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 1 홍신 엘리트 북스 13
서머셋 몸 지음 / 홍신문화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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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사회상태의 실정적 요소들에 사람이 어떻게 강제되고 그래서 순수한 이성에 때가 묻는지, 그런데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이 쌓인 후에 그 영상들을 천천히 감상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것을 성숙이라는 말로 터무니없이 포장하고 비로소 적응했다고, 온전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하는 황당함에 욕지기가 치미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분노가 치미는 것이다.
이런 불쾌감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잘 길들여진 순한 양처럼 온갖 전략적인 사회적 장치들에 순응하여 살아 온 삶이 불현 듯 항의 할 구체적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필립’이라는‘서머셋 몸’의 소설 속 분신인 인물이 소년에서 장년에 이르며 마주하는 삶의 그 수많은 감정적 요소들이 마치 지금의 내가 감당해 온 삶의 역사와 다를 수 없다는 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일 게다. ‘몸’의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의 표제가 몇 차례의 변경 끝에‘스피노자’『윤리학』의 한 표제인「인간의 굴레」를 인용한 것은 사회의 유무형의 힘인 장치들이 작동하는 현장에 포획당하지 않고 그 속성을 관찰 할 수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이 빛나는 통찰의 언어만으로도 소설은 이미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린 어린 시절 가족들에게서 그리고 학교라는 집단의 규범 속에서, 또한 이상과 취향에 따른 또래들과의 상호작용에서, 나아가 이질적인 보다 큰 사회의 무리와 소통과 단절을 지속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구축해 나간다. 그러나 이 자신만의 삶이란 것이 순전히 개인의 자율로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가족, 학교, 또래집단, 사회의 이상과 규범으로부터 무언의 강제와 주입의 영향 하에 내면화되는 것이니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면 삶이 그리 순탄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의사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어린 필립은 목사인 백부와 백모의 슬하에서 성장하게 된다. 아이가 없는 백모의 헌신적이고 조심스러운 사랑과는 달리 인색하고 속물적인 백부의 위압적인 훈육은 다리를 저는 아이의 사회성을 위축시키고 모든 언어와 행동을 내면으로 숨어들게 한다. 왕립학교에서의 생활은 절름발이 소년에 대한 또래의 공격과 조롱에 대한 저항과 순응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속성의 본질을 터득케 하고, 교사와 교장이라는 어른들, 기성 사회의 졸렬하고 구차한 삶의 위선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된다. 대학 진학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정형화된 구속을 벗어나기 위해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향하는 필립의 저항적 행위는 청년으로 성장하는 소년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거름이 되지만, 자기 삶에 대한 주도적 능력을 기르지 못한 상태에서의 자유란 자칫 공허한 맹목의 방황 이상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몸은 이 시기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새롭게 인식되는 보다 다양한 삶의 모습들에 대한 경험과 이해의 과정, 그 자체로서 기억될 뿐이다.

한편, 필립에게 생의 불안정성, 한계를 암시하는 기호로서 부모가 남긴 2000파운드의 유산은 그의 삶을 실용적인, 아니 속물의 시선으로서 세상을 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결국 학업보다는 런던의 회계사무소 보조원으로서 안정적 직업으로 예견되는 생의 수단에 목적을 두지만, 이내 미술 스케치에 대한 주변의 칭찬이 자신의 뒤늦은 잠재력을 발견한 것인 양, 파리의 미술학교로 태도를 전환한다. 여기에서 통상 아이와 부모들은 갈등하고 반목하게 되는데, 직장을 이내 그만두고 돌연 미술공부를 하겠다는 인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아이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자기 삶의 그럴듯함에 도취된 아이의 대립이다. 상충하는 인식들, 즉 인간의 삶에 유용하다고 간주된 방향을 향해 운용되고, 통치되며, 지도되는 실천과 앎, 제도의 세계에 대한 부딪힘의 결과는 체험만큼 훌륭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서로 달리 습관화되고 내면화된 개인의 규범은 보다 보편적일 수 있는 기성의 장치에 종속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리에서의 미술학교 생활역시 자신의 역량에 대한 깨달음, 일종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는 재능 없는‘프라이스’라는 동료의 죽음은 이류 화가로서의 불투명한 미래를 확인케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역시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이해보다는 생계의 원활한 수단으로서 자신의 미술세계가 가능치 못하다는 판단에 연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성사회의 장치에 타협하는 것이 그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은 확실한 소득을 가져다주는 직업의 길을 걷는 것이 된다. 아마 소설의 실질적 시작은 이제부터라 할 수 있는데,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하는데 걸린 10년의 세월에 걸친 삶의 이야기이다.

여기 출발점에 서서 필립이 하는 위대한 말이 있다. 이는 그의 인생이 사회와 본격적으로 부딪히는 20대의 장구한 시간이 놓여있는데, 그 한 복판에‘밀드레드’라는 그의‘굴레’가 드러누워 있다. 밀드레드라는 천박하고 간특한 여성의 행동과 교차하며 사회의 속성을 선언하는 가히 몸의 빛나는 통찰력의 진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과의 투쟁에 있어서 사회는 세 가지의 무기를 가진다. 법률, 여론, 양심이 그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술책으로 대항 할 수 있는 무기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술책만이 강자에게 대항 할 수 있는 약자의 유일한 무기이다. ~ 中略 ~ 국가라는 유기체와 자의식을 가진 개인, 이 양자가 화목하게 손을 잡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며...”
즉 사회의 실정성을 이루는 장치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삶의 지혜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필립은 찻집의 웨이트리스인 밀드레드란 여인에 사로잡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지만 여자는 사랑은 물론 그 어떠한 것도 필립에게 진실로 내어주지 않는다. 모욕과 좌절, 수치심만을 안겨주는 여인에 대한 갈망은 그 만큼 자기모멸을 심화시킬 뿐이다.

필립의 사랑과 돈을 마음껏 유린하곤 건달과 살림을 차린 탕녀가 건달의 아이를 임신한 채 잊혔던 필립을 다시금 찾아와 수단으로 그를 이용하며, 필립의 친구와 사통하는 과정은 진정 교활한 장치와의 타협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회와의 타협이란 것이 이처럼 구역질나는 술책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마 암이겠지만 죽을병에 결려서야 다시 찾아온 탕녀에게 비로소 내보이는 냉소적 연민은 사회와의 타협점을 암시한다. 마침내 밀드레드란 굴레를 벗어나 중단되었던 의사수업과 면허의 취득, 그리고 순수한 이성, 겸손과 배려의 미덕을 갖춘‘샐리’와의 결혼으로 맺는 이 소설은 인간의 성장기에 거치게 되는 의례들을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권력의 장치들과 연계하여 다면적이고 또한 규범의 안팎을 종횡하면서 관찰하게 해준다.

오이코노미아, 실정성, 장치, 규범과 이상이라는 정체성처럼,  그 용어와 의미의 범위의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사회의 행동을 지배하는 모든 유무형의 전략적 힘으로서‘굴레’라는‘서머셋 몸’의 철학적 통찰을 실현한 이 소설은 가히 천재의 면모를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과연 선의지에 의한 순수이성만으로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삶이란 어느 만큼은 술책을 용인하여야 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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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덴티티 경제학 - 정체성이 직업.소득.행복을 결정한다
조지 애커로프 & 레이첼 크렌턴 지음, 안기순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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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섣부른 판단이자 결론일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모든 이론과 학문은 결국 한 장소로 모이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한다. '아이덴티티(Identity)', 즉 정체성(正體性)이란 개개집단 또는 개인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는 환경과 집단 내 인간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내재화되고 습관화된 특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그간의 사회분석을 지향하는 여러 성찰에서 용어를 달리하긴 하지만 개인과 사회집단의 행동을 지배하는 요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일례로 푸코나 바디우가 말하는 소위‘장치’라는 것처럼 제도와 규범, 사회적 취향등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배경의 상호작용이 인간의 행동을 억제하거나 방임하는 형태로 작동하는 힘이라고 역설한 것과 상통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덴티티 경제학’이란 이 낯선 경제학의 새로운 접근은 전통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거나 놓치고 있는 인간의 인지적 편견과 심리학적 발견을 반영한 행동경제학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실제 효용의 선택에 있어서 개인이 소속된 사회집단의 배경에서 비롯되는 선호나 취향이라는 정체성, 다시 말해서 사회적 맥락에 기인하는 동기에 의해 효용을 결정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정체성 개념을 사용하면 현대경제학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명예나 의무는 물론 성차별, 인종차별, 조직 갈등 등 사회 제반의 현상이 규명 가능케 되어 그 현상의 원인과 치료에 대한 탐색의 범위를 넓혀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실례(實例)를 위해 기업조직과 교육,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 빈곤과 인종차별의 현상에서‘정체성’이 결정적인 동기임을 밝혀내고 있다.

저자들은 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 개인이 어떠한 집단적 소속 또는 위치에 포함되거나 포함되려하는 지라는‘사회적 범주’와, 그 집단 또는 사회의‘규범과 이상’, 그리고 ‘정체성 효용의 이익과 손실’의 저울질을 중심으로 인간의 동기가 사회적 맥락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개되는 실험사례나 관찰된 일화는 우리 사회가 해명하지 못하거나 이론(異論)으로 분열되어 갈등을 겪고 있는 현안 문제들이어서 이해와 관심을 집중시킨다. 일례로 기업경영자들을 아주 혹하게 하는 매력적인 장으로, 기업조직의 갈등을 해소하고 효율적 경영관리를 위한 영감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인데,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의 공정한 설정은 생산성과 연대하여 항상 고민에 빠뜨리는 부분이다. 어떤 조직이든 조직의 이상과 규범에 충실한 부류와 이에 반발하는 부류가 있다. 충성하는 집단을‘인사이더’라 하고, 적대하는 집단을‘아웃사이더’라 하면, 인사이더는“적은 노력을 기울일 때 정체성 효용을 잃지만 아웃사이더는 자신이 일부라고 느끼지 않는 조직에 많은 노력을 투입할 때 오히려 정체성 효용을 잃는다.”이 경우 아웃사이더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한다고 해서 과연 생산성이 제고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실제 많은 기업들이 금전적 인센티브로 효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군대조직이나 대기업들이 자아상을 효과적으로 변환시켜 공동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형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신입 생도나 직원에게 입사초기에 강도 높은 혹독한 훈련을 실시하는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아웃사이더를 인사이더로 전환시키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다. 단 이 전환비용, 즉 정체성비용이 아웃사이더의 생산성 저하로 인한 손실보다 적은 수준에서 실시 될 것은 물론이다. 목표 달성도 하고 자원을 저감시킬 수 있는 효과적 발상을 자극하는 다양한 일화들은 일선 경영자들에게 분명 유용한 장이 될 것이다.

한편, 우리사회는 물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교육문제처럼 민감하고 집단을 분열시키는 주제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효과적으로 만드는 사항들, 개혁프로그램의 성공과 실패 원인, 학생이 학교에 가는 이유, 교육수요의 파악”등에 이르기까지 학부형, 교사, 교육 정책자에 아주 긴요한 시각을 제공하는 정체성과 교육경제학의 장은 이즈음의 우리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실로 적시(適時)의 내용이 아닌가 한다. 아웃사이더가 되어 교사와 학교에 적대감을 갖는 학생이나 그들의 집단이 지향하는 정체성의 효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순간,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학생과 학교, 교사가 상호 동일시하고 일체화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면, 기존 경제학의 주장처럼 학생의 기술과 미래의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는 기계적 교육의 편협성과 어떠한 사회갈등의 봉합을 위한 처방도 제시하지 못하는 헛된 정책을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규범이나 이상의 변화와 같은 정체성으로서만이 비로소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경제적 분석과 판단을 가능케 하는 예가 풍부하다. 남녀에게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직업이 서로 다른 것이나, 이 남녀라는 성의 구분이 희석되어 어떠한 시장구조의 변화도 없음에도 직업의 구분이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현상역시 정체성으로 해독할 수 있다. 소수자 우대정책이나 직업훈련프로그램과 같은 공공정책의 수립에 있어서도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가 의미하는 정체성의 반영은 절대적인 경제적 의사결정에 있어 필수적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개인의 자선행위나, 광고, 정치행위, 나아가 증오와 폭력, 범죄의 행위까지 정체성이 경제분석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는 이유로 설명되고 있다.

행동방식에 대한 규범은 사회적 맥락에서 사람들의 지위에 따라 결정되며, 동기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변한다. 어떤 행동은 소비를 증가시킬 수도 있지만 정체성에 대한 효용을 감소시킨다. 한 개인은 이런 상충관계에 균형을 맞춤으로서 효용을 극대화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개인의 효용 선택은 전통 경제학처럼 합리적 이성에 의한 선택도 아니며, 그렇다고 인지적 편견의 작동에 의해서만도 아니다. 바로 개인이 속한 사회적 범주와 그 범주 속에서의 이상과 규범의 틀에서 결정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새로운 개념의 사회분석 틀을 접하는 순간 우리사회의 요즘과 같은 극단적 사회 분열의 해소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과 국가와 사회 및 경제적 문제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유용한 툴(tool)로 손색이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학문적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15년 남짓 된 출발점에 서있는 유아상태의 학문이다. 그렇다고 정체성 경제학 자체가 학문적 유아상태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고전경제학에 수많은 취향적 효능을 반영하고 심리적, 인지적 편향이라는 행동경제학의 토대위에 서있는 학문이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 어쩌면 반드시 밟아가야 하는 길을 정말 유일하게 안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간결한 언어와 일화로 짜임새 높게 압축된 정체성경제학을  개괄한 최초의 입문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산업 경제, 교육, 여성 및 노동분야의 정책자들, 정치 및 정당인들, 기업 경영자들에게 이즈음 반드시 읽어두어야 할 필독서로 권유하고 싶은 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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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지 오웰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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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하게 읽힌 작품 중 하나여서, 또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인용되는 작품 중에 아마도 순위권에 들 정도로 그 노출의 빈도가 높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출판사 비채가 출간한 김욱동 교수의 번역 판본을 접하면서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이 작품의 감상을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이 어떻게 한국사회에 유독 많은 번역 판본을 갖게 되었는지는 아이러니이지만 추정되는 이유가 있긴 하다. 우리사회에 처음으로 번역 소개된 1950년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 대결이 첨예한 장이었으며, 소위 우익은 이 소설을 소비에트연방으로 상징되는 공산주의의 패악과 실패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미에서 활용한 것이었고, 좌익은 노동자가 끊임없이 자본가에 의해 착취당하는 삶의 현실을 설명하는 효과적 도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극렬한 이념의 갈등이 낳은 참으로 모순되는 좌우의 아전인수는 이 작품을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읽어야 되는 권장도서가 되는데 서로 이의가 없었다. 여기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 작가의 의도를 떠나 얼마나 다양한 관점으로 읽히고 서로 다른 해석을 갖게 하는지, 바로 이것이 문학특성의 일면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게 하는 것이다.

소설은 장원농장의 주인인 인간‘존스’로부터 동물들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착취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려는 동물의 반란과 이후 동물들의 공동자치, 그리고는 권력의 갈등과 지배권력의 등장, 다시금 반복되는 계급사회와 노동력 착취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무력한 동물들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사실 너무도 극명한 플롯으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간과 인간사회, 그리고 사회주의를 나아가서 당대 소비에트연맹(구 소련)을 상징하는 동물들과 동물농장을 통해 후기산업자본사회의 노동자인 대다수 시민들의 비참한 삶의 현실과 부와 권력의 비열한 기만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견 스탈린의 소비에트연맹 건설이란 특정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소설의 인물과 사건들을 실제의 인물들과 사건의 연장으로 해석하면 그야말로 단순명료해져서 정작 작품의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의도들을 놓치고 말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소비에트공산주의의 초기 권력투쟁이나 자본주의 사회와의 갈등과 기만적 협력이라는 협소한 틀에 고정시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단지 하나의 가능한 독해로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지, 마치‘조지 오웰’이, 이 작품을 하나의 단순한 맥락으로만 썼다고 주장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자본권력이 무산계급인 노동자의 노동력 착취기반에 서있음으로서 이 구조는 여하한 방식으로 개선하여야 할 당위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 소재는 하나의 구성요소일 뿐이지 소설의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을 획득하고 권력을 유지 존속키 위해 계층을 다시금 분리하는 인간 사회의 구조적 본성에 대한 성찰이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발단은 농장동물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메이저 영감이란 돼지의 훈시로 착취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등, 동물다운 동물(인간다운 인간의 은유)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기본 권리에 대한 자각과 선동이다. 즉, 자본권력에 억압되어 착취만 당하는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혁명을 통해 개인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이론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시작은 당대의 무산계급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주의의 염원으로 시작되지만, 이 후 돼지‘나폴레온’이 정적(政敵)인‘스노볼’을 무참히 쫒아내는 것과 같이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연상하게 하지만, 이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서의 권력에 대한 본성의 발현이라 보는 것이 오히려 현대적인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권력이 획득되었을 때, 또한 이의 유지존속을 위해 인간이 하는 행동에 대한 일련의 통찰로 보면 권력자의 정당성 확보와 특권의식의 발효, 시민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두려워하는 요소를 통해 언로를 차단하거나 반대의견을 묵살하는 사악한 논리전술을 볼 수 있다. 동물들의 회의(懷疑)와 반대가 예상되는 정책을 권력자의 의도대로 실현코자 할 경우, 동물들이 끔찍스럽게 싫어하는 인간‘존스’나 추방된 ‘스노볼’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여 아무도 이의를 말 할 수 없게 하는 형식이다. “존스가 다시 돌아오는 거요! ~ 여러분 중에 존스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자는 아마 하나도 없겠지요?”이의를 달면 반동이 되는데 어느 누가 의견을 말 할 수 있겠는가? 한국사회에도 똑같은 패턴을 가지고 보수집권당이 한결같이 사용하는 전술이 있는데, 서민의 복지를 이야기하거나 정당한 배분과 같이 평등을 말하면 여지없이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는 것과 같다. 빨갱이에 동조하면 반역이 되고마는 희한한 왜곡전술인데 권력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가장 천박하고 사악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동물농장은 권력의 탐욕, 사악함, 타락의 과정을 말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경쟁자를 숙청하고 추방하는 방법, 반대세력을 굴복시키는 방법, 추방된 정적을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법, 권력을 부의 축적수단으로 이용하는 방법, 특권화하고 계급화하는 수단과 과정 등 인간사회의 평등한 공동체의 구축이란 이처럼 어렵고 도달하는데 고통스러운 장애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랄 수도 있다. 소설에는 시종일관 시니컬한, 상황의 변화에 냉담함 혹은 무관심을 지속하는‘벤저민 영감’이란 당나귀가 있다. 이 자는 인간인 존스의 농장시절이나, 돼지 나폴레온의 농장시절이나 “굶주림과 고통과 실망은 변하지 않는 삶의 법칙”이라고 단순한 체제의 변화만으로는 시민 생활의 긍정적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네발달린 짐승인 돼지가 이윽고는 두발로 서서 인간의 흉내를 내기에 이르는데, 결국은 권력이 지향하는 것은 소유, 즉 물질을 향한, 그리고 차별을 통한 권위의 확보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소설의 결말은 인간사회에 하층계급이 있다면 동물농장에는 하층동물이 있으며, 더 열심히 일하면서 식량을 적게 배급받는 사회의 실현이라는 권력의 독재화, 전제화라는 권력이 부패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체제도 기만과 허위, 실패를 야기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한다면 소비에트공산주의의 위선과 실패를 고발했다고 하겠지만, 이젠 보다 폭넓은 읽기를 위한 독해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번역 판본에는 「문학과 정치」라는 김욱동교수의 동물농장과 조지오웰에 대한 해설이라 할 수 있는 평론이 80여 쪽 수록되어있어, 작가 오웰의 문학과 정치사상은 물론 소설 동물농장에 대한 심화된 읽기와 연구가 가능토록 지원되고 있다. 또한 소설의 본문에는 풍부하고 세심하게 주석들이 설명되고 있어 은유된 시대상과 결부하여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도록 되어있다. 이것이 자유로운 독서의 이해를 방해할 수 있음은 물론이지만, 이를 배경지식으로 참고한다면 초행길인 독서자에게는 유용한 안내자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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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넘버 포 1 - 로리언에서 온 그와의 운명적 만남 로리언레거시 시리즈 1
피타커스 로어 지음, 이수영 옮김 / 세계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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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일라잇’과는 또 다른 매혹적 판타지로맨스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드넓은 우주의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가능성은 항상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는가? 고도의 문명과 초능력을 지닌 우리의 모습과 닮은 멋지고 아름다운 외모의 외계인과 사랑에 빠지고, 그(그녀)의 고통과 희망을 이해하게 된다면, 아마 멋지고 환상적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낯설고 두려운 경계심도 함께하지 않을까? 스토리가 얼마나 달콤하고 맛깔스러운지, 게다가 심장을 옥죄는 긴장감과 유쾌하기도 하지만 공포의 전쟁과 맞닥뜨린 초능력의 액션, 그리고 간간이 우리의 지성을 일깨우는 인류의 자기반성을 은유하거나 역사적 인식에 대한 무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등 반짝이는 지적환기까지 완벽한 구성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오늘의 지구인들처럼 자기파멸적인 생태계의 파괴로 생물의 존속이 불가능하게 된‘모가도어’행성의 자원획득을 위한 야만적이고 무참한 침공이 지구의 문명보다 이만오천년정도 성숙한 행성‘로리언’에 가해지자 이를 피해 9명의 아이(가드)가 그들과 동수의 보호자(세판)와 지구로 탈출한다. 아이들은 세판들의 보호 하에 유산되어오는 잠재된 초능력을 키워, 그들을 멸종시키려는 모가도어인에 대항 할 정도의 힘을 단련하기위해 지구의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숨어 지낸다.

아홉 명의 아이들은 각기 넘버 원(one)에서 넘버 나인(nine)까지 일련의 번호를 가지고 있으며, 반드시 번호의 순서대로만 살해가 가능토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한 명의 가드가 모가도어인에게 살해 될 때마다 아이들의 발목에 하나의 원(circle)이 타는 고통과 함께 새겨진다. 넘버 원, 투, 쓰리가 살해되었다. 이제 넘버 포다. ‘나’, 넘버 포(No.4)는 추적을 피해 계속하여 보호자인‘헨리’와 함께 이주를 지속한다.

헨리와 넘버 포가 위장하여 새롭게 정착한 곳은 오하이오주의 작은 도시‘파라다이스’, 새로이 이주하는 곳마다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도피자의 신분은 열여덟 살의 넘버 포에게는 힘겹기만 하다. 소설의 주 무대는 영애덜트(Young Adult)작품답게 넘버포가 전학 간 고등학교이며, 신선하고 사랑스러운 젊음의 생기가 넘쳐흐른다. 서로 끌리듯이 관심을 갖게 되는 넘버 포(존 스미스)와‘세라’의 달짝지근하고 향긋한 사랑의 내음이 시종 소설을 휘감아 돈다.
그러나 열정이란 감성에만 싸여있을 수 없는 것은 모가도어인의 추적이 차츰 좁혀져 오고 있다는 징후 때문이다. 드디어 넘버 포에게 첫 레거시(Legacy;잠재 초능력)로 루멘(Lumen;자체 發光, 發熱)이 나타나고, 점진적으로 염력의 능력까지 키우게 된다.

세라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보호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신분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보호자인 헨리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떠 날 수 없어 위험의 거리는 가까워지기만 한다. 모든 생물이 학살되고 파괴되던 그들의 행성 로리언의 무참한 광경, 생존과 힘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도피는 무력감과 좌절로 내 몰기만 한다.
하지만“모든 걸 잃고 끝났을 때, 모든 게 암울하고 끔찍하게 느껴질 때도 언제나 희망은 있는 법이다.”라는 헨리의 희생을 무릅쓴 보호와 애정어린 자극의 언어, 세라의 사랑은 용기와 희망의 의지를 깨워준다.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동반한 액션, 황홀할 정도로 감미로운 사랑의 장면들이 정교하게 얽힌 구성 못지않게 오늘의 우리 지구, 자연의“생명을 빼앗아 그 힘으로 다른 것들을 죽이고,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정신을 조종하는”생존방식이나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하는 우매함을 상징하는 듯한 모가도어인의 야만성은 자칫 공허할 수 있는 소설의 지적 균형감각을 지탱해준다.

소설의 압권은 넘버 포와 헨리, 그리고 동료들과 모가도어인과의 초능력이 부딪치는 공포의 장면인데 아마 곧 공개될 “카루소 감독과 마이클 베이”가 제작한 영화로 확인 하고플 정도의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다. “아이 엠 넘버 포(나는 넘버 포다!)”란 자긍심 넘치는 표현처럼 소설 또한 여느 판타지문학에 견주어 손색없는 완벽한 흥미와 생동감, 활력이 넘쳐흐른다. 아마 소설의 프롤로그의 암시로 보아 넘버포의 활약은 후속작의 예견을 가능케 한다. 혹 로리언은 우리 인류의 진짜 조상이 아닐까? 아니면 그들이 바로 인류의 창조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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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그 매혹적인 예술
에릭 부스 지음, 강주헌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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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술이 돈으로 평가되는 상품이 되고, 20세기 들어서는 예술행사는 특권층의 사치품으로 전락했다는 주장이 사실과 그리 괴리된 말은 아닐 것이다. 특히 자기표현이 예술의 목적 그자체로 부각되면서 특별히 고상하고 추상적인 방법으로 변질되었고, 또한 제도화되어 계층을 구별 짓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즉 생득적 권리로부터 멀어졌다. 그렇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술은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니, 삶에 실제로 유용한 것인가? 하는 의문에 회의적인 존재가 된 것이 사실이다. 말로는 예술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화가의 소품 한 점도 일반대중이 구입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재화를 요구하고, 교향악이나 오페라 공연은 언감생심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해득하려면 상응하는 교육과 안목을 가져야 하는데, 일반 대중에게는 사치스러운 투자이니 접근은 애초에 차단되고 만다. ‘부르디외’말마따나“계급적 에토스를 숨긴 문화적 구별짓기”의 자연스러운 도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은 일상의 삶에서 극단적으로 이탈된 존재가 되어, 인간의 삶 자체였던 예술행위 본래의 기능인 공동체의 결속과 사회규범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으니 오늘의 대중이 예술을 일개 사치품, 사치행위로 간주하는 것을 그릇되다 할 수 만은 없게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처럼 예술 본연의 의미가 퇴색되고 정치적 의미부여가 강화되는가하면 표현방법, 도구의 변질이 지속됨에도 인간의 원초적 충동이나 표현과 같은 개인적 욕망은 변한 것이 없다. 즉 개인적 의미 찾기나 사물의 탐구, 자기만의 작품을 남기고자하는 욕구는 본능적인, 생래적인 것이니 예술이 인간을 떠난 적은 없었다고 해야 하는 모순이 남는다. 그러나 사회의 정치경제적 지배논리에 억눌려 인간 본연의 능력이 압도당하고 있을 뿐, 사람의 예술적 본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니 결코 모순이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에릭 부스’는 이 감추어지고 발현되지 못한 예술의 감각을 일상에서 발견하고 깨워내서 삶의 열정을 키워내고 창조적이고 아름다우며 풍부한 감성의 세계를 만들어내자고 예술가로서, 사업가로서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예술적 삶을 위한 방법과 과정, 그 방향을 진정한 언어로 알려준다.

예술은“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바탕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 즉 의미 있는 세계를 만들려는 노력으로서‘제2의 존재 방식’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삶은 고되고 피로한 과정이다. 이 존재자로서의 고통, 일상의 궤도를 맴도는 존재에게 새로운 감정, 생각, 새로운 세계관을 펼쳐보여 줄 수 있는 예술행위를 통해 내적인 정화를 갖고 상상력을 키우는 과정은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얼마든지 성취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위해 예술행위를 습관처럼 살아온 예술가로서의 세상보기를 가르쳐준다. 우리의 일상적 주변을 의미있는 세계로 만드는 법을, 그래서 일상이 얼마나 매혹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얼마나 경이롭고 위대함이 가득한 세상인지를 깨우치게 한다.
예술행위를 하기위한 세 가지 방법으로 그는 세상 만들기, 세상 탐구하기, 세상 읽기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세상 만들기란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즉 타자의 창조물과 만나는 과정에서 서로의 내적인 속성이 하나가 되어 여러 재료를 질서있고 조화롭게 조정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진실을 만들어가는 입구를 조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타자에게 적극적으로 뛰어듦으로서 타자(사물)에 담긴 의미를 찾는 세상 탐구하기가 진행되며 이는 낯 선 세계를 알게 되는 기회를 낳는다. 그리곤 지극히 평범한 삶의 한 부분에서조차 삶의 중요한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로 세상 읽기에 나서면 상징적 의미로 가득 찬 세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감춰진 예술적 능력이 발현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의 실천을 위한 예술의 내적 기술로 열망, 관찰, 비유, 문제의 재구성, 적극적 참여라는 다섯 가지의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지만 눈에 띠지 않는 기술이 설명되는데, 식물의 굴성(tropism)처럼 인간의 본능으로 존재하는 예술행위의 에너지원인‘열망’의 실천으로서 순수한 환희에 넘친 때 묻지 않은 감탄, “와!”하는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탄성이야말로 내면에서 무언가 일어났음을 의미 하고 무언가를 열고 무언가를 조절한 순수한 참여, 바로 예술 행위를 자극하는 충동이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반응이 시작된다는 통찰은 이후의 보석같은 체험적 지혜들처럼 마음에 직접적인 체득의 이해를 번쩍하는 깨우침으로 스며들게 한다.
“감탄이 감동하는 능력을 점화하고 열망이 예술행위를 끌어가는 엔진이라면 반응은 1단 기어쯤 된다.”

또한 예술가는 주의력을 기본으로 삼고, 관찰력을 섬세한 도구로 활용한다고 하면서, 행위를 하는 동안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중요한 것으로 눈여겨보는‘관찰’,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기까지 하는 예술행위로서의 기초적 태도를 꼼꼼히 알려주기도 한다. 우리를 옭아매는 기존의 게슈탈트(gestalt)를 과감하고 가차 없이 파괴하고 재정리해서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할 기회를 갖는 것, 즉 무언가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배움을 향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예술 행위는 미지의 것을 향해 가는 통로라는 점을 깨우치게 해주기도 한다.

상징으로서의 은유에서 비롯하여 현실의 무게와 요구에서 해방된 놀이의 세계가 지니는 적극성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우리들이 예술과 만나고 예술적 발견을 해 낼 수 있도록 조언을 아낌없이 베풀고 있는 이 저작은 실로 새로운 세상보기라는 커다란 선물을 안겨준다.
일상이 온통 예술의 세계로, 아름다운 상상의 공간으로, 그러면서 생활의 영위 수단들에까지 흥분을 감출 수 없는 관점의 혁명을 각성케 하여준다. 내 삶을 예술의 세계로 바꿔놓는 순간, 내 안에 잠재한 예술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순간 아마 세상은 매혹의 빛으로 가득해질지도 모르겠다. 진정 다양한 영감을 제공하는 창조적 길라잡이요, 인생 지침서이자,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 예술세계에 입문하거나 활동하는 이들에게 조차 탁월하고 진지한 선배의 숭엄한 가르침을 귀동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세상을 배우고 일상에서 예술을 이해하며 실천하는 명쾌한 지혜의 보고(寶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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