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 꿈이 끝나는 거리 모중석 스릴러 클럽 26
트리베니언 지음, 정태원 옮김 / 비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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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 죄악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가장 중대한 죄악은 무엇인가? 범죄라고 할 수 있는 살인이 있는 것인가? 죄악의 무게는 무엇으로 잴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마침내 사랑을 거역하는 죄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는 말에 수긍케 하는 다분히 사색적인 작품이다. 거칠고 폭력적인 행위, 인생의 막장에 이른 매춘부, 좀도둑, 포주...패배자들의 도시, 절망이란 죄악의 씨앗이 생성되는 도시,‘메인’의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까지 분명 느와르적인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이 정교한 소설의 소재와 배경, 플롯을 능가하는 세상을 향해 날리는 날카로운 작가의 시선과 고독한 한 남자의 꿈이 어린 연민은 여느 삶의 의미를 재발견케 하고 사회적 본성을 통찰하는 작품들의 철학적 깊이를 훌쩍 넘어선다.

또한 작품에 매료되게 하는 요인인‘클로드 라프왕트’경위라는 인물의 됨됨이로, 그가 발산하는 영혼의 자유로움과 절대 고독이 몸에 짙게 배어버린 인간적 매력, 부랑자, 소외된 도시 서민, 삶의 피로에 후줄근하게 지쳐버린 사람들의 회색 그림자를 분별할 줄 아는 인간애가 동료애, 동질감을 자극한다.“주민들과 평범한 얘기를 나누는 아버지와 같은 감시인”, 자신의 순찰구역‘메인’에 대한 애착으로 도시의 범죄자들에게 조차 존경받는 우호적인 독재자 이웃 이자 운명 같은 존재인 사람.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20대의 이태리계 남자가 바닥에 머리를 숙이고 구부린 야릇한 형상의 사체로 발견된다. 수사의 강박적 속도와 말초적 스릴보다는 살인사건을 통해 등장하는 용의자들의 배경과 그들이 안고 있는 고통의 본질을 비추는데 더 많은 할애를 하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결과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실제와 형식, 현상과 본질이라는 도덕적 본성을 사유케 하는 시간을 제공하려는 차원 높은 작가의 의도로 이해된다.

사실 라프왕트 수사의 초점은 살해된 자 보다는 살인 용의자들, 즉 이주자들의 도시인 메인의 주민들인 끝장나기 직전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은 자는 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하는 물음은 다소 정의가 전도된 듯한 의문을 갖게 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사람을 짐승으로 멸시하는 행위, 그 중에서도 사랑을 빼앗는 행위가 가장 큰 죄악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면 충분히 납득 할 수 있는 질문이 된다.

살해된 자의 신분이 들어나면서 이 자에 대한 증언은 “그냥 지나치지 않아요! 여자를 말이에요!”라고,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인간, 그래서 사람을 짐승과 같은 모멸의 나락으로 밀어낸 인간으로 확정한다. 더구나 이를 위해 법률을 회피하고 기만하는 비겁하고 교활한 인간일 경우 그 죄악은 우리 인식에서 분노로 변한다. 소설은 이렇듯 범죄와 죄악을 구분한다. 범죄이지만 죄악이 아닌 것, 범죄는 아니지만 죄악인 것. 이 구분은 자신들이 지닌 것을 잃지 않기 위해 고안된 소위 시스템과 규칙이라는 사회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누군가가 그 규칙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면 사회는 그 사람에게 단 두 가지의 가능성을 인정하네. 그 일탈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었느냐 하는 것이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거라면 그는 범죄자라네.  만일 자신의 이익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규칙을 어기면 그는 미친 사람이야. 사람들은 미친 사람을 무서워하고 가두고 봉인하네, 세상 사람들이 미친 사람을 가두는 것인지, 세상 바깥으로 따돌리는 것인지, 그건 시각 차이의 문제네.      - P 422 中에서


고위층 사람이나, 서류상 수속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형사, 비열한 범죄자에게는 거친 경관이지만 범죄자들조차 그의 성실하고 정직한 인물됨에 기묘한 긍지를 갖게 하는 사람, 행복보다는 평온을, 음악보다는 정적을 좋아하는 남자, 서민의 영웅 라프왕트 경위를 통해 차디찬 이익을 위해 정의를 버린 오늘의 사회와 외로운 싸움을 대리 수행케 하는 이 작품은 그래서 아득한 통증을 불러오고, 공감의 슬픔을 가져온다. 자신의 입신, 쾌락, 재화를 위해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인간들과 사회가 규정하는 그 왜곡되고 이기적인 규칙들은 오늘날 죄악을 처벌하지 못하는 기형적 모습을 하고 있다. 단지 범죄라는 자의적이고 회피할 수 있는 규칙만 있을 뿐.

사람들에게 절망을 양산하게 하는 사회, 그 절망이 죄의 근원이 되어 범죄를 만들어 내게 하는 사회, 우린 그래서 여기에 대항하는 고독한 경관인 소설 속의 인물,‘라프왕트’에게 열광하게 되는 줄도 모르겠다. 발표된 지 35년여가 지난 이 작품이 왜 오늘에도 독자들을 환호케하는지, 미스터리의 고전적 지위를 얻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섬세한 인물의 내면묘사와 눈앞에서 전개되는 듯한 액션의 스케치, 게다가 진중한 사회적 통찰과 철학적 성찰의 무게까지 어느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장르문학의 전범(典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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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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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의 획기적인 발전이 질병의 치료, 건강의 유지를 통한 수명의 연장과 같은 긍정적 결과를 갖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편으론 인류의 본성까지 조작이 가능해진 유전학에 도덕적인 불편함을 떨쳐내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대체 유전학 테크놀로지의 무엇이 우리들을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샌델 교수는‘유전학적 강화’와 배아에서의‘줄기세포의 추출’이 지니는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고 도덕적 공방을 통해 인간과 인간사회의 윤리에 대해 조심스러운 성찰의 시간을 마련 한다.
그의 저술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미 도덕성을 판단하기 위해서 인간의 행복과 자유와 미덕이라는 세 가지 이상을 기준으로‘정의’의 다양한 판단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았듯이 유전학의 발전과 이용이 만들어내는 윤리의식 또한 이에 못지않은 기준과 사유를 요구한다. 먼저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디자인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다소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청각장애인 부부가 자신들의 아이도 청각장애자이기를 원하여 청각장애의 유전적 형질을 지닌 배아를 통해 아이를 출생시키는 행위에 대해 어떤 도덕적 문제점이 있는가하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도덕적으로 편치 않은 느낌을 갖지만 그것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이와는 반대로 키 작은 아이를 위해 부모가 유전적 기술을 통해 신장을 늘리는 것은 어떨까? 이 행위에는 도덕적 문제가 없는 것일까?

청각장애 부부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자유롭게 행사한 이 행위에 딱히 부도덕하다고 지적할 만한 도덕적 판단요소를 내밀기가 쉽지 않다. 만일 이것이 부도덕한 행위라 하면 발육이 부진한 키 작은 아이에게 유전적 도움을 받아 신장을 늘리는 행위도 사실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 “성별, 키, 다른 유전형질을 선택하고, 신체적, 인지적 능력을”변화시키는, 즉 인간의 본성을 공학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왜 잘못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이의 의지와는 달리 인생을 미리 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율성이 침해되고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인생 계획을 수립할 권리의 박탈이라는 개념이 개입되어 있다. 우리들은 이처럼 자율성, 개인의 권리와 같은 도덕적 언어로 이들 행위의 그름을 설명하지만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남는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신체능력이나 기억력, 집중력의 강화를 위해 유전학적 강화 기술을 통해 능력을 개선시키는 것처럼 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로 확장해보면 운동선수에게 근육 강화제를 주사한다던가, 산만하여 행동장애가 있는 아이를 치료하는 리탈린이나 암페타민제제를 사용하여 집중력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유전학적 기술을 통해 생체공학적으로 탁월한 운동선수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면 우린 여기에 도사린 도덕적 문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유전적 선택이나 강화는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침식해서 바로 인간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체공학적 운동선수는 그 자신이 아니라“실제 행위자는 그를 생체공학적으로 만들어낸 발명가”이기에 때문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행동을 완전히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가 인식하는 자유와 도덕적 책임에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유전공학자의 능력이니 여기에 도덕성과 책임의 의무가 개입할 어떠한 여지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의 주체에 대한 문제를 떠나 이러한 선수가 뛰는 스포츠가 더 이상 관중의 시선을 끌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던져보자. 아마도 성취에 대한 우리의 존경이 퇴색할 것은 뻔하고, 더구나 탁월성이라는 스포츠의 본질을 상실하고 말 것이며, 재능을 높이 사고 칭찬할 만 한 것이 사라진 스포츠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유전학적 강화가 인간에게 중요한 부분인 자연적인 재능과 소질을 침식하는 것은 분명하다. 나로서는 여기에 존 롤스의‘차등이론’, 즉 “출생이라는 우연을 기준으로 소득, 재산, 기회, 권력과 같은 도덕적 임의성은 불공평을 조장하고, 더구나 혜택 받은 가정환경의 산물로서 우연의 영향을 받는다면 노력의 미덕도 인정치 않는다.”는 견해를 확장하여 유전학적 기술이 야기하는 이러한 도덕적 임의성이 사회의 기본 구조를 파괴한다는 점을 추가하고 싶다. 우연의 차이로 인해 불평등이 만들어지는 자연출생조차 행운의 이익이 배분되는 것이 공동체의 이익과 사회 안정이라는 정의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유전학적 강화는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일뿐 아니라 오늘의 과잉 경쟁사회의 요구에 순응하여 정복과 지배를 향한 지나친 불안을 조장하는 도덕적 곤란함을 내재하게 된다는 비판을 비켜나갈 수 없는 것이지 않을까?

더구나 이는 20세기 우생학의 악령과 다름이 없기도 하다. 극빈자에게 강제 불임을 시키는 것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에게 생식을 못 하게 하는 법률을 추진했던 과거의 우생학처럼 국가주도의 강제성이 없으니 오늘의 유전학적 강화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유전적 선호를 이유로 태아를 낙태하고, 프리미엄 난자시장이 성황하며, 특권층 부모가 경쟁사회에서 성공할 만한 자식의 종류를 선택하고 유전공학적으로 성공할 만한 조건을 갖추게 하는 방식의‘자유주의 우생학’은 도덕적 불편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하버마스의“유전학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인격은 자신을‘자기인생 역정의 단독자’로 볼 수 없다.”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측면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인류가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행위를 시작할 수 있는 인류 능력의 조건이라는 말이다. 인간이 유전학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우연에 좌우되어 자신의 운명을 연대와 공유할 이유가 없어져 급격하게 사회연대는 파괴될 것이며, 겸손과 같은 미덕은 사라질 것이다. 궁극에는 아마 영화 『터미네이터』가 상상하는 무한의 전쟁만 존재하는 공멸의 세상을 초래할 밖에 없지 않을까?

끝으로‘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 생명의 복제까지 나아가려 하는 유전학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짚어본다. 줄기세포 추출 행위는 인간 생명을 상품화하는 비인간적 활동이며, 인간 배아(포배)의 파괴를 동반하는 비도덕적 행위라는 반대론에 대해 저자는 생물학적 사실에서 포배가 인간 존재이고 인격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고 피부세포를 예로 들어 주장하며 줄기세포 추출행위를 찬성하고 있다. 또한 인간 중 누구도‘복제 포배’였던 적이 없는 만큼 복제 포배는 엄격히 말해 배아가 아니라 생물학적 인공물(clonote)이며, 자연생식에 있어서도 초기배아는 다반사로 죽기 때문에 포배를 연구물로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배아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문제가 있다. 과연 포배는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물인가?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에 반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화 할 수 없다. 인간은 목적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가침성을 어느 시점에 획득하는가? 하면 다시금 그 경계를 확정짓는 다는 것이 어렵다는 점에 봉착하게 되지만, 저자의 주장과 달리 나는“수정부터 출생까지 과정에서 인격이 정확히 언제부터 생기는지 짚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배아를 발달한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싶다. 알 수 없기에 불의의 상황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 아닌가! 단지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만이지 않은가? 물론 이 문제의 결론에서 “사물로만 취급되어선 안 된다고 해서 배아가 인격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배아는 불가침의 권리가 없다, 그러나 맘대로 처분할 대상도 아니다.”라고 하면서,“오직 쓰고 버릴 목적 때문에 발달초기의 생명을 만드는”엽기적인 일을 지지하고 있다. 질병 치료라는 인류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목적이기에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사용하는 목적과 본성에 적절한 일이어야 한다는 유전학기술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 이 기준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용하는 목적에 대한 정의와 도덕성의 판단기준에 이르면 다시금 불확실성과 상대주의와의 충돌을 마주한다. 이런 순환논리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고귀하게 사용하자는 추상적 호소에 동의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직감하는 도덕적 불편함 그 자체가 이미 부도덕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유전학적 강화, 인간의 초기생명체인 포배의 실험 사용문제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이 저술은 분명 유익하지만 과학이 초래하는 기계적 합리주의와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불공정성의 고착화를 내재하는 이 문제는 인간의 미래를 불투명한 어둠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할 수 있다. 이기적 경쟁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라는‘프로메테우스적 욕구’는 우리 인간사회에서 지양하여야 할 본성이다. 유전학 그 자체가 무슨 악이겠는가.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유전학 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이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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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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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삶, 사람의 존재성이란 것이“숲이라는 거대한 익명성 속에서도 개별자로서 외롭거나 억눌려 보이지 않는 나무”와 같을 수 있다면 인간들의 욕망이란 것이 그처럼 혐오스럽고 남루하고 치사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세밀화 작가인 작품 속 화자,‘연주’처럼 일상성 속에서 삶의 욕망을 이해하고, 존재함으로써 비로소의 의미를 지니는 시간을 깨닫는 자등령(紫登領) 젊은 숲속에서의 초극(超克)의 사계절이 부럽기 조차하다.

“불모를 끌어안고 기어이 살 수 밖에 없었던 세월의 쌓인 늙음”이라고 생의 결핍과 피로감, 황폐함을 말하지만 삶이란 것에 무슨 결실이란 것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불모’라는 속물적 욕망의 표현이 은근히 저항감을 불러온다. 어쩜 이런 내 느낌이 이미 위선적인 자기기만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내세란 것이 있다면 포유류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화자(話者)의 말처럼 육신의 누추함,“가족들의 생리적인 삶만이 모든 진실”이어서 세상에 부대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갈취형 상납비리로 범죄자가 되어 수감된 공무원인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거의 모든 대다수의 사람들을 더욱 비참하게 하는 말 같기만 하기 때문이다.

“삶의 생리를 보호하고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방편이며 조건이자 환경”인 재화(돈)를 위해 부대끼는 사람들, 그 표상인 아버지의 구속, 즉 “더 이상 돈을 벌지 않아도 되고 세상에 부대끼지 않는 자리에 아버지가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에 연주와 그녀의 어머니가 안도하는 것은 욕망이라는 생의 모멸감과 수치심에 대한 자각이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여기에 삶을 더욱 초라하고 무력하게 하는 매개체로‘할아버지의 늙은 수 말’, ‘좆내논’에 얽힌 일화는 무거워 보이는 짐수레를 끌고 저무는 지평선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화자의 꿈 속 모습이 더해져 황폐하고 메마른 인간 포유류들의 삶을 비루하게 비출 뿐이다.

풍화의 맨 마지막 과정을 겪는 듯한 민통선 근처 소읍에서 우회전하자 시야에 들어온 인적이 사라진 자연의 공간은“온대 활엽수의 숲이 극성기를 이룬 천연림”을 등에 지고 사람의 진출이 통제된 민통선내 수목원과 대립되어 인간의 시간이 아닌 마치 다른 시간이 흐르는 듯한 환상을 준다. 계약직 세밀화 작가로 수목원에 취업한‘연주’가 꽃과 나무의 생애의 가장 역동적인 순간에 작동하고 있는 생명의표정과 질감, 생명의 사실을 그리는 작업에서 발견하는‘쟁쟁쟁’하는 역동성과 자신감, 관능성이라는 젊음의 울림은 우리네 사람들의 삶의 구조와 토대에 새로운 인식을 보게 해준다.

50여 년 전 죽음으로써 삶을 제거하고 죽임으로써 죽음을 갚는 무한소모전으로 피와 시체로 뒤덮였던 자등령 능선과 시화평 고지에는 삭고 풍화된 유골들이 적막하게 싸여있다. 한 때 젊은이였던 이젠 뒤틀리고 구멍나고 부스러진 뼈가 된 이들의 흔적에서 죽음과 땅, 생명의 순환, 그 자연의 덧없음만을 살피게 된다. 유골발굴단이라는 전시적인 듯한 산자들의 몽매함이 죽은 병사의 뼈 그림을 극사실화로 그려달라는 군(軍)의 주문으로 더해져 “쟁쟁쟁은 그 구조 너머에 떠도는 것이어서 화폭에 좀처럼 내려앉지 않았다.”는 話者의 생각처럼 무지함의 단순명료한 발상들이 답답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인간의 삶이란 욕망이 빚어내는 남루함, 아마 작가의 전작인 『공무도하』에서 되뇌던 던적스러움 이상이지 않을 것이다.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할 남편을 맞이하는 두려움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연주 어머니의 불면증이나“주님 오시기 전에는 여기나 거기나 결국 다 마찬가지”라더라고 하는 연주 아버지의 넋두리는 생애의 고통과 수치심의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꽃의 색깔에서 어떤 구조적 또는 종자학적 필연성을 찾아내려는 수목원 연구실장‘안요한’과 그의 자폐아 아들에서 생명으로 태어난 것들의 근원적인 결핍을 발견하는 화자의 시선에서굳어버린 무위(無爲)의 단단함으로 나무라는 생명체를 곧게 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늙은 목질”의 다른 시간과는 구별되는 인간생애의 모멸을 읽게 된다. 인간의 시간과 다른 나무의 단독자로서의 존재는 내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금 생각게 한다.

짐처럼 생을 걸머지고 살던 아버지, 그의 죽음을 “아이구 불쌍해라!”라고 통곡하는 어머니의 한 맺힌 울음에서 비로소 그네들이 자신들의 생을 괴롭히던 욕망을 벗어나는구나 하는 안도감보다는 왠지 내 명치끝이 아려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포유류의 공감 때문일까? 그러함에도 생은 끝없이 교체를 반복하며 닮은꼴의 세대를 이어간다. 아마 색깔들이 물안개로 피어나는 시간, 그‘쟁쟁쟁’하는 생명의 소리를 가진 젊음, 식물의 시간이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을 지닌 연주에게 젊은 계급장을 단 ‘김민수’중위의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그녀의 부모들이 좇는 삶의 피로가 누적된 그 건조한 욕망과는 다른 것이 될 터이다.

아무런 대립이나 구획이 존재치 않는 나무라는 단독자의 개별성과 숲의 익명성, 그리고 눈을 뚫고 올라오는 얼레지 꽃의 농염함, 밤을 지낸 수련 잎이 햇살을 맞이하고 봉오리가 열리며, 바람에 흔들리며 수런거리는 분석되지 않는 소리의 바다, 그 숲의 깊이에서 새로운 시간의 소리를 들려주고, 존재자로서의 사람의 삶의 의미를 사유케 하는 웅숭깊은 작품이다. 욕망의 비루함이여 물러가라. 왜 타자의 욕망을 따라하는가.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모욕되게 하는지 모른단 말인가. 어느덧 나무와 숲을 닮은 얼굴로 나무의 시간 속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평온해진 나를 느끼게 된다. 비록 해탈과 같은 종교적 초월, 그 미지의 대상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삿된 오욕을 잃어버리는 시간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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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주체
사카이 나오키 외 지음 / 이산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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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 대한 동일화의 욕망을 부르는‘쌍형상화’,‘문화본질주의’, ‘근대성’과‘보편주의’의 담론을 통한 근대‘일본’을 비롯한‘문화국민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라 할 수 있다. 1910년 한⋅일 강제 합병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사과라는 것이 100 년 만에 나왔다는 발표는 일본 제국주의 사상의 근간이랄 수 있는‘와쓰지 데쓰로’의 전체성의 기획을 위한 문화적 국민주의에 대한 비판론이 주요부분을 장식하는 이 저술의 시각을 이해할 때 혹여 2010년의 일본, 일본인이 자기중심적 역사의 허구와 서양에 대한 동일시의 욕망인 부정적, 대립적 분리주의를 벗어날 정도의 각성이 이루어질 만큼 성숙해졌나 하고 의아해 질정도이다.

저자‘사카이 나오키’의 발화자로서의 위치는 일본인이나 미국인으로서가 아니라 未知의 타자, 즉 상호 말이 통할 지 알 수 없는 자로서의‘외국인’이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이 저술의 첫 장인 31 세로 요절한 재미 한국인‘차학경’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딕테』가 집요하게 시도하는‘말하는 주체’의 제작을 유산시키고, 안과 밖을 가르는 대칭적 경계선을 혼란시켜 쌍형상화 과정을 위기에 빠뜨리고자 하는 작업의 독해와 일맥상통한다. 식민지민으로서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고 강제된 외국어를 사용해야만 했던 어머니, 그리고 미국의 이민자로서 영어를 쓰지만, 말하는 것과 의미사이의 거리가‘0’으로 환원이 불가능함으로써, 신체가 보이는 완강한 단념으로서의 상실의 발견을 통해 주체적 기술의 작업을 무효화시키는 문학의 정치성을 읽어내는 것과 같다.

서양의 근대적 담론에 의해 제작된‘민족공동체’나‘국민 주체’라는 작위적인 주체 만들기를 통한 ‘일본국민’의 제작 과정에서부터 서양에 대결하는 것으로서의 발상으로서 단지 욕망의 재생산 이상이 아닌 자기의 사상이나 역사의 잘못된 출발을 지적한다. 사실 이러한 역사적 오류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동일한 모방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리적 이름과 그 영역에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예로서 상고시대에도 과연 한국이라는 지역이 있었던 이상 민족으로서 한국인 또한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서양과의 대칭성과 평등에 대한 요청에 의해 발상된 국가와 역사라는 관념은 현재의 지리적 영역에는 고대에도 자신의 민족이 존재하였다고 정의해버리고, 그저 시대를 확장해 버린다.‘일본사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지적하는 이와 같은 문제는 비서양의 역사에서 거의 동일한 형태로 목격된다. “사료들에 나타난 사고방식이나 감정은 현대 일본인에게는 부정할 여지없는 이국적인 것”이라고 역사인식의 오류에 쐐기를 박는다. 자기중심적이고 세계시민주의 전체론적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매개된 합리적 이성 공동체라는 국민을 만들어내는 것은 타자의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싶은 전이적인 욕망의 발현, 즉 쌍형상화 도식에 이미 연관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황국사관을 정립한‘와쓰지’의『윤리학』과 『풍토』의 담론들을 통해 이 저술의 중심주제인 문화국민주의에 대한 자아도취적 메커니즘과 반역사적 태도의 비판론은 오늘의 일본,일본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또한 국민의 정체성과 동일한 전체의지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가시성의 구조에 대한 천황제에 대한 담론은 우리 정치사회의 현실에서도 유의미한 관점을 해독케 한다. ‘쇼와 ’천황이 죽기 3개월 전부터 일본대중매체를 통해 천황상을 쏟아내지만 실은 천황의 신체는커녕 병실조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대중매체에 의해 주어진 정보와 이미지라는 가시성의 구조 속에서 실은 내내 불가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은 부재상태에서 보는 것을 욕망할 것이라고 가정된 집단으로 재정의 되어“같은 욕망을 공유하며 같은 대상을 걱정하고 관심을 가지며 같은 목적을 위해 행동하리라 생각되는 사람들로 국민을 정의”하려는 시도로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어떠한 이의신청을 하면 바로 억압되고, 암묵적으로 굴복을 강요하는 공감의 일체화과정을 유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서민의 복지정책을 말하면 친북세력, 빨갱이로 치부되는 한국 보수사회의 집단적 세뇌 과정과 같다 할 수 있다.

이는 와쓰지의 철저한 인간 개별성의 부정과 사람에 내재하는 전체성만을 인정하는 인간론의 모습, 즉 감정이 무매개적으로 공유됨으로써 공감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전체성으로의 합일에 대한 사례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을‘문화적 본질주의’라 할 수 있는데, 공유된 심미적 정서로 통합된 문화적 공동체와 국가의 통합체로서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와쓰지의 담론에서 아주 야릇한 오늘의 일본인 정서를 엿볼 수 있는데, 살아있는 전체성으로서의 국민이지만 전체성으로서의 전체의지는 그 존재말고는 아무것도 실현하지 않으니, 전체의지는 무언가를 함으로써 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전체성을 어떻게 대상적이고 눈에 보일 수 있게 하느냐는 것으로서 일본인들은 그것을‘천황’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천황은 사회의 유기적 연대를 상징할 뿐 어떠한 정치적 귀결에 대해서도 결코 책임이 없다는 얘기와도 상통하는 것이니, 아주 인상적이고 주체에 대한 교묘한 논리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자의성과 문화적 국민주의가 동원된 사례로서 와쓰지의 천황제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국민’과 ‘국가’, 그리고‘전체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토양을 마련해준다.

한편 지배력을 가진 실정성으로서의 서양이라는 상징된 통일체가 “지정학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담론 도식의 역할”로서 ‘근대성’을 정의하고, 세계를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다르게 생각해 볼 가능성을 배제하는 일종의 뒤틀림으로 봄으로써 서양이라는 통일체를 구성하는 담론 편제로서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를 설명하는데, 서양의 합리주의를 말할 때면 보편성과 서양세계를 연결하는 식의 일정한 권력관계를 정식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등장하거나, 힘의 우월성에 의한 일종의 몽상임을 논증하기도 한다. 보편과 특수주의에서 보듯이 역사의 주체는 복수이며 역사적 주체의 위치는 일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결국 이종혼성성과 타자성에 얼마큼 열려있는지, 다원적 결정을 고려할 줄 아는, 그래서 역사 주체들 사이의 작용과 반작용을 여하히 포섭하여 나가느냐 하는 것은 슬기로운 역사인식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인식론적 subject인 주관에서 탈피하여 지속으로서의 시간에 마련되는 주체(主體)를 정립 할 것인가는 실로 자명한 귀결일 것이다. 실로 다양한 담론들로 구성된 역사 비평서이자 문화에 대한 명료하고 실천적 힘을 부여하는 보배 같은 실천철학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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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리
고봉황 지음 / 왕의서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민중들의 삶이란 항시 치욕과 모멸, 눈물겨운 인고(忍苦)의 시간임을 역사는 말한다. 그래서“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아진다)”는 무념의 체념어린 신조가 삶 그자체가 되어버린다. 그저 질긴 목숨 이어가기만 하는 것이다. 적어도 타인에게 종속되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 인간사, 아니 이 사회의 더욱 두드러진 모습일 것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빼앗긴 것을 찾기 위해 몸부림쳐야하는 사람의 연대기를 좇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작품은 그래서 가뜩이나 호젓한 우리네들의 마음을 더욱 아리고 슬프게 하고 분노와 통증으로 괴롭게 한다.

1958년 제주 4.3민중항쟁의 시기를 배경으로 시작하여 생의 전반을 치유되지 못한 화인(禍因)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송지하’라는 여인과 그녀를 에워싼 비극의 일대기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 땅에서 권력과 부가 행사되고 장악되는 모양이 추악한 형상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이지만 이로 인해 민중의 삶이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왔으며, 바로 이 시간에도 그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반복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퇴색시키지는 않는다.
당시 이념이란 것이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상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일개 경찰관이 무슨 이념적 철학관과 신념이 있었겠으며, 미군정청에 아부하는 자들이 권력과 재산의 증식말고 어떠한 자기이해가 있었겠는가.

이승만 정권의 권력유지를 위해 착안된 빨갱이라는 적대전략의 명맥은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며 하며 활개 친다. 역사의 혼란과 전환기는 이 땅에 오늘도 이어지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가져와 정의와 도덕성과는 거리가 먼 사회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소설은 이러한 사회가 빚어낸 인간들의 제어되지 않은 비열함과 추접스러운 욕망이 한 가계(家系)의 파괴에 작동한 일그러진 모습을 그려낸다. 위조하고 협박해서 강탈하고, 저항하면 죽음으로 보상하는 세계, 부도덕한 권력에 반항하면 빨갱이가 되어 도살된다. 아버지와 오빠, 사랑했던 연인까지 잃어야 했던 여자. 죽음을 피 할 수 없는 연인의 간절한 부탁인 그의 아이를 가진 여자와 배 속의 아이를 지켜내야 했던 여인, ‘지하’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된다. 연인의 무력한 죽음을 구제키 위해 극악한 경찰관에게 몸을 맡겨야하는 비참함, 악의 씨앗이 잉태되고, 연인의 아이까지 양육해야 하는 여인의 마음속 응어리는 비극에서 비극으로 치닫는다.

사랑했지만 손이 닿지 않는 사람,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의 아들과 자신의 혈육이지만 악의 씨앗인 딸의 양육은 비뚤어진 사랑과 학대를 낳는다. 빼앗긴 한라산 기슭의 광활한 목장을 되찾는 것은 도적들인 지배권력과 재산가들에 대한 복수의 표상이다. 주정사업을 통해 억척스럽게 재산을 모으는가하면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간절함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헌신적인 그의 자식에 대한 양육은 극단적인 외면과 학대로 이어지는 자기의 딸과 대조되어 회복될 수 없을 것 만 같은 슬픔의 심연으로 몰아넣는다. 악연의 뿌리는 이리 휘감기고 저리 감겨서 사랑이 되고 또 다른 불신과 이별, 고통을 낳는다. 그러나 여기에 움츠리고 있는 또 하나의 상처, 지주계급인‘지하’의 상처와는 달리 바라보아야만 하는 태생적 통한을 안고 있는‘우찬’이란 인물은 바로 우리네의 모습, 우리들의 어버이와 조상처럼 희생되고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전형이어서 그 개입만큼이나 균형자로서의 객관적 시선을 생각게 한다.

인생을 앗아간 자의 아내 역까지 해내면서 되찾아야만 했던 빼앗긴 땅, 그렇게 찾은 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미한테 따뜻한 손길 한번 받지 못하고, “바닷물로 눈물을 씻어내며 자맥질을 하던”딸의 한 맺힌 죽음, 자신 만큼이나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을 주었던 사람에 대한 몰이해가 황혼이 뉘엿뉘엿 내릴 때에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은 진정 어리석음의 고통일 것이다. 제주 여인들의 그 모진 비바람이 시대의 쓰라린 역사와 궤를 같이하여 민중의 삶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비록 400쪽 남짓의 짧은 소설이지만 여느 대하소설 못지않은 장엄한 스케일로 비바리, 제주 여인 3대에 걸친 피울음의 흐느낌이 문장의 곳곳에 스며 흘러간다. 사랑과 희생, 집요한 욕망으로서의 모성에 대한 갈증이 빚어낸 뜨거운 삶의 이야기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숭고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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