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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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출간한 역사책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 느낌은 '민음사가?'였습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책들을 내고 있다고는 해도... 민음사까지 역사책을 낼 필요는 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죠. 민음사라면, 우리나라 제일의 규모를 자랑하는 서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만큼 꽤나 넓은 출판활동을 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처음에의 느낌은, 마치 대기업이 중소기업 시장에 뛰어든 듯 싶은 그런 느낌이었던 것이죠. 


조금 세세히 살펴보니, 민음사에서 저자를 '고용'하였다기보다는, '섭외'하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그런 형태의 역사서적 출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출간은 하지만 개입은 없는. 아마 처음에 가졌던 막연한 거부감은, 저자 주도의 역사서적이 아닌 출판사 주도의 역사서적이 아닌가라는 의심, 그리고 과연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출판사에서 역사적 안목을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일단, 조금 더 관심있게 들여다보니, 집필 집단이 있어서 그 곳에서 집필이 이루어지고, 민음사는 출간 쪽에만 신경을 쓰는 듯해서, 거부감이나 의심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마침 역사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책의 느낌은, 논문집을 모아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각 전문 분야를 가진 집필진이 모여서, 자신들의 전문(관심) 분야에 대해서 세세하게 모아놓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기존의 역사 관련 서적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국사 교과서 같은 경우를 예로 들자면, 우선 시대별로 - 조선 전기, 조선 후기 등 - 정치적 사건을 나열한 후에, 경제/사회/문화적인 변화를 뭉뚱그려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5세기]는 우선 시대를 세기별로 나누고 있습니다. 대표 저자의 말대로, 21세기에 걸맞는 평등을 기치로 한 새로운 사관의 정립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기존에 없었던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구분에 따른 역사관의 서술은, 분절적인 느낌이 강하게 온다는 데에서 조금 생경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지만, 시대 안에서 주목할만한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밀도있는 서술에는 꽤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단은 더 두고봐야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로 다루는 사건/현상은, 


태종의 왕권 강화

세종의 업적 중, 예악, 과학 기구, 훈민정음에 관련된 것

계유정난

경국대전


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현상을 중심으로하여, 조선 시대가 점차로 왕권을 강화시켜나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인상적인 구절이 하나 있어 언급하여 봅니다. 


민주주의 사태의 국민들이 왕정 시대의 지도자를 이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습은 기묘하다. 민주적 원리에 따라 수천만 명 중에서 뽑힌 지도자들보다 몇 명의 아들 중에서 선택된 세습 군주의 업적이 두드러진다면 민주주의 시대의 주권자인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왕정 시대의 유일한 주권자였던 군주가 최대한으로 발휘한 역량을 존경해야 하는가, 질투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와는 별도로 세종이 현대 한국인의 멘토로 군림하는 현상은 정작 세종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보낸 데 어려움을 준다. (100~101쪽) 

아마도 시리즈를 시대순으로 출간하지 않고, 15세기를 처음을 엮은 것에는, 세종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비교불가능한 군주를 제시하는 것에 대한 유혹때문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종대왕 시절의 왕권 강화는 애민 정신과 함께였다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애민 정신에 대한 서술이 세종대왕의 업적 속에 내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하필이면 1400년에 태종이 즉위한다는 부분도, 왕권 강화에 초점을 맞추어서 조선 시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므로, 15세기라는 시대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국사 교과서나, 여러 통사류의 역사 관련 서적보다는, 초점을 분명하게 하여 세세하게 들여다본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동시대의 세계 다른 나라 - 특히 중국 - 의 현상과 사건과 비교하여 세계사적인 흐름과 비교할 수 있도록 한 부분에도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그래프, 사진, 도표 등을 통해 시각적인 자극을 많이 주고 있다는 점에도 특징을 둘 수 있습니다. 종이질도 훌륭합니다. 반면에 텍스트의 양은 적다고 할 수 있죠. 책을 사면 부록으로 따라오는 작은 핸드북은, 책의 텍스트 부분만 따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읽을 양은 그만큼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통사류의 역사책을 많이 접해본 분들에게는 유용한 부분이 있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바라보는데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게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16세기]도 사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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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수학 - 세상을 움직이는 비밀, 수와 기하
EBS 문명과 수학 제작팀 지음, 박형주 감수 / 민음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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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세계의 여러 의미있는 문명이 수학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명의 5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이 되었던 것을, 다른 EBS 방영물처럼 역시나 책으로 묶어낸 것입니다.



처음에의 기대는, EBS의 다른 저작물들에게서 받았던 신선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는 지적 자극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EBS 시리즈는, 특히 '아이의-' 시리즈나, 교육 관련 시리즈는 여러가지로 볼거리와 생각할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시리즈였고, TV를 보지 않는 제게는 특히 책으로 엮인 내용이 더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있어서, 주로 믿고 사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명과 수학]은 조금 집중도가 떨어진다고 하여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다 아는 이야기라는 것이 제일 큰 이유이겠네요. 수학사 부분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경우에, 이 내용은 다 한 번쯤은 접하였을 그런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수학이라는 학문이 그렇지만, 겉핥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두 극단 중에 하나에 머물러야하는 특성상,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들은 겉핥는 내용으로 이루어집니다. 가령,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같은 경우에는, 당연하겠지만, 정리 자체에 초점을 맞출 수가 없기 때문에 정리를 해결해나가는 외적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뭐, 정리 본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용을 이렇게 구성할 수 밖에 없는 것도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지금 함께 읽고 있는 책인 [위대한 수학문제들] 같은 경우, 수학의 여러 난제들을 관련 수학론에 대한 소개와 함께 조금은 더 - 일반 대중이 보기에 -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실은 도통 내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등학교 수학 실력 정도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한 [위대한 수학문제들] 같이 어렵거나, [문명과 수학] 같이 겉핥거나, 수학에 관련된 책은 양극단에 설 수 밖에 없나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학적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분들이 [문명과 수학]을 읽게 될 경우에는, 아마도 내용이 이해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혹여라도 방송으로 보게될 경우에는, 여러가지 시각적 자료들과 함께, 방송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성 때문에라도 재미나게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텍스트는 그런 가능성을 줄여버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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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 나라 학생들을 똑똑하게 만드는가 - 미국을 뒤흔든 세계 교육 강국 탐사 프로젝트
아만다 리플리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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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수학, 읽기/독해 능력,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 아이들을 따돌린 "공부 열심히 하는" 한국 학생들에 대한 기사는 많이 읽어 봤다. 그러나 '수업 시간에 거리낌 없이 자는' 한국 학생들에 대해서는 읽어 본 적이 없다. 급우들의 행동을 보상이라도 하듯 애릭은 더 곳꼿이 앉고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다렸다. 

그러나 선생님은 전혀 동요 없이 계속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났다. 10분밖에 되지 않는 쉬는 시간은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여학생들은 책상 위에 앉거나 뒤집어 놓은 쓰레기통 위에 앉아 수다를 떨거나 전화로 문자를 주고받았다. 남학생 몇몇은 연필로 책상을 드럼처럼 때리며 놀았다. 다들 교실에 자기 집 거실이나 되는 것처럼 묘하게 편안해 보였다. 

 다음 시간은 과학이었다. 다시 한 번 3분의 1은 잠을 잤다. 거의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었다. 수업 시간에 저렇게 맨날 자면서 한국 아이들은 어떻게 그런 기록적인 성적을 낼 수 있었을까?

(90쪽~91쪽) 

이 책은 알라딘 사이트의 '이 주의 신간'에 소개된 책을, 소개된 내용을 본 후 한 번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매 후 읽어본 책입니다.


그 주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 대한 부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처한 교육적 상황을 적은 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꼭 읽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기대와는 달랐지만, 독서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이 책은 '미국' 교육에 관한 책입니다. 그 단초는 PISA 시험입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 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시험은, OECD에서 개발한 국제시험으로, 2000년에 시작되어 지금도 그 공신력을 인정받으며 치루어지는 시험입니다. 주로 문제해결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물어보는 이 시험은, 지금까지의 유형과는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의 현재 실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세계 제 1의 강대국으로 알려져 있는 미국의 몰락과, 핀란드, 한국의 탁월한 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부터 시작하여, 언론인 신분의 저자는, 미국 교육의 문제점을, 미국에서 다른 나라 - 핀란드, 한국, 폴란드 - 로 교환 학생 신분을 가지고 공부하러 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조명하는 방식과 함께, 자신이 취재하고 조사한 이야기를 교차서술하면서 문제의 본질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이상은 핀란드의 예입니다. 


핀란드에서는 교사가 되기 위하여 높은 수준의 자격 요건이 필요합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입학 점수가 필요하고, 예비교사로서 빠듯한 과정을 이수해야 합니다. 그러한 교원의 자질은 학생들과 사회로 하여금 존경심을 가질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한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사는 학문적 엄격함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학생들과 사회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4쪽)


'엄격함'이란 단어는 바로 미국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주요한 키워드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세대간의, 인종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합니다. 그런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교육에서는 역기능의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세대간, 인종간의 다양성이 교육적 성취에 대한 다양성으로의 인정으로 전화되는 순간, 아이들은 조금 못해도 용인되어버리는 학교 문화가 조성되게 되고, 그것이 학생들의 성취를 더디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자는 다양성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이해가, 교육의 측면에서는 배척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높은 성취를 가진 나라들이 드러내는 것처럼,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을 통해서 학생 성취의 기준을 제시하고, 수준 높은 교사진에 의해서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이 운영될 수 있는 시스템이 바로 미국 사회에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폴란드의 예는, 미국 사회의 빈부 격차가 학업 부진의 이유가 되지 않음을 설명하는 예로 여겨집니다. 동구권을 지배하던 이데올로기를 벗어버리면서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폴란드는 사회 전체적인 가난함 속에서 빈부격차도 벌어져 있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PISA에서 미국보다 좋은 성과를 거두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엄격함에 대한 키워드를 개혁의 본질 속에 심은 폴란드를 통해, 미국 사회도 그런 엄격함을 다양성의 존중에 앞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저자는 하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우리나라의 예는, 핀란드가 가진 이상적인 모습도, 미국이 가진 문제 투성이의 모습도 아닌, 제 3의 영역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엄격함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것들이 다 좋은 길은 아니다. 한국의 '다람쥐 쳇바퀴'는 그것이 해결한 문제만큼이나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냈다. 기쁨이 없는 배움은 좋은 시험 성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회복력이 좋은 '탄력 있는 세대'를 만들어 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런 식의 끊임없는 공부는 오래갈 수 없다. 한국 아이들의 그 유명한 공부에 대한 열정은 대학 입학 후 극적으로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그러나 한국의 '쳇바퀴'와 미국의 다른 여러 나라의 '바운스하우스'를 고르라면 - 말할 것도 없이 말도 되지 않는 선택 조건이지만 - 망설이면서도 나는 결국 쳇바퀴를 선택할 것 같다. 맞다. 가차 없고 과도하긴 하지만 동시에 더 정직하다는 느낌이 든다. (303쪽) 

저자는 우리나라의 사교육 시장이, 자유 경제 체제 아래에서 효율성을 추구하는 가장 극적인 예시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연 PISA의 탁월한 결과가 사교육 덕택인지에 대해서는 그 대답을 유보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자의 생각은, 미국이 핀란드의 길을 걸을 수 없다면 한국의 '쳇바퀴'도 나쁘지 않다, 정도로 정리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교육의 이상향은 아닌 셈이죠. 그 결과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끌리지 않는...



책을 읽은 후에, 저자가 유보한 우리나라의 현상에 대한 판단을, 저는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핀란드의 예시처럼, 좋은 시설이 교육 환경을 도와주지는 않지만, 교사의 탁월한 역량을 통해 엄격함 속에서 아이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학생들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신뢰를 보내는 것이 성공적인 교육에의 결과로 드러나겠지만, 우리나라는 엄격함에 대한 면이 공교육에서는 중학교를 지나면서 점차로 축소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주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우리나라 교수-학습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움이 일어나야하는 학교에서 배움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핀란드와 우리나라는, 적어도 저자가 취재하고 조사한 것 만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왜 우리나라의 공교육은, 핀란드처럼 수준 높은 교사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기준 아래에서 아이들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교육시키고 있는데, 핀란드와 같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배움을 자극하는 모습은 없는 것일까요?


저는, 학생들이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이 험하고 거친 사회에서 자녀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정지어버리는 학부모에 의해서 사교육이 선투입되는 상황이, 공교육으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모의 그런 단정은, 끊임없는 자녀에의 의심으로 이어져, 학생들은 자신의 실력과 자신의 꿈, 자신의 목표, 자신의 가치관을 끊임없이 어른들로부터 의심받게 됩니다. 아이의 선택을 신뢰하고 아이를 믿고 아이에게 스스로의 삶을 맡길 수 있는, 하지만 '한계가 명확하고 협상이 허용되지 않는 규칙을 정해 실행에 옮기'는 '권위형 부모'(181쪽)의 모습을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아이들이 혹시라도 지식이 주는 재미를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교육 바운더리 안에 있는 저는,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부모에게 돌릴 생각은 없습니다. 공교육도 문제가 있습니다. 다만, 실은, 세상 어디에도 문제 없는 공교육은 없습니다. 태생적으로, 공교육은 문제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해답은, 공교육도, 부모도, 아이들에게 선택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발달과 성장의 여정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공교육은 학문적이며 지식에 대한 방향성에서 만큼은 타협하지 않는 엄격함으로, 부모는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라는 분명하고 불변하는 규칙으로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요. 



의도가 틀어진 독서가 되어버렸지만, 책을 잡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해보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장, 다음 주에 학교에 가서, 아이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지적이며 재미난 수업을 해낼 수 있도록, 지금부터, 늘상, 학문적 구조를 매일매일 머릿속에 갖추어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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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jddus2chlrh 2019-12-15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읽으면서 공감하기는 처음인거 같습니다.

하리야헌처크 2019-12-30 02: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찾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꾸벅)
 
독재자들 - 히틀러 대 스탈린, 권력 작동의 비밀
리처드 오버리 지음, 조행복 옮김 / 교양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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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독재자들]을 읽으려고 시도했던 것은 아마 책이 출간된 직후부터였을 것입니다. 도서관에서도 여러 차례 빌렸었고, 꼭 읽어봐야지 했던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읽지 못하다가, 작년에 책을 구매하고 올해 초에 책을 읽기 시작해서, 비로소 다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히틀러와 스탈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독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독일의 제 3제국 체제와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의 비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이래로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독재자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만화경 같은 구실도 합니다. 


꽤나 두꺼운 책이지만, 읽기에 부담스럽지는 않습니다. 의외로 술술 넘어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책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연대기 순이 아니라 주제 순입니다. 실은, 독소전쟁의 이야기를 기대한 측면도 있습니다. 전쟁사에는 문외한인 편이어서 이 책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공방을 결정지은 독소전쟁의 대략이 나와있을까 생각했지만, 책은 양 독재 체제를 주제에 따라 비교하는 그런 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두 독재 체제를 가장 잘 대조한 것은, 독일의 제 3제국은 독일의 민족적 정체성을 가장 우선순위에 둔 일사불란한 독재 체제였고, 소련의 공산 국가는 인류의 진보를 위한 이상을 가졌지만 그것을 구현할 만한 역량이 발현될 기회도 실천 의지도 박약했던 독재 체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독재 체제가 처했던 배경과도 관련이 있겠지요. 독일은 어쨌든, 1871년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급격한 공업 발전과 함께 군국주의적인 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한 국가입니다. 소련은, 그 공업 생산력이 세계 다섯 손가락에 들긴 했지만, 기본적인 체제는 농노 제도가 운영되는 지역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었던 봉건 전제 국가이면서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던 국가입니다. 두 독재 체제가 왜 하필이면 독일과 소련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참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두 독재 체제 모두 당 우선의 정치 질서를 구축하였고, 국민 전체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하나의 행동으로 움직여지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책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체주의적'이란 말은 두 정당이 '절대적인' 정당이라거나 모든 것을 포괄하거나 완전한 권력을 휘두른다는 뜻이 아니다. 그 용어는 두 정당이 자신들이 활동하는 사회의 '전체성(totality)'에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다. 이러한 협의의 의미에서 볼 때 두 운동은 진정 전체주의적 열망을 품었으며, 결코 단순한 의회 정당이 아니었다. (268쪽) 

그리고 독일이 훨씬 강력한 전체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죠. 그것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임하는 독일과 소련의 위치를 결정한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참 의아한 것은, 어떻게 두 독재 체제의 전체성 지향이 국민들에게 먹혔는가라는 부분입니다. 두 독재 체제 모두 유토피아적 국가 수립의 이상향을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제시하면서, 체제에 방해가 되는 존재에 대한 배제를 함께 구사하고 있습니다. 1936년부터 1938년에 걸친 소련의 숙청과 함께, 체제 수립 후에 지속적으로 유태인들에 대한 배제를 실시하는 독일의 경우에서 그러한 부분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독재자 개인에 대한 숭배도 강화됩니다. 배제를 통해 반대의 목소리를 사회에서 제거해 나가면서 사회의 전체성을 강화하는 것. 두 국가는 점차 전체성을 강화하면서 독재 체제를 지속해 나갑니다. 


이 부분에서 현대의 독재 체제가 용인되는 메커니즘을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두 경우에서 독재 체제의 정당성을 입증한 것은 주관적 요인(예를 들면 강한 인간들의 포부)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의 객관적인 법칙이었다. 그 결과, 도덕적 전치가 발생하여 정권과 그 대리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에서 해방되었다. 두 체제는 인간의 변덕이 아니라 생물학적 필연이나 역사적 필연이 새로운 도덕 질서를 낳고 인간의 행위를 지배했다고 주장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주장했다. 그러한 역사적 힘은 스탈린이 '진정한 지식'과 '객관적 진리'라고 부른 것이나 히틀러가 '준엄하고 엄정한 자연 법칙'이라고 기술한 것의 원천이었다. 두 독재자는 자신들의 체제가 역사적 우연이라는 생각을 거부했고, 이 점에서 그 시대에는 '옳았다'. (397쪽)

배제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도덕적 문제가 이런 방식으로 정당화되고 합리화되면서, 독재 체제의 모든 비인간적인 행위가 눈 감아지는 것이겠죠. 이 지점에서 '구국의 결단'이라는 키워드가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합니다. 


그러면서 법치주의라는 키워드도, 국가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일탈한 개인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키워드로 작동합니다. (435쪽) 그러면서 더 높은 정의 - 독일은 아리아 민족의 이상향 건설, 소련은 모든 인민을 위한 유토피아 건설 - 아래에서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은 두 독재 체제가 드러낸 공통점을 계속 지적하는 것으로써, 결국은 두 체제의 동일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독재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역자 후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독재 체제를 가깝게 살아간 놀라운 경험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 우리나라나 북한에서 - 우리로써는 의미있게 읽어볼만한 책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총 14장 9백여쪽의 분량에서 4분의 3 정도 오는 시점부터 가독성이 떨어지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습니다. 책이 잘 안 읽혀지더군요. 그 부분부터는 조금 힘들게 책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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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 한길그레이트북스 12
에릭 홉스봄 지음, 정도영.차명수 옮김 / 한길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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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에릭 홉스붐은 2012년에 타계한 영국의 역사학자입니다. 유명한 시리즈인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 3부작을 통하여 18세기 이중혁명 - 산업혁명, 프랑스 대혁명 - 에서 비롯된 19세기의 변화 양상을 잘 포착한 사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 시리즈의 첫 작품인 [혁명의 시대]를 이번에 읽게 되었습니다. 


실은, 책을 구매해서 읽기 시작했던 것은 2008년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디에선가의 서평을 보고 혹해서 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의외로 읽다가 말다가를 서너번 하였습니다. 번역서를 읽다보면 확실히 몰입도가 흐려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번역의 문제인지, 독자인 저 개인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도 읽다가 어디에선가 읽기 불편한 부분들이 생겨서 계속 읽다가 말다가를 반복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방학에, 크게 마음을 먹고 주욱 읽었고, 역시나 고비가 있었지만 결국 끝을 보았습니다. 책을 다 읽고, 역자 후기를 보는데, 역자가 중간에 바뀌었던 적이 있다는 코멘트를 보고는, 독자의 문제보다는 역자의 문제가 책의 몰입도에 더 큰 영향을 차지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약간의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책의 주된 내용은, 이중혁명이 19세기에 끼친 영향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의 양상을 기록한 앞부분과, 이중혁명으로 초래된 변화상을 기록한 뒷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저자는 이중혁명이, 분명히 사회의 모습을 혁명적으로 바꾼 것이 분명하지만, 1848년 2월혁명 이전까지는 그런 변화의 모습들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살펴보면, 19세기 사회의 급격한 변화의 모습이 이중혁명 때문이라고 기술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산업혁명은 구체적인 양상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프랑스대혁명 또한 1815년 빈 체제가 들어서면서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지나간 사건이 되어버렸다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에서 벌어지는 여러 이야기들은 정중동의 느낌을 줍니다. 19세기 전반의 시대는, 이름하여 혁명의 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지만, 동시대 사람들이 과연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인식할 수 있었을까, 라는 물음에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어쨌든, 이중혁명으로 초래된 변화가, 그 이후의 시대에 끼치는 영향은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가장 적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남긴 가장 엄청난 유산은 어디에서든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써먹을 수 있도록 마련된 정치적 격변의 모델이요 패턴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238쪽) 

혁명이란, 결국 후세대 사람들에게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인가의 여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중혁명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시대가,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으로 인한 자본주의와 공화주의의 체제 아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리즈의 첫 권은 읽는데 5년 가까이 걸렸지만, 아마 두 번째, 세 번째 권은 조금은 빠르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번째 권을 얼마 전에 구매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 볼 생각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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