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글의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 여행을 다룬 이야기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이 나는 것은 [백투더퓨처] 시리즈입니다. 얼마 전에 디지털 버전으로 다시 개봉되어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기도 할만큼 어마어마한 시리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앎이 짧아,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 여행을 다룬 이야기에서는 항상 패러독스가 발생하는 듯 합니다. 돌아간 과거가 바뀌면서 현재에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은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에게까지 이르릅니다. [백투더퓨처]가 그러잖습니까.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순간, 당연히 과거에 터한 현재는 바뀌게 되고, 현재에 발딛고 살아가는 등장인물도, 비록 몸은 과거에 있지만 현재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되는 셈이지요. 언뜻 이치에 맞는 이야기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이 책 [11/22/63]에서의 시간 여행은 조금 다릅니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은 일회적입니다. 주인공의 단골 가게 사장인 앨 템플턴은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로 돌아가 영향을 끼친 후 돌아오면, 현재는 그 영향을 받아 변화를 일으키더라. 그런데 다시 과거로 돌아가 이전에 끼친 영향을 끼치지 않고 돌아오면, 현재가 받았던 영향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더라.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앨 템플턴은, 실수로 사냥꾼의 총에 맞아 평생 휠체어 신세가 된 한 여자 어린이가 총에 맞지 않도록 한 후에 다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현재에서 여자 어린이의 미래도 바뀐 것을 확인했는데... 다시 과거로 갔다가 여자 어린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은 채 돌아오니, 사건은 원래 예정되어 있던대로 흘러가게 되고, 비로소, 바꾸고 싶은 사건이 있다면 과거로 갈 때마다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가 더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일회적인 듯 싶지만, 과거가 바뀔 때마다 그 과거에 연결된 현재는 하나씩 하나씩 더 늘어납니다. 과거에 연결된 현재와의 끈이 하나 두 개라면 조금 밋밋합니다. 끈이 여섯 개라면 마치 기타같은 화음을 만들 수 있겠지요. 끈이 열 두 개라면 가야금 같은 선율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런데 끈이 백 개, 천 개가 된다면 그들이 이루는 화음은 더 이상 화음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존 F. 케네디의 암살을 막아버려 과거를 지금과 다르게 바꾸어버리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어마어마하게 두껍고 튼튼하며 큰 영향력을 끼치는 줄을 하나 만들어버리는 셈입니다. 제이크 에핑은 그 일을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는 화음대신 불협화음에 시달리게되고, 그 때문에 에핑은 자신의 사랑을 포기합니다. 세계가 더 큰 불협화음 때문에 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사랑 뿐만 아니라, 해리 더닝이 잘 자라 베트남 전에서 전사하는 일도, 캐롤린 풀린이 휠체어에서 내려 서는 일도, 모두 포기합니다. 이 책은 시간 여행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조금은 차가운, 조금은 사랑과 열정에 조심스러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인물을 끌어옵니다. 존 F. 케네디.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나면 존 F. 케네디에 대해서도, 시간 여행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도 안하게 됩니다. 다만, 너무나 사랑했던 자신의 연인을 잃는 한 남자가, 마치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 물론 [사랑의 블랙홀]은 주인공의 선택과 무관하게 항상 2월 2일 아침 여섯 시로 돌아오지만 - 언제라도 인생을 리셋하여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기에 자신의 사랑을 다시 시작하기를 선택하는 대신, 세계의 불협화음을 조금이라도 덜 하기 위해 자신의 사랑을 놓아버리는 그 선택에 조금은 달뜬 기분을 느끼면서 책을 덮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적같은 사랑으로 온 몸과 마음 속이 천천히 균열을 일으킨다기 보다는, 이야기의 어마어마한 스케일 속에서 이루어지는 두 남녀의 사랑을 한껏 즐기다가, 불현듯 이야기가 끝났음을 느낄 때의 한껏 상기된 기분을 느낀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요는, 여운이 길지도, 깊지도 않은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겠지요. 킬링 타임 영화를 한 편 본 듯한 느낌입니다. 시간 여행의 외피가 조금 덜 아귀가 맞는다는 느낌. 존 F. 케네디라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인물 이야기로 겉을 잔뜩 꾸민 탓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것. 괜찮은 남자와 괜찮은 여자가 괜찮은 사랑을 하는 모습을 어마어마한 이야기와는 조금 결이 다르게 그렸다는 것. 한 마디로 몰입감 있게 빠져들 수 있는 킬링 타임 소설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책의 가장 아쉬운 점은... 두 번의 독서가 필요 없다는 것이겠지요. 여운을 느낄 겨를이 없었으니, 여운을 다시 느끼기 위해 책장을 열 일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껏 읽기 위해 구매한 책을 어찌해야하나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해리 더닝의 과거가 바뀐 후에 그의 미래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엿보는 부분과, 존 F. 케네디가 죽지 않은 후에 미국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작가가 예측하여 이야기에 담은 부분 정도. 항상 개연성 있는 상상력이 주는 짜릿함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듯 싶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