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주체
사카이 나오키 외 지음 / 이산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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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 대한 동일화의 욕망을 부르는‘쌍형상화’,‘문화본질주의’, ‘근대성’과‘보편주의’의 담론을 통한 근대‘일본’을 비롯한‘문화국민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라 할 수 있다. 1910년 한⋅일 강제 합병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사과라는 것이 100 년 만에 나왔다는 발표는 일본 제국주의 사상의 근간이랄 수 있는‘와쓰지 데쓰로’의 전체성의 기획을 위한 문화적 국민주의에 대한 비판론이 주요부분을 장식하는 이 저술의 시각을 이해할 때 혹여 2010년의 일본, 일본인이 자기중심적 역사의 허구와 서양에 대한 동일시의 욕망인 부정적, 대립적 분리주의를 벗어날 정도의 각성이 이루어질 만큼 성숙해졌나 하고 의아해 질정도이다.

저자‘사카이 나오키’의 발화자로서의 위치는 일본인이나 미국인으로서가 아니라 未知의 타자, 즉 상호 말이 통할 지 알 수 없는 자로서의‘외국인’이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이 저술의 첫 장인 31 세로 요절한 재미 한국인‘차학경’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딕테』가 집요하게 시도하는‘말하는 주체’의 제작을 유산시키고, 안과 밖을 가르는 대칭적 경계선을 혼란시켜 쌍형상화 과정을 위기에 빠뜨리고자 하는 작업의 독해와 일맥상통한다. 식민지민으로서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고 강제된 외국어를 사용해야만 했던 어머니, 그리고 미국의 이민자로서 영어를 쓰지만, 말하는 것과 의미사이의 거리가‘0’으로 환원이 불가능함으로써, 신체가 보이는 완강한 단념으로서의 상실의 발견을 통해 주체적 기술의 작업을 무효화시키는 문학의 정치성을 읽어내는 것과 같다.

서양의 근대적 담론에 의해 제작된‘민족공동체’나‘국민 주체’라는 작위적인 주체 만들기를 통한 ‘일본국민’의 제작 과정에서부터 서양에 대결하는 것으로서의 발상으로서 단지 욕망의 재생산 이상이 아닌 자기의 사상이나 역사의 잘못된 출발을 지적한다. 사실 이러한 역사적 오류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동일한 모방을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리적 이름과 그 영역에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예로서 상고시대에도 과연 한국이라는 지역이 있었던 이상 민족으로서 한국인 또한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서양과의 대칭성과 평등에 대한 요청에 의해 발상된 국가와 역사라는 관념은 현재의 지리적 영역에는 고대에도 자신의 민족이 존재하였다고 정의해버리고, 그저 시대를 확장해 버린다.‘일본사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지적하는 이와 같은 문제는 비서양의 역사에서 거의 동일한 형태로 목격된다. “사료들에 나타난 사고방식이나 감정은 현대 일본인에게는 부정할 여지없는 이국적인 것”이라고 역사인식의 오류에 쐐기를 박는다. 자기중심적이고 세계시민주의 전체론적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매개된 합리적 이성 공동체라는 국민을 만들어내는 것은 타자의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싶은 전이적인 욕망의 발현, 즉 쌍형상화 도식에 이미 연관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황국사관을 정립한‘와쓰지’의『윤리학』과 『풍토』의 담론들을 통해 이 저술의 중심주제인 문화국민주의에 대한 자아도취적 메커니즘과 반역사적 태도의 비판론은 오늘의 일본,일본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또한 국민의 정체성과 동일한 전체의지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가시성의 구조에 대한 천황제에 대한 담론은 우리 정치사회의 현실에서도 유의미한 관점을 해독케 한다. ‘쇼와 ’천황이 죽기 3개월 전부터 일본대중매체를 통해 천황상을 쏟아내지만 실은 천황의 신체는커녕 병실조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대중매체에 의해 주어진 정보와 이미지라는 가시성의 구조 속에서 실은 내내 불가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은 부재상태에서 보는 것을 욕망할 것이라고 가정된 집단으로 재정의 되어“같은 욕망을 공유하며 같은 대상을 걱정하고 관심을 가지며 같은 목적을 위해 행동하리라 생각되는 사람들로 국민을 정의”하려는 시도로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어떠한 이의신청을 하면 바로 억압되고, 암묵적으로 굴복을 강요하는 공감의 일체화과정을 유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서민의 복지정책을 말하면 친북세력, 빨갱이로 치부되는 한국 보수사회의 집단적 세뇌 과정과 같다 할 수 있다.

이는 와쓰지의 철저한 인간 개별성의 부정과 사람에 내재하는 전체성만을 인정하는 인간론의 모습, 즉 감정이 무매개적으로 공유됨으로써 공감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전체성으로의 합일에 대한 사례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을‘문화적 본질주의’라 할 수 있는데, 공유된 심미적 정서로 통합된 문화적 공동체와 국가의 통합체로서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와쓰지의 담론에서 아주 야릇한 오늘의 일본인 정서를 엿볼 수 있는데, 살아있는 전체성으로서의 국민이지만 전체성으로서의 전체의지는 그 존재말고는 아무것도 실현하지 않으니, 전체의지는 무언가를 함으로써 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전체성을 어떻게 대상적이고 눈에 보일 수 있게 하느냐는 것으로서 일본인들은 그것을‘천황’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천황은 사회의 유기적 연대를 상징할 뿐 어떠한 정치적 귀결에 대해서도 결코 책임이 없다는 얘기와도 상통하는 것이니, 아주 인상적이고 주체에 대한 교묘한 논리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자의성과 문화적 국민주의가 동원된 사례로서 와쓰지의 천황제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국민’과 ‘국가’, 그리고‘전체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토양을 마련해준다.

한편 지배력을 가진 실정성으로서의 서양이라는 상징된 통일체가 “지정학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담론 도식의 역할”로서 ‘근대성’을 정의하고, 세계를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다르게 생각해 볼 가능성을 배제하는 일종의 뒤틀림으로 봄으로써 서양이라는 통일체를 구성하는 담론 편제로서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를 설명하는데, 서양의 합리주의를 말할 때면 보편성과 서양세계를 연결하는 식의 일정한 권력관계를 정식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등장하거나, 힘의 우월성에 의한 일종의 몽상임을 논증하기도 한다. 보편과 특수주의에서 보듯이 역사의 주체는 복수이며 역사적 주체의 위치는 일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결국 이종혼성성과 타자성에 얼마큼 열려있는지, 다원적 결정을 고려할 줄 아는, 그래서 역사 주체들 사이의 작용과 반작용을 여하히 포섭하여 나가느냐 하는 것은 슬기로운 역사인식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인식론적 subject인 주관에서 탈피하여 지속으로서의 시간에 마련되는 주체(主體)를 정립 할 것인가는 실로 자명한 귀결일 것이다. 실로 다양한 담론들로 구성된 역사 비평서이자 문화에 대한 명료하고 실천적 힘을 부여하는 보배 같은 실천철학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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