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의 염소들
김애현 지음 / 은행나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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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된 주체로서 내가 또 다른 독립체인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동정과 연민,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아마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것일 게다. 내가 그 누군가의 감정에 이입되려고 노력하지 않고서 그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만하고 그릇된 이해겠는가? 소설 속 방송작가인 엄마와 개그우먼 지망생인 딸의 어긋나는 대화에서 소통이란 것의 공허한 틈새를 발견한다. 일에 심취해있는 엄마, 자기 삶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가진 엄마, 주변인들의 한결같은 존경의 대상이 되는 커리어 우먼인 엄마이지만‘나(딸)’는 소홀해 보이기만 하는 자식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가 마땅치 않기만 하다.

우리들 삶의 여정에서 툭하면 대두되는 일과 가정에 대한 비중, 그 무게중심의 편차에 대해 구성원들의 갈등이란 것의 실체는 어찌보면 이기심이라는 본질을 벗어난 감정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일하지 않으면, 아니 일을 통해 경제적 재화를 획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 때문이기만 할까. 일이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일이라면 그 사람을 그것에서 격리하려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며, 삶의 의미를 포기하라는 압박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저녁밥을 기대할 수없는 나에게 엄마의 일은 사랑의 경쟁자이기에, 그 일에 몰두하는 그녀는 더욱 알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딸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면 젖을 먹이지 못했다는 엄마의 말이‘나’의 삶에 결핍을 낳는 근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갈망하는 사람의 결여라는 상징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 공허함을 채우는 무의식의 행위로 젖병에 흰 우유를 넣어 마시는 장면들은 아직은 삶의 이해에 서툴고 에고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사람의 불안이어서 거북하기만 하다.


한편, 소설의 표제인‘과테말라의 염소’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엄마의 방송프로그램 현지취재 내용의 장면으로서 염소의 젖을 관광객에 팔아 살아가는‘호세’라는 청년의 죽은 엄마에 대한 비로서의 이해와 사랑의 비감한 회고로서 생전에 생계의 원천이었던 염소들이 그녀에게는 “그저 다섯 마리의 염소가 아니었어요.”라는 그 지고한 삶의 원천이자 자식에 대한 사랑의 복합체로서의 깨달음에 대한 일종의 우화이다. 이 이야기는 話者인‘나’의 엄마에 대한 그 먹먹하고 뭉클한 사랑과 그녀의 삶에 대한 새로운 앎의 각성 과정과 중첩되어‘어머니’라는 아릿한 태곳적 그리움에 젖어들게 한다.

중환자실에 아무런 의식조차 없이 누워있는 엄마, 병문안을 위해 찾아오는‘나’의 친구들이 들려주는 엄마의 전문가로서의 모습, 남자친구라는‘전 선생’의 엄마의 여자로서의 관계에 대한 고백과 ‘나’에 대한 사랑의 안타까운 이야기들에서“젖 먹던 힘”의 본질을 알아가고, 결핍의 번민, 그 허전함의 틈새가 채워져 나간다. 엄마에 대한 향수, 일의 이면에 내재한 도덕적 책임이라는 자애(慈愛)의 실재함, 그리고 이별이란 불가피한 통증의 수용이 담담한 필체로 다가와 마음을 적신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슬픔의 한 복판”에 놓여 참았던 울음이 막 터져 나올 듯한데도 마치 딴 청을 부리는 느낌의 소설이다. 내겐 참으로 낯 선 감정의‘나’였고,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십대의 감성, 언어, 삶의 시선에 대한 놀라운 다름의 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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