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의 삶, 사람의 존재성이란 것이“숲이라는 거대한 익명성 속에서도 개별자로서 외롭거나 억눌려 보이지 않는 나무”와 같을 수 있다면 인간들의 욕망이란 것이 그처럼 혐오스럽고 남루하고 치사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세밀화 작가인 작품 속 화자,‘연주’처럼 일상성 속에서 삶의 욕망을 이해하고, 존재함으로써 비로소의 의미를 지니는 시간을 깨닫는 자등령(紫登領) 젊은 숲속에서의 초극(超克)의 사계절이 부럽기 조차하다.

“불모를 끌어안고 기어이 살 수 밖에 없었던 세월의 쌓인 늙음”이라고 생의 결핍과 피로감, 황폐함을 말하지만 삶이란 것에 무슨 결실이란 것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불모’라는 속물적 욕망의 표현이 은근히 저항감을 불러온다. 어쩜 이런 내 느낌이 이미 위선적인 자기기만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내세란 것이 있다면 포유류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화자(話者)의 말처럼 육신의 누추함,“가족들의 생리적인 삶만이 모든 진실”이어서 세상에 부대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갈취형 상납비리로 범죄자가 되어 수감된 공무원인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거의 모든 대다수의 사람들을 더욱 비참하게 하는 말 같기만 하기 때문이다.

“삶의 생리를 보호하고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방편이며 조건이자 환경”인 재화(돈)를 위해 부대끼는 사람들, 그 표상인 아버지의 구속, 즉 “더 이상 돈을 벌지 않아도 되고 세상에 부대끼지 않는 자리에 아버지가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에 연주와 그녀의 어머니가 안도하는 것은 욕망이라는 생의 모멸감과 수치심에 대한 자각이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여기에 삶을 더욱 초라하고 무력하게 하는 매개체로‘할아버지의 늙은 수 말’, ‘좆내논’에 얽힌 일화는 무거워 보이는 짐수레를 끌고 저무는 지평선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화자의 꿈 속 모습이 더해져 황폐하고 메마른 인간 포유류들의 삶을 비루하게 비출 뿐이다.

풍화의 맨 마지막 과정을 겪는 듯한 민통선 근처 소읍에서 우회전하자 시야에 들어온 인적이 사라진 자연의 공간은“온대 활엽수의 숲이 극성기를 이룬 천연림”을 등에 지고 사람의 진출이 통제된 민통선내 수목원과 대립되어 인간의 시간이 아닌 마치 다른 시간이 흐르는 듯한 환상을 준다. 계약직 세밀화 작가로 수목원에 취업한‘연주’가 꽃과 나무의 생애의 가장 역동적인 순간에 작동하고 있는 생명의표정과 질감, 생명의 사실을 그리는 작업에서 발견하는‘쟁쟁쟁’하는 역동성과 자신감, 관능성이라는 젊음의 울림은 우리네 사람들의 삶의 구조와 토대에 새로운 인식을 보게 해준다.

50여 년 전 죽음으로써 삶을 제거하고 죽임으로써 죽음을 갚는 무한소모전으로 피와 시체로 뒤덮였던 자등령 능선과 시화평 고지에는 삭고 풍화된 유골들이 적막하게 싸여있다. 한 때 젊은이였던 이젠 뒤틀리고 구멍나고 부스러진 뼈가 된 이들의 흔적에서 죽음과 땅, 생명의 순환, 그 자연의 덧없음만을 살피게 된다. 유골발굴단이라는 전시적인 듯한 산자들의 몽매함이 죽은 병사의 뼈 그림을 극사실화로 그려달라는 군(軍)의 주문으로 더해져 “쟁쟁쟁은 그 구조 너머에 떠도는 것이어서 화폭에 좀처럼 내려앉지 않았다.”는 話者의 생각처럼 무지함의 단순명료한 발상들이 답답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인간의 삶이란 욕망이 빚어내는 남루함, 아마 작가의 전작인 『공무도하』에서 되뇌던 던적스러움 이상이지 않을 것이다.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할 남편을 맞이하는 두려움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연주 어머니의 불면증이나“주님 오시기 전에는 여기나 거기나 결국 다 마찬가지”라더라고 하는 연주 아버지의 넋두리는 생애의 고통과 수치심의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꽃의 색깔에서 어떤 구조적 또는 종자학적 필연성을 찾아내려는 수목원 연구실장‘안요한’과 그의 자폐아 아들에서 생명으로 태어난 것들의 근원적인 결핍을 발견하는 화자의 시선에서굳어버린 무위(無爲)의 단단함으로 나무라는 생명체를 곧게 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늙은 목질”의 다른 시간과는 구별되는 인간생애의 모멸을 읽게 된다. 인간의 시간과 다른 나무의 단독자로서의 존재는 내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금 생각게 한다.

짐처럼 생을 걸머지고 살던 아버지, 그의 죽음을 “아이구 불쌍해라!”라고 통곡하는 어머니의 한 맺힌 울음에서 비로소 그네들이 자신들의 생을 괴롭히던 욕망을 벗어나는구나 하는 안도감보다는 왠지 내 명치끝이 아려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포유류의 공감 때문일까? 그러함에도 생은 끝없이 교체를 반복하며 닮은꼴의 세대를 이어간다. 아마 색깔들이 물안개로 피어나는 시간, 그‘쟁쟁쟁’하는 생명의 소리를 가진 젊음, 식물의 시간이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을 지닌 연주에게 젊은 계급장을 단 ‘김민수’중위의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그녀의 부모들이 좇는 삶의 피로가 누적된 그 건조한 욕망과는 다른 것이 될 터이다.

아무런 대립이나 구획이 존재치 않는 나무라는 단독자의 개별성과 숲의 익명성, 그리고 눈을 뚫고 올라오는 얼레지 꽃의 농염함, 밤을 지낸 수련 잎이 햇살을 맞이하고 봉오리가 열리며, 바람에 흔들리며 수런거리는 분석되지 않는 소리의 바다, 그 숲의 깊이에서 새로운 시간의 소리를 들려주고, 존재자로서의 사람의 삶의 의미를 사유케 하는 웅숭깊은 작품이다. 욕망의 비루함이여 물러가라. 왜 타자의 욕망을 따라하는가.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모욕되게 하는지 모른단 말인가. 어느덧 나무와 숲을 닮은 얼굴로 나무의 시간 속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평온해진 나를 느끼게 된다. 비록 해탈과 같은 종교적 초월, 그 미지의 대상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삿된 오욕을 잃어버리는 시간이 되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