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 푸른역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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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많은 일본 사람들이 청일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치른 전쟁이었다고 배웠을 것이다. 청일전쟁의 목적을 나라 안팎에 밝힌 선전조칙(宣戰詔勅)에도 "조선은 (일본)제국이 처음에 가르치고 이끌어 열국의 대열에 들게 만든 독립된 나라다. 그런데도 청나라는 조선을 속방이라고 칭하여 음으로 양으로 그 내정에 간섭하니·····제국이 솔선해서 제 독립국의 대열에 들게 한 '조선의 지위'와 '그것을 표시하는 조약'을 업신여기는 청조 중국의 잘못된 욕망 때문에 일본은 부득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청일전쟁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여기는 일본과, '속국'이라고 여기는 청나라가 벌인 전쟁으로, 조선을 '속국'이라고 한 청조 중국은 '야만국'이며 일본은 '문명국'이다. 청일전쟁은 '야만'과 '문명'의 전쟁이었다고 곧 떠들썩하게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처음 행사한 무력은 다름아닌 그 독립을 위해 싸운다던 조선의 왕궁을 향해서였다."(59-60)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자유민권운동이 쇠퇴하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적인 강경론이 우세해지고 있었다. 청일전쟁 발발 10년 전인 1884년 일본의 후원을 받은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서울에 주둔한 중국 군대에게 격파되어 실패로 끝났고, 김옥균 등은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중국에 대한 적대감과 일본의 국권확장 주장이 국민들 사이에서도 급속히 퍼졌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론(脫亞論)'을 외친 것도 갑신정변 다음해의 일이다. 더구나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894년 3월 김옥균이 상해에서 조선의 자객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청에 대한 일본의 적대감정은 한층 높아갔다. 따라서 조선의 농민반란을 이유로 일본군이 출병하자 여론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신문도 적극적으로 전쟁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은 구미 열강의 (간섭) 움직임이었다."(61)


"그래서 조선주재 일본공사 오토리 케이스케가 생각해 낸 방법이, 청한 종속문제를 끄집어 낼 것이 아니라 조선 정부에게 터무니없이 무리한 난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1876년 조선 정부가 일본과 맺은 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서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로서·····"라고 약속한 것을 들어, 지금 청조 중국의 군대가 "속방을 보호한다"라는 이유로 주둔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다. 조선은 청국의 속국인가 독립국인가, 독립국이라면 청국군을 국외로 몰아내야 하며, 조선에 그럴 힘이 없다면 일본군이 대신해서 몰아낼 것이므로 조선 정부는 일본에게 '청군 구축'을 의뢰하는 공식 문서를 보내라며 정부를 압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미 7월 12일 청조 중국에 대한 영국의 조정 공작이 실패하자 전쟁을 시작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19일 대본영(大本營)도 조선에 있는 일본군에게 "청국군이 늘어나면 스스로 결단을 내리도록 하라"며 개전을 허가하였다. 조선왕궁점령은 이렇게 해서 계획되었다."(62-3)


'공간전사'인 《메이지 이십칠팔년 일청전사》 제1권은 조선 국왕이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충돌로 서로 사격하게 되어 국왕에게 걱정을 끼친 것을 사죄하고, '국왕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보도는 사건 직후부터 일본은 물론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일청전사》 초안에 분명히 나타난 바와 같이 국왕은 일본군에게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국왕을 지키고 있었던 이들은 조선 병사들이었다. 더욱이 이 위급한 때에 국왕측은 '외무독판이 지금 오토리 공사에게 가서 담판 중이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문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며 일본병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야마구치 대대장은 "문안에 있는 조선 병사의 무기를 인도하면 응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지만, 국왕측이 듣지 않자 '칼을 빼들고 군대를 지휘하고 질타하여 일본병을 문안으로 돌입'시키려고 했던 것이다."(76-7)


"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한 7월 23일 오전 11시에 국왕의 부친인 대원군 이하응이 일본군 보병 제11연대 제6중대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왕궁으로 들어왔다. 일본측은 왕비인 민비 일족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대원군을 추대하여 민씨 일족을 정권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일본 공사관의 스기무라 후카시 서기관은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는 대원군에게 "일본 정부의 이번 거사는 실로 의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일이 성사된 다음 조선국의 땅을 한 치도 빼앗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을 전했다. 어떻게 하든지 대원군을 끌어내서 민씨 일족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국왕을 일본 지배하에 두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왕궁점령의 최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마지못해 요청에 응하여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왕궁으로 들어간 것이 오전 11시였다. 이어서 오토리 공사도 궁전으로 들어와 조선 정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83-4)


"조선 출병 이후 군사 관련 보도는 도쿄 발은 물론, 현지 보도도 일본 정부와 군의 엄중한 관리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일본 국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렇게 걸러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언론 기관은 신문지조례를 비롯하여 여러 법률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 파병 직후부터는 군사에 관한 기사 게재에 대한 내무성 경보국의 '주의 구두전달'(6월 5일)이 있었고, 또 육군성 제9호·해군성령 제3호(모두 6월 7일) 등에 의해 엄중하게 통제되었다. 〈오사카아사히 신문〉의 기사 가운데 "이상 전보 세 개 중 23일 발은 모두 그날 접수했지만 즉각 독자에게 보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든가,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의 "위 확실한 보도는 육군성 검열필"이라는 기록은 그 같은 통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 내무성과 육군성·해군성 등은 단순한 통제뿐 아니라 '꾸민 이야기'를 흘려 정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사실인 듯이 보도한 7월 25일자 기사는 그 같은 정보 조작의 한 예다."(128-9)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에서는 "미국과 싸운 일은 잘못되었지만, 청일·러일전쟁까지는 좋았다"라고 하는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도, 그 주요한 책임은 일본의 군부, 특히 육군에 있으며, 그 군인들이 "위대했던 메이지 시대 선배들의 작업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쪽에는 군도(軍刀)를 차고 위압을 가하는 거친 군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국가의 앞날을 우려하여 고뇌하는 자유롭고 합리주의적인 시민들이 있는 듯한 역사 인식, 그리고 양심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힘이 없는 후자의 사람들이 군인 집단에 맞서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굴복하는 가운데 전쟁을 향한 길이 준비되고 있었다는 역사 인식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단지 천황과 그의 측근 그리고 일본의 보수 정치가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들조차 이와 비슷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현실에서 자주 경험한다."(161-2)


"오늘날까지도 "일본은 청일·러일전쟁 무렵까지는 국제법을 잘 지켰다"는 목소리는 일본에서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한층 목청을 돋우기까지 하고 있다. 시바 료타로가 죽고 나서, ('좋은 시대 메이지'로 대표되는) '시바 사관'을 찬미하는 소리가 한층 더 높아진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다." "시바는 정체와 부패로 얼룩진 조선 왕조와 비교하여 일본의 '메이지를 찬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시바가 죽은 후 일본의 저널리즘이 조잡하고도 일방적으로 '시바 찬가'를 선전할 때, '메이지 찬미'와 극에 위치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 사실 그리고 그에 저항했던 조선과 중국의 민족적 각성의 역사는 일본인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 현대사상의 동향은 청일·러일전쟁 승리라는 그늘 뒤에서 일본이 조선과 중국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그리고 조선과 중국에서는 이러한 침략과 패배에 대항하여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애써 감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167-8)


청일전쟁의 선전조칙(詔勅)이 나온 지 채 열흘도 되기 전에 육해군 참모회의에서 남방 작전 구상이 논의된다. "그곳에는 '동아의 평화를 교란할 염려가 있는 영국'을 견제하려면 영국의 '화심을 안고 있는 홍콩'을 제압할 수 있는 팽호도의 영유가 꼭 필요하고, 팽호도의 안전을 위해서는 '타이완을 병유'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다시 마음껏 '구주 열국'과 경쟁하여 '동아시아에서 자웅을 다투기' 위해, 기회를 틈타 필리핀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상까지 있었다. 필리핀 점령까지 구상한 이 같은 논의가 참모들 사이에서 오간 것으로 당시 정부의 대외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청일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일본군의 중추에서 이러한 논의가 거듭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무적 황군의 신화'가 생기고, 비합리적인 전략으로 내달린 태평양전쟁으로의 길이 청일·러일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172-3)


"'무적 황군의 신화', 비합리적인 전략 포로의 학대 등 태평양전쟁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타락한 일본군의 모습을 보며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청일·러일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일본의 침략을 받아 전장이 됐던 조선과 중국의 입장을 고려하는 관점이 거의 무(無)에 가깝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군과 일본 정부 지도자는 물론 저널리즘과 일반 국민여론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조선인과 중국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일본 정부와 일본군은 그들의 저항에 어떻게 반응했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한 고려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점이 훗날 무모한 침략과 조선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민에 대한 학대로 이어진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당했던 조선으로서는 그 나라 군대가 다시 몰려와 나라의 상징인 왕궁을 점령했으니, 조선의 관야에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는가. 조선 민족의 눈으로 그 일을 목격한다면 사건의 중대성을 자연히 알 수 있을 터이다."(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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