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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닷되
한승원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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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시절을 되돌아보니, 아물아물 안개 속의 음화 한 폭이네. ~ 그 슬프면서도 설레던 시의 편린들을.” - 본문 P10 中에서

뉘엿뉘엿 황혼이 검붉게 물드는 인생의 시간은, 작가가 노래하듯 성장의 진통을 겪던 어린 시절의 그 아릿하고 시린 기억들이 아름답고, 슬프고, 또한 설렘이 교차하는 안타까움인가보다.‘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파우스트’를 자신에게 비유하였듯이 젊은 날의 기억인 이 소설을 위해 작가는 자신의 악마인“시꺼먼 놈”에게 영혼을 저당 잡혀야 했을 만큼 그 꽃 같은 시절로의 회귀는 간절함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었던 것 같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에세이처럼 펼쳐지던『해산 가는 길』이라는 작품의 연작으로서 『보리 닷 되』는 인생길의 선택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성년 이행기의 자전적(自傳的)소설이다. 작가의 문단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신춘문예 당선작인, 단편소설「목선」이 탄생하기까지의 젊은 날의 치기와 오기에서부터 실패와 성공에의 갈등, 그리고 영원히 계속 될 것 만 같던 좌절의 운명을 교정하는 집념의 시간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흐른다. 가부장제의 전통, 병영국가의 획일적 군사문화, 겉보리 닷 되로 상징되는 가난한 삶의 끈적거림에 대항하고, 애틋한 사랑과 세속적 성공이 소설가 시인이 되고자하는 청년의 삶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친다.

빗나가기만 하는 형의 그릇됨을 방기하여 장자세습의 전통에 저항하는 둘째의 심리가 비밀스럽게 고백되고,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학교 악대원이 되어 엄격한 획일성을 강요하는 교련시간을 피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본성을 엿보게 된다.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거예요.”라는 소박한 꿈은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과는 괴리된 실패의 삶으로 이해되던 시절에 아버지로부터도, 연인에게서도, 형제로부터도 외면되는 것이었으니, 집안의 일손을 돕기 위해 쟁기질하고 김을 뜯어야 하는 문학청년의 번민은 자신의 현실이 과연‘성공을 준비하는 것인지, 실패를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시름을 깊어만 가게만 한다.

한편 소설에서 주인공‘승원’은 오금의 고질적 피부질환으로 수시로 긁어대는데, 바로 이“오금의 환부”는 긁어대어 진물이 나고, 딱지가 앉아 걸음에 불편을 주는 고통이지만, 마구 긁어대면 가려움과 아픔을 한 순간에 덮어버리는 환장할 것 같은 쾌감이기도 하듯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역설이자 인생의“모순된 슬픈 거래”로서, 스스로 극복해야 할 장애로서 따라다닌다. 그래서 이 오금의 가려움증이 낫게 될 때, 비로소 성장의 통증은 치유된다.

“소설가의 말로는 좋지 않다”는 아버지의 반대에 저항하여 가출하고는 머슴살이의 반복되는 노동에서 언덕위로 돌을 나르는 시시포스의 영원한 형벌을 생각하지만, 바로 이 영원할 것만 같은 동어반복의 고통에서 탈출시키는 것은 자신일 뿐이라는 깨달음, 그리고“오직 혼자만의 지혜와 판단과 힘으로 이를 갈면서 올바른 물길을 찾아 배를 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바닷가 거룻배 위의 교훈처럼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이 삶임을 어느 순간 우린 터득한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원고지 팔십팔 매의 단편소설「목선」이 게재된 신문을 아버지 영정 밑에 걸면서, “아버지 제 고집이 이겼습니다.”라는 주인공의 울음석인 자부심의 목소리가 짠하게 울려온다. “실패를 준비하는 삶을 기록하는 것”이 진짜 소설 아닌가? 하는 주인공의 외침처럼, 우린 누구나 다 이렇듯 자기만의 부대낌과 통증을 앓으면서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이제 고향 장흥으로 돌아가 해산 토굴마당에서 소설가로서 그의 문학적 뿌리가 된 꽃 같은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는 이 소설에서 진정“파릇파릇 새싹들”이 움트는 것을 확인케 된다. “시쓰기와 소설쓰기에 확실히 미쳐버린다는 조건”으로 영혼을 맡기겠다는 계약을 한 작가처럼 내게 다시 세월을 돌려준다면 난 무엇을 약속 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품에 안겼을 때 맡아지던 유향, “곡신(谷神)의 향기”라 했던가? 아름답게만 기억되는 그 철없던 어린 시절이 문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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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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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이란 이 자전소설은 조지오웰이라는 필명으로 본격적 작가의 인생을 시작한 1933년 발간된 그의 최초 작품이다. 오늘의 경제적 사회적 현상과는 사실 많은 괴리가 있지만 “가난 그 자체”를 쓰려했다는 작가의 선언처럼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 본질과 이를 만들어내는 사회, 사회의 왜곡되고 편협한 시선을 교정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탐지할 수 있다.

소설로 분류되고 있지만, 파리 빈민가의 하층민들과 섞여 그들의 힘겨운 일상과 호텔 접시닦이 등을 통한 생존을 위한 분투와 런던 구빈원을 들락거리며 걸인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본성을 통찰하는 일종의 밑바닥 삶에 대한 체험기이자 사회고발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여인숙 숙박비와 빵 값을 조달하기 위해서 일자리 찾아 헤매지만 청소부, 접시닦이와 같은 허드레 일도 주어지지 않는 일상이 지속되고, 급기야 굶주림과 하늘을 가린 냄새나고 불결하며 조잡한 안식처인 여인숙마저도 유지하기 힘든 날이 계속 된다.

“사람이 처음으로 가난에 부닥치게 되면 아주 묘해진다. ~ 무시무시하리라 생각했지만 그저 궁상맞고 진절머리가 날 따름이다. 처음에 발견하는 것이 특유의 구차스러움이다. 편법과 비굴한 쩨쩨함...”

그리곤 가난이 지닌 장점으로 가난은 미래를 말살해버리고, 마침내 밑바닥까지 왔다는 안도감이 주는 쾌감을 말하는데 이르면, 가난이 사람을 정상적으로 온건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을 왜 포기하게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욕설이 난무하고 허리를 펼 수조차 없이 낮은 지하의 지저분한 호텔 주방에서의 접시닦이로 하루 17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리면 잠이“휴식이라기보다는 관능적인 무엇, 즉 탐닉과 같은 것”이라는 잠의 진가를 말하는 화자(話者)의 고통이 그대로 전달된다. 현대의 노동자란 사실 노예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임금에서 일전 한 푼 저축하기 불가능하고 겨우 연명할 정도이며 죽도록 아니 악착같이 일하지 않으면 그나마 기다리는 것이 헐벗은 굶주림 박에 없을 때 선택이란 자유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유일한 휴가는 해고당했을 뿐이라는 자조(自嘲)섞인 유머는 육체적 노동을 숭배하고 신성하다고 부추기는 맹목적 설교의 허위를 강타한다.

런던으로 건너와 전당포에 잡혀먹을 옷가지조차 없게 되자 부랑자 구호소를 전전하게 되는데, 부랑자가 재활 할 수 없도록 조장하는 당시의 구빈시스템을 고발하고, 나아가 물질주의에 침몰된 상실되어가는 인간 존엄성과 자선, 구빈을 말하는 사회주체의 위선, 가진 자들의 폭력적인 격리체계임을 지적하고 있다. 단지 적절한 생계비를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경멸 받는 부랑자들, 결국 능력이니, 효율성이니 하며 돈이 미덕을 가늠하는 위대한 척도가 되어 이 기준에 맞지 않기에 멸시당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란 것이며, 만일 구걸로 돈을 많이 벌어들인다면 존경 받는 직업이 될 것이라고 자본주의 물질 지상의 이념에 조소를 보내기도 한다. 예배를 조건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교회의 위선적인 자선이 그네들에게 얼마나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지, 생활방식의 결과를 원인으로 호도하여 편협한 잣대를 들이대는 무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은 타고난 악덕이 아니라 바로 영양실조였다.”라는 사회 편견에 대한 냉소적 시정의 이 한마디는 이 작품의 전체를 설명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비록 한 세기라는 격세지감이 있지만 소외받는 하층민과 빈곤에 대한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케 하여 사회 공동의 일원으로서 우리들의 자세와 태도 교정에 소박한 일조를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930년대의 영국과 프랑스 사회 서민들의 일상을 보는 사료적 재미뿐만 아니라, 오웰의 이후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경험과 시선을 만끽 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엿보는 기회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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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소설집에는 예나 지금이나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실상을 우화적으로 비판한, 오웰의 작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준 <동물농장>이 수록되어 있는데, 봉사의 즐거움과 노동의 존엄성에 대한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기만을 하는 지배자의 탐욕이나, 당시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권력투쟁과 사회주의의 폭력과 위선, 그리고 실패에 대한 엄중한 비판을 읽을 수 있다. 볼쉐비키의 멘쉐비키에 대한 잔혹한 처단이나 인간 해방을 부르짖는 이면의 암울한 실상이‘수퇘지 나폴레옹’이란 독재자를 통해 비유적으로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다. “누가 돼지인지 누가 사람인지 구별하기란 이미 불가능 했다.”고 맺는 이 소설은 인간이란 자기 자신 이외에는 다른 어떤 동물의 이익을 위해서도 봉사하지 않는다는 개인 이기주의 본성에 대한 신랄한 반성의 토대를 제공하기도 한다.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는 고전은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그 재미를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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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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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의의 영어표현인 'Justice' 의 사전적 의미는 공평성, 공정성으로 해석되고, 우리말 사전은“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올바른 도리’나, ‘공정한 도리’, ‘공평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대체 공정하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에 이르면 그만 모호해지고, 수많은 견해들이 갈등한다.

이 저작에는 우리들이 좀처럼 결정을 할 수 없는 질문들이 예시되고 있다. 남대서양 한가운데 구명보트에 표류하는 4인이 있다. 그러나 병약한 17살 소년을 죽여서 먹으면 나머지 세 사람이 살 수 있다. 그래서 살해하여 식용하면서 연명했고 드디어 구조되어 생환했다. 과연 이 행위는 정의로운가? 우린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여기서‘제레미 벤담’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功利主義)이론을 통해 한 명의 고통을 통해 세 명의 행복이 달성 되었으니 정당하다고 주장해보자. 정말 그럴까? 그러나 생존자와 생존자 가족의 기쁨을 고려한다 해도 이러한 죽음을 허용할 경우 사회전체의 행복이 증가할까 하는 질문에 이르면 공리주의적 판단을 하더라도 결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지는 못하다. 나아가서 도덕 문제를 모조리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하려는 공리주의가 빠뜨리고 있는 것이 분명 있지 않을까?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의지에 반하는 죽음 즉, 개인의 권리를 소홀히 취급하는 자유의 권리와 충돌하고 있지 않은가? 좀체 정의를 획일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가능치 않을 것 같다.

저자는 정의를 공리주의자들의 행복을 비롯해서 자유와 미덕이라는 세 가지 이상(理想)을 통해 고민하고 있다. 한 가지 문제에 공리주의적 관점, 자유지상주의자의 관점, 칸트의‘순수실천이성’과 정언명령에 의해서, 그리고 존 롤스의 ‘무지의 장막’이라는 원초적 평등에 기초한 차등원칙,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telos:목적,본질)와 영광이라는 삶의 목적론적 사고에 의한 도덕적 미덕으로서의 판단이 어떻게 개인과 인간사회의 정의에 관여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일례로서 우리의 헌법은 적정 연령에 이른 남성을 징집대상으로 하고 군에 입대하여 국방의 의무를 부담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만일‘대리복무’제도를 헌법에 도입하여, 즉 적정의 댓가를 지불하고 누군가를 대신하여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는 정당한가? 아니면 부당한가? 부당하다면 왜 부당하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대리복무가 아니라 납세자들이 세금을 조금 더 부담하여 아예‘자원병제’를 도입하여 희망자가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하여 복무케 하는 것은 어떨까? 이는 대리복무보다 더 도덕적인가? 자유주의자들은 징병제는 심각하게 개인의 자유, 즉 선택을 제한하는 노예제라 비판할 것이고, 공리주의자는 서로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거래를 금지하여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킨다고 비판할 것이다. 이들 자유주의자와 공리주의자의 비판은 옳은 이야기일까? 만약 오류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자원병제나 대리복무제는 애초에 공정성의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청년실업이 상습화되어 가난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 아닌가. 결국 강제의 형태만 다를 뿐 사실상 자원군은 경제적 어려움이 강제하고 있는 것으로 이미 기회의 균등이 적절하지 못하며, 자유로운 의사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군 복무를 상품 취급해 모든 시민은 나라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미덕과 공동선을 파괴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의무를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급기야 댓가를 받고 임신을 하는 일과 같이 임신을 서비스로, 아이를 생산물로 취급하여 거래하는 계약도 있다. 세상에는 시장이 존중하지 않는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있을까 할 정도로 인간을 상품화하고 거래의 대상으로 하기에 이르고 있다. 이는 정의로운 행위인가? 아기나 임신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에서 과연 가치는 어떻게 평가하는 것인가? 존중 받아야 할 인간이 사용가치로 인식되는 것과 같이 일반적 생산을 지배하는 준거로 대체 할 수 있는 것일까?

칸트는 이와 같이 우연히 생기는 욕구에서 도덕을 끌어내는 것은 도덕을 생각하는 방식부터 그르친다고 이들 자유지상주의와 공리주의를 비판한다. “쾌락(편리함, 위험의 면제 등등)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처럼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도덕적 일 수 없다는 것으로 인간은 그 자체의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 존중이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에 내 몰리지 않고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통치하게 할 때 우리는 자율적 존재이며 선택 할 능력이 비로소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순수실천이성이 참여 할 때 도덕법을 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적절한 기회균등이나 공정한 상태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존 롤스’의 누구도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는 원초적 평등한 상황을 말하는 평등주의, 즉 롤스가 주장하는 차등원칙은 자율과 호혜에 대한 도덕적 평가에 있어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출생이라는 우연을 기준으로 소득, 재산, 기회, 권력과 같은 도덕적 임의성은 불공평을 조장하고, 더구나 혜택 받은 가정환경의 산물로서 우연의 영향을 받는다면 노력의 미덕도 인정치 않는다. 이러한 도덕적 임의성을 배제하고 엄격한 평등을 추구하여, 사회의 기본 구조를 조정해 우연한 차이가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쓰이도록 하는 차등원칙의 주장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설명하는 고귀한 도덕적 배경이 되어준다.

한편‘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에 입각한 텔로스와 영광을 통한 정의를 통하여 시민의 도덕적 미덕을 강조하고, 인간존재를 서사의 개념으로 파악한‘매킨타이어’를 통해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라며, 우리에게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그리고 사회계약의 결과로도 돌릴 수 없는 도덕적 의무를 설명한다.

이것은 역사적 부당행위에 대해 집단적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개인은 단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만 책임지면 그만이라고 한다면, 즉 자신이 출생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을 사과할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해외에서 추한 한국인을 보았을 경우 우린 수치심을 느끼고,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월드컵에서 승리하면 우린 자부심을 느끼는데, 이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도덕 감정으로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한데 묶여 있으며, 우리를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는 서사에 연관된 사람들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즉 이러한‘연대의식’은 자연적 의무나 합의를 필요로 하는 자발적 의무를 넘어서는 의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대나 가족에 대한 충성(직)이 도덕과 충돌할 때가 있다. 내 형제가 악질의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 정당한가, 아니면 그의 도피를 돕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질문처럼 공동선과 개인의 연대의식은 어느 것이 정의라고 결정하기가 버거운 상황이 있다.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비난하여야 하는가? 과연 우린 연대의식 없이 삶을 살아 갈 수 있는가?  연대는 우리에게 도덕적 부담을 안겨주기도 하며, 또한 도덕적 힘이 필요하기도 하다. 도덕보다 가족의 연대가 더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린 놀라기도 하지만 정의를‘공적 이성’에만 호소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 할 수 있다.

이처럼 도덕적 판단이나 정의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하는 요소는 실로 다양하다. 특정 이데올로기나 관념에 입각하여 판이한 정의를 주장할 수 있다. 자유와 행복, 공동체로부터 영광과 인정을 받을 가치와 같은 미덕을 생각하기도 해야 하며, 목적, 즉 텔로스를 묻기도 해봐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행복을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 만들 수도 없으며,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서로의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논의하는 문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생각의 다양성들 중에서, 오늘의 현대사회에서 판단의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공리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 존 롤스의 차등원칙, 칸트의 순수실천이성, 자유(지상)주의이념을 중심으로 적절한 사례를 통한 비판과 반박의 이론으로 정의의 이상에 한 발 가까이 가게 해주는 이 저작은 도덕철학, 도덕정치학의 진수이다. 특히 우리를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일상의 문제들에서 보다 정의롭고 좋은 삶에 대한 미덕의 실현에 기여하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도덕 교과서라 할 수도 있다. 풍부하고 정교한 지식과 재치 넘치는 서술로 도덕철학을 이렇게 흥미롭게 읽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가히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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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1 - 인사편
조용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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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게‘동양학’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으나, 강호를 두루 두루 돌아다니면서 저자의 뻥도 좀 세진 것 같다. 그 1권인 인사(人事)편으로 시시콜콜한 인간만사를 통해 삶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대략 100여개의 단상을 풀어내고 있으니 예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심오한 학문적 성취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독만권서(讀萬卷書)하고 행만리로(行萬理路)한 내공으로 버텨내는 입담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바람을 먹고 이슬을 덮고 자는“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과정을 거쳐야만 강호학(江湖學)을 할 수 있다.”라면서 인생의 시름과 깊이를 알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구라도 칠 수 있다는 것은 일견 설득력있어 보인다. 게다가‘강호의 4대 학파’까지 운운하면서 대개들 알법한 인물들로 구성된‘다석, 간송, 장일순, 야산학파’를 들먹이면 이건 그럴듯함을 넘어 지고한 경지로부터 솟아난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사마천’은 세계의 구라꾼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중국 천지를 여행함으로써 인생을 알고 속세를 초월하는 상상력의 산물인『사기(史記)』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이나,“이야기는 건달이 만드는 것이고, 건달이 되면 춥고 배곯으며 천하를 돌아다녀야 한다. 건달의 궁극적 관심은 주역의 건(乾)괘에 통달(達)하는‘건달(乾達)이 되는 경지다.”하면, 정말 강호를 주유천하(周遊天下)해야지만 인생의 참맛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이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는데 유유자적 산천을 거닐며 만나는 사람들과 자연에서 삶의 이치를 깨닫는 느림의 철학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케 된다.
그렇다보니 강호를 주유하며 사람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그네들의 이야기 속에 담긴 진한 삶의 향기에서 인간의 도리와 인생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지혜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 이 강호학을 말하는 저자의 설레발이 그리 밉지는 않다.

1만2천석 대지주집 도령이 하인에게 건넨 정감 있는 말 한마디가 후일 목숨을 건지게 해주었다는‘봉소당 피화담(避禍談)’얘기에서 “논리(論理)위에 정리(情理)”가 있음을 확인케 하고, 조선 선조 조일전쟁의 의병대장이었던 고경명을 비롯하여 구한말 의병대장 고광순, 고광문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이어가며 의로움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고씨 가문이나, 가난한 민중들을 의식하여 굴뚝을 낮게 하여 위화감을 없애려하고 사랑채 옆 쌀뒤주에서 쌀을 퍼가게 눈을 감아주는 사대부의 아량 넘치는 미덕에서 어느덧 잃어버린 고귀한 정신들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여기에“자신에게 이로우면 남에게도 이로워야 오래간다.”즉,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인생의 보람 있는 무의식이자 양심의 세계를 통해 바로 이 무의식이 염라대왕의 장부책, 인간 양심의 블랙박스임을 설파하는 글이 더해져 나눔의 사회에 대한 정의를 더욱 맛깔스럽게 한다.

한편 깊은 인상을 준 글로, 고택(古宅)에 대한 인식인데, 오늘에까지 무너지지 않고 수백 년을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은‘역사의 검증’에서 살아남았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변의 민중들에 덕을 베풀어 적을 만들지 않았으며, 학문적 성취도 존숭(尊崇)받는 집안으로 자손 대대로 이를 긍지와 자존심으로 지켜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갓 잔류하고 있는 사대부들의 고택이 민속가옥의 전통적 가치이외에 무어가 있을까 했던 시선이 순간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또한 오늘날 의전(儀典)의 문제가 대두하면 왼쪽이 상석이냐 오른쪽이 상석이냐 하며 자리배치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좌(左),우(右)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공부(工)와 입구(口), 양과 음으로 바라보는 전통적 사고의 뿌리 깊은 인식으로 풀어내어 퇴계학파를 모시는 호계서원의 학봉과 서애의 위패 자리다툼시비가 400 년 만에 학봉 자손들의 양해로 마무리되었다는 미담은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어쨌거나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와 너 어울려 고통 없이 즐겁고 평안하게 살다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자니 밝은 마음, 이웃에 대한 배려와 같이 덕과 선함의 의지와 풍요로운 자연과 교감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삶, 그 이상 무어가 있을까.
‘소동파’가 정했다는 시원하면서 즐거운 그 무엇인‘상심16사(賞心十六事)’, 즉 “시원한 비오는 밤 죽창(竹窓)옆에서 이야기 나누기, 여름밤 시냇물에서 발 씻기, 제방길 산보하기, 강 건너 산사의 종소리 듣는 것, 등나무 베개 베고 낮잠 자기,..등등”이나, 맹자의 군자삼락은 아니더라도 소인인 내게 있어 소인삼락(小人三樂)으로 저자가 꼽은, “지리산 천은사 뒤의 눈 덮인 소나무 숲에서 장엄한 광경을 보며 세상사의 때를 씻어내고, 오래된 벗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남은 인생의 유한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정말 인생이 즐겁지 않겠는가!

민간에 자리 잡은 전해져 오는 민담에서, 지나가다 만난 의외의 강호의 고수에게서, 그리고 소소한 삶의 자투리와 장엄한 자연 모두에게서 배워내는 삶의 지혜들을 익숙한 고사에 먹음직스럽게 버무려낸 보편적 도덕과 사회정의를 말하는 도덕사회학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중년의 나이에 책을 읽고 그 소감을 쓰고 있는 내게 그것이 바로‘상팔자’아니냐고 하는 저자가 고맙기도 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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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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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증오의 대 서사시. 넘실대는 욕망의 끊임없는 쟁투. 거짓된 이데올로기로 위장된 탐욕과 파괴가 사랑과 파탄이란 애증과 교묘하게 교차된 야만으로 퇴행하는 인류사회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신화적 상상력과 현실이 교감하는 루시디만의 특유한 마법적 이야기에서 잠시라도 눈을 돌리는 것은 예의가 아닐 정도이다.

‘카슈미르’,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종교가 어우러지고 전통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들의 평화가 깃든 낙원이었던 곳, 그러나 오늘날의 캬슈미르는 극단적인 종교 갈등과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부딪는 곳, 죽음의 그늘이 깊게 드리운 장소의 다른 이름이다. 소설은‘누가 이 아름다운 산야를 피로 물들이고, 경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는가? 그 의도와 목적에 도사리고 있는 진실의 얼굴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신화와 어우러진 전통 민속공연을 부족의 자긍심으로 살아가는 카슈미르의‘파치감’마을. 파치감의 족장‘압둘라 셰르 노만’은 “누가 힌두인이고 누가 무슬림이오?”할 정도의 공존과 개방을 신념으로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마을의 정신적 지주이자 철학자이며 요리사인‘판디트 피아렐랄 카울’과 여성해방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설명하는 아내‘팜포시’는 바로 그 공존과 평화의 파트너라 할 수 있다. 작품은 이들의 자식인‘광대 샬리마르’와 ‘부니 카울’의 광풍같은 사랑의 열기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마법의 선(善)따위는 없애버리고 자신의 운명에”맞서야 한다는 속박 없는 미래와 자유의 비전을 지닌,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도덕적 판단도 멈출 수 있는 여인인‘부니’와 사랑의 지고지순함과 성스러운 결합이라는 신념의‘샬리마르’의 결혼은 이미 비극의 시작을 알린다. 여기에 인도주재 미국대사‘막스 오퓔스’의 등장은 젊은 무희 부니의 지독한 굶주림을 채워줄 수 있는 노골적인 실용주의, 아니 공리(功利)주의적 기회이자 수단이 된다.  

이 소설의 재미는 바로 이 막스라는 인물로 인해 극단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더욱 견고한 의미를 담은 의식을 시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남편을 버린 부니와 쉰다섯 살에 종교적이고 시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지상 낙원을 얻은 막스의 불륜은 외교적 실패와 정치 생명의 단절이라는 운명을 가져오지만, “그의 운명이 정책이나 외교, 무기 판매와는 거의 무관하며, 훨씬 더 오래된 태곳적 욕망의 명령과 전적으로 연관된 것임을 깨달았다.”는 인식처럼 거대해 보이는 세계의 정치 질서라는 것의 이면에는 인간의 탐욕스런 욕망이 꿈틀대는 것 이상이 아님을 암시한다.

소설은 이들과 함께 일명‘인디아 오퓔스’, 또는 ‘라테타’, 아니‘카슈미라 카울’이 가세하여 이 비극적인 사랑과 증오의 승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인디아’,‘부니 카울’,‘막스’,‘광대 샬리마르’, 4인을 축으로 하여 그네들의 삶을 투영하며 이데올로기, 종교, 인종적 갈등의 본질을 탐색한다.
사실 작가는 종교나 정치적 이념의 갈등으로 포장된 이면의 진실을 이들 삶의 족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실체란 기껏 욕정과 흥정과 광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막스의 칭송받는 2차 대전 레지스탕스로서의 경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자기생존의 우연한 산물인지 하는 것이나 한낱 세밀화가의 열정을 타고난 위조 전문가의 재능이 무기거래상이자 억만장자로 정계의 막후 실력자로, 그리고 테러리스트로, 미래를 거래하는 세계의 설계자로 둔갑하는 것의 실상을 술회하는 것, 그리고 무자히드(성스런 전사)가 되어 파키스탄에서 필리핀에서 미국에서 이슬람의 적대자들을 심판하는 전문 테러리스트인 광대 샬리마르의 신념이란 것이 결국 부정한 아내에 대한 살의와 그 복수라는 것처럼 욕망의 광기, 부지(不知)의 부도덕(不道德)이 곧 세계 권력과 테러의 본질이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캬슈미르와 로스엔젤레스, 소설의 배경인 두 도시는 승리와 패배가 거듭되지만 반복되는 야만의 전쟁이 가져오는 것은 헛된 죽음뿐인 곳으로서 또한 꿈틀대는 현대의 음험한 욕망의 장소로서 복수의 천사, 죽음과 저주의 천사를 암시하는 공간일 따름이다. 그래서 광대 샬리마르가 미국의 이 도시에서 막스 오퓔스를 살해하는 것은 겉으로는 반테러리즘을 옹호하면서 아프가니스탄 탈리브의 테러를 지원하는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세계의 권력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빼앗긴 남편의 명예의 손상, 수치에 대한 보복이자 사랑의 약속을 실현하는 행위일 뿐임을 더욱 명료하게 인식케 한다. 이는 달리말해 문명의 갈등, 종교의 갈등, 정치이념의 갈등이라 그럴듯하게 위장하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위선의 조롱이자 인간의 탐욕이라는 본질의 규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증오는 증오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 더구나 “옳고 그름이란 단어가 의미를 잃고 산산이 부서지는”정의의 회색지대에 우리를 풀어놓아, 시체와 피, 광기,..흑마술, 결코 끝나지 않는 어둠이 계속되는 오늘의 세계에서 욕망이라는 충동처럼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실체를 대면케 하고 있다. 인디아 오퓔스는 아버지 살해자인 샬리마르에 대한 증오를 연속시키는 세대이다. 그래서 욕망이 잉태한 자식, 인디아 오퓔스 이자 카슈미라 카울은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벌이는 전쟁과 테러, 이데올로기와 종교 등 이 세계의 불가해한 현상을 연인의 사랑과 배신, 그리고 복수의 여정에 정말 멋지게 녹여내고 있다. 탐욕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권력, 평화의 진정한 적들의 실체에 대해 이보다 적나라한 통찰과 규명을 가한 소설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자유가 곧 전쟁인 이 사악한 세기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선택을 놓고 벌이는 정의에 대한 최고의 문서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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