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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사 ㅣ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7
로버트 C. 앨런 지음, 이강국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3월
평점 :
20세기에 발명된 대부분의 기술은 선진국에서 나타나는데 "그들은 더욱 더 비싸지는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자본을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저임금 국가에서는 이 신기술들이 비용 면에서 비효율적이었지만, "경제 도약을 위해 계획과 투자 조정을 사용하는 빅 푸시(Big Push)와 함께 이러한 기술을 급속히 도입"한 국가들은 서구와의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10-11) 경제발전을 통해 최저생계 수준을 높이는 일은 사회 후생에 여러가지 함의를 갖는다. 최저생계 수준으로 살아가는 사회는 건강 상태와 교육 수준이 낮다. 무엇보다 "최저생계 수준은 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경제적 동기를 제거한다. 하루의 노동으로부터 더 많은 산출을 얻어내야 하겠지만, 이 경우 노동이 너무 값싸서 기업들이 굳이 생산성을 높일 기계를 개발하거나 도입할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이다. 최저생계 수준은 빈곤의 덫이다."(23-4)
국부의 요인을 "경제학자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경제 발전 이론들에서 찾지만, 경제사가들은 역사적 변화의 동적인 과정에서 찾는다."(8) 제도, 문화, 지리는 언제나 "경제 성장의 배경에 숨은 요인이었던 반면, 기술 변화, 세계화, 경제 정책은 불균등 발전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게다가 산업혁명 자체가 콜럼버스, 마젤란을 비롯한 위대한 탐험가들의 항해와 함께 15세기 말에 시작된 세계화의 첫번째 단계의 결과였다. 따라서 대분기는 첫번째 세계화와 함께 시작된다."(29-30) 산업혁명 전야에 가장 크게 변화한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중은 (74퍼센트에서) 45퍼센트로 하락했다. 또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급속하게 도시화되었다." 1750년 영국 '농촌의 비농업 인구 비중'은 32퍼센트였다. "이들 대부분은 제조업에 종사했고 이들이 생산한 제품은 유럽을 가로질러 때로는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38)
도시화와 농촌 제조업의 성장은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켜 노동시장을 타이트하게 만들고 임금을 끌어올렸으며, 식품 생산을 위한 농업과 노동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켰다. 그 결과로 영국과 네덜란드 모두에서 농업혁명이 나타났다."(39) 또한 도시의 수요 증가로 에너지 혁명이 발생했다. 도시가 성장하고 나무 가격이 급등하자 대체 연료가 발전했는데, "네덜란드에서 대체 연료는 이탄(peat)이었고, 영국에서는 석탄(coal)이었다." 영국은 18세기에 "대규모 석탄 광산업을 지닌 유일한 나라였고, 석탄은 세계에서 가장 싼 에너지원을 영국에 제공했다." 식자율(literacy)의 상승 요인으로 흔히 종교개혁을 이야기하지만, 가톨릭 지역인 프랑스 북동부와 벨기에, 라인 강 계곡에서도 식자율이 상승한 현상을 감안하면, 이는 "고임금, 상업 경제의 등장 때문이었다." 고임금 경제는 식자율뿐만 아니라 계산력, 숙련의 형성을 촉진했다.(40-1)
문화·정치적 배경은 지역별 차이를 낳았다. "프랑스의 귀족은 세금에서 면제되었지만, 영국 의회는 1693년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토지세를 부과했다." 재산권과 관련해서도 "토지 수용이나 운하 건설, 토지를 가로지르는 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재산권 소유자들의 권리를 무효로 하는 영국 의회의 사법률[private acts, 특정 지역이나 특정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법률] 같은 것이 프랑스에는 없었다. 명예혁명이 현실에서 의미했던 바는 '1688년 이전에는 간헐적으로만 존재했던' 국가의 '독재적인 권력'이 이후로는 언제나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46-8) 도시화와 상업의 발전으로 "장인, 기능공, 상점주인, 농부의 아들 대부분과 노동자의 아들 일부가 몇 년 동안의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전례가 없을 만큼 대중들이 신문을 읽고 정치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는 톰 페인 같은 급진주의자가 <인간의 권리The Rights of Man>라는 책을 수십만 권 팔아서 유명해질 만큼 새로운 세계였다."(49)
"과학의 발견들은 유럽 전역에 알려졌고, 자연철학에 대한 상류층의 관심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화적 발전으로는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없다. 대신 산업혁명에 대한 설명은 영국의 독특한 임금과 가격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고임금과 값싼 에너지에 기초한 영국 경제에서는 기업들이 산업혁명을 일으킨 혁신적인 기술을 발명하고 사용하는 것이 이익이 되었다." 영국 기업들은 값싼 에너지와 자본을 사용하여 값비싼 노동을 절약했고, "더 많은 자본과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영국 노동자들은 더욱 생산적이 되었다."(49-50) 제니 방적기, 아크라이트 방적기, 뮬 방적기 등이 연이어 발명된 것은 과학적 발견에 빚진 것이 아니라, 노동이 비싸고 자본이 싼 곳에서 기계를 사용하면 이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엄청난 사고의 발전이 아니라 진부한 아이디어를 실행하기 위해 기계를 발명하고 개량하는 데 시간과 돈을 쏟아부은 결과였다.
"증기기관은 발명을 추동하는 경제적 인센티브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증기기관의 과학은 유럽 전체에 알려져 있었지만 연구개발은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영국에서 증기기관 개발에 자금 지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58) 증기력은 또한 "19세기의 교통을 혁명적으로 탈바꿈시켰다. 고압 증기기관을 발명한 모든 이들(퀴뇨, 트레비식, 에반스)은 지상의 운송 수단을 움직이는 데 증기기관을 사용했다. 그러나 포장되지 않은 도로 사정을 극복할 수 없었던 탓에 모두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 가지 해결책은 선로 위에 증기기관을 설치하는 것이었다."(61) 19세기 중반 "영국 노동생산성 상승의 절반은 증기기관 덕이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이득이 경제 성장이 100년 동안 지속된 중요한 원인이었다. 또다른 원인은 여러 산업 분야에 과학이 더 많이 적용되었다는 점이다."(63) 산업혁명기의 발명들은 이전 세기와 달리 계속되는 혁신의 물결을 촉발하면서 연달아 이루어졌다.
산업혁명의 서막은 영국이 열어젖혔지만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는 1870년에서 1913년 사이에 산업 생산에서 영국을 추월했을 뿐 아니라 기술 역량에서도 명백하게 추월했다."(74) 선도국들은 저발전 국가들과 격차를 벌리면서 경쟁우위를 더욱 강화했고, 제국주의로 나아갔다. 산업혁명은 유럽 제조업의 생산력을 높였지만, 저임금 노동력이 풍부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자본을 활용한 기계화가 비용 면에서 효율적이지 않았다. "인도의 직물 산업 이야기는 19세기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의 이야기였다. 세계화와 결합된 편향적인 기술 변화가 유럽 국가들의 산업화를 촉진했고 동시에 아시아의 오랜 제조업 경제를 탈산업화했다."(98) 그러나 식민지 인도에서는 표준적인 개발 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다. "인도 인구의 겨우 1퍼센트만이 교육을 받았고, 성인 인구의 식자율은 6퍼센트였다. 관세는 낮았고 오로지 정부 수입을 위한 것이었다. 산업에 자금을 조달하는 은행 정책은 존재하지 않았다."(100)
북아메리카의 동부 해안 지역은 "큰 규모의 경제를 지원하기에 충분히 넓고 비옥했고, 대륙의 내륙 지역은 세인트로렌스, 모호크-허드슨, 미시시피 등의 강들을 따라 접근 가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활동 대부분은 멕시코 내륙과 안데스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강은 이 지역에서 해안까지 이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수출 비용이 높았다."(105) 라틴 아메리카의 "팜파 지역은 적어도 펜실베니아만큼 쇠고기와 밀을 잘 생산할 수 있었지만 식민지 시대에 아르헨티나는 유럽으로부터 너무 멀었다. 아르헨티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량의 가죽 수출뿐이었다. 칠레는 유럽으로부터 더욱 멀었다. 이 국가들의 경제사는 그들의 수출품이 유럽에서 경쟁할 수 있을 만큼 선박이 충분히 개선된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진정으로 시작되었다."(119) 멕시코가 정체된 원인은 20퍼센트를 차지하는 백인 인구와 비슷한 수준의 식자율이 말해주듯, "노동력의 전반적인 기술 부족" 때문이었다.(139)
오늘날 아프리카의 가난을 이해하려면 1500년의 사회경제구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지리, 인구 그리고 농업의 기원이다."(147) 얌 재배 농민들이 열대우림을 처음 개간할 무렵 등장한 말라리아와 수면병 같은 열대 질병들은 서아프리카의 인구 증가를 억제했다. "서아프리카는 토지가 풍부한 농업 지역이었으므로 이동 경작이 그러한 상황에 적절한 대응이었다." 따라서 마을에는 "토지 없는 노동자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고 누구든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지 않고 토지를 개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토지를 구입하거나 빌리기 위한 수요가 존재하지 않았다."(150-1) 아울러 인구 밀도가 낮고, 운송 비용이 높았기 때문에 대규모 시장을 떠받치는 전문 제조업이 발전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생산 체제를 지탱한 정치 체제는 토지를 배분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군대를 구성하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무리 또는 부족 연합이었다. "리더는 '족장'이라 불렸고 족장의 지위는 설득으로 유지되었다."(153)
이동 경작은 "위계적이지 않은 사회 조직을 만든 특징이 한 가지 있었다. 경작자들이 많은 여가시간을 즐겼다는 점이다." 게으를 권리와 권력의 매력은 노예제에 대한 욕망을 부추겼다. "문제는 토지가 상당 부분 점유되지 않은 환경에서는 노예들이 도망쳐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족장들은 "다른 지역의 노예들을 사냥하여 이러한 가능성을 차단했다. 사로잡힌 노예들은 토착 언어를 알지 못하거나 토착 생태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몰랐다. 물론 그 자녀들은 그 언어와 생존법을 알았다. 따라서 노예제는 한 세대 동안만 지속되었고, 노예의 아이들은 부족의 구성원으로 허락되었다. 노예제는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 아프리카에서 매우 흔했으며 많은 국가의 기초였다." 토지가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사적 재산권을 조직하기 위해 사용한 측량, 계산, 기하학, 쓰기 같은 법적, 문화적 제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153-5)
초기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은 "북아메리카의 선례와 같이 '직접 통치'를 통해 조직되었다. 이러한 통치하에서 비록 토착민은 흔히 선거권이 없었지만 식민 정부는 영토 전역의 정착민과 토착민에게 본국의 법을 적용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직접 통치가 '간접 통치'로 대체되었다. 모든 인종적 차이를 인식하게 하고 외국인에 대한 지원을 대가로 그들을 잘 따르는 지도자들에게만 권력과 부를 부여함으로써, 토착민이 외세의 점령에 덜 반대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식민지 국가는 본국의 법을 정착민과 도시에만 적용한다. 시골의 토착민에 대한 통제는 그들 종족의 '관습'을 적용하는 '족장'에게 맡겨졌다." 관습은 "식민주의의 목표에 맞게 재정립되었다. 노예제 같은 '야만적인' 관습은 (비록 현실에서는 계속되었지만) 제거되었고 부불노동을 요구하는 부족장의 권리 같은 쓸모 있는 관습은 유지되었다. 이런 식으로 강제노동이 식민지의 삶에서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다."(164-5)
"선진국들이 연 2퍼센트씩 성장한다고 했을 때, 후진국의 일인당 GDP가 연 4.3퍼센트씩 성장하면 두 세대(60년) 만에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 인구 증가율에 따라 다르지만 그러려면 총 GDP는 매년 6퍼센트 이상 성장해야 한다." 저개발 국가들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진국 경제의 모든 요소―제철소, 발전소, 자동차 공장, 도시 등―를 한꺼번에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빅푸시(Big Push) 산업화이다. 이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부른다. 수요와 공급이 있기 전에 모든 것을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공장에 앞서 제철소가 건설되어야 하며, 제품에 대한 유효수요가 있기 전에 자동차 공장을 건설해야 한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이 성공하려면 계획기구가 경제 활동들을 조정하고 그 활동들이 반드시 실행된다고 보장해야 한다. 계획기구의 역할은 서로 많이 달랐지만 20세기에 빈곤에서 탈출한 대규모 경제들은 이러한 과업에 성공했다."(2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