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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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일상에 순수하게 참여할 때...

 

내 일상에 무심히 스쳐가는 것들, 혹은 의도된 만남이나 의지를 요구하는 사물들을 대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내 삶에 하나의 의제로 삼아보는 여유가 있었던가 하는 물음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매일 지나는 거리의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것들에 가해지는 시간의 풍화로 변화된 작은 다름은 없었는지. 아, 빈번하게 같은 엘리베이터의 공간에 있게 된 그와 그녀가 입었던 옷은? 그들의 표정을 보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것들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 그것들의 미세한 변화에 대해 나는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태가 이러하니 상상력이 극도로 메말라 붙고, 세상의 이해도 협소해지고 만다. 거리를 바삐 걷는 누군가의 움직임으로부터도, 미디어를 장식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사연에 대해서도, 아니 똑 같기만 하다고 여겨지는 내 행동의 작은 변화조차도 나는 눈치 채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 하루키라는 이 사람은 정말 하찮고 소소한 것들을 바라보고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느끼고, 그래서 자기를 비로소 말 할 수 있는 여유를 창조한다.

 

내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무엇인지? 상상의 여유, 그 어느 것도 하찮을 수 있음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무심함에 익숙해진 건조해진 감성이 아닐까? 그저 변화란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아니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했던, 그래서 그 변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했던 것들로 인해 내 감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기형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하루키의 지극히 사적인 감상의 나열인 이 책이 삶의 신념을 바꾸게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문득 ‘상상의 시간’을 내게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요일은 오지 않는 신문에 대해 왜 나는 하루키처럼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 왜 여행 중에 오디오 북을 들을 생각을 하지 못했지? 나는 언제부터 좋아했던 책 향(香) 느끼지 못했던가? 비닐정키인 하루키처럼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수집했던 진귀한 우표들의 수집 책은 지금 어떻게 되었지? 하는 등등의 실종된 지각들이 내 삶의 태도를 가볍게 두드린 것이다. 그래 이 책은 소박한 것들에 대한 애정, 늘 우리 곁에 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에 깃든 사연들에 대한 몽상이요, 여유이자, 산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뉴욕대의 예술교육자인‘에릭 부스’의 일상이란 재료에 대한 통찰이 떠오른다. “이미 존재

하는 재료를 바탕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즉 의미 있는 세계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제2의 존재방식을 찾는 것이라던 말이. 바로 하루키는 일상의 궤도를 맴도는 존재에게 새로운 감정, 생각, 새로운 세계관을 펼치듯, 상상력을 키우는 과정이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성취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에는 악마, 뒤에는 깊고 푸른 바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깊고 푸른 바다가 매혹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절망한 이가 바다에 뛰어드는 것 아니겠는가라는 상상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나는 누군가가 그저 진저리나는 삶을 피해 자살했다고만 여겼을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연민도 삶의 이해도 없는 것이다. 내가 잃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삶이 풍성한 예술처럼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내 고뇌이고 고통이지 않았을까하는 상념이 찾아든다.

 

이것은 하루키가 지적하듯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뭐 논리대로 되는 것이 있겠는가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 아닐까? 항상 예기치 않은 곳으로, 정말 어쩌다 생의 행로가 결정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의도한대로 되지 않았다고 낙심할 것도, 절망할 일도 아닐 것이다. 가려는 행로를 성실히 밟아나가다 보면 일상적 주변을 의미 있는 세계로 만드는 법을, 그래서 일상이 얼마나 매혹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얼마나 경이롭고 위대함이 가득한 세상인지를 깨우치게 되는 것일 게다.

 

채소들마다의 기분을 생각했던 하루키처럼, 아니 식물의 굴성(tropism)처럼 인간의 본능으로 존재하는 순수한 환희에 넘친 때 묻지 않은 감탄, ‘와!’하는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탄성이야말로 내면에서 무언가 일어났음을 의미 하고 무언가를 열고 무언가를 조절한 순수한 참여, 바로 예술, 공감의 행위를 자극하는 충동이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반응이 시작된다는 통찰일 것이다. 이 상상의 여유는 체험적 지혜가 되어 마음에 직접적인 체득의 이해를 번쩍하는 깨우침으로 스며들게 할지도 모른다.

 

주의력, 관찰력을 섬세한 도구로 활용하게 된다면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기까지 하는 풍성한 삶의 행위자가 될 것 만 같다. 타자(타인 그리고 사물들)에게 적극적으로 뛰어듦으로서 그것에 담긴 의미를 찾는 세상 탐구하기가 진행되며 이는 낯 선 세계를 알게 되는 기회를 낳는다. 그리곤 지극히 평범한 삶의 한 부분에서조차 삶의 중요한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로 세상 읽기에 나서면 상징적 의미로 가득 찬 세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무심히 지나친 것들의 의미를 생각하는 삶의 여유, 상상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내 삶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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