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무력 정치사 - 민족주의자와 경찰, 조폭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
존슨 너새니얼 펄트, 박광호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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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1980년대 말 학생, 노동자, 지식인, 종교 단체, 중산층이 단합하여 권위주의 지배를 종식시킨 이후 국가는 중산층이 계속 방관자 입장을 취하도록 애써왔다. "한국사에서 주목할 만한 함의 하나는 국가와 비국가 폭력 전문 집단이 강제 철거와 노동 억압 시장에서 협력한 것이다. 왜 유독 강제 철거와 노동 억압인가? 그 답은 이 둘 모두가 중산층의 사회경제적 안녕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강제 철거는 무엇보다, 주택 공급을 늘릴 뿐 아니라 강력한 경제 성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사회 기반 시설을 증진하는 대규모 재개발과 [도시] 미화 사업의 일부이다. 또한 노동 불안은 국가의 경제적 활력을 위협한다. 그런데 그런 사업에서 국가의 폭력 행위는 정치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런 사업 대다수에서 국가는 폭력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다. 즉 실제로 폭력을 수행하는 행위자가 아니라 폭력의 관리자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사례에서 중산층은 뚜렷이 침묵을 지킨다."(21-2)


2장 국가와 국가 권력: 이론적 고찰


"선진국에서는 비국가 집단을 과거보다 덜 사용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국가는 하청 강제력을 이용한다. 다만 국가가 제공하는 합법적 틀 내에 있는 하청 집단들을 주로 이용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나 국가와 초법적 활동을 하는 비국가 집단들 사이의 협력과 공모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다양한 수준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 국가 형성에 관한 문헌은 현대의 발전된 정치체에서 이런 집단의 다양한 역할을 대개 가리거나 철저히 무시한다. 사실 그런 제도적 협약을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정당한 폭력 자원과 부당한 폭력 자원, 합법적 서비스를 명령하는 자와 불법적 서비스를 명령하는 자라는 엄격히 양분된 개념들이 복잡해진다. 더욱이 물리적 능력과 민주주의 능력, 이 둘이 모두 강한 정치체에서도 그런 사례들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면, 그런 현상은 그저 약하거나 실패한 국가에서만 나타난다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26-7)


3장 한국의 무력 시장: 사법부에서 경찰, 국정원까지


"행상은 사회계층에서 맨 밑바닥에 위치했는데, 대개 '태생이 천한,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로 여겨졌고 실제로도 그런 대우를 받았다. 행상, 특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행상들은 높은 계층의 약탈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박원선에 따르면 "고려왕조 말엽, 지방 관리의 갈취와 산적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행상들이 큰 무리를 이루었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대동단결해 상인 조합을 조직했다." 달리 말해 행상의 재산권과 안전권에 대한 집행이 공적 영역에서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적 보호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던 것이다. 19세기에 행상들은 조선 정부와 중요한 관계를 형성했다. 국가는 그들에게 반관半官 징수원(시장에서 판매세 징수), 밀정, 염탐꾼의 역할을 요구했고 무력 충돌이 일어날 때에는 이들을 지원 부대로 뽑기도 했다. 이런 긴밀한 관계와 다양한 역할로 인해 그들은 가장 중요하고 유력한 비정부조직이 되었다."(52-3)


"현대의 범죄 폭력 집단의 역사적 기원은 해방 후 정치, 경제 무대를 지배한 불법 무장 '청년 집단'의 역사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정계 보스와 실세들과의) 광범위한 관계망을 통해 비국가 범죄 집단들은 박정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국가 형성에서 막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61년과 1963년 사이 박정희의 지배 아래 경찰은 조직적 활동으로 범죄 집단의 일원 약 1만 3000명을 체포했다. 사회 혼란에 책임이 있는 집단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 공식 명목이었다. 2004년에 발간된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1차 영문보고서는 대개 그런 활동이 시민들의 승인을 얻어냈다고 말한다. 대중의 지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유용했다. 비록 이후 박정희가 1963년, 1967년, 1971년에 대통령직을 얻기(유지하기) 위한 노력에서는 꼭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범죄 조직들이 흔히 박정희 반대파의 기반이었다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53-5)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잔혹하게 억압한 뒤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권력 공고화 과정에서 시민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한편 대중의 환심을 사는 이중 전술을 사용했다.〉 전두환 행정부는 이를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구호 아래 실시하며 군사 반란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런 정책의 일환으로 처음에는 계엄포고령 제13조 선포, 그리고 1980년 사회안전법을 통해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범죄자와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했다. 군경은 전 지역에 내려진 체포 할당에 따라 영장 없이 시민 6만 7055명을 구금했고 그 중 4만 명을 군대가 운영하는 악명 높은 캠프인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이런 '사회 정화' 및 '각종 일제 단속' 정책들은 정부가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사회에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경찰과 범죄자들이 점점 더 서로 친밀해지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관대한 처분을 내리거나 노동 캠프로 보내는 것은 경찰의 특권에 달려 있었다."(55-6)


"조직범죄 집단들은 여러 합법 사업에도 관여한다. 유력한 혐의들(합법적인 바, 단란주점, 레스토랑 운영 등) 외에도, 민간 경비 산업의 성장은 강제력 행사 전문 틈새시장을 제공했다. 1976년 용역경비업법이 생기며 합법화된 민간 경비 산업은, 국가가 이전까지 직접 담당하던 강제 철거 같은 일들을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영화하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주로 건물을 보호하거나 호송 업무를 하는 집단들과는 달리) 주로 강제에만 집중하는 집단들은 '용역 회사'로 불리고, 더 넓게는 '건설 용역'으로 불리기도 한다. 용역 회사들은 대개 공식 등록이 되어 있고 그런 이유로 합법적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전술들은 흔히 본질상 범죄적이다." "강제 철거 외에도 '용역 회사'는 파업 분쇄를 비롯한 노동 문제에도 깊게 관여한다. 용역 회사가 출현해 강제 철거와 파업 분쇄에도 관여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초에 사회가 점차 투쟁적 사회로 변모하게 된 것, 그리고 민주화 운동과 맥락이 닿는다."(59-60)


"1970년대부터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까지 조직 폭력 집단들 사이의 관계는 경쟁적이고 폭력적이었다. 한국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유력한 행위자 다수를 체포하고 기소해 감옥에 넣은 것도 이 시기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연이어 체포하고 구금하는 동안 다양한 범죄 행위자들이 길고 잔혹한 감금이라는 경험을 공유하면서 점차 서로 친해졌다는 것이다. 그런 공유된 경험은 느슨한 협력 조합, 즉 '형제애'가 형성되는 촉매가 됐다. 일종의 공제조합처럼 상호 보호비를 모으는 이런 조합들은 서로 더 쉽게 협력하거나 협조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집단 간 갈등을 줄이고자 조직됐다."(64) "(보스들의 모임은 조직 간의 분쟁 해결 외에도 지역 사회를 타겟으로) 장학금, 임대료 지원, 기타 재정 관련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이 계획의 목적은 일단은 지역사회와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해 지역사회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고, 가장 중요하게는 지역 경찰과 정치인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66)


4장 국가 추구자, 민족주의자, 불법 무장 단체: 대한민국의 시작


"본디 식민지 시기부터 조직적 범죄와 폭력에 관여한 조직들은 정치권력들의 정쟁 도구로 이용됐다. 가장 유명한 무리는 김두한이 이끄는 조직과 정진영(또는 정진룡)이 이끄는 조직이었다. 이 둘은 모두 항일 활동으로 유명해졌는데, 나중에는 일본인에 고용되어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 의용정신대)을 조직하고 이끌어 사실상 합법적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1945년 식민 지배가 끝나면서 김두한과 정진영은 자신들이 거느린 용역들을 정당과 실세에게 대여했다. 김두한은 우익에 붙었고, 정진영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위해 일했다." "이 집단들은 정치사회화 과정과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을 모집하는 데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으며, 결국 각 정계 보스와 정파 형성을 위한 권력의 기초를 마련했다." "폭력적 정치 활동이라는 '더러운 일' 외에도 대개 불법 자금에 의존하는 그런 집단들은 강제된 혹은 '지발적 기부금'에 기댔는데, 그 액수는 놀랍게도 1949년 국가 세입의 절반쯤이나 됐다."(74-5)


"정치 깡패, 민족주의자, 불법 무장 단체, 국가 행위자 사이 협력의 시대는 이승만 이후 시기에도 규모가 훨씬 작아지긴 했지만 각기 다른 수준으로 계속됐다. 박정희가 무력 시장을 대체로 강화할 수 있었고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제력의 공적 자원을 통해 무력 시장을 지배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임기 전반에는 적어도 민주주의를 약속하며 활동해야만 했다. 이승만 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회 세력을 흥분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1961년과 1970년 사이 그런 협력을 추동한 논리는 국가의 고능력과 저자율성을 고려할 때 규범적 이해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가 권위주의를 공식적으로 도입하자 한국의 국가강도는 고능력, 고자율성으로 바뀌었다. 요컨대 국가는 과거와 같은 그런 협력적 관계가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한동안 단절되었던 그런 관계는 1980년대 중반에 전두환이 박정희의 후임으로 들어서면서 회복된다."(93-4)


5장 국가 확장, 시민사회의 발흥, 그리고 전술의 변화: 박정희에서 전두환까지


"(국가와 비국가의 협력 관계는) 전두환 시기 노동 시위 억압과 강제 철거 부문에서 다시 시작했다. 전두환이 고도로 발달된 강제력을 뽐내던 국가를 물려받았음에도 협력 관행을 다시 활성화한 것은 국가 자율성이 가파르게 하락한 결과였다. 가장 중대한 것은 인구가 과거에는 시골의 농민이 지배적이었다가, 필요하다면 커다란 압력을 가하려 하고 또 그런 힘이 있는 교육받은 도시민으로 빠르게 변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유롭고 공정한 민주 선거는 1987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은 그 전부터 이미 정치 엘리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무력 시장에서 국가와 비국가가 다시 협력하게 됐다는 것은 국가가 값싼 노동력과 재개발이라는 공공재(증가하는 중산층이 요구한 재화)를 공급할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바로 그 재화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강제력을 사용하는 일에서 일어날 사회 세력으로부터의 처벌을(그리고 국제적 비난을) 편하게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97)


"선거 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전인 제3민주화 국면(1984~1987년)이 특히 중요하다. 1983년 전, 강제 철거와 관련해서 국가는 재개발 과정에서 사실상 모든 면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목동 재개발 과정에서 대규모 시위들이 한창 벌어지는 동안 그 과정을 민영화하면서 달라졌다. 노동 억압과 관련해서는 민간 경비 회사와 기타 비국가 행위자들(예컨대 구사대)을 허가하는 조치가 이른바 노동자대투쟁(1987~1989) 기간 중인 중인 1987년에 시작됐다."(117-8) "1987년 전, 노동을 포함한 시민사회의 다양한 부분과 중산층 사이의 동맹은 권위주의 통치 체제를 제거하는 목표를 공유했다. 정치 문제가 해결되자 중산층은 흩어졌다. 노동자와 학생의 급진적 집단들이 잠재적으로 국가와, 더 중요하게는 자신들의 지위에 유해하다고 본 것이다. 이 분열은 연이은 정부들이 흔히 민간 대리인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핵심 요소의 하나였다."(120)


6장 강제 철거의 정치: 목동 재개발에서 인사동 노점상 철거까지


"1960년대 초 판자촌을 없애는 표준 절차는 주택을 헐고, 필요하다면 주민들을 강제로 도시 바깥으로 내쫓는 것이었다. 내쫓긴 철거민들은 동일한 혹은 그보다 열악한 다른 주택을 짓곤 했다. 그러니까 도시로 돌아와 집을 다시 짓는 것이었다. 이런 철거 정책은, 판자촌이 특히 취약한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날 때도 시행됐다." "(철거민들은 시청에 항의하거나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철거에 대응하기도 했지만) 가장 흔한 것은 철저한 물리적 저항이었다. 경찰과 지역 행정관들은 건물 철거와 강제 퇴거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경찰이 주민을 내쫓기 위해 불도저, 물대포, 최루탄을 사용하는(미국 남부의 민권 운동 시기를 연상시키는) 광경이 비일비재했다. 1966년과 1970년 사이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은 '불도저'라는 별명이 붙은 이였다. 특히 시청이 스스로 많은 수의 철거민을 감당하기 힘들 때, 용역들이 간간이 동원됐다. 하지만 경찰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이 모든 일의 선두에 섰다."(124-5)


"1972년 초, 서울특별시청은 1971년 11월 이전에 지은 판잣집은 부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항공사진을 통해 판자촌 약 17만 3900곳이 확인됐고, 그 소유권이 사실상 합법화됐다. 이로써 본질상 두 유형의 판자촌 주민이 탄생했다. 적어도 약간의 권리가 있는 판잣집 소유주와 권리가 없는 세입자 말이다." "재개발 정책은 두 집단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소유주들은 단순히 퇴거해 보상을 받기도 했을 뿐 아니라 지역의 재개발과 향상이 지가 상승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큰 이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세입자들은 스스로 퇴거하거나 강제로 쫓겨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이 정책으로 판잣집 소유주는 정부 편에 서게 됐고 세입자는 국가 세력, 부동산 투기꾼, 건설회사, 더 많은 상업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업가들, 그리고 극심한 주택 부족으로 증가한 집값에 직면한, 점점 늘어나는 서울의 중산층에 맞서는 자리에 서게 됐다."(125-6)


정부가 주도한 목동 사업 이후 "공공 관리 재개발 모델을 대신해 공동 재개발 사업 체계가 개발됐다. 이 계획에서는 재개발 과정이 사실상 민영화되어 재개발 이후 남은 이익이 얼마든 그것은 회사로 돌아간다." "공동 재개발 사업은 중요한 일들을 했다. 첫째, 전에는 제한했던, 판잣집 소유주로 인정된 이들의 수를 확대했고 그에 따라 기존의 소유주와 세입자 사이의 연대가 깨졌다. 결국 잠재적 저항 수준을 일부분 효과적으로 감소시켰다. 둘째, 더 중요한 것으로, 이전까지 정부에 지워졌던 재정 부담을 없앴다. 정부는 재정 부담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재산세도 더 걷게 됐고, 그와 동시에 당시 1970년대 오일 위기의 여파로 인한 해외 건설의 감소로 큰 타격을 입었던 국내 사업 시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셋째, 정부의 역할을, 단지 그 과정을 간접적으로 관리하고 사용되지 않는 국유지를 판매하는 역할로 축소했다. 시 관리들은 강제 퇴거 같은 좋은 소리 들을 게 없는 조치들을 직접 수행하지 않게 됐다."(131-2)


7장 노동 억압의 정치: 한국노총, 구사대에서 컨택터스까지


"1987년 이후 노동자들의 요구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중반까지 파업과 노동쟁의의 주된 이유였던 경제적 이해를 넘어섰다. 특히 파업들은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노조를 설립할 권리, 그리고 노조의 이해가 아니라 집단행동을 억압하는 데 이용됐던 국가조합주의적 노조들을 제거하는 데 집중했다. 달리 말해 노조 활동들은 작업장의 민주화에 집중했다. 국가의 대응은 흥미롭다. 1987년 8월 초까지, 정권은 노동쟁의에 방관자적 태도를 보였다. 예컨대 당시 정권은 경찰을 눈에 띄게 동원해 노동자들의 저항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민주주의의 창시자라는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가 '퇴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국가의 초기 무대응은 정주영이 두 가지 보호 전략을 쓰는 계기가 됐다. 첫째, 구사대를 만들었다. 둘째, 용역들을 모집해 다루기 힘든 노동자들과 파업들을 진압하는 데 사용했다. 다른 기업들도 그에 따라 구사대를 만들고 노동을 억압하는 주요 강제 집단을 고용했다."(153-4)


8장 결론, 그리고 한국 사례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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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 - 국제적.국내적 계급관계의 관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모노그래프 54
김수행.박승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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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 체제에 대한 평가가 왜 쟁점이 되는가?


"동아시아 발전모델에 관한 논쟁은, 신고전파 이론에 의거해 시장기구의 역할을 강조하는 시장중심론, 자율적인 국가에 의한 시장개입의 유효성을 강조하는 발전국가론, 유교문화의 역할에 주목하는 유교자본주의론, 동아시아지역의 특수한 지정학적 여건에 주목하는 국제주의적 시각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국제주의적 시각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관점은 모두 주류경제학의 패러다임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고, 시장중심론의 한계를 발전국가론이나 문화론이 보완하는 형식으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논쟁의 초점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제3세계에서 예를 볼 수 없는 고도성장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었는가"이므로, 이 논쟁에서는 논점의 차이와 대립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반면 정치적 독재는 고도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측면 또는 필요악이었다는 관점이 암암리에 전제되고 있었다."(2-3)


2 민족경제론 : 박정희 체제에 대한 정통적 비판


"민족경제론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이 추구하는 외자의존적 수출공업중심의 개발정책은 한국경제의 대외종속성을 강화하며 경제의 대내적 분업관련을 파괴해 불구적이고 파행적인 경제구조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자립경제의 확립을 점점 더 어렵게 하고, 매판 독재정권을 점점 더 강화하며, 한국경제는 대외종속에 따른 경제잉여의 유출과 외채위기로 파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민족경제론은 1950~60년대의 제3세계 혁명이 제기한 '자립적 민족경제의 건설'과 '매판 독재정권의 타도'를 슬로건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한국의 진보진영에 의해 크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자립경제'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제시하지 못했고, 어떤 경로를 통해 '파국'이 불가피한가에 대한 분석도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수출증진을 통해 고도성장─비록 '허울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을 달성하자마자 민족경제론적 관점은 점점 지지세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8)


# 민족경제론 비판

1. 한국경제의 세계시장 편입은 불이익의 측면만이 아니라 기회의 측면에서도 보아야 한다.

2. 자본주의화의 진전에 따른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대립이라는 근본 과제를 외면한다.

3. 정치와 경제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정치적 형태’ ‘경제적 형태’임을 파악하지 못한다.


3 발전국가론 : 국가의 물신화


"발전국가론은 국가의 자율성과 국가의 개입을 성공적인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박정희 정권은 대내·대외의 이익집단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어서 한국경제의 장래를 공평무사하게 계획하고 집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국가는 이익집단들이나 압력단체들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발전국가론은 박정희 정권의 상대적 자율성을 진지하게 다룬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국가론은 박정희 정권이 기존 이익집단이나 낡은 경제지식에 포획되지 않으면서 한국경제를 고도로 성장시킬 지도자와 관료들을 지니고 있었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발전국가론은 국가물신주의(國家物神主義)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16)


"물론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에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아직 정치세력으로서 힘이 없었고, 야당정치인·종교인·일반시민·학생도 군사적 폭력 앞에 당분간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 당시 남북대치와 미소냉전 상황에서 군사쿠데타 세력이 미국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 정부가 미군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가 아직도 국가재정의 큰 기둥이었으며,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호의(好意)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군사쿠데타 정권의 대외적 자율성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군사쿠데타 세력의 소시민적 민족주의는 광범한 민중을 지지기반으로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벌과 자본가들을 국내의 동맹세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박정희 정권의 대내적 자율성도 크게 제한되지 않을 수 없었다."(17)


#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부정부패

1. 부일(釜日)장학회 헌납 사건 :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 등을 소유한 김지태를 구속한 뒤, 처벌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언론 3사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토지를 헌납받아 정수장학회 설립

2. 경향신문 매각 사건 : 1965년 각 은행들이 경향신문에게 일제히 대출금을 상환할 것을 요구해, 1966년 기아산업 사장 김철호에게 매각됨.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1974년 5·16장학회(정수장학회) 소유로 넘아감.


4 개발독재론 : 발전국가론의 제도주의적 수정


"이병천은 (발전국가론을 개량하여) '국가주의 근대화 수동혁명체제'로서 '개발독재체제' 개념을 만들었다. 개발독재론에 따르면, 박정희 집권기의 '사회발전체제'는 개발독재체제인데, 이 체제가 산업화에 성공한 것은 주로 특정한 제도형태, 이른바 '복선형(複線形) 산업정책(수입대체정책과 수출지향정책의 결합)' 또는 '개발주의 제도형태' 때문이며, 부차적으로 재벌체제와 노동의 '헌신(獻身)'이 기여했다. 이병천은 근대와 현대의 세계경제사에서 국가 개입이 산업화에 성공한 사례가 매우 드문 근본원인을 "국가의 지원과 보호가 새로운 생산적 부와 혁신을 창출할 수 있는 규율과 연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며, 한국 산업화 성공의 핵심요인을 "국가 지원에 성과 규율을 연계시킨, 규율을 동반한 지원제도"에서 찾는다. 그리고 "국가에 의한 시장·자본·노동에 대한 유도-통제-규율방식의 틀에서 재벌체제와 노동의 헌신이 산업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29)


"개발독재에 노동대중이 '동의'하고 '헌신'하며 나아가 '자발적으로 호응'했다는 평가와 압축적 산업화를 위해 단순한 '권위주의적 조절'이 불가피했다는 평가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런 평가는 근본적으로 박정희 체제가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에 의한 노동의 처참한 착취,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투쟁을 보지 못했고, 포악한 군사독재가 노동자들에 의한 계급투쟁과 중간계층(지식인·종교인·학생)의 민주화 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개발독재론은 박정희 체제가 단순히 '국가주도하에서 민족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하고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공통의지'로 산업화를 지지하고 노동대중이 자발적으로 산업화에 헌신했다는 비상식적이고 몰역사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30-1)


5 박정희 체제에 대한 대안적 평가


"'자본축적'은 기계·기술·숙련 등에 의존할 뿐 아니라 임금수준·노동시간·노동강도 등에 의존하며, 특히 자본주의적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는 전자를 규정하는 생산력보다는 후자를 규정하는 자본-노동관계, 즉 생산관계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즉, 자본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적 발달은 기계·기술·숙련 등 생산력의 발달을 가져올 뿐 아니라, 임금노동자들을 더욱 많이 만들어 냄으로써 자본-노동관계를 경제영역 전체로 확대한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고도성장', '압축성장', '근대적 산업화' 등 생산력 차원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인 자본-노동관계의 사회적 확장이라는 생산관계 차원을 가지고 있다. 더욱 분명히 말하면, '고도성장', '압축성장', '근대적 산업화'가 가능했던 것은 자본-노동관계의 사회적 확장이 군사정권의 '독재'에 의해 압도적인 자본 우위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41-2)


"'계급투쟁'이란 용어의 관용적 사용을 엄밀히 살펴보면, 자본(또는 정치권력)을 하나의 '구조'로 전제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투쟁에만 계급투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자본을 구조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파악한다면, 즉 자본을 자본-노동의 착취관계로 파악한다면, 계급투쟁은 상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전자를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라 한다면, 후자를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라 부를 수 있다. 1960년대의 개발독재가 압도적 자본 우위의 계급 역관계에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에 의해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을 도모했다면, 1970년대의 유신체제에 의한 개발독재는 1960년대의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에 따라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형성되어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 반(反)독재투쟁과 더불어 격화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발달을 유지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었다."(45-6)


"5·16 군사쿠데타 이후 쿠데타 주도세력에 대한 지지 여부에 대해 미국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의 안정적 추진을 주요한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케네디 정부는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도 불구하고 군사쿠데타 세력이 참신한 세력으로 부패를 일소하고 경제개발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사후적으로 승인했다. 여기서 박정희 군사정권의 특수성은 군사쿠데타에 의한 집권이라는 정당성 취약 때문에 경제성장의 성과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고도성장의 성공 요인을 정책 차원에서 찾는다면, 수출지향 산업화로의 정책전환보다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른 대일청구권자금의 도입과 베트남파병 등에 의한 막대한 외자도입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이완범(1999)은 1960년대의 후진국 산업화에서 여타 제3세계와 남한의 결정적 차이는 원활한 외자도입에 있었다고 말한다."(54)


"박정희 체제의 역사적 성립과 전개과정을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하면, 제국주의·정치·경제 사이의 내적 연관을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냉전체제와 남북분단체제에서 미국은 남한을 '자유세계'(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의 본보기(show-window)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고, 군부쿠데타 정권은 고도경제성장을 통해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독재를 통해 자본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계급관계를 재구축·강화함으로써, 자본가들로 하여금 직접적 생산자들(농민과 노동자)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게 하고, 소수의 대자본(재벌)으로 하여금 중소자본을 수탈해 모든 잉여가치를 자기에게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하며, 모든 이용가능한 대내외 자원을 특정 성장산업에 투자하도록 대자본에 특혜를 부여했다. 이리하여 고도성장이 달성된 것이다."(58)


"박정희 체제의 장시간·저임금·위험한 노동은 도시와 농촌의 엄청난 상대적 과잉인구의 존재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농산물의 낮은 가격정책은 도시노동자의 임금수준을 낮은 수준으로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고 주로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을 통해 실현되었는데, 그 결과 식량의 자급률은 1962년 93.4%에서 1969년 78.8%로 급격히 저하했고, 1963~64년에 도시근로자 소득을 크게 상회했던 농가소득은 1965년을 기점으로 낮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공적사회부조(公的社會扶助)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서민들의 생계는 가족적 복지망을 통해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족적 복지망은 가족 중 누군가가 희생될 것을 강요했는데, 그 일차적 희생자는 농촌 출신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전태일의 분신 저항으로 대표되는) 노동자계급의 참상에 비추어 볼 때 제도학파의 '사회적 합의'나 '공통의지'라는 시각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사실왜곡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61-3)


"1970년대 초반의 경제위기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대응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봉쇄하는 조치로부터 시작하여 반동적인 유신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신체제는 3선 개헌이라는 헌법파괴로부터 진전된 정치적 위기와 1960년대 말 사회·경제적 위기로 나타난 종속적 개발지배연합의 재생산 위기에 대응하여 등장한 공개적 독재체제였다."(이광일 2001) 박정희 체제는 '외국인 투자기업에 관한 특례법'(1970), 국가비상사태선포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1971), 10월 유신(1972) 등 일련의 파시즘적 악법을 통해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했다. 유신체제는 노동자의 단결권 자체를 총체적으로 부인하였으며, 이런 노조부인정책은 유신체제의 적자(嫡子)임을 내세워 또 다른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한 정권기 내내 계속되어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의한 노동법 개정 때까지 유지되었다."(68)


"유신체제에 맞선 정치적·경제적 계급투쟁은 1970년대 말에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맞물린 박정희 체제의 위기에서 다시 폭발적으로 고양되었다. 1979년 8월 외자기업의 철수에 맞선 YH무역노조의 완강한 생존권투쟁은 야당인 신민당의 당사(黨舍) 농성을 계기로 여당과 야당 사이의 정치투쟁을 야기했고, 나아가 서울민사지법이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직무정지시킴으로써 부마사태로 발전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에 의해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 과정은 전형적인 계급투쟁의 역동성에 의한 것이다." "이후 노동자계급의 폭발적인 생존권 투쟁과 학생·지식인·종교인의 전면적인 민주화 투쟁에 대응하여, 지배계급의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 전두환의 또다른 군부쿠데타로 표현되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으로 상징되는 격렬한 계급투쟁으로 인해 박정희 체제는 더욱 강화된 억압체제로서만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77-9)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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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회의의 정체 - 아베 신조의 군국주의의 꿈, 그 중심에 일본회의가 있다!
아오키 오사무 지음, 이민연 옮김 / 율리시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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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일본회의의 현재


 1990년을 전후하여 소련을 필두로 하는 사회주의 정권이 차례로 붕괴하면서 이른바 냉전체제는 종식되었다. 일본 국내에서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운동단체 등이 큰 피해를 보았지만, 반공을 최대의 결집 축으로 삼은 일본의 우파 역시 일종의 목표상실 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운동을 다시 새롭게 부흥하고 재결집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것이 냉전체제가 붕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7년에 일본회의를 결성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는데, 결국 우파로서 내세운 결집축도 새롭게 정리되어 일종의 '원점회귀'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한다. p.31


2장 또 하나의 학생운동과 생장의 집


3장 꿈틀거리는 회귀 욕구


4장 풀뿌리 운동의 궤적


 일본회의가 가장 중시하는 주제들은 무엇보다 먼저 ① 천황, 황실, 천황제의 수호와 그 숭배, 이어서 ② 현행 헌법과 그로 상징되는 전후체제의 타파 , 그리고 이에 부수하는 것으로서 ③ '애국적'인 교육의 추진, ④ '전통적'인 가족관의 고집, ⑤ '자학적'인 역사관의 부정. 이로부터 파생한 그 밖의 주제를 다룰 수는 있어도 역시 핵심적인 운동대상은 이상 5가지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운동의 노하우 역시 원호법제화 운동 등에서의 '성공체험'을 통해 배운 수법, 오직 그것을 반복하여 진화·발전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대규모 운동의 경우에는 신사본청이나 신사계, 신흥종교단체와 같은 동원력, 자금력을 보유한 조직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국 각지에 '캐러밴대'라는 명칭의 회원부대를 파견하여 '풀뿌리 운동'으로 대량의 서명 모집과 지방조직 구축, 또는 지방의회에서의 결의와 의견서 채택을 추진함으로써 '여론'을 형성한다. 

 그와 동시에 중앙에서도 일본회의와 그 관련 단체, 종교단체 등이 연계하여 '국민회의'라는 명칭의 조직을 설립하고, 대규모 집회 등을 파상적으로 개최하여 시선을 끌면서 전국에서 모은 서명과 지방의회의 결의, 의견서를 갖고 중앙정계를 압박한다. 한편, 뜻을 같이 하는 국회의원들도 이에 호응하여 의원연맹이나 의원 모임을 결성하고, 여당과 정책결정자를 움직여 운동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한 토대로 일본회의는 지금까지 국회의원간담회나 지방의원연맹의 내실을 다지면서 가맹의원 수를 착실히 늘려왔다. pp.204-205


# 풀뿌리 운동의 주요 활동 내역

1. 정부 주최 '헌법기념식전' 규탄(1976)

2. 원호법제화 운동(~1979) : 일본의 공식연호를 기록방법으로 법제화하려는 운동. 1979년 6월 법으로 제정되었다. 

3. (헌법을 존중하는) 자민당 신강령 반대 운동(1985) 

4. 쇼와 천황 재위 60년 봉축운동(1985~86)

5. 《신편 일본사新編日本史》 편찬 운동(1985~86)


6. 건국기념일 식전 독자개최(1988) : 기원절(초대 천황인 신무 천황의 즉위일)을 건국기념일로 정립

7. 천황 방중 반대 운동(1992)

8. 전후 50년 국회결의(무라야마 담화) 등에 대한 반대 운동(1994~95)

9. 선택적 부부별성제도 반대 운동(1996~)

10. 국기국가법 제정 운동(1999)


11. 외국인(특히 재일한국인)의 지방참정권 반대 운동(1999~)

12.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지지와 (별도의) '국립추모시설' 계획에 대한 반대 운동(2001~02)

13. 야스쿠니 신사 20만 참배운동(2005)

14. 교육기본법 개정 운동(2000~06) : 헌법개정의 전초전으로 '공공의 정신, 도덕심'이나 '일본의 전통·문화 존중' '향토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교육기본법에 포함시키려는 운동 → 제1차 아베 정권에서 개정 교육기본법 설립(2006)

15. 여성 천황 허용의 황실규범 개정 반대 운동(2005~06)


 일본회의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이들을 아는 관계자는 그 집념과 끈기의 배후에 '종교심'이 있다고 지적한다. 신흥종교단체 생장의 집 출신이기에 존재하는 '종교심'이 그렇다. 일본회의 자체가 신사본청을 필두로 하는 신사계로부터 두터운 후원을 받기 때문에 그 '종교심'에 의해 뒷받침되는 운동과 주장은 가끔 근대민주주의 대원칙을 쉽게 벗어나거나 짓밟는다. 

 천황 중심주의의 찬미와 국민주권의 부정, 제정일치에 대한 한없는 동경과 정교분리의 부정. 예를 들면 일본회의의 실무를 관장하는 가바시마는 일본이 세계적으로 드문 전통을 지닌 국가이며, 국민주권이나 정교분리 등과 같은 사상은 일본 특성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평소 태연하게 입에 담아왔다. 이는 일본회의의 운동과 동질성·연관성을 지닌 아베 정권의 위험성을 동시에 부각해준다. pp.206-207


5장 아베 정권과의 공명, 그 실상


 일본회의가 아베 정권을 좌지우지한다거나 지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양자가 공감하고 공명하면서 '전후체제의 타파'라는 공통목표를 향해 나아가 결과적으로 일본회의라는 존재가 거대해졌다고 생각하는 편이 적절한 것 같다. 즉 '위로부터'의 권력 행사를 통해 '전후체제를 타파'하려고 호령하는 아베 정권과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운동'으로 '전후체제를 타파'하고자 집요하게 운동을 지속해온 일본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전후 처음으로 자전거 앞뒤 바퀴처럼 서로 작용하면서 오랜 비원을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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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박맹수 외 지음, 한혜인 옮김 / 모시는사람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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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사상의 특징

1. 시천주侍天主 : 누구나 자신 안에 ‘천주’(만물의 생명의 근원)를 모실 수 있다는 만민평등 사상

2. 보국안민輔國安民 : “국가의 악정을 고쳐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민본주의적 사상

3. 후천개벽後天開闢 : 현세가 종말을 맞이하고 가까운 미래에 이상적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

4. 유무상자有無相資 :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공동체 정신


# 동학조직의 구성

1. 대도소大都所 : 2대 교주 최시형이 1893년 충청도 보은에 설치한 총본부

2. 포包(대접주) : 몇 개의 접을 묶어 만들어진 중간 조직

3. 접接(접주) : 35-70호 정도의 규모로 지역에 만들어진 기초 조직


#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1. 최초의 무장봉기 : 1894년 2월 15일 전봉준 등이 중심이 되어 고부의 악덕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항의하면서 일어난 봉기

2. 혁명을 목표로 한 봉기: 전봉준과 손화중·김개남 등의 대접주들이 뜻을 모아 전면 봉기하여 황토재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5월 10일)하고 전주마저 점령(5월 31일). 동학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청나라와 일본군이 조선 출병.

3. 전주화약(全州和約) :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농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도소(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을 진행하기로 합의

4. 항일투쟁 : 일본군의 경복궁점령 소식이 전해지면서 10월 이후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2차 봉기. 두 차례의 우금티 전투(11월 10-12일, 12월 4-7일)에서 일본군에게 대패

5. 우금티전투 이후 : 일본군의 포위섬멸작전


후비 제19대대 3개 중대 중 일본군 서로 부대인 제2중대는 남·북접 합동 농민군의 북상을 논산평야 북부에 있는 금강 강변의 요지인 공주성에 들어가서 기다렸습니다. 11월 20일에 농민군이 북상해서 동학농민전쟁 최대의 격전이었던 공주전투가 두 차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 후비 부대는 스나이더 소총이라는 라이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이플총은 탄구를 회전시키도록 총 내부에 나선형 홈이 새겨진 총으로, 당시의 소총과는 격이 다른 사정거리와 명중률, 살상력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 보병전에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 최대의 격전이 되었던 이 공주전투가 전장의 최후로 서술되어 있는 우금티전투입니다. (···)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은 100명 단위로 병력이 훨씬 적은 일본군에게 개개 전투에서는 압도적으로 격파당하였습니다. 죽창과 화승총을 가진 농민군과 라이플총을 가진 훈련된 근대 보병대와의 싸움은 농민군 200명을 일본군 1명이 대적할 정도로 엄청난 전력 차가 있었던 것입니다.(94-6)


# 후비병 : 현역과 예비역 다음으로 병역에 임한 27-32세 가량의 최고령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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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 푸른역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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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본 사람들이 청일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치른 전쟁이었다고 배웠을 것이다. 청일전쟁의 목적을 나라 안팎에 밝힌 선전조칙(宣戰詔勅)에도 "조선은 (일본)제국이 처음에 가르치고 이끌어 열국의 대열에 들게 만든 독립된 나라다. 그런데도 청나라는 조선을 속방이라고 칭하여 음으로 양으로 그 내정에 간섭하니·····제국이 솔선해서 제 독립국의 대열에 들게 한 '조선의 지위'와 '그것을 표시하는 조약'을 업신여기는 청조 중국의 잘못된 욕망 때문에 일본은 부득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청일전쟁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여기는 일본과, '속국'이라고 여기는 청나라가 벌인 전쟁으로, 조선을 '속국'이라고 한 청조 중국은 '야만국'이며 일본은 '문명국'이다. 청일전쟁은 '야만'과 '문명'의 전쟁이었다고 곧 떠들썩하게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처음 행사한 무력은 다름아닌 그 독립을 위해 싸운다던 조선의 왕궁을 향해서였다."(59-60)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자유민권운동이 쇠퇴하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적인 강경론이 우세해지고 있었다. 청일전쟁 발발 10년 전인 1884년 일본의 후원을 받은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서울에 주둔한 중국 군대에게 격파되어 실패로 끝났고, 김옥균 등은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중국에 대한 적대감과 일본의 국권확장 주장이 국민들 사이에서도 급속히 퍼졌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론(脫亞論)'을 외친 것도 갑신정변 다음해의 일이다. 더구나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894년 3월 김옥균이 상해에서 조선의 자객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청에 대한 일본의 적대감정은 한층 높아갔다. 따라서 조선의 농민반란을 이유로 일본군이 출병하자 여론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신문도 적극적으로 전쟁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은 구미 열강의 (간섭) 움직임이었다."(61)


"그래서 조선주재 일본공사 오토리 케이스케가 생각해 낸 방법이, 청한 종속문제를 끄집어 낼 것이 아니라 조선 정부에게 터무니없이 무리한 난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1876년 조선 정부가 일본과 맺은 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서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로서·····"라고 약속한 것을 들어, 지금 청조 중국의 군대가 "속방을 보호한다"라는 이유로 주둔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다. 조선은 청국의 속국인가 독립국인가, 독립국이라면 청국군을 국외로 몰아내야 하며, 조선에 그럴 힘이 없다면 일본군이 대신해서 몰아낼 것이므로 조선 정부는 일본에게 '청군 구축'을 의뢰하는 공식 문서를 보내라며 정부를 압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미 7월 12일 청조 중국에 대한 영국의 조정 공작이 실패하자 전쟁을 시작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19일 대본영(大本營)도 조선에 있는 일본군에게 "청국군이 늘어나면 스스로 결단을 내리도록 하라"며 개전을 허가하였다. 조선왕궁점령은 이렇게 해서 계획되었다."(62-3)


'공간전사'인 《메이지 이십칠팔년 일청전사》 제1권은 조선 국왕이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충돌로 서로 사격하게 되어 국왕에게 걱정을 끼친 것을 사죄하고, '국왕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보도는 사건 직후부터 일본은 물론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일청전사》 초안에 분명히 나타난 바와 같이 국왕은 일본군에게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국왕을 지키고 있었던 이들은 조선 병사들이었다. 더욱이 이 위급한 때에 국왕측은 '외무독판이 지금 오토리 공사에게 가서 담판 중이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문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며 일본병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야마구치 대대장은 "문안에 있는 조선 병사의 무기를 인도하면 응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지만, 국왕측이 듣지 않자 '칼을 빼들고 군대를 지휘하고 질타하여 일본병을 문안으로 돌입'시키려고 했던 것이다."(76-7)


"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한 7월 23일 오전 11시에 국왕의 부친인 대원군 이하응이 일본군 보병 제11연대 제6중대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왕궁으로 들어왔다. 일본측은 왕비인 민비 일족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대원군을 추대하여 민씨 일족을 정권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일본 공사관의 스기무라 후카시 서기관은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는 대원군에게 "일본 정부의 이번 거사는 실로 의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일이 성사된 다음 조선국의 땅을 한 치도 빼앗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을 전했다. 어떻게 하든지 대원군을 끌어내서 민씨 일족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국왕을 일본 지배하에 두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왕궁점령의 최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마지못해 요청에 응하여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왕궁으로 들어간 것이 오전 11시였다. 이어서 오토리 공사도 궁전으로 들어와 조선 정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83-4)


"조선 출병 이후 군사 관련 보도는 도쿄 발은 물론, 현지 보도도 일본 정부와 군의 엄중한 관리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일본 국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렇게 걸러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언론 기관은 신문지조례를 비롯하여 여러 법률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 파병 직후부터는 군사에 관한 기사 게재에 대한 내무성 경보국의 '주의 구두전달'(6월 5일)이 있었고, 또 육군성 제9호·해군성령 제3호(모두 6월 7일) 등에 의해 엄중하게 통제되었다. 〈오사카아사히 신문〉의 기사 가운데 "이상 전보 세 개 중 23일 발은 모두 그날 접수했지만 즉각 독자에게 보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든가,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의 "위 확실한 보도는 육군성 검열필"이라는 기록은 그 같은 통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 내무성과 육군성·해군성 등은 단순한 통제뿐 아니라 '꾸민 이야기'를 흘려 정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사실인 듯이 보도한 7월 25일자 기사는 그 같은 정보 조작의 한 예다."(128-9)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에서는 "미국과 싸운 일은 잘못되었지만, 청일·러일전쟁까지는 좋았다"라고 하는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도, 그 주요한 책임은 일본의 군부, 특히 육군에 있으며, 그 군인들이 "위대했던 메이지 시대 선배들의 작업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쪽에는 군도(軍刀)를 차고 위압을 가하는 거친 군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국가의 앞날을 우려하여 고뇌하는 자유롭고 합리주의적인 시민들이 있는 듯한 역사 인식, 그리고 양심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힘이 없는 후자의 사람들이 군인 집단에 맞서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굴복하는 가운데 전쟁을 향한 길이 준비되고 있었다는 역사 인식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단지 천황과 그의 측근 그리고 일본의 보수 정치가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들조차 이와 비슷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현실에서 자주 경험한다."(161-2)


"오늘날까지도 "일본은 청일·러일전쟁 무렵까지는 국제법을 잘 지켰다"는 목소리는 일본에서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한층 목청을 돋우기까지 하고 있다. 시바 료타로가 죽고 나서, ('좋은 시대 메이지'로 대표되는) '시바 사관'을 찬미하는 소리가 한층 더 높아진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다." "시바는 정체와 부패로 얼룩진 조선 왕조와 비교하여 일본의 '메이지를 찬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시바가 죽은 후 일본의 저널리즘이 조잡하고도 일방적으로 '시바 찬가'를 선전할 때, '메이지 찬미'와 극에 위치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 사실 그리고 그에 저항했던 조선과 중국의 민족적 각성의 역사는 일본인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 현대사상의 동향은 청일·러일전쟁 승리라는 그늘 뒤에서 일본이 조선과 중국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그리고 조선과 중국에서는 이러한 침략과 패배에 대항하여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애써 감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167-8)


청일전쟁의 선전조칙(詔勅)이 나온 지 채 열흘도 되기 전에 육해군 참모회의에서 남방 작전 구상이 논의된다. "그곳에는 '동아의 평화를 교란할 염려가 있는 영국'을 견제하려면 영국의 '화심을 안고 있는 홍콩'을 제압할 수 있는 팽호도의 영유가 꼭 필요하고, 팽호도의 안전을 위해서는 '타이완을 병유'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다시 마음껏 '구주 열국'과 경쟁하여 '동아시아에서 자웅을 다투기' 위해, 기회를 틈타 필리핀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상까지 있었다. 필리핀 점령까지 구상한 이 같은 논의가 참모들 사이에서 오간 것으로 당시 정부의 대외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청일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일본군의 중추에서 이러한 논의가 거듭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무적 황군의 신화'가 생기고, 비합리적인 전략으로 내달린 태평양전쟁으로의 길이 청일·러일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172-3)


"'무적 황군의 신화', 비합리적인 전략 포로의 학대 등 태평양전쟁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타락한 일본군의 모습을 보며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청일·러일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일본의 침략을 받아 전장이 됐던 조선과 중국의 입장을 고려하는 관점이 거의 무(無)에 가깝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군과 일본 정부 지도자는 물론 저널리즘과 일반 국민여론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조선인과 중국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일본 정부와 일본군은 그들의 저항에 어떻게 반응했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한 고려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점이 훗날 무모한 침략과 조선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민에 대한 학대로 이어진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당했던 조선으로서는 그 나라 군대가 다시 몰려와 나라의 상징인 왕궁을 점령했으니, 조선의 관야에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는가. 조선 민족의 눈으로 그 일을 목격한다면 사건의 중대성을 자연히 알 수 있을 터이다."(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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