'이 주어진 환경조건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문제는 문화인류학의 충격에 의해 점점 무시되고 '특정문화의 구성원'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문제만 부각되었다. 하르트만의 이러한 두 가지 차이점 간에 존재하는 모순은 단지 외면적인 것일 뿐이다. 양자 모두 그가 평소에 철저하게 견지하고 있던 직업적·개인적 신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자아의 자율성'─자아의 성장 및 강화─은 개별적인 인간과 보편자로서의 인간 모두에게 특유한 한 가지 목적 속에서 두 가지 견해를 결합시킨다." "어떤 문화권에 사는 인간이든 모두 성장하는 과정─특히 초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유사한 경험을 할 것이기 때문에, 인류학자나 정신분석가들이 몇 가지의 보편적인 윤리적 평가작용을 발견했던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261-5)


"1960년대에 와서 역사가들은 정신분석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랫동안 찾던, 개인에서 대중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를 인류학이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인류학에까지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한 사회가 스스로를 정의할 때 사용하는 상징, 말 혹은 제도적 형식으로 표현되는 공통적인 의미, 그리고 인간이 그들에게 기대되는 것을 내면화하는 방식─즉, 카디너의 용어를 빌리자면, 제2차적인 '투사체계'의 과정─등을 문화인류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데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회과학자나 역사학자들도 점점 이 두 영역 간의 공동연구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결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회연구에서 정신분석이론을 체게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동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별로, 아니 전혀 없었다. 하르트만도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점진적이고 축적적인 '상호 침투' 과정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프로이트 이론의 '적용'이란 결코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다."(294-5)


6장 결론 : 대변혁


"1950년대 초 유럽의 생활 및 연구조건이 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자 망명 지식인들은 '귀향'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문화적 충성심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적 안락을 택할 것인가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 말고도, 망명자들에게는 세기의 중반기에 보다 특수한 상황─즉, 냉전과 그에 수반된 '매카시즘'의 파도─이 닥쳐왔다. 망명의 문제에 대해 글을 써오던 사람들도 이번에 닥친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아마 그 주제는 그들이 전면적으로 탐구하기에는 지나치게 미묘하고도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판 파시즘에 대한 공포가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망설이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추진력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대부분의 미국 출신 지식인들이 그들의 정부를 지원하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때 미국에 남은 망명자들 중 지도적인 인사들이 미국의 국내 및 대외정책이 가는 길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00-1)


"1941년 미국의 선전포고 이후 본래의 미국인들과 새로운 이주자들은 반파시즘 투쟁에 함께 나섰지만, 1940년대 후반에 이르자 이 결속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렌트처럼 몇몇 주목할 만한 예외도 있었으나, 그들은 공산주의를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한다든가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인물로 보는 태도를 거부했다. 이런 거부 속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심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파시즘은 그들 대부분이 1920년대에 견지하고 있던 윤리적 상대주의 혹은 판단 유보의 태도를 결국 해체시키는 촉진제 구실을 했다. 또 그것은 그들에게 악의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선'에 대한 나름의 감각을 갖도록 했다. 그래서 그들은 나치의 기록을 완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보면서도, 공산주의─심지어 그것이 스탈린에 의해 왜곡된 공산주의라 하더라도─에 대해서만은 그 기원과 미래에 대한 잠재능력 속에 계몽주의의 가냘픈 희망 혹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려 했던 것이다."(301-2)


"더욱 넓게 이야기하자면 1930년부터 1945년까지 15년의 기간은 망명자들에게 정신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그 기간 동안 목격할 수 있었던 3중의 전투─경제공황, 국내의 압제, 인종적 정복 등에 대항한─는 그들에게 남은 인생의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적 경험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동방으로부터의 새로운 위협에 철저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서구의 재동원─이번에는 스탈린주의에 대해─이 과거와 같은 대의명분을 결여하고 있다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토마스 만은 히틀러가 많은 사람의 감정을 아주 단순화시켜주며, 극도로 명쾌한 거부의 태도와 명확하고 필사적인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쓸 정도였다. 그에 대한 투쟁의 기간은 '도덕적으로 선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그 이후의 시기는 윤리 수준이 하락한 시기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1930년대를 '침울한 부정직의 시대'라고 묘사한 미국 출신 비판자들의 견해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302)


"언어의 문제는 중부 유럽의 사상이 도버 해협 혹은 대서양을 건너감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이익과 손실을 평가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표현의 뉘앙스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분야─즉, 사용되는 중요한 용어들이 관습적이거나 국제적인 것들이며, 그 의미까지도 직설적이고 명백한 분야─는 영미의 지적 생활에 노출됨으로써 거의 순수한 이익만을 얻었다. 자연과학 또는 방법의 정확성에서 그것에 접근하는 분야에서는 사상의 융합 혹은 공생을 운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뚜렷한 영역을 가진 경험적 연구나 개별적 연구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파시즘 비판자들의 저서를 영어로 출판해야 했을 때, 그들의 주장이 평이한 서술에 적합한 언어로 쓰임으로써 보다 예리하고 보다 명확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인들이 항상 자신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오던 사변적인 사고양식에서는 그러한 융합이 불완전하거나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334)


"망명자 세대는 이론의 정교화─피상적인 경험적 연구를 넘어서는 추상화의 차원─라는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좀 뒤떨어졌지만, 언어와 가치에 관한 고찰이라는 면에서는 그들의 선배들보다 넓은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세기의 중반기가 되자 과거와 같은 요약적 방식으로 인간의 담론을 취급하는 태도는 지적으로 설득력을 잃었다. 그 사이 두 가지의 새로운 사회 연구 분야─언어학과 인류학─가 개발됨에 따라, 여타 분야의 보다 통찰력 있는 연구자라면 그들 자신의 언어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소통의 형식에 관한 강력한 관심은 비트겐슈타인과 아도르노의 업적을 메를로-퐁티나 구조주의자들과 같은 프랑스 소장학자들의 업적에 연결시켜주었다. 그리고 이런 재검토 과정에서 말이 반드시─정신분석학의 '담화요법talking cure'에서처럼─이해로 통하는 길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서 음악이 그에 대한 대안 또는 보다 유효한 표현수단으로 등장했다."(336-7)


"그렇지만 음악에 의존했을 경우, 의미를 명료하게 만들 수 없는 영역이 생겨났다. 결국 직접적인 일대일의 의사소통 가능성에 대한 사회사상가의 열망은 무산된 셈이었다. 적어도 이론에서만큼은,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난 연구자들도 옳다고 인정할 만한 사회학적 증명을 자기가 고안해낼 수 있을 것이라던 베버의 확신은 이제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자기회의의 과정을 통해 사회사상가는 보통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던 가치체계와는 다른 가치체계를 탐구하게 되었다." "사실 망명세대의 업적 중 많은 부분이, 학문적 성실성과 정열적인 윤리적 실행을 동시에 간직한 채 인간사를 논의하는 방법을 자기 자신과 후계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지적인 성실성은 사회이론가의 최고 이상으로 계속 남아 있기는 하겠지만, 이제 그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사상의 거장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자기 인식에 의존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그 성실성에 덧붙여졌다."(3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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