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연금술
캐럴 맥클리어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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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품의 내용만큼이나 주인공인 뉴욕월드 신문의 탐사보도기자인‘넬리 블라이(Nellie Bly)’란 여성에 대한 궁금증도 자못 흥미로울뿐더러, 이 작품의 작가인‘캐럴 맥클리어리’또한 한국의 서울에서 출생했다는 인연으로 작품외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소설 속에서도 넬리의 성향이 충분히 소개되고 있지만, 그녀가 한창 활동하던 1890년이란 시간은 여성이 남성의 보조자란 지위를 떠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회활동, 더구나 남성 전유의 세계인 신문기자를 한다는 것은 상상키 어려운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래서‘넬리 블라이’는 오늘날에도 미국을 비롯한 유럽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진출과 참여를 열어 제친 여권신장의 개척자(pioneer)로 칭송받는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실존적 인물에 대한 매혹을 물리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쥘 베른, 오스카 와일드, 루이 파스퇴르, 게다가 틀루즈 로트렉까지 가세시켜 파리 만국박람회, 에펠탑, 물랭루즈 등 당시 스펙타클의 정점에 이른 사회분위기에 빈틈없이 이들이 얽혀 빚어내는 정교한 얼개는 작가의 높은 구성력으로 이어져 흠뻑 매료케 된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 사회적 인식을 넬리를 통해 부각하고 있는데, 여성 노동자에 대한 임금차별, 여성의 사회진출 제한 등에 대한 저항,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부르주아지 지배계층의 착취와 빈곤의 고착에 대한 무정부주의자의 저항운동이 작품의 저변을 받쳐 더욱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갖게 된다. 악명 높은 정신병원의 인권유린을 밀착 취재하다 대면케 된 살인자의 홀연한 사라짐, 그리고 이어 영국런던에서 발생한 희대의 연쇄 살인은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파리로 이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뉴욕월드지의 사장인‘퓰리처’에게 어렵게 취재승낙을 얻어낸 넬리의 추적은 환락과 퇴폐의 상징이었던 몽마르트 언덕의 카페와 살롱, 희미한 가스등이 비추는 음울한 길거리에서 시작된다.

『해저 2만 마일』,『80일간의 세계일주』등 공상과학과 모험의 세계를 그린 당대에는 선구자라 할 수 있는‘쥘 베른’이 넬리의 살인자 추적의 파트너로 등장하여, 노작가와 젊은 여기자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기묘한 조합에서 연륜과 패기, 신중함과 열정의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파리 빈민가를 죽음의 공포로 뒤덮고 있는 흑열병의 실체를 조사하는 세균학자‘루이 파스퇴르’는 물론, 동성연인의 피살로 범인을 추적하는‘오스카 와일드’의 수다스러움이 더해져 1890년이란 시대를 대표하는 명사들의 화려한 활약이 작품의 재미를 북돋운다. 거기다 슬그머니 당시 파리의 흥청거리던 캬바레와 무희들, 창녀들의 화려한 풍경 뒤에 감추어진 비애를 그렸던‘틀루즈 로트렉’까지 그야말로 매머드급 조연들이 적재적소에서 퍼즐 조각처럼 등장하여 살인자에 한 걸음 접근케 한다.

빈곤층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그리고 평등과 자유를 위해 정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로 분(扮)한 살인자의 실체로 다가가는 과정에는 묵직한 조연들 못지않게 무기상 등 자본주의의 추악한 얼굴들을 드러내게 하는가하면, 시민운동의 모습에 대한 사려 깊은 사유를 동반하고, 관료조직이 발생시키는 무능과 안일함의 고발까지 오늘의 사회상으로 오버랩시켜 자연스럽게 문제를 제기하는 재치를 발휘하기도 한다. 난폭한 연쇄 살인자와 그가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의 진의를 쫒는 넬리와 베른의 여정은 마음 졸이는 긴장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이들에게 애정 전선이 드리우면서 또 다른 긴장의 달콤한 기운으로 안내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병원체를 인간에 주입함으로써 순간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살인자, 사회가 지켜주지 못해 불가피하게 몸을 파는 여성들을 유인해 잔혹하게 실험용으로 난도질한 후 버리는 인면수심의 괴물과의 두뇌 싸움은 스릴러로서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다. 치밀한 추리물로서 인물들의 면면에 숨겨진 반전의 장치와 복선은 물론, 세균이라는 독특한 소재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접근 요소들까지 무한한 흥분과 재미를 안겨준다.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의 생활사, 문화사를 훑어본 느낌까지, 제법 풍성한 스토리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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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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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외치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목표는 국가의 징세 및 지출 능력의 제한과 억제, 규제완화와 사유화(민영화), 작은 정부와 시장의 자동조종기능에 따른 경제 불간섭이라 할 수 있다. 즉 시장은 어떠한 개입도 없이 방임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기능한다는 신화, 환상, 그리고 기만적인 책략을 신봉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세계의 여타 국가들에 규제완화와 공기업화, 재정지출의 삭감을 압박하고 강요하던 신자유주의 선봉장인 미국과 영국은 2008년 자신들이 금융붕괴로 궁지에 빠져들자 부실금융기업들을 국유화하고 재정지출을 늘리는 등 신자유주의의 실천을 배격하였음은 바로 시장자유론자들의 소리가 얼마나 허망하고 위선적인지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시장자유주의자들의 소리가 공허하고 사악한 이기적 탐욕 이상이 아니며, 인류사회에 문제점만을 노정시키고 있는 해악임은 새삼스러운 지적이 아니다. 따라서 이 저술은 시장자유론자들의 망상이라 할 수 있는 주장들에 대해 그것들의 허상과 실패를 보다 충실히 확인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고 하여야겠다. 저자는 이것들을 23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하고 있는데, 이는 시장자유론자들이 늘 하는 주요 주장들을 망라한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자유주의 시장론자들이 주장하는 순수한 인간의 이기심외의 모든 동기는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시장의 자율적 조정 능력이라는 국가의 불간섭과, 계획경제나 규제와 같이 국가의 개입 및 간섭의 문제라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논의로 회귀한다.

신자유주의가 내걸고 있는 경제 패키지는“낮은 인플레이션, 자유로운 자본이동,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다.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불안케 하는 무슨 원흉인 냥 인플레이션을 잡으려고 긴축적 거시경제정책을 추진하고, 금융자본의 국가 간의 자유로운 이동에 장애가 되는 장벽을 모두 해체토록 강요하며, 노동자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 마치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인 것이라고 부르짖은 결과는 과연 어떤 것이겠는가? 사실 너무도 뻔한 수라서‘금융자산 보유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극대화’하기 위한 책략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부자나라, 그리고 부자를 살찌우기 위한 방편인데 단기고용과 비정규직으로 전환하여 이윤율을 높여 주주 수익을 극대화하고, 규모가 작은 금융시장을 거대자본으로 들었다놓았다하여 자기이익만을 실현한 후 붕괴되는 망하든 튀어버리고, 인플레이션을 낮춰 실질 금융소득을 안정화시키고 늘리기 위해 갖추어진 삼박자라 하여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고용은 날로 불안해져 저임금자로 내려앉고 해외자본에 유린당한 기업은 껍데기만 남아 국민의 혈세를 수혈해야하며, 긴축재정으로 국민복지 등 사회안전망은 극도로 피폐해지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실체이다.

규제 완화 등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여 시장의 자율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는 그야말로 참담하고 참혹한 결과만 초래했다. 여기서 뜻밖의 경제사를 접하게 되는데, 인류 역사이래“자유시장 정책으로 부자 된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이 부국으로 성장하는 19세기에 그네들은 철저한 보호무역 정책으로 자신들의 문을 꼭꼭 걸어 잠금으로써 경제적 능력을 키웠다는 것이다. 또한 오늘의 중국 역시 자유시장과는 멀어도 한 참 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지역의 저개발국들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신자유주의 질서의 편입을 강요하는 것이 부당할 수밖에 없다는 반증이다.

아마 시장자유론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들의 하나일 것이다. MB정부 역시 기만에 가득한 이 논리를 툭하면 던지곤 하는데, 소위‘트리클 다운(trickle down)’경제논리로, 부자를 위한 감세혜택, 부자를 위한 자금지원, 부자를 위한 규제완화와 같이 부자에게 큰 파이를 주면 높은 부를 창조해서 커진 부가 아래로 흘러내려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스며들 것이라는 말인데, 이 역시 인류 역사이래 단 한 번도 작동된 적이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이다. 노동자의 생산과실 조차 재분배하지 않고 자신들의 뱃속에 채우기 급급한 이 땅의 천박한 자본가들이 부를 키워서 노동자들, 가난한 자들에게 배분한다는 것은 환상, 아니 망상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결코 시장에 맡겨두어서는 상당한 양의 물이 아래로 내려오지 않기에“복지국가라는 전기 펌프”, 즉 국가의 개입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거대기업의 유익한 경제 환경을 만들어준답시고 기업에게 좋으면 나라에도 좋은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인데, 정작 기업의 미래는 물론 국가경제까지 위험에 빠뜨린 사례는 차고 넘친다.

한편, 저개발국,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들을 위한 직접적 조언이라 할 수 있는 논의가 있는데,‘탈산업 시대’라는 환상 속에서 제조업을 경시하고 서비스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생산성 증가에 한계가 있으며, 교역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제조업이 부재함으로 인해 제조업관련 첨단 서비스의 품질이 저하하여 경쟁이 취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 스위스, 스웨덴 등 최고부국들의 제조업부분 비율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높으며, 세계최고의 지식기반 서비스산업 수출국인 영국조차도 국민총생산의 4퍼센트에 불과할 정도로 서비스업을 국가경제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구상임을 경고하고 있다. 이 밖에도 교육과 국가 경제의 상관관계, 규제의 목적과 내용에 따른 정책적 중요성, 금융자본 유동속도의 조정, 소득분배의 불평등과 국가 평균소득의 허상 등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초래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논의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신화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으니 규제와 계획경제와 같이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시장의 적절한 통제체제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이 이 저작의 논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진정한 기회균등을 위해 결과의 균등을 강조하면서 국내총생산 대비 공공사회 지출이 OECD국 중 가장 낮은 한국의 경우 복지를 강화하여, 비정규직 노동자가 50%에 육박하는 극도의 고용불안을 해소하는 등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은, 복지제도가 오히려 사람들의 변화를 더 개방적이게 할 수 있는 여유로 산업구조조정을 수월하게 하여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같이 공공지출이 경제발전의 동력으로서 같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의 시장 개입정도가 어디까지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구(舊)소련의 중앙계획경제가 노출한 수많은 문제점들과 실패사유를 우리는 거의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기에 계획경제체제의 그 적절성에 대한 논의는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시장 정책은 실패했다. 그럼 어디까지 자유화하고 어디에서 국가가 개입해야 하는가?  저자는 저술의 말미에서“이제 불편 해 질 때가 왔다.”고 선언하고 있다. 아마 지금까지 누려온 경제적 자유를 조금은 포기해야 할 각오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에두른 표현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유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를 벗겨낸 자본주의에 대한 흥미로운 도덕적, 정치적 논의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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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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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문을 열면서 세계의 석학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소리는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 진리의 혼돈, 철썩처럼 믿었던 진실의 흔들림으로‘가치는 어디로 가는가?’하는 것이었다. 지구화라는 거센 물결 속에서 마구 뒤섞인 문화와 가치의 충돌과 융합, 그리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규칙과 제도들은 사람들에게 잠시도 여유를 주지 않는다. 한 눈을 파는 순간 낙오하고 도태될 각오를 해야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자본주의의 파고(波高)는 경제 권력의 지구화를 촉진하고, 미처 지구화되지 못한 정치권력은 지구화된 세계 권력의 방호막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기탁하고 의지할 가치의 기준도 상실한 채, 더구나 보호막이 걷힌 벌판에서 스스로 야수에 대적하고 생존해야 하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놓였다.

‘바우만’의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라는 부제를 지닌 이 저술『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는 이와같은 바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공포, 불확실성의 원인과 이의 규명을 방해하는 걸림돌들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기획이다.
저자는 지금의 지구화는‘부정적으로 지구화된 세상’, 즉 인류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파편화시키며, 집단적 방어장치들의 결속력을 약화시켜 개인을 무력화하는, 그래서 두려움의 공포로 자신의 안전에 전전긍긍하는 문제만을 노정시키는 세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지구화가 지향하는 약육강식의 시장경제 압력은 규제의 철폐를 강요하고, 약자들의 집단적 연대를 해체하며, 따라서 개인을 보호하는 국가의 제도적 장치를 점점 와해시킨다. 이로인해 의지할, 보호할 안전지대와 장치들을 잃어버린 개인들은 스스로의 안전벽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국 국가나 집단의 안전보호 책임이‘개인의 몫’이 되어버렸다고 지적한다.

이와 더불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자본주의는 자기 꼬리를 잘라먹고 사는 뱀과 같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뜯어먹던 타자성의 마지막 풀까지 먹어치우고는 굶어죽는 근대성의 치명적 결과로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인간-쓰레기(Wasted Human)' 를 처리할 배출구의 차단과 공급 불능성의 현실을 적시하고 있다. 지구화가 만들어낸 인간적 유대의 소멸, 연대의 약화는 필연적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로 잉여인구를 급격하게 양산하고 있으나, 역으로 전지구화된 세계는 이제 어디에도 배출지, 배출구가 들어설 여지를 없애버려 이미 지구의 관리 능력을 초과하고 있음에도 해결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전지구적 문제를 지역적으로 해결하려는 사이비 해결방책이란 것으로 난민수용소와 같은 격리공간으로 대처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근원적 해결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밖에 인종청소와 같은 부족간 전쟁과 학살, 상호조직의 살해 등으로 잉여 인구를 흡수하는 참혹한 해결이 그나마 현실로 자행되고 있을 뿐인 것이 오늘 인류의 실상이다. 즉 지구화된 문제를 이러한 모순적인 지역의 해결이 아니라 지구화의 문제로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근원적 접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선두주자들인 선진국, 지역 내부적으로는 기득권을 확보한 지배 권력이 후발주자, 약자를 격리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닌 공존의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지속가능한 인류사회를 위한 불가결의 대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실로 어렵고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잉여인력, 불필요해진 인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쓰레기 인간의 판정 기준은 갈수록 그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 오늘의 정상이 내일의 비정상이 되는 잠재적인 인간-쓰레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소수의 권력자들, 특권층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이 쓰레기가 될 개연성에 놓여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 자신의 안전을 보호 할 수 있는‘일신의 권리’를 위해서는 게임 참가들을 속박하는 규칙을 만드는‘정치적 권리’를 획득하지 않으면, 이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일신의 권리마저 확보키 어려운 것이기에 일신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는 필연적으로 공히 확보되어야 하는 개인의 권리라고 주장하며, 이와 더불어 생존의 유지를 위한 실천적 권리인‘사회적 권리’가 없이는 정치적 권리 또한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기에 이들 세 개의 권리는 시민들을 위한 필수적 권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급하지만 이쯤에서 지금의 세상이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지옥인가를 논의할 수 있을 것 같다.“예전의 성벽과 해자와 작은 탑, 총안(銃眼)을 기술적으로 갱신해 놓은”것의 다름 아닌 현대의 구분하고, 격리하며 배제하는 도시 공간의 모습은 곧 지금까지의 한계에 봉착한 쓰레기 처리와 안전망을 상실한 개인으로 야기되는 불안과 안전위협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한 분리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짜증나고 혼란스러우며 비위에 거슬리는 낯 선 감정은 특권층에게 분리주의적 충동을 자극하고, 함께 지내는 것의 위험을 단절하기 위해 선을 긋고 자신들만의 유배지, 섬을 지향하게 하지만, 이는 생활세계에서 두 범주의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완벽하게 단절하게하고 오히려 적대감으로 광범위한 긴장관계를 강화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질적인 집단에 대한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 사람이 앉지 못하도록 비탈공간을 만들고, 가시밭 공간을 조성하며, 순찰 경비원을 세워 접근을 방어하는 공간 분리는 거주자들의 차이에 대한 내성을 오히려 약화시켜 더욱더 위험을 증대시킬 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근대의 관리하고 보호하는‘정원사’의 마음가짐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자루를 채워줄 큰 사냥감을 죽이는 것이 유일한 일인‘사냥꾼’의 자세에 밀려나, 모든 사람들이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거나 강요당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냥꾼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사냥감이 되거나 아니면 사냥꾼의 대열에서 추방당하여 인간-쓰레기가 되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이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죽도록 뛰어다녀야 한다. 결코 이 대열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소통이 단절되고 입구를 차단하며 서로를 분리하는 것, 사냥꾼으로 영원히 대열을 지켜야 하는 것, 점점 부정적인 지구화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의 소비자향의 시장경제 사회가 유토피아인가? 사람들은 이제 유토피아는 몰락했고,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예전의 미래의 행복을 찾아 헤매던 유토피아가 아니라 예상만큼 좋지 않은 현재의 유토피아로부터 도망가는 것, 즉 실패한 유토피아로부터 도망가기에 급급한 것, 유토피아의 실현이라기보다는 유토피아의 뒤를 쫒기에 바쁜 것이라는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바로 지옥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간은 계속 흐르므로 파도의 흐름을 타라! 가라앉기 싫은가? 그러면 파도를 타라!” 이 무참한 사냥꾼의 논리가 지옥과 무엇이 다른가. 지옥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당당히 맞서 싸우지 않으면, 지역의 그 참혹한 사이비 해결책에, 적대감으로 부글거리는 그 위험천만한 공포와 죽음의 현실을 직면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아슬아슬한 잠정적 협정의 세상에서 개인의 확고한 안전과 자유를 확보키 위해 정치적 권리, 사회적 권리를 향한 외침은 더욱 더 크게 외치고 유대와 결속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온통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아우성을 치는 오늘의 우리들이 바로 이미 무력한 사회로 접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바우만’의 지적은 그래서 더욱 불안하게 유동하는 오늘을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낳은 문제와 지옥 같은 오늘을 극복하기 위한 번뜩이는 통찰과 담론의 세상이 유쾌한 지적 성찰로 잘 빚어진 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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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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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죽음, 이별이란 상실, 그리고 여러 유형의 회한 등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삶에 노출되었을 때,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고 오랜 방황과 심지어는 죽음까지를 선택하기도 한다. 인생이란 걸 살아오다보니 이러한 때가 역시 나를 피해가지도 않았고, 그 시간을 떠 올리면 지금도 속에서 밀려올라오는 울음이 있다. 더구나 소설 속‘정섭’이란 인물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지만”, 내 마음을 보여 줄 단 한 사람이 없어 너무나 쓸쓸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깊은 밤 홀로 이불을 감싸고 억눌렀던 울음을 남 몰래 터뜨렸고 그 후련한 여운에 비로소 정화된 느낌으로 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작가의 말처럼 “슬픔의 사람이 어떻게 슬픔을 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가”는 타인의 아픔에 조응하는 낯선 경험에서, 자신이 아프니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처럼 다가오는 모양이다. 슬퍼하는 사람들, 바로 오늘의 우리들을 얘기한다. 아이를 잃고, 그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내 자살한 남편, 어느새 세상에 오직 혼자만이 된 여자의 그 고립이 슬픔을 넘어 두렵기조차 할 만큼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딱히 전할 의미도 없는 갚을 수 없게 된 인세를 이유로 만난 소설가‘정섭’을 따라 상가(喪家)의 문상을 위해 목포를 향해 가는 여자의 무력감과 연약하고 시린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소위‘변명의 여지없는’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인해 독일로 떠나버린 아내와 딸을 등지고 세상의 온기를 온통 잃어버린 채 한기에 허우적거리는 중년의 남자, 자신의 삶 속에 꽁꽁 묶여있던 아이와 사랑하는 남편, 장미가 피어나는 그네들의 숨결이 배어든 집조차 훌훌 사라져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여자, 쇠락하는 항구의 초라한 여관과 오랜 세월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묻고 사는 늙은 아낙, 귀머거리 딸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손끝이 닳아져라 낡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늙은 아비와 그 속의 울음을 아는 딸의 슬픈 미소가 오랜 세월 수탈과 강요된 희생의 사연을 간직한 항구 목포와 어울려 더욱 애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정섭이란 낯선 이를 따라 무작정 내려온 목포, 그리곤 사라진 남자, 갈 곳 없이 찾아든 여관에서 여자는 자살을 시도하고 여관의 노인과 손녀인 여자아이의 미소 속에서 깨어난다. 여자는 허드렛일을 도우며 그네들의 일원으로 주저앉는다. 그래서 가진 이름은 영란여관의 이름을 따라‘영란’이가 된다. 한편 여자를 목포에 두고 떠나온 남자‘정섭’은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너무 아파하던 여자의 행동이“나를 좀 도와주세요”라는 노크였음을 깨닫고, 항구의 낯선 거리를 헤매고 있을 것만 같은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향한 목포의 기행은 삶이 척박한 우리네 인생살이, 바로 사람들의 아픔에 공명하는 시간이 된다.

일명 통혁당 사건으로 불리는‘임자도 간첩단 사건’의 희생자 가족인 영란여관의 할머니와 그녀의 아들‘김헌’, 그리고 잔혹한 고문을 피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할 수 밖에 없었던‘정영술’노인의 회한의 삶, 저마다 사랑과 이별의 아픔으로 곤혹스러워하는 빈약한 우리 민중들의 애환이 도시를 내려다보는 유달산의 구슬픈 노래소리에 묻혀 그렇게 또 그러하게 흘러간다. 부모 잃은 아이의 까까머리에서 나는 어린아이 냄새, 그 슬픈 내음에서 자신의 상처가 어루만져지고, 늙은 아비의 울음 섞인 악기의 소리에서 슬픔을 토닥거리는 위안을 얻는다. 치매 얻은 노파의 웃음과 악다구니의 반복에서 아무에게도 해 끼치지 않고 살았던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을 본다. 그렇게 여자와 남자, 우리들은 또 다른 우리들의 슬픔을 보면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살아간다.

생애 어느 한 때, 내 인생이 가장 환히 빛나던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시절이 있었던가 하는 작품 속 한 구절이 왠지 잊혀지지 않는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삶이 충만하여 발그레하게 익은 볼을 하고 마냥 즐겁기만 했던 어느 날, 그 어느 시절을 떠 올리려 애쓰는 나를 보게 된다. 영란을 사랑하는 순수하기만 한 청년‘완규’의“대책 없이, 무방비로, 그냥, 좋다고, 헤, 하고” 웃는 그 표정처럼 웃어 보았던 때가 언제인지 아득한 것만 같다. “세상의 아픈 것 짠 것 다 보듬어 불면 큰마음이 될 것이다.”는 영란여관의 안주인이 들려주는 말처럼 삶의 슬픔이란 또 사랑하고 이별하고 상처받으며 이겨내는 것일 것이다. 주류에서 소외된 남도의 항구도시, 목포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조폭어로 왜곡된 낯설지만 정감어린 친근한 사투리들과 오래되고 쇠락한 골목길을 닮은 사람들의 사연들에서 살아야만 하는, 아니 살지 않을 수 없는 정말의 위로를 받게 된다. 물리적 삶의 기반도, 정신적 토대도 빈약한 우리네들의 삶을, 우리네들의 등을 따뜻하게 쓸어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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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비지 가든
마크 밀스 지음, 강수정 옮김 / 비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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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이 발산하는 지성과 유쾌함, 그리고 우아함 때문일까? 작품 전체를 우울한 아름다움이 감아 돈다. 매력적인 사람들, 오랜 세월 지켜온 비밀을 잔뜩 품고 있는 듯한 피렌체 남쪽 투스카니 산자락 거대한 저택과 근처 골짜기에 조성된 작은 숲의 추모정원이 어울려 매혹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사랑과 욕망, 질투와 허영, 그리고 죽음의 신화가 잇닿아 있는, 그래서 가벼운 흥분과 설렘, 알 수없는 호기심이 몸을 가득 채운다.

케임브리지大 재학생인‘애덤’은 지도교수인‘크리스핀 레너드’교수가 졸업논문 주제로 제안한 투스카니 지방의 작은 정원을 연구하기 위해 피렌체로 향하고, 교수의 옛 친구인‘프란체스카 도치’여사의 저택이 품고 있는 작은 추모정원의 예술적 진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1577년‘페데리코 도치’가 직접 설계하고 조성하여, 죽은 아내‘플로라’에게 바쳤다는“추모정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빽빽한 호랑가시나무 숲이 위협적으로 조성”되어있어,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무단으로 침입한 듯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의 부정한 의도를 감지한다.

400년의 세월을 간직한 작은 정원이 400쪽에 이르는 작품을 가득 채울 정도의 마력을 뿜어내는 것은 예술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성한 지적 향기 때문일 것이다. 정원에 세워진 조각상들과 부조들의 조사를 위해‘오비디우스’의『변신』과 『달력』을 통해 유추하지만, 죽은 아내를 표현한 조각상의 얌전을 빼면서도 유혹하는 듯한‘추모’와는 조화롭지 못한 몸짓은 더 이상 연구를 진척시키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히아킨토스’,‘나르키소스’,‘아도니스’ 등 전부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은 부조들을 보면서,‘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기억에 이른다. 수세기 동안 지켜진 침묵을 풀어내려는‘애덤’의 일과는‘푸생’의 풍경화처럼 펼쳐진 낭만적 배경, “무심한 듯 어떤 허영도 담고 있지 않는”도치여사의 손녀인 아름다운 여인‘안토넬라 볼리’의 사랑의 지원 속에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

24살 안토넬라의 나이로 추정해보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57년이 되고, 독일군이 퇴각할 때 살해되었다는 도치여사의 큰아들‘에밀리오’와 굳게 잠긴 저택 꼭대기 층의 비밀은 시간의 근접성으로 현재화되어 정원의 비밀에 더해 이야기를 더욱 미스터리한 국면으로 이끈다. 죽은 에밀리오의 사진을 애덤에게 보여주는 도치여사의 행동, 유전적 형질표현을 통한 출생의 비밀, 저택과 소유토지에 대한 탐욕을 보이는 둘째 아들‘마우리치오’까지 가세하여 사랑과 상실, 욕망이라는 영원한 인간의 메시지가 도치 저택을 휘감아 돈다.

“이별의 시간이 도래하여 우리는 각자의 길로 헤어지니, 나는 죽고 너는 산다. 어느 것이 더 나은지는 오직 신만이 안다.”는 소크라테스의 웅변이 새겨진 추모정원과 폐쇄된 꼭대기 층은 혐오와 증오를 상기하는 교묘한 상징으로 전환된다. 화려함과 쾌활함의 이면에 간직된 야만의 비밀들이 우아한 지성의 내음에 실려 복선과 반전조차도 예술적 문장을 배반하지 않는다. 달콤 쌉싸래하면서도 조금은 위험한, 그러나 결코 미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미스터리의 수작(秀作)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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