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장르 소설의 대가, 헤닝 만켈의 신작 [이탈리아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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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평점 :
늦은 가을 석양이 질 무렵 낙엽을 흩날리는 을씨년스런 바람같은 소설이다. 가끔은 초로(初老)의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는데, 인적 없는 숲 속 어딘가에 또는 외딴섬 그 어느 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느릿하게 산책을 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그런 그림이다. 사실 사냥꾼의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내쳐지지 않기 위해 버둥거린 세월에 대한 보상인 것인데, 헤닝 만켈의 이 소설 속 66세의 주인공 ‘프레드리크 벨린’의 모습과 삶의 우연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환자의 멀쩡한 팔을 절단하는 의료사고로 외과의사를 그만두고 북구의 외딴섬에 자신만의 방호벽을 꼭꼭 둘러치고 은둔의 생활을 하는 이 초로의 남자를 보면서 나를 투영하고, 어쩜 비슷한 인물이 스웨덴의 차가운 바닷가 섬에도 있구나 하는 위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방향 감각을 모두 상실한 어떤 삶에 대한 연대기”를 쓴다는 벨린의 간결한 일기는 기껏“사라지는 황여새와 점점 쇠약해지는 반려 동물들에 대한 내용”뿐이듯이, 내용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매일 기억나게 하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는 행위를 하는 남자를 읽다보면 와락 그 인생의 이해에 대한 공감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전혀 관심이 없는 일에 대해 수다를 떨고 자기가 상상한 질병을 진단하라고 요구”하는 우편배달원‘얀손’만이 외딴섬을 찾는 유일한 사람인 그런 일상. 이 고적한 풍경에 취해 있다가 주인공만큼이나 나도 놀란다. 이 남자에게 너무 이입되어서였던 모양인데, 꽝꽝 얼어붙은 빙해위에 쓰러져 있는 여자의 발견은 시선을 피하고 싶어하는 그의 행동만으로 많은 것을 전달한다.
거의 40년 만에 나타난 여자.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여자였으나 배신당할까봐, 통제할 수없는 감정에 휘둘리고, 구속되는 것이 두려워 비겁하게 먼저 배신하고 삶에서 지워버린 여자,‘하리에트 회른펠트’가 찾아왔다. 이제 외딴섬에 설치한 결코 견고할 수 없는 남자의 방호벽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어둠이 시작하는 경계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불치병을 안은 노년의 여인이 그가 배신하고 떠난 지 40년이 흐른 뒤 앞에 나타나 그녀가 살면서 들은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었던‘노를란드 숲 속 작은 연못’에 가자던 약속을 지켜달라고 한다.
북구의 침엽수들이 울창한 겨울 숲길을 달리는 두 사람의 여정은 뉘엿뉘엿 기우는 황혼의 빛과 닮아있다. 침묵하는 겨울, 주위도 그네들의 내면까지도. 자신을 걸어 잠그고 거짓을 말하는 배반한 남자, 베른을 향한 하리에트의 “사실은 하나도 없어. 당신은 스스로 어떻게 견디지?”하는 질책은 고립과 외로움의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가둬놓은 외딴섬을 돌이켜보게 한다.
40년 전 젊은 연인이 한 약속, 돌고 돌아 숲 속 작은 연못,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행된 약속, 그리곤 하리에트가 요구하는 40년의 이자(利子), ‘에움길’의 요구로 성년이 된 베른의 딸,‘루이제’의 존재를 알려 준다. 긴긴 세월을 돌아 가족을 얻게 된 남자, 적막함에 스웨덴의 숲 속에 눌러앉은 구두공‘자코메티’의 삶의 연륜에서 묻어나는 “자기 안에서도 길을 잃곤”하는 우리네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내 그 어떤 삶의 귀착점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말은 아마 인생이란‘그러함’이란 경외처럼 다가온다. 문득 사람이 서로 가까이 있는 이유는 헤어지기 위해서라는 이 엄연한 말의 그 밀도높은 진실이 이처럼 깊이있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이렇게 삶의 의미를 지독하게 반추하게 한다.
하리에트와 루이제와의 만남이란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시선이 되어, 마침내 자신을 고립케 한 껍질, 팔이 절단된 여성,‘앙네스 클라르스트룀’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베른은 자기가 속한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들, 버림받고, 분노와 증오에 포획된 아이들을 보게되고, 앙네스의 보호를 받던 소녀의 느닷없는 외딴섬 방문과 자살은 비로소 관계와 소통, 타자의 외로움에 대한 이해로서 숨고, 회피하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사랑하는 이들, 베른과 루이제의 곁에서 임종을 원하는 하리에트를 위한 마지막 파티, 그 소박한 모임이 진정 인생에서 가장‘황홀한 아름다움의 시간’임을 말 할 때, 그리고 빈 술병 속의 메모에 남겨진 하리에트의 “우리 여기까지 왔어.”라는 짧은 문장은 인생이란 이러한 것이라는 뭉클한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인생이란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 ‘카라바조’를 좋아하는 딸아이 루이제를 기다리며, 개미탑을 걷어내는 베른의 모습으로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작품은 끝내려고 하지만 “인생은 심연 위에 걸쳐진 가느다란 나뭇가지”라는 표현에 마음이 더 다가가기만 한다. 때 묻지 않은 숲 속 진실의 언어들을 조용히 귀 기울여 들은 느낌이다. 그리고 내 일천한 어휘력으로 담아낼 수 없는 너무도 아름다운 소설이었다는 소중한 감성을 남기게 한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가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픈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