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세계대전사 (양장)
존 키건 지음, 조행복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역사 주제의 책을 좋아하는 편이고, 그러한 까닭에 열심히 읽기도 하는 편이지만, 전쟁사에 관련된 책을 읽어본 적은 거의 없는 듯 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쟁을 거시적인 것으로 바라본, 혹은 전쟁이 하나의 과정으로 기술된 책은 조금 접해보았지만,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둔 책을 읽은 기억은 거의 나질 않습니다.


이 책, [1차 세계대전사(이하, 1차)]는, 많은 현대사 책들이 1차 세계대전을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필연적 귀결로 이야기하거나, 혹은 2차 세계대전의 파국을 내재한 과정으로 묘사하는 것과는 달리, 온전히 1차 세계대전에 초점을 맞추어 건조하게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차]를 읽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건조하게 전투의 추이를 이야기하는 와중에, 그림자료가 상당히 부족하다는데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궤는 다르지만, [로마인 이야기] 같은 경우에는 다양한 전투의 장면에서 간략한 도해를 첨부하여 텍스트를 보충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다양한 전투 장면들이 건조하지만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텍스트를 이미지화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이미지를 통해 텍스트의 이해도를 높이는데에도 불친절함이 분명합니다. 혹여라도, 전쟁사에 관심이 있어, 세게부도라도 하나 옆에 놓고 지명과 병력 배치를 하나하나 표시하면서 읽어내려갈 만큼의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은 상당히 좋은 책임에 분명하지만, 저와 같이 전쟁의 기술적인 측면에는 문외한인 독자에게는 고통스러운 읽기임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600여쪽의 분량 중 절반에 이를 때까지의 독서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절반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전투에 대한 건조한 묘사는 조금 줄고, 전투의 전후 상황에 조금 더 치중하고 있는데, 그 이후로는 읽기에 조금 편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분량의 절반 이후로는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이, 미묘하게 얽혀있던 국가간의 동맹/연합 관계가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과 그에 대처하는 각국의 대처가 미묘하게 엇나가면서 시작한 전쟁인 탓에, 세계대전의 초중반인 1915년도까지는 전투의 양상이 국가 단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저자의 기술이 상대적으로 전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책 전반부의 흐름은 분절적이고 건조한 미시적 서술이 주가 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읽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하던 세계대전은, 각국의 동맹/연합 관계가 개별 전투에서 결합되고,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의 급작스러운 강화로 인해, 참전국 간의 이해관계가 새롭게 조성되면서 분산되어 있던 전투의 양상이 통일성과 집중성을 띄게 되고, 그 시점 이후로 어렵지 않게 독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실, [1차]를 읽다보면, 1차 세계대전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럽의 제 국가들은 나름대로의 합리성에 기반한 전쟁 억제 장치를 구축하고 있었고, 그것은 19세기의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국가 간의 첨예한 이해 관계의 대립 속에서도 파국을 막는 안전장치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국의 연합과 동맹은 각 이해관계국간의 것이었고, 삼각관계를 넘어선 다자간 연합/동맹체는 아니었으므로, 다양한 세력들은 직접적인 억제 장치로 연결된 것보다는 한 다리 건너 간접적인 이해 관계를 수립하고 있었는데, 적의 적은 동지라는 이러한 합리성이, 병렬적인 국가 간 연계고리 속 어딘가에서 방아쇠를 당겨버리게 되었고, 그것이 연쇄적으로 발화함으로써, 유럽은 겁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리게 된 것입니다. 


분명히, 국가 간의 동맹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억제를 위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에 대하여 세르비아를 응징하려는 것은 기실 세계대전을 목적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맹과 연합이 파국을 억제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어느 시점에서 어긋나 버릴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바로잡기에는 유럽 제 국가간의 이해관계가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있던 탓에 발화선을 끊어내지 못해버리고 폭탄은 터진 것이겠지요. 


이러한 1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제정 러시아의 붕괴와 볼셰비키 혁명 앞에서 변곡점을 맞이하고,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극적인 귀결에 이르게 됩니다. 독일의 제2제국은 붕괴되고 동유럽의 각 민족은 민족국가를 수립하며, 이제 러시아에서 시작된 레닌의 혁명은 다시 유럽과 세계를 전쟁의 겁화로 몰고 들어갈 불씨가 됩니다. 



이 책, [1차]는 전쟁에 대한 낭만인 생각이 핓빛 죽음과 처연한 고통의 실존 앞에서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세밀하고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는 책입니다. 국가 간의 이해 관계와 그에 따른 전황의 극적인 변화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대의(라고 믿었던 것)에 뛰어들었던 개인이 전쟁 앞에서 어떻게 소멸되는지를 처연하게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 청장년 인구 중 10%가 넘는 이들이 너무도 쉽게 죽음의 문턱을 넘어버리는 장면을 기술하는 제 전투 장면에서는, 마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프롤로그에서의 아무렇지도 않은 죽음이 주는 섬뜩함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세계대전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지는 않고 있습니다. 피할 수 있었던 필연 속에서 개인과 집단, 국가가 겪었던 겁화의 소용돌이를 제 3자적인 입장에서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사책을 읽다보면 영웅적인 개인 혹은 파국을 야기하는 개인이 마치 역사의 변곡점을 제공하는 것처럼 그리는 저자들도 좀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것 없이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골고루 저자의 이해를 분배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익히 명성을 접해왔던 책을, 약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이 2010년 4월 19일이었네요. 그 동안 몇 번 멈췄다 다시 시작했다가... - 다 읽게 되어서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전작인 [2차 세계대전사]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독서였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역자는 조행복 씨 입니다. 얼마 전 작고한 토니 주트의 [포스트워 1945-2005]를 번역한 역자이기도 합니다. [포스트워 1945-2005]는 참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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