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저리 클럽
최인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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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를 떠올리면 우울이 커다란 장막처럼 둘러싸인다. 누구에겐 그 시절이 정말 신나고 행복했던 시간이겠지만 내겐, 이른바 선별고-연합고사를 보고 상위권 아이들을 선별해 입학이 허락된 곳-에서 치어 지내던 기억 뿐이라 조금도 즐겁지 않다. 중학교 때 제법 공부 좀 한다고 콧방귀 뀌던 아이들이 자신보다 더 "잘난" 아이들에게 밀려나 좌절감과 열등감을 느끼며 부적응, 격리현상(?)을 겪는다. 서정인,『강』이라는 단편 소설에 그때 우리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나와 있다. 서정인이 그 소설에서 한 말 "아, 잃어버린 것의 상실함이여!" 라는 말이 가슴에 박혔던 기억이 있다.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그마저 잃어버렸으니...

 

작가의 학창시절은 우리 때와 달리 유쾌, 발랄, 호탕했던 가보다. 그래, 우리보다 한참 앞 세대들은 그래도 낭만이 있었다고 하지. 그랬을 거라 짐작이 되기도 하고. 촌스럽고 썰렁하지만 인간적으로 웃어줄 수 있는 여유가. 아직 시가 날카롭게 살아있던 시대여서인지 작가가 책 속에 시를 많이도 인용해 두었다. 말투는 또 얼마나 예스러운지. 등장인물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으레 교양있는 척(?) 할 때 쓰는 말투로 얘기한다. 요즘처럼 "말이 짧지" 않고 조금 느리게, 핸드폰도 없고 컴퓨터도 보급되지 않던 시절답게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도 중간에 말을 끊지 않고 다 들어준다.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덧 학창시절로 돌아가게 되는데, 겨울이면 바깥보다 교실이 더 추워서 햇볕을 쪼이려고 밖으로 나가 광합성 효과(?)를 몸으로 느끼곤 했다. 교복치마가 얇아 덜덜 떨면서 스타킹 위에 체육복 바지를 껴 입으면 가정선생들이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여자는 반드시 치마를 입어야 하고 추워도 참아야 한다는 말인데 여성스럽지 못 하다는 구태의연한 얘기들을 들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 여성성에 대한 시각이 남성 위주로 되어 있었구나.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긋지긋하다. 이 소설에도 대화 곳곳에 성차별이나 여성다움에 대한 편견이 가득하다. 시대적인 분위기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작가가 종교적 색채도 지나치게 자주 드러낸다. 사상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이네.

 

의성어와 의태어 표현이 환상이다. 작가에게 사사받고 싶다. 책을 읽는 초반에는 언어도 신선하고 묘사도 탁월했다. 매력적인 인물도 등장해 기대감을 한껏 키웠는데 이야기가 갈수록 거품이 푹 꺼져 시들해졌다. 머저리클럽 회원이 6명인데 주인공과 문수라는 아이의 특징만 알 수 있고 나머지는 주변인물처럼 취급해 버리고 말아서 뭔가 아쉽고 허무하기까지 하다. 특히, 영민이라는 인물이 등장할 때 정말 재미난 일들이 벌어지겠구나 싶었는데 작가가 그 아이를 총애(?)하지 않은 것인지 요란한 등장 이후로는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주인공 이름은 참 잘 지었다. 동.순. 이름에 "순" 자를 붙이면 왠지 촌스럽고, 남자 아이라면 여자 아이로 오해받기도 할 텐데 주인공의 동글동글, 섬세한 성격을 이름에서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작명 솜씨도 뛰어나야 해. 하마터면 항렬자에 맞춰 "창순"이가 될 뻔한 내 조카 녀석도 생각났다. 지금에 와서 보니 그 이름이 더 나았을 것도 같다. 요즘엔 그리 흔한 이름이 아니니.

 

마지막엔 고교 졸업 얘기가 나와 내 졸업식이 떠올랐다. 한번도 부모님이 못 오신 것 같다. 초등학교 졸업이야 뭐 의미 없고 중학교 땐 큰언니가, 고등학교 땐 넷째 언니가 와 주었고 대학교 땐 큰언니 대학원 졸업이랑 날짜가 겹쳐서 엄마는 큰언니 졸업에만 신경을 쓰셨다. 막내 딸이 졸업하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으셨다. 생각해 보면 엄마답다 웃음이 나지만 그때만 해도 조금 서러웠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특별한 날엔 짜장면이었는데 그 이후론 다른 맛있는 음식들이 많아져 짜장면이 찬밥 신세가 됐구나.

 

작가와 같은 세대 사람이라면 더욱 공감할 수 있겠다. 고등학교 기억이 괜찮아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느낀다면 읽어 볼 만하다. 사춘기 소년의 성장을 풀어낸 이야기는 風이 아닌 望이라는 뜻의 영화, "바람(wish)"이 훨씬 재미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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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01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아니 한겨울에 왜 교복 치마를 입히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samadhi(眞我) 2016-11-01 10:34   좋아요 0 | URL
어릴 때부터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짓이라고 봐요. 그땐 싸워야 하는 이유를 몰라 학교 체제와 싸우질 못 했는데요. 그냥 담벼락을 넘나들고 땡땡이만 칠 줄 알았거든요. 지금이라면 투쟁했을 텐데.

samadhi(眞我) 2016-11-01 10:36   좋아요 0 | URL
보시기에 좋았더라 겠죠 어떤 놈들인지.

매너나린 2016-11-01 10:38   좋아요 0 | URL
요즘엔 여자 애들 교복 바지도 입게 해주더라구요^^그래서 저희딸은 매일 바지만 입고 갑니당~~

samadhi(眞我) 2016-11-01 10:44   좋아요 1 | URL
이제야 좀 정상으로 사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