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국 지구를 위한 답을 찾을 것이다 - 지구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가장 쉬운 기후 수업
김백민 지음 / 블랙피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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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지금보다 10도 더 뜨거운 세상이 있었다


"지각이 형성된 후 바닷속에서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한 대륙들이 약 27억 년 전 한곳으로 뭉치면서 지구에 거대한 단일 대륙이 출현했습니다. 지질학자들은 이 대륙을 케놀랜드Kenorland라고 명명했습니다." "1972년 칼 세이건과 그의 동료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어두운 젊은 태양의 역설Faint Young Sun Paradox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그 당시 태양 빛의 세기는 지금보다 20%나 약했기 때문에 지구 온도는 매우 낮았고, 바다가 아닌 얼음으로 뒤덮여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질학적 증거로 보았을 때 분명 27억 년 전 지구는 넓디넓은 바다가 출렁거리는 따뜻한 행성이었음이 분명했습니다. 이 역설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과학자들은 온실효과가 지구 온도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약한 태양 빛에서도 지구가 높은 온도를 유지하는 방법은 높은 온실효과를 가정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22-4)


"바다가 존재하는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기 중 대부분의 이산화탄소는 비를 통해 바다에 흡수된 다음 탄산칼슘이나 석회암 형태로 암석에 저장됩니다. 지각판의 움직임은 그 암석을 지구 내부로 끌어들이고, 화산 폭발을 통해 다시 대기로 되돌아가는 순환이 이루어집니다. 이를 지질학적 시간 규모에서의 탄소 순환으로 명명했습니다." "화산이 특히 활동적일 때 이산화탄소는 대기에 축적되어 온실효과가 극대화됩니다. 그러나 온실효과가 강해져 온도가 너무 많이 오르면 지구의 온도조절기가 작동합니다. 뜨거워진 바다에서 증발한 수증기가 많은 비가 되어 내리고, 이산화탄소를 머금어 산성화된 비는 바위를 마모시키며 바다로 흘러 들어가 탄산칼슘 재료로 쓰입니다. 조개껍질 혹은 석회암 및 기타 암석의 형태로 탄소를 지각에 가두어 대기를 다시 냉각시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수십억 년 동안 자연이 조절해온 대기 중 온실기체 농도를 인간이 화석연료를 태워 스스로 조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39-41)


"포유류의 시대에도 급격한 기후변화의 위협은 늘 존재했습니다. 가장 극적인 이벤트는 지금으로부터 5,500만 년 전 지구 평균기온이 갑자기 5~6℃ 상승한 것이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 평균기온 상승 폭이 현재까지 약 1℃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정말 엄청난 기온 상승이죠. 과학자들은 이 시기를 '팔레오세-에오세 최대 온난기'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Paleocene-Eocene Thermal Maximum, 줄여서 'PETM'이라고 합니다." "PETM 시기에 이루어진 5~6℃ 온도 상승은 약 2만 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지질학적 시간 규모로 보면 매우 짧고 인간의 수명과 비교하면 매우 긴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지구 온도가 약 1℃ 상승하는 데는 200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PETM 때와 비교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인류가 온도 상승의 주범이라면 이 놀라운 메탄 폭탄 이벤트에 비해 무려 20배나 빨리 지구를 덥히고 있는 것입니다."(47-9)


# PETM 온난기 : 메탄 얼음덩어리인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대규모로 폭발하면서 발생한 급격한 온도 상승기


제2장 빙하시대의 수상한 리듬


"인도의 여름은 매우 후덥지근합니다. 여름이 되면 인접한 인도양에서 따뜻하고 매우 습한 공기가 바람을 타고 인도 전역을 덮치기 때문이지요. 바로 '인도 몬순'이라는 현상입니다. 이 습한 공기 덩어리는 중국까지 넘어가지 못하고 히말라야라는 거대한 장벽을 만나 급상승합니다. 갑작스럽게 상승한 공기는 엄청난 양의 비를 뿌립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수증기를 산 사면에 비로 뿌리고 나서야 고온 건조한 공기 덩어리가 되어 산을 넘습니다. 루디먼은 바로 이 거대한 산맥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거대한 산 사면을 타고 올라가는 공기 덩어리가 구름을 만들어내고 엄청난 양의 비를 뿌릴 수 있다는 데 착안했지요. 이 비는 물에 작 녹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산성비를 산 사면에 뿌렸고, 조산운동으로 잘게 부서진 암석들은 대량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굳혀나갔습니다. 이에 따라 대기 중 이산화탄소는 점점 감소하고, 지구는 서서히 식어갔습니다."(60-2)


# 윌리엄 루디먼의 '인도-유라시아 충돌 가설'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급감시킨 대규모 충돌 외에 지구 운도를 떨어뜨린 공범이 있습니다. 바로 얼음입니다. 온도가 내려가 생긴 얼음은 또 다른 기온 하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일단 기온이 떨어지고 지구에 얼음이 생기면서 새하얀 얼음이 전보다 훨씬 많은 태양 빛을 반사했고, 이는 지구가 흡수하는 햇빛 양을 현격히 줄여 지구 온도 하강을 부추겼습니다. 온도가 떨어지면 얼음이 더 생기고, 얼음이 생기면 다시 햇빛을 더 반사하고 온도는 떨어집니다. 이렇게 물고 물리면서 반복되어 급기야 햇빛이 약한 극지방에까지 거대한 얼음이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렇게 물고 물리며 처음에는 작았던 변화가 증폭되는 것을 '양의 피드백 작용'이라고 부릅니다. 이 얼음 반사와 관련된 증폭작용이 온도 하강을 부추겨 오늘날 지구 온도인 약 14℃보다 더 차가워졌습니다. 그 후로도 지구는 줄곧 추워졌고 약 260만 년 전 신생대 4기에 매우 추운 시기인 빙하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62-3)


# 빙하기 생성 과정 : 천체운동의 변화(이심률, 기울기, 세차운동) → 북반구 고위도 지역의 일사량 감소 → 얼음 생성 → 지표면의 햇빛 반사율 증가 → 해빙 확장으로 바다 내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감소) → 바닷물 온도 하락 → 수증기 증발 감소→ 온실효과 감소


"급격한 온도 변화는 일사량의 변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천체의 움직임이 너무 서서히, 그리고 부드럽게 변화해 왔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월리스 S. 브로커는 '그레이트 오션 컨베이어'라는 말로 세계 해양 순환의 장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간단히 말해 남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흐르는 따뜻하고 얕은 물의 광대한 강이 아프리카를 둥글게 두르고 대서양을 통해 북쪽으로 향합니다. 북극의 차가운 물에 닿으면 물이 식어 북유럽 근처에서 가라앉습니다. 거기에서 심연을 통과해 태평양으로 돌아와 따뜻해지고, 상승하고, 사이클을 다시 시작합니다. 브로커는 이 거대한 바닷속 흐름을 타고 방대한 양의 열이 이동하면서 지구 기후를 조절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혈액이 몸 여기저기를 순환하듯 지구 곳곳을 흐르는 거대한 강과 같은 흐름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흐름이 고장 나면 순환이 되지 않아 적도 지역은 더 뜨거워지고 극 지역은 더욱 추워지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95-6)


제3장 인류, 지구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길고 긴 지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락하고 안정된 기후를 설명하는 용어로 골디락스보다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10억 년 전 온 세상은 얼음에 덮여 태양 에너지를 모두 반사했으며, 6,500만 년 전에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지금보다 6~7배나 더 많았습니다. 이때는 극지방에도 열대우림이 펼쳐졌으며, 대기 중 지나치게 많은 이산화탄소를 식물이 과잉 섭취하는 바람에 나무의 키가 커져 공룡도 덩달아 덩치가 커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좀 더 가까운 과거를 살펴보면 약 10만 년 동안 인류는 수십 번의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쳤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골디락스의 시기는 지질학적으로 홀로세라고 불립니다. 사실 인류는 약 1만 년 전에 끝난 마지막 빙하기 이후 50억 년 지구 역사를 비추어 볼 때 더없이 포근하고 안정적인 기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4대 문명이 출현한 시기는 마지막 빙하기 이후 해수면 상승이 멈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108-9)


# 홀로세Holocene : 약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시대로서, 충적세 또는 현세現世라고도 부른다.


"대가속 그래프는 인류가 초래한 여러가지 현상이 급격한 기후변화와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는 지구온난화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을 바로 인구-질소비료 증폭작용이 불러온 인구수의 급격한 증가로 봅니다. 개체 수 증가에 따른 먹잇감이나 식량 부족 현상은 지극히 비선형적인 지구 생태계가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고유의 안정화 작용입니다. 초래된 변화 혹은 충격에 대처해 다시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안정화 작용이 없으면 생태계는 유지될 수 없고, 역으로 말하면 그런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태계가 유지됩니다. 지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혁명을 기반으로 처음 식량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시대, 그리고 핵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고 평화가 보장된 상태는 인구수의 큰 증가를 불러일으켰고, 촉발된 인구-질소비료 증폭작용은 자연이 컨트롤할 수 없는 양상으로 흘러갔습니다. 대가속 그래프에 숨은 의미입니다."(126)


# 대가속 그래프 : 윌 스테판이 동료들과 함께 인류세에 벌어진 인류 문명의 다양한 양상을 시각화한 것으로, 인간 활동의 자취가 1950년을 전후해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의 온도는 전반적으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와 함께 꾸준히 상승하며 특히 1970년대부터 기온 상승이 두드러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1960년대부터 상승 폭이 확대된 이산화탄소 커브보다 10년 정도 뒤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기온 커브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밋밋한 이산화탄소 커브와는 달리 변동성이 상당히 크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온실기체로 온실효과가 일어났을 때 남은 에너지가 지구 표면 온도를 덥히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변덕스러운 바다는 온실효과로 남아도는 에너지를 수심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대기로 다시 뱉어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지구의 표면 온도는 춤을 추듯 출렁거리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변덕은 지구의 온도가 이산화탄소 증가에 반응해 일정하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큰 상승 이후 정체기를 거치고, 다시 규모 큰 상승기를 거치는 계단식 상승에 가까운 양상으로 온도 상승이 일어나게 만듭니다."(128-9)


제4장 우리가 정말 지구온난화의 범인일까?


"오늘날 인류는 매년 기록을 경신하며 끝없이 증가하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수치에 매우 민감하지만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당시 과학자들은 인류가 이산화탄소를 다량 배출한다 하더라도 물에 매우 잘 녹는 기체인 만큼 거대한 바다가 이를 대부분 흡수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구온난화를 깊이 연구하던 과학자 로저 르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바다가 실제로 흡수하는 이산화탄소 양이 생각보다 적다는 걸 경고하는 연구 결과를 1957년에 발표했습니다." "오늘날 정밀한 측정으로 바다의 순흡수량을 구해본 결과 인류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양의 4분의 1 정도만 바다에 흡수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르벨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입증하기 위해 제자 킬링에게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관측을 맡겼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지구과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커브인 이산화탄소의 궤적 '킬링 곡선'이 탄생했습니다."(151-3)


"킬링 곡선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산화탄소 커브에 기이한 톱니 같은 모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식물의 여름철 광합성을 통한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식물이 많은 북반구와 적은 남반구에서 큰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마치 지구가 숨을 쉬듯 이산화탄소 농도가 낮아지고 높아지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매년 이산화탄소 농도가 전년보다 조금씩 높아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결과에 자극받은 기후학자들은 지구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산업혁명 이전 280ppm이던 대기 중 이산화탄소는 어느새 2013년 400ppm을 훌쩍 돌파하고 2021년 2월 현재 416ppm을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에 의한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얼마나 될까요? 무려 수백억 톤에 달합니다. 1990년대 약 250억 톤이던 이산화탄소 연간 배출량이 어느새 2019년을 기준으로 390억 톤을 넘어서고 있습니다."(153-7)


"모든 기후변화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즉 기후는 왜 변하는 것일까요? 지구로 들어오는 에너지와 우주로 빠져나가는 에너지가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웬만헤서는 이 두 값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자연의 원리에 따르면 지구는 흡수하는 태양에너지만큼 스스로 우주 공간으로 복사에너지를 방출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복사평형의 원리'라고 합니다." "슈테판-볼츠만 법칙에 따라 지구의 온도가 태양으로부터 받는 에너지에 비해 너무 높으면 에너지를 많이 내보내 지구의 온도를 끌어내리고, 지구의 온도가 낮으면 에너지를 적게 내보내 온도를 끌어올려 균형 상태를 향해갑니다. 따라서 받아들이는 태양에너지와 지구가 방출하는 에너지 차이는 시간에 따라 점점 줄어들다가 지구가 방출하는 에너지가 태양에서 받는 에너지와 같아지면 아무 변화가 없는 균형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이 바로 지구가 스스로 에너지 균형 상태를 찾아가는 복사평형의 원리입니다."(174-6)


"이 조건에서 만약 대기 중에 온실기체가 갑자기 추가된다면 지구의 온도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앞의 상황과는 달리 온실기체의 존재로 인해 지구가 방출하는 에너지의 일부를 온실기체가 흡수합니다. 흡수된 에너지 중 일부는 온실기체가 대기권 밖으로 다시 쏘아 내보내지만 일부는 지구 표면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일단 한번 온실기체에 흡수된 지구복사에너지가 다시 온실기체의 의해 방출될 때는 온실기체 온도의 4제곱에 비례하는 양이 방출됩니다." "이렇게 잉여 에너지가 생겨 어딘가의 온도가 상승해야 하는데 마침 온실기체가 지구를 향해 일부 에너지를 뿌려주고 있으니 지구 표면 온도가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다시 지구 표면은 증가된 온도의 4제곱에 비례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우주 공간으로 방출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에너지를 대기권으로 방출하고 시간이 지나 지표 온도가 충분히 상승하면 결국 또 다시 들어오는 태양에너지와 정확하게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176-7)


"중요한 것은 틀어졌던 균형이 맞추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지구에는 바다 같은 열용량이 매우 큰 물탱크가 존재하기 때문에 온도 상승이 매우 더딥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1ppm의 온실기체를 추가했다고 해서 온도 반응이 즉각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온도가 상승하게 된다는 것이죠. 반대로 갑자기 내일부터 당장 온실기체를 인류가 배출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배출된 온실기체가 초래하는 에너지 불균형이 해소되기까지 수십 년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지구 온도는 계속 상승하겠죠." "다만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 에너지를 흡수하는 효율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지구를 가열하는 데 쓰이는(불균형을 초래하는) 에너지의 증가세는 둔화됩니다. log커브의 특징입니다. 또 이산화탄소가 2배씩 증가할 때는 항상 동일한 3.7w/m²의 에너지 불균형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77-84)


"이제 이 에너지를 지구의 각 부분이 얼마나 흡수하는지 파악하고, 각 부분의 열용량이 얼마나 큰지 확인한 다음, 열용량에 맞게 온도 상승을 계산해보면 이산화탄소가 2배씩 증가할 때마다 지구 온도는 약 1℃ 상승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계산은 온실효과가 발생해도 온도만 오를 뿐 빙하가 녹거나 구름이 늘어나는 등 온도 상승이 지구에 미치는 방향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들을 고려하면 어떻게 될까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마치 음원에서 나온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증폭되듯 지구는 다른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온실효과를 증폭시키는 앰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구온난화에서 직접적인 온실효과의 역할은 앰프와 스피커 없이 전자 기타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비록 직접적인 온실효과가 다소 약하더라도 일단 가열되기 시작해서 지구의 증폭작용이 이어지면 더 큰 폭의 온도 상승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185-6)


제5장 하키 스틱과 믿지 못하는 사람들


"1998년, 유엔은 기후변화를 연구하기 위해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인 IPCC(International Pannel on Climate Change)를 설립했습니다." "1차 보고서에서 IPCC는 과거 1,000년간 지구 온도 변화를 요약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그래프에서는 지금보다 더 따뜻한 시기가 과거 1,000년 사이에 존재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중세(900~1400년)에 중세 온난기로 불리는 매우 따뜻한 시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진실은 무엇일까요? 중세 온난기는 전 지구적 현상이 아니라 유럽 지역에만 나타나는 현상인 것으로 결론이 나고 있습니다." "전 지구 평균온도는 체온과 비슷합니다. 에너지 균형의 지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지구 온도, 즉 전 지구 평균온도입니다. 지역적으로 아무리 추운 곳이 있다고 해도 만약 다른 지역에서 이를 상쇄하는 고온 현상이 나타난다면 지구 온도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에너지가 균형을 맞추고 있으니까요."(206-10)


"1990년대 학계에서는 '인간 활동이 1950년대 이후 지구온난화의 원인'이라는 주장과 '자연적인 변동이 기후를 지배하며 1950년대 이후의 온도 상승도 자연 변동의 일부'라는 논리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1998년에 공동 저자인 레이먼드 브레들리와 말콤 휴 등과 함께 수명이 매우 긴 소나무의 나이테를 비롯해 홍해의 산호초, 빙핵 등 전 세계 곳곳의 천연 온도계를 분석해 거기서 발견한 기후 패턴을 분석했습니다. 그들은 우선 지난 600년 동안의 지구 온도를 복원하는 데 성공해 〈네이처〉에 관련 논문을 실었습니다. 1999년에 이들은 나이테 자료에 산호, 빙하 코어 등의 자료를 추가해 지난 1,000년 동안의 지구 온도를 복원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완성된 그래프는 1,000년 전 높았던 기온이 조금씩 하강하다가 100년 전부터 치솟는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즉 이 그래프에서는 중세 온난기가 지금보다 결코 따뜻하지 않았음이 드러난 것입니다."(213-4)


# 하키 스틱 커브


"구름에는 하층운(낮은 구름)과 상층운(높은 구름)이 있습니다. 하층운은 햇빛을 반사하는 데 특화된 능력이 있는 반면, 온실효과의 효율은 매우 떨어집니다." "하층운은 온도가 지면과 비슷하기 때문에 구름에 흡수되어 재방출될 때와 지면에서 바로 밖으로 빠져나갈 때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대신 햇빛을 잘 반사하기 때문에 지구가 흡수하는 에너지 양을 감소시킵니다. 따라서 하층운이 많을수록 햇빛 반사로 지구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상층운은 어떨까요? 반대 특징을 지닙니다. 상층운은 좋은 담요와 같은 효과를 발휘합니다. 온도가 낮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에너지를 상층운이 일단 흡수하고 재방출할 때 자신의 온도로 플랑크 복사를 하는데, 이때 온도가 지면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더 적은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지구가 방출하는 에너지 중 많은 양을 대기 중에 가두는 역할을 하죠. 정리하면 하층운은 온도 상승 방해, 상층운은 온도 상승 증폭의 역할을 합니다."(238-9)


"리처드 린젠은 기상학계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뛰어난 과학자입니다. 그는 물리학과 응용수학을 전공한 자신의 장점을 살려 대기과학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거의 모든 현상의 수학적 모델을 개발하고 가다듬는 데 학문적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는 2001년 홍채 이론을 도입하면서 기후 민감도, 즉 이산화탄소가 산업혁명 이후 2배가 되더라도 온도 상승이 1℃ 정도로 제한적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기후변화 예측에 있어 불확실성을 초래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나 이해가 아직 많이 부족한 이슈가 바로 구름에 대한 것입니다. 미래 지구 온도의 상승 폭은 구름이 좌지우지한다고 봐도 된다는 뜻입니다. 지구가 까칠한지 아니면 유순한지 결정하는 핵심이 온난화에 따라 상층운이 많이 생길지 하층운이 많이 생길지에 달려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린젠은 바로 이 부분에서 주류 과학자들과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237-40)


# 홍채 이론 :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오면 눈의 동공이 작아져 빛 흡수를 줄여주는 것처럼, 자연도 지구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받아 온도가 상승하면 권운(상층운)의 양을 줄여 더 많은 에너지가 구름에 흡수되지 않고 바로 우주로 나가게 해준다는 주장


제6장 미래 예측


"카야 항등식은 일본의 경제학자 카야 요이치가 만들었습니다. 카야 항등식은 온실기체가 증가하는 요인을 분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카야 항등식의 의미를 자세히 풀어쓰면 전 지구 온실기체 배출량 증가는 1) 얼마나 인구가 증가했는지 2)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잘 살게 되었는지 3) 돈 1달러를 버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는지 4) 에너지 생산에 얼마나 온실기체를 배출해야 했는지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네 요소 중 지구온나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인구수가 조절될까요? GDP가 조절될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온실기체를 감축하기 위해 자국 인구수와 경제성장을 통제하는 것에 대해 비 OECD 국가들은 절대 찬성하지 않겠지요. 따라서 세 번째와 네 번째 요소, 즉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노력이 국제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유일한 해결 방안일 것입니다."(257-60)


"여러분도 〈기후변화, 2℃에서 막아내자〉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지구 온도가 산업혁명기를 기준으로 2℃ 이상 상승하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한 기상재해가 더 자주 발생한다는 문구입니다. 어떻게 정확하게 콕 집어서 2℃를 얘기했을까요?" "사실 파리기후협약에서 채택한 2℃라는 목표치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수치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 '도대체 왜 2℃인가?'라는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최초로 어디에서 2℃라는 말이 언급되었는지 조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밝혀낸 사실은 2℃는 특정 연구 논문에서 언급한 것이 아니라 예일 대학교 경제학자 윌리엄 노드하우스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냈습니다. 그는 1975년 〈우리가 이산화탄소를 제어할 수 있을까?〉라는 논문에서 산업혁명 이후 이산화탄소 양이 2배가 되었을 때 예상되는 온도가 지켜내야 할 마지노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온도가 바로 2도였습니다."(279-80)


"2018년 윌 슈테판이 주도하고 많은 과학자들이 참여해 작성한 논문 〈인류세의 지구 궤적〉에서 그들은 하나의 티핑 포인트가 아닌 여러 개의 기후 티핑 포인트가 지구 시스템의 여러 요소에 산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각각은 넘지 말아야 할 임계값이 존재하고, 이를 넘으면 마치 폭포처럼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다른 티핑 포인트를 자극해 임계값을 넘도록 부추긴다는 '티핑 폭포'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한창 녹고 있는 북극의 여름철 얼음이나 그린란드 빙하는 1~3℃에 티핑 포인트가 존재해 이 요소에 대해서는 티핑 포인트에 거의 다다랐으며, 이들은 다시 온도 상승을 부추겨 3~5℃의 티핑 포인트, 예를 들면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을 녹여 강력한 온실효과를 지닌 메탄가스를 대량으로 방출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촉발한다고 본 것입니다. 티핑 폭포 개념은 2℃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282)


제7장 화석연료 없이 살아남기


"지금까지 인류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고려하지 않았던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화석연료의 고갈입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자신의 저서 《수소 혁명》에서 2010년과 2020년 사이 원유 생산량은 정점을 찍고 감소하기 시작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점을 찍은 원유 생산량은 가파르게 하락하고 2070년경에는 원유를 생산해봤자 이윤을 남기지 못할 정도로 생산 효율이 떨어져 사실상 석유 시대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세계적인 석유 회사 브리티시 페트롤리엄과 셸 등은 2020년 석유 생산의 정점을 지나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지금처럼 화석연료에 의존한다면 앞으로 20~30년 뒤에는 심각한 글로벌 에너지 위기가 닥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입니다. 더 중요한 점은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은 더 이상 캐낼 석탄이 없을 때 혹은 전 세계 유정에 석유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종말은 석유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295-6)


"그렇다면 무조건 태양광과 풍력발전기 숫자만 늘려 에너지를 많이 생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태양광과 풍력으로 생산한 전기는 그 즉시 사용하거나 미래를 위해 저장해두거나 아니면 전력망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화력이나 원자력보다 기교와 순발력은 뛰어나나 기복이 심하고 체력이 매우 약한 선수라고나 할까요?" "더욱 심각한 문제는 (태양광 개발로) 임야가 토지로 바뀌는 순간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던 땅이 이산화탄소를 뱉어내는 땅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태양광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산림을 훼손할수록 우리 땅이 지닌 탄소 흡수 능력을 떨어뜨려 탄소 제로 사회로 진입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꼭 알아야 합니다." "다만 태양광과 풍력의 경우, 한번 보급하면 30년 정도를 쓰는데 놀라운 학습곡선 덕분에 설비 가격은 해가 갈수록 저렴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꼭 필요한 양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경제성 측면에서도 중요합니다."(301-5)


"국가와 기업이 할 수 있는 거창한 일이 아닌, 개인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방법은 없을까요?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개인이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육식, 특히 소고기 섭취를 줄이는 일입니다. 전 세계 탄소 배출량에서 식량 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나 됩니다. 주로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사육할 때 필요한 농지나 숲을 개간하면서 나오는 이산화탄소,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료 생산, 쉴 새 없이 되새김질하며 메탄을 뿜어대는 소의 트림과 방귀, 농업과 축산에 관련된 교통 등을 모두 포함한 비율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가축 사육에서 발생하는 온실기체가 모든 교통수단, 즉 자동차, 배, 비행기 등이 배출하는 양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가축이 이산화탄소보다 28배나 강한 온실효과를 유발하는 메탄을 뿜어내기 때문입니다." "또 축산업은 탄소를 배출할 뿐 아니라 농지를 파괴하지요. 아마존 열대우림이 감소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축산업입니다."(324-5)


"소고기를 덜 먹는 일이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옵션이라면, 새로운 시대에 개인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개인은 항상 소비자로서 국가의 산업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린 뉴딜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개인은 그린 뉴딜이 성공하고 선순환의 생태계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현명한 소비를 통해 기업을 자극해야 합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화석연료 시대의 끝자락으로 접어들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인류가 기후위기 대응에 힘을 기울이지 않고 이대로 살아간다면 가까운 미래 인류의 가장 큰 고민은 기후위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화석연료 고갈과 심각한 에너지 위기가 닥칠 수도 있으니까요. 인류의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해 기후와 에너지는 하나의 이슈가 되어버렸습니다." "기후위기 극복을 고민하는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 에너지 대전환 방법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열어놓고 고민해봐야 합니다."(3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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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平成)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요시미 슌야 지음, 서의동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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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헤이세이'라는 실패─'잃어버린 30년'이란 무엇인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는 17세기 초 유럽에서 최대최강을 목표로 군함 '바사vasa호'의 건조를 명했다. 1628년 8월 10일 마침내 완공된 바사호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항해를 시작했지만 얼마 안가 선체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서 침몰했다." "바사호 참사는 일부 치명적인 미스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계획이 지나치게 거대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지나치게 큰 규모의 배에 과다한 중장비, 너무 높은 마스트 등 모두 최대이길 바라는 왕의 주문 자체에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기세등등한 대국 국왕의 명령에 대해 어느 누구도 정면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기술자는 스스로의 지식을 구사해 부여된 직무 범위 내에서 왕의 의향을 좇아 일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직무에서 결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분의 최적화는 전체의 최적화와 다르다. 부분적으로는 아무리 똑바로 쌓아올려도, 전체가 똑바르게 되지는 않는다."(8-9)


# 헤이세이 30년 동안 발생한 4개의 쇼크

1. 버블경제의 붕괴(1989.1~1995.1)

2. 한신·아와지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1995.1~2001.9)

3. 9·11 테러와 국제정세의 불안정(2001.9~2011.3)

4.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2011.3~2019.4)


제1장 몰락하는 기업국가─은행의 실패, 가전의 실패


"1980년대 말 일본은 자신감이 절정에 달했다. 경제는 호조였고, 그 기반도 약하지 않았다. 내수도 상승하고 있고, 실업률은 최저 수준, 학생의 취업 전선도 공급자에게 대단히 유리한 시장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므로 여유가 있을 때 산업의 체질 개선과 기술 혁신을 추진한다면 〈개인 소비도 솟아오르고 성장은 지속할 것〉으로 여겨졌다." "세련된 자신을 연출하는 것이 행복의 실체라고 모두들 믿을 수 있던 시대가 버불의 1980년대였다. 젊은이들은 아직 1990년 이후 등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었고, 미래는 과거와 다름없이 밝고 풍요로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성장 시대의 인간에게는 성장 이후의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는다. 차를 운전하면서 앞이 잘 안 보일 경우 똑바른 길이 있을 것으로 믿어버리는 것과 같아, 커브를 꺾을 수 없는 상태로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버블시대에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43-5)


"(버블이 이미 제어불능 단계로 확대되어버린) 1980년대 말의 일본경제를 되돌아보면 한편으로는 (1985년 9월 G5에서 체결된 플라자합의가 촉발한) 엄청난 기세의 엔화강세로 국내 제조업은 대타격을 입었고, 이는 특히 중소 제조업에서 심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수 확대를 위해 금리가 대폭 완화됐고, 시중에는 대량의 자금이 풀렸지만, 이들은 엔화강세로 이윤이 감소한 제조업을 활성화시키기보다는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로 돈을 벌려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갔던 것이다. 문제삼아야 할 것은, 당시 정말 필요했던 것이 금리인하나 재정투입이었던 것인가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목표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축소시키기 위해 일본의 내수확대와 수출주도형 산업의 구조전환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엔화강세를 진정한다는 이유로 추진된 금융완화는 내수를 확대시키고 제조업을 지지하기보다 주식과 부동산에 대한 과잉투자를 초래했다."(49-50)


"거대함선 일본호가 옆으로 쓰러지며, 마침내 침몰에 이르는 첫 충격이 나타난 것은 1995년부터였다. 이 해 7월, 코스모신용조합의 경영이 파탄했고, 8월에는 효고은행, 기즈신용조합도 파탄, '주센住專문제'가 결정적으로 심각해진다. 1990년 이후 땅값이 대폭락을 계속하는 가운데 땅값 상승을 전제로 확대노선을 밟아온 금융업계의 붕괴가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붕괴는 1997년부터 1998년에 걸쳐 정점에 달한다. 1997년 11월 우선 산요증권이 파탄했고, 이어 20대 대형은행 중 하나인 훗카이도척식은행이 파탄했다. 이어 4대 증권회사의 하나인 야마이치증권이 '자진폐업'한다. 붕괴는 일본경제의 중추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일본호는 이미 구멍이 뚫려 선내에 물이 차는 단계를 지나 배 전체가 바닷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일본장기신용은행과 일본채권신용은행이 잇따라 파탄을 맞았다."(54-5)


# 주센住專문제 : 주택금융전문회사가 버블붕괴 직후 떠안은 불량채권과 그 처리를 둘러싼 문제


"2000년대 이후 파탄의 중심은 금융계에서 과거 '재팬 이즈 넘버원'의 주역이던 제조업의 붕괴로 향해갔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실패를 두드러지게 드러낸 것은 전기電機산업이다. 1990년대 말 금융의 실패는 버블시대의 '재테크' 광풍에 휩쓸린 기업의 말로였지만, 2000년대 이후 전기산업의 실패는 보다 뿌리 깊었다. 일본기업의 체질 그 자체가 1990년대부터 진행된 글로벌화와 인터넷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일본 대기업이 (종합전기 메이커라는) 수직적인 분업체계 유지에 집착하면서 글로벌한 수평분업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반도체가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본업'〉으로는 간주하지 않았던 것과도 표리를 이룬다. 일본에서 '전기메이커가 사라지는 날'을 생생하게 묘사한 오니시 야스유키에 따르면 가전에서 중전重電까지 폭넓게 취급하는 일본기업에게 〈반도체는 여러 사업 중 하나에 불과하고 '실패해도 회사가 망할 일은 없다'는 안이함 속에서 경영이 이뤄졌다.〉"(64-9)


"헤이세이 시대,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여겼으나 몰락으로 치달은 일본의 전기기업 중에서도 특히 실패 규모와 영향이 컸던 것은 (근대 일본의 전기화를 중추적으로 담당해 온) 도시바의 실추였다." "거함의 침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조직내부에 억압의 사슬이 엄존했으며 정보도 횡적으로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시바에서는 '챌린지'라는, 통상의 방법으로는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경영진이 각 부문에 강요했다. 그것이 상명하달식으로 전달되면서 이익을 부풀려 수익이 좋아진 것처럼 꾸미는 부정회계가 만연했다." "한편으로 도시바 몰락의 직접 요인은 그들이 2006년 거액을 쏟아부어 웨스팅하우스의 원자력 부문을 매수한 데 있다." "이미 당시, 1979년의 스리마일섬과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를 겪으면서 원자력은 결코 안전하지 않고 리스크가 큰 시설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시바가 원전건설에 집착한 이유는 원전수출이 국책사업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78-80)


제2장 포스트 전후정치의 환멸─'개혁'이라는 포퓰리즘


"헤이세이 직전인 1988년 발각된 리쿠르트 사건은 헤이세이 정치의 액상화를 가속화하는 쇼크로 작용했다. 리쿠르트 사건이 원인이었다고 하긴 어렵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헤이세이 정치질서는 일거에 유동화로 나아갔다." "리쿠르트 사건의 특징은 제공된 것이 미공개 주식이라는 점인데, 종래 법적 규제의 바깥에 있던 금융상품이었을 뿐 아니라 양도대상도 극히 넓어 자민당 실력자 대부분이 포함됐고, 그 범위는 야당에까지 미쳤다. 뇌물 수수 목적도 상당히 애매했다. 일반적으로는 정계나 재계에서 리쿠르트사의 '지위'를 높일 목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지위'라는 것이 대단히 애매한 탓에 뇌물을 제공한 측은 실제로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미공개주식을 대량으로 건넨 것이었다. 뇌물을 건넨 목적도, 받은 쪽의 범위도, 수수 방법도 그 전까지의 상식을 크게 벗어난 사건이었다."(94-5)


"(스캔들의 여파로) 자민당 내 다케시타파가 분열하면서, 1993년 8월에는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 등 8개 회파會派 연립의 지원으로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정권이 탄생했다. 물론 정권의 탄생을 배후에서 연출하고, 전후 55년 체제의 숨통을 끊은 것은 오자와 이치로였다. 호소카와 정권은 오자와의 지원 내지는 조종을 받으며 소선거구 비례대표병립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과 정치자금규정법 개정 등을 실현했다. 호소카와가 스캔들로 사임한 후 연립의 중추에 있던 오자와는 하타를 총리로 세우지만, 하타 정권은 2개월의 단명으로 끝난다. 이 흐름을 타고 자민당은 사회당 위원장인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총리를 맡도록 하는 신공을 발휘해 정권복귀에 성공했고, 자민당 야당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무라야마 내각 이후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와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연립정권이 이어지지만, 모두 단명으로 끝났다."(99-100)


"리쿠르트 사건을 계기로 자민당 파벌의 정치역학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에 걸쳐 액상화되어갔다. 특히 이 액상화, 아니 멜트다운이 발생한 중심무대는 과거 다나카 카쿠에이에 의해 구축됐고, 다나카가 록히드 사건으로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계를 지배해온 거대한 정치 권익집단인 다나카파였다. 그리고 마치 핵폭발처럼 주위를 빨아들이며 이 멜트다운을 확대시킨 것은 오자와 이치로라는, 다나카 못지않은 개성 강한 정치가였다. 오자와는 1990년대 일본 정치는 물론, 민주당 정권 탄생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헤이세이 일본 정치는 오자와를 중심으로 움직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의 파벌 역학이나 정당의 자기보존 능력으로 보자면 일어날 리 없는 중선거구제 파괴가 1990년대 일본에서 극적인 스피드로 추진된 것은 오자와 이치로라는, 다나카 가쿠에이로 시작하면 3대째에 해당하는, 극히 특이한 보수정치인의 움직임을 빼면 이해할 수 없다."(104)


"고이즈미와 자민당과의 관계는 1990년대에 걸쳐 치열한 대결을 거듭해온 오자와와 자민당 간의 관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오자와의 경우, 자민당을 뛰쳐나와 신당을 만들고, 권모술수를 동원해 자민당을 궁지에 몰았지만, 그 정치 수법은 구 다나카=다케시다파와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이즈미가 자민당의 지배체제와 싸우기 위해 도입한 것은 오자와적인 수업 대신 직접 언론 앞에 나서 자신의 말과 퍼포먼스로 적이 누구인지를 시사하고,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정세를 전환시키는 방법이었다." "고이즈미 내각은 헤이세이 기간의 모든 내각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내각이다. 역으로 말하면, 헤이세이의 일본에서 고이즈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성공한 정권은 없다." "문제는, 민주당 정권의 '대실패'와의 비교를 덧붙이면, 헤이세이 시대 정치의 성공은 고이즈미 같은 포퓰리즘적 방식으로만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129-32)


"2009년 8월 30일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115석에서 308석으로 의석수를 3배 가까이 늘리며 압승했다. 하토야마 유키오가 총리가 되고 정권교체가 실현됐다."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를 비롯해 민주당이 매니페스토를 통해 표방한 정책에는 자민당이 오랜 기간 누려온 기득권의 굴레를 깨뜨리겠다는 임팩트가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먼저 거버넌스 설계에서 몇 차례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정'과 '당'을 일원화하겠다는 원칙을 관철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양자의 제도적인 조정 시스템을 파괴해버린 탓에 '정치주도'의 이름 아래 '관'을 권력중추에서 배제하게 됐고, 이로써 내각이 과다한 조정 리스크를 지게 됐다. 게다가 정부 내에서도 핵심인 국가전략국 구상은 그간의 내각관방 체제와 모순됐다." "결국 2012년 12월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118석에서 294석으로 3배 가까이 의석을 늘리며 압승했다."(145-6)


"수차례 정치주도의 실패를 거치면서 아베 정권은 민주당이 내건 래디컬한 정치주도를 부정하고, 이를 교활한 관저주도로 대체했다." "게다가 민주당 정권의 실패가 너무도 참담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식의 '정치주도'라면 딱 질색이었다." "헤이세이 시대 일본이 추구해온 정치주도란, 공적인 의사결정의 주체를 행정기관의 관할주의 메커니즘에서 끄집어내 총리관저가 됐건 시민과 정치인들의 이니셔티브가 됐건 누군가의 강력한 리더십 하에 두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행정에서 빼앗은 결정권은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확실히 기록되고 공개됨으로써 그 공정성이 검증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독재의 싹이된다. 제2차 아베정권은 민주당 정권의 실패를 뒤집고 관저주도의 기본형을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최대 위험은 관저와 성청의 관계가 액상화하는 가운데 공적기록에 기반한 정치의 공정성이 뿌리부터 손상되면서 전체가 허구화한 것이다."(147-53)


제3장 쇼크 속에서 변모하는 일본─사회의 연속과 불연속


"일본 사회에는 다양한 참사를 사회 '실패'의 결과라기보다 외부에서 초래된 '쇼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단순한 '쇼크'로 간주하는 이는 적지만, 옴진리교 사건이나 미야자키 쓰토무의 유아연속유괴살인사건, 고베의 '사카키바라세이토'의 연속아동살상사건, 아키하바라 묻지마 살인사건, 사가미하라 시의 장애인 시설 '쓰쿠이야마유리원'에서 일어난 대량살인사건 등은 모두 범행동기가 불가해한 것으로, 광기에 의해 돌연 저질러진 '쇼크' 이상의 것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버블붕괴도, 중간층의 붕괴를 초래한 격차확대도 '1.57 쇼크'로 알려진 초저출산도 '지방소멸'로 일컬어지는 인구감소도, 모두 헤이세이 일본이 불가항력적으로 입은 사회적인 '쇼크'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쇼크'로 간주하고 요령부득의 일로 받아들이는 수용 패턴은 사회가 정책이나 정치적 타협이 야기한 실패들을 '실패'로 인식하며 그 구조적 문맥을 정면에서 응시하는 것을 곤란하게 만든다."(161-2)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헤이세이뿐 아니라 전후를 통틀어 일본이 경험한 최대 사건이었으며, 1995년에도 일본을 근저에서 뒤흔든 한신·아와지대지진이 발생했었다." "두 대지진 모두 고도성장기 일본식 개발주의의 위험성을 근저에서 지적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지진은 원전이나 고속도로, 인공섬 같은 기술의 한계를 드러내 보였을 뿐 아니라 전후 흔들림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사회의 기반이 의외로 무르고, 불안정함을 일깨웠다. 1995년의 지진은 직하형이었기 때문에 붕괴 충격은 고층빌딩이나 고속도로 등 도시 인프라에서 두드러졌다. 2011년의 재해는 바다의 쓰나미에 의한 것으로 광대한 지역에 미쳤으며, 에너지 공급체계가 근본부터 의문시됐다. 두 차례 지진으로 현대 일본의 대도시와 그 광대한 배후지 양쪽 모두 도마에 오른 것이다. 또한 고도성장기에 발전해 1970년대에 확립된 도시개발과 에너지 공급체계 전체에 심각한 물음표가 붙게 됐다."(165-8)


"일본 전체가 고베시가지를 괴멸시킨 대지진의 충격 한가운데에 있던 1995년 3월 20일, 이번에는 도쿄 도심에서 사람들을 한층 격하게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옴진리교 신도에 의한 지하철 사린사건이다." "1995년 3월 이후 지하철 사린사건의 쇼크로 옴진리 교단 특유의 타자공포감을 이번엔 거꾸로 일본 사회가 갖게 됐다. 사건 후 TV에서는 엄청난 물량의 특별 보도프로그램이 편성됐고 높은 시청률을 획득했다. 이 시기 TV는 거의 전면적으로 '옴' 관련 소재로 뒤덮였다." "신문의 경우 스포츠지나 석간신문뿐 아니라 종합지에서도 속속 센세이셔널한 제목으로 보도가 이뤄졌고, 오보도 되풀이됐다. 이는 사람들이 극히 기괴한 사건에 대한 강박적인 호기심과 불안에 휘둘리는 과정이었다. 즉, 옴진리 사건의 '쇼크'란 교단 신도들에 의한 범행만을 가리키지 않고, 그런 쇼크로 촉발돼 일본사회 전체가 빠져든 타자에 대한 공포심의 고양, 강박적인 타자 배제 등 모든 활동을 포함했다."(168-72)


"신도들에게 행해진 '모략'이나 '마인드 컨트롤'의 결과물이라는 옴사건의 해석은,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회 쪽의 일상과는 철저히 이질적인 것으로 옴신자들을 타자화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략'론은 옴 교단의 이해불능한 행위를, 현대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반사회적 집단의 악랄한 의도에 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마인드 컨트롤'론은 옴 신자들의 행위를 교조의 '광기'로 조작된 집단적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이 광기와 우리들 자신의 정기正氣=일상은 철저히 불연속적이라고 여긴다. 어떤 것이든 '옴'이란 불쌍하긴 하되 '우리들'과는 다른 세계 사람들이고, 그 다른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교조의 '광기' 혹은 '어둠'의 조직이라는 뜻이다. 1995년에 휘몰아친 옴 보도는 사건에 이러한 해석을 부여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공포심을 자극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리얼리티가 뿌리부터 추궁당할 가능성을 박탈하면서 사건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만으로 소비되는 것을 가능케 했다."(173-4)


"헤이세이 시대를 뒤흔든 쇼크에는 〈권투의〉 보디블로처럼 보다 지속적으로 사회를 변모시켜온 것도 있다. 보디블로처럼 일본을 덮친 쇼크에는 글로벌한 신자유주의의 조류가 관통하고 있다." "헤이세이 직전은, 가장 격차를 보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러나 이 1억 총중류總中流의 상황이 헤이세이가 시작될 무렵, 버블경제 속에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변화의 방아쇠는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었다. 버블경제 결과, 자산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격차가 확대됐다.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올라 앞으로 평생 집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했다. '격차사회'라는 단어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으로 자신은 하층에 속한다고 답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1980년대 말은 계층면에서 일본인들의 의식에 균열이 확실히 생겨나던 순간이었다." "일본이 다행증多幸症적인 소비사회에서 불안투성이의 격차사회로 바뀌었던 것이다."(182-5)


"헤이세이 일본 사회가 양극화로 나아간 것은 인구구조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초소자화超少子化가 멈추지 않게 된 것이다." "여성 한 사람이 평생 동안 평균적으로 낳는 아이 수인 합계특수출생률이 연속해서 1.50을 밑돌고 있는 것은 그 국민의 인구가 자력으로 회복가능한 선을 넘었다는 것, 즉 사회의 기반이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인구동향에는 일종의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에 출생률 저하는 장기적인 추세로 유지된다. 실제로 합계특수출생률이 2.00을 밑돌기 시작한 뒤 반세기 가까이 지났기 때문에 이 추세는 이미 장기화되고 있다. 그리고 반세기 이상 전부터 출생률이 저하한 영향이 지금, 인구감소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출생률 변화가 인구구조를 확실하게 변화시키기 시작하는 데까지는 반세기의 시차가 있다. 지금 당장 소자화의 근원적인 대책이 마련돼 출생률이 회복되더라도 인구가 회복기조로 바뀌는 것은 적어도 반세기 이상 지난 뒤의 일이라는 것이다."(199-201)


제4장 허구화하는 아이덴티티─'아메리카닛폰'의 행방


"헤이세이 경제가 버블 붕괴로 시작했고, 헤이세이 정치가 55년 체제를 무너뜨렸으며, 헤이세이 사회가 단카이 주니어 세대의 취직빙하기와 조우함으로써 초소자화가 멈추지 않을 것을 예고하듯, 헤이세이 문화는 '종말'의 예감을 이어받는 것으로 시작했다." "'종말'에 대한 관심은 사회의 성장에 대한 '꿈'이 성장의 끝에 대한 '불안으로 바뀌는 순간에 부상한다. 1970년대 초는 바로 이런 불안감이 분출하던 시대였다. 이런 불안감은 1980년대의 다행증적인 시대를 넘어 재부상했고, 현실 속의 다양한 붕괴가 사회 전반에서 분출하던 것이 헤이세이 시대였다. 전후 일본의 '종말' 이미지의 원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1954년 비키니 환초에서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일본의 참치어선이 피폭된 것을 계기로 제작된 영화 《고질라》다. 태평양 저편에서 등장한 고질라는 도쿄 도심부를 유린하며 수도를 철저히 파괴한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도쿄대공습의 재연이고 전후 일본인에게는 원풍경原風景적인 '종말'이었다."(216-8)


"1980년대의 '종말' 예감은 묵시록적인 이미지를 계승하면서도 '핵=방사능'으로 인한 문명 파멸에 대한 성찰을 심화시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전쟁보다는 테러, 그것도 내면적인 파괴의 이미지로 결정화된 『AKIRA』가 있다." "두 작품은 헤이세이에 선행한 시대가 낳은 '종말' 서사의 쌍벽이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개가 나타내듯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후의 계보는 '종말'에서 '판타지'로 향했다. 반면 헤이세이의 '종말' 서사의 주류를 이룬 것은 『AKIRA』의 계보다. 이 계보는 안노 히데아키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을 거쳐 안노가 제작한 영화 《신 고질라》로 이어진다. 여기에 '종말' 서사를 집어넣은 오시이 마모루의 영화 《공각기동대》와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을 추가하면 '종말'은 헤이세이 일본 애니메이션계 서브컬처를 관통하는 기축 테마였음을 알 수 있다. 전후 일본인들은 오랜 기간 '종말'의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221-6)


"TV나 레코드에 의해 확산되고 소비된 주류 대중문화를 관통한 것은 '종말'의 예감만은 아니었다. 대중문화에 있던 것은 오히려 '미국'에 대한 희망이다." "1960년대 말 청년들의 '반란' 시대를 지나 1970년대는 '패배' 후의 침잠과 내향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 '아메리카닛폰'에 균열이 발생했고 그 균열에서 '포스트 전후사회'적인 감성이 부상했다." "해외에서 역수입돼 대히트한 YMO(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반전은 안과 밖, 자아와 타자, 일본과 미국, 내셔널과 글로벌 간 경계선의 위치바뀜을 나타낸다. 1970년대 초에는 아직 남아 있던 '내=일본'과 '외=미국'의 경계선은 1980년대가 되면, 서서히 부상하던 미디어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 쉽게 조작가능한 것이 됐다. YMO는 〈'외'를 향해서는 '일본'과 '아시아'를 상징적으로 짊어지며, 서구인의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을 유도하는 것으로 주목을 끌었다. 반대로 '내'에서는 '외'에서의 평가를 지렛대로 이른바 박래품 대접을 받으며 인기를 획득했다.〉"(232-5)


"마릴린 아이비 콜럼비아대 교수는 1970년대 일본을 대표한 'Discover Japan'에서 '이그조틱 재팬'으로의 이행을, 동시대의 아이덴티티 정치와 연결지었다." "1980년대에 등장한 '이그조틱 재팬'에서 재발견되어야 할 자신은 이미 허구일 뿐이다. 아이비는 외국의 시선을 의식해 영어로 쓰여진 'Discover Japan'과는 달리, '이그조틱 재팬'이 가타카나로 쓰여진 것에 주목한다. 가타카나는 통상, 일본인이 자국에 수입된 외국 제품이나 개념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서체이다. 이것이 '일본'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은, 일본이 이미 일본인 자신에게도 '외국'으로 느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통상, '자/타'를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보자면 '이그조틱'한 것은 '자아'가 아니라 '타자'다. 따라서 광고가 주장하듯 '재팬'이 '이그조틱'하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일본'이 타자화됐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설정된 것은 마치 서구 관광객처럼 자국의 풍경에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일본인 자신이다."(236-7)


"코스프레에서 스트리트 패션까지 1970년대에 나타나 1990년대 이후에 전국화, 일상화한 현상은 '미디어 속의 타자'와 '도시 속이 자신'이 반향하며 융합하는 현상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스타와 아이돌, 판타지 주인공은, 동경의 대상이긴 하되 자신이 아닌 타자이다. 그런 타자의 복장과 스타일, 몸짓의 일부를 자기표현에 인용하는 것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모방이었고, '오리지널'에 대한 '카피'였다. 그러나 이 관계는 1990년대에 반전된다. 이미 인터넷 이전부터 젊은이들은 서브컬쳐, 패션, 음악 영역에서 누구나 오리지널 즉 발신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넷 사회의 확대는, 이 경향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코스프레에서 청년들은 단순히 만화,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코스프레를 공연하는 청년들 스스로 자신을 '작품'화하고, 그 제작자, 즉 가공 이미지의 공급자가 된 것이다. 이제 와서는 '카피'가 '오리지널'이 된 것이다."(257-8)


"헤이세이 시대를 문화 차원에서 훑어보면 ①'종말'의 실현 ②허구로서의 '일본' ③새로운 집합성이라는 3가지 조류가 이 시대를 관류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첫째로 1970년대부터 부상한 '종말'의 예감은 헤이세이 시대 들어 두 차례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의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된다. 버블 붕괴와 급격한 경제적 쇠퇴, 격차사회화와 인구감소 등에 의해 장기적으로도 '종말'은 이 나라에서 실현되고 있다. 두 번째로, 역시 1970년대에 시작된 일본의 소비사회화는 우리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일본'의 자아인식을 근저에서 변화시켰다. 1980년대에 등장한 것은 현실성이 존립할 지평의 상실이고 헤이세이의 리얼리티 전체가 이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세 번째로 1990년대말 이후 인터넷의 일상 침투는, 우리들의 집합성을 근본부터 바꿨다. 인터넷은 다른 입장을 연결하는 대화의 매개에서, 얼마 안 가 배제의 매개로 반전해가지만, 동시에 각 유저들을 '수용자'에서 '발신자'로 변모시켰다."(267-8)


마침글 세계사 속의 '헤이세이 시대'─잃어버린 반세기의 서곡


"헤이세이는 종언의 시대이고, 시작의 시대였다. 종언이라는 것은 인구증가의 종언, 경제성장의 종언, 총중류화의 종언이다. 뒤집어 말하면, 인구가 축소하고 경제가 장기적으로 정체하고 사회가 분열해가는 시대의 시작이었다. 정치는 전후 일본의 시스템을 '개혁'하려 거듭 노력했지만, 이 사회의 기반적 변화에 몇 번이고 걸려 넘어졌다. 또한 헤이세이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이던 시대의 종언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약 150년 전, 메이지유신을 달성한 일본은, 서양의 기술, 제도, 지식을 전력으로 도입해 불과 30년에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동아시아의 중심성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고, 아시아태평양전쟁 패배 이후에도 미국과 일체화하는 것으로 이를 유지했다. 그러나 냉전 후의 헤이세이 시대, 동아시아의 중심은 일본에서 중국으로 옮겨갔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원상복구로,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이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의 시기가 특수한 시대였던 것이다."(3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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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읽다 - 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는 법 유유 동양고전강의 5
양자오 지음, 문현선 옮김 / 유유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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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속된 세계관


"갑골문으로 쓰인 복사卜辭나 청동기에 보이는 상나라 문화와 『초사』에 보이는 초나라 문화 사이에는 아주 쉽게 교집합이 발견됩니다. 귀신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람과 귀신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한 묘사가 넘치지요. 주나라 사람과 문화의 관점(불연속 세계관)에서 보면 이는 모두 '괴력난신'怪力亂神에 해당하는 것으로, 믿어서도 안 되고 믿을 가치도 없는 일들입니다." "폭넓은 고대 문화를 살펴보건대, 상나라와 초나라의 문화는 고고학자 장광즈 선생이 주창한 '연속된 세계관'에 기초합니다. 사람과 외부 환경 사이에 명확한 구분과 단절이 없다는 의미지요. 세상 만물은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은 저것으로 변화할 수 있고, 저것 또한 이것으로 변화할 수 있지요." "이러한 문화의 축적이 있었기에, 장자는 우언寓言이라는 형식을 골라 쓸 수 있었고, 그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34-8)


"장자가 묘사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완벽하게 '연속된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주류가 아닌 세계관으로 자신이 처한 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평가하고 판단했지요. 이에 반해 노자는 여전히 주나라 문화의 '불연속 세계관' 입장에서 어떻게 인간관계를 처리할지, 어떻게 역발상의 논리로 이 인간 세상에 더욱 적합한 방식을 찾아낼지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양자 모두 '도'道를 이야기하고 '도'라는 말로 완전하고 신비한 원리 원칙을 통칭하며, 마찬가지로 '자연'自然을 강조하면서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사람이 자연을 광활한 공간으로 삼아 인간 세계라는 비좁은 범주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을 유유히 누비며 도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데 중점을 두는 반면, 노자는 자연의 도리를 인간 세상에 적용해 인간관계를 처리하고 이를 통해 더 안정적이고 강력하게 인간의 삶을 장악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합니다."(40-1)


2 상대성에서 시작하다


"연못에서 살면서 몇 길 높이를 채 오르지 못하는 작은 새가 거대한 붕새를 비웃습니다. 〈저이는 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하는 것인가? 나는 펄쩍 날아올라도 몇 킬로미터를 날지 못하고 곧 내려오며 풀숲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닐 뿐이지만 이 역시 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난다는 것은 결국 이런 일일 뿐이다. 그런데 저이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 작은 새는 두 번이나 〈어디로 가는가?〉라고 되풀이 물음으로써 거대한 붕새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도리어 붕새에 대한 경멸을 드러냅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과 맞닥뜨렸을 때 자주 드러내는 반응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날의 개념을 사용하자면 이는 서로 다른 잣대와 크기를 넘어서는 '공약불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작은' 잣대의 크기로는 '큰' 잣대와 크기의 문제에 깊이 다가갈 수 없는 법입니다."(82-3)


# 〈연못 안의 작은 새가 비웃으며 말했다. "저이[붕]는 또 어디로 가는가? 나는 펄쩍 날아올라도 몇 길을 오르지 못하고 내려오며 쑥대밭 사이를 맴돌지만 이 또한 날 만큼 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저이는 또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이다.〉 『장자』 내편 제1편 「소요유」


# 공약불가능성 : 현대의 과학과 과거의 과학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음을 가리키는 말로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사용한 개념


"(붕새의 비유를 사람에게 적용해보면) 〈지혜는 한 가지 벼슬을 감당할〉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고, 〈영예와 모욕의 경계를 가늠하는〉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으며, 〈바람을 타고 다니며 가볍고 묘하게 날기를 잘하는〉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위에는 〈지인至人, 신인神人, 성인聖人〉의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아가 없고 육체 조건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지인〉이 될 수 있지요.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공로를 세우고자 애쓰지도 않지만 세상 만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신인〉입니다. 다른 사람이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지만 어떠한 명성도 굳이 바라지 않으므로 비로소 진정한 〈성인〉인 것이지요." "이것이 '작은 앎'과 '큰 앎'의 차이로, '작은 앎'을 가진 낮은 등급의 사람은 이해의 잣대와 크기가 훨씬 더 큰 '큰 앎'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89)


# 〈그러므로 말한다. "지인에게는 자기가 없으며 신인에게는 공로가 없고 성인에게는 이름이 없다."〉


3 절대성으로 상대성을 초월하다


"〈도〉를 감추는 것은 선입견과 편견이며, 작은 부분만 보고 전체를 다 아는 듯 여기는 태도입니다. 말을 감추는 것은 갖가지 화려한 수식과 교묘한 화법입니다. 그래서 유가와 묵가의 논쟁과 같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 있습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작은 이룸〉을 얻어 각기 다른 입장에서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서로 대립합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평가하는 기준과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들처럼 이런 언어의 상대적인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불분명함에서 벗어나 맑고 깨어 있는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밝음〉일까요? '이것'과 '저것'이 서로 대응하여 이루어진다는 사물의 상대성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인 것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저것'이 됩니다. 고정된 '이것'과 '저것'은 없습니다."(151-2)


# 〈도는 작은 이룸에 감춰지며, 말은 화려함에 감춰진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있어 그 그르다고 하는 바를 옳다 하며 옳다고 하는 바를 그르다 한다.〉 〈그 그르다고 하는 바를 옳다 하고 그 옳다 하는 바를 그르다고 하려면 밝음을 따름만 한 것이 없다. 사물은 저것이 아님도 없고 사물은 이것이 아님도 없다. 저것으로 말미암으면 보이지 않으나 스스로 알면 그것을 알게 된다.〉 『장자』 내편 제2편 「제물론」


"그래서 성인은 이러한 상대적인 이치에 기대지 않고 〈하늘〉에 의지합니다." "'樞'(추)는 가운데서 사물이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장치로 '문지도리'는 문이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문의 중심축입니다. 그렇다면 〈도의 지도리〉는 '도'가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중심축을 뜻하겠지요. 어떻게 '도'를 회전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회전의 가운데〉, 다시 말해 원심에 서는 것이죠. 원심은 원의 한가운데이며, 이쪽도 없고 저쪽도 없습니다. 모든 대립하는 입장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지요. 이쪽에 있지 않으며 저쪽에 있지도 않습니다. 중심점에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습니다. '저것'과 '이것'이 구분되지 않으므로 〈무궁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밝음〉은 옳고 그름, 저것과 이것의 상대성을 꿰뚫어보며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인 원점을 찾아내, 그 자리에 굳게 서서 바쁘고 번잡하며 상대적인 저것과 이것, 옳고 그름을 관찰하고 그에 대응합니다."(154-6)


# 〈이것 또한 한 가지 시비요, 저것 또한 한 가지 시비다. 과연 저것과 이것의 구분은 있는가? 과연 저것과 이것의 구분은 없는가? 저것과 이것이 그 짝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일컬어 도의 지도리라 한다.〉


4 관점이 곧 편견이다


"〈만물은 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만물은 실로 가능한 바가 있다. 만물은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가능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바로 「제물론」의 핵심입니다. '제물'齊物은 모든 것을 한 가지로 바꾸고, 한 가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만물은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가능하지 않음이 없다〉라는 이치를 보라고 하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렇거나 그렇지 않음',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음'은 종종 〈만물은 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만물은 실로 가능한 바가 있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이름이나 이름 붙이기, 주관적인 규정에 우리 자신이 집착하면서 나온 편견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별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같지 않음'이 생겨나지요. 그래서 '제물'은 곧 구별과 편견을 꿰뚫어보는 것이며, 주관적인 관점에서는 사실 어떤 사물을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각의 사물에는 나름의 자연스러운 이치가 있고 모두 평등해집니다."(165)


"청나라 말 중화민국 초기의 학자 차오서우쿤은 『장자내편주』莊子內篇注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제물론」의 본문을 마치고 나면 그 뒤는 조항의 열거에 지나지 않으며 상술한 내용을 설명한다.〉 이런 관점은 일리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장자 자신도 이미 '말'言에 대해, 해석이나 설명에 대해 경고한 바 있지요. 자신의 글에서 말했듯 〈이로써 그칠 따름입니다.〉 ... 도가 일단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는 더 이상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근원적인 '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이치는 교묘한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진정한 자애는 어디에나 두루 펼쳐지기에 특정한 방향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큰 도는 이름 부를 수 없다〉라는 말은 『노자』의 제1장 첫머리에 나오는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변함없는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와 같습니다." "『노자』에서는 이 역설의 원칙을 인간 세상에서 사는 방식으로 돌려 사상의 핵심을 이룹니다."(186-8)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모순 그리고 그가 웅변이라는 방식을 활용한 또 다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큰 바룸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진심으로 이렇게 믿고 있었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장자 자신의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하지요. 그런데도 그는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논쟁하거나 설명하는 '행위'와 논쟁하거나 설명하고자 하는 '이치' 사이에 근본적인 모순과 갈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확신하며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 자신이 한 말과 할 수 있는 말에 질문을 던집니다. 갖가지 웅변 기술을 쓰면서, 그는 우리를 이해시키고 믿게 하려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웅변 기술이라는 것이 의지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려고 합니다. 현대의 논리 언어로 설명하건대, 장자의 글은 끊임없이 첫 번째 진술로부터 멀어지며, 두 번째 진술은 첫 번째 진술에서 쓰인 언어와 이치를 '메타'meta 검증하지요."(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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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읽다 - 공자와 그의 말을 공부하는 법 유유 동양고전강의 3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유유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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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어』의 연원


"공자의 가장 큰 공헌은 서주西周의 귀족 교육 체계인 '왕관학'王官學의 내용을, 출신 성분으로 봤을 때 그런 자격이 부족한 이들에게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귀족 교육의 핵심인 글쓰기가 공자를 통해 확대되고 전파되어 그 결과, 중국 최초의 민간 저술이 탄생했습니다. 『논어』 이전의 다른 문자 기록은 모두 왕조의 봉건 귀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시경』, 『서경』, 『춘추』는 다 귀족 교육의 중요한 교재였기에 문자로 기록된 겁니다. 『시경』은 관리가 민요를 수집해 민간의 사정을 살피던 채풍采風 및 귀족 연회의 여흥과 관계가 있으며, 『서경』은 조정의 문서를 모아 놓은 겁니다. 『춘추』는 사관이 자신의 직분에 따라 작성한 방대한 사건 기록이지요. 그렇게 기원전 5세기까지 이루어졌던 글쓰기에 대한 독점과 제한을 공자는 교육이라는 방식을 빌려 부수었으며, 이에 힘입어 그의 제자들은 최초의 민간 저술인 『논어』를 집필했습니다."(39)


"역사적으로 『논어』의 더 새롭고 혁명적인 의의는 바로 『논어』가 그 전에는 없었던 인간관계, 즉 사제 관계를 구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자 이전의 교육은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배울 자격이 있는 사람을 가르쳤는데, 그 자격은 혈연과 신분으로 정해졌습니다." "반면 공자와 그가 가르친 사람들은 혈연관게가 아니었습니다. 공자의 수많은 제자들은 본래의 봉건 질서 속에서 그런 귀족 교육을 받을 자격조차 없었습니다. 따라서 공자가 맡은 역할은 사실상 봉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마침 봉건 질서가 흔들리던 춘추 시대였기에, 공자가 옛 체제의 규범을 어기고 본래 폐쇄적이고 독점적이었던 귀족 교육의 내용을 차별 없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친족 간의 유대를 통해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공자를 좇아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41-3)


2 스승으로서의 공자


"그 시대에 구舊귀족의 태도는 자리와 직무가 생겼을 때 관련 지식과 기능을 잘 익히면 된다는 것이었지요. 그 지식과 기능이란 군주와 다른 고관들을 대하는 예의, 연회에서 쓰이는 음악과 그 의미 그리고 시를 인용해 넌지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야인'들은 적극적인 태도로 알아서 예악을 배우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누가 자기를 필요로 하면 즉시 국정과 외교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사실상 공자의 주요 업무는 제자들이 〈먼저 예악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 다시 말해 〈먼저 예악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평소 공자의 가르침 아래 열심히 예악과 규범을 익히다가 언제든 국정과 외교 분야에서 그것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정말로 국정에 쓰고자 한다면 나는 '먼저 나아간 사람', 즉 이미 준비를 마친 사람을 쓰겠다〉고 주장한 겁니다."(53-4)


# 〈먼저 예악에 나아가는 것은 야인野人이고 나중에 예악에 나아가는 것은 군자다. 만약 실제로 쓰고자 한다면 나는 먼저 나아가는 쪽을 좇겠다.〉, 「선진」편 첫째 장


"공자가 보기에 스승은 학생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특히 자신이 말하고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의문과 반박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 정진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스승은 당연히 학생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지만, 만약 스승과 학생 사이에 스승이 학생을 돕고 영향을 주는 일방적인 관계만 있고 거꾸로 학생이 스승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영향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졌기에 공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기꺼워하기만 하는 안회를 두고 〈나를 돕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불평한 겁니다. 그는 진심으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중요하게 생각한 인물이었습니다." "어쨌든 안회에 대한 공자의 원망은 진짜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한마디에서 '기쁠 열說' 자를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說'자는 '悅'자와 통하며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기쁨과 희열을 뜻합니다."(64-6)


# 〈회는 나를 돕는 사람이 아니니, 내 말에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다.〉, 「선진」편 넷째 장


3 공자는 진리의 확성기가 아니었다


"공자가 '효'를 중시한 까닭은 나날이 혼란해지던 춘추 시대에 그가 목도한 인간 세상의 숱한 고통이 수백 년간 유지되었던 서주 봉건 질서의 파괴 및 와해와 근본적으로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봉건 질서는 친족의 인륜을 확장하여 사회적 인간관계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공자가 생각하기에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마땅히 봉건 질서를 회복해야 했고, 또한 봉건 질서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인륜 관계의 각 주체들이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식 된 자는 '효'에, 신하 된 자는 '충'에 힘쓰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공자는 결코 자식과 신하에게만 편파적으로 역할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동시에 아비 된 자도, 군왕인 자도 각기 아비답고 군왕다워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어디까지나 관계는 상대적이므로 행위에 대한 요구도 필연적으로 상대적이어야 했습니다."(78-9)


# 〈효성스럽도다. 민자건이여. 그의 부모와 형제가 그에 관해 하는 말에서 사람들이 흠을 잡지 못하는구나.〉, 「선진」편 다섯째 장


"공자가 보기에 배움을 향한 진실한 감정과 즐거움의 기준에 부합하는 제자는 안회밖에 없었습니다." "안회는 공자의 가르침이 가졌던 모순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 시대에 매우 유용해서 무질서한 사회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인재를 키워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본래 그런 용도의 가르침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공자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가르침은 주나라의 예악禮樂을 회복하는 데 유용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윤리가 바탕인 봉건 시기의 예절과 의례 정신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했던 겁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공명과 이익이나 현실에 따르지 않음을 강조했으며, 유용하게 쓰이려고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가르침의 모순은 그의 가르침이 인본주의로 돌아간 '무용한 학문'이면서도 결과적으로 유용해졌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제자가 겨우 서른한 살의 나이에 요절했으니 공자로서는 당연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89-90)


# 〈계강자가 물었다. "제자들 중에 누가 배움을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안회라는 자가 배움을 좋아했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고 지금은 없습니다."〉, 「선진」편 일곱째 장


4 본래의 공자로 돌아가기


"염유(염구)가 스승에게 한 말을 보면 내적인 능력을 들어 자신의 그리 훌륭하지 못한 외적 행동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내적인 느낌과 동기를 기준으로 그를 비판합니다. 스승이 진정으로 주목한 것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행동을 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적으로 얼마나 강한 동기를 갖고 더 잘하려고 하는지, 그것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자는 확실히 '유심론자'입니다. 염유에 대한 그의 추궁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문제 삼고 있으니까요." "확실히 주관적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관성은 공자의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자신의 풍부하고 민감한 공감 능력에 의지해 공자는 어떤 가치, 즉 진실하고 성실하게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외적인 표현으로 남에게 잘 보이고 남을 설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공자는 염유가 정말로 '역부족'인지 아니면 '선을 그은 것'인지 그 내적인 차이를 한눈에 꿰뚫어본 것입니다."(126-7)


# 〈염구가 말했다. "스승님의 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부족일 따름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역부족인 사람은 중도에 포기하는데 지금 너는 선을 긋고 있다."〉, 「옹야」편 열두째 장


"춘추 시대는 왜 그렇게 혼란하고 무질서해서 수많은 사람이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을까요? 공자의 견해는 시종일관 같았습니다. '예'를 잃었기 때문이었지요. '예'가 버려지고, 왜곡되고, 변질되었다고 본 겁니다." "묵가, 도가 그리고 훗날의 법가의 공통된 출발점은 기존의 '예'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었으며 적어도 '예'가 현실의 요구에 부적합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예'를 밀어내고 '예'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의 외적 형식과 내적 정신이 서로 근본적으로 어긋나 버린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예'가 형식화되어 인간의 진실한 감정과 이어졌던 끊이 끊어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새상을 구하는 방법은 '예'의 정신을 탐구하고 처음에 설정된 '예'의 원초적인 의미로 돌아가 다시금 '예'가 인간 내면의 진실한 감정과 결합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130-1)


# 〈공자께서는 상을 당한 자 곁에서는 일찍이 배불리 드신 적이 없다.〉, 「술이」편 아홉째 장, 〈공자께서는 곡을 한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술이」편 열째 장


"공자의 장점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많은 것을 기억하며 자기가 배운 것을 어떻게 가르질지 잘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이 지식과 기능은 공자 자신에게 제대로 속하지 못하고, 실제 삶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자신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자신을 바꾸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공자는 언제나 배운 다음의 일을 걱정했습니다." "공자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 했고 제자들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당연히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기능은 가르칠 수 있어도 가장 중요한, 그 지식과 기능이 자신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게 하는 것만은 가르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이런 몇 가지 일을 끊임없이 걱정했는데 이 걱정 자체가 그의 꾸준한 수양인 동시에 제자들을 감화시키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진정한 솔선수범이었던 것이죠."(140-2)


# 〈덕을 닦지 못하고, 배운 것을 연구하지 못하고, 의로운 얘기를 듣고도 실천하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점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근심이다.〉, 「술이」편 세째 장


5 스승에게는 정답이 없었다


"자로와 염유가 차례로 공자에게 완전히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말을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각기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자로에게는 〈어른이 계시니 의견을 여쭤 봐야 하지 않느냐? 어찌 듣자마자 행하겠느냐?〉라고 답했고, 염유에게는 〈옳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지〉라고 답했습니다. 당시 공서화는 공자 옆에 가장 자주 있던 제자여서 그 두 번의 문답을 다 들었습니다. 당연히 무척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그래서 왜 다른 대답을 했는지 물으니 공자는 〈염유는 성격이 소극적인 편이어서 망설이지 말라고 격려한 것이고, 자로는 성격이 충동적이고 늘 혼자 두 사람 몫의 일을 하려고 해서 다소 늦춰 준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이른바 '인재시교'因材施敎로서 인물에 맞게 가르치는 교육 방식입니다. 진정한 교육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답이 아닌 답을 제자들에게 내줄 수 있는 사람만이 스승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173-4)


# 〈자로가 물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형父兄이 있는데 어찌 듣고 바로 행하겠느냐?" 염유가 물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들으면 바로 행하여라." 공서화가 물었다. "유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스승님은 '부형이 있다'고 하셨고 구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스승님은 '들으면 바로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혼란스러워 감히 여쭙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는 물러나는 성격이라 격려한 것이고, 유는 두 사람 역할을 하므로 물러나게 했다."〉, 「선진」편 스물 두째 장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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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와 문명 - 1300~1700년, 유럽의 시계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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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1세기부터 15세기 말까지 유럽 기술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진보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갈수록 수가 늘어나던 수공업자들이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응용역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응용역학을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실용적 용도로 쓰기 위해서 연구했다. 기계는 생산과정에서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방앗간mill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적절한 사례이다. 물레방아는 기원전 1세기에 소아시아에 알려졌고 수직 형태의 풍차는 서기 7세기 페르시아에 알려져 있었지만, 방앗간 건설이 진정으로 크게 유행한 곳은 중세 유럽이었다. 무명의 수공업자들은 일련의 기발한 기계장치를 고안해 물이나 바람에서 나온 회전력을 망치, 압축기, 드릴, 맷돌 등 잘 분화된 여러 운동 장치로 전환했다. 유럽은 곧 놀랄 만큼 많은 방앗간으로 뒤덮이게 되었다."(30-1)


"실리주의적 풍조는 중세 도시 문명에서 탄생했고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촉진했으며 베이컨 철학에 의해 범위가 좁혀지고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 풍조는 새로운 기계에 대한 커져가는 열광과 그러한 장치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대한 열렬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다른 한편으로, 역학, 화학, 현미경 관찰, 정성定性 천문학은 이제 막 태동했고 새로운 탐구 분야로의 진입 장벽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시계공, 렌즈 제작자, 정밀 도구 제작자 같은 고도로 숙련된 수공업자와 과학자가 발상과 제안을 주고받은 사례는 많다." "아울러 유럽에는 학자와 수공업자 이외에도 학자나 수공업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은 아마추어 과학자 집단이 대규모로 존재했고 그 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 초기 과학의 진보에서 이 명인virtuosi들이 했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확실히 숙련공들이 수행한 역할보다 훨씬 컸다."(48-9)


1장 유럽, 시계를 만들다


"종은 중세 도시 생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종은 공동체의 삶을 지배했고 종소리는 〈만물을 질서와 평온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모두가 종소리의 의미를 알았고 종소리는 언제나 메시지를 전달했다. 종소리는 시각을 알려주고, 불이 났거나 적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군대나 평화로운 모임에 소집하며, 잠자리에 들 때, 일어날 때, 일터에 나갈 때, 기도할 때와 싸울 때를 알려주고 장을 열 때와 닫을 때를 알리고, 교황의 선출과 국왕의 즉위, 승전을 축하했다. 널리 퍼진 믿음에 따르면 종소리는 폭풍과 전염병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도시와 교회, 수도원이 아름다운 종이나 소리가 맑은 종을 갖는 것은 그곳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효율적으로 종을 치는 장치도 개발되었다. 톱니바퀴와 왕복 지렛대로 구성된 이러한 장치들이 기계식 시계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다."(54-5)


"도시는 급성장하고 있었고 새로운 도시 문화가 전례 없이 활발하게 꽃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종 제도와 전통, 기득권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될 경직성에 아직은 발목이 잡히지 않았을 때였다. 13세기는 대학과 고딕 성당의 확산, 조토 디 본도네와 조반니 치마부에가 가져온 미적 혁명,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찾고자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하려는 유럽인 최초의 시도를 목격한 시기였다. 그 세기 후반에는 최초로 대포가 제작되었다. 기계식 시계와 대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것이 전적으로 우연은 아니다. 두 가지 모두 수적으로 또 질적으로, 금속 직공의 괄목할 만한 성장의 소산이었으며 뒤에 가서 보겠지만 초창기 시계 제작자 다수가 또한 대포 제작자였다. 대포와 기계식 시계의 동시 출현은 유럽식 발전의 특징을 증언하는 것이면서 또한 앞으로 전개될 양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56)


"시계, 특히 커다란 공공 시계는 당시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시계를 설치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시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은 대개 지역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시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는 특별히 임명된 〈관리장〉의 정기적인 임금까지 포함되었다. 시계를 설치할지 말지의 문제는 종종 길고 열띤 논쟁 끝에 결정되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의 공공 시계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본질적으로 유용한 물건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58-9) "아무도 시계가 없거나 극소수만이 시계를 휴대하고 있던 시대에 시각을 알리는 공공 시계의 유용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실용성만이 언제나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다. 일보 도시들은 15세기 한 프랑스 문헌이 표현한 대로, 〈도시를 빛낼 크고 훌륭한〉 기계를 갖고 있다는 명성을 두고 다른 도시와 경쟁했다." "따라서 도시의 자부심, 실용성, 기계에 대한 관심이 결합하여 비교적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시계의 확산이 촉진되었다."(64)


공공 시계가 보급되면서 점차 가내용 시계가 확산되는 길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추가 유일한 원동력인 한 가내용 시계는 쉽게 옮길 수 없었다. 그것들은 받침대로 받쳐야 하거나 벽에 단단히 고정시켜야 했다. 쉽게 옮길 수 있는 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류의 원동력을 고안해야 했다. 동시대의 누군가에 따르면, 위대한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태엽 장치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1410년이 되자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태엽〉으로 돌아가는 시계를 제작하고 있었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증거로 보았을 때 시계에서 태엽을 사용하게 된 시기는 적어도 15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태엽 발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태엽의 발명으로 쉽게 운반 가능한 시계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에 가서는 손목시계와 회중시계 같은 휴대용 시계의 제작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76-7)


"대부분의 시계가 쇠나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공공 시계였으므로 시계 제작자들이 대장장이나 자물쇠공, 총포 대장장이, 일반적인 금속 노동자인 것은 이해할 만한다. 하지만 가내용 시계와 회중시계가 점차 흔해진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상황은 변했다. 더 작은 시계들은 값비싼 장치였고 부유층이 소유했다. 시계는 사치품이라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시대를 특징짓는 장식 과잉 열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새로운 유행을 만족시켜야 하는 수공업자들은 이제 대장장이나 자물쇠공보다 보석 세공인의 기술이 필요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커다란 공공 시계 제작자〉와 〈작은 시계 및 회중시계 제작자〉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직 일반화된 현상은 아니었지만) 시계 제조업이 두드러진 산업으로 발전한 제네바 같은 중심지는 시계공들이 눈에 띄는 사회적 지위도 획득했다."(83-4)


"18세기가 밝아오자 런던과 제네바는 유럽 시계 제조업의 최대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두 중심지의 부상과 더불어 시계 제작 및 상업에서 새로운 원原산업적, 원原자본주의적 작업 방식이 출현했다. 특히 17세기 전반기 이후 시계 제작이 발달한 지역의 수공업자들은 특정 부품 생산을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태엽 제조공이 최초로 출현한 전문 직공으로 보이며 다른 전문가들도 곧 뒤를 따랐다. 18세기 초에 런던 클라컨웰 지구의 여러 거리들은 탈진기 제조공, 선반공, 원뿔형 도르래 절단공, 비밀 태엽 제조공, 마감공 같은 직공들이 차지했다. 이미 1701년에 회중시계 제작은 분업의 이점을 증명하는 실례로 꼽혔다. 제네바에서는 두 전문 직공 집단이 시계공 길드와 구분된, 자신들만의 길드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따라 조립공들은 1698년에, 조각공들은 1701년에 길드를 조직했다. 이러한 발전은 자연히 다른 직종에도 영향을 미쳤다."(106-7)


2장 중국, 시계와 조우하다


"대포를 탑재한 원양 범선으로 유럽인들은 대해의 주인이 되어 이슬람의 해운과 교역 대부분을 파괴하고 아시아 내 무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세계 무역은 본질적으로 아메리카에서 동쪽의 유럽으로, 그곳에서 다시 동쪽의 아시아로 다량의 은이 유출되고 그 반대 방향으로는 다량의 상품이 이동하는 것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서양인들에게 서양 상품에 대한 동양의 낮은 수요는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아시아의 제품들이 주요 경제 부문에 걸쳐 유럽 시장에서 유럽의 상품과 성공적으로 경쟁한다는 사실이었다. 브리스톨의 상인이었던 존 캐리가 표현한 대로 〈동인도 무역은 우리에게 매우 해로운데 우리의 정금을 수출할 뿐 우리의 상품이나 제품은 거의 수출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제조된 상품을 수입해와 우리 제품의 소비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으니 기계식 시계가 그중 하나였다."(118-22)


"시계는 예수회원들이 베이징의 궁성 문을 열 때도 활약했다. 소문에 따르면 예수회원들은 예를 갖춰 조정에 나가 황제에게 시계 두 점과 다른 공물을 몇 점 바치고 싶다고 간청했다. 시계 가운데 하나는 쇠로 만들어졌고, 도금된 용과 독수리 및 기타 형상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형 시계였다. 나머지 하나는 도금을 한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태엽으로 돌아가는 작은 시계였다. 둘 다 종을 치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었다."(125) "〈스스로 울리는 종〉에 대한 천자들의 애착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17세기와 18세기 내내 시계와 자동 창치, 그리고 그와 비슷한 아름답고 신기한 장치들이 끊임없이 베이징의 황궁으로 흘러들어갔다. 강희제(1662~1722년 재위)는 황궁에 크고 작은 시계를 만드는 제작소를 차리기까지 했고 특유의 유연성을 보인 예수회원들은 예수회에서 전문 시계공을 선발해 중국 선교단에 포함시켰다."(129)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의 중국인들은 서양 시계와 천문학의 관련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서양 시계를 장난감으로, 오직 장난감으로만 보았다." "16세기 말에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중국인들이 유럽의 어떤 물건에도 관심이 없지만 〈온갖 종류의 렌즈만은, 특히 형형색색의 렌즈만은 구입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유럽인들이 렌즈를 가지고 현미경과 망원경, 안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동안 중국인들은 렌즈를 멋진 장난감으로 사용했다. 시계도 마찬가지였다. 렌즈와 시계, 여타 기기들은 유럽 사회가 느끼던 특정한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개발되었고 그 필요는 다시 유럽이 자신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기계 장치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었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중국인들은 그것을 그저 재미나고 특이한 물건으로 대했다."(131-2)


"중국의 관료 정치 및 관료제적 구조가 중국 수공업자들의 잠재력이 꽃필 기회를 방해했다고 볼 근거가 있다." "꼭 금전적으로 표현된 유효수요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다른 보람 있는 자극들이 수공업자들을 독려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옛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수공업자를 대하는 당시 관리들의 태도를 두고 권력 남용의 무수한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쉽게 일축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명대 중국의 지배적인 사회문화적 가치 체계는 실제로 수공업자와 기술을 천대했다. 올바르게 지적된 대로, 〈예술가artist와 수공업자artisan는 서로 다른 인종이나 마찬가지였다.〉 〈교양 있는 중국인은 수공업자의 작품을 감상할 때 마치 비버의 영리한 작품을 살펴볼 때처럼 놀랍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명대 중국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 체계는 수공업자를 억압하고 응용과학과 과학 기술의 진보를 방해했다."(147-8)


"사실 아래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모호하고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왜 중국은 시계와 대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왜 중국은 산업화로 나가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암암리에 비중국적인 조건에서 중국을 평가한다. 그러나 로빈 G. 콜링우드가 썼듯이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을 두고 두 방식 모두 같은 것을 이루려 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바흐는 베토벤처럼 곡을 쓰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테네는 로마가 되려고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록펠러 재단의 이사가 한 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왜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중국이 유럽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가라는 묻는 것은 다소 예의 없을 뿐 아니라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150-1)


에필로그


"시계가 등장한 직후부터 사람들은 활동 시기를 서로 맞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시간에 무척 민감해졌고 궁극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일은 필요이자, 미덕, 집착이 되었다. 따라서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계를 갖게 될수록 다른 사람들도 그와 유사한 장치를 가져야만 했고 기계는 자신이 확산되는 조건을 창출했다. 그와 동시에 시계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을 바꾸고 있었다. 유럽의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불가항력으로 진행되었다. 균등한 시간 체계가 계절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불균등한 시간 체계 그리고 그 밖의 시간 구분 방식들을 대체했다. 〈첫 미사 시간〉이나 〈저녁 기도 시간〉 같은 표현들이 완전히 폐기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동일한 길이의 〈시계의of the clock〉 시간(정각o'clock)이란 더 추상적인 표현이 점차 자리를 잡았고 마침내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156-7)


"기계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나 〈중립적인〉 도구는 아니다. 우리는 기계를 사용하면서 기계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생텍쥐페리는 〈기계는 조금씩 인간성의 일부가 될 것〉이며 〈모든 기계는 자신의 기능 속에서 원래의 정체성을 잃고 점차 [인간의] 녹이 끼게 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기계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우리 역사 점차 녹이 껴가고 있고 인간사를 다루는 데 언제나 유용하거나 이롭지많은 않은 기계적 세계관에 조금씩 물들어간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다는 대로 〈기계가 끼치는 해악은 인간 자신도 기계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만이 기계를 그렇게 덮어놓고 비난할 것이다. 우리는 갈수록 더 많은 기계와 더 좋은 기계가 절실하다. 경제와 기술의 발전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계를 좋고 훌륭한 용도로 쓸 수 있도록, 철학의 발전과 인간사를 다루는 능력의 발전도 간절히 필요로 한다."(1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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