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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십자가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평점 :
동작(動作)을 통한 심리수사라는 독특한 전문성으로 첫 선을 보였던 여성 수사요원‘캐트린 댄스’의 활약에 심취케 했던 『잠자는 인형(The Sleeping Doll)』이 소개된 지 2년 남짓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마 목을 기다랗게 늘리고 국내 출간을 기다리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내심 오랜 기다림이 오히려 실망으로 돌아서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가지고 읽었다고 해야겠다. 혹여 작품의 시간적 반영으로 풍화되기라도 한다면 정말 맥 빠지는 것이기에 말이다.
전작(前作)은 컬트 범죄 집단의 교활한 연쇄살인범과 댄스와의 심리적 대결이란 소재를 중심으로 동작학의 기발한 진가를 보여주었다면 이번 작품은 블로그, 메신저, 이메일, 게임 등 가상공간으로서의 온라인의 폐해인 악의적, 감정적 폭력 등 사회 질병적 문제로 그 소재가 진화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자신들과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집단 따돌림, 약자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의 행태 등 기만적인 오늘의 세태도 가세하여 사이버 폭력의 본질을 헤집는다. 단순히 액션과 서스펜스를 버무려 스릴러의 긴장감이나 복선 따위로 독자를 현혹시키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캐트린 댄스의 두 번째 시리즈인 이 작품이 유혹적인 하나의 이유는 여성 주인공이 표출하는 감성이 여느 남성 중심적 작품과는 그 맛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관점, 부모와의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의 묘사, 남성의 세계에서 마주하는 여성 고유의 감수성 등이 그것들이다. 한편, 육백 쪽을 넘어서는 분량이 읽기를 압박하지만 차 뒤 트렁크에 갇혀 어디론가 끌려가는 죽음에 직면한 소녀의 긴박한 상황으로 시작되는 장면을 접하면 압도적인 분량을 그만 잊어버리게 된다. 역시‘제프리 디버’의 스토리텔링의 마력을 벗어나기는 수월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도로변의 십자가’란 교통사고로 사망한 고인을 추모하는 사고 장소에 세워진 일종의 추모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 표기된 날자가 혐오스럽고 소름끼치게도 살인을 예고하는 범죄의 표식일 때에는 연민과 숙연함은 사라지고 공포로 뒤바뀐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트렁크에 갇힌 소녀의 발견이 도로변 십자가의 날자와 일치하는 것이고 사건은 단순 범죄 이상의 의미로 해석되게 된다. 그리곤 사회정의를 표방하는 <칠턴 리포트>라는 한 블로그에 사건 피해자와 관련한 교통사고의 당사자를 겨냥한 악의적 댓글들이 사건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킨다.
단지 가난하고 추레한 환경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동급생들로부터 무자비한 따돌림을 당하는 소년은 어떠한 증거도 없이 블로그의 한 포스트에서 익명의 무자비한 댓글들이 증폭되면서 도로변 십자가의 당사자인 범죄자로 확신되고, 급기야는 잔혹한 살인마가 되어버린다. 서로 다른 의견이 경쟁하면서 궁극에는 진실로 수렴한다는 낭만적인 인터넷 옹호자들도 있지만 현실은 마녀 사냥식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진실로 뒤바꾸어 무고한 희생자를 낳고 있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다.
여기에 소위 파워 블로거니 스타 블로거니 하면서 자신들이 쏟아낸 말들에 대해 책임이란 단어의 의미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소음의 병폐는 간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소설은 이렇게 재미없는 주제를 무겁게 다루는 그런 부류의 작품이 아니지만, 사건의 중요한 발단 또는 매개체가 된 블로그의 운영자를 통해서 정보의 자유, 발언(언론)의 자유와 공공적 책임, 사회공동체에 대한 책무의 균형에 대한 세간의 팽팽한 견해의 대립을 자연스럽게 수사의 갈등 속에 녹여내고 있다.
캐트린 댄스 등 수사기관은 소년의 잠적에 따라 가상세계의 진위를 알 수 없는 악의적 댓글이 가리키는 소년을 찾기위해 모든 수사력을 동원하지만 블로그의 운영자는 고객의 비밀보호라는 도덕적 책무를 세워 수사의 협조를 거부한다. 도로변 십자가는 거듭 발견되고 피해자와 피살자가 늘어나면서 블로그 운영자의 미온적 협조가 이루어지지만 소년의 자취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각되는 문제는 사이버 상에 노출된 무수한 익명자들이 흘려 놓은 정보의 악용, 그리고 이러한 익명자들이 키보드 뒤에 숨어 자신들의 분출하는 비상식과 분노를 이용하여 대중의 시선을 모으려는 탐욕, 그리고 이러한 바탕에서 가상의 공간에서야 비로소 힘을 갈구하는 익명자들이 순식간에 증폭시키는 악의의 글들이 발산하는 가학적 폭력성은 그 돌이 킬 수 없는 확산의 위력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심각하게 우려 할 정도라 할 것이다. 악의적 댓글을 올렸던 익명자들이 거듭 피살되고 있음에도 블로그 운영에 사회적 긍지까지 가지고 있는 칠턴이라는 자는 바로 이처럼 믿음과 집착을 혼동하고, 옳더라도 틀릴 수 있음을 지각 할 줄 모르는 전형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소설은 또 하나의 정치적 왜곡의 명제를 들려주는데, 영화, TV, 게임의 폭력성이 아이들을 폭력화 시킨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과연 시각적 폭력의 노출이 인간을 폭력화시키는 것일까? 다른 요인은 상관없다는 것인가? 인간을 폭력적으로 변하게 하는 것은 마음속에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대상, 원인으로부터이지 어찌 그것이 한낱 무체(無體)물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논리적으로 명쾌한 답변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증적으로, 경험적으로 영상물의 자극이 범죄의 근인이 아님을 ‘트레비스’라는 게임 매니아 소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부정한 거대기업의 개발사업과 권력의 야합, 갈수록 감정적 폭력의 강도가 심각해지는 온라인 댓글의 포악성, 그리고 정의의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치정사건까지 더해지면서 소설은 박진감 넘치는 속도로 이야기에 독자를 완벽하게 포섭한다.
이러한 추진력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몇 차례의 반전을 겪고 나면 이 모든 악의의 뿌리에 인간의 과시적 욕망이 안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살인자, 범죄자의 동기였음을 깨닫게 된다. 제프리 디버의 작품에 따라다니는 퀄리티 스릴러(quality thriller)의 정수라는 말을 이 작품에도 예외 없이 부여하게 된다.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점에 주력하다 캐트린 댄스의 활약을 소홀히 하게 되었지만 안락사의 용의자가 되어 소송에 휘말리는 엄마와 댄스의 갈등이나 상급 수사기관, 감찰기관의 일선 수사기관에 대한 위압적이고 기만적인 수사 방해도 볼만한 얘깃거리다. 아무튼 쏙 빠져들어 읽도록 하는 재미와 소재의 다양성이 주는 즐거움은 여느 작품의 추종도 불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