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민주주의
최경봉 지음 / 책과함께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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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언어와 문자는 해당 공동체 구성원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회생활의 도구이기에 언어와 문자의 선택과 유지에는 구성원의 합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국어정책과 국어 인식에서 민주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한글이 공용 문자로 쓰인 뒤에도 한글은 여러 번 그 모습을 바꾸었다. 모아쓴 글자(한)를 풀어쓴 적(ㅎㅏㄴ)도 있었고,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쓴 적(ㅇㅍ)도 있었고, 소리 나는 대로 쓴 적(사람이 → 사라미)도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대중의 호응을 얻어 현재까지 이어진 경우는 드물다. 새로운 시도가 성공했다면 한글 표기가 간편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관습을 고려하지 않고 진행한 개혁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문자의 선택이 역사적 선택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관습의 힘과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적 원칙이다."(16)


"동경어를 표준으로 삼은 표준어 정책은 지방분권적 봉건국가였던 일본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민국가를 이루고자 했던 근대 일본의 열망이 표준어 정책에 투영되면서 표준어 정책은 국민정신의 함양을 목적으로 강력하게 진행되었고, 이는 곧 새로운 국어를 정립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조선의 표준어 정립 과정은 이미 유일하게 존재하는 공통어를 공식화하는 일에 가까웠다. 따라서 서울말을 표준어로 공식화하는 일은 설득과 투쟁의 문제라기보다는 교육과 보급의 문제였다." "이처럼 표준을 정하는 일이 막연한 상황에서 '대체로 쓰이는 말'과 '중류 사회의 말'이라는 기준은 '규칙에 맞는 표현' 혹은 '바른 본'이 대신하게 되었다. 언어의 표준화 사업이 바람직한 말을 찾아 중류 계층에게 걸맞은 말을 건설한다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바람직한 말을 익힌다는 것은 표준어를 권리로 인식하기보다는 의무로 인식하게 하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44-5)


"조선어사전 편찬회가 결성되던 1929년 민족문화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에게 조선어의 표준을 정하는 것은 조선 문화의 사활을 결정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조선의 문화가 향상되지 못한 것이 모두 언어의 표준을 마련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조선어의 표준화가 얼마나 절박한 일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표준어 사정안은 민족어사전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의 한 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1936년 10월 28일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한 시점을 계기로 조선어학회의 대중 집회가 금지되었고, 조선총독부의 국어 상용화 정책이 더욱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표준어 제정의 역사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공용어로서의 표준어를 정립하고자 한 노력은 더 큰 억압을 불러왔지만, 억압 속에서 강화된 절박감은 우리말 사전을 완성하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편찬된 사전은 해방 후 우리의 국어생활을 이끄는 기준이 되었다."(53-4)


"대부분의 근대 민족국가는 순수한 모국어를 국어로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언어 정화 운동을 국가사업으로 진행하였다. 방언을 제약하면서 표준어를 확립하였고, 이와 함께 철자와 문법을 정비하면서 이상적인 언어 모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규범에 어긋나는 표현은 국어의 순수성을 해치는 옳지 못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 순수한 국어를 지향하는 것은 언어 규범의 통일성을 중시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풍조와 맞물려 외래어를 배척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처럼 외래어를 배척하는 언어 정화 운동이 시작되고 국가주의 교육이 등장하면서, 언어는 교섭과 변화를 통해 발전해가는 것이고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이 소홀히 인식되었다. 그리고 언어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을 국가 정체성 유지와 관련지으면서 외래어 문제는 언어 규범의 문제라기보다 도덕과 이념의 문제가 되었다."(98)


"한국적 어문민족주의는 식민지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역사성 때문에 어문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국어정책과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외래어가 폭넓게 쓰이는 현실과 별도로 우리의 외래어관이 서구나 일본에 비해 더 폐쇄적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외래어 의식의 특이성은 외래어에 대한 저항의식에서 나타난다. 가장 특이한 점은 외래어의 기원에 따라 이를 대하는 의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어 표현과 일본 한자어는 사용하는 이의 무지를 질타하거나 고루함을 비판하는 예시로 사용되곤 하지만, 서구 외래어는 현학적인 또는 과시적인 표현 태도를 비판하는 예시로 자주 사용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언어순혈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을 경우 국어 속 한자어를 외래어로 보고, 한자어의 존재를 중국 문화에 대한 종속으로 판단하기도 한다."(102)


"우리의 근대의식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탈중화(脫中華)'를 모토로 했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도 마찬가지였는데, 동아시아 중세 질서가 중화주의를 근간으로 했기 때문이다. 근대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문화적으로는 한자 문화로부터의 독립을 내세우게 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정치·문화적 독립에 대한 열망은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문화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문화운동은 다른 어떤 문화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 고유의 것을 찾고자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새롭게 우리 문화를 건설하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근대 국어 운동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러한 흐름에서는 서구 외래어보다 한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외래어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국어 순화의 결과를 왜곡시키기도 한다."(111)


"관례를 떠나 현지 발음대로 외래어를 표기하자는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찬반이 팽팽히 맞선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러한 주장이 공감을 얻는 이유는 실용성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변하는 글로벌 시대에 효율성과 실용성 면에서 뒤떨어져 있음에도 관습이나 전통에 매달려 필요한 변화를 과감히 실천 못하면 퇴보나 제자리걸음밖에 안 된다"(이익훈, <어륀지 발음 옳다>)라는 일갈에 '오렌지는 국어, 어륀지는 영어', '국어정책의 주체성' 따위의 말은 초라한 변명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효율성과 실용성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이들의 '실용주의'는 특정 계층의 편리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말하는 '실용'과 '효율'은 '관습'을 부정하고 '경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실용주의자들은 대중들의 낯설어함과 곤혹스러움을 개의치 않는다. '일반인들이 낯설어하고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선점한다는 것은 더 큰 권력을 쥘 수 있는 토대가 된다."(153-4)


"근대의 특징 중 하나는 민족어가 생활의 언어에서 정치, 경제, 학술의 언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민족어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이어진 것은 민족어의 역할을 생활 언어로 국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대 민족어의 탄생은 민족어의 역할 확대를 의미했다. 따라서 민족어를 유지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민족어가 정치, 경제, 학술의 언어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는 일본어 상용 정책에 맞서 민족어 운동을 전개한 선조들도 뻐저리게 느꼈던 문제다." "규범을 강조하고, 표준어를 완고하게 고수하려는 조선어학회의 태도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융통성이 없는 근대주의자의 모습이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어를 국어인 일본어와 같은 반열에 올리려는 의욕적인 민족주의자의 모습이다. 일제의 일본어 상용 정책이 심화되면서 조선어의 위상이 추락하는 현실에서 조선어의 규범화를 위해 노력했던 이들은 이런 점에서 선각자였다."(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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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 지음 / 푸른역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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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중국 전문가의 한국사 관전평


"한국 상고사 특히 고조선에 관한 문헌기록은 위만조선 멸망과정을 다룬 《사기》 <조선열전> 이전의 자료로 한정하면 정말 한줌에 불과할 정도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한 연대가 기원전 2세기 말~1세기 초 정도이니, 그 이전에 조선을 언급한 중국 측 기록은 글자수로 따지면 아마 100자 남짓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 위만조선 이전의 고조선사를 구축하는 작업은 기둥 몇 개만 가지고 큰 집을 지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고고학 자료 역시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 특정 자료를 민족이나 국가의 강역이나 활동 구역을 밝히는 증거로 활용하는 데는 큰 문제들이 따른다. 특정 고고학적 유물을 다른 족속들이 나누어 썼을 가능성뿐만 아니라 같은 족속이라도 다른 유물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자료를 민족의 구분에 활용하려는 시도는 문헌자료의 오용 못지않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조선 연구에 한국 학자들이 남용하고 있는 비파형동검이 좋은 사례다."(222-3)


"기원전 2세기경 출간된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수감 중에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주자 이를 부끄럽게 여긴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고,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전한다. 《상서대전》보다 약 50년 후 사마천 역시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1970년대 랴오닝성遼寧省의 서부 다링하大凌河 유역에서 "기자 일족과 연관될 수 있는 기후라는 명문이 새겨진 상 말기의 청동기가 상당량의 다른 상말주초商末周初 청동기들과 함께 이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따라서 기원전 11세기경 기자 조선동래설은 상당한 고고학적 근거를 갖게 된 셈이다. 문제는 기자의 조선 동래를 전하는 문헌기록과 고고학 자료 간에 연대 편차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고고학 자료에서는 기원전 11세기 그 족속의 이동 가능성을 볼 수는 있지만 문헌자료는 그보다 약 1000년 이후인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나 되어서야 그러한 인식이 존재한다."(224-6)


선진先秦시대 문헌에서 기자는 상의 마지막 왕에게 학대를 받았지만, 주의 무왕에게는 환대를 받은 현인 정도로 묘사될 뿐이며 조선과의 연관성은 언급되지 않는다. "기자와 조선의 연관성이 한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과 함께 시간이 갈수록 기자 관련 이야기가 증폭되는 양상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상서대전》이나 《사기》가 단지 기자의 조선 이주와 분봉만을 전하는 반면에, 《한서》에는 조선을 교화시킨 문화적 영웅으로서 기자가 나타나고, 이어지는 《삼국지》에서는 40대를 존속한 조선의 통치가문으로서 기자조선 상이 정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1,400년 이후 조선 왕조에서 더욱 확대되어, 한민족의 시조로서 기자의 위치가 더욱 공고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후대의 문헌으로 갈수록 더욱 세밀하게 증폭되어 나타난다는 구제강(고힐강)의 '누층적累層的으로 조성된 고사古史'설과 맞아떨어져, 그 진위 여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229)


"따라서 기원전 11 세기 중엽 상 멸망 직후에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상서대전》과 《사기》 〈송미자세가〉에 언급된 고사의 신빙성 여부도 엄정하게 재검토되어야 한다. 물론 기자 조선동래설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상말주초인 기원전 11세기 다링하 유역에서 기자 일족이 일시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부인하지 않듯이, 상 멸망 이후 기족을 비롯한 상의 귀족 세력들이 다링하 유역으로 이주했을 개연성은 있다. 이는 그 지역에서 발견된 다량의 상 후기 청동기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서주 전기 연나라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유리허琉璃河 유적지를 비롯한 연나라의 근거지에서도 기족 관련 청동기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다링하 유역과 가까운 연에 근거지를 둔 소공과 기자와의 인연이나 양 지역에서 모두 출토된 기후 명문을 지닌 청동기들 역시 기자 일족의 동북이주설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기자 일족이 도피해간 바로 그 지역에 과연 조선이라는 정치체가 존재하고 있었을까는 별개의 문제이다."(229-30)


"고조선에 관심을 가지는 유사역사가들이나 학자들까지도 그 연구에서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고조선의 원고성遠古性에 대한 선험적 믿음이다.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이나 혹은 기자조선 얘기처럼 기원전 11세기에라도 존재했다면, 그 후신인 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기 때문에 고조선은 최소한 2,000년 혹은 1,000년 이상 존속한 나라가 된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장기적으로 존재한 나라다." "역사상 존재한 한 정치체나 나라의 존재 여부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신빙성 있는 문헌 증거로 입증되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둘째, 고고학적으로 입증되는 실체일 텐데, 최소한 그 중심지로 추정될 만한 성곽이나 묘지 등의 존재가 적절한 편년編年과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중국 최초의 왕조로 알려진 전설상의 하夏나라와 그 유적지로 추정되는 기원전 얼리터우二里頭 유적과의 연관성은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230-1)


선진시대 문헌 중에 고조선의 존재를 입증하는 근거로 동원되는 "《관자》와 《전국책》은 기원전 1세기 말 유향劉向의 편집을 통해 현재의 형태로 전래되었고, 조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산해경》의 두 편 역시 한대에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관자》는 그 내용이나 어법이 전국시대 이전으로 소급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한 사람의 저작으로 보기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원형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직하稷下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학자들이 당시 영웅화된 관중의 사상을 대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진과 한나라 초기를 거치며 소실되었고 유향의 재편집 당시 많은 부분이 새롭게 추가되었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설사 백번 양보하여 《관자》 두 편에 나오는 내용의 신빙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헌으로 입증할 수 있는 조선의 최초 출현은 (환공과 관중이 활동했던 기원전 7세기로서)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기원전 11세기 중반과는 무려 400년의 차이가 존재한다."(233-4)


"기원전 211년 진의 통일 이후 《사기》 〈진시황본기〉에 진의 영토가 동쪽으로 조선에까지 이르렀다고 언급되어 있듯이 조선이 중국 동북방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마천은 또한 〈조선열전〉에서 기원전 194년 위만의 조선 왕위 찬탈 이후 조선의 급성장과 함께 1년을 끌어온 한 무제의 조선 정벌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선진시대의 학자들과 달리 한대 이래의 학자들에게는 요동의 동부나 한반도 서북부를 차지했을 조선이 오늘날 중국 동북부의 대표 세력으로 각인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대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용 가능한 고고학 자료를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곳의 대략적 위치(다링하 유역)에 대한 정보는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한 무제의 조선 정벌에 뒤이어 그 지역에 설치한 군현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까지 더해져 기자의 조선동래 고사는 더욱 정치하게 다듬어질 수 있었다."(235-7)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를 자신들의 충성심에 따라 정치적 변신을 거듭한 요遼나라 때(907~1125) 변경 주민들의 시각을 통해 바라본 나오미 스텐든은 《속박되지 않은 충성심》에서 당시 중국 동북 지역에서 '중국'은 통합된 개체로서나 관념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았고, 문화적인 정체성이나 민족성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오직 지역 지도자들의 충성심이 정치적 추이를 결정하는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중세까지 이 지역을 단일한 민족이나 국가적 정체성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중국 동북 지역에서 중국의 부재가 지금부터 2,000~3,000여 년 전 그 지역을 아우르는 고조선의 존재를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연원이라고 믿고 있는 고조선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했을 수 있지만 만주 지역은 고대 이래 청대까지도 다양한 세력이 이합집산하며 명멸한 곳이었다. 결코 민족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용광로였던 것이다."(2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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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 이토록 곡해된 사상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테리 이글턴 지음, 황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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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체제에 대한 견해를 수정한 대다수 급진주의자들이 단순히 주변의 면화공장 수가 줄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구레나룻이나 머리띠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던져 버린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맞섰던 체제가 너무 강고해서 깨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커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꿀 가능성에 대한 환멸이 결정적이었다."(17) 이처럼 자본주의는 놀랄 만한 진보를 성취했지만, "단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만도 엄청나게 달려야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한계가 자본 그 자체이며 자본의 끊임없는 재생산이 자본주의의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20) "마르크스주의의 의미는 그것이 엄밀히 한시적이라는 데 있으며, 따라서 자기 정체성의 전부를 그것에 투여하는 사람은 핵심을 놓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그 자체이다."(14)


2.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으로만 괜찮다?


"사회주의가 되려면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넉넉해야 한다. 마르크스나 엥겔스부터 레닌과 트로츠키에 이르기까지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이와 다르게 생각한 적이 없다."(28) 물질적인 기반이 결여된 상태에서 끔찍한 희생을 강요한 스탈린주의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마르크스 작업의 평판을 떨어뜨린다기보다 오히려 그 타당성을 증언해준다."(31)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작동할 수 없다는 이들은 "풍족한 조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 해도 복잡한 현대 경제를 시장 없이 어떻게 운영할 수 있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점점 더 많은 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놓는 대답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시장은 사회주의 경제의 빠뜨릴 수 없는 일부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른바 시장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소유되지만 자치적인 협동조합들이 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32-3)


3.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이다?


"생산력-생산관계 모델의 명백한 결함 가운데 하나는 결정론적인 측면이다. 여기서는 어떤 것도 생산력의 전진에 저항할 수 없는 듯하다. 역사는 불가피한 내적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 역사를 관통하여 뻗어나가며 그 과정에서 여러 다른 정치적 장치들을 무너뜨리는 단 하나의 역사적 '주체'(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생산력)가 있다. 이는 복수심을 가진 형이상학적 관점이다."(51) 그러나 마르크스의 작업에는 생산력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낳는다는 생각 말고 다른 방향의 사유도 있다. 여기서는 "사회적 생산관계가 생산력보다 선차적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 사유에서는 사회적 관계와 계급투쟁을 만들어내는 인간이야말로 역사의 명실상부한 창조자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인간을 이용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역사는 인간이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활동에 불과하다"고 쓰고 있다.(56)


4.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마르크스가 (푸리에나 생시몽, 오언을) 반대했던 것은 무엇보다 순전히 논변의 힘을 통해 반대파를 이길 수 있다는 이 유토피아주의자들의 믿음이었다. 그들에게 사회란 사상의 전쟁터이지 물질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었다."(72) "<고타 강령 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 1875)에서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에는 그것이 태어난 자궁인 낡은 질서가 남긴 선천성 반점이 찍혀 있으리라고 쓰고 있다. 그러니 '순수한' 출발 지점이란 없다."(75)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란 "우리가 집단적으로 우리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대체로) 정치적 제스처 게임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을 말한다." "진정으로 다른 미래는 현재의 단순한 연장도 그것과의 절대적 단절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해방 개념은 평탄한 연속성과 철저한 단절 둘 다를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매우 희귀한 존재, 즉 냉철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한 몽상가였다."(79)


5 .마르크스주의는 만사를 경제로 환원한다?


"경제환원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야말로 '생산'이란 단어의 가장 좁은 의미에서 생산을 위한 생산을 믿는다. 반면 마르크스는 더 폭넓은 의미에서 생산을 위한 생산을 믿는다. 그는 인간의 자기실현 자체가 목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며 다른 어떤 목표의 도구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112) 계급은 "경제적 실체인 만큼이나 사회적 구성체이자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것은 관습과 전통, 사회적 제도, 가치와 사유 습관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정치적 현상이다." "생산은 삶의 특정한 형식들 안에서 수행되고 따라서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노동은 언제나 의미를 띠며 인간은 의미 있는 (문자 그대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동물이므로, 노동은 결코 단순히 기술적이거나 물질적인 사건일 수 없다. 신에게 기도하거나 조국을 찬양하거나 아니면 비상금 주머니를 채우는 방법으로 볼 수도 있다. 요컨대, 경제적인 것은 언제나 그 자체보다 더 많은 것을 전제한다."(116-7)


6. 마르크스에게 세계는 물질 덩어리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은 "역사나 물질이나 정신의 노리개가 아니라 자신의 역사를 만들 능력을 지닌 적극적이고 자기결정적인 존재이다."(125) 유물론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정신'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애초에 그런 질문을 제기하지도 못한다고 답할 것이다. 사회적 협동이 없었다면 우리를 살아 있게 해주는 물질적 생산도 없었을 것이며,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상당 부분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을 말한다." "의식은 어떤 유령 같은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물질 덩어리지만 독특하게 창조적이고 표현적인 덩어리이며 우리가 '정신'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창조성이다."(127) 따라서 "이 현실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현실을 우리 자신의 활동과는 별개의, 자연적이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소외라 칭한 것이다."(129)


7.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사라진 노동계급에만 집착한다?


"구분을 복잡하게 만들고 위계를 무너뜨리고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의 형태들을 잡다하게 섞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성이다. 어떤 삶의 형태도 이보다 더 혼종적이고 다원적이지는 않다. 정확히 누가 착취받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되면 이 체제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평등하다. 자본주의는 가장 독실한 포스트모더니스트만큼이나 반反위계적이며 가장 열렬한 국교회 목사만큼이나 관대한 포용주의자이다."(153)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계급이 점유하는 위치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커다란 망치를 다루는 근육질 남성만이 아니라 "노동력을 자본에 팔 수밖에 없고 자본의 억압적 규율 아래 신음하며 자신의 노동 조건에 대한 통제력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 모두를 포괄한다."(159)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은 "제 기능을 다하면서도 박탈당하고, 특정하면서 또한 보편적이며, 시민사회의 불가결한 일부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156)


8.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폭력적인 정치 행동을 선호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조직된 노동계급이 다양한 동맹 세력과 더불어 부르주아 혹은 자본주의적 중간계급을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소규모 반란 집단이 아닌 대다수의 행동이다. 사회주의는 대중적 자치에 관한 것이며,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전문 포커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혁명을 대신 해줄 수는 없다."(174) 혁명주의자들 역시 개혁을 옹호한다. 하지만 이들이 개혁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그와 같은 개혁을 더 장기적이고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데 있다.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조만간에 체제가 절대 양보하지 않는 지점에 이를 것이며, 마르크스주의에서 이 지점은 사회적 생산관계로 알려져 있다. 혹은, 좀 거친 기술적 용어로는, 물적 자원의 통제권을 절대 내놓지 않으려고 작정한 지배계급이다. 오직 그 지점에서만 개혁과 혁명 사이의 결정적인 선택이 중대한 문제로 떠오른다."(176)


9. 마르크스주의는 전권을 가진 국가를 믿는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시들어 소멸하리라 희망한 것은 중앙 행정부라는 의미의 국가가 아니었다. 복잡한 근대 문화에서는 어디서든 그런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자본> 제3권에서 "모든 공동체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공동의 활동들"에 관해 썼다. 행정체로서의 국가는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끝을 보고자 희망했던 것은 (지배계급을 옹호하는) 폭력의 도구로서의 국가였다."(181-2) "국가는 스스로를 위로부터 사회를 형성하는 존재로 보지만, 실상은 사회가 낳은 산물이다. 사회가 국가에서 나온 게 아니라 국가가 사회에 기생한다. 전체 구조가 뒤집힌 것이다." "마르크스의 목표는 국가와 사회, 정치와 일상생활의 이런 간극을 전자를 후자에 녹임으로써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가 민주주의라 부른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현존하는 국가는 그저 "현 체제가 입힌 인간적 손상의 일부를 닦아낼 수 있을 뿐이다."(185-6)


10. 마르크스주의는 최근의 급진적 운동에 기여한 바 없다?


로버트 J. C. 영에 따르면 1960년대 이전에 "민족주의와 식민주의 문제와 더불어 젠더라는 이슈를 체계적으로 제기하고 논의한 것은 공산주의 운동이 유일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의 권리를 확고히 옹호했을 뿐 아니라 세계 반식민주의 운동에도 가장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실제로 20세기 전반부에 걸쳐 그 운동에 가장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의 세 가지 가장 위대한 정치투쟁, 즉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여성해방, 파시즘에 대항하는 싸움의 선두에 섰다. 반식민주의 전쟁의 위대한 1세대 이론가 대다수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없어서는 안 될 출발점을 제공했다."(196-7) 또한 마르크스는 "자연 자원에 대한 단기적인 자본주의적 착취와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생산 사이의 갈등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독일 이데올로기>를 쓸 때부터 이미 "사회 분석에 지리학적이고 환경적인 요인들을 포함"시킨 현대적 환경주의자이기도 했다.(2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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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 - 문명을 읽는 새로운 코드 옥스퍼드 세계사
대니얼 R. 헤드릭 지음, 김영태 옮김 / 다른세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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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구를 만들어낸 후에는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 - 마샬 맥루한


옛 호모 사피엔스를 신인류로 재탄생하게 만든 요인은 바로 문화이다. 수백만 년 동안 생물학적 진화에 묶여 있던 인류에게 "상징 표현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면서 인류의 문화는 절대 느려지거나 멈추지 않게 되었으며 새롭고 더 창의적인 발전 방법을 찾아나가게 되었다."(18) 신석기 시대에 정착문화가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을 찾는 데 몰입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너무 무겁거나 약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었던 물건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29) 인류의 신체와 두뇌는 신석기 시대에 정체되어 있었지만 "이들이 만든 유물의 다양성·효율성·의미는 지수적으로 증가하였다. 기원전 1만 년경 이들의 기술과 제작품 덕분에 인간은 가장 효율적인 수렵채집자가 되었으며, 이전에 보지 못한 가장 성공적인 포식자가 되었다."(33)


신석기 마을에서 문명사회로 전환할 수 있었던 주요인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잉여 식량을 생산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급진적이고 새로운 사회조직이 생산을 증대시키는 새로운 농업기술과 함께 등장한 셈이다."(36) 최초의 문명사회는 강이나 호수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건조 지대와 사막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해 운하나 둑을 쌓는 토지 작업을 하면서, 협동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고대 문명이 남긴 "문자 기록과 기념물, 대부분의 수공예품은 엘리트가 만들었거나 엘리트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문명을 특징짓는 기술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비롯하여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사람들을 지배하는 능력을 크게 발전시켰다."(62-3)


철기시대 초기에 생산된 괴철bloom은 "청동보다 부드러웠지만, 쉽게 부서지고 날이 쉬 무뎌지며 녹이 잘 슬었다." 그럼에도 철은 "거의 모든 국가의 발굴하기 쉬운 지표면 근처에서 광석이 대량으로 발견된다"는 엄청난 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널리 쓰이게 되었다.(67) 말과 바퀴 달린 이동수단 그리고 "저렴한 철제 무기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유라시아 전역이 전쟁에 휩싸였다."(72) 철기시대에는 모든 건설사업이 관개시설이나 운하처럼 "수력과 관계된 것만은 아니었다. 제국은 통일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우수한 운송수단이 필요했다. 따라서 도로 건설은 부분적으로는 무역을 위해, 더 중요하게는 수도와 외곽 지방 사이의 빠른 통신과 원활한 군대 이동을 위해 필수적이었다."(78)


"8세기 초 등자가 유럽에 도달하였고 여기서 전쟁의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크족의 지도자인 샤를 마르텔은 무거운 창으로 무장한 기병(창기병)의 가능성을 깨달은 유럽 최초의 지도자였다. 기수가 창을 단단히 잡고 등자가 있는 말과 한 몸이 되어 달리면, 창 자체의 무게뿐 아니라 기수와 말의 무게까지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창기병의 창은 보병이 던진 창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105) 말 가슴걸이와 편자의 발명은 농업 혁명뿐만 아니라 운송 혁명도 불러왔다. "목수들은 회전이 가능한 앞 차축, 브레이크, 물추리막대whippletree(길모퉁이를 돌 때 두 말이 끄는 짐의 무게를 같게 해 주는 수평막대)를 갖춘 바퀴가 네 개인 마차를 만들었다. 12세기에는 이런 무거운 마차를 흔히 볼 수 있었다."(118)


대항해 시대는 세계의 중심을 유럽대륙 너머로 확장시켰다. "폭풍이 몰아치는 유럽의 대서양 쪽으로 항해하기 위해서 북유럽의 선박 기술자들은 카그cog라고 불리는, 커다란 사각돛과 한 개의 돛대를 가진 둥근 통 모양의 배를 만들었다."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박 제조업자들은 "갤리선과 카그선의 장점만을 결합하여 카라벨caravel이라고 부르는 배를 만들었는데, 이 배는 세계 어느 대양에서나 항해가 가능했다." 바스코 다 가마, 콜럼버스와 마젤란 모두 개량한 카라벨을 타고 항해에 나섰다. 카라벨의 더 큰 형태인 "무장 상선 캐럭carrack과 큰 돛을 단 상선 갤리언galleon은 다음 4세기 동안 유럽 항해의 버팀줄이 되었다."(131) 16세기에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옥수수와 카사바는 열대우림 지역에서도 잘 자라나 아프리카인의 생존력을 크게 높였다.


18세기 산업혁명은 본질적으로 네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는 분업화이다. 이는 공장·농장·건설 현장에서 하는 일을 일련의 단순화 작업으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여 생산·운송·통신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처음 두 가지의 결과물, 다시 말해 예전 방식으로 만든 제품보다 저렴해진 대량생산된 제품을 말한다. 그리고 네 번째는 화석 연료로부터 역학적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이다."(158) 증기기관은 "석탄·철·기계 제작의 다른 세 가지 산업과 발맞추어 진화하였다. 석탄은 물을 퍼내고, 기계를 돌리고, 마차를 끌고, 광산에서 승강기를 들어 올리는 엔진의 연료로 사용되었다." 그중에서도 "동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은 증기기관을 운송에 응용한 것이었다."(170-1)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이전 100년 동안 이룩한 기술의 승리였다. 1869년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이런 승리를 잘 보여주었다. 첫 번째 사건은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이었다. 이로써 유럽과 동남아시아가 연결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미국의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최초의 철도가 개통된 것이었다."(188) 적당량의 탄소를 함유하여 단단하면서도 휘어지는 강철은 철도와 해운을 전세계로 확산시켰다. 영국인 헨리 베세머는 강철 생산 과정을 개량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한 번에 수 톤의 강철을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전환로converter를 만들었다." 곧이어 한층 발전한 "지멘스-마르탱 평로법Siemens-Martin open-hearth furnace과 길크리스트-토머스법Gilchrist-Thomas process(1875)"이 등장한다.(189-90)


"20세기에 내연기관보다 인간의 삶과 환경에 더 큰 충격을 준 기술은 없었다. 화실이 실린더와 분리된 증기기관과 달리, 내연기관에서는 연료가 실린더 내부에서 연소되고 더 많은 에너지가 운동으로 바뀌었다. 이런 아이디어는 17세기부터 존재했지만 실제로 작동이 되는 내연기관을 처음 제작한 사람은 1859년 프랑스의 기술자 에티엔 르누아르였다." 다음 목표는 "내연기관을 (운송수단에 적용할 수 있도록) 가스관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1883년 독일의 기술자 카를 벤츠가 석유로부터 등유를 얻을 때 생기는 부산물인 휘발유를 기화시키는 법을 발견했다. 3년 후 벤츠는 다른 독일의 기술자 고트리프 다임러가 했듯이 3륜 마차에 휘발유 엔진을 달았다. 다임러와 벤츠는 곧 힘을 합쳐 최초의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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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사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7
로버트 C. 앨런 지음, 이강국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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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명된 대부분의 기술은 선진국에서 나타나는데 "그들은 더욱 더 비싸지는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자본을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저임금 국가에서는 이 신기술들이 비용 면에서 비효율적이었지만, "경제 도약을 위해 계획과 투자 조정을 사용하는 빅 푸시(Big Push)와 함께 이러한 기술을 급속히 도입"한 국가들은 서구와의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10-11) 경제발전을 통해 최저생계 수준을 높이는 일은 사회 후생에 여러가지 함의를 갖는다. 최저생계 수준으로 살아가는 사회는 건강 상태와 교육 수준이 낮다. 무엇보다 "최저생계 수준은 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경제적 동기를 제거한다. 하루의 노동으로부터 더 많은 산출을 얻어내야 하겠지만, 이 경우 노동이 너무 값싸서 기업들이 굳이 생산성을 높일 기계를 개발하거나 도입할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이다. 최저생계 수준은 빈곤의 덫이다."(23-4)


국부의 요인을 "경제학자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경제 발전 이론들에서 찾지만, 경제사가들은 역사적 변화의 동적인 과정에서 찾는다."(8) 제도, 문화, 지리는 언제나 "경제 성장의 배경에 숨은 요인이었던 반면, 기술 변화, 세계화, 경제 정책은 불균등 발전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게다가 산업혁명 자체가 콜럼버스, 마젤란을 비롯한 위대한 탐험가들의 항해와 함께 15세기 말에 시작된 세계화의 첫번째 단계의 결과였다. 따라서 대분기는 첫번째 세계화와 함께 시작된다."(29-30) 산업혁명 전야에 가장 크게 변화한 국가는 영국이다. "영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중은 (74퍼센트에서) 45퍼센트로 하락했다. 또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급속하게 도시화되었다." 1750년 영국 '농촌의 비농업 인구 비중'은 32퍼센트였다. "이들 대부분은 제조업에 종사했고 이들이 생산한 제품은 유럽을 가로질러 때로는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38)


도시화와 농촌 제조업의 성장은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켜 노동시장을 타이트하게 만들고 임금을 끌어올렸으며, 식품 생산을 위한 농업과 노동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켰다. 그 결과로 영국과 네덜란드 모두에서 농업혁명이 나타났다."(39) 또한 도시의 수요 증가로 에너지 혁명이 발생했다. 도시가 성장하고 나무 가격이 급등하자 대체 연료가 발전했는데, "네덜란드에서 대체 연료는 이탄(peat)이었고, 영국에서는 석탄(coal)이었다." 영국은 18세기에 "대규모 석탄 광산업을 지닌 유일한 나라였고, 석탄은 세계에서 가장 싼 에너지원을 영국에 제공했다." 식자율(literacy)의 상승 요인으로 흔히 종교개혁을 이야기하지만, 가톨릭 지역인 프랑스 북동부와 벨기에, 라인 강 계곡에서도 식자율이 상승한 현상을 감안하면, 이는 "고임금, 상업 경제의 등장 때문이었다." 고임금 경제는 식자율뿐만 아니라 계산력, 숙련의 형성을 촉진했다.(40-1)


문화·정치적 배경은 지역별 차이를 낳았다. "프랑스의 귀족은 세금에서 면제되었지만, 영국 의회는 1693년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토지세를 부과했다." 재산권과 관련해서도 "토지 수용이나 운하 건설, 토지를 가로지르는 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재산권 소유자들의 권리를 무효로 하는 영국 의회의 사법률[private acts, 특정 지역이나 특정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법률] 같은 것이 프랑스에는 없었다. 명예혁명이 현실에서 의미했던 바는 '1688년 이전에는 간헐적으로만 존재했던' 국가의 '독재적인 권력'이 이후로는 언제나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46-8) 도시화와 상업의 발전으로 "장인, 기능공, 상점주인, 농부의 아들 대부분과 노동자의 아들 일부가 몇 년 동안의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전례가 없을 만큼 대중들이 신문을 읽고 정치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는 톰 페인 같은 급진주의자가 <인간의 권리The Rights of Man>라는 책을 수십만 권 팔아서 유명해질 만큼 새로운 세계였다."(49)


"과학의 발견들은 유럽 전역에 알려졌고, 자연철학에 대한 상류층의 관심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화적 발전으로는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없다. 대신 산업혁명에 대한 설명은 영국의 독특한 임금과 가격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고임금과 값싼 에너지에 기초한 영국 경제에서는 기업들이 산업혁명을 일으킨 혁신적인 기술을 발명하고 사용하는 것이 이익이 되었다." 영국 기업들은 값싼 에너지와 자본을 사용하여 값비싼 노동을 절약했고, "더 많은 자본과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영국 노동자들은 더욱 생산적이 되었다."(49-50) 제니 방적기, 아크라이트 방적기, 뮬 방적기 등이 연이어 발명된 것은 과학적 발견에 빚진 것이 아니라, 노동이 비싸고 자본이 싼 곳에서 기계를 사용하면 이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엄청난 사고의 발전이 아니라 진부한 아이디어를 실행하기 위해 기계를 발명하고 개량하는 데 시간과 돈을 쏟아부은 결과였다.


"증기기관은 발명을 추동하는 경제적 인센티브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증기기관의 과학은 유럽 전체에 알려져 있었지만 연구개발은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영국에서 증기기관 개발에 자금 지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58) 증기력은 또한 "19세기의 교통을 혁명적으로 탈바꿈시켰다. 고압 증기기관을 발명한 모든 이들(퀴뇨, 트레비식, 에반스)은 지상의 운송 수단을 움직이는 데 증기기관을 사용했다. 그러나 포장되지 않은 도로 사정을 극복할 수 없었던 탓에 모두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 가지 해결책은 선로 위에 증기기관을 설치하는 것이었다."(61) 19세기 중반 "영국 노동생산성 상승의 절반은 증기기관 덕이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이득이 경제 성장이 100년 동안 지속된 중요한 원인이었다. 또다른 원인은 여러 산업 분야에 과학이 더 많이 적용되었다는 점이다."(63) 산업혁명기의 발명들은 이전 세기와 달리 계속되는 혁신의 물결을 촉발하면서 연달아 이루어졌다.


산업혁명의 서막은 영국이 열어젖혔지만 "유럽 대륙과 북아메리카는 1870년에서 1913년 사이에 산업 생산에서 영국을 추월했을 뿐 아니라 기술 역량에서도 명백하게 추월했다."(74) 선도국들은 저발전 국가들과 격차를 벌리면서 경쟁우위를 더욱 강화했고, 제국주의로 나아갔다. 산업혁명은 유럽 제조업의 생산력을 높였지만, 저임금 노동력이 풍부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자본을 활용한 기계화가 비용 면에서 효율적이지 않았다. "인도의 직물 산업 이야기는 19세기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의 이야기였다. 세계화와 결합된 편향적인 기술 변화가 유럽 국가들의 산업화를 촉진했고 동시에 아시아의 오랜 제조업 경제를 탈산업화했다."(98) 그러나 식민지 인도에서는 표준적인 개발 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다. "인도 인구의 겨우 1퍼센트만이 교육을 받았고, 성인 인구의 식자율은 6퍼센트였다. 관세는 낮았고 오로지 정부 수입을 위한 것이었다. 산업에 자금을 조달하는 은행 정책은 존재하지 않았다."(100)


북아메리카의 동부 해안 지역은 "큰 규모의 경제를 지원하기에 충분히 넓고 비옥했고, 대륙의 내륙 지역은 세인트로렌스, 모호크-허드슨, 미시시피 등의 강들을 따라 접근 가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활동 대부분은 멕시코 내륙과 안데스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강은 이 지역에서 해안까지 이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수출 비용이 높았다."(105) 라틴 아메리카의 "팜파 지역은 적어도 펜실베니아만큼 쇠고기와 밀을 잘 생산할 수 있었지만 식민지 시대에 아르헨티나는 유럽으로부터 너무 멀었다. 아르헨티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량의 가죽 수출뿐이었다. 칠레는 유럽으로부터 더욱 멀었다. 이 국가들의 경제사는 그들의 수출품이 유럽에서 경쟁할 수 있을 만큼 선박이 충분히 개선된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진정으로 시작되었다."(119) 멕시코가 정체된 원인은 20퍼센트를 차지하는 백인 인구와 비슷한 수준의 식자율이 말해주듯, "노동력의 전반적인 기술 부족" 때문이었다.(139)


오늘날 아프리카의 가난을 이해하려면 1500년의 사회경제구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지리, 인구 그리고 농업의 기원이다."(147) 얌 재배 농민들이 열대우림을 처음 개간할 무렵 등장한 말라리아와 수면병 같은 열대 질병들은 서아프리카의 인구 증가를 억제했다. "서아프리카는 토지가 풍부한 농업 지역이었으므로 이동 경작이 그러한 상황에 적절한 대응이었다." 따라서 마을에는 "토지 없는 노동자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고 누구든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지 않고 토지를 개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토지를 구입하거나 빌리기 위한 수요가 존재하지 않았다."(150-1) 아울러 인구 밀도가 낮고, 운송 비용이 높았기 때문에 대규모 시장을 떠받치는 전문 제조업이 발전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생산 체제를 지탱한 정치 체제는 토지를 배분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군대를 구성하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무리 또는 부족 연합이었다. "리더는 '족장'이라 불렸고 족장의 지위는 설득으로 유지되었다."(153)


이동 경작은 "위계적이지 않은 사회 조직을 만든 특징이 한 가지 있었다. 경작자들이 많은 여가시간을 즐겼다는 점이다." 게으를 권리와 권력의 매력은 노예제에 대한 욕망을 부추겼다. "문제는 토지가 상당 부분 점유되지 않은 환경에서는 노예들이 도망쳐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족장들은 "다른 지역의 노예들을 사냥하여 이러한 가능성을 차단했다. 사로잡힌 노예들은 토착 언어를 알지 못하거나 토착 생태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몰랐다. 물론 그 자녀들은 그 언어와 생존법을 알았다. 따라서 노예제는 한 세대 동안만 지속되었고, 노예의 아이들은 부족의 구성원으로 허락되었다. 노예제는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 아프리카에서 매우 흔했으며 많은 국가의 기초였다." 토지가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사적 재산권을 조직하기 위해 사용한 측량, 계산, 기하학, 쓰기 같은 법적, 문화적 제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153-5)


초기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은 "북아메리카의 선례와 같이 '직접 통치'를 통해 조직되었다. 이러한 통치하에서 비록 토착민은 흔히 선거권이 없었지만 식민 정부는 영토 전역의 정착민과 토착민에게 본국의 법을 적용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직접 통치가 '간접 통치'로 대체되었다. 모든 인종적 차이를 인식하게 하고 외국인에 대한 지원을 대가로 그들을 잘 따르는 지도자들에게만 권력과 부를 부여함으로써, 토착민이 외세의 점령에 덜 반대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식민지 국가는 본국의 법을 정착민과 도시에만 적용한다. 시골의 토착민에 대한 통제는 그들 종족의 '관습'을 적용하는 '족장'에게 맡겨졌다." 관습은 "식민주의의 목표에 맞게 재정립되었다. 노예제 같은 '야만적인' 관습은 (비록 현실에서는 계속되었지만) 제거되었고 부불노동을 요구하는 부족장의 권리 같은 쓸모 있는 관습은 유지되었다. 이런 식으로 강제노동이 식민지의 삶에서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다."(164-5)


"선진국들이 연 2퍼센트씩 성장한다고 했을 때, 후진국의 일인당 GDP가 연 4.3퍼센트씩 성장하면 두 세대(60년) 만에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 인구 증가율에 따라 다르지만 그러려면 총 GDP는 매년 6퍼센트 이상 성장해야 한다." 저개발 국가들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진국 경제의 모든 요소―제철소, 발전소, 자동차 공장, 도시 등―를 한꺼번에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빅푸시(Big Push) 산업화이다. 이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부른다. 수요와 공급이 있기 전에 모든 것을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공장에 앞서 제철소가 건설되어야 하며, 제품에 대한 유효수요가 있기 전에 자동차 공장을 건설해야 한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이 성공하려면 계획기구가 경제 활동들을 조정하고 그 활동들이 반드시 실행된다고 보장해야 한다. 계획기구의 역할은 서로 많이 달랐지만 20세기에 빈곤에서 탈출한 대규모 경제들은 이러한 과업에 성공했다."(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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