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후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시미즈 켄 지음, 박소영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4월
평점 :
절판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문구다.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윤회나 구원이기 이전에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먼저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살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막연할 따름이다. 건강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강 건너 불구경보다 더 무심하게 바라볼 대상인 탓이다.

 

  그러나 '암 선고'를 받은 이들에겐 다를 것이다. 자신에게 남은 삶이 고작 1달이나 3달, 길어야 반 년이나 고작 일 년 남짓하다는 의사들의 소견은 환자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삶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 이들은 하루, 아니 1분 1초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환자들의 태도는 어떨까? 저자는 일본에 '정신종양학' 전문의로 지내면서 수많은 암 환자들과 상담을 한 결과, 놀라운 결론을 접할 수 있었단다. 죽음의 문턱에 선 환자들에게 환한 웃음과 희망찬 삶을 발견하였다면서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분명 삶은 무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무미건조하기 십상인데, 죽음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남은 삶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 암 환자들의 삶이 그토록 밝고 환할 수 있단 말인가?

 

  결론은 '후회없는 삶'으로 남은 생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환자들의 표정과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단다. 남의 눈치만 보는 삶이나 남의 위한 삶 따위는 걷어 내버리고 오직 '자기를 위한 삶'으로 사는 1분 1초가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비록 건강을 잃어버려서 고통에 겨운 나날이 더 많을지라도 순간순간 찾아오는 '고통없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고 말이다.

 

  욕심을 부려 본다면, 사형선고를 받지 않은 건강한 이들이 바로 이런 깨달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어떨까? 혹시 막연하다고 느껴진다면 <1년 후,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평범한 이들의 일상이 어떻게 바뀌게 될까? 물론 쉽지 않은 상상일 것이다. 절실함과 절박함이 없는 삶에게는 너무나도 심오한 깨달음인 탓이다.

 

  그래도 애써 욕심을 부려보자. 아니 적어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암 환자들에게 응원이라도 보내 보자. 나의 삶은 그들에 비해 '영원'에 가깝다는 염치를 배우는 순간, 분명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 뿐인 목숨을 버리는 순간, 다시 말해, 죽을 각오로 '하는 일'은 무서운 힘을 보여주곤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이 임박한 이들에게는 뒤를 되돌아볼 여유가 없어진다. 다른 말로 '남의 눈치 따위'는 중요해지지 않게 된다. 온전히 '나를 바라보게 되는 순간'부터가 진짜 자신의 삶이 시작하는 셈이다.

 

  평범한 이들이 투정부리는 오늘은 바로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는 문구가 새삼 떠오른다. 딴에는 너무 비장하다는 생각에 그닥 와닿지 않는 문구이기도 했지만, 하루하루가 심심해 죽을 지경인 이들에게는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릴 법하다는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하루를 살더라도 멋지게 살고 싶은 이들에겐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지금의 삶이 너무나도 절박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지금 행복에 겨운 이들이라면 너무 뻔한 소리라는 느낌일테고 말이다.

 

  아쉬운 것은 '평범한 삶의 나날들'이 행복이라는 마무리였다.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얻은 교훈을 그리 '평범한 결론'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차라리 채찍으로 따끔하게 깨우쳤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고 있는데, "투정을 부리는 너의 삶이 행복한 거란다"라는 말이 씨알이라도 먹힐까? 차라리 암으로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또래 어린이가 고통에 겨워하는 장면이라도 보여주는 것이 더 시원한(?) 깨우침이 아닐까? 너무나 폭력적인 훈육이라는 비판이 앞선다면...나이를 조금 더 들게 하여, 스무 살 청년인데도 무료한 나날을 보내면서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있다면..이라고 가정하면 어떨까? 여전히 '폭력적인 훈육'일까? 이 나이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꼰대라는 비판을 받을까? 그렇다면 나름대로 살만큼 산 '40대 중년'이라면 어떨까? 그 즈음에는 바람직한 훈육(?)일까나?

 

  바로 이렇게 '선택적인 깨달음'이라는 점이 아쉽다는 말이다. 가슴 깊은 울림을 주는 깨달음이라면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큰 울림을 주어야 할 텐데 말이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소재가 비교육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나이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메멘토 모리'라는 문구가 주는 깊은 울림을 느끼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하얀 바탕에 검은 점 하나가 더욱 눈에 띄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순간, 검은 바탕으로 물들게 되었을 때 '하얀 점'을 찍을 용기가 필요해지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