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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유전학의 획기적인 발전이 질병의 치료, 건강의 유지를 통한 수명의 연장과 같은 긍정적 결과를 갖는 것은 물론이지만 한편으론 인류의 본성까지 조작이 가능해진 유전학에 도덕적인 불편함을 떨쳐내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대체 유전학 테크놀로지의 무엇이 우리들을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샌델 교수는‘유전학적 강화’와 배아에서의‘줄기세포의 추출’이 지니는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고 도덕적 공방을 통해 인간과 인간사회의 윤리에 대해 조심스러운 성찰의 시간을 마련 한다.
그의 저술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미 도덕성을 판단하기 위해서 인간의 행복과 자유와 미덕이라는 세 가지 이상을 기준으로‘정의’의 다양한 판단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았듯이 유전학의 발전과 이용이 만들어내는 윤리의식 또한 이에 못지않은 기준과 사유를 요구한다. 먼저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디자인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한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다소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청각장애인 부부가 자신들의 아이도 청각장애자이기를 원하여 청각장애의 유전적 형질을 지닌 배아를 통해 아이를 출생시키는 행위에 대해 어떤 도덕적 문제점이 있는가하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도덕적으로 편치 않은 느낌을 갖지만 그것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이와는 반대로 키 작은 아이를 위해 부모가 유전적 기술을 통해 신장을 늘리는 것은 어떨까? 이 행위에는 도덕적 문제가 없는 것일까?
청각장애 부부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자유롭게 행사한 이 행위에 딱히 부도덕하다고 지적할 만한 도덕적 판단요소를 내밀기가 쉽지 않다. 만일 이것이 부도덕한 행위라 하면 발육이 부진한 키 작은 아이에게 유전적 도움을 받아 신장을 늘리는 행위도 사실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벗어날 수 없다. “성별, 키, 다른 유전형질을 선택하고, 신체적, 인지적 능력을”변화시키는, 즉 인간의 본성을 공학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왜 잘못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이의 의지와는 달리 인생을 미리 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율성이 침해되고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인생 계획을 수립할 권리의 박탈이라는 개념이 개입되어 있다. 우리들은 이처럼 자율성, 개인의 권리와 같은 도덕적 언어로 이들 행위의 그름을 설명하지만 왠지 석연찮은 구석이 남는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신체능력이나 기억력, 집중력의 강화를 위해 유전학적 강화 기술을 통해 능력을 개선시키는 것처럼 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로 확장해보면 운동선수에게 근육 강화제를 주사한다던가, 산만하여 행동장애가 있는 아이를 치료하는 리탈린이나 암페타민제제를 사용하여 집중력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유전학적 기술을 통해 생체공학적으로 탁월한 운동선수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면 우린 여기에 도사린 도덕적 문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유전적 선택이나 강화는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침식해서 바로 인간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체공학적 운동선수는 그 자신이 아니라“실제 행위자는 그를 생체공학적으로 만들어낸 발명가”이기에 때문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행동을 완전히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가 인식하는 자유와 도덕적 책임에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유전공학자의 능력이니 여기에 도덕성과 책임의 의무가 개입할 어떠한 여지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의 주체에 대한 문제를 떠나 이러한 선수가 뛰는 스포츠가 더 이상 관중의 시선을 끌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던져보자. 아마도 성취에 대한 우리의 존경이 퇴색할 것은 뻔하고, 더구나 탁월성이라는 스포츠의 본질을 상실하고 말 것이며, 재능을 높이 사고 칭찬할 만 한 것이 사라진 스포츠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유전학적 강화가 인간에게 중요한 부분인 자연적인 재능과 소질을 침식하는 것은 분명하다. 나로서는 여기에 존 롤스의‘차등이론’, 즉 “출생이라는 우연을 기준으로 소득, 재산, 기회, 권력과 같은 도덕적 임의성은 불공평을 조장하고, 더구나 혜택 받은 가정환경의 산물로서 우연의 영향을 받는다면 노력의 미덕도 인정치 않는다.”는 견해를 확장하여 유전학적 기술이 야기하는 이러한 도덕적 임의성이 사회의 기본 구조를 파괴한다는 점을 추가하고 싶다. 우연의 차이로 인해 불평등이 만들어지는 자연출생조차 행운의 이익이 배분되는 것이 공동체의 이익과 사회 안정이라는 정의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유전학적 강화는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일뿐 아니라 오늘의 과잉 경쟁사회의 요구에 순응하여 정복과 지배를 향한 지나친 불안을 조장하는 도덕적 곤란함을 내재하게 된다는 비판을 비켜나갈 수 없는 것이지 않을까?
더구나 이는 20세기 우생학의 악령과 다름이 없기도 하다. 극빈자에게 강제 불임을 시키는 것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에게 생식을 못 하게 하는 법률을 추진했던 과거의 우생학처럼 국가주도의 강제성이 없으니 오늘의 유전학적 강화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유전적 선호를 이유로 태아를 낙태하고, 프리미엄 난자시장이 성황하며, 특권층 부모가 경쟁사회에서 성공할 만한 자식의 종류를 선택하고 유전공학적으로 성공할 만한 조건을 갖추게 하는 방식의‘자유주의 우생학’은 도덕적 불편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하버마스의“유전학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인격은 자신을‘자기인생 역정의 단독자’로 볼 수 없다.”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측면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인류가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행위를 시작할 수 있는 인류 능력의 조건이라는 말이다. 인간이 유전학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우연에 좌우되어 자신의 운명을 연대와 공유할 이유가 없어져 급격하게 사회연대는 파괴될 것이며, 겸손과 같은 미덕은 사라질 것이다. 궁극에는 아마 영화 『터미네이터』가 상상하는 무한의 전쟁만 존재하는 공멸의 세상을 초래할 밖에 없지 않을까?
끝으로‘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 생명의 복제까지 나아가려 하는 유전학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짚어본다. 줄기세포 추출 행위는 인간 생명을 상품화하는 비인간적 활동이며, 인간 배아(포배)의 파괴를 동반하는 비도덕적 행위라는 반대론에 대해 저자는 생물학적 사실에서 포배가 인간 존재이고 인격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고 피부세포를 예로 들어 주장하며 줄기세포 추출행위를 찬성하고 있다. 또한 인간 중 누구도‘복제 포배’였던 적이 없는 만큼 복제 포배는 엄격히 말해 배아가 아니라 생물학적 인공물(clonote)이며, 자연생식에 있어서도 초기배아는 다반사로 죽기 때문에 포배를 연구물로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배아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문제가 있다. 과연 포배는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물인가?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에 반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화 할 수 없다. 인간은 목적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가침성을 어느 시점에 획득하는가? 하면 다시금 그 경계를 확정짓는 다는 것이 어렵다는 점에 봉착하게 되지만, 저자의 주장과 달리 나는“수정부터 출생까지 과정에서 인격이 정확히 언제부터 생기는지 짚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배아를 발달한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싶다. 알 수 없기에 불의의 상황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 아닌가! 단지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만이지 않은가? 물론 이 문제의 결론에서 “사물로만 취급되어선 안 된다고 해서 배아가 인격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배아는 불가침의 권리가 없다, 그러나 맘대로 처분할 대상도 아니다.”라고 하면서,“오직 쓰고 버릴 목적 때문에 발달초기의 생명을 만드는”엽기적인 일을 지지하고 있다. 질병 치료라는 인류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목적이기에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사용하는 목적과 본성에 적절한 일이어야 한다는 유전학기술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 이 기준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용하는 목적에 대한 정의와 도덕성의 판단기준에 이르면 다시금 불확실성과 상대주의와의 충돌을 마주한다. 이런 순환논리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고귀하게 사용하자는 추상적 호소에 동의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직감하는 도덕적 불편함 그 자체가 이미 부도덕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유전학적 강화, 인간의 초기생명체인 포배의 실험 사용문제의 도덕성을 검증하는 이 저술은 분명 유익하지만 과학이 초래하는 기계적 합리주의와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불공정성의 고착화를 내재하는 이 문제는 인간의 미래를 불투명한 어둠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할 수 있다. 이기적 경쟁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라는‘프로메테우스적 욕구’는 우리 인간사회에서 지양하여야 할 본성이다. 유전학 그 자체가 무슨 악이겠는가.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유전학 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이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