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리더들을 위한 과학 입문 1 미래의 리더들을 위한 과학 입문 1
리처드 뮬러 지음, 전이주 옮김 / (주)하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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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과학을 잘 한 편입니다. 문과생이었지만, 모의고사 점수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내신도 좋은 편이어서, 대학교를 과탐 덕택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적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험 성적은 좋은 편이었지만, 지식이 축적될수록 지식간의 연계는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보자면, 물리는 파동 파트가 나오면서부터, 화학은 여러 탄소 화합물이 나오면서부터 제정신(!)이 아닌채로, 암기에 의존하여 지식을 습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비단 저뿐이겠습니까.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자신이 다루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채, 시험을 위해 지식을 꾸역꾸역 넣는 것이 일반적이겠고, 고등학교를 떠나면 그렇게 넣은 지식들은 대뇌피질 어디에선가 굳어버려 끄집어낼 수도 없는 무엇인가가 되어버리겠지요. 


그렇게 고등학교를 떠나, 문과생으로 살아가던 나날에 다시 과학을 접해볼 기회를 가진 것은 교대 2학년때 수강했던 과학과교육 1 시간에서였습니다. 그 때 강의하시던 교수님께서 '열'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머리에서 열이 난다'라고 할 때 그 열의 정체는 뭐냐, 이런 식의 이야기였던 듯 싶은데, 그 때 그 '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열에 대한 오개념, 열과 에너지와의 관련성 - 결국 열은 에너지라고 할 수 있죠 -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식이 분절적이라면 어쩔 수 없이 조각난 지식을 머릿속에 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체계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테니, 분절적인 지식을 최대한 구조화하여 넣어야할텐데... 구조화하기 위한 유목화를 위하여 지식간의 연관성을 따진다는 것에서 부닥칠 수밖에 없는 근원적 문제를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에게 분절적 지식은 마치 조립하기 전 레고 블럭처럼 무의미한 더미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 책 [과학 입문 1]은 고등학교 정도의 - 저 정도되는 - 과학 - 특히 물리와 화학 - 지식을 가진 독자가, 자신의 과학 지식을 실생활에서 확인하면서, 지식간 연련성을 강화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는 대학교에서 과학의 문외한에 가까운 학생들에게 교양 수업으로 강의한 내용을 이 책으로 엮었는데, 과학을 처음으로 접하는 이들이 읽기에는 조금 버거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진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은 두 권으로 되어있고, 저는 1권을 먼저 읽었습니다. 1권을 읽어보고 2권을 구매할지 말지를 결정하려고 했는데, 1권의 3분의 1쯤을 읽는 시점에서 2권을 구매했습니다. 물리의 중요한 핵심지식인 일과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 화학의 중요한 핵심지식인 원자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다루고, 우리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방사능과 핵에너지, 전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는 1권을 마무리합니다. 아무래도 숫자가 조금 벅찬 편이고, 주요 수식들이 복잡하게 엮여 있지만,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않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2권도 기대가 되네요.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기존에 알고 있던 과학 지식과는 조금 다른 방향의 이야기들도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과학 지식이 짧아서 책 속 내용 중 일부는 크로스체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부지런히 공부해서 여러 내용들을 명확하게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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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 - 경제민주화를 넘어 정의로운 경제로 한국 자본주의 1
장하성 지음 / 헤이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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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장하성 교수는, 많은 분들에게는 '장하성 펀드'로 알려진, 소액주주운동을 펼친 우리나라의 경제학자입니다. 저자는 소액주주운동을 통하여, 소위 재벌이라고 불리우는 대기업군의 소유주들이 자신이 창업하거나 물려받은 회사를 개인기업인 것처럼 운영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즉, 한 기업에 대하여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소액주주들을 결합하여 주주총회에서의 의결권을 실제로 행사함으로써, 기업의 창업주 또는 2세 경영인들의 전횡을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소액주주운동을 해나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분들중에, 소액주주운동이 우리나라 재벌들의 경영권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고, 이 때문에 외국 자본들이 우리나라 대기업군에 대한 적대적M&A를 시도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저자도 이 책의 일부를 할애하여 설명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충분히 설득력있다고 받아들여집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은 우리나라 경제상황을 사안별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할애하고 있으며, 두 번째 부분은 그러한 우리나라 경제상황 중에서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주목할만한 세 가지 이슈를 자세하게 다루면서,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소액주주운동의 당위성을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설명 하나 없이 강화하고 있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현재 우리나라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문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약간씩의 의문들이 들기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경제 관련 서적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경제 현상을 바라보는 경제학자들의 이야기는 백인백색인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다른 학자는 저렇게 이야기하고, 또 다른 학자는 요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고, 확연하게 갈라선 견해가 대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입장은 확연하게, 성장보다는 분배 쪽에 포커스가 맞추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성장론자들보다는 분배론자들을 더 강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저자는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장론자에 대한 비판적 논지 구성은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결국 현재 우리나라 경제 상황을 바라보는 가장 큰 대립은 성장과 분배이기 때문에, 책이 성장론자들의 논지를 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분배론적 견해를 밝혔으면 좋았겠지만, 이 책은 같은 분배론자 중에서도 특히 재벌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통해 성장 동력을 유지하면서 분배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같은 분배론자 중에서, 저자의 소액주주운동이 결국 우리나라 기업의 성장동력을 깎아먹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견해를 가진 분들도 있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 대해서, 소액주주운동을 통한 기업 견제가 왜 타당하며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는데에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항상, 대명제보다는 지엽적 주장에 더 많은 설명을 할애하는 것을 보면서, 사실은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현상에 대한 문외한이 보기에, 이 책은 꼭 읽어볼만한 부분을 여러 가지로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책이 잘 읽힙니다. 지금 읽다가 멈춘 책 중에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과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저의 손길을 다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책들은 읽기에 약간은 버거운 부분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론적으로도, 현상적으로도. 그런데 저자의 이 책은 우선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을 전체적으로 톺아주면서,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점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간결하게 붙여나가면서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저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런 상황이 친숙하기 때문에 책이 쉽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 주석 부분을 빼고 600쪽 - 책이 술술 읽힌다는 것은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한 짧고 간결하게 중요한 키워드를 잘 정리하여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영미형과 북유럽형의 자본주의는 둘 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지만 전자가 시장 효율성과 경쟁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민주주의와 공정성, 연대 등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존 체제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신자유주의의 개념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중략)


'프라사드의 주장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말하는 정책 프로그램은 어떤 정연하게 체계화된 경제 이론이나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각 나라가 처한 정치경제적 현실에서 경쟁하는 정치 세력들이 선거 승리를 위해 유권자들에게 제시했던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일련의 정책 대안들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관한 많은 연구들은 신자유주의를 경제 이념으로 논의하기보다는 1980년대 초부터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에서 나타난 규제 완화, 개방화, 민영화, 자유화, 세계화, 작은 정부 등으로 상징되는 일련의 시장 기능의 확대와 정부 역할의 축소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경제정책들로 정의한다. (126~127쪽)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예로 들자면, 저자는 신자유주의를 개념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현상적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론적 바탕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1970년대 케인즈 식의 자본주의가 보여준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나타난 일련의 정책들을 통칭하여 신자유주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견해는 책의 이후 부분에 충분히 반영되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논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조금 거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큰 줄기는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개발 연대의 계획경제체제에 변화를 시도하고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으로 볼 수 있다. (중략) 계획경제의 마지막 단계이자 시장경제로의 전환의 일환으로 김영삼 정부는 출범과 함께 '신경제 5개년 계획'을 1993년부터 추진했지만 1996년에 조기 종료 되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의 5개년 계획은 몇 가지 의미 있는 개혁을 했다. 1993년에는 모든 금융거래에 실명을 의무화하는 '금융실명제'가 도입되었다. 1994년에는 계획경제의 상징이자 주무 부처였뎐 경제기획원이 폐지되고, 재무부와 통합되어 재정경제원으로 변신하였다.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로써 1995년부터 민영화를 포함한 시장 자유화 정책들이 추진되었다. 이렇게 보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된 것은 1995년이라 볼 수 있다. (79~80쪽)


저자의 이러한 견해도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계획경제하에 있다가, 본격적인 시장경제로 전환된 시기를 1995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2000년대 초반의 경제 정책을,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라고 보기보다는 시장경제체제를 강화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견해처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기존의 케인즈식 자본주의의 반동으로 나온 것이라고 할 때, 우리나라에서 드러난 2000년대 초반의 일련의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케인즈식의 강력한 국가 개입을 통한 분배적 경제 시스템을 구축한 적이 없기 때문에, 2000년대 초반의 경제정책을 그에 대한 반동의 의미로써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명료하게 표현하면서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경제 상황을 리뷰하고 있으며, 저자가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사례들을 예로 들면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함으로써 편안한 독서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저자의 결론은, 궁극적으로는 민주적 절차를 통하여 분배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것인 듯 싶습니다. 저자는 존 롤스의 정의론을 가지고 와서, 사회적 약자가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이 분배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사회 전체의 합의 과정을 꾸준하게 거쳐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결국 분배가 당위성을 얻기 위해서는, 분배의 객체인 고소득층 시민들이 당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절차를 민주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기업의 내부유보금에 대한 기나긴 설명과 문제점 지적 끝에, 초과 내부유보세를 부활하자는 견해와 함께, 누진적 직접세를 강화할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익에 대한 배당 지급 및 임금 인상을 통해서 자본의 분배를 실현하며 - 저는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 '업무 존속 기간'을 기준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자는 주장도 펼치고 있습니다. 


분량은 무겁지만, 독서는 가볍게, 그러면서도 여러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독서가 되었고, 몇몇 부분에서는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인 틀에서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한 서른 부분 넘게 스크랩 해 두었습니다. 하나하나 소개하고 싶지만, 일독을 권하는 것으로 갈음하여야겠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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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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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저자는 전우용 씨입니다. 역사를 전공하신, 역사학자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저자는 이전부터 여러 현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역사학자답게 역사적 사실 속에서 반추하는 트윗으로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저자의 트윗을 다른 경로로 - 저는 트위터를 하지 않습니다 - 접할 기회를 가지면서, 저자의 탁월한 통찰에 고개를 끄덕거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서울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 담긴 책을 여러가지로 검색하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저자가 누구인지 안 후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구입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1'


이런 종류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여행에 관심을 가지면서였습니다. 


어릴적 부모님따라 다녀왔던 동해안 해수욕장이나, 교회 수련회 등의 특수 목적의 장소가 아닌, 여행을 위한 여행을 해 봤던 것은, 결혼하기 전에는 2박 3일의 부산행이 유일한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은, 학비를 벌어서 학교를 다녀야했던 고학생에게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일이었기에, 스물 다섯 살의 초여름 어느날, 동기 녀석이 살고 있던 부산에 잠시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신혼여행을 가기 전까지는 여행이라고 하는 것을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결혼을 해서도, 딱히 여행을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우선 면허가 없었고, 따라서 차도 없었습니다. 면허를 따고 나니, 학원 강사 신세라 어디로 갈만한 시간 여유가 없었고, 둘째 낳고 세 번째 대학 생활을 하고, 돈을 벌고 하다보니, 역시나 여행을 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어느 날, 불현듯 부산에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09년의 석가탄신일 날, 당일치기로 부산행을 감행했었지요. 아침 여덟시에 출발해서, 첫 기착지인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에 도착한 것이 오후 네 시. 자정 무렵까지 단지 여덟 시간 동안 부산 공기를 맡기 위해서 왕복 열 여섯 시간의 운전을 결행했던 그 이후로, 지금까지 시간이 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바쁜, 그런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여행에 대한 의문이 든 것은, 아마도 재작년 전주 행이 직접적인 이유였다고 할 수 있겠고, 더 나아가서는 서울의 인사동, 삼청동 등지에서 느꼈던 의아함이 그 단초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어번의 인사동 행은, 왜 여기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고, 삼청동 행은, 이 곳이 왜 이런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당일로 다녀온 전주 행은, 그런 제 의문을 확실한 무언가로 만드는 그런 여행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한 세기 넘게 지속된 오리엔탈리즘 학습은 토속적인 역사, 죽은 역사는 즐거이 상품화하면서도 아직껏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는 아프고 창피하다는 이유로 감추고 숨기는 태도를 깊이 심어주었다.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떻게 생겼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대장간은 후딱 복원하면서, 난지도 역사를 살아서 증언해온 구조물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허물어버리는 이율배반의 시대가 21세기형 '역사의 시대'요 '문화의 시대'였다. (중략)  팔리느냐 안 팔리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한다. (10~11쪽)


무언가를 소비하기 위한 여행일 뿐, 그 소비의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는 그런 여행, 그것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알 수 없어서 한동안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작년 여름을 통째로 건너 뛰는 - 세째의 출산도 있었지만 - 까닭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은, 소비하는 여행 이상을 누릴 수 있어야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다만 명소가 어디이고 맛집이 어디인지, 어떤 숙소에서 어떻게 소비하여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그런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이 지내온 삶을, 그 곳이 가지고 있는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찾는 곳은 누군가 살던 곳이고, 무언가를 하던 곳이며, 그러면서 생각과 생각이 맞닥뜨리던 그런 곳임을 발견할 수 있다면, 여행이 주는 감동은 소비 이상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런 여정을 보낼 수 있다면, 아마 다음에도 같은 장소를 한 번 더 찾을 수 있겠지요. 그 곳의 삶과 관계 속에, 그 곳을 지내온 나의 삶과 관계도 녹아들었기에, 조금 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 그 곳은, 나를 한 번 더 당겨들게 되겠지요. 조금 벅차더라도, 이런 책이 가지는 의미는, 우리의 삶을 조금 더 풍부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2.


이 책은, 도시로써의 서울, 농촌과 대비되는 장소의 의미를 가진 서울이 지내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입니다. 책을 읽다가 '도시사'라는 학문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 도시의 역사에 대한 책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잠깐 했었는데, 마침 저자가 책 중간에 '도시사'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책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내온 역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분명하여졌습니다. 그런 서울의 역사 중에서도 특히, 이 책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점, 그러나 근대로의 이행이 일제에 의해 좌절되어가던 시기인 '대한제국'기와, 1950년부터 1960년까지, 이행되지 못한 근대의 신기루를 뒤로 한 채, 탈근대 - 가져본 적 없는 시기라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 의 몸부림이 가시화되던 시기의 서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바라보는 서울은 '결핍의 공간'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시(또는 서울)는 없는 게 없이 풍족한 공간이고 농촌(또는 시골)은 여러 가지가 부족한 빈곤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상식은 물질의 총량에 대해서만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물질에 관한 한, 도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결핍의 공간'이다. (중략) 앞에서 중세 도시의 크기를 규정한 여러 요인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이 경제적으로 가치 없는 요소들의 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생산력적, 기술적 토대를 만들지 못했던 것도 도시 확장을 제약한 중요 배경이었다. (272~273쪽) 


도시는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소비 지향적인 공간이라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견해입니다. 따라서 도시는 '생산 자체보다는 그 생산물을 분배하고 관리하는데 더 많은 신경을 쓰는(128쪽)' 인류의 모습이 드러나는 공간이며, 도시는 그러한 인류의 모습을 '지표 위에 도로와 필지, 그 위에 우뚝 솟은 건조물'이라는 '관계망이 그려낸 그림(128쪽)'입니다. 풍부하나 빈약한, 넘치는 듯 하나 메마른, 그런 공간 중에서도, 특히 서울이라는 곳은 극장 하나, 공연장 하나 없는, 유교적 사상에 의해 계획적으로 조영된 그런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도시 서울, '그 안의 사람들과 밖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24쪽)'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는, 그러나 실은 '농촌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루이스 멈퍼드, 24~25쪽에서 재인용)'하는 외로운 공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대의식이 사라진 도시(57쪽)'을 살면서 '공간과 장소를 공유해 본 경험을 갖지 못한 채(56쪽)', 2~3m앞의 간판들에 시야를 뺏겨버려 멀리 내다볼 수 없는 그런 근시안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경박성(188~189쪽)'을 한껏 드러내며 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도 못한 채, 혹은 그것을 특권으로 여기면서 '서울과 시골 사이에 시간적 장벽을 쌓아가는(101쪽)' 그런 삶을 자랑스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골 사람이 서울에 자리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졌고, 서울 사람이 아주 낙향하는 일도 드물어졌다. (중략) 이제 부의 원천은 더 이상 농토에 국한되지 않았다. (중략)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하여 학연으로 혼맥으로 끼리끼리 뭉친 서울의 대관 나리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못 하는 일이 벗었고 안 하는 짓이 없었다. 특히 시골의 인재를 빨아올리는 빨판 구실을 해왔던 과거제가 심각하게 망가졌다. (중략) 17세기 중반부터 서울 문체와 시골 문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의 경화 자제들은 시골 유생들이 배우기 어려운 새로운 문체를 배웠고, 출제자들은 그에 합당한 문제를 냈다. (중략) 경화거족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급제할 수 있는 길을 넓혀주었고(후략). (100~101쪽) 


요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보면 느끼게 되는 것이, 획일적인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고착된 서울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온 시골의 문화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디를 가도, 거기와 같은. 풍부한 듯 보이지만, 지나치게 부족하게 느껴지는. 


아마도 서울의 특징이라기보다는, '21세기의 문화(7쪽)'가 서울을 외피로 하여 만들어낸 모습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10년 전에는 그러지 않았으니, 21세기의 문화가 분명할 것입니다. 



3. 


이 책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견해를 곁들여,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서울에 대해, 압구정과 석파정의 서울에 대해, 양란 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서울에 대해,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에 대해, 5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서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장소로써 주목하기보다는,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삶에 관련된 서울을 주목하여 보는 편입니다. 특히 저자가 가장 주목하는 '인물'은 고종 황제입니다. 고종에 대한 역사적인 견해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대원군의 것보다 더 많을 듯 싶습니다. 보통 고종이라면, 대원군 혹은 민비 - 명성황후라고도 하는 - 와의 연계 속에서 고찰하는 시선도 많지만, 몇 년 전에 읽었던 [고종황제 역사 청문회] 같은 책에서 드러나는 조금은 긍정적인 시각도 일부 존재합니다. 


이 책에서도 저자는 고종에 대해서, 나약하고 의존적인 군주였다기보다는, 나름대로의 합리성과 확고한 통치 철학을 가진 군주로써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만, '공간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공간을 설계한 사람의 의도대로만 움직이지는 않는(181쪽)' 탓에 고종의 의도는 그 방향을 곧 잃어버리고 만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긴 하지만 말이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아마도 천지가 개벽하는 것같은 급변의 시대에, 고종이 군주로서 자신의 의지를 오롯이 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4. 


이 책은, 서울의 '역사'를 '도시'의 역사 속에서, 농촌 - 시골 - 과의 관계 속에서 비교하고 있는 그런 책입니다. 장소적으로는, 경운궁(덕수궁), 종로, 청계천, 남대문시장 등을 언급하지만, 어디를 가기 위해서 읽어야하는 답사기 격의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서울을 사는 이로써, 서울에 대해서, 근대적 의미의 도시에 대해서, 거대한 위력을 휘두르는 메가시티로써의 서울에 대해서 조금은 관심있게 바라보고 싶은 분들이 읽을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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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수학 이렇게 가르쳐라
리핑 마 지음, 승영조 외 옮김 / 승산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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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 2학년, 수학과교육 1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교수님께서 다음 문제를 주셨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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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분수 나눗셈을 문장제 문제로 바꾸어보라. 


조금 당황했었다는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사교육에 십수년을 종사하면서 꽤 많은 숫자의 학생들을 가르쳐왔지만, 막상 위의 문제를 문장제로 바꾸려니 쉽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나눗셈 식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만의 문제는 아니지요. 사실 나눗셈의 수학적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위의 문제는 나눗셈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단순하게 나눗셈 기호를 곱셈으로 바꾼 후에, 제수 위치의 분수의 분자 분모를 바꾼 후에 분수의 곱셈으로 푸는, 알고리즘 - 공식 - 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가르쳐왔고 배워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나중에 어떤 아이들이 나오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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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같이 푸는 학생들이 꼭 나옵니다. 왜냐하면, 제수 위치의 분수의 분자와 분모를 바꾸어야 하는데, 분수가 아니니까 바꿀 분자와 분모가 없으니까 그냥 놔두는 방식으로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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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풀어버리는 아이들도 꼭 나옵니다. 분자 분모의 위치를 바꾸어야겠는데, 분수가 하나 밖에 없으니까 그냥 그것을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수학 부진은 이런 식으로 시작이 됩니다. 개념 없는 알고리즘의 사용, 그리고 알고리즘의 왜곡과 오답, 그런데 알고리즘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찾을 수 없을만큼 수동적이 되어버린 상태. 그렇다보니, 수능 수학 점수의 경우, 평균 점수가 40~50점 정도 나오는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즘이나 되니까, 쉬운 문제로 조금 더 배려하고, 교육과정도 조정되고 그랬으니 그렇지, 공통수학과 수1이 함께 출제되던 당시의 문과생들의 수능 수학 점수는 지수, 로그, 삼각함수 덕택에 평균이 20점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서 결정이 되곤 했습니다. 


수학포기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디에선가 수학을 포기하게 되는 이러한 현상에는,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원리의 이해 없는 알고리즘의 무한 연습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수학에 대한 흥미를 느낄 겨를도 없이, 기계적으로 문제 풀이를 해대는 그런 과정, 아이들의 수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일으켜주기보다는 수학에 대한 좌절과 절망부터 맛보기에, 수학에 대해서는 수동적으로만 대할 수밖에 없는 그런 문제. 



이 책 속에서, 저자가 결국은 '교사 탓'을 하고 있는 것을, 현재 우리나라의 공교육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수학 학습을 위해서 교사가 수학의 개념과 원리를 확고하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닌가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의 수학 교사와 중국의 수학 교사를 병렬적으로 비교하면서, 미국 교사들이 갖지 못한 '지식 꾸러미'를 중국의 교사가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 꾸러미라는 것은, 수학적 개념과 원리가 연계된 총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의 분수 나눗셈 문제 상황을 생각해보자면, 결국 분수 나눗셈의 의미는 분수 곱셈의 개념을 중시으로 정수 나눗셈의 개념 및 단위 개념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하나의 꾸러미 - 세트 - 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저도 깊이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지식 꾸러미가 중요한 까닭은, 학생들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해해야할 개념이나 원리는, 그 하위에 또다른 개념이나 원리와 연계되어 있는 까닭에, 만약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에, 그 하위의 개념이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학생은 결국 문제 해결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학의 연계성이죠.


이것이 심화되면, 학생들은 유형에만 집착하게 되고, 문제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주요한 개념과 원리를 보지 못한 채, 유형을 따로따로 학습해나가야하는 상황에 이르릅니다. 그런데 시험에는 연습한 유형대로 문제가 나오지 않죠. 유형을 아우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 유형을 아우르는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동은 결국 문제 해결에 이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형별 수학 문제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유형 연습을 하지만, 결국 유형을 아우르는 문제 앞에서 포기해버리게 됩니다. 유형별 수학 문제집은, 학원에서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유형을 해결하지 못하면, 같은 유형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풀려서, 그 유형을 외우게라도 만들어서, 아이도, 학원 강사도, 부모도, 모두 착시 현상에 빠지게 만드는 - 이제 이 유형을 해결했어 -, 그러나 이 아이는 유형을 아우르는 문제 앞에서, 결국 자신이 문제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암기하였기 때문에 개념과 원리를 이용하여 문제 해결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결국 깨닫지 못한 채, 왜 다 풀어봤었는데 시험은 못 보지, 라면서 좌절과 절망을 깊이 느끼게 되고 말지요. 


물론, 어떤 아이들은 그런 수학 문제집을 통해서도 유형 외의 문제를 잘 풀어냅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은 약간의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센스 Sense 를 가지고 문제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아이들일 뿐, 그런 아이들이 전체 아이들의 10분의 1도 되지 않을텐데, 모든 학생들이 그런 방식으로 문제 해결 역량을 키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돌아가더라도,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효율적인 학습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경험하고 시도해보면서, 개념과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한다는 것이겠고,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교사의 몫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수준에서, 특히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 안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수학적 본질에 도달하기 위한 기초적이면서도 깊고 폭넓은 수학적 사고의 역량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의 발달 단계를 고려하여 아이들이 비록 학습 역량을 향상시킬 수 없을만큼 어릴 때, 섣부르게 아이를 재촉하는 것보다, 아이의 발달 단계가 왜곡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아이를 허용하는 태도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 중에 무엇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냐하면, 저는 아이들의 발달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강요당하는 학습 역량의 향상 압력에서 벗어나서, 조금 더 자유롭게 사고의 외연을 확장시켜 나가고, 사고의 내면을 깊이있게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현재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교사가 게으를 수는 없으니, 교육과정 연구와 교재 연구를 통하여 아이들에게 방법적 지식 이전에 개념과 원리를 먼저 안내할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하며, 그것을 위해 교사가 먼저 공부하고 연구하여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 책의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를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수업 모델을 개발하고, 학생들에게 적절하게 교수하여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저자가 강조하는 바입니다. 


적어도 초등학교 교사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교사에게 중요하지 않은 과목에 없겠지만, 그 중에서도 수학은 개념의 엄밀성과 함께 개념간 연계성이 다른 과목에 비해 워낙 강하기 때문에, 현재의 초등학교 교사들이 자신의 수학적 역량을 향상시킴으로써, 학생들이 공교육 바운더리에서 개념과 원리 중심의 수학 학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면 우리나라 학생들이 조금 더 재미나게 수학 학습을 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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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접근법 - 레지오 에밀리아의 한국 적용
유승희 지음 / 양서원(박철용)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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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접근법은, 쉽게 접근하자면 유치원/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 1~2학년에서 다루는 주제별 통합학습의 한 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2009년 개정 교육과정을 시행하면서, 초등학교 1~2학년 통합 교과서가, 기존의 '바른생활', '슬기로운생활', '즐거운생활'에서, '봄', '가족', '여름' 등의 주제별 제목을 단 교과서로 단 것이 조금 더 프로젝트 접근법에 유사한 방향으로 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제별 통합학습에 대한 이야기는 공교육이 시작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길게는 Dewey의 프레그머티즘까지 가야할 듯 싶고, 책에서는 이탈리아의 레지오 에밀리아의 '프로젝트 접근법'을 통해 주제별 통합학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 4차 교육과정(1982년 시행)부터, 어쨌든 명목상으로나마 '바른생활', '슬기로운생활', '즐거운생활' 교과가 도입되었으니, 통합학습에 대한 역사는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젝트 접근법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아동으로부터 시작하는 교육과정, 즉 '발현적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지오 에밀리아의 프로젝트 접근법은 그것을 체현해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구요. 아동부터 시작하는 교육과정이란, 아동의 흥미와 관심을 토대로 교육과정을 구성해야 한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어떤가.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입니다. 국가 - 정확하게 말하면 교육과정평가원, 수능 시험을 출제하는 곳으로 유명한 - 에서 학생들의 성취수준 - 학습 이후에 학생들이 도달해야 할 목표 - 을 정하고 그에 따라 교육과정을 고시합니다. 그러면 그를 토대로 성취수준을 달성할 수 있는 도구를 선정하고 그것을 교과서라는 틀에 담습니다. 그래서 교육과정은 총론-각론-교재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 교재, 즉 교과서는 교육과정 상의 성취수준을 달성하도록 하는 도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과정 상의 성취수준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는, 교사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교과서가 국정 체제에서 검인정 체제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은 교사의 역량을 존중하고 교사가 교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자율권을 주기 위해,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 이미 그 시행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이번 2014년도에 사회과 경제 단원 같은 경우에는 교재 재구성을 해서 교육과정 상의 성취수준을 달성하려고 시도한 바 있으며, 도덕과의 경우에도 교재 대신 성취수준만 가지고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2015학년도에도 수학같은 과목은 교과 내 재구성을 통하여 교육과정 상의 성취수준을 달성하기 위한 수업을 계획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프로젝트 접근법은, 그러한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과연 아동의 흥미와 관심을 토대로 만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동의 흥미와 관심에 따르지 않는다면, 아동을 움직일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을 것이며, 아동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배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레지오 에밀리아 식 프로젝트 접근법은 비고츠키의 사회적 구성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아동의 흥미와 관심에서 시작하는 발현적 교육과정을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프로젝트 접근법은, 우리나라의 국가 수준 교육과정 상의 성취수준을,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토대로 하여 주제별로 재구성하여 프로젝트 형식으로 구성한 수업 방식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 책은 그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담은 책입니다.



아동의 흥미와 관심을 중심으로 한 교육의 실시는 지속적으로 교단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교육의 중심이 아동이며, 아동의 학습 동기를 높임으로써 아동이 행복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바일 것입니다. 주제별 교육과정 재구성에 대한 필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문의 엄밀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합니다. 하나의 학문적 이론이 그 틀을 잡아나가는데 있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있었고 그를 통해 갖추어진 학문적인 엄밀함을, 과연 아동들의 활동을 통해서 재현해 낼 수 있을 것이냐는 의문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Bruner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저부터도 약간은, 부분적으로는, 그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별 교육과정 재구성은 어떤 면에서는 필요한 부분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습동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고, 과연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을 하던 방식대로 - 교과서 중심의, 아동의 흥미와 관심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 수행하는 것이 아동의 학습동기를 고양시키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도 있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2015학년도에는 저도, 교과 전 범위에서의 주제별 교육과정 재구성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교과별로 묶을 수 있다면 - 아이들의 흥미와 관심을 시작으로 하여 -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교과를 묶어내는 주제별 교육과정 재구성을 수행해 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 준비과정에서 읽게 된 책이기도 하구요. 


다만, 그 이상과는 별도로, 실제 사례로 소개된 부분은 그다지 크게 공감가지 않는 사례였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주제별 교육과정 재구성을 통한 프로젝트 접근법 수행 사례로, '인체'라는 주제로 프로젝트 학습을 실시한 사례가 나왔고, 도덕과와 과학과, 수학과의 교육과정 상의 성취수준을 한 곳에 묶어낸 실제가 소개되었는데, 굳이 이렇게 재구성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제 개인적인 공감대 미형성의 경우라고 할 수 있는 바, 주제별 교육과정 재구성이라는 것이 교사의 흥미와 관심, 또는 교사의 역량까지도 고려해야하는 부분이기에 벌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듯 싶고, 다른 분들은 이 사례를 실제 교육 현장에서 변형하여 사용하시려는 생각을 하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성향 상, '활동 중심'이라는 방식 자체에 대한 생경함때문에 가지게 된 생각이라는 것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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