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리
고봉황 지음 / 왕의서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민중들의 삶이란 항시 치욕과 모멸, 눈물겨운 인고(忍苦)의 시간임을 역사는 말한다. 그래서“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아진다)”는 무념의 체념어린 신조가 삶 그자체가 되어버린다. 그저 질긴 목숨 이어가기만 하는 것이다. 적어도 타인에게 종속되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 인간사, 아니 이 사회의 더욱 두드러진 모습일 것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빼앗긴 것을 찾기 위해 몸부림쳐야하는 사람의 연대기를 좇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작품은 그래서 가뜩이나 호젓한 우리네들의 마음을 더욱 아리고 슬프게 하고 분노와 통증으로 괴롭게 한다.

1958년 제주 4.3민중항쟁의 시기를 배경으로 시작하여 생의 전반을 치유되지 못한 화인(禍因)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송지하’라는 여인과 그녀를 에워싼 비극의 일대기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 땅에서 권력과 부가 행사되고 장악되는 모양이 추악한 형상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이지만 이로 인해 민중의 삶이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왔으며, 바로 이 시간에도 그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반복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퇴색시키지는 않는다.
당시 이념이란 것이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상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일개 경찰관이 무슨 이념적 철학관과 신념이 있었겠으며, 미군정청에 아부하는 자들이 권력과 재산의 증식말고 어떠한 자기이해가 있었겠는가.

이승만 정권의 권력유지를 위해 착안된 빨갱이라는 적대전략의 명맥은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며 하며 활개 친다. 역사의 혼란과 전환기는 이 땅에 오늘도 이어지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가져와 정의와 도덕성과는 거리가 먼 사회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소설은 이러한 사회가 빚어낸 인간들의 제어되지 않은 비열함과 추접스러운 욕망이 한 가계(家系)의 파괴에 작동한 일그러진 모습을 그려낸다. 위조하고 협박해서 강탈하고, 저항하면 죽음으로 보상하는 세계, 부도덕한 권력에 반항하면 빨갱이가 되어 도살된다. 아버지와 오빠, 사랑했던 연인까지 잃어야 했던 여자. 죽음을 피 할 수 없는 연인의 간절한 부탁인 그의 아이를 가진 여자와 배 속의 아이를 지켜내야 했던 여인, ‘지하’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된다. 연인의 무력한 죽음을 구제키 위해 극악한 경찰관에게 몸을 맡겨야하는 비참함, 악의 씨앗이 잉태되고, 연인의 아이까지 양육해야 하는 여인의 마음속 응어리는 비극에서 비극으로 치닫는다.

사랑했지만 손이 닿지 않는 사람,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의 아들과 자신의 혈육이지만 악의 씨앗인 딸의 양육은 비뚤어진 사랑과 학대를 낳는다. 빼앗긴 한라산 기슭의 광활한 목장을 되찾는 것은 도적들인 지배권력과 재산가들에 대한 복수의 표상이다. 주정사업을 통해 억척스럽게 재산을 모으는가하면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간절함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헌신적인 그의 자식에 대한 양육은 극단적인 외면과 학대로 이어지는 자기의 딸과 대조되어 회복될 수 없을 것 만 같은 슬픔의 심연으로 몰아넣는다. 악연의 뿌리는 이리 휘감기고 저리 감겨서 사랑이 되고 또 다른 불신과 이별, 고통을 낳는다. 그러나 여기에 움츠리고 있는 또 하나의 상처, 지주계급인‘지하’의 상처와는 달리 바라보아야만 하는 태생적 통한을 안고 있는‘우찬’이란 인물은 바로 우리네의 모습, 우리들의 어버이와 조상처럼 희생되고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전형이어서 그 개입만큼이나 균형자로서의 객관적 시선을 생각게 한다.

인생을 앗아간 자의 아내 역까지 해내면서 되찾아야만 했던 빼앗긴 땅, 그렇게 찾은 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미한테 따뜻한 손길 한번 받지 못하고, “바닷물로 눈물을 씻어내며 자맥질을 하던”딸의 한 맺힌 죽음, 자신 만큼이나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을 주었던 사람에 대한 몰이해가 황혼이 뉘엿뉘엿 내릴 때에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은 진정 어리석음의 고통일 것이다. 제주 여인들의 그 모진 비바람이 시대의 쓰라린 역사와 궤를 같이하여 민중의 삶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비록 400쪽 남짓의 짧은 소설이지만 여느 대하소설 못지않은 장엄한 스케일로 비바리, 제주 여인 3대에 걸친 피울음의 흐느낌이 문장의 곳곳에 스며 흘러간다. 사랑과 희생, 집요한 욕망으로서의 모성에 대한 갈증이 빚어낸 뜨거운 삶의 이야기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숭고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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