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의 염소들
김애현 지음 / 은행나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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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된 주체로서 내가 또 다른 독립체인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동정과 연민,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아마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것일 게다. 내가 그 누군가의 감정에 이입되려고 노력하지 않고서 그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만하고 그릇된 이해겠는가? 소설 속 방송작가인 엄마와 개그우먼 지망생인 딸의 어긋나는 대화에서 소통이란 것의 공허한 틈새를 발견한다. 일에 심취해있는 엄마, 자기 삶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가진 엄마, 주변인들의 한결같은 존경의 대상이 되는 커리어 우먼인 엄마이지만‘나(딸)’는 소홀해 보이기만 하는 자식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가 마땅치 않기만 하다.

우리들 삶의 여정에서 툭하면 대두되는 일과 가정에 대한 비중, 그 무게중심의 편차에 대해 구성원들의 갈등이란 것의 실체는 어찌보면 이기심이라는 본질을 벗어난 감정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일하지 않으면, 아니 일을 통해 경제적 재화를 획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 때문이기만 할까. 일이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일이라면 그 사람을 그것에서 격리하려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며, 삶의 의미를 포기하라는 압박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저녁밥을 기대할 수없는 나에게 엄마의 일은 사랑의 경쟁자이기에, 그 일에 몰두하는 그녀는 더욱 알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딸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면 젖을 먹이지 못했다는 엄마의 말이‘나’의 삶에 결핍을 낳는 근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갈망하는 사람의 결여라는 상징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 공허함을 채우는 무의식의 행위로 젖병에 흰 우유를 넣어 마시는 장면들은 아직은 삶의 이해에 서툴고 에고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사람의 불안이어서 거북하기만 하다.


한편, 소설의 표제인‘과테말라의 염소’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엄마의 방송프로그램 현지취재 내용의 장면으로서 염소의 젖을 관광객에 팔아 살아가는‘호세’라는 청년의 죽은 엄마에 대한 비로서의 이해와 사랑의 비감한 회고로서 생전에 생계의 원천이었던 염소들이 그녀에게는 “그저 다섯 마리의 염소가 아니었어요.”라는 그 지고한 삶의 원천이자 자식에 대한 사랑의 복합체로서의 깨달음에 대한 일종의 우화이다. 이 이야기는 話者인‘나’의 엄마에 대한 그 먹먹하고 뭉클한 사랑과 그녀의 삶에 대한 새로운 앎의 각성 과정과 중첩되어‘어머니’라는 아릿한 태곳적 그리움에 젖어들게 한다.

중환자실에 아무런 의식조차 없이 누워있는 엄마, 병문안을 위해 찾아오는‘나’의 친구들이 들려주는 엄마의 전문가로서의 모습, 남자친구라는‘전 선생’의 엄마의 여자로서의 관계에 대한 고백과 ‘나’에 대한 사랑의 안타까운 이야기들에서“젖 먹던 힘”의 본질을 알아가고, 결핍의 번민, 그 허전함의 틈새가 채워져 나간다. 엄마에 대한 향수, 일의 이면에 내재한 도덕적 책임이라는 자애(慈愛)의 실재함, 그리고 이별이란 불가피한 통증의 수용이 담담한 필체로 다가와 마음을 적신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슬픔의 한 복판”에 놓여 참았던 울음이 막 터져 나올 듯한데도 마치 딴 청을 부리는 느낌의 소설이다. 내겐 참으로 낯 선 감정의‘나’였고,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십대의 감성, 언어, 삶의 시선에 대한 놀라운 다름의 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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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독스 논리학 - 제논의 역설부터 뉴컴의 패러독스까지, 세계의 석학들이 탐닉한 논리학의 난제들
제러미 스탠그룸 지음, 문은실 옮김 / 보누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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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사용치 않던 뇌의 어느 부분을 사용하는 부담을 느껴보게 하고, 궤변인지 진실인지 조차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나 멀쩡한 이성이 기만당하는 역설들에 내 사고력과 판단력, 그리고 논리력이 구멍이 숭숭 뚫려있음을 자각하는 겸허한 시간이 되게 한다.
몇 가지 논리학의 난제(難題)는 우리네 이성의 딜레마를 이야기 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것들이어서 살짝 건너뛰어도 되지만, 문제를 이해하기에 더없이 핵심만 압축적으로 제기하고 있어 두뇌에게 반복 학습의 시간을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 어린 시절 궁리해 낸 수수께끼처럼 의외로 차분히 단서들을 대입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지 못해 쩔쩔매다 해답란을 보고서야 아하~하고 이해하게 되는 확률의 논리문제도 있다. 또한 어수룩하고 섣부르기 그지없이 잘 속는 우리의 논리적 이성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하는데, 언어에 내재하고 있는 마법같은 술수, 확률의 함정을 결코 피해가지 못하는 추론 능력을 확인하곤 인간 지성의 취약성을 새삼스레 인정하는 시간이 된다.

역전의 역설이라고도 하는'심슨의 패러독스(Simpson's Paradox)'에서 각각의 게임에서 진 사람의 합계의 점수에서는 오히려 앞서는 기이한 현상의 진실로부터, ‘저지의 역설’을 대하면 핵전쟁의 발발과 같은‘최후심판 날의 기계’와 같은 자동화, 기계화의 아슬아슬한 위기가 상상되기하고. 연쇄삼단논법의 패러독스와 같이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아는 것과 논증의 결론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을 보게도 된다. 사실 직관으로는 분명히 옳지 않음을 알지만 진실과 반대되는 논리적 결과를 명쾌하게 반박하거나 그릇됨을 지적할 수 없는 역설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저작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거듭 인간지성으로 인간의 삶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없으리라는 내 신념의 붕괴를 인정치 않을 수 없는 당혹감에 잠시 휩싸이기도 한다.

특히 이 저작에서 시종 내 관심을 흐트러지게 하지 않는 두 개의 장인 철학적 난제와 패러독스 세계에 대한 것인데, 이 중에서도 자기스스로를 원소로서 포함하지 않는 집합들의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서 포함하는가? 하는 일명 러셀의 패러독스나, 인과적 결정론은 인간에게 참 일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뷔리당의 당나귀 패러독스’는 자유의지에 대한 의문까지 실로 광대한 사유를 이끌어 내고, 지배원리와 기대효용이론의 지지로 나뉘는 뉴컴의 인간 사고실험이 보여주는 사람들의 논쟁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를 생각게 한다.

정체성의 딜레마처럼 진지함에 머물게도 하지만, 1달러 지폐를 경매에서 팔면 수지가 남을까하는 계획의 실상처럼 미소 짓게 하는 인간의 심리, 본성, 이성의 맹점을 발견하는 재미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흥미로운 저작이다. 그리고 각 단원마다 짤막한 논리퀴즈(Logic Quiz)가 있는데 이 문제들 또한 단연 압권이다. “벨기에에서는 남자가 자기 과부의 자매와 결혼하는 것이 합법일까?”한 번 풀어보시라!
세계의 지성들이 탐닉한 난제들을 함께 생각하고, 해결해 보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사고와 논리, 인간의 실체를 발견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몇 자 되지 않는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책자이지만 수월치 않은 시간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꼼꼼히 읽다보면 애장도서 목록에 추가하고픈 생각이 은근히 지배하는 그런 저작임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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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의 복음
톰 에겔란 지음, 손화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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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과 종교에 대한 고고학적 소재를 지닌 이 작품이 넘나드는 영역은 우주생물학, 천체학과 물리학, 그리고 영적 신비주의에서 A.D.325년 니케아 공회의를 전후한 성서의 정경화에서 배제된 외경(外經)을 둘러싼 신학의 갈등, 첨단 장비로 무장한 현대의 고고학에 이를 정도로 상상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게다가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오가면서 사건의 진실로 다가가게 하는 치밀한 플롯과 작품 곳곳에 쌓인 수수께끼들의 파편을 하나의 유기적인 서사로 엮어나가며 최고의 지적흥분을 불러오는 재미는 그야말로 과학 스릴러의 정수를 보여준다.

 ‘빛의 천사’‘루시퍼?’, 루시퍼는 타락한 천사, 아니 사탄, 악의 화신인가? 그 존재의 의미는 진정 무엇인가?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 고고학 조교수인‘비외른 벨토’는 키예프의 수도원 큐레이터로부터 외경과 관련된 한 필사본의 연구의뢰를 받고, 내키지 않는 비밀유출을 돕지만, 곧 큐레이터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 66개의 촛불에 에워싸인 채 피한방울 남지 않은 알몸의 시신으로 발견 된 것이다. 알 수 없는 이단(크리스트교 입장에서 보면)의 제의(祭儀)를 행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 그리곤 공동연구를 하기로 했던 동료마저 동일한 형태로 살해되고, 이를 돕기로 했던 프랑스의 고문서연구자인 여성까지 연이어 人身供犧의 희생자로 발견된다.   


 점차 죄어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벨토에게 다가오고, 아이슬란드의 한 연구소에 의문의 설형문자로 써진 필사본의 해독을 맡기고는 살해자들의 연고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에 은둔하고 있는 사탄 연구자의 요청으로 로마로 향하게 된다. 소설은 여기서 불신과 믿음에서 갈등하는 벨토를 통해, 믿음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의외의 진실을 설득력 있게 펼쳐나가는데, 바로 벨토의 손에 들어온 「루시퍼의 복음」의 필사본을 건네줄 것을 요구하는 서로 다른 조직과 마주하게 된다. 양 쪽 모두 인류의 종말을 구원하기 위해 필히 자신들이 이 필사본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한다. 무엇이 인류의 영속을 위한 진정한 행위인지를 알 수 없을 때, 선과 악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일명‘루시퍼 프로젝트’의 완결을 위해 미국의 정보기관부터 고고학, 물리학, 우주천제학, 생물학, 신학의 인사들이 망라되어 구성된 비밀 조직으로부터 벨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필사본이 세 부분으로 분리된 루시퍼 복음의 마지막 부분임을 알게 된다. 사탄을 숭배하는‘드라큘라 기사단’의 죽음을 무릅쓴 필사본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피해, 루시퍼의 진실로 한걸음씩 접근하는 과정의 전율이 아찔하다. 결국 <모세의 오경>이 되었든, <에스마엘 서>나, <요한 계시록>등 신앙의 중요한 바탕은 항상 지구의 종말론에 이르는데, 작품 속에서 지적하듯이 “종말의 개념 없이는 존재의 영적 정화는 물론 삶의 목적이나 의미조차 찾기 힘들기에”, 다시 말해서 종말의 날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의 문제가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도 있기에 그 진실에 대한 인간의 집요한 탐색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품은 나아가 상징적 표현인 성서의 문장들을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하여 그 예언적 문장을 실현하려는 터무니없는 근본주의자들과 진정의 의미를 과학적 진실을 통해 규명하려는 집단과의 갈등으로 귀결시킨다. 물론 이라크의 사막 한 가운데, 알 힐라, 옛 우르지역에서 전설의 바벨탑 흔적인 지구라트(ziggurat)를 발굴함으로써 과학이 근본주의에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설의 결실은 그리 단순치가 않다.

지구 종말론의 실체는 무엇인가? 루시퍼의 복음에서 가리키고 있는 지구라트에 숨겨진 진실이란 무엇인가? 최초의 인간, 인간의 기원은 어떤 것인가? 날개달린 하늘에서 내려온 빛의 천사, 그들은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을 밝혀낸다. 구약에서부터 길가메시이야기, 고대문서들에 등장하는 거인족, ‘네피림’의 존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200명의 천사가 빛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구약의 말은 진정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마르게돈, 그리고 아마겟돈이라고까지 의미를 오도한 ‘하르가-메-기도-돔’의 진짜 의미, “지구로 되돌아온다.”는 말의 진의는 무엇인가? 마침내 현대과학이 파헤친 진실은“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창조론”을 만들어 낸다. “우주에서 온 손님, 오우하(Ouah)”, 여전히 미흡한 진화론의 인류 발생학에 대한 답으로서 이 뜬금없는 듯한 과학적 상상력은 꽤나 설득력을 갖는다. 만약 「루시퍼의 복음」에서 말하는 1,640,000일 후에 되돌아온다는 그 누군가의 말을 신뢰한다면 2012년에서 2024년 사이에 빛과 함께 나타나는 그들을 기다려 볼 일이다. 고고학을 비롯한 다채로운 지적도구들, 진정 호감을 가지고 읽어 볼 작품이라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인류의 기원과 종교에 관한 정말의 탁월한 기획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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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장르 소설의 대가, 헤닝 만켈의 신작 [이탈리아 구두]
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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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가을 석양이 질 무렵 낙엽을 흩날리는 을씨년스런 바람같은 소설이다. 가끔은 초로(初老)의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는데, 인적 없는 숲 속 어딘가에 또는 외딴섬 그 어느 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느릿하게 산책을 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그런 그림이다. 사실 사냥꾼의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내쳐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린 세월에 대한 보상인 것인데, 헤닝 만켈의 이 소설 속 66세의 주인공 ‘프레드리크 벨린’의 모습과 삶의 우연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환자의 멀쩡한 팔을 절단하는 의료사고로 외과의사를 그만두고 북구의 외딴섬에 자신만의 방호벽을 꼭꼭 둘러치고 은둔의 생활을 하는 이 초로의 남자를 보면서 나를 투영하고, 어쩜 비슷한 인물이 스웨덴의 차가운 바닷가 섬에도 있구나 하는 위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방향 감각을 모두 상실한 어떤 삶에 대한 연대기”를 쓴다는 벨린의 간결한 일기는 기껏“사라지는 황여새와 점점 쇠약해지는 반려 동물들에 대한 내용”뿐이듯이, 내용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매일 기억나게 하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는 행위를 하는 남자를 읽다보면 와락 그 인생의 이해에 대한 공감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전혀 관심이 없는 일에 대해 수다를 떨고 자기가 상상한 질병을 진단하라고 요구”하는 우편배달원‘얀손’만이 외딴섬을 찾는 유일한 사람인 그런 일상. 이 고적한 풍경에 취해 있다가 주인공만큼이나 나도 놀란다. 이 남자에게 너무 이입되어서였던 모양인데, 꽝꽝 얼어붙은 빙해위에 쓰러져 있는 여자의 발견은 시선을 피하고 싶어하는 그의 행동만으로 많은 것을 전달한다.

거의 40년 만에 나타난 여자.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여자였으나 배신당할까봐, 통제할 수없는 감정에 휘둘리고, 구속되는 것이 두려워 비겁하게 먼저 배신하고 삶에서 지워버린 여자,‘하리에트 회른펠트’가 찾아왔다. 이제 외딴섬에 설치한 결코 견고할 수 없는 남자의 방호벽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어둠이 시작하는 경계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불치병을 안은 노년의 여인이 그가 배신하고 떠난 지 40년이 흐른 뒤 앞에 나타나 그녀가 살면서 들은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었던‘노를란드 숲 속 작은 연못’에 가자던 약속을 지켜달라고 한다.

북구의 침엽수들이 울창한 겨울 숲길을 달리는 두 사람의 여정은 뉘엿뉘엿 기우는 황혼의 빛과 닮아있다. 침묵하는 겨울, 주위도 그네들의 내면까지도. 자신을 걸어 잠그고 거짓을 말하는 배반한 남자, 베른을 향한 하리에트의 “사실은 하나도 없어. 당신은 스스로 어떻게 견디지?”하는 질책은 고립과 외로움의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가둬놓은 외딴섬을 돌이켜보게 한다.
40년 전 젊은 연인이 한 약속, 돌고 돌아 숲 속 작은 연못,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행된 약속, 그리곤 하리에트가 요구하는 40년의 이자(利子), ‘에움길’의 요구로 성년이 된 베른의 딸,‘루이제’의 존재를 알려 준다. 긴긴 세월을 돌아 가족을 얻게 된 남자, 적막함에 스웨덴의 숲 속에 눌러앉은 구두공‘자코메티’의 삶의 연륜에서 묻어나는 “자기 안에서도 길을 잃곤”하는 우리네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내 그 어떤 삶의 귀착점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말은 아마 인생이란‘그러함’이란 경외처럼 다가온다. 문득 사람이 서로 가까이 있는 이유는 헤어지기 위해서라는 이 엄연한 말의 그 밀도높은 진실이 이처럼 깊이있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이렇게 삶의 의미를 지독하게 반추하게 한다.

하리에트와 루이제와의 만남이란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시선이 되어, 마침내 자신을 고립케 한 껍질, 팔이 절단된 여성,‘앙네스 클라르스트룀’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베른은 자기가 속한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들, 버림받고, 분노와 증오에 포획된 아이들을 보게되고, 앙네스의 보호를 받던 소녀의 느닷없는 외딴섬 방문과 자살은 비로소 관계와 소통, 타자의 외로움에 대한 이해로서 숨고, 회피하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사랑하는 이들, 베른과 루이제의 곁에서 임종을 원하는 하리에트를 위한 마지막 파티, 그 소박한 모임이 진정 인생에서 가장‘황홀한 아름다움의 시간’임을 말 할 때, 그리고 빈 술병 속의 메모에 남겨진 하리에트의 “우리 여기까지 왔어.”라는 짧은 문장은 인생이란 이러한 것이라는 뭉클한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인생이란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 ‘카라바조’를 좋아하는 딸아이 루이제를 기다리며, 개미탑을 걷어내는 베른의 모습으로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작품은 끝내려고 하지만 “인생은 심연 위에 걸쳐진 가느다란 나뭇가지”라는 표현에 마음이 더 다가가기만 한다. 때 묻지 않은 숲 속 진실의 언어들을 조용히 귀 기울여 들은 느낌이다. 그리고 내 일천한 어휘력으로 담아낼 수 없는 너무도 아름다운 소설이었다는 소중한 감성을 남기게 한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가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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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연금술
캐럴 맥클리어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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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내용만큼이나 주인공인 뉴욕월드 신문의 탐사보도기자인‘넬리 블라이(Nellie Bly)’란 여성에 대한 궁금증도 자못 흥미로울뿐더러, 이 작품의 작가인‘캐럴 맥클리어리’또한 한국의 서울에서 출생했다는 인연으로 작품외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소설 속에서도 넬리의 성향이 충분히 소개되고 있지만, 그녀가 한창 활동하던 1890년이란 시간은 여성이 남성의 보조자란 지위를 떠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회활동, 더구나 남성 전유의 세계인 신문기자를 한다는 것은 상상키 어려운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래서‘넬리 블라이’는 오늘날에도 미국을 비롯한 유럽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진출과 참여를 열어 제친 여권신장의 개척자(pioneer)로 칭송받는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실존적 인물에 대한 매혹을 물리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쥘 베른, 오스카 와일드, 루이 파스퇴르, 게다가 틀루즈 로트렉까지 가세시켜 파리 만국박람회, 에펠탑, 물랭루즈 등 당시 스펙타클의 정점에 이른 사회분위기에 빈틈없이 이들이 얽혀 빚어내는 정교한 얼개는 작가의 높은 구성력으로 이어져 흠뻑 매료케 된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 사회적 인식을 넬리를 통해 부각하고 있는데, 여성 노동자에 대한 임금차별, 여성의 사회진출 제한 등에 대한 저항,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부르주아지 지배계층의 착취와 빈곤의 고착에 대한 무정부주의자의 저항운동이 작품의 저변을 받쳐 더욱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갖게 된다. 악명 높은 정신병원의 인권유린을 밀착 취재하다 대면케 된 살인자의 홀연한 사라짐, 그리고 이어 영국런던에서 발생한 희대의 연쇄 살인은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파리로 이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뉴욕월드지의 사장인‘퓰리처’에게 어렵게 취재승낙을 얻어낸 넬리의 추적은 환락과 퇴폐의 상징이었던 몽마르트 언덕의 카페와 살롱, 희미한 가스등이 비추는 음울한 길거리에서 시작된다.

『해저 2만 마일』,『80일간의 세계일주』등 공상과학과 모험의 세계를 그린 당대에는 선구자라 할 수 있는‘쥘 베른’이 넬리의 살인자 추적의 파트너로 등장하여, 노작가와 젊은 여기자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기묘한 조합에서 연륜과 패기, 신중함과 열정의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파리 빈민가를 죽음의 공포로 뒤덮고 있는 흑열병의 실체를 조사하는 세균학자‘루이 파스퇴르’는 물론, 동성연인의 피살로 범인을 추적하는‘오스카 와일드’의 수다스러움이 더해져 1890년이란 시대를 대표하는 명사들의 화려한 활약이 작품의 재미를 북돋운다. 거기다 슬그머니 당시 파리의 흥청거리던 캬바레와 무희들, 창녀들의 화려한 풍경 뒤에 감추어진 비애를 그렸던‘틀루즈 로트렉’까지 그야말로 매머드급 조연들이 적재적소에서 퍼즐 조각처럼 등장하여 살인자에 한 걸음 접근케 한다.

빈곤층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그리고 평등과 자유를 위해 정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로 분(扮)한 살인자의 실체로 다가가는 과정에는 묵직한 조연들 못지않게 무기상 등 자본주의의 추악한 얼굴들을 드러내게 하는가하면, 시민운동의 모습에 대한 사려 깊은 사유를 동반하고, 관료조직이 발생시키는 무능과 안일함의 고발까지 오늘의 사회상으로 오버랩시켜 자연스럽게 문제를 제기하는 재치를 발휘하기도 한다. 난폭한 연쇄 살인자와 그가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의 진의를 쫒는 넬리와 베른의 여정은 마음 졸이는 긴장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이들에게 애정 전선이 드리우면서 또 다른 긴장의 달콤한 기운으로 안내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병원체를 인간에 주입함으로써 순간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살인자, 사회가 지켜주지 못해 불가피하게 몸을 파는 여성들을 유인해 잔혹하게 실험용으로 난도질한 후 버리는 인면수심의 괴물과의 두뇌 싸움은 스릴러로서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다. 치밀한 추리물로서 인물들의 면면에 숨겨진 반전의 장치와 복선은 물론, 세균이라는 독특한 소재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접근 요소들까지 무한한 흥분과 재미를 안겨준다.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의 생활사, 문화사를 훑어본 느낌까지, 제법 풍성한 스토리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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