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을 길들이다 과학과 사회 10
베르나르 칼비노 지음, 이효숙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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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감각과 감정으로 느껴지는‘통증(痛症)’이란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하면 소위 고통(苦痛)이란 언어로 표현되는 것만큼 생각해 본적이 없다. 다만, 분명 통증을 느끼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신체상 사유가 없다는 진단의 경우 당혹스럽기도 하고, 의료진의 처방이나 치료에 불만족스러웠던 기억이 전부라 할 수 있다. ‘대체 내가 아프다는 데 왜 이상이 없다고 하는거야!’하고 말이다. 이 저술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다분히“주관적이고 복합적인 신경심리학 현상”인 통증(douleur)을 현대의학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료진의 관점에서부터 철학과 종교, 문학에서 바라보는 통증의 관념, 그리고 이의 치료와 처치방법에 대한 자세와 태도 등 사회 인식의 당위를 제시하고 있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차원에서 사람의 온전한 상태를 위협하는 전반적 현상”이라는 고통과는 달리, 통증이란 “세포조직의 실제적 또는 잠재적 상해(傷害)와 관련된 또는 그러한 통증의 표현들로 묘사된 불쾌한 감각적 감정적 경험”이라 정의된다. 결국 통증에 감정적 경험이 포함되는 것처럼 상처나 정신적 고통이 신체적 통증으로 전이되어 다가오는 느낌까지 있다보니 그 범주가 모호해지는 것도 사실이며, 이는 통증이란 환경, 심리적 상황에 따라서도 변화할 수 있는 인지적 감각이라는 말이 된다.

저술은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통증의 범주와 생리학적 양상 등을 말하는 의학적 검토에서부터, 인간의 삶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와 같은 인문학적 성찰, 그리고 통증의 치료에 대한 의학계의 관심과 발전적 이해의 과정을 통해 보편주의적 윤리로서의 지향점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통증에 대한 의료계 및 사회전반이 지향해야 할 전방위적 과제와 목표를 제시하기 위하여 필히 요구되는 윤리적 사상과, 사람 그리고 사람의 삶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 사회의 통합적 공감대의 확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를 앞에 둔 의사는 단순히 진단을 위한 척도로서만이 아니라 통증은 바로 환자의 어휘이며, 존중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환자는 통증 지속이 곧 병리학적 진행이라는 오해를 불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통증을 호소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소아나 노인, 다중장애인과 같은 의사소통이 힘든 환자들에 대한 진전된 통증의 측정 방법들이 의미하는 휴머니즘의 이해는 물론, 인간 삶에서 통증이 의미하는 그 진정의 유대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사회 및 국가의 통증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의 당위성을 납득케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통증의 의료적 이해를 위한 설명 중에서 심각한 정신지체에 운동장애가 결합된 다중장애인인 환자의 경우 통상적으로 알려진 코드에 따라 설명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통증을 간과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네들의 신체와 감성적 징후들을 포착하여 통증을 진단하고 처치하는 전문적 방법들의 소개는 의학이 지금까지의 단순한 생리학적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것임을 일깨우고 있으며, 임신 24주면 이미 태아의 경우에도 통증감각을 통합하는 수용체는 물론 통증 투사의 주요경로가 완성되고, 기억력까지 획득한다는 연구결과는 태아와 신생아에 대한 통증의 의료적 대처는 물론 생명윤리 차원에서도 중차대한 의료적, 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환자들의 통증 호소가 의학적인 객관적 징후들에 앞서야 함을 강조하는 일반의(醫)인‘마르탱 빙클레르’가 들려주는 일화는 감동적이다. 통증을 과다하게 표현하는 환자가 있어 과장되고 시끄러운 환자라고 치부하자 아버지가 그에게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너는 그렇게 말할 권리가 없어! 이 사람이 아프다고 말하면 너는 믿어야 해! 의사가 뭐라 해도 통증이 옳아! 네가 그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너는 직업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이 치료사로서의 행동원칙은 그가 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일생의 신념이 되었다는 것이다. 치료는 통증이‘진짜’라는 것에 대한 증거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과연 우리의 의료계 현실은 어떤지 모르겠다.

한편 이 저술의 아주 흥미로운 부분인데, “통증이란 자기 영혼의 위대함을 시험해보고 모두의 눈에 자기 의지의 우월성을 확인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정의한‘세네카’의 말을 시작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스토아적 의연함이나, 18세기 프랑스 외교관이자 정치가였던‘탈레망’의 가혹하고 잔인한 무마취 수술을 견뎌냈던 이야기는‘칸트’가 말했듯이“우리 삶에 대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통증 속에서이고 일종의 인생을 밝혀주는 자극 같은 것”이라는 얘기처럼 통증은 인간 삶의 실제일 것이라는 점에 공감케 된다. 더구나 “자기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또는 남의 고통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의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 문학이라고 하면서 들려주는 문학 속의 통증의 이야기들과 온갖 형태의 예술화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가 통증에서 시작된다는 미학적 도전에 관한 담론은 숭고함, 때론 신성화의 언어로, 드라마틱하고 관능적인 인내의 격앙(激昂)으로 인간 삶에 깊숙이 스며드는 통증 해석의 명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통증은 인간에게 있어 한낱 상해와 관련된 불쾌한 감각적 감정적 경험에 머무는 것이 아닐 것이다. 통증 치료는 그래서 통증 속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존재의 짐을 덜어주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유대를 증명하는 것이며, 저술의 말미에서 지적하듯이 치료에 대한 심리학과 학제간의 접근이나 인문학과 철학교육의 의학교육에의 적극적인 확충, 여전히 불충분한 기초 및 임상연구의 강화, 국가적 프로그램의 법적 도입 등을 통한 통증치료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확산은 진정한 휴머니즘의 실천이 될 것이다. 신경생리학, 생체의학, 철학, 종교학, 비교문학을 아우르는‘통증’이란 감각과 감정에 대한 이보다 압도적인 저술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의료인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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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환상 -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세계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수현.천경록 옮김 / 책갈피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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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다!” 이 급진적인 선언은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을 시작으로 세계의 경제를 위기로 전락시킨 미국 발(發) 금융 붕괴가 의미하는 세계경제에 대한 저자의 분석 결과이다. 그래서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최대 규모의 금융폭락으로 지구경제를 오랜 침체로 몰아넣은 이 사건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본질 자체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단순한 경기순환의 일부일 뿐이며, 일부 부패한 거대 금융기업 탓이기만 한 것인지를 추적한다. 또한 시대의 획을 긋는 사건으로 2008년 8월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짧은 전쟁이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위기와 세계체제의 전반적 재편의 서막(序幕)을 알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음을 지적하며, 미국주도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리더십 약화와 다극화하는 세계의 경제체제를 성찰하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사적 소유권과 계급의 관계성이나, 이윤의 원천이 되는 잉여가치율, 현대 경제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산임금노동자를 양산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존재조건 등에서 자본주의가 내재적으로 자체 붕괴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부하기조차 하지만, 이 저술이 바로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적 불안정성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시사하는 바를 결코 낡은 가치라 외면하기만은 힘들게 한다.

특히 이번 금융붕괴가 가져온 파장은 단지 금융부문뿐만 아니라 산업일반을 포함한 국가경제 전체의 혼란과 침체를 야기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자본주의의 구조나 경향과 얼마나 관계가 깊은지를 이해하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결국 회오리처럼 경제전반을 빨아들인 금융의 오늘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인데, ‘신용’의 대두와 이에 기반한 금융파생상품은 물론 개인의 신용카드까지 모든 금융주체를 금융의 그물망 속으로 엮어 넣은 오늘의 경제사회의 모습을 보면 굳이 부가설명이 필요치 않음을 이해할 것이다. 더구나 신용의 문제는 부풀려진 자본의 증식으로 인해 생산자들에게 잘못된 가격신호를 보내고 이는 불균형과 과잉축적의 경향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여기에 논의의 타당성과 검증 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해 저작의 많은 부분을 시장자유주의자들과 케인주의자 및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바탕으로 한 경제정책의 이견을 담아내어 실증적인 규명을 하여 이해를 제고시키고 있다.

예로써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외치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목표는 국가의 징세 및 지출 능력의 제한과 억제, 규제완화와 사유화 등의 작은 정부와 경제 불간섭과 같은 방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시장이 붕괴하자 세계의 여타 국가들에 규제완화와 공기업화, 재정지출의 삭감을 압박하고 강요하던 신자유주의 선봉장인 미국과 영국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  정작 자신들이 궁지에 빠지자 미국은 프레디맥, 페니메이, AIG등 금융기업을 인수하여 국유화하였으며, 영국은 스코틀랜드왕립은행과 로이드뱅킹의 최대주주가 됨으로써 재국유화하는 등 저네들이 먼저 신자유주의의 실천을 배척하였다. 결국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서 비로소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의미로, 이는 시장의 자동조종기능을 외쳐대던 자유주의자들의 소리가 얼마나 허망한 위선인지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자본주의체제에서 노동생산성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생산성의 성과를 자본이 가져가는‘노동착취’와 ‘자본의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서만 이윤율을 높일 수 있음은 대개의 사람들이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윤율 증대 방법이 세계경제 순환의 강력한 축이 되어 작동하고 있음을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극단의 경제를 통해 목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 온다. 일종의 ‘국가자본주의’를 구사하는 중국의 경우 막대한 자본축적은 물론 국민총생산규모에서 일본을 제치고 미국 다음인 세계2위에 올라섰다. 국내소비는 GDP의 절반도 안 되고 빈민이 8억 명에 이르는 후진국인 중국이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자본축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 노동자들의 낮은 소비, 즉 노동 착취기반에 서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반면 미국이란 나라가 부채경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젠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다. 동아시아국가들이 착취경제로 쌓아 축적한 자본은 미국의 싸구려 자산과 국채를 사도록 종용되고 또한 달러가치의 하락을 방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채무를 줄이고 유입된 자본을 마구 써대는 파렴치한 구조이다. 결국 이러한 상시적인 불안정과 불균형의 동반관계와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적 속성은 지속 가능한 체제가 되기에는 본질적인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금융붕괴로 인한 은행 및 기업의 구제금융은 현대 자본주의가 직면한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망하는 기업은 파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국가가 나서서 재정을 투입하여 회생시키는 것이 바른 것인가? 아마 이번과 같은 글로벌화 되어있는 거대금융기업들의 연쇄 적 도산을 그냥 방치했다면 자본가치의 한없는 추락으로 오랜 기간의 심각한 불황을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대대적인 재정투자로 자본가치의 폭락을 막는 조치는 과잉축적으로 인한 수익성의 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위기가 장기화된다는 문제를 갖는다. 이러나 저러나 딜레마를 해소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자본주의가 수십 년간 해결하지 못하고 낑낑대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낸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처럼 2008년 금융붕괴가 표상한 세계경제의 혼란은 자본주의가 지닌 구조적 불안정성과 한계라고 지적하면서 자본이 가졌던 권력이 국가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하며, 현재는 자유시장과 상품화 증대에 따른 고통이 너무 커져 반작용으로 규제강화와 탈상품화 움직임이 출현하는, 아직은 이름이 없는 그 무엇인‘착근된 자유주의’라 명명하면서 시장경제가 헤게모니를 누리던 시대는 끝나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딱히 시장경제를 대신할 만한 믿을만한 대안 체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자본주의의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로서 국유화, 소유관계의 완전 폐지, 자본주의 분업의 전면 타파, 협동적 생산형태와 같은 아주 급진적인 체제의 혁신을 내놓는데, 다분히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이상과 결부되어 논의의 실효성에 의문을 낳게 한다. 다만, 경쟁논리가 지배하는 시장경제의 대체안으로서 ‘앨버트’의‘파레콘(참여경제)모델’이나, ‘팻 드바인’의‘협상에 의한 조정’모델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한 자원배분의 민주적 발상 등은 미래 인류사회를 위한 중요한 참조가 되기도 한다.

수출주도형 경제가 초래하는‘바닥을 향한 경주’를 막기 위해 수요를 키우려면 소득분배의 형평성 실현 노력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며, 따라서 최저임금, 노동조합, 기타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는 중차대한 요소가 될 것이다. 또한 외국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으로 막대한 고통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강력한 자본통제 시스템의 구축 또한 시급한 것이다. 각국의 자본주의는 더 이상 획일적이지 않다. 네거티브한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국가자본주의’에서부터 남미 국가들의‘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 그리고 여러 변형된 자본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국제수준의 자유주의와 국가개입 강화가 결합된 오늘의 착근된 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미 종주국들도 지키지 않는 신자유주의를 고집하는 우리의 경제체제는 숙고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폐해와 불평등과 불안정에서 인류 사회를 해방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탁월한 담론인 이 저작은 세계체제의 폭넓은 분석의 틀을 제공하여 자기반성과 미래에 대한 귀중한 숙고의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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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 보았지만 읽지는 못한 명화의 재발견
전준엽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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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나 사조의 순에 의하지 않고 감상의 느낌이나 이야기와 주제로 구분하여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작가는 서로 다른 감상의 장(Chapter)에서 발견되어 특정 작가의 또 다른 작품세계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대략 60인 남짓한 동서양 화가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미술작품에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대중에게는 비교적 낯선 조르주 라투르, 자크 루이 다비드, 빌렘 헤다, 마리 로랑생,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 등 화가들의 명화(名畵)세계를 접함으로써 회화 감상의 폭을 확장시켜주는 배려를 느끼게 된다.

물론, 바로크, 인상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등 각각의 미술 사조(思潮)를 대표하는 로렌초 베르니니, 얀베르메르, 외젠 들라크루아, 빈센트 반고흐, 폴 고갱,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리다 칼로, 클로드 모네, 폴 세잔, 조르주 쇠라, 구스타프 클림트, 에드바르 뭉크, 바실리 칸딘스키 등 화가들과 명작들에 대한 저자의 특별한 감상 포인트와 뒷이야기들이 회화의 감상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다만“미술 지식 없어도 쉽게 읽는”명화의 재발견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감상 포인트까지 일일이 표기하고 있어 작가의 해설이 혹여 독자의 감상을 획일화 할 수 있겠다는 우려도 살짝 들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항상 난감함을 느끼게 하는 화파(畵波)와 시대의 관계성에 대한 무지로 인해 감상의 깊이를 방해 당했던 기억을 하면 해당 작품에 깃든 시대상이나 신화와 전설, 작가의 작업 환경, 사생활, 일군의 화가들의 시대변혁에 대한 저항과 같은 배경 지식은 감상자의 위치에서 고마운 지식이 아닐 수 없다. 성(聖)스러움과 관능의 그 교묘한 경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로렌초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법열>이라는 작품에서는 감상이상의 도움을 받고, 정신과 물질, 보수와 혁신의 대비를 비로소 보게 해준‘얀베르메르’의 <저울질 하는 여인>은 그 작품의 해독뿐 아니라 35점에 불과한 희귀성으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는 의외의 세속적 정보까지도 얻게 된다.

특히 회화의 주류세계에서 벗어나 있던 영국회화를 서구미술의 중심으로 이끈‘폴 내시’를 비롯한 몇 몇 화가들, 여성에 유난히 인색한 미술계에 여성적 감수성 그 자체로 훌륭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현한‘마리 로랑생’의 <코코 샤넬 초상>이란 작품에 얽힌 이야기와 유명한 시(詩) <미라보 다리>의 시인‘기욤 아폴리네르’와의 사랑에 관한 일화는 문학적 감수성까지 자극할 정도이다.

이에 더해 정물화가 독립적인 회화장르로 발달하게 된 대표적 화가인 17세기 네덜란드의‘빌렘 헤다’의 ‘바니스타 정물화’의 미술사적 지식이나, 당대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소설가‘조르주 상드’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던‘들라크루아’나,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 유명한 에로티즘의 극치를 표현한 <다나에>의 실제인물인“오스트리아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불렸던‘알마 말러베르펠’의 일화는 회화 감상을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세계로 안내하기도 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와 ‘베첼리오 타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비교함으로써 "알몸(Naked)과 누드(Nude)", 즉 매춘부의 알몸과 비너스의 누드라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형이상학적 구분을 해대는 상투적인 인간의 허위의식을 슬쩍 비꼬아대기도 하고, 사랑, 불안, 장엄, 순수, 기쁨, 슬픔, 경건, 사색 같은 정서와 같이 구체적 형상이 없는 것들의 표현으로서 추상(抽象)이 지니는 의미, 나아가 ‘라울 뒤피’나 ‘바실리 칸딘스키’, ‘로베르 들로네’ 등 회화와 음악의 교류, ‘교향곡 같은 예술적 감흥’의 표현에 이르는 작가들과 작품의 설명에서 회화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물론 그 친근성을 견인하여 구별짓기로서의 문화의 벽을 허무는 성실한 저자의 노력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저작의 마지막 장에는 우리 전통회화의 장을 따로이 수록함으로써, “일본이 우리 문화와 정신 말살”의 일환으로 우리의 회화를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는 억지를 주입키 위해‘동양화’라고 그 주체성을 상실시킨 용어는 더 이상 지양되어야 할 것이라는 요구는 채색화, 수묵화와 같은 우리고유의 회화특성으로 전환하여 부르는 중요한 각성이 된다. “가장 위대한 예술은 가장 쉬워야 한다.”는 신념을 지켜내면서 이처럼 풍성한 미술의 지식을 품어낸 저술도 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중 독자들을 향한 작자의 애정과 진실이 느껴지는 훌륭한 미술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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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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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단위 주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생명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발생시킨다.   종(種)이나 집단선택, 개체선택, 유전자선택과 같이 진화가 발생하는 실체로 학설이 나뉘고 있으나. 이 저작은‘유전자 선택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동원되는 선구적 실험이나 연구조사 사례와 논증은 그야말로 풍부하고 탁월한 지적 향연이라 할 수 있다. 특히,‘이기적’이라는 도덕적 냄새가 나는 유전자의 성향이 대중을 매혹하지만 단지 결과의 인식을 수월하게 이해토록 하기 위한 도킨스식 표현 방법에 불과하다는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된 것은 나로서는 성과라 할 수 있겠다.

생물은“‘종(種)의 이익을 위하여’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다윈의 사상에 대해 여기서 말하는 종이란 단지 번식에 대한 완곡한 표현일 뿐이지 진화의 주체를 종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시작하여, 진화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라는 신념을 강조한다.
그리고 개체나 집단선택설들이 주장하는 자연의 사례에 대해 유전자선택으로 해석 가능함을 입증함으로써 진화의 주체는 자기복제자인 유전자나 유전자세트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 과정에는 무척이나 진기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어 진화의 단위로서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이해를 떠나 모든 존재의 이유를 성찰할 수 있는 지적감동의 시간으로 충만한 느낌을 갖게 된다.

유전자는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통해 영속하고자 하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며, 자연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유전자를 선택할 뿐이다. 진화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지 여기에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방향이 개입될 여지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복제 능력을 지닌 유전자가 굳이 몸이라는 개체 속에 들어 앉아 번거롭게 생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하는 의문을 낳는다. 즉 자기복제자가 모든 것을 행하는 운반자를 구태여 만들어 내어 생식과 생장이란 과정을 겪게 하는 이유의 실익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감수분열을 통해 서로 다른 개체가 한 개체에 모이게 함으로써 이로운 돌연변이를 지니게 될 수도 있으며,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함으로써 정확성과 복잡성을 공고하게 하며, 유전자수를 극대화하는데 결정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기적 유전자는 생존기계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앉아 생존기계의 행동에 영향을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자기 유전자의 번영을 증진시킨다. 사실 이 말은 당혹스럽고 획기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신체가 단지 유전자의 자기 생존과 번영이라는 이기적 행위를 수행하기 위한 운반기계, 즉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하나의 개체로서의 주체성이 부정되고 하위단위인 유전자의 생존기계라는 것이니 그 발칙함은 선뜻 수용하기가 버거운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개체나 집단이 자기복제능력을 지니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되면 사실 자기복제 역할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생명체가 자기복제를 하는 실체의 생존율 차이에 의해 진화한다는 것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의 학설은 개체선택설과 팽팽한 대립)

한편 시선을 잡아당기는 특징적인 이론 중에‘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etgy, ESS)'라는 매파와 비둘기파의 장기적 생존 이익에 기반한 협력과 배신의 시나리오를 통한 자연 선택의 특성은 배신자에 대한 보복자와 같은 조건부 전략자의 승리처럼 자연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고도 의미있는 시사를 한다. 특히 게임이론의 중추인 죄수의 딜레마가 무한 반복될 경우‘호혜적 이타주의’로 안정 상태에 도달하는 실험은 자연선택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중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여기서 어떤 한 전략이 계속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전략이 다수일 때 즉 자기 자신의 사본이 많은 환경에서 특히 유리하며, 계속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ESS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 저술은 저자의 우려처럼 도덕성을 논하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지만, 다른 유전자들과 잘 어울리고 상호보완적이어야 생존 가능성이 높다는 것으로 ‘마음씨 좋음’과 ‘관대’함이 승리한다는 자연의 속성은 인간세계에 의도하지 않은 미덕을 알려준다.

이 저작이 제기하는 또 하나의 탁월한 이론으로 모방의 단위이자 문화 전달의 단위로서‘밈(Meme)’이라는 일종의 문화유전자를 들 수 있다. “현대인의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자만이 진화의 기초라는 입장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의복과 음식의 유행, 의식과 관습, 예술과 건축, 기술과 공학 등 문화가 뇌에서 뇌로 퍼져 가면서 그 수가 늘어나며 진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동물의 행동은 어쨌든 유전자의 제어 하에 있지만, 세상을 시뮬레이션하고 자기인식까지 갖게 된 뇌를 지니게 된 인간은 유전자의 독재에 반항하는 힘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완벽하게 실행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유전자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실행의 결정권을 생존기계가 갖게 되는 날 아마 새로운 진화의 단계로 나아갈 것이라는 도킨스의 예견은 유일한 자기복제자인 유전자(DNA)의 독점권을 밈(Meme)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새로운 진화를 시작하게 될 것이라는 데 공감케 된다.

이 밖에 저자의 동명의 저작인‘확장된 표현형’이라는 유전자의 생존기계 내,외부를 막론하고 해당 동물의 행동을 담당하여 유전자 자신의 생존을 극대화하는 경향에 대한 이론은 매혹적이다 못해 감탄스럽기조차 하다. 이외에도 숙주와 기생체의 협력이 궁극에는 완전히 동화하여 하나의 동일체로 진화할 수 있다는 가설은 생물의 급작스럽게 변형된 형태와 행동을 설명하는데 스티븐 제이굴드의 단속평형설 못지않은 발상을 주기도 하며, 생존기계 안에서 자기사본을 알아보는 유전자의 그럴싸한 방법이나, 대투자 정직 전략과 소투자 착취전략의 두 갈래로 진화한 성 전략이‘종의 이익’에 미치는 검토는 앎에 대한 갈증을 산뜻함을 넘는 청량감을 느낄 정도로 풀어준다.

진화는 돌연변이를 필요로 하는 유전적 변화이다. 여러 생물 개체 속에 들어앉아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력의 모습들을 도킨스의 설명으로 보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사물이 어떻게 진화되었는지,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한 진술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최적자의 차등적 생존인 자연선택과 유전자, 그리고 생존기계, 협력의 진화에 이르는 이‘유전자선택설’을 주장하는 진화론의 저술은 그 이론적 주장을 초월하는 생명과학에 대한 성찬이자 신(新)다윈주의의 위대한 저술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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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라, 세계를 향한 영혼의 승부
김한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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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많은 한국인들은 해외에서 벌어지는 유명 자동차경주대회를 접할 때마다 저 많은 차량 중에‘메이드인코리아(Made in Korea)'는 왜 없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꼈을 법 하다. 효율성이라는 대량생산의 가치에 집중하는 체제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가치와 상상력이 결합한 이러한 차량을 만들어 낸다는 의식이 자리 잡을 틈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영혼을 투여하는 예술적이라 할 수 있는 창조의 정신,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는 장인(匠人)정신이 어느 샌가 대량생산이라는 경제적 논리에 밀려났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저작의 표지와 삽화를 장식하는 날렵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스포츠카를 대하면서 우리에게도 포르쉐와 람보르기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슈퍼카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러한 노력이 대접받기에 턱없이 황폐한 환경에서 무모하기까지 할 수 있는 도전을 한 사람이 누군가하는 호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해야 할까? “대한민국 최초의 수제 스포츠카”가 우리의 시선에 놓이기까지의 사연들과 그 제작과정, 한 젊은이의 꿈이 중년이 되어 비로소 실현되기까지의 여정이 소개되고 있다.

이태리 피렌체 국립미술대학을 거쳐 FIAT社가 있는 수제자동차의 본고장인 토리노 SDAD(디자인대학원)에서의 자동차디자인을 전공하면서 꿈의 실현을 한 단계씩 밟아나가는 청년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일종의 디자인 능력을 갖춘 자동차 공방(工房)이랄 수 있는‘카로체리아(Carrozzeria)', 즉 대량생산시스템을 구축하지 않고 솜씨 좋은 디자이너와 장인들이 어울려 수공업 방식으로 차를 만드는 그의 의지는 실현된다.

귀국 후 국내 자동차회사들의 디자인실에서의 경험, 그리고 마침내 아내와 프로토디자인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직원들의 헌신적인 참여로 이상을 향해 매진하지만, 세상은 항상 장애를 마련해 순탄한 길을 열어주지 않는가 보다. 고난과 역경, 위기를 기회의 국면으로 이해하고, 극한의 낭떠러지에서 조차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의 손길은 기적처럼 다가온다.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는‘해낼 수 있다’는 자기암시의 긍정적 최면은 분명 이처럼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이 진실임을 목격하게 한다.

2007년“시속 100킬로미터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제로백)이 3.8초, 최고속력 330킬로미터”의 슈퍼카인‘스피라 레이싱카’ 버전이 당당히 GTM(Grand Touring Masters)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 그 감격과 감동은 근 30년을 지속해 온 장인에게는 형언 할 수 없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자동차디자인 프로세스, 디자인과 설계기술자, 제작기술자의 조화와 협력, 자동차산업의 환경, 개인의 신념과 인간에 대한 신뢰와 감사의 곡진한 이야기들이 수제자동차의 제작이라는 꿈의 도전에서뿐 아니라 삶의 진정함까지 아우르면서 감동을 선사한다.

혼신을 다해 이루고자 하였던 그 과실이 마침내 열리고, 이젠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한 토대에서 정말 세계의 명차들을 향해 우리도 장인정신이 이렇게 꽃을 피우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저자 ‘김한철’의 긍지이기도 하겠지만,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도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외면당했던 그의 분투가 더 많은 투자자들의 관심과 지원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21세기, 대량생산의 시대는 저물고 인간의 감성과 영혼을 담겨있는 장인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지 않은가. 소량이지만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장인산업은 우리의 이상도 실현하고 충만한 미래의 삶을 일궈내는 새로운 가치일 것이다. 정말‘스피라’가 무럭무럭 자라나길 응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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