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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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앤장이라는 곳은 흔히 로펌으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로펌은 아니라고 책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법률사무소죠.

조악한 이해일지는 모르겠지만, 김앤장 법률사무소에는 사장이 없습니다. 개인사업자들의 모임이라고 봐야하는거죠. 그에 대한 이야기는 금새 불법과 탈법으로 옮겨갑니다.  뭐, 쌍방대리라던지, 과다수임료라던지, 세무조사를 면제받는다던지 하는 이야기들 말이죠.

거기에서부터 저자들은 작심하고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저지르는 불법과 탈법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론스타, 삼성 전환사채 및 CD 발행, 현대차그룹 비자금, 한화그룹의 아드님 비호에까지.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맡아온 사건과 그 안에서 저질러졌을 것이라 추정되는 다양한 불/탈법까지. 

 

리는 흔히 사회가 민주화될수록 법치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법이란,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법을) 아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법치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공평무사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법치는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만 유리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법이라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법이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것이라는 환상을 많은 분들이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법은 인간이 겪는 아주 일부분의 사건만을 규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의 영역이 아닌 곳은? 그 때에는 규율된 법에 근거한 '해석'이 들어가는거죠. 그리고 해석은, 규율된 법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따라 질적으로 구분되겠지요. 

뭐, 일반적인 모든게 그렇죠. 많이 알면, 더 잘 빠져나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법치에 속고 삽니다. 촛불집회 등의 여러 사안을 보면, 국가가 어떻게 '법적으로' 개인을 억압하는지 알 수 있잖습니까? 그런 억압의 기제로 사용되는 것이 소위 '법치'국가죠. 법은,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물론 그래야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법률사무소 김앤장]에서 저자들이 이야기하려는 바는, 그런 것입니다. 법을 아는 이들이 어떻게 탈법하고, 어떻게 불법을 저지르는지. 그리고 어떻게 집단화, 조직화되어 우군을 만들어가는지. 

 

책은 딱히 (사서) 읽을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특히, 책을 읽기 전에 '김앤장에는 문제가 있을거야'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라면, 책을 읽고 나서는 '김앤장에는 문제가 있군'이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결국 책을 읽으나 읽지 않으나 심정적인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서고 싶은 예비 법조인들이라거나, 법은 평등으로 인도하는 등불이라고 믿는 분들에게는 책이 조금 충격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 권력에 대한, 특히 모피아를 위시한 경제 관료들에 대해서는,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감출 수 없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나아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하는 오랜 격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뜬금없는 이야기이겠지만요. 

아무튼 보이지 않는 권력은 무서운 겁니다. 어떻게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정부의 정책을 바꾸고, 거액의 자문료 및 수임료에 별도의 성공보수까지 받으면서도 잠잠히 묻어갈 수 있는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확장해나가고 있는 김앤장의 모습을, 저자들의 격앙됨을 애써 참고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으면서 볼 수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참고로 저는 구립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습니다. 모든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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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드래곤 라자 10주년 기념 신작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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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연히, 감상글이니까, 스포일러가 넘쳐납니다. 그걸 고려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아직 타자님의 글을 다 읽지 않으신 분들은 절대로 스크롤을 내리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D


0.

본격적인 글에 들어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제가 관리하는 홈페이지에는, 속칭 영도빠가 많은 편입니다. 따라서 이번 타자 님의 신작에 대한 소식들이 빠르게 오고 갔고, 그에 대한 기대도 많았습니다. 아울러 쓴소리도 있었다는 것을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쓴소리는 바로, 타자 님의 작품에 열광하는 많은 독자들이 있는데, 과연 그 독자들이 타자 님의 작품에 대해서 하고 있는 것이 열광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언급이었습니다. 즉, 타자 님의 글에 대한 평가는 왜 없는가 라는 말이었죠.

'굉장하다!' '놀랍다!' 이런 감탄사만으로 점철된 평가 말구요. 굉장한데 왜 굉장한가, 놀라운데 왜 놀라운가, 같은 평가 말이죠. 작품활동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나서 이제 10주년 기념작을 낸, 게다가 과작(寡作)의 작가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의 작품을 출판한 - 10년 동안 드래곤라자, 퓨처워커, 폴라리스 랩소디,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총 5편의, 분량도 상당한 글을 두드렸다면 분명히 과작은 아니겠죠 - 작가에 대해서, 작품과 작가에 대한 평가는 왜 이렇게 박하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정말 작가에게 열광한다면, 그 열광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저는 그런 지적에 별다르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냥, '이제 10년이 지난 작가이니, 작가에 대한 독자들의 평이 조금 더 다양하고 본격적으로, 그리고 조금 더 체계적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의 [그림자 자국]이, 타자 님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편으로, 쓴소리를 건네주셨던 분에게 변명아닌 변명을 드리자면... 타자 님의 작품은 읽으면... 비평할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폴라리스 랩소디]는 아직 어줍잖게나마 비평글을 써내려갈 엄두도 나질 않는군요. 다른 작품에 대해서는 어줍잖게나마, 체계도 불분명하고 내용도 빈약하고 논리성도 상당히 결여한 글을 썼지만... [폴라리스 랩소디]는 한 5, 6년째 마음만 먹고 있고 글 읽는 횟수만 늘리고 있을 뿐이지 체계적인 글을 쓰질 못하겠네요.

그런 이유가, 타자 님의 글을 읽다보면 독자의 자세가 아무래도 분석적이 될 수 밖에 없어서 그렇지 않나, 이번 [그림자 자국]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더 하게 되었습니다. 글이 마치 보물찾기처럼 얽혀있어서, 한참 글을 읽다가보면 새로운 보물을 발견하는 듯한 기분에, 보물을 하나 더 발견하려고 글을 읽지, 글이 독자의 삶에 던지는 주제에 천착하지 못하다보니까, 타자님의 글이 그렇다보니까 더더욱 그렇지 않나라는 변명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어줍잖은 감상을 시작해봅니다.


1.

이영도 氏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저는 단호하게 '이영도 氏는 어떻게하면 인간이 서로를 더욱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가에 모든 관심이 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눈을 마시는 새(이하, 눈새)]에서는 그 관심이 케이건의 말을 통해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된 편이고, [폴라리스 랩소디(이하, 폴랩)]에서는 하리야 선장과 파킨슨 신부의 말을 통해 세련되게 표현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명의 열렬한 독자로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작가의 그런 의도가 작품을 더할 수록 너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작가가 한 innerview에서 언급하였다시피, 감상론이라는 것은 딱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한국인의 감상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이죠. 특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쓰는 글들과는 달리, 소설 장르의 글은 백인백색의 감상이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독자는 모두 다른 별을 바라보죠. 그들이 바라보는 별이 같은 방향일 수는 있어도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글은 권수가 늘어날수록, 그 글 속에서 점점 같은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작가의 주제를 향한 인식이 글로는 상당히 투박하게 드러남으로써, 독자는 갈림길에서 갈등할 기회를 잃었다는 느낌 말입니다. 물론, 기껏 읽었더니 이게 도대체 무슨 글인지도 모르겠는 글이라면 정말 '대략난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등산객이 산 정상을 바라보지만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해 버둥거린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글이겠지요. 그러나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한 다양한 경로와 흥미로운 과정이 있다면, 그 정상에 올라 별 흥미로운 것을 못느끼더라도 등산에 대한 호감을 가지는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작가의 근작들은,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흥미로운 과정과 끝내주는 정상에서의 탁트인 시야는 있지만, 경로는 하나뿐인 그런 느낌입니다. 한 편으로는, 작가가 자신이 가진 이야기의 주젯거리를 섣불리 버리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흔히 그런 경우 있잖습니까? 작가의 변신. 저는 이영도 氏가 어떤 식으로 변신할지 두려운 부분도 내심 있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작가의 주젯거리를 상당히 좋아하는 바라, 바라기에는 작가가 자신의 주젯거리를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이야기에 실어주기를 바란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그림자 자국(이하, 그자)]는, 더 두고 읽어봐야 하겠지만, 그런 면에서 어중간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산은 옅은데, 길은 짧은데, 흥미로운 과정은 너무 많고, 경로는 다양하지 못합니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인생에 대한) 질문을 듣기보다는, 작가가 던지는 수수께끼를 푸느라고 정신 없이 퍼즐 조각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모양새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책을 두 번 가량 읽었지만, 작가와 속내 있는 대화를 나누지는 못한 듯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가 선사하는 모닝스타(강렬한 반전)는 독자에게 충분한 의미가 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글에서 국가에 대한 의미있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최초작인 [드래곤 라자(이하, 드라)]에서 작가는 신화로서의 바이서스를 멸망시켜버렸습니다. 길시언 바이서스의 죽음은 바로, 마법검을 쥐고 소를 타고 다니는 기사의 낭만이 종막을 고했다는 신호죠. 이제 국가는 신화와 전설로 통치되는 곳이 아닌, 제도와 법으로써 통치되는 공간으로 바뀝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저의 어줍잖은 감상 [드래곤 라자]를 읽고, 에 적은 바 있습니다.)

이제 [그자]에서 바이서스는 또 한 번의 멸망을 예언받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이서스는 국가로서가 아닌 가문으로서의 바이서스가 멸망합니다. 그러나,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자주 이런 장면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에서도, 그리고 작년 말에 우리나라에서도 왕들이 자신의 권위를 잃게 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중세적 시대 배경'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작품을 보다보니까 독자들은 작가의 모닝스타를 줄기차게 맞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바이서스의 멸망은 왕가의 교체를 상징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의 중세적 프레임은 국가와 통치자를 하나로 보고 있는데 익숙합니다. 그리고 그런 프레임은 책을 볼 때만 유효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작가는 독자를 거세게 한 대 내려칠 수 있는 것이죠. 바로 우리의 제한된 프레임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그자]에서도 그런 모닝스타들이 여지없이 작렬하고 있습니다. 가령 바이크를 타고 고글을 쓰는 이루릴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중세적 프레임 바깥에서 난데없이 등장한 작가의 장치는 독자를 깜짝 놀래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작가가 이렇게 독자의 선입견을 파고드는 방식은 독서 행위에 유의미함을 줄 수 있는 기제가 됩니다. 그것이 다만 말초적이기만 하다면 금방 싫증이 나겠지만, 이영도 氏의 그런 방식은 비록 아직은 지엽적임에도 분명히 독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극할 수 있는 부분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긍정직인 발전의 양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마법이 신화가 되고 모험이 고전이 된 시대에, 바이서스 인간들은 '공존'이라는 단어 또한 옛사전 속에나 나올만한 단어로 치부하면서 마치 지금의 우리네 삶처럼 바쁘게 휘돌아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의미있는 부닥침이 있습니다. 위험은 가능성만으로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보다 성공은 희망만으로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런 의미있는 부닥침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희망만으로도 성공을 추구하는 목소리들은, 희망에 온통 기대이질 못하고 무언가 확실한 희망을 소망합니다. 마치 [퓨처 워커(이하, 퓨워)]의 할슈타일 후작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보다 희망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허언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성공을 담보하는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랑이 결혼이나 득자/녀의 수단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절망은 희망의 전제조건도 아닙니다. 절망한 자만이 희망을 꿈꾸지는 않습니다. 희망은 그것을 꿈꿀 자들이 아무런 이유나 원인없이, 어떤 결과도 바라지 않고 희망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자]에 나오는 모든 인간들은 희망 후의 성공을 원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다그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족들을 전쟁에서 잃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확실한 성공을 담보하기 위한 도구로 희망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희망은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미 v. 그라시엘이 할슈타일 후작의 구원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그 대척점에는 '예언은 폭력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예언자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고루한 사람입니다. 위험할 가능성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자신의 예언이 얼마든지 폭력적인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예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바이서스에뿐 아니라, 우리네 삶 속에서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얼마전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이 생각납니다. 몇 백명이 한 날 한 시에 시간을 정해서 시험을 봐야하는데, 모두가 되는 시간에 딱 한 사람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한 사람만 희생을 감수하면 모두가 편할 수 있는데, 라면서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요즘은 그런 시대죠. 팍팍한 시대. 그래서 나의 한 마디가 99퍼센트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의 성공을 희망하면서 내뱉는. 그래서 요즘의 시대에 예언자같이 고루한 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신화가 되고 고전이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요즘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단어들이 고루한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겠지요.

결국 인간의 삶은 공존의 가능성을 시험받습니다. 성공을 희망하는 인간과, 위험의 가능성때문에 미래를 잃을 위험에 처한 드래곤은 자신들의 생을 걸고 무의미한 대결을 펼칩니다. 팽배했던 고립주의 때문에 드래곤은 인간과 맞닥뜨리지 않았지만 하늘이 열린 상태에선 더 이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드래곤과 인간은 무시무시하게 충돌하게 됩니다. 지금 이 시대의 곳곳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처럼 말이죠. 그것은 무가치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드래곤은 미래를 잃었고, 인간은 현재를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화해의 탁자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바로 '드래곤 라자'의 자질을 가진 인물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자]에서 예언자는 그림자 지우개에 의해 무화(無化)하게 됩니다. 예언자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예언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데, 그 빈 곳에는 드래곤과 인간의 공존을 돕는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자리잡습니다.

무화한 아버지의 아들, 그는 결국 아버지 없는 아들입니다. 그러나 사생아는 아닙니다. 아버지가 인지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도는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구도입니다. 바로 기독교의 예수님 이미지와 같은 것이죠. 아버지 없이 어머니만 있는 예수님. 그렇게 기독교의 예수님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가장 먼저 연결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사랑은 소통이 있는 것이었죠. 사랑을 위해서 반드시 함께하는... 그래서 성경 속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죠. 자신이 매개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을 소통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작가가 꿈꾸는 삶은, 모든 인류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사는 삶은 아닙니다. 작가는 종교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작가의 글은 종교적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소통을 통한 사랑의 메시지는 종교적이니까요. 그리고 작가는 마음 더듬이가 긴 인간과 상처입은 드래곤처럼 인간은 당연히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서고 싶어하는 개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테니까요.


3.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흐른다

한 편으로, [그자]는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시간의 이야기를 그대로 닮아오고 있습니다. [퓨워]가 그랬었죠. 시간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흘러온다. 인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미래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었죠.

작가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자]에서도 미래는 변하지 않습니다.

늙은 왕이 젊은 왕으로 바뀌어도, 그는 에이다르 바데타에게 죽습니다. 프로타이스가 지워짐으로써 에이다르 바데타를 살리지 못하(ㄴ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그래도 젊은 왕이 에이다르 바데타에게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미래는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은 예언자의 예언이 (어떻게든) 그대로 이루어짐을 통해 명확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언자도, 미 v. 그라시엘처럼 놀라지 않은 놀람을 놀라야하고, 슬프지 않은 슬픔을 슬퍼해야하고, 이미 기쁜 기쁨을 기뻐해야합니다. 이미 다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은 인간(본연)의 삶일까요?

인간은, 비록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뚜벅뚜벅 걸어야하는 존재입니다. 어두운 미래를 알기에 좌절하고 멈춰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비록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바로 지금 사과나무를 심어야하는 존재입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미래를 알아야 하는 존재는 (본연의) 인간됨이 아닙니다. 인간은 미래가 고정되어 있을지라도 오늘을 힘차게 살아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알게된 미래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 수동적인 인생은 스스로에게 허락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작가는 무릇 인간이 그래야만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내일 인육을 먹게 되더라도. 바이서스가 멸망을 향해 가더라도. 오늘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야 한다는 인간 본연의 마음가짐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단 강요이겠습니까. 희망은 성공을 향해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살아있기에, 혹시라도 미래가 고정되어 있더라도, 우리의 절멸이 당연한 것일지라도, 희망할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4. 그림자의 프로타이스한 자국

[그자]에서는 그림자 지우개라는 신비한 마법용구가 하나 등장합니다. 글의 전개에 핵심적인 소도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자 지우개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립니다. 전작인 [드라]에서는 영원의 숲이 나옵니다. 스스로를 의심할 때 스스로의 일부가 조금씩 파멸되어 버리는. 결국 자신을 잃게되는 공간으로 영원의 숲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자]에서의 그림자 지우개는 타인에 의해서 인간 존재 자체가 창세 전부터 무효화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의 자신에 대한 폭력이 아닌, 타인의 자신에 대한 폭력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하게 지워질 수 없습니다. 그 때 자신을 일깨우는 것은 지워진 자신 속의 흔적, 그림자 자국입니다. 그 자국이 단순한 찌꺼기라면 그것은 어떤 변화도 수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본질적인 남다른 부분이었다면, 그래서 타인에게 깊숙히 각인되었다면, 그 자국은 자신을 오롯이 회복할 수 있도록하는 기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이 '프로타이스' - 프로타이스는 글 속에서 독특한 존재로 제시된 드래곤의 이름입니다. (너무) 쉽게 표현하자면 이단아입니다. 그래서 글 속에서는 '프로타이스하다'는 표현을 남다르게 행동한다, 정도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글 속에서는 마치 엄친아같다 같은 형용사화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하게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작가의 전작인 [피를 마시는 새]에서 스카리 빌파라는 인물이 그렇게 독자를 화나게 하면서도 사랑을 받았는지를 생각해보면 유추가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떼쟁이. 인간은 떼를 써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변화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변화시켜야 하니까요. 미래가 고정되어 있기에 현재를 고정해야하는 삶의 비극은 미 v 그라시엘과 예언자라는 인물들을 통해서 충분히 넘겨보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떤 인간도 미래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미래가 고정되어 있던 아니던 인간은 끊임없이 떼를 써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변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가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죠.

작품 속에서 황금드래곤인 아일페사스에게 가미가제를 날리는 바이서스 왕국을 보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드라] 감상글을 통해 신화 시대를 뛰어넘은 국가가 이제 비로소 틀지어진 형태로 다스려지게 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가가 변질된다면? 그 변질의 한가운데에는 애국심이라는 그럴듯한 논리가 있습니다. 개인 본연이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 속에서 도구화되는 그 순간, 프로타이스는 없습니다. 그 현장 한가운데에는 변질된 '나는 단수가 아니다'가 있습니다. 내가 단수가 아니라면 복수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단수가 아니지만, 나는 하나입니다. 오롯한 하나가 되기위해 나는 단수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존재로써의 단수가 아닌 존재가 아니라, 다만 인간이 수량으로써 단수가 아닌 존재가 된다면, 그것은 국가가 인간을 도구화해버린 변질의 의미죠.

그래서 인간은 반항해야합니다. - 그래서 인간은 프로타이스해야 합니다.

칼 헬턴트의 전쟁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5.

이영도 氏의 최신작인 [그자]를 읽다보면 그의 전작(前作)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자]에서 전작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전지성은, 미래를 보는 무녀인 미 v. 그라시엘 그리고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인 노래의 불꽃 벨로린과 닮아 있습니다. 희뿌연 여명 전에 먼저 떠오르는 황금빛 드래곤은, 새벽의 사수가 쏘아 맞추었던 첫 일출을 연상시킵니다. 인간의 (조금 더 크고 자체적인 폭발력을 갖춘) 화살들이 첫 일출을 쏘아 떨어뜨리는 것까지. 따라서 [폴랩]에서 오스발이 '이 새벽에 두 태양 중 하나는 떨어져야 한다'고 말할 때의 그 느낌과도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왕비와 동거(!)하는 화가에게서 [마시는 새 연작] 속의 군령자를 떠올렸다면... 제가 너무 과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자]는 분명히 전작들의 향취가 많이 묻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당연하겠지만) 초기 두 작품인 [드라]와 [퓨워]의 것이 가장 진하죠. 발탄의 이름과 '말과 함께 친구 타기' 만으로도 작가의 작품에 익숙한 독자들은 즐겁습니다. 하물며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야물딱진 골조를 세운, 초장이 탐정의 추리소설이라면 아마 작품을 읽으면서 자신의 [드라]와 [퓨워]의 첫 독서를 추억하게 될 것입니다.

작가가 자신의 첫 작품 출간 10주년 만에 낸 기념작은, 따라서 독자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제게 [그자]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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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08-12-0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글 밑에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을 붙이시던데....동일인이시겠죠?^^

하리야 2008-12-0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그그... 그렇겠죠? :D 아직 저런 꼬릿말을 다는 이는 저 외에는 본 적이 없습니다. (하하)
 
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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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사IN]이라는 잡지에 고 이청준 선생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김승옥 선생과의 일화를 기록한 글이 있어서 제 글의 서두에 게재해봅니다. 이청준 선생에 초점을 맞춘 글이지만, 김승옥 선생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어 소개합니다. 글은 문학평론가인 신형철 씨가 글을 썼습니다.


서울대 불문과 60학번 김승옥이 있었고 서울대 독문과 60학번 이청준이 있었다. 둘 다 문학을 사랑했고 또 둘 다 가난했다. 1961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되었던 김과 이는, 김의 주도 아래 이런 작당을 한다. 우리 신춘문예에 한번 덤벼보자. 까짓 거, 한국문학 별 거 있냐. 붙는다. 붙으면 그 상금으로 다음 학기 등록을 하고 혹여나 떨어지면 미련 없이 입대하자. 아니나 다를까 김승옥은 1962년 1월1일자 한국일보에 등단작 <생명연습>을 실었다. 이청준은? 입대했다.

곱씹을 만한 데가 있는 에피소드다. 김승옥은 ‘까짓 거’ 하면서 번뜩이는 소설을 써내는 타입이었다. 쓰고 나서 통속소설이라고 자평한 게 걸작 <무진기행>이었고, 코믹한 거 한 편 써보자고 온돌방에 엎드려 쓴 소설이 동인문학상 수상작 <서울, 1964년 겨울>이었다. 그러나 이청준은 달랐다. 그는 제대 후 1965년에야 <퇴원>으로 등단한다. 이청준은 까짓 거 하면서 써내려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시사인 제48호, 2008. 8. 12일자]


위의 글을 소개하면서 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참고로 제 글에서 인용되는 본문은 문학사상사에서 출판한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대표작품집 / 김승옥] 제 5판(1994. 2. 28. 발행)에 수록된 [무진기행]의 것을 사용했습니다.



1. 60년대의 작가, 김승옥. 그리고 무진기행

흔히 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김승옥 氏가 단연 손꼽히고 있습니다. 서울대 문리대학 불어불문학과 60학번 입학, 65년 졸업.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 그리고 그의 등단작인 [생명연습]과 그의 중편 중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환상수첩]은 모두 그가 대학 재학 중인 20~25살 연간에 쓴 작품들입니다. 몇몇 꽁트를 제외하고는 24여편의 작품만을 남긴 김승옥 氏가 그의 대부분의 대표작을 쏟아낸 1960년대 초는 격동의 시기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면, 우리 민족이 민주정체를 수립한 이후로 최초의 정권교체가 반정부 시위를 거쳐 대통령을 하야시키면서 얻어낸 혁명적인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이렇게 국민들이 만들어준 정부가 1년도 채 견디지 못하고 군부 세력에 의하여 좌초한 상황 또한 혁명적인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1960년대는 그런 격동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상황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우리나라는 이승만 정권 당시의 원조 경제, 농업 중심의 경제 질서를 벗어버리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 제조업 중심의 경제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에서 [무진기행]을 살펴볼 때, 주인공인 윤희중이 어느 제약회사의 간사로 곧 전무 승진을 앞두고 있다는 부분과, 윤희중의 후배인 무진중학교 교사 朴이 가장 성공한 선배로 윤희중의 기수에서는 윤희중과 세무서장인 조를 꼽는 장면, 그리고 무진중학교 발령을 받고 서울에서 내려온 음악선생 하인숙이 끊임없이 서울행을 꿈꾸는 것들을 한군데로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무진이라는 공간이 가진 도시와의 단절성이, 무진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시에 대한 하나의 환상을 갖도록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을, 작가는 여러 세부적 장치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무진의 단절성을 안개가 만듭니다.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 주변의 것들이 마치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는 듯이 무진은 단절되고 소외됩니다.

따라서, 김승옥 氏의 소설에서 도시는 바로 산업화의 장소이자 주인공을 제외한, 특히 무진으로 형상화되는 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동경의 장소입니다. 도시는 성공의 장소이자 이상의 장소이며 무릇 사람이라면 당연히 동경해야 하는 장소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1960년대 초반의 공업 중심의 사회구조로의 재편은 우리나라의 인구 구조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 자체를 흔들어놓는 대사건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소설 첫머리에 무진을 찾아오는 시찰단의 대화는 의미심장합니다. 무진이라는 공간은 특산물도 하나 없이, 항구나 평야도 하나 없이 육만 몇천 명이 그냥저냥 살아가는 무진. 그 곳은 윤희중의 말대로 도회지의 동향인에 대해서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없는 공간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도시를 동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승옥 氏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누구에게나 동경의 공간인 도시를 탈주하고 또 탈주하고 싶어합니다. [환상수첩]에서, 선애를 잃고 영빈으로부터 문학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본마음을 '무관심한 표정으로 가려버리는 법을' 배우도록 해준 서울로부터 탈주하는 정우처럼, 윤희중도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옇든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에 '몇 차례 되지 않는 무진행'을 통해 서울에서의 탈주를 성사하였던 것입니다. 즉, 김승옥 氏의 주인공들에게 서울은 탈주의 장소일 뿐입니다. 다만 윤희중은 정우나  [서울, 1964년 겨울]에서의 김처럼 완전한 탈주 - 즉, 죽음 - 를 감행할 용기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무진기행]은 [서울, 1964년 겨울]이나 [환상수첩]과는 약간의 방향성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에 대한 부분은 이후의 글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60년대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던 시간입니다. 김승옥 氏는 이런 도시화와 산업화의 시공간적 배경의 상징물인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인간에의 '무관심'에 대한 무기력함을 시니컬하게 읊조리고 있습니다. [서울, 1964년 겨울]이 소통 없는 60년대 식의 인간상을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서 직접 다루고 있다면, [무진기행]이나 [환상수첩]의 경우에는 서울을 꿈꾸는 군상을 통하여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무기력한 고향

이런 격동의 시기에, 그러나 고향이라는 공간은 그다지 바랄만한 공간만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시나 소설에서 우리가 만난 고향이라는 이미지은, 피안의 세계이며 이데아의 공간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친 영혼을 품어주는 공간이며 인간사의 애처로움을 보듬어주는 공간인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김승옥 氏의 고향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윤희중이 돌아간 무진은, 결단코 그의 부인이나 장인의 바람대로 '한 일주일 동안 긴장을 풀고 푹 쉬었다가 올' 수 있는 공간은 아닙니다. 고향은 외려 무관심보다 더 한 무기력을 심화시키는 공간입니다. [환상수첩]의 주인공인 정우가 돌아간 고향은, 생각하지 못하는 갈대가 되어버린 시인 윤수와 폣병에 걸려버려 약값을 위해 춘화를 파는 법대생 수영, 그리고 화마에 온가족과 자신의 눈을 잃은 형기가 무기력하게 도사리고 있는 공간입니다. 마찬가지로 윤희중이 돌아간 고향은 '모두가 전쟁터에 몰려갈 때' 골방에 갇혀버린 신세의 고향이며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를 가지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기껏해야 수면제일 뿐인 무기력한 공간입니다. 고작해야 사람도 아닌 개들이나 '그 눈부신 햇볕 속에서, 정적 속에서 혀를 빼물고 교미하'는 공간일 뿐입니다.

마치 겨울바람의 스산함때문인 듯 마음이 소슬하여질 때, 우리는 있지도 않은 고향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 안온함 속에서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위로받으려 하지만, 작가는 냉정하게 그런 독자의 마음을 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고향은 안락을 주는 공간이 아니라 무력함에 몸을 비틀며 하릴없이 골방에 처박혀 오지 않는 잠을 청해야만 하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윤희중은 고향에서 쓸쓸합니다.

만날 수 있는 인물들마저 이러한 윤희중의 쓸쓸함을 심화시킵니다. 도시의 무관심을 피해 돌아온 고향은 속물들이 우글거리는 공간일 뿐입니다. 조는 하인숙을, 하인숙은 무진의 모든 것을, 심지어는 박마저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속물적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박입니다. 고향이라는 공간의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순수를 옷입고 있는 박이라는 인물마저도, 윤희중의 성공앞에서 열등합니다. 고향이라는 이미지와 가장 가깝게 연결되는 순수가, 도시의 세속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릎 꿇는 이미지를 통해서 작가는 갈곳없는 우리네 신세를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3. 유예된 죽음

김승옥 氏는 자신의 인물들을 모두 사지로 몰아넣습니다.  생명연습에서도, 서울, 1964년 겨울에서도, 환상수첩에서도, 그들은 모두 갈 곳 없어 죽음을 선택합니다. [환상수첩]에서 '될 수 있는대로 살아보'라던의 오영빈의 말은, 자신의 갈 곳을 잃어버린 정우에게도 혹은 선애에게도 단지 죽음을 확정짓는 선고였을 뿐입니다. 될 수 있는대로 사느니 그 삶을 마치겠다는 죽음에로의 선택. 선애는 뼈에 사무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혹은 한 번 쾌락을 맛본 자가 쾌락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감히 얘기할 수 있을까요? ... 아무리 발버둥쳐도 별 수 없이 눈에 보이는 구멍이지요. 찬바람이 술술 새어들어오고...' 선애의 이런 말은, 순수를 잃고 이제 생활인이 되어가는 자의 처절한 자기 독백일 뿐입니다. 작가의 눈에 그러한 자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죽음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잠시 언급한대로, 윤희중은 약간 다릅니다. 그는 군에 자원하려는 자신을 말리는 어머니,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오욕을 어떻게 넘길 줄 아는 인물입니다. 윤희중이 삶에 유연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작가의 눈에는 두 가지의 인간 부류가 있습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의 나와 안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다만 만족할 수 있는 생활인과, 김처럼 아내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순수의 죽음 앞에서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예외가 있다면, [무진기행]의 첫머리에 나오는 미친 여자나, [환상수첩]의 수영처럼 미쳐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세상의 무관심과 무기력에 대해 스스로를 단절하는, 죽음의 다른 장치이므로. 결국 작가의 선택할 길은 죽음 밖에 없습니다. 다만 윤희중은 아직 죽음을 유예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예된 죽음을 상징하는 것은 그의 아내인 영, 입니다. 4년전 그의 곁을 떠난 희 때문에 자신의 순수에 큰 타격을 받았던 윤희중은, 십수년 전에 6.25를 피해서 오욕에 떨며 골방에 갖혀있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갔던 것처럼, 서울행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유예합니다. [환상수첩]에서 순수를 찾기위한 여행을 떠났던 정우는 결국 되찾은 순수와 함께 서울행 기차에 오르지 못하지만, 윤희중은 순수와 죽음의 중간위치에 어중간하게 선채로 서울행 열차를 탔고, 자신'에게서 달아나 버렸던 여자에 대한 것과는 다른 사랑을 지금의 아내'인 영에게서 발견합니다. 자신의 순수했던 사랑을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서 상실한 채 죽음의 수렁에 직면했던 윤희중은, [환상수첩]의 오영빈이나 [서울, 1964년 겨울]의 나, 혹은 안처럼 생활인의 사랑을 가지고 지난 4년을 지내왔고, 그것은 바로 유예된 죽음입니다. 김승옥 氏의 주인공 답지 않은 생활인인 윤희중은, 그러나 이번에는 순수와는 무관하게 생활인의 일상 속에서 일어난 잡다한 생활에서 기인한 사건들 때문에 의도하지 않았던 무진행을 택하게 되었고, 이 곳에서 죽음에 직면합니다. 하인숙이 바로 윤희중을 죽음으로 안내하는 사신입니다. 하인숙이 암살자라는 말이 아니라, 하인숙은 바로 윤희중이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을 상징한다는 말입니다. 도시를 동경하는 속물들을 싫어하지만, 그 자신도 도시를 동경하며 무관심한 도시의 면모까지도 함께 가지고 있는 하인숙은, 바로 4여년 전에 윤희중의 곁을 도망가버린 동거녀 희와 같은 인물입니다. 잠못이루던 윤희중이 통금해제 사이렌과 함께 잠드는 순간에 청산가리를 먹고 죽어버린 술집여자의 죽음 앞에서, 그녀의 죽음에 무임승차하는 마음으로 윤희중은 하인숙에게 마음을 줍니다. 희를 잃고 무진으로 향했던 윤희중은, 하인숙을 얻어 서울로 향할 생각에 잠깁니다.

하인숙은, 순수와 죽음의 사이에서 다만 죽음을 유예하고 있는 윤희중의 손을 잡고 그가 잠시 잊고 있었던 내면의 순수에의 상실을 각인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성악 전공자, 순수를 조롱하며 자신의 연애편지를 내보이기도 하는,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그런 하인숙에게서 윤희중은 '감상이나 연민으로써 세상을 향하고 서는 나이도 지난' 처지에, 그녀에게서 조바심을 빼앗고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기 위해 달려가지만, 그 달려감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마치 서로 조금씩 순수를 잃어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이후를 어쩔 줄 몰라 약간의 시차를 둔 채 죽음에 이르는 [환상수첩]의 정우와 선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윤희중은 깨닫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선입관' 때문이며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그래서 윤희중은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아마 다음에, 자신이 순수를 상실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쯤이면 아마 윤희중은 죽음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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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11-08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룩하신 주님의 영광에 의지하여...
윤희중은 죽지 않습니다. 속물은... '한 가지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우기는 존재'이기 때문일까요?
야, 거의 논문 수준의 리뷰인데요...^^
이주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하리야헌처크 2008-12-06 20:37   좋아요 0 | URL
아우... 감사합니다. ^^a 부끄럽네요. (헤헤)
 
화성의 공주
에드거 라이스 버로우즈 지음, 최세민 옮김 / 기적의책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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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이건 로맨스잖아?

성공한 로맨스에 대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저는 성공한 로맨스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새로운 로맨스에 대한 시작이기도 하기에, 현재진행형 상태인 로맨스는 아마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 쿨럭 - 끝이 나겠지만, 어쨌든 결혼에 이르는데까지의 로맨스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공한 로맨스의 특징은, 그것이 더 이상의 시련과 갈등 그리고 고난으로 점철된 노정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성공한 로맨스를 찬찬히 잘 뜯어보면, 그 속에는 시련과 갈등 그리고 고난 따위는 없습니다. 짜릿한 스릴과 행복한 추억만 있을 뿐이죠. 마치, 선택되어 이미 그 끝에 도달한 갈림길이, 더 이상 갈림길이 아닌 행로(行路)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드래곤라자’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죠. 갈림길을 다 걷고 뒤를 돌아다보면 더 이상 갈림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내가 걸어온 흔적만 남아있을 뿐.

로맨스는 할 때에는 힘들고 어렵고 때로는 깨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매일매일 싸우고 힘들게 갈등하고 맞지 않는 의견 때문에 잠시 떨어져있기도 하고... 그러나 성공한 로맨스의 뒤를 돌아다보면, 갈림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끝을 보았기 때문이죠. [화성의 공주]는 성공한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잭 카터와 데자 소리스의 되도 않는 인연, 그리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나가는 그 어이없는 과정들. 우연과 행운으로 점철된 듯한 그 무수한 이야기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연인들에게는 과장이 아닌 현실 그대로의 담담한 회고일 뿐입니다.

두 연인에게 물어보죠. 당신들이 여기까지 오는데 겪었던 그 무수한 기적은...? 기적이라뇨! 그건 우리의 사랑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필연인게죠.


책을 다 읽고, 찌릿한 느낌이 들었던 바로 그 이유는, 두 연인이 겪었던 필연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실은, 우리, 가요의 사랑 가사나 이러저러한 드라마의 사랑 이야기에 너무 많이 노출되는 바람에, 사랑에 대한 진지하고 아릿한 감정을 고민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현실에서 얽히는 인스턴트 식의 사랑들. 작고 큰 갈등 속에서도 금새 깨어지고 갈라지는 사랑의 양태들. 그런 것들의 무수한 편린이 제 주변을 싸고 도는데, 그 속에서 내가 고구할 진실한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화성의 공주]는 이 시대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랑에 대한 환타지를 화성이라는 낮선 공간에서 엮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제게는 너무나 당연해보이고, 그들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제 가슴속에서 불끈거립니다. 비록 그들의 이야기는 세부적이지는 않습니다. 100여년 전의 소설이라, 묘사보다는 서사에 기댄 이야기의 전개가 마치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그냥 주욱 훑어간다는 느낌, 그 생경함이 글을 읽는 내내 독자의 한 쪽 마음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수십 차례의 전쟁을 거친 군인 잭 카터가 현대인처럼 너무 복잡하게 고민한다면, 혹은 화성의 연인인 데자 소리스가 지구인처럼 조변석개한다면 그 이야기가 더 낯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글을 읽다보면 그네들처럼 활활 타오르는 사랑 안으로 부나방처럼 뛰어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차라리 차오릅니다. 모든 염려와 걱정을 잊고, 나의 사랑을 위해서 나를 사랑에 쏟아붇는 그런 것 말입니다.

[화성의 공주]는 사랑을 이루어낸 사람이 당연히 공감할 수 있는 로맨스소설입니다.


2. 그런데 우주?

그러나 아마추어 독자가 ‘이 글은 로맨스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작가나 글의 명성이 좀 크네요. 저는 장르에 대해서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이 소설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시작 격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가인 에드거 R. 버로우즈는 [밀림의 왕자 타잔]으로 유명한 바로 그 작가이구요.

그러나 제게 그런 것들은 유의미한 이야기들은 아니고, 다만 우주라는 공간이 제게는 낯선 공간이라는데 주목해 봅니다. 우주라는 곳이 뭔가 큰 함의를 담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다만 비현실적인 공간일 뿐이라는 말이죠. 요즘에야 화성이 엄연히 현실의 일부가 되고 있기는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우주여행을 가는 장관이 펼쳐지기도 했다지만. 그러나 제게는, 그리고 작가에게는 우주가 다만 이곳이 아닌 저 곳이었을 뿐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나니아 연대 이야기]의 장롱 속이나, 혹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9와 4분의 3 플랫폼 너머의 세계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화성의 공주]는 환타지의 비일상성과 상징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알레고리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있겠지만... 글 속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부분은 ‘이성’과 ‘감정’의 대립과 관용이라고 여겨집니다.

보통 환타지에 들어서는 이야기는, 일상성을 제거해야하는 것들일 때가 많습니다. 매일매일 일어나고 경험하는 일들을 말하기 위해서 환타지의 공간을 빌릴 필요는 없습니다.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이야기를 굳이 환타지의 공간 안에 펼쳐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환타지 속에 알레고리가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환타지는 그 곳에서만 유의미한 이야기들을 따로 가집니다.

[화성의 공주]에서는, 박약한 제 이해로는,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정이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모습이 가장 많이 보입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라면, 누구나 한 몸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로 분리해낼 수 없는, 그리고 늘 화합된 형태로 나타날 뿐인, 동전의 앞뒷면 같은 인간의 두 가지 중요한 성질 말입니다.

(조금 덧붙이자면, 감정이라는 단어보다 조금 더 좋은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합리성에 기반한 단어인 이성, 에 대비될 수 있는 단어나 의미가 딱히 떠오르질 않아서, 조악하나마 감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합리성의 반대항에 비합리성을 두시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야성(野性) 정도가 대비항으로 적합할 듯 하지만...)

일단 저지르고 보는 녹색인과, 한 번 고민해보는 적색인은, 우리가 무언가를 놓고 고민할 때마다 - 가령, 오늘 저녁에 라면 하나를 끓여먹고 내일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 햇살을 맞이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배를 곪고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잠들지만 기분 좋은 아침밥으로 배를 채울 것이냐 같은 - 좌뇌와 우뇌 뒤에서 펑, 소리와 함께 나타나서 서로 티격태격되는 악마와 천사의 모습과 그닥 크게 차이나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대립과 관용은 글에서 줄곧 드러납니다. 마치 우리가 숨 쉬듯이 대립하고 관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글이 이쯤에서 그냥 끝난다면 별 재미가 없겠지만, 작가는 저지르기 전에 사고하는 독특한 녹색인 - 타르스 타르카스 - 과 불타는 야성으로 사랑을 향해 갈구하는 적색인 - 데자 소리스 - 의 사이에, 적색인의 몸과 녹색인의 심장을 가진 잭 카터를 두고 있습니다. 비합리적인 행동의 연속과 우연한 선택의 결과로 인해 얻게 되는 해피엔딩은, 인간이 인생을 통해서 경험하는 삶의 불합리성을 아이러니컬하게 보여주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실은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잖습니까? 뭔가 시의적절치 않은 어리석어보이는 행동을 계속 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행복을 향해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으니까요.

우주라는 공간은, 아직 신화가 현실에서 똑 부러지게 분리되지 못한 19세기 말~20세기 초엽에는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상정하기에 적절한 만큼의 거리를 가지고 있는 공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당시의 신화가 씨줄과 날줄처럼 현실과 얽혀들어 현상의 알레고리로 읽혀졌던 바, 우주라는 공간은 그 시대의 이러한 우화성을 극복하면서도 현실에서 일정부분 거리를 두는 공간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굳이 중간계 같은 이세계(異世界)를 만들지 않아도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바를 충분히 이야기 할 만큼, 우주는 그런 정도의 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지금은 우주가 현실의 일부분으로써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환타지의 공간보다는 조금 더 밀접하게 현실과 연결되어있는 것과는 대비해서 말입니다.


읽기 부담스러울 만큼의 긴 글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요즘 글들처럼 세련미 넘치지는 않는 글이지만, 읽고 나서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꽤 강렬하였습니다. 글을 읽고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은 바, 잭 카터를 주인공으로 한 몇 권의 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꼭 한 번 구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잭 카터처럼 잃어버린 10년을 갈구하지 않아도 되는 운명을 가졌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하하)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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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타잔의 창조자, E.R.버로우즈의 스페이스 오페라 [화성의 공주]
    from 즈믄누리 :: 도깨비들의 巨城 2008-06-20 01:46 
    1. 이건 로맨스잖아? 성공한 로맨스에 대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저는 성공한 로맨스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새로운 로맨스에 대한 시작이기도 하기에, 현재진행형 상태인 로맨스는 아마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 쿨럭 - 끝이 나겠지만, 어쨌든 결혼에 이르는데까지의 로맨스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공한 로맨스의 특징은,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 황우석 사태 취재 파일
한학수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평점을 주다보니까... 계속 별 네 개만 찍게 되네요. 아무래도 일장일단이라서 그런가보죠.
 

일단, 어제 '핀란드 역으로' 를 다 읽은 다음 바로 시작한 책입니다. 시사IN에 잠시 소개된 책이기도 하구요.  

황우석 氏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습니다. 문과생인데다가, 처음부터 주목하지 않으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라... 그래서 드라마도 처음부터 보지 않으면 보지 않게 되거든요. 덕택에 황우석 氏에 대해서 처음부터 접하지 않은 탓에, 2005년의 PD수첩 사건이 있었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갔었지요. 실은 이 책도 보려고 본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빌리려던 책이 없어서 빌리게 된 것일 뿐인데... 

일단 책을 잡고 나서 쉼없이 읽어제쳤다는 말부터 합니다. 다른 말로는 상당히 흥미있었다는 말이고, 또다른 말로는 가볍게 읽기에 좋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읽게되지는 않을 듯해요. 왜냐하면, 이제 다 알았으니까.  

지식을 전달해주는 류의 책입니다. 사유를 던져주긴 하지만, 디테일한 사건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포괄적인 류의 고민 말입니다. 


요즘 삼성의 전임 법무팀장이던 김용철 氏가 내부고발자의 지위로 주목받고 있는데, 이 책도 내부의 고발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황우석 氏와 함께 일하던 연구원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입니다. 나중에는 부인까지 - 부인도 함께 연구하던 간호사였구요 - 고발에 참여합니다. 

김용철 氏만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지탄받고 있는 처지인데, 2005년 당시에는 더했던 듯 싶습니다. 내부고발자인 두 사람 다, 자신의 직장을 잃고, 이 책이 쓰여지던 당시에는 무직자로 있는 상태였으니까. 책을 덮으면서, 과연 이들이 지금은 안정된 직장에 다시 취업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울러, 과연 내부고발자가 도덕적/윤리적으로 지탄받는 분위기가 맞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도 말이죠. 우리나라 사람들 특유의 온정주의라고 생각되는데... 가족이니까... 라는 커뮤니티 의식이, 내부고발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드는 듯해요. 실제로, 그들에게 가해지는 비난 대부분이 그런 부분에 대한 것이니까요. 보스를 배신했다, 먹여살려주던 직장인데 그럴 수 있느냐... 물론 처음에는 다니는 직장에서 '짤리는' 일부터 고민하겠지만... 옳지 않은 일, 특히 속해있는 집단이 사회 전체를 기만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 책임있는 사람이 책임있게 하는 발언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황우석 氏의 거짓말을 고발한 PD수첩의 용기보다는,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한 사람의 진실이 이 사회에서 대우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단 책이 흥미있게 읽히는 이유는, 사건 자체가 워낙 큰 반향을 일으켰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책을 쓴 한학수 氏가 책을 단순한 사건 중심의 나열로 그친 것이 아니라, 사건의 핵심이 되는 다양한 생명공학 지식들을 사건의 얼개 속에 잘 버무려서, 일반인들도 사건의 정확한 실체에 다가가도록 한 글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 문과생(!)인 제가 읽기에도 버겁지 않았는데, 읽고 난 후에 돌이켜보면 상당히 많은 생명공학의 용어들을 접하면서도 어려움 없이 독서할 수 있었던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네요. 
 
아울러, 탐사보도를 담당한 PD 답게 글 자체도 탐사보도 식으로, 즉, 황우석 氏가 거짓말장이라는 대명제를 보여준 후에, 사건의 추이를 차근차근히 감질맛나게 보여준 것도, 책을 쉴새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한 요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한 편, 불만이라고 한다면, 저널리즘에 입각한 책이라기 보다는, 에세이에 가깝게 쓰여진 면모가 있어서, 사건의 객관적인 실체보다는,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한학수 氏의 비망록 격으로 책을 읽게 되더군요. 물론, 저는 책을 읽으며 황우석 氏의 거짓말 행각에 분노하였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작가와 동일시되어 책을 읽긴 하였지만,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관적인 색깔이 상당히 강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황우석 氏를 옹호한 많은 언론들의 무책임함과, 권력기관 - 작가는 청와대를 지칭하고 있지만 - 의 비균형적인 언행은, 내내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학문적 진실, 학자적 양심. 황우석 氏가 온 나라를 기만한 사건의 이면에는, 당연하게 여겨야 할 것들을 결여한 한 노회한 (학자의 탈은 쓴) 정치인의 작태를 비호하고 옹호한 다수의 언론/권력의 몰지각한 행동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권력은 선거로 심판할 수 있다고 하지만, 과연 썩은 언론 - 작가는 조선일보를 지칭하고 있지만 - 은 누가 심판해야 합니까? 그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보게 된 책이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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