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후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시미즈 켄 지음, 박소영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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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문구다.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윤회나 구원이기 이전에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먼저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살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막연할 따름이다. 건강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강 건너 불구경보다 더 무심하게 바라볼 대상인 탓이다.

 

  그러나 '암 선고'를 받은 이들에겐 다를 것이다. 자신에게 남은 삶이 고작 1달이나 3달, 길어야 반 년이나 고작 일 년 남짓하다는 의사들의 소견은 환자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삶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 이들은 하루, 아니 1분 1초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환자들의 태도는 어떨까? 저자는 일본에 '정신종양학' 전문의로 지내면서 수많은 암 환자들과 상담을 한 결과, 놀라운 결론을 접할 수 있었단다. 죽음의 문턱에 선 환자들에게 환한 웃음과 희망찬 삶을 발견하였다면서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분명 삶은 무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무미건조하기 십상인데, 죽음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남은 삶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 암 환자들의 삶이 그토록 밝고 환할 수 있단 말인가?

 

  결론은 '후회없는 삶'으로 남은 생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환자들의 표정과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단다. 남의 눈치만 보는 삶이나 남의 위한 삶 따위는 걷어 내버리고 오직 '자기를 위한 삶'으로 사는 1분 1초가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비록 건강을 잃어버려서 고통에 겨운 나날이 더 많을지라도 순간순간 찾아오는 '고통없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고 말이다.

 

  욕심을 부려 본다면, 사형선고를 받지 않은 건강한 이들이 바로 이런 깨달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어떨까? 혹시 막연하다고 느껴진다면 <1년 후,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평범한 이들의 일상이 어떻게 바뀌게 될까? 물론 쉽지 않은 상상일 것이다. 절실함과 절박함이 없는 삶에게는 너무나도 심오한 깨달음인 탓이다.

 

  그래도 애써 욕심을 부려보자. 아니 적어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암 환자들에게 응원이라도 보내 보자. 나의 삶은 그들에 비해 '영원'에 가깝다는 염치를 배우는 순간, 분명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 뿐인 목숨을 버리는 순간, 다시 말해, 죽을 각오로 '하는 일'은 무서운 힘을 보여주곤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이 임박한 이들에게는 뒤를 되돌아볼 여유가 없어진다. 다른 말로 '남의 눈치 따위'는 중요해지지 않게 된다. 온전히 '나를 바라보게 되는 순간'부터가 진짜 자신의 삶이 시작하는 셈이다.

 

  평범한 이들이 투정부리는 오늘은 바로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는 문구가 새삼 떠오른다. 딴에는 너무 비장하다는 생각에 그닥 와닿지 않는 문구이기도 했지만, 하루하루가 심심해 죽을 지경인 이들에게는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릴 법하다는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하루를 살더라도 멋지게 살고 싶은 이들에겐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지금의 삶이 너무나도 절박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지금 행복에 겨운 이들이라면 너무 뻔한 소리라는 느낌일테고 말이다.

 

  아쉬운 것은 '평범한 삶의 나날들'이 행복이라는 마무리였다.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얻은 교훈을 그리 '평범한 결론'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차라리 채찍으로 따끔하게 깨우쳤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고 있는데, "투정을 부리는 너의 삶이 행복한 거란다"라는 말이 씨알이라도 먹힐까? 차라리 암으로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또래 어린이가 고통에 겨워하는 장면이라도 보여주는 것이 더 시원한(?) 깨우침이 아닐까? 너무나 폭력적인 훈육이라는 비판이 앞선다면...나이를 조금 더 들게 하여, 스무 살 청년인데도 무료한 나날을 보내면서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있다면..이라고 가정하면 어떨까? 여전히 '폭력적인 훈육'일까? 이 나이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꼰대라는 비판을 받을까? 그렇다면 나름대로 살만큼 산 '40대 중년'이라면 어떨까? 그 즈음에는 바람직한 훈육(?)일까나?

 

  바로 이렇게 '선택적인 깨달음'이라는 점이 아쉽다는 말이다. 가슴 깊은 울림을 주는 깨달음이라면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큰 울림을 주어야 할 텐데 말이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소재가 비교육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나이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메멘토 모리'라는 문구가 주는 깊은 울림을 느끼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하얀 바탕에 검은 점 하나가 더욱 눈에 띄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순간, 검은 바탕으로 물들게 되었을 때 '하얀 점'을 찍을 용기가 필요해지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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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 한빛비즈 교양툰 3
갈로아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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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공룡에 흠뻑 빠져들게 되는 걸까? 무엇보다 큰 덩치를 자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덩치가 큰 동물들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을 것을 보면 '절대적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난 조금 다른 이유를 꼽고 싶다. 내가 공룡에 큰 관심을 갖는 까닭은 바로 '어제의 공룡'과 '오늘의 공룡', 그리고 '내일의 공룡'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좋아한다. 정말이지 달라도 너무 달라지기 때문에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다.

 

  공룡이 이렇게 시시각각 달라지는 까닭은 다름 아닌 '화석을 통한 연구'에 '연구자의 상상력'이 덧붙여져서 '학계의 공인'을 받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적인 가설'을 증명하는 방식인 탓에 허무맹랑한 상상력 따위의 허섭스레기 가설은 발붙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어릴 적의 공룡의 모습을 상상한 것과 마흔이 넘어선 지금의 복원된 공룡의 상상도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불과 2~30년이 지났을 뿐인데, 공룡에 대한 연구가 이토록 깊고 넓어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오늘날의 새'가 공룡의 후손이라는 것과 공룡은 파충류와 달리 '롱다리'라는 것, 그리고 공룡에게도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었을 거라는 것 등이다.

 

  나 어릴 적만 해도 '진화의 계통도'에서 [어류-양서류-파충류-조류-포유류]의 순서로 진화가 이루어졌으며, 진화가 진행될수록 고등해진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 가운데 '공룡'은 파충류의 단계에 해당된다고 확정지었기 때문에, 공룡은 '새대가리'보다 못한 저능한 거대동물이었을 거라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커다란 덩치를 자랑했기 때문에 '뇌용량'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오늘날에는 '공룡'은 파충류도 아니고 조류도 아닌 독자적인 생태적 지위를 가졌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다. 거기다 공룡은 파충류와 달리 '따뜻한 피'를 지닌 온혈동물이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다. 요즘에는 온혈이나 냉혈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항온'과 '변온'이라고 표현하므로, 공룡은 '항온성 동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오늘날의 새가 '항온 동물'이기에 새의 조상인 공룡이 '항온 동물'이라는 것이 얼추 보더라도 맞을 것이다. 이는 공룡이 육지에서만 번성하고 바다에서는 살지 않았다는 점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커다란 덩치로 바다에서 적응하려면 엄청 높은 체온을 유지해야만 했을 것인데, 공룡이 번성하던 '쥐라기 시대'는 지구의 기온이 지금보다 더 높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체온이 더 높았다면 소행성이 떨어지기도 전에 고혈압으로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룡이 번성한 것은 확실한 사실이므로 그렇게 높은 체온이 아니어도 살 수 있는 쪽으로 진화했을 거라는 상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한편, 공룡은 커다란 덩치 때문에 느릿느릿 걷거나 기어갔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화석'에서 보여주는 증거들은 두 다리 또는 네 다리로 겅중겅중 잘 걸었으며, 커다란 꼬리나 무거운 배를 질질 끌지 않고 당당하게 걸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그런 탓에 과거의 공룡화석 복원은 하나같이 '꼬리로 무거운 체중을 떠받치는 자세'이거나 무거운 체중을 버티기 위해서 '수중생활'을 했을 거라고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지만, 공룡은 물속에서 살지 않았다. 간혹 <공룡대백과>에서 공룡이라고 소개하는 물속 생물체들은 물고기의 모습을 닮은 '어장룡'이나 목이 긴 '수장룡'이라고 불리는 파충류들이다. 분명히 공룡과는 사뭇 다른 종인 셈이다.

 

  그렇다면 '공룡에 대한 학계의 보고'는 왜 이토록 빠르게 달라지는 것일까? 그건 바로 '공룡 연구'의 핵심이 화석인 탓이다. 과거의 지층에서 발견되는 화석이 오늘날의 생명체와는 사뭇 다른 덩치를 자랑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의 관심도는 매우 높지만 연구할 수 있는 재료는 고작해야 '돌이 되어 버린' 화석 뿐인 셈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오로지 연구자의 상상력에만 의존해서 주관적인 결과물을 내놓곤 했지만, 오늘날에는 온갖 첨단과학장비 덕분에 공룡의 모습을 좀더 '객관적'인 결과물을 내놓으며 과학적인 복원작업을 하기 때문에 좀더 수긍할 수밖에 없는 공룡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복원된 오늘날의 공룡의 모습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바로 '깃털 달린 공룡'이다. 이는 오늘날의 '새의 모습'을 닮았기에 더욱 흥미를 끈다. 더구나 잠들다 화석이 된 듯한 공룡의 모습은 오늘날의 새가 잠든 모습을 영락없이 빼다박은 듯하였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조새'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참고로 시조새는 오늘날의 새와 '공통 조상'을 가졌을 뿐, 오늘날의 새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두면 좋다. 예컨대, 인류의 조상이 침팬지가 아니듯이 말이다.

 

  이처럼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은 과학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마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것처럼 증거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매우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녔다. 따라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표현도 매우 과학스럽다. 어찌 이런 과학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또한 '공룡 연구'처럼 매우 빠른 속도로 패러다임이 뒤바뀌는 공부는 정말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또 달라질 공룡을 기대하는 즐거움으로 이 책을 만나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일 것이다. 물론 공룡이 좋아서 읽는 건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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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쫌 아는 10대 - 우주론 카페 빅뱅에 온 걸 환영합니다 과학 쫌 아는 십대 4
이지유 지음 / 풀빛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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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학문에 그런 면이 있지만 '천문학'은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왜냐면 '연구대상'이 거의 대부분 '가볼 수 없는 곳'이면서, 동시에 '바라볼 수만 있는 것'인 탓이다. 그것도 다양한 시선이 아닌 '오직 한 방향'으로만 바라보는 편향된 연구를 하면서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야 겨우 알아낼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과학'이기 때문에 상상에 그쳐서는 안 된다. 관찰된 결과를 토대로 세운 '가설'을 수학적인 방법으로 정확하게 증명하여야 인정받는 학문이기도 하다. 그런 탓에 '천문학'에는 유독 천재적인 면과 어린아이의 순수한 면을 동시에 가진 과학자들이 많다. 물론, 대표적인 천문학자는 '칼 세이건'이다.

 

  하지만 이 책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는 결이 다른 '우주의 탄생과 신비'를 다룬 '빅뱅 이론'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우리에게 '별똥별 아줌마'로 기억되는 이지유 작가의 책이기에 어린이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이긴 하지만, 책 내용은 '일반독자'에게도 조금은 어려운 내용이 가득하다. 특히나 '천문학'이 생소한 독자라면 더욱 그럴 것인데, 그건 '천문학'이 유독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아직 '인류가 알고 있는 우주'가 고작 4%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천재적인 천문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우주의 비밀을 전체의 4%를 알아냈고, 나머지 96%는 앞으로 밝혀내야 할 연구과제인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는 아직도 '기술적'으로 지구밖을 나가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그동안 쏘아올린 우주선과 탐사선, 그리고 인공위성이 '우주쓰레기'가 되어 골치를 썪이고 있을지경인데도 고작 위성인 '달'에 딱 한 번 착륙해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태양계 내에서 지구에 가장 가까운 행성인 금성은 너무 뜨거워서 갈 엄두도 못내고 있고, 그 다음 화성은 아무리 빠른 우주선을 보내도 가는데만 몇 달, 오는데는 몇 년이 걸린 탓에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탐사'를 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이니 태양계를 품고 있는 '우리은하'는 물론이거니와, '다른은하'를 가볼 생각은 꿈에서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물론 미래라고 해서 그닥 달라질 것도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 인류가 '우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까닭은 '우주의 신비'를 알아내는 일이 '인류의 미래'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관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분명해지고 깊어지고 있는 까닭에, 이제는 없던 관심도 가져야만 한다. 단순히 '제2의 지구'를 찾으려는 노력이나, '외계지적생명체'를 찾는 일 뿐 아니라, 지구의 미래 경제분야에 '우주관련상품'이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헬륨-3'라는 자원이 달에 많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세계 각국은 이런 '우주자원'에 속속 관심을 나타내면서 노골적인 과학기술력을 자랑으로 삼기에 바쁘다. 이렇게 미래 우주자원을 선점한 나라가 '신대륙'을 발견하여 엄청난 국력신장을 이끌어냈던 '대항해시대'처럼 미래에는 '대우주시대'를 열 것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한민국도 바로 그 '대우주시대'에 당당한 첫 발을 내딛었다고 선언한 상태다. 이런 시점에 '우주'에 관한 공부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명언은 다가올 우주시대에 가장 바람직한 명언일 것이다. 더구나 모르는 것 투성이인 '우주'는 그만큼 관심을 받기에 딱 맞는 학문이기도 하고, 공부하는 보람도 느낄 수 있는 학문이란 얘기다. 그런데 '빅뱅' 이야기는 언제 할 거냐고? 우리가 알아야 할 '빅뱅 이론'은 지금의 우주가 이렇게 만들어진 까닭을 밝혀낼 수 있는 현재까지 가장 적절한 가설이라는 사실이다. 고작 4%를 알아낸 현재로써는 최선인 '이론'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나머지 96%에 해당하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에 관한 비밀을 풀어내면 또 달라질 이론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알아야 하냐고? '천문학의 발자취'를 담고 있는 인류의 오랜 역사를 공부하면서 얻는 지식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토인비가 말했던 '도전와 응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그런 지식 말이다.

 

  웬만한 '천문학' 책의 내용이 너무나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탓에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이 책은 10대를 위한 책인데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도 읽어야 할까?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내용으로 가득한 책인데 말이다. 심지어 '천문학' 따위를 몰라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 없는데도 말이다. 결론은 읽어야 한다. '막장 드라마'를 보듯 천문학 책을 읽어야만 하는 시대다. 뭐..'막장 드라마'도 뭔 내용인지 모르고 보기는 마찬가지니, '천문학'과도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 고작 4%만을 밝혀냈을 뿐이지만, 고작 4%를 밝혀내기 위해 평생을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감동 스토리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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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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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에서 유명한 두 대사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다. 난, 첫 번째 대사를 '복수'로 파악했고, 두 번째 대사를 '욕망'으로 분석했다. 따라서 <햄릿>은 인간이 가진 여러 성격 가운데 '복수와 욕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랄 수 있겠다.

하지만 <햄릿>에서는 복수와 욕망의 끝은 '비극'이라는 결말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왜 복수를 하고도 행복할 수 없고, 욕망을 추구하고도 행복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인간에게 복수와 욕망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게 된다. 바로 이런 맛이 '문학'을 읽는 맛일 것이다.

암튼, 우리의 주인공 햄릿은 죽은 아버지를 위한 복수를 결심하지만 좀처럼 실행에 옮기질 못한다. 과연 '완벽한 복수'를 하기 위한 장치였을까? 설령 완벽한 복수를 했더라도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어머니의 욕망(?)'이 햄릿에게 또 다른 고민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오~ 약한 자여, 그대는 왜 여자입니까?

과연 햄릿의 어머니는 '욕망덩어리'였을까? 그건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어머니가 욕망을 추구하게 된 계기나 원인을 밝히지 않았다. 그저 '욕망했다'고 전할 뿐이다. 햄릿에게는 번뇌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에 반해, 어머니가 왜 결혼을 두 번이나 했는지? 그것도 전 남편의 동생과 했는지 밝히질 않고 있다. 그저 '여자'란 으레 남자를 밝히기 마련이라는 뉘앙스만 풀풀 풍기면서 맹비난을 쏟아 붓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400여 년 전,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가 '남자들의 전성시대'라고 할지라도 여성을 맹목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놓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햄릿을 비롯해서 주변 등장인물이 거의 대부분 죽음에 이르고서야 이야기가 끝맺는다. 과연 누가 성공했을까? 복수와 욕망을 추구한 결과가 '비극'적이라는 결론만 남겨 두었다. 그런 까닭에 복수도, 욕망도 '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작품인걸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두고두고 읽으면서, 이런 궁금증들을 풀어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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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모자이크 - 뇌는 남녀로 나눌 수 없다
다프나 조엘.루바 비칸스키 지음, 김혜림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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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음식점에서 공깃밥을 주문하면 남자는 가득 담아주고 여자는 덜 담아주는 경우가 있다. 같은 가격을 받으면서 말이다. 분명 '차별'이다. 하지만 이유는 있다. 밥 한 공기로 양이 차지 않는 건장한 남성이 배부르게 먹으려면 가득 담아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여성은 의도적으로(?) 공깃밥의 반을 남기면서 덜 먹으려 한다. 한 공기를 다 먹으면 배가 부르는 여성도 많지만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 일부러 남기는 여성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런가보다 할 수 있다. 근데 남자들 중에도 밥 한 공기를 다 못 먹는 소식가들이 있다. 물론 여자들 중에도 밥 한 공기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는 대식가가 있고 말이다. 그런데 식당 아줌마가 재량껏(!) 빼빼 마른 남성에게는 살 좀 찌라며 더 많은 밥을 퍼주고 덩치 큰 여성에게는 그만 좀 먹으라며 밥을 더 달라는 여성의 요청을 묵살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곤 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과연 식당 아줌마는 왜 '차별'을 했을까? 같은 가격을 받는 '밥 한 공기'에는 어떤 사연이 담긴 걸까?

 

  <젠더 모자이크>는 남자와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애써 남녀로 '구분'을 했을 때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문제점을 예로 들기도 한다. 이를 테면, 복용약 가운데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따로 판매하는 약이 있다. 성분은 똑같지만 복용하는 양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임상실험결과를 근거로 남자는 1알 전부를, 여자는 1알의 반만 복용하도록 따로 포장해서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남성용', '여성용'으로 알맞게(?) 복용했을 때 효과가 미약하거나 때론 심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어서다. 그 까닭은 잘못된 구분법으로 판매한 탓이다. 애초에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지 않았으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예를 들어, 수면제의 경우, 건장한 남성이 1알을 먹으면 푹 잠을 잘 수 있다. 대부분의 여성은 '반알'을 먹으면 역시 푹 잘 수 있다. 하지만 저체중의 남성이 1알을 먹으면 아침이 되어도 잠을 깨지 못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곤 한다. 반대로 과체중의 여성이 반알을 먹으면 아침이 되어도 개운하지 못한 느낌을 받곤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단다. 분명히 '남성용'과 '여성용'을 제대로 복용했는데 말이다. 이는 수면제의 약효가 '근육량'이나 '신진대사' 등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애초에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나눈 것도 바로 평균적인 남성과 여성의 '근육량'을 기준으로 삼아 만들었던 것이다. 만약, 남녀로 구분하는 기준이 아니라 '체중별'로 몇 알씩 복용하라는 기준을 삼았으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각각 남자와 여자의 고유의 특성이 아닌 '보편적인 특성'에 남녀의 명칭만 갖다 붙였을 뿐이다. 이를 테면, '힘이 세다'는 특성은 보편적으로 남성에 해당하는 것이고, '화장을 하다'는 특성은 보편적으로 여성이 더 많이, 더 잘 할 뿐이다. 그런데 힘이 센 여성도 있고, 화장을 잘 하는 남성도 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하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젠더(사회적인 성)'의 문제점이라고 지칭했다.

 

  우리는 종종 '생리적인 성별(섹스)'의 차이를 '젠더의 문제'로 심화시키곤 한다. 오늘날의 한남충이니 메갈리안이니 하는 '페미니즘 문제'도 바로 이러한 오해와 편견에서 시작하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애써 '남녀를 구분하려 들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책이 패미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은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이 그닥 없다'는 사실을 뇌과학적인 관점에서 심오하고 세심하게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리고 결론은 '남녀는 구분할 수 없는 모자이크의 성향을 띤다'라고 내렸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100% 남성성을 지닌 남성과 100% 여성성만 갖춘 여성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뇌과학적으로 증명하면서, 각각의 영역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각각 파랑과 분홍으로(중간은 하얀색으로) 나누어서 '뇌지도'를 그려보았더니, 다양한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각각의 남성과 여성의 뇌지도를 펼쳐보이면서 '구분'해보라고 했더니 대다수는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더라는 사실도 함께 발표했다.

 

  이는 우리의 상식과 매우 다른 결론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전형적인 남성과 여성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뇌영역을 그린 지도를 보았을 때, 파랑색이 우세한 뇌지도는 '남성의 뇌', 분홍색이 우세하면 '여성의 뇌'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서로 다른 다양한 색색의 모자이크만 발견했을 뿐,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로 따로 구분할 수 있는 뇌지도는 없었던 셈이다.

 

  이런 결론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만끽하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런 '다름(차이)'로 인해서 보여지는 다양성을 무시하고 천편일률적인 남성과 여성의 '기준'을 억지로 정하고 애써 '구분'하려 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전형적인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지으려 들면 생기지 말아야 할 문제점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분명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르기에 더욱 아름답다. 우리가 남자다운 남자와 여자다운 여자에게 큰 매력을 느끼는 것도 바로 '다름의 아름다움'에 끌린 탓이다. 그러나 그런 매력을 '고정관념'으로 삼아서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고 애써 '구분'짓게 되면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남자와 여자는 이래저래 피곤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남녀의 갈등이 복잡해지고 심화되면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잃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패니미즘 갈등이 전혀 아름답지 못한 까닭이다. 이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의 아름다움'을 만끽해야 하지 않을까?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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