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것들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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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소설이 마치 자신의 현실세계를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 같다면 그 느낌이 어떤 것일까? 나는 객관성을 거의 상실했다고 해야 하겠다. 작중 화자의 넋두리에 내가 앓고 있는 분노를 대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염세적인 한 마리의 늙은 짐승처럼?” 나쁜 것들! 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에 말이다. 굳이 관계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지하고 부도덕한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고자 함을 고작 오만과 고독이나 즐기려는 삶의 회피자로 몰아세우면서 절에나 들어가 사시지 왜! 하는 반응같은 것. 웃을 일이 없어 입을 앙다문 사람에게, 슬픔을 즐기고 있다고 말하는 꼴 아닌가. 상처입고, 막막하고, 망가지고, 짓밟혀 신음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반응이란 고작 이런 것일 게다. 정말이지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지 않은가?

 

육십 줄에 접어 든 소설가, 십여 년 전 눈앞에서 아내와 큰 딸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모습을 작은 딸 아이와 함께 절망적으로 지켜 본 남자, 그래서 그 고통의 환영이 온 몸에 새겨진 남자가 있다. 소설은 현실의 삶들에서 발생하는 소음으로부터 이렇게 생의 분절을 만들어 낸 사건 전후의 시간들을 오가면서 인생이란, 운명이란 것의 회한을 쏟아 놓는다.

그것은 차마, 혹은 미처 용서 할 수 없었고, 용서 받지 못했던 것들의 얘기이자, 어쩌면 삶을 구성하는 본질의 모습들일지도 모른다.

 

영화배우가 된 둘째 딸, ‘알리스’와의 끔찍할 정도의 반목, 그 근원에는 죽은 아내‘조아나’의 일기가 있다. 남자의 외도사실을 꼼꼼히 적어 놓은 일기, 알리스는 남자에게 ‘추잡한 인간’이라 길게 악을 써대며 집어 던진다. 남자는 이 우발적이고 일회적 외도의 사실을 아내에게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 그녀는 이미 죽었으니까. 이런 딸아이가 실종 되었다는 소식을 사위로부터 전해 듣게 되고, 노년의 남자는‘안 마르’라는 대학동창인 여자에게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 탐정 일을 의뢰한다. 아내를 잃고 난 후, 이년이 지나 결혼한 아내‘쥐디트’는 남자의 고통에 뛰어들지 않으며, 자신의 일로 바쁠 뿐이다. 더 이상 그는 딸에게도, 사위에게도, 아내에게도, 아무런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는 무능한 아버지이자 남편일 뿐이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동정도, 연민도 스며들어 있지 않다. 그저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며, 자신들의 고통과 욕망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탐정 일을 맡겼던 안 마르에게 살인죄로 형량을 채우고 출감하는 아들‘제레미’가 있고, 그 상처 받은 영혼을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 만큼 고통스러운 존재의 음울함을 발견한다. 노 작가와 마음의 손상으로 짓밟힌 젊은이와의 교우는 서로를 보면서 현실을 견뎌내는 위안이 된다. 청년의 트라우마가 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막연한 분노와 증오에는 역시 모자(母子)의 치유할 수 없는 불용(不容)이 있다.

 

소설에는 이처럼 부모와 자식의 얘기가 있고, 그 자식들에게 애를 먹는 부모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이런 운명에서 벗어난 부모는 드물다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다. 마약에 절어 살던 딸 내외의 거침없는, 무례한, 교활한 삶의 방식, 그러한 것까지 인정해야 했던 남자에게 딸의 실종은 지독히 잔혹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실종 사건이란 것이 단지 여배우로서 인기에 대한 병적 집착 때문에, 대중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벌인, 소설가 아버지를 제물로 삼은 딸 내외의 자작극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심경이란 것이 무엇인지 타인들이 알기나 할까?

 

이해 할 수 없고, 이해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싸여 혹여라도 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 사소한 말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남자에게 나는 동류의 연민을 느낀다.

한 때 남자의 소설을 읽고 독자로서의 열정을 보여 주었던 아내 쥐디트의 무심함이 남자의 입에서 “나쁜 년, 내가 지금 『전쟁과 평화』나 『길 위에서』 같은 작품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다니.”라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그래서 미행을 붙일 만큼, 피폐해진 남자의 불안을 어루만져주지 못하는 여자의 이기심에 또한 불용의 장막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로 인한 감정의 소비에 일말의 동정을 보낼 여지는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그만 움찔해질 것 같다.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반은 자신의 내면에, 나머지 반은 자신의 개를 향해”있다는 청년 제레미에 대한 조롱의 견해는 남자에게 또한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한다. 점점 용서하기가 힘들어진다. 완고한 늙은이처럼 변해가는 내 모습을 문득 느끼게 될 때면 그 나쁜 것들이 바로 나이기도 하다는 인식에 도리질을 하게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십년 만에 다시 소설을 쓰고, 그것으로 여전히 숨 쉴 수 있어 다행스럽다는 남자의 표현은 더더욱 가슴을 파고든다. 자식에 대한 관용과 용서는 부모로서 어쩌지 못하는 것일 게다. 갈수록 회의적이고 견유(犬儒)주의자처럼 세상과의 차단을 바라게 되는 것이 과연 잘못된 궤도를 달리는 것이라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한 남자의 자기 관찰적 소회(所懷)인 이 소설은 이처럼 내겐 깊은 동료적 울림으로 태연히 읽지 못한 이야기가 되었다. 염세적인 늙은 짐승의 추악한 외침이라고 누군가 비난할지라도. 제레미가 자살하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길을 잘못 들어선 남자의 내면을 종식시키는 상징인것만 같아 괜스레 마음이 허둥대기까지 했다. 이렇게 나를 돌아보게 한 소설이 있었던가? 하고 자문하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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