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엔트로피라는 단어가 있다. 무질서라고도 불리는데, 백과사전의 설명을 빌리자면 자연 물질이 변형되어 다시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현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열역학적으로 또 통계학적으로도 의미를 갖는 이 <엔트로피>는 광범위하면서도 밖으로 뻗어나가는 무질서함을 연상시키는데, 제레미 리프킨은 이 개념을 통해 사회 조직과 경제적 현상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와 해설 가운데서, 가장 쉽게 이해되는 설명을 - 하나 - 고르자면 네이버 캐스트 <엔트로피는 증가한다>에 소개된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인류의 역사가 진보함과 동시에 우리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고 있으며, 질서를 원하는 만큼 무질서함도 증가한다는 사실은 현대 인류 문명이 가지고 있는 생태적, 정신적, 경제적 문제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제임스 브래드필드 무디가 지은 <제 6의 물결>에서는 자원 한정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 적은 자원으로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친환경적으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는데, 이는 엔트로피의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라고 보면 되겠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이때. 그 중심에는 - 바로 - <엔트로피>라는 단어가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은 미국의 소설가 <토머스 핀천>의 작품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자 문학적 배경이기도 하다.
2. 이번에 창비에서 출간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라는 소설집은 토머스 핀천의 초기 단편소설들을 모은 책이다. <이슬비>, <로우랜드>, <엔트로피>, <언더 더 로즈>, <은밀한 통합>. 이렇게 다섯편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복잡하면서도 깊은 맛을 풍긴다는 점이다. 무거운 느낌을 주는 책표지의 색상과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독특한 질감의 표지 때문일수도 있지만, 특유의 문체와 특별한 소재들이 그 느낌을 더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도 엔트로피와 열역학, 폐쇄회로와 헤비사이드층과 같은 물리학 용어들의 - 어색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이 - 자연스런 등장은 짧은 단편을 가볍게 느껴지지 않게 했다.
3. 각 단편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점들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건조하고 삭막한 느낌의 용어들로 포장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면서 그 느낌을 더 깊게 한다. 먼저, 첫 단편인 <이슬비>는 군대라는 공간속에서 정체된 "러바인"의 모습을 단조롭게 표현하고 있는데, 다양함을 잃고, 관계를 잃은 채, 의지마저 사라져버린 한 사람의 무기력함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61페이지에 소개된 ".........전혀 그렇지 않아. 내 말은 폐쇄회로 같다는 거야. 모든 사람의 주파수는 다 똑같아. 그래서 잠시 뒤 나머지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잊게 되고 이것만이 중요하고 실재하는 유일한 주파수라고 믿기 시작해. 반면에 바깥에서는 대지의 위아래로 기가 막힌 색깔과 엑스선, 자외선들이 펼쳐지고 있어...." 라는 문구에서는 단절되어버린 사람과 그렇지 않은 바깥을 폐쇄회로와 스펙트럼이라는 단어를 통해 대비시키고 있다. <로우랜드>와 <언더 더 로즈> 역시 결코 가볍지 않은,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소재를 통해서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데,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을 통해 무언가 고갈되어 가는 느낌을 - 강하게 - 전달하고 있다. 다른 세 작품보다 더 쉽게 읽혔지만, 느낌만은 그렇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엔트로피>는 말 그대로 무질서함을 나타내는 소재들로 가득찬 단편인데, 이 개념을 통해 단절과 문명의 파국, 현대 문명의 종말과 같은 의미를 독자들이 느낄수 있게 도와준다. 119페이지의 ".....그는 엔트로피 혹은 닫힌 씨스템을 향한 무질서의 척도에서 그가 사는 세계의 어떤 현상들에 적용할 수 있는 비유를 발견했다. 예컨대 그는 어린 세대들이 그의 세대가 월스트리트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은 분노를 가지고 매디슨 가를 상대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미국의 '소비지상주의'안에서 그는 가장 낮은 확률에서 가장 높은 확률로, 차별화에서 균일화로, 질서 잡힌 개성에서 일종의 무질서로 변하는 유사한 경향을 발견했다. 요약하면 그는 기브스의 예측을 사회적인 용어로 바꿔서, 인간의 생각이 열에너지처럼 더이상 이동하지 않는 일종의 열역학적 죽음이 그의 문화에 나타나리라고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런 일이 초래되는 이유는 생각의 각지점들이 궁극적으로 동일한 양의 에너지를 갖게 되고, 그리하여 지적인 움직임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라는 부분은 이런 엔트로피를 감각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은밀한 통합>은 <허클베리 핀의 모헙>을 연상케했는데, 과학적이면서도 현대 문명에 비판적인 시선들이 인상적이었던 소설이었다. 또 그 안에 표현된 인종차별 문제와 아이들의 모험은 이와 대비된 요소들이었고.
복잡하고 어렵다는 느낌을 주는 문체와 소재들이었지만,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우리들 모두가 느끼는 바로 그러한 문제들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4. 모두가 전문가들이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진 못했다. 정치인들도, 행정가들도, 해양경찰도, 전문구조업체도 모두다 뛰어난 사람들이었지만 - 정말 이상하게도 - 사람들을 구하진 못했다. 정보 기술이 발달했고, 효율성을 위해 전문화된 조직 구조로 나누어 졌으며, 대통령, 도지사, 군수, 경찰청장, 장관, 총리, 선장과 항해사 등 사람들을 이끌어갈 수많은 리더들이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 도움도 되진 않았다. 더 나아졌다고 생각했던 시스템이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 이면에는 수많은 무질서함이 가득차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핀천은 서문의 마지막에서 말한다. 젊은 친구들에게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결국 변화하리라는 것, 완성된 인물의 스틸사진이 아니라 움직이는 영화, 움직이는 영혼이라는 것. 엔트로피의 무질서함이 정답이 아니라, 엔트로피의 역동성을 삶에 입히라는 것. 엔트로피의 무질서함을 바라보라는게 아니라, 그것에 대응하는 방법에 고민해보라고 말하는 것이라 믿고 싶다.
P.S.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서문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수가 실수로 끝나는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 또 다른 실수를 하지 말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램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런 점들은 초보적 수준의 소설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문제점과 글을 쓴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작가들이 피했으면 하는 사례들에 대한 주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