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 강의
왕리췬 지음, 홍순도.홍광훈 옮김 / 김영사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성어를 말하면 의례히 초패왕‘항우’의 쓸쓸한 죽음을 연상케 된다. 한(漢)나라 고조가 된‘유방’에게 패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실패한 인물이 승자보다 더 인구에 회자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를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왜 항우를 말하는가? 왜 패자(敗者)를 노래하는가? 더더욱 승자에 집착하며 패자를 조롱하기에 여념 없는 비정의 세상인 지금에서. 그런데 과연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인가? 무언가를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이기는 것인가? 부, 권력, 부릴 수 있는 인간들, 명예 같은 것들? 아니면 도덕성, 배려심, 연민, 고통에의 공감 같은 사랑은?

 

책은 강력한 군사적 천재성을 지닌, 그리고 초의 대대손손 명망 귀족의 배경으로 가볍게 정치 무대의 상석에 서는 유리한 출발선까지 가졌던 항우가 왜 천하통일의 패업(霸業)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는가를 인물, 전략, 사회적 배경, 정치적 인식 등을 토대로 분석해 내고 있다. 이 해석에서 저자는 때론 일반적 통설을 뒤엎는 주장도 하며 항우의 인간적 매력을 높이기도 하지만, 실패 요인의 분석에 있어서는 냉철한 통찰로 수장(首長)의 자질, 시쳇말로 리더의 경영학적 모델이랄 수 있는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경쟁자인 유방이나 배신하여 유방을 도운 한신에 대한 평가는 항우의 그것과 비교하여 참말의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게도 한다.

 

항우의 정치적 인식

 

항우의 패배이유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정치적 인식의 미성숙이다. 군사적 역량의 천재성은 항우의 성장기에서 시작하여 그가 참여하는 전투에서의 압도적 승리로 인해 반박할 여지없이 승인되는 사항이고, 사가(史家)들 역시 입을 모아 그의 군사능력의 탁월함에는 어떠한 이의도 붙이지 않는다. 항우 자신의 주장이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와 같이 잘 알려진 비유처럼 그가 참여하는 전투에서 지지 않았다. 싸움에서 지지 않는 장수가 졌다는 얘기는 모순처럼 들리지만, 여기에 바로 정치라고 하는 권모술수가 개입한다.

 

한마디로 그는 술수를 부리지 못하는 영웅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유방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모든 분야에서 이류에 불과하던 유방이 뛰어난 것이 이 점이었기에 항우의 정치적 유치성은 더욱 부각된다. 진나라를 멸하고 관중에 진입하면서 이를 제지하던 유방에 대한 항우의 분노를 교묘한 변설과 임기웅변으로 위기를 피하는 유명한‘홍문연’사건은 대표적인 항우의 정치적 패착과 유아(幼兒)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군사적 규모나 영향력에서 상대가 되지 못하던 유방이 항우의 명예심을 자극하고, 당면한 갈등을 모호하게 하기 위하여 진나라의 멸(滅)을 위하여 공동으로 일어선 역사적 단계로 항우의 경각심을 돌린 교활성에 놀아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무식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 된다.

 

물론 여기에는 항우의 인척으로 유방과 그의 모사인 장량의 술책에 놀아난 항백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이 역사적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을 무위로 바꾸어 버린 점이라든가, 유독 애정과 친정(親情)에 취약했던 항우의 편협성에 근인을 두고 있다. 초한(楚漢)전쟁이라 불리는 항우와 유방의 4년간의 싸움에서 국부적 전장에서는 줄 곧 유방에 승리하면서도 전체 국면에 대한 전략적 관심 부족으로 유방의 세력에 포위되어 고립되는 형국에 이르는 것은 그의 정치적 인식 능력의 취약성을 거듭 확인하게 한다.

 

또한 유방과 달리 항우에게는‘범증’이라는 별로 뛰어나지도 못한 모사가 유일한 것처럼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이 있다. 즉 간언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인식능력에 이미 제약, 한계가 있었다는 측면을 말한다. 그러하다 보니 사람을 잘못 판단하는 실찰(失察)로 좋은 사람을 잃어버리는 실인(失人)은 그의 실패를 예견케 하는 지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궁지에 빠뜨리는 적과의 내통으로 자기이익만 챙기는 삼촌 항백은 보지 못하고 장량의 이간책에 말려 하나뿐인 모사인 범증까지 쫓아버리는 항우의 전략적 인식능력은 사실 유치함을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아마 한국의 대다수 기업의 오너들에서 항우의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족벌경영은 거의 예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고, 경영적 판단이라는 소위 의사결정에 있어서도 오너의 독단적 판단에 좌우되는 낙후된 관습이 여전하다는데 동의 할 수 있을 것이다. 간언을 참지 못하고,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는 장을 봉쇄하는 한국사회를 예측하는데 이보다 좋은 교훈이 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럼에도 왜 항우인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한국 사회는 이긴 자가 선하고 진 자는 악하다는 해괴한 신념이 있다. 그래서 무지하고 분별없는 자들은 실패자, 혹은 낙오자라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배제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우월성인 듯이 행동하는 것에 수치를 알지 못하는 천박한 뻔뻔함을 보인다.

항우는 소위 말하는 루저다! 그러나 사가들을 비롯한 후대인들은 항우를 이러한 해괴한 신념의 선상에서 판단하지 않는다. 다음의 전해오는 영사시(詠史詩)처럼 여전히 영웅으로 회자되고 그의 실패를 안타까워한다.

 

살아서는 사람 중의 인걸이요,

죽어서는 귀신중의 영웅이구나.

사람들이 아직까지 항우를 생각하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몰래 강동을 건너지 않았음이리라.

 

이것은 비록 역사적 터닝 포인트를 인식하는 능력이 부족하긴 하였으나, 그의 인간됨됨이는 인걸이자 영웅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는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무엇이 그러했다는 것일까? 이러한 일면은 그의 행적 곳곳에서 발견된다. 제업(帝業)이라는 중앙에 권력이 집중된 통치권자이기보다는 패업을 선택한 그의 행로라든가, 홍구를 경계로 유방과 휴전을 취할 때에도 유방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의 패업을 위해 백성들을 고생시키는 것이라는 이기심에 대한 참회의식이 그것이다. 물론 유방은 이것마저도 자기 이익의 편취를 위해 사용할 정도로 교활하였지만 말이다.

 

또한 오강에서 강을 건너 도피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패착을 인정하고 자결을 택했으며, 더구나 배신한 부하에게 자신의 목을 내 놓는 장면은 더 이상의 무고한 백성의 희생을 연장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시대의 환경이 이익을 보면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아무런 수치가 되지 않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였다는 것 또한 항우의 불운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오늘처럼.

그저 자신들의 이익만 쫓는 사회, 타인은 단지 딛고 일어서야 할 물체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항우를 배신한 한신, 경포,...등이 이러한 인간들의 표상일 것이다. 그들의 말로는 어떠했을까?

 

유방의 모사 중 괴통이 전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짐승을 다잡으면 사냥개는 삶겨 죽습니다... 공훈이 탁월한 사람은 종종 상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유방은 결코 사람을 아끼는 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신의라는 것을 품고 있지 않는 인물이었다. 다만 활용할 가치가 있는 재능을 확실히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 뿐이니, 천하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하고 황제를 칭하게 되었을 때 한신 등을 주살해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오로지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이라는 말을 진리처럼 신봉하는 사회가 과연 인간의 주류사회여야 한다는 것이 옳은 것일까? 지금도 한국의 조직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비뚤어진 신념에 의해 희생당하는 인재들이 무수하게 양산되고 있을 것이다. 진정 인재들은 소외되고 얼치기들이 세상을 차지하는 양태에서 무슨 바른 판단과 정신이 서겠는가?

 

결어

 

잔혹한 폭정으로 백성을 학대한 진을 멸한다는 공동의 이익과 목표가 사라질 때, 바로 그것이 정치적 환경의 전환점임을 알지 못했으며, 유방의 경쟁자로서의 성장을 인식하지 못했던 어리석음, 또한 타인을 이용할 줄 모르고 믿지 못했던 약점이 분명 있는 인물이지만 이것들은 일컬어 전략이라는 술수를 부리지 않았으며, 남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는 측면으로 해석하게 되면 더없이 진실한 인물이 된다.

 

더구나 그의 실패를 야기한 배경에는 백성을 먼저 생각한, 전장에서 자신이 행사한 무참한 폭력에 대한 참회가 있다. 또한 칭 황제 이후에야 관용을 버리고 잔혹해진 유방과 달리 전쟁 중 관용에 인색했던 항우의 우직함 역시 교활함과는 한 참이나 다른 곧은 성품을 짐작케 한다. 우린 패자를 노래해야 한다. 비극의 영웅을 말해야 한다. 잃어버린,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격려하고 그들의 분노를 위로해야 한다. 진짜배기 사람들은 패자들인 바로 우리들이니까 말이다.

 

항우의 우미인(虞姬)과의 사랑 얘기인 패왕별희의 일담(逸談)도, 고구려의 살수대첩을 연상시키는 용수와 한신의 유수(㶙水)전투도, 장량, 진평, 소하, 역이기 등 모사들의 기지도, 두목, 왕안석, 이청조 등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영사시(詠史詩)까지 더해 초한(楚漢)의 쟁패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맛깔나게 재해석하고 있는 이 책은 오늘 왜 우리들이 패자에 연민의 눈길을 보내야 하는지의 이유를 즐겁고 명쾌하게 깨우치게 한다. 오강에서 딱 한 번 웃으며 생을 마감한 항우의 그 호탕한 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int236 2012-08-1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묘한 사내입니다. 패자이면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인물은 인물인가 봅니다. 항우를 인간적인 면에서 재조명했다니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필리아 2012-08-14 16:49   좋아요 0 | URL
제가 지나치게 인간적 측면을 강조했나 보네요. 책은 정치,전략,환경적 측면을 모두 아우르고 있답니다.

saint236 2012-08-18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의 책소개 때문에 구입했습니다.^^

필리아 2012-08-18 18:07   좋아요 0 | URL
혹여 기대하셨던 내용에 미치지 못하면..., 제 편협한 감상이 폐를 끼친것이 아니기만을 바랍니다...
 
사랑과 다른 악마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성의 시대에 돌입했다고 계몽주의가 설쳐대던 18세기에 서구의 기독교 수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교조적이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인 권위를 유지할 공간이 여전히 필요했으리라. 그것은 식민지들이었고, 자기들과 다른 모든 종교와 풍습,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에 대한 악랄한 불용과 배제를 통한 기독교적 쾌락이었을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거행되고 묵인되는 식민지배자들의 야만성은 시간을 거스르며 18세기를 중세의 암흑기로 되돌려 놓았다. 소설은 이러한 기독교의 수구성, 폭력성이 뒤집어쓰고 있던 위선의 가면을 벗기는 작업이요, 자신들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들에 악마의 이름을 붙였지만 정작 그 악마는 바로 그들 자신이었음을 밝히는 일환이다.

 

무지에서 비롯되는 광기만큼 공포를 담고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는 것이 없으니 거침없다. 여기에다 죽음을 조장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내세를 말하는 종교, 즉 죽음의 종교인 기독교 교리가 더해지면 정말 끔찍한 일들을 사람에게 저지른다. 이 광기는 인간을 자신들의 권위에 묵어두는 파렴치한 수단이 되고, 그것은 바로 마녀사냥이자, 종교재판이라는 잔혹하고 탐욕스런 정치적 권력이 된다.

나와 다른 타자는 모두 이단이요, 악마이며,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한다는 포악성은 선량한 무수한 인간들을 끔찍하게 처단했다. 그래서 희생자들의 문화와 종교, 전통, 풍습, 언어는 소멸되고, 그 자리에는 탐욕스런 서구의 종교만 남았다.

 

부모의 무관심에 방치되어 흑인 노예들의 손에 양육되던 후작의 열두 살 외동 딸 ‘시에르바 마리아’는 생일 파티를 위해 장에 갔다가 개에게 한 쪽 다리를 물린다. 그러나 그 개에게 물린 사람들이 광견병으로 사망하자 마리아 역시 발병을 의심받는다. 뒤 늦게 딸의 사고를 알게 된 후작은 그녀의 안위를 위해 노심초사하고, 계몽주의자인 명의(名醫)‘아브레눈시우’에게 치료를 의뢰한다. 광견병의 소견이 없음에도 흑인의 풍습과 언어에 능한 마리아에 대한 소문은 점차 사악함, 악마의 기운으로 확산되고 이윽고 지역의 주교는 후작을 소환하고, 아이의 광기, 사악한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서 수녀원에 감금되어야 함을 명령한다.

 

기독교의 교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곧 악마라는 것이다. 더구나 항상 기독교의 야만적 폭력을 포장하는 말처럼, 자신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종교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요, 예수께서 하심이라.’ 이 얼마나 기만적인 목소리인가! 자신들은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교활한 술책이다. 또한 “우리는 소녀가 아니라 소녀의 안에 있는 악마와 전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소녀 안의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 소녀를 죽여야 한다.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것이라 말하며 이원론을 고집하는 기독교의 이 모순된 악의는 대체 어디서 연원하는 것일까?

 

열두 살 소녀는 종교의 무지와 야만성에 이끌려 수녀원에 인도되고, 편협과 아집, 독단에 사로잡힌 수녀원장에 의해 마녀가 되고, 악마가 된다. 멀쩡한 소녀가 서구 백인의 언어와 풍습과 다른 표현과 이해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말이다. 주교는 자신이 총애하는 사제인 ‘델라우라’에게 소녀를 감시하고 엑소시즘을 시행할 소임을 맡긴다. 그러나 사제는 마리아가 광기에 젖어있는 것도, 악마가 깃든 것도 아니요, 단지 후작 내외의 방치 탓에 흑인 풍습을 습득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소녀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쌓아간다. 사제는 그와 반목하는 수녀원장의 진정에 의해 주교로부터 임무를 박탈당하고 정신병원 간호인으로 쫓겨나지만 깊은 밤 수녀원 감방에 몰래 잠입할 정도로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깊어져 간다.

 

이윽고 주교가 직접 나서 고위 사제단을 이끌고 후작의 딸 마리아에게 엑소시즘을 실행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기독교의 광기에 어린 야만성 그 자체이다. 주교의 신들린 고함소리, 성가대의 굉음, 격정으로 이글거리는 주교의 눈 빛, 그것은 바로 원한의 악마, 관용을 모르는 악마, 백치의 악마, 혐오스러움이다. 델라우라에게 끔찍했던 엑소시즘의 순간을 토해내는 마리아의 창백한 목소리, “마치 악마 같았어요!”는 악마란 과연 누구인가를 역설한다.

그런데 또 하나 아주 우스운 기독교인들의 단골 언어가 떠오른다. “악마는 심지어 진실을 말하고 있을 때도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아퀴나스의 모순어이다. 대체 악마자체가 모호한 것을, 전체주의자, 파시스트들의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의 독선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서구 식민 지배자들의 탐욕과 이들의 체제 수호적이고 회귀적이며 수구적인 기독교의 악의성이 어떻게 식민지민들의 언어와 종교, 풍습을 억압하고 압살했는지를 사랑과 악마라는 그네들의 이분법적 언어에 담아 아릿한 환상적 사랑의 얘기로 풀어낸 걸작이다. 도시개발로 허물어지는 옛 수녀원의 묘지 이장(移葬) 현장에서 발굴된, 죽어서도 길게 자란 머리를 한 소녀의 사체를 모티브로 식민지 남미의 역사를 거슬러 서구의 종교적 문화적 이중성을 고발한 이 작품은 거장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의 유감없는 소산(所産)이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쁜 것들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소설이 마치 자신의 현실세계를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 같다면 그 느낌이 어떤 것일까? 나는 객관성을 거의 상실했다고 해야 하겠다. 작중 화자의 넋두리에 내가 앓고 있는 분노를 대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염세적인 한 마리의 늙은 짐승처럼?” 나쁜 것들! 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에 말이다. 굳이 관계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지하고 부도덕한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고자 함을 고작 오만과 고독이나 즐기려는 삶의 회피자로 몰아세우면서 절에나 들어가 사시지 왜! 하는 반응같은 것. 웃을 일이 없어 입을 앙다문 사람에게, 슬픔을 즐기고 있다고 말하는 꼴 아닌가. 상처입고, 막막하고, 망가지고, 짓밟혀 신음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반응이란 고작 이런 것일 게다. 정말이지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지 않은가?

 

육십 줄에 접어 든 소설가, 십여 년 전 눈앞에서 아내와 큰 딸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모습을 작은 딸 아이와 함께 절망적으로 지켜 본 남자, 그래서 그 고통의 환영이 온 몸에 새겨진 남자가 있다. 소설은 현실의 삶들에서 발생하는 소음으로부터 이렇게 생의 분절을 만들어 낸 사건 전후의 시간들을 오가면서 인생이란, 운명이란 것의 회한을 쏟아 놓는다.

그것은 차마, 혹은 미처 용서 할 수 없었고, 용서 받지 못했던 것들의 얘기이자, 어쩌면 삶을 구성하는 본질의 모습들일지도 모른다.

 

영화배우가 된 둘째 딸, ‘알리스’와의 끔찍할 정도의 반목, 그 근원에는 죽은 아내‘조아나’의 일기가 있다. 남자의 외도사실을 꼼꼼히 적어 놓은 일기, 알리스는 남자에게 ‘추잡한 인간’이라 길게 악을 써대며 집어 던진다. 남자는 이 우발적이고 일회적 외도의 사실을 아내에게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 그녀는 이미 죽었으니까. 이런 딸아이가 실종 되었다는 소식을 사위로부터 전해 듣게 되고, 노년의 남자는‘안 마르’라는 대학동창인 여자에게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 탐정 일을 의뢰한다. 아내를 잃고 난 후, 이년이 지나 결혼한 아내‘쥐디트’는 남자의 고통에 뛰어들지 않으며, 자신의 일로 바쁠 뿐이다. 더 이상 그는 딸에게도, 사위에게도, 아내에게도, 아무런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는 무능한 아버지이자 남편일 뿐이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동정도, 연민도 스며들어 있지 않다. 그저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며, 자신들의 고통과 욕망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탐정 일을 맡겼던 안 마르에게 살인죄로 형량을 채우고 출감하는 아들‘제레미’가 있고, 그 상처 받은 영혼을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 만큼 고통스러운 존재의 음울함을 발견한다. 노 작가와 마음의 손상으로 짓밟힌 젊은이와의 교우는 서로를 보면서 현실을 견뎌내는 위안이 된다. 청년의 트라우마가 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막연한 분노와 증오에는 역시 모자(母子)의 치유할 수 없는 불용(不容)이 있다.

 

소설에는 이처럼 부모와 자식의 얘기가 있고, 그 자식들에게 애를 먹는 부모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이런 운명에서 벗어난 부모는 드물다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다. 마약에 절어 살던 딸 내외의 거침없는, 무례한, 교활한 삶의 방식, 그러한 것까지 인정해야 했던 남자에게 딸의 실종은 지독히 잔혹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실종 사건이란 것이 단지 여배우로서 인기에 대한 병적 집착 때문에, 대중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벌인, 소설가 아버지를 제물로 삼은 딸 내외의 자작극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심경이란 것이 무엇인지 타인들이 알기나 할까?

 

이해 할 수 없고, 이해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싸여 혹여라도 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 사소한 말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남자에게 나는 동류의 연민을 느낀다.

한 때 남자의 소설을 읽고 독자로서의 열정을 보여 주었던 아내 쥐디트의 무심함이 남자의 입에서 “나쁜 년, 내가 지금 『전쟁과 평화』나 『길 위에서』 같은 작품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다니.”라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그래서 미행을 붙일 만큼, 피폐해진 남자의 불안을 어루만져주지 못하는 여자의 이기심에 또한 불용의 장막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로 인한 감정의 소비에 일말의 동정을 보낼 여지는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그만 움찔해질 것 같다.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반은 자신의 내면에, 나머지 반은 자신의 개를 향해”있다는 청년 제레미에 대한 조롱의 견해는 남자에게 또한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한다. 점점 용서하기가 힘들어진다. 완고한 늙은이처럼 변해가는 내 모습을 문득 느끼게 될 때면 그 나쁜 것들이 바로 나이기도 하다는 인식에 도리질을 하게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십년 만에 다시 소설을 쓰고, 그것으로 여전히 숨 쉴 수 있어 다행스럽다는 남자의 표현은 더더욱 가슴을 파고든다. 자식에 대한 관용과 용서는 부모로서 어쩌지 못하는 것일 게다. 갈수록 회의적이고 견유(犬儒)주의자처럼 세상과의 차단을 바라게 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궤도를 달리는 것이라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한 남자의 자기 관찰적 소회(所懷)인 이 소설은 이처럼 내겐 깊은 동료적 울림으로 태연히 읽지 못한 이야기가 되었다. 염세적인 늙은 짐승의 추악한 외침이라고 누군가 비난할지라도. 제레미가 자살하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길을 잘못 들어선 남자의 내면을 종식시키는 상징인것만 같아 괜스레 마음이 허둥대기까지 했다. 이렇게 나를 돌아보게 한 소설이 있었던가? 하고 자문하게 하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작(動作)을 통한 심리수사라는 독특한 전문성으로 첫 선을 보였던 여성 수사요원‘캐트린 댄스’의 활약에 심취케 했던 『잠자는 인형(The Sleeping Doll)』이 소개된 지 2년 남짓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마 목을 기다랗게 늘리고 국내 출간을 기다리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내심 오랜 기다림이 오히려 실망으로 돌아서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가지고 읽었다고 해야겠다. 혹여 작품의 시간적 반영으로 풍화되기라도 한다면 정말 맥 빠지는 것이기에 말이다.

 

전작(前作)은 컬트 범죄 집단의 교활한 연쇄살인범과 댄스와의 심리적 대결이란 소재를 중심으로 동작학의 기발한 진가를 보여주었다면 이번 작품은 블로그, 메신저, 이메일, 게임 등 가상공간으로서의 온라인의 폐해인 악의적, 감정적 폭력 등 사회 질병적 문제로 그 소재가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자신들과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집단 따돌림, 약자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의 행태 등 기만적인 오늘의 세태도 가세하여 사이버 폭력의 본질을 헤집는다. 단순히 액션과 서스펜스를 버무려 스릴러의 긴장감이나 복선 따위로 독자를 현혹시키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캐트린 댄스의 두 번째 시리즈인 이 작품이 유혹적인 하나의 이유는 여성 주인공이 표출하는 감성이 여느 남성 중심적 작품과는 그 맛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관점, 부모와의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의 묘사, 남성의 세계에서 마주하는 여성 고유의 감수성 등이 그것들이다. 한편, 육백 쪽을 넘어서는 분량이 읽기를 압박하지만 차 뒤 트렁크에 갇혀 어디론가 끌려가는 죽음에 직면한 소녀의 긴박한 상황으로 시작되는 장면을 접하면 압도적인 분량을 그만 잊어버리게 된다. 역시‘제프리 디버’의 스토리텔링의 마력을 벗어나기는 수월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도로변의 십자가’란 교통사고로 사망한 고인을 추모하는 사고 장소에 세워진 일종의 추모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 표기된 날자가 혐오스럽고 소름끼치게도 살인을 예고하는 범죄의 표식일 때에는 연민과 숙연함은 사라지고 공포로 뒤바뀐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트렁크에 갇힌 소녀의 발견이 도로변 십자가의 날자와 일치하는 것이고 사건은 단순 범죄 이상의 의미로 해석되게 된다. 그리곤 사회정의를 표방하는 <칠턴 리포트>라는 한 블로그에 사건 피해자와 관련한 교통사고의 당사자를 겨냥한 악의적 댓글들이 사건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킨다.

 

단지 가난하고 추레한 환경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동급생들로부터 무자비한 따돌림을 당하는 소년은 어떠한 증거도 없이 블로그의 한 포스트에서 익명의 무자비한 댓글들이 증폭되면서 도로변 십자가의 당사자인 범죄자로 확신되고, 급기야는 잔혹한 살인마가 되어버린다. 서로 다른 의견이 경쟁하면서 궁극에는 진실로 수렴한다는 낭만적인 인터넷 옹호자들도 있지만 현실은 마녀 사냥식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진실로 뒤바꾸어 무고한 희생자를 낳고 있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다.

 

여기에 소위 파워 블로거니 스타 블로거니 하면서 자신들이 쏟아낸 말들에 대해 책임이란 단어의 의미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소음의 병폐는 간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소설은 이렇게 재미없는 주제를 무겁게 다루는 그런 부류의 작품이 아니지만, 사건의 중요한 발단 또는 매개체가 된 블로그의 운영자를 통해서 정보의 자유, 발언(언론)의 자유와 공공적 책임, 사회공동체에 대한 책무의 균형에 대한 세간의 팽팽한 견해의 대립을 자연스럽게 수사의 갈등 속에 녹여내고 있다.

 

캐트린 댄스 등 수사기관은 소년의 잠적에 따라 가상세계의 진위를 알 수 없는 악의적 댓글이 가리키는 소년을 찾기위해 모든 수사력을 동원하지만 블로그의 운영자는 고객의 비밀보호라는 도덕적 책무를 세워 수사의 협조를 거부한다. 도로변 십자가는 거듭 발견되고 피해자와 피살자가 늘어나면서 블로그 운영자의 미온적 협조가 이루어지지만 소년의 자취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각되는 문제는 사이버 상에 노출된 무수한 익명자들이 흘려 놓은 정보의 악용, 그리고 이러한 익명자들이 키보드 뒤에 숨어 자신들의 분출하는 비상식과 분노를 이용하여 대중의 시선을 모으려는 탐욕, 그리고 이러한 바탕에서 가상의 공간에서야 비로소 힘을 갈구하는 익명자들이 순식간에 증폭시키는 악의의 글들이 발산하는 가학적 폭력성은 그 돌이 킬 수 없는 확산의 위력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심각하게 우려 할 정도라 할 것이다. 악의적 댓글을 올렸던 익명자들이 거듭 피살되고 있음에도 블로그 운영에 사회적 긍지까지 가지고 있는 칠턴이라는 자는 바로 이처럼 믿음과 집착을 혼동하고, 옳더라도 틀릴 수 있음을 지각 할 줄 모르는 전형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소설은 또 하나의 정치적 왜곡의 명제를 들려주는데, 영화, TV, 게임의 폭력성이 아이들을 폭력화 시킨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과연 시각적 폭력의 노출이 인간을 폭력화시키는 것일까? 다른 요인은 상관없다는 것인가? 인간을 폭력적으로 변하게 하는 것은 마음속에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대상, 원인으로부터이지 어찌 그것이 한낱 무체(無體)물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논리적으로 명쾌한 답변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증적으로, 경험적으로 영상물의 자극이 범죄의 근인이 아님을 ‘트레비스’라는 게임 매니아 소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부정한 거대기업의 개발사업과 권력의 야합, 갈수록 감정적 폭력의 강도가 심각해지는 온라인 댓글의 포악성, 그리고 정의의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치정사건까지 더해지면서 소설은 박진감 넘치는 속도로 이야기에 독자를 완벽하게 포섭한다.

 

이러한 추진력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몇 차례의 반전을 겪고 나면 이 모든 악의의 뿌리에 인간의 과시적 욕망이 안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살인자, 범죄자의 동기였음을 깨닫게 된다. 제프리 디버의 작품에 따라다니는 퀄리티 스릴러(quality thriller)의 정수라는 말을 이 작품에도 예외 없이 부여하게 된다.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점에 주력하다 캐트린 댄스의 활약을 소홀히 하게 되었지만 안락사의 용의자가 되어 소송에 휘말리는 엄마와 댄스의 갈등이나 상급 수사기관, 감찰기관의 일선 수사기관에 대한 위압적이고 기만적인 수사 방해도 볼만한 얘깃거리다. 아무튼 쏙 빠져들어 읽도록 하는 재미와 소재의 다양성이 주는 즐거움은 여느 작품의 추종도 불허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2-07-2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캐트린 댄스 정말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리뷰가 딱 눈에 띄네요, 반갑구요....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리아 2012-07-27 07:32   좋아요 0 | URL
네, 드디어 동작분석가 댄스가 올 여름 돌아왔네요. 재미, 구성, 스토리텔링 모두 더 강해져서 말이죠...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사로운 일상에 순수하게 참여할 때...

 

내 일상에 무심히 스쳐가는 것들, 혹은 의도된 만남이나 의지를 요구하는 사물들을 대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내 삶에 하나의 의제로 삼아보는 여유가 있었던가 하는 물음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매일 지나는 거리의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것들에 가해지는 시간의 풍화로 변화된 작은 다름은 없었는지. 아, 빈번하게 같은 엘리베이터의 공간에 있게 된 그와 그녀가 입었던 옷은? 그들의 표정을 보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것들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 그것들의 미세한 변화에 대해 나는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태가 이러하니 상상력이 극도로 메말라 붙고, 세상의 이해도 협소해지고 만다. 거리를 바삐 걷는 누군가의 움직임으로부터도, 미디어를 장식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사연에 대해서도, 아니 똑 같기만 하다고 여겨지는 내 행동의 작은 변화조차도 나는 눈치 채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 하루키라는 이 사람은 정말 하찮고 소소한 것들을 바라보고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느끼고, 그래서 자기를 비로소 말 할 수 있는 여유를 창조한다.

 

내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무엇인지? 상상의 여유, 그 어느 것도 하찮을 수 있음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무심함에 익숙해진 건조해진 감성이 아닐까? 그저 변화란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아니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했던, 그래서 그 변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했던 것들로 인해 내 감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기형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하루키의 지극히 사적인 감상의 나열인 이 책이 삶의 신념을 바꾸게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문득 ‘상상의 시간’을 내게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요일은 오지 않는 신문에 대해 왜 나는 하루키처럼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 왜 여행 중에 오디오 북을 들을 생각을 하지 못했지? 나는 언제부터 좋아했던 책 향(香) 느끼지 못했던가? 비닐정키인 하루키처럼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수집했던 진귀한 우표들의 수집 책은 지금 어떻게 되었지? 하는 등등의 실종된 지각들이 내 삶의 태도를 가볍게 두드린 것이다. 그래 이 책은 소박한 것들에 대한 애정, 늘 우리 곁에 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에 깃든 사연들에 대한 몽상이요, 여유이자, 산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뉴욕대의 예술교육자인‘에릭 부스’의 일상이란 재료에 대한 통찰이 떠오른다. “이미 존재

하는 재료를 바탕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즉 의미 있는 세계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제2의 존재방식을 찾는 것이라던 말이. 바로 하루키는 일상의 궤도를 맴도는 존재에게 새로운 감정, 생각, 새로운 세계관을 펼치듯, 상상력을 키우는 과정이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성취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에는 악마, 뒤에는 깊고 푸른 바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깊고 푸른 바다가 매혹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절망한 이가 바다에 뛰어드는 것 아니겠는가라는 상상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나는 누군가가 그저 진저리나는 삶을 피해 자살했다고만 여겼을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연민도 삶의 이해도 없는 것이다. 내가 잃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삶이 풍성한 예술처럼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내 고뇌이고 고통이지 않았을까하는 상념이 찾아든다.

 

이것은 하루키가 지적하듯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뭐 논리대로 되는 것이 있겠는가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 아닐까? 항상 예기치 않은 곳으로, 정말 어쩌다 생의 행로가 결정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의도한대로 되지 않았다고 낙심할 것도, 절망할 일도 아닐 것이다. 가려는 행로를 성실히 밟아나가다 보면 일상적 주변을 의미 있는 세계로 만드는 법을, 그래서 일상이 얼마나 매혹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얼마나 경이롭고 위대함이 가득한 세상인지를 깨우치게 되는 것일 게다.

 

채소들마다의 기분을 생각했던 하루키처럼, 아니 식물의 굴성(tropism)처럼 인간의 본능으로 존재하는 순수한 환희에 넘친 때 묻지 않은 감탄, ‘와!’하는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탄성이야말로 내면에서 무언가 일어났음을 의미 하고 무언가를 열고 무언가를 조절한 순수한 참여, 바로 예술, 공감의 행위를 자극하는 충동이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반응이 시작된다는 통찰일 것이다. 이 상상의 여유는 체험적 지혜가 되어 마음에 직접적인 체득의 이해를 번쩍하는 깨우침으로 스며들게 할지도 모른다.

 

주의력, 관찰력을 섬세한 도구로 활용하게 된다면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기까지 하는 풍성한 삶의 행위자가 될 것 만 같다. 타자(타인 그리고 사물들)에게 적극적으로 뛰어듦으로서 그것에 담긴 의미를 찾는 세상 탐구하기가 진행되며 이는 낯 선 세계를 알게 되는 기회를 낳는다. 그리곤 지극히 평범한 삶의 한 부분에서조차 삶의 중요한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로 세상 읽기에 나서면 상징적 의미로 가득 찬 세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무심히 지나친 것들의 의미를 생각하는 삶의 여유, 상상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내 삶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