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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봉의 도시산책 - 서울의 일상, 그리고 역사를 걷다
권기봉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평점 :
서울, 그 장소에 대한 백과사전
서울은 제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이 곳을 수도로 삼은지 70년이 다 되어가기도 하며, 일제 강점기에도 식민지의 중심 도시로 36년 동안 역할해 온 곳이며, 조선왕조의 도읍으로 5백년을 훌쩍 넘긴 도시이기도 합니다. 더 멀게는 한성백제의 도읍지이기도 했으며, 고려 시대의 3경 중 한 곳으로 한반도의 중추적인 장소로 기능해오기도 했지만, 조선왕조 이전의 시대는 모두 수도 한양의 주춧돌 아래로, 혹은 한양을 둘러싼 환경의 뒷편으로 사라져 이제는 그 자취를 볼 길 없으니 논의의 실익은 크지 않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서울이 다른 많은 이들의 눈길을 조금 덜 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지역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자신의 삶의 발자취를 남겨왔으며, 어느 도시보다도 더 많은 골목길을 가지고 있어 쑤시고 다니면 다닐수록 더 오래된 발자국의 흔적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동네보다도 더 많은 삶의 상징들을 가지고 지켜오고 있는 곳인데,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조선왕조의 도읍이었기 때문에 더 화려한 많은 것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것들은 소홀히 여김받고,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며, 그렇게 많은 이들이 찾지 않는 그런 도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그런 장소들에 대한 간단한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역사 위에 중첩된 오랜 흔적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곳은 단지 유명한 곳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던 도시에, 사람의 흔적이 남은, 의미있는 공간에 대한 소고가 담긴 책입니다. 저자는 서울 토박이가 아니기 때문에 유의미한, 그러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새로운 의미를 포착해내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공간이 가진 의미를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짧지만 강력하게 독자에게 전달하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잠실이라는 지역에서 거의 30년을 살아오고, 초/중/고등학교를 다 다녔던 저 같은 이들에게,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이 주는 의미는 동네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책이 소개하는 서울의 면면이 그런 의미로 다가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라는 공간이,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세 가지 서로 다른 색깔로 강렬하게 변화해 온, 중세의 한양의 모습과, 식민 경성의 모습, 그리고 지금의 수도 서울의 모습을 차례로 거쳐 온, 그러면서도 그 세 가지 서로 다른 색깔이 중첩되어 비추고 있는 그런 모습을 독자는 맛보고 엿볼 수 있습니다. 서울은 그런 도시입니다. 하나이면서 세 가지 색깔을 다 가지고 있는. 그래서 더 강력한 하나인.
그러한 서울의 이미지는, 실은 우리는 중첩의 이미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분절된 이미지로 바라보는 편이기도 합니다. 고궁을 통해서는 수도 한양의 장중한 이미지를, 세운상가나 낙원상가 같은 건물을 통해서는 개발독재 시대의 분주한 질주를 각각 따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렇게 나뉜 이미지의 서울이 아니라, 예컨대, 한양도성 성곽 위에 자리잡은 주택과 학교 등을 비추이면서, 역사 이전에 이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는 역할을 합니다. 짧지만 그리 짧지만은 않게.
어디까지 지켜야 할 것인가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옛 흔적을 지키려는 저자의 철학에 대한 부분입니다.
저자는 조선총독부에 대하여, 과연 철거가 답이었겠느냐는 물음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조선총독부였지만, 중앙청이기도 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이기도 했던 그 장소의 역사성을 고려할 때, 건물을 이전하여 보존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는가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저자는 일관되게, 장소의 보존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아닙니다. 예컨대 경운궁(덕수궁)의 대안문(대한문)도 태평로 확장공사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나 뒤편으로 물러 앉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저 또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총독부 건물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해 그 건물을 지킬 것까지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역사적 의미는 건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건물이 자리잡고 있던 장소, 그 장소로부터의 기억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복궁 근정문 앞, 광화문 뒤, 거대하게 자리잡고 백악산의 웅장함을 모두 잡아먹고 앉아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그 장소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순간, 그 역사적 의미는 상실될 것입니다. 기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을 뿐이겠지요. 그렇다면 굳이 그 자리를 떠나 다른 곳에 자리잡은 조선총독부 건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그냥 두는 것은 더더욱 의미없을 뿐. 경성부청사(구 서울시청)나 서울역 건물을 보존하는 것과는 궤가 다릅니다. 치워야 할 건물이라면 확실하게 치워버리고, 굳이 치워야 할 건물이 아니라면 두고두고 기억되도록 보존하는 것이 낫겠지요. 그래서 조선총독부 건물과 경성부청사, 서울역 등의 건물은 따로 여길 바라고 생각합니다.
책은 금새 잘 읽힙니다. 아마 이런 류의 책을 꽤나 많이 읽기도 해서겠지만, 각 장소 당 4~6쪽의 내용과 사진으로 밀도있게 기록한 저자의 역량도 무시못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에 두고는, 무료할 때 착, 펼쳐서, 펼쳐나온 그 쪽의 장소를 가 보는 것으로 반나절을 보내는, 서울의 룰렛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사는 사람에게는 말이죠.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