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 - 국제적.국내적 계급관계의 관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모노그래프 54
김수행.박승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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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 체제에 대한 평가가 왜 쟁점이 되는가?


"동아시아 발전모델에 관한 논쟁은, 신고전파 이론에 의거해 시장기구의 역할을 강조하는 시장중심론, 자율적인 국가에 의한 시장개입의 유효성을 강조하는 발전국가론, 유교문화의 역할에 주목하는 유교자본주의론, 동아시아지역의 특수한 지정학적 여건에 주목하는 국제주의적 시각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국제주의적 시각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관점은 모두 주류경제학의 패러다임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고, 시장중심론의 한계를 발전국가론이나 문화론이 보완하는 형식으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논쟁의 초점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제3세계에서 예를 볼 수 없는 고도성장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었는가"이므로, 이 논쟁에서는 논점의 차이와 대립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반면 정치적 독재는 고도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측면 또는 필요악이었다는 관점이 암암리에 전제되고 있었다."(2-3)


2 민족경제론 : 박정희 체제에 대한 정통적 비판


"민족경제론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이 추구하는 외자의존적 수출공업중심의 개발정책은 한국경제의 대외종속성을 강화하며 경제의 대내적 분업관련을 파괴해 불구적이고 파행적인 경제구조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자립경제의 확립을 점점 더 어렵게 하고, 매판 독재정권을 점점 더 강화하며, 한국경제는 대외종속에 따른 경제잉여의 유출과 외채위기로 파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민족경제론은 1950~60년대의 제3세계 혁명이 제기한 '자립적 민족경제의 건설'과 '매판 독재정권의 타도'를 슬로건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한국의 진보진영에 의해 크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자립경제'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제시하지 못했고, 어떤 경로를 통해 '파국'이 불가피한가에 대한 분석도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수출증진을 통해 고도성장─비록 '허울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을 달성하자마자 민족경제론적 관점은 점점 지지세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8)


# 민족경제론 비판

1. 한국경제의 세계시장 편입은 불이익의 측면만이 아니라 기회의 측면에서도 보아야 한다.

2. 자본주의화의 진전에 따른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대립이라는 근본 과제를 외면한다.

3. 정치와 경제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정치적 형태’ ‘경제적 형태’임을 파악하지 못한다.


3 발전국가론 : 국가의 물신화


"발전국가론은 국가의 자율성과 국가의 개입을 성공적인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박정희 정권은 대내·대외의 이익집단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어서 한국경제의 장래를 공평무사하게 계획하고 집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국가는 이익집단들이나 압력단체들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발전국가론은 박정희 정권의 상대적 자율성을 진지하게 다룬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국가론은 박정희 정권이 기존 이익집단이나 낡은 경제지식에 포획되지 않으면서 한국경제를 고도로 성장시킬 지도자와 관료들을 지니고 있었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발전국가론은 국가물신주의(國家物神主義)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16)


"물론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에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아직 정치세력으로서 힘이 없었고, 야당정치인·종교인·일반시민·학생도 군사적 폭력 앞에 당분간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 당시 남북대치와 미소냉전 상황에서 군사쿠데타 세력이 미국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 정부가 미군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가 아직도 국가재정의 큰 기둥이었으며,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호의(好意)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군사쿠데타 정권의 대외적 자율성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군사쿠데타 세력의 소시민적 민족주의는 광범한 민중을 지지기반으로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벌과 자본가들을 국내의 동맹세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박정희 정권의 대내적 자율성도 크게 제한되지 않을 수 없었다."(17)


#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부정부패

1. 부일(釜日)장학회 헌납 사건 :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 등을 소유한 김지태를 구속한 뒤, 처벌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언론 3사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토지를 헌납받아 정수장학회 설립

2. 경향신문 매각 사건 : 1965년 각 은행들이 경향신문에게 일제히 대출금을 상환할 것을 요구해, 1966년 기아산업 사장 김철호에게 매각됨.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1974년 5·16장학회(정수장학회) 소유로 넘아감.


4 개발독재론 : 발전국가론의 제도주의적 수정


"이병천은 (발전국가론을 개량하여) '국가주의 근대화 수동혁명체제'로서 '개발독재체제' 개념을 만들었다. 개발독재론에 따르면, 박정희 집권기의 '사회발전체제'는 개발독재체제인데, 이 체제가 산업화에 성공한 것은 주로 특정한 제도형태, 이른바 '복선형(複線形) 산업정책(수입대체정책과 수출지향정책의 결합)' 또는 '개발주의 제도형태' 때문이며, 부차적으로 재벌체제와 노동의 '헌신(獻身)'이 기여했다. 이병천은 근대와 현대의 세계경제사에서 국가 개입이 산업화에 성공한 사례가 매우 드문 근본원인을 "국가의 지원과 보호가 새로운 생산적 부와 혁신을 창출할 수 있는 규율과 연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며, 한국 산업화 성공의 핵심요인을 "국가 지원에 성과 규율을 연계시킨, 규율을 동반한 지원제도"에서 찾는다. 그리고 "국가에 의한 시장·자본·노동에 대한 유도-통제-규율방식의 틀에서 재벌체제와 노동의 헌신이 산업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29)


"개발독재에 노동대중이 '동의'하고 '헌신'하며 나아가 '자발적으로 호응'했다는 평가와 압축적 산업화를 위해 단순한 '권위주의적 조절'이 불가피했다는 평가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런 평가는 근본적으로 박정희 체제가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에 의한 노동의 처참한 착취,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투쟁을 보지 못했고, 포악한 군사독재가 노동자들에 의한 계급투쟁과 중간계층(지식인·종교인·학생)의 민주화 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개발독재론은 박정희 체제가 단순히 '국가주도하에서 민족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하고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공통의지'로 산업화를 지지하고 노동대중이 자발적으로 산업화에 헌신했다는 비상식적이고 몰역사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30-1)


5 박정희 체제에 대한 대안적 평가


"'자본축적'은 기계·기술·숙련 등에 의존할 뿐 아니라 임금수준·노동시간·노동강도 등에 의존하며, 특히 자본주의적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는 전자를 규정하는 생산력보다는 후자를 규정하는 자본-노동관계, 즉 생산관계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즉, 자본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적 발달은 기계·기술·숙련 등 생산력의 발달을 가져올 뿐 아니라, 임금노동자들을 더욱 많이 만들어 냄으로써 자본-노동관계를 경제영역 전체로 확대한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고도성장', '압축성장', '근대적 산업화' 등 생산력 차원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인 자본-노동관계의 사회적 확장이라는 생산관계 차원을 가지고 있다. 더욱 분명히 말하면, '고도성장', '압축성장', '근대적 산업화'가 가능했던 것은 자본-노동관계의 사회적 확장이 군사정권의 '독재'에 의해 압도적인 자본 우위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41-2)


"'계급투쟁'이란 용어의 관용적 사용을 엄밀히 살펴보면, 자본(또는 정치권력)을 하나의 '구조'로 전제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투쟁에만 계급투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자본을 구조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파악한다면, 즉 자본을 자본-노동의 착취관계로 파악한다면, 계급투쟁은 상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전자를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라 한다면, 후자를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라 부를 수 있다. 1960년대의 개발독재가 압도적 자본 우위의 계급 역관계에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에 의해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을 도모했다면, 1970년대의 유신체제에 의한 개발독재는 1960년대의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에 따라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형성되어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 반(反)독재투쟁과 더불어 격화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발달을 유지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었다."(45-6)


"5·16 군사쿠데타 이후 쿠데타 주도세력에 대한 지지 여부에 대해 미국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의 안정적 추진을 주요한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케네디 정부는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도 불구하고 군사쿠데타 세력이 참신한 세력으로 부패를 일소하고 경제개발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사후적으로 승인했다. 여기서 박정희 군사정권의 특수성은 군사쿠데타에 의한 집권이라는 정당성 취약 때문에 경제성장의 성과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고도성장의 성공 요인을 정책 차원에서 찾는다면, 수출지향 산업화로의 정책전환보다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른 대일청구권자금의 도입과 베트남파병 등에 의한 막대한 외자도입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이완범(1999)은 1960년대의 후진국 산업화에서 여타 제3세계와 남한의 결정적 차이는 원활한 외자도입에 있었다고 말한다."(54)


"박정희 체제의 역사적 성립과 전개과정을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하면, 제국주의·정치·경제 사이의 내적 연관을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냉전체제와 남북분단체제에서 미국은 남한을 '자유세계'(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의 본보기(show-window)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고, 군부쿠데타 정권은 고도경제성장을 통해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독재를 통해 자본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계급관계를 재구축·강화함으로써, 자본가들로 하여금 직접적 생산자들(농민과 노동자)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게 하고, 소수의 대자본(재벌)으로 하여금 중소자본을 수탈해 모든 잉여가치를 자기에게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하며, 모든 이용가능한 대내외 자원을 특정 성장산업에 투자하도록 대자본에 특혜를 부여했다. 이리하여 고도성장이 달성된 것이다."(58)


"박정희 체제의 장시간·저임금·위험한 노동은 도시와 농촌의 엄청난 상대적 과잉인구의 존재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농산물의 낮은 가격정책은 도시노동자의 임금수준을 낮은 수준으로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고 주로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을 통해 실현되었는데, 그 결과 식량의 자급률은 1962년 93.4%에서 1969년 78.8%로 급격히 저하했고, 1963~64년에 도시근로자 소득을 크게 상회했던 농가소득은 1965년을 기점으로 낮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공적사회부조(公的社會扶助)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서민들의 생계는 가족적 복지망을 통해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족적 복지망은 가족 중 누군가가 희생될 것을 강요했는데, 그 일차적 희생자는 농촌 출신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전태일의 분신 저항으로 대표되는) 노동자계급의 참상에 비추어 볼 때 제도학파의 '사회적 합의'나 '공통의지'라는 시각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사실왜곡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61-3)


"1970년대 초반의 경제위기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대응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봉쇄하는 조치로부터 시작하여 반동적인 유신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신체제는 3선 개헌이라는 헌법파괴로부터 진전된 정치적 위기와 1960년대 말 사회·경제적 위기로 나타난 종속적 개발지배연합의 재생산 위기에 대응하여 등장한 공개적 독재체제였다."(이광일 2001) 박정희 체제는 '외국인 투자기업에 관한 특례법'(1970), 국가비상사태선포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1971), 10월 유신(1972) 등 일련의 파시즘적 악법을 통해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했다. 유신체제는 노동자의 단결권 자체를 총체적으로 부인하였으며, 이런 노조부인정책은 유신체제의 적자(嫡子)임을 내세워 또 다른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한 정권기 내내 계속되어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의한 노동법 개정 때까지 유지되었다."(68)


"유신체제에 맞선 정치적·경제적 계급투쟁은 1970년대 말에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맞물린 박정희 체제의 위기에서 다시 폭발적으로 고양되었다. 1979년 8월 외자기업의 철수에 맞선 YH무역노조의 완강한 생존권투쟁은 야당인 신민당의 당사(黨舍) 농성을 계기로 여당과 야당 사이의 정치투쟁을 야기했고, 나아가 서울민사지법이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직무정지시킴으로써 부마사태로 발전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에 의해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 과정은 전형적인 계급투쟁의 역동성에 의한 것이다." "이후 노동자계급의 폭발적인 생존권 투쟁과 학생·지식인·종교인의 전면적인 민주화 투쟁에 대응하여, 지배계급의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 전두환의 또다른 군부쿠데타로 표현되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으로 상징되는 격렬한 계급투쟁으로 인해 박정희 체제는 더욱 강화된 억압체제로서만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77-9)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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