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4)

[My Review MMCLXXI / 인물과사상사 29번째 리뷰] 내가 좀 그렇다. 뭔가 시대의 흐름을 읽는 '신기(神技)'는 갖고 있지만 대부분 '뒷북'을 치는 경우가 많다. 유행에 첨단을 걸으며 발빠르게 쫓아가지는 못하지만 대세를 판단하는데 있어 느리지만 틀림은 없는 편이다. 이런 내 성향을 아주 잘 맞추는 증거가 바로 '개정판'이다. 왠지 꽂히는 책이 있어 남들보다 뒤늦게 '책구매'를 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개정판'이 출간하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퇴마록>이 그랬다. 물론 30년 전에 구매해서 읽은 '초판본'이 있지만, 중간에 '개정판'이 나와 구매하지 않았다가 재작년 쯤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올해 '개개정판'이 출간했다. 이런 경험이 참 많다.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도 '구판'을 신나게 사모으니 '새책'이 떡하니 나왔고, 공원국의 <춘추전국 이야기>도 그런 케이스다. 그런데 이 책도 올해 '개정판'이 출간했다. 한창 구판을 읽으며 올해 신나게 구매에 열을 올렸더니 '연말'이 되어서야 '개정판'이 출간된 것이다. 단순한 '표지갈이'만 하는 수준이 아니라 출간한 지 20년이 지났으니 내용도 대폭 추가한 '개정증보판'이 출간된 듯 싶다. 이참에 '구간'과 '신간'을 함께 읽어야 겠다. 시리즈가 방대한 관계로 '개정판'을 바로 접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이제 1960년대다. 4·19 혁명으로 무너진 이승만 정권으로 새로 출발한 '제2공화국 체제'로 시작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혁명 이듬해인 1961년 5월 6일에 박정희가 이끄는 군내부의 소장파들에 의해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정치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체제를 전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곧 야심을 드러냈고 정권을 탈취해 '제3공화국'을 열었다. 박정희는 자신들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정권을 차지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에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정권을 빠르게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경제성장'을 달성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그 달성목표를 향해 무조건 돌진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잠시 묻어두고 오직 '달콤한 열매'를 따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셈이다. 이게 대한민국의 1960년대라고 요약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럼 강준만은 박정희 정권을 뭐라 정의했을까? '기회주의'라고 단언했다. 사전적 의미로는 '일정한 신념이나 주관이 없이,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서 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라고 설명되었다. 허나 '기회주의'는 주체나 동인(動因)에 따라서 여러 갈래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가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가? 또한 기회주의는 부정적인 관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긍정적인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상반된 평가도 잘 설명할 수 있는 대목을 엿볼 수 있다. 심지어 개인에 따라서는 '기회주의'를 싫어하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기 시작한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원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인공 '덕천가강'도 기회주의에 끝판왕으로 평가 받는 장본인 아니겠는가. 들리는 소문에는 60, 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이 소설에 그토록 열광했다고 하던데,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기회주의'가 판을 치던 시절이었기 때문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 싶다.

그럼 기회주의는 왜 판을 치는 것인지 강준만의 설명을 들어보자. 한국사회에 기회주의가 난무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는, 첫째, 역사가 격랑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압축적 근대화와 그에 따른 '역사 지체 현상' 때문이다. 셋째, 과도한 외부 환경의 영향이다. 넷째, 공적 영역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특한 '소용돌이 문화' 때문이다. 라고 풀어냈다. 다른 건 이해하기 쉬우니 둘째치고, '소용돌이 문화'란 무엇인가? 흔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한 번 휘말리면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현상을 말하는 것일테다. 바로 우리 사회문화가 그랬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의 동질성과 중앙집중성은 곧잘 '극단주의'를 낳았기 때문이다. 중간이 설 자리가 없고, 대립의 양 끝단에서 첨예하게 갈등을 불지피며 어느 한 쪽이 지쳐 떨어져 나가 죽을 때까지 아귀 다툼을 벌이고 만다. '모 아니면 도'인 상황이 너무 쉽게 벌어진다. 흔히 말하는 '치킨 게임', '승자독식 게임'이 우리 나라에서 횡행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외국 언론에서도 한국을 '민주주의 교과서'라면서 극찬하면서도, 한편으론 '양극단'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세력간의 알력다툼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것을 주목하며, 21세기 한국 같은 민주국가에서 '비상계엄'이 벌어지게 된 원인이 거기에 있다며 분석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어찌보면 위태롭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기회주의의 폐해'를 너무 오래 경험한 탓일까? 남북이 대치하고 아직도 '전쟁중'인 나라인데도 이렇게나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외국인들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초긴장된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그런 숨막히는 긴장감이 대한민국이 발빠르게 성장하는 원동력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긴장의 끈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이제 다른 나라를 선도하는 국가로 발돋움했는데, 대한민국처럼 빠르게 성장하고 싶으면 '초긴장 속에서 살아가라'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않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이를 '역사적 비극'으로 보고 있는데, 너희들도 비극적으로 살아보라고 조언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 새로운 원동력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걸 찾기 위해서라도 한국 현대사를 다시금 조명해야만 할 것이다. 철저한 반성 위에서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암튼, 혁명 이후 세워진 '장면 내각 정부'에 대한 평가부터 시작해보자. 일단 장면 총리는 리더십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한민국사에서 최초의 '의원내각제'가 시작부터 실패작이었느니, 대한민국은 '강력한 대통령제'가 더 잘 어울리느니 그런 평가는 논외로 친다. 어떤 민주제도를 따르던 중요한 것은 '주권'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운용만 한다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의 의원내각제라는 불행에, 리더십 부재라는 불운이 겹쳐서 '혁명 이후' 한국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그로 인해 '5·16 군사정변(군사쿠데타)'는 필연이었다는 설명은 '결과론'일 뿐이다. 이는 오히려 쿠데타에 성공한 세력이 '승자의 역사'를 쓴 것에 불과하다고, 자신들이 한 행적을 '정당하게' 평가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시 '장면 총리'를 평가한 이야기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장 총리는 보기 드물게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심약하였고, 위기대처 능력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다."(<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 김대중 자서전 1>, 인동(1999), 146쪽) 많은 사람들이 평가하기를 장면은 정치인이 아니라 '성직자'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로도 '천주교'에 몸담고 있다가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아 정치인이 된 케이스다. 개인적으로는 근면 성실 청렴 결백하고 깨끗한 사람이었지만, 정치를 하기에는 '리더십'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했고, 심지어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정보를 접하고도 "미국이 있는데 설마 쿠데타를 일으킬 리 없고, 일으켰다 하더라도 성공할 리 없다"는 식으로 정치적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장면 내각'을 무능력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리더십은 부족했더라도 성정이 깨끗한 사람이 지도자로 있으니 적어도 '부정부패'에서 멀리 떨어질 수는 있었다. 그 결과, 혁명 직후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불만과 그로 인한 시위 덕분에 혼란스러운 국면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그러니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명분 가운데 극도의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대목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보다는 저들의 '정치적 야욕'이 군사정변의 주요 목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논리에 맞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역사는 '군사정변'을 일으킨 세력이 정권을 잡는 방향으로 흐름을 틀었다. 한국에 연이어 대혼란이 찾아온 시점이었다. 그런데 왜 북한과 미국은 잠잠했던 것일까? 나중에서야 김일성은 그때가 절호의 기회였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지만, 북한은 명백히 오판을 했던 셈이다. 왜냐면 박정희가 잠시나마 '남로당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고무되었다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쪽에 큰 혼란이 벌어졌는데도 '남로당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북한 방송 청취'가 가능했었다고 한다. 이승만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 정권 초기에도 남쪽 사람들이 '새 소식'을 접하는 방송으로 '북한 방송'이 늘 10~20%를 웃돌았다고 하니 말이다. 비단 남파 간첩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세가 극도로 불안했고, 정부를 100% 믿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민들도 나름의 '고육책'이었다. 물론 청취하다 들키면 '빨갱이'로 낙인 찍힐 위험이 크지만, 이승만을 믿었다가 제 발등을 찍힌 국민들의 감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던 셈이다.

그럼 북한은 그렇다치고, 미국은 '군사쿠데타'를 왜 용인했던가? 미국은 애초부터 '정의로운 나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에게 '정의'는 오로지 '미국 이익'이었다. 한마디로 한국 정부에 누가 권력자로 들어서던 미국의 이익에 큰 걸림돌이 없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가 '혈맹'이라 부르면서 미국에 의지하고 '숭미(崇美)주의'를 가지고 있던 것에 비하면 정말 배신감과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런 미국을 상대로 박정희 군사정권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바로 '반공'을 국시로 못박으며 발빠르게 태세전환을 꾀했던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자신이 '남로당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작용한 결과다. 미국의 신뢰가 없으면 자신들의 정권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빠르게 '빨갱이 색출'에 나섰던 것이다. 따라서 '혁명군'은 강력한 반공국가 건설을 표명했고, '좌익 사상범들을 체포'하고,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체포'하자. 심지어 좌파 이데올로기에 물든 지식인, 사회단체 지도자, 노조 지도자 등 사회 불만세력과 좌익 활동 경력자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고 체포하는 성과를 미국에 그대로 전달했고, 미국의 환심을 사는 데에도 큰 성과를 거뒀다. 박정희는 '혁명공약 제1항'대로 반공을 국시로 확고히 했다는 것으로 미국의 사상검증을 무사히 통과했던 것이다.

이로써 북한은 착각과 오판으로 절호의 기회를 날렸으며, 박정희 정권은 발빠르게 체제 안정을 구축하는 행보를 연이어 밀어붙였다. 5월 19일 계엄사령부는 <민족일보> 폐간 통보와 함께 조총련계로부터 약 1억 환의 불법도입자금으로 발간한 것을 빌미삼아 '괴뢰집단을 옹호하는 언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워서 3명을 사형을, 5명은 중형을 선고했다. 이에 국내의 언론과 문인 들이 관대한 처분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박정희 앞으로 보냈으나, <민족일보> 대표였던 조용수는 그해 12월에 사형을 집행했고, 2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선에서 끝냈다. 당시 32살이었던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게 억울하다. 정규조(친구) 동지에게 돈을 꾸어다 신문 만드는 데 썼는데, 갚아주지 못하고 가게 돼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겼단다. 이게 소위 '좌익사상'에 물들고 '국가전복'을 획책하던 심대한 문제를 일으킬 만한 '용공분자의 최후 발언'이란 말인가? 그냥 '평범한 시민'이자 언론인으로서 바른 말을 하며 올곧게 살아가려는 젊은이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박정희 정권의 면면을 살펴보면, 국가적인 큰 이미지로 보면 대단히 훌륭한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허나 그렇게나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과를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희생양'을 자처했던 국민 개개인에게는 비극을 넘어 참극이 벌어지는 풍경을 살펴볼 수 있다. 이승만 때에도 그랬지만, '소수'를 위해서 '대다수'를 희생시켜야 했던 우울한 역사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오늘날에도 '국가'를 위해서 개인의 '희생'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수구꼴통들이 많은데, 왜 '자신'이 그 희생양을 자처하지 않는지는 참으로 의문스럽다. 전광훈 목사, 전한길 열사...당신들이 가진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말하진 않겠다. 허나 당신들이 가진 '전재산', 당신 가족들의 명의로 되어 있는 '모든 재물'을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서 헌액하라. 그러면 당신들의 애국심을 쬐끔 믿어줄테니 말이다. 당신들이 찬양하는 '윤어게인'이 실현된다면 바로 그런 시대로 되돌아가게 될테니 말이다.

이런 말을 들은 수구꼴통들은 이리 항변한다. 박정희가 경제성장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만세고, 반공정신에 투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처럼 굶어죽기 딱 좋을테니 말이다. 이건 맞는 말일까? 앞서도 말했지만, 박정희 때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박정희'가 경제성장 시킨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주체는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들'이고, 수없이 미싱을 돌렸던 공순이를 비롯한 노동자와 땡볕에서 땀 흘려 곡식을 일궈낸 농민들이었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수출도 못했고, 먹거리 해결도 못했다. 그런데 어찌 '박정희' 혼자만의 공로냔 말이다. 물론 훌륭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모두에 언급했던 '소용돌이 문화'도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구심적이 있었기에 그 중심을 향해 똘똘 뭉쳤고, 정상을 향한 일치단결이 한몫 했기 때문에 이뤄낸 '한강의 기적'이었다고 말이다. 그렇다. 그런 점도 있다. 그런데 '한강의 기적'이란 엄청난 성과조차 '소수만을 위한 잔치'에 불과했다는 지적은 어찌 대답할 것인가? 박정희 때 이룬 경제성장은 국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서 만들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런데 경제성장으로 얻은 열매는 누구에게 돌아갔나? 소수의 재벌들에게 '재투자'란 명목으로 대부분 돌아갔고, 국민들은 여전히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고, 반공을 위시한 공포정치로 수많은 국민들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우리는 거시적인 성과에 취해서 미시적인 문제점을 등한시 하는 경향이 아직도 여전하다. 강준만이 지적하는 '소용돌이 문화'가 그것이다. 이제 우리는 시각을 다변화해야 한다. 21세기 세계정세가 혼란할수록 우리끼리 더욱 똘똘 뭉쳐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헤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이럴수록 우리는 더욱 의연해져야 한다. 성과에 환호라며 기쁨은 만끽하다가도 문제에 봉착하면 조속하게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모아야 하는 것이다.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여전히 냉전시대의 전유물인 '남북대치'에 매몰되고, '정권다툼'에 혈안이 되고, '숭미주의'에 빠져서 대한민국이 당연히 누려야 할 모든 것을 '다른 나라(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면서 움추려들어야만 하는가? 이젠 당당히 어깨를 펴라. 이젠 대한민국이 '강대국'이기 때문이다. 전세계인들이 한국을 주목하고 있지 않은가? 부러워서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강대국에게 눈치보는 나라가 아니라, 눈치 주는 나라임을 명심하라. 강력한 리더십에 의존하는 '구심력'에 만족하지 말고, 원대한 선도국가 되어 '원심력'을 발휘해야 할 때란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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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혁명 전야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4)

[My Review MMCLXX / 인물과사상사 28번째 리뷰] 2025년 현재의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생각하면 과거 70여 년 전의 '1950년대의 대한민국'을 상상하기 힘들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정부가 이끌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고, 전쟁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며, '대통령 한 명'이 무능하면 얼마나 나라가 나락으로 빠져들고 마는지, 그야말로 '교과서'적으로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이런 비극적 교과서가 이승만을 필두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윤석열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아찔할 정도다. 그나마 박정희는 '경제 부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고 쳐도 자칭 '보수정권'이라고 부르는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민주주의 파괴자'로 등장했다는 것에 통탄을 금치 못할 정도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50년대편 3권'에서는 이승만의 장기집권 욕심 때문에 얼마나 나라꼴이 우스워지게 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부터 총정리를 한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김구'라는 인물과 맞붙어야 했다면,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사실상 '영구집권'을 꾀했던 54년 '사사오입 개헌'을 밀어붙이는 야욕을 벌이자, 이를 막기 위해 새로 등장한 정치세력이 민주당과 진보당이었다. 그리고 56년 5·15 선거에서 조봉암은 대통령 후보로 총 투표수의 23.8%인 216만 3808표를 얻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물론 이승만을 이기지 못해서 2대 대통령 자리도 이승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지만,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김구 못지 않은 경쟁자가 될 것이 자명했다. 물론 이승만은 가만 있지 않았다. 안두희를 이용해서 김구를 암살하였듯이 조봉암도 간첩으로 엮어서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조봉암 죽이기'가 실행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주장(?)대로 조봉암은 '공산주의자(빨갱이)'였던가? 이에 대해 조봉암은 '사형집행'을 당하기 직전에 유언으로 남긴 말 가운데,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정태영, <한국 사회민주주의정당사>, 세명서관(1995), 476쪽)라는 대목이 있단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이 내세운 '자유민주주의'는 소수를 위한 정치 행위였고, 조봉암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워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고르게 잘 살자는 정치 행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이들이 '모두가 잘 사는 정치행위'를 북한 공산당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다며 곡해하고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가곤 한다. 이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둘의 차이점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완벽한 평등'을 주장하며 '사유재산'을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사회주의는 '사유재산'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렇기에 결론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완벽한 공산주의 국가는 단 한 나라도 없는 셈이다. 과거의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도, 북한도 모두 '유사 공산주의'를 표방한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운영하고 있었고, 지금도 '사회주의'를 실질적으로 하고 있으면서 '공산당 독재'로 폭망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렇다면 조봉암도 현재의 중국과 북한과 다를 바 없는 '공산당 독재체제 아래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려 했었던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봉암이 내세웠던 '사회주의 노선'은 오늘날 북유럽 국가들이 취하고 있는 '사회당 집권' 아래 정부를 꾸리고 시민들의 사회복지를 위해서 높은 세금으로 복지자금을 확보해서 전국민이 고르게 부를 누릴 수 있는 국가를 꿈꿨던 정치인이었다.

물론, 1950년대 당시 대한민국 경제수준으로 북유럽 국가들과 맞먹는 정도의 사회복지국가를 실현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허나 조봉암이 이승만을 압도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평화롭게 정권교체를 해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더 빨리 안착했을 것이다. 그것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면 우리는 그 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같은 '군사독재 시대'를 건너뛰고 발빠르게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기적같은 일을 성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수 있었던 증거로는 우리 나라의 높은 '교육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끼니를 굶는 한이 있어도 자녀를 학교에 보내서 '신분상승'을 꾀했던 광풍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한국인들의 DNA에 원래부터 박혀 있었던 듯이 불어 재꼈으니 말이다. 그런 열의가 이념갈등으로 만들어진 '빨갱이 색출' 같은 잘못된 방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 세계와 경쟁력을 갖춘 과학기술의 발달이란 옳은 방향으로 표출되었더라면 분명 '한강의 기적'은 온 국민이 고르게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는데 큰 업적으로 달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시련은 조금 더 진행되어야만 했다. 진보당의 조봉암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뒤에, 민주당 후보였던 '조병옥'까지 돌연사를 하고 만다. '신익희'에 이어 두 번째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자유당'만 좋은 일이 연이어 벌어진 셈이다. 이때가 1960년 2월 15일이었다. 허나 여론은 좋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의 무능함을 너무 오래 겪었기 때문이다. 이런 무능함 때문에 민주당의 선거구호였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가 온 국민들의 마음을 후벼 팠던 것이다. 자유당 측에서 아무리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갈아봤자 소용없다"를 외쳐도 당시 신익후 후보를 냈던 민주당에 인기를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치졸하게도 "못 살겠으면 북으로 가라"고 외치는 수준 낮은 협잡까지 했지만 별로 잘 먹히지 않았다. 그런데 달리는 열차 안에서 신익희는 돌연사 했다. 선거 유세를 돌다 지쳐서 생긴 일이겠지만, 대한민국 민주화에는 치명타를 안겨준 셈이었다. 이때가 56년이었는데, 그 뒤 바통을 이어받을 조봉암까지 59년에 사형집행을 당하고 마니, 60년 3월에 벌어진 '3·15 부정선거'는 부패한 이승만 정권이 벌인 '최후의 발악'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85세의 고령이었지만 '대항마'로 지목되었던 야당 후보들이 연이어 사망했기 때문에 60년 대선에서 이승만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로 보일 정도였다. 허나 문제는 이승만을 든든히 보좌할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기붕은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민주당 후보였던 '장면'이 부통령 당선이 유력했는데, 고령의 대통령 유고시에 부통령이 '자동'으로 대통령이 된다는 점에서 이기붕은 안달을 냈던 것이다. 그래서 3·15 부정선거는 조직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야당 유세에는 정치깡패를 동원해서 행패를 놓기 일쑤였고, 선거벽보에서 '장면 후보의 사진'을 훼손하는 일 정도는 얌전한 방법이었다. 조직적인 '인력동원'으로 여당의 선거유세에는 참석을 유도하였고, 반대로 야당의 선거유세 때에는 온갖 명분을 갖다 붙여서 참석을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학부모들에게 '가정방문'을 한다면서 교사들에게 특별수당을 지급하는 따위로 말이다. 이에 학생들은 "학교를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섰고, 경북고 학생들을 시작으로 다른 학교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시민들은 학생들의 시위에 박수를 쳤지만, 이내 경찰들이 투입되면서 시위는 번번이 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자유당은 멈추지 않았다. 투표함 바꿔치기는 말할 것도 없고, '3인조 공개투표'를 예행연습까지 시키는 바람에 '부정선거의 정황'은 발빠르게 소문이 번졌으며,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 등의 부정선거 현장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마산의 시민들은 민주당 의원들이 앞장 선 시위에 합류했고, 시위군중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이 시위지도자인 민주당 의원들을 연행하며 강력 대응을 하자 시위군중은 더욱 불어나 만여 명을 넘겼다. 이에 경찰은 발포를 했고, 시위대는 분노하며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사, 파출소 등을 파괴했다. 이때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 당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개표결과가 나왔다. 이승만과 이기붕이 얻은 표가 '유권자수'를 초과한 것이다. 이 자체로 '부정선거'였던 셈이다. 그러자 득표수를 80%나 70%로 하향조정하라는 지령이 전국 개표소에 하달되었다. 그리고 서둘러 '마산 사건'을 무마하려고 했다. 허나 이기붕은 정치부 기자들과의 회견자리에서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라고 말을 꺼냈다. 곧 실수임을 깨닫고 주워 담았지만, 이승만 정권이 국민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 셈이다. 마산 경찰당국은 '공산당 지하조직의 폭동'이라고 조작이라고 발표했다. 마산 경찰은 시위주모자로 잡아들인 26명을 공산당으로 몰아 혹독한 고문을 했고, 거짓 자백과 증거물 조작을 시도해 내놓았다. 심지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학생의 호주머니에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전단을 집어 넣기까지 했다. 이승만은 마산 사태의 책임을 지고 책임자를 문책 해임하는 선에서 무마하려 했다. 일단은 잠잠해지는 듯 싶었다.

허나 4월 11일 정오쯤에 마산 앞바다에서 교복차림의 10대 소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눈에는 최루탄이 박힌 채였다. 이 사실이 '사진'과 함께 널리 알려지자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않았다.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 군이었다. 그는 3월 15일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되었는데, 실종 27일만에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날 밤 3만여 명의 시위대는 시청과 경찰서 등을 습격했고 기물을 파괴했다. 자유당과 관련된 기관이나 개인 집까지 습격 대상이었다.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고 15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제 '이승만 정권 규탄 시위'로 전환된 것이다.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마산에서는 12일, 13일까지 계속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은 연일 시위에 동참했고, 이승만 정권을 규탄했다. 전국의 학생들은 이 소식을 어떻게 접했을까? '언론의 자유'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때처럼 정부가 '언론 탄압'을 하며 통제하고 있었더라면 4·19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무능하고 부패한 이승만 정권에 준엄한 심판을 내리는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아이러니 한 것은 시위를 주도한 것은 '중고등학생'이라는 점이다. 대학생 참여는 4월 18일 고려대학생의 시위 참여가 처음이었고, 그전까진 다른 유명 대학의 동참은커녕 무력한 모습마저 보여줄 뿐이었다. 특히 지방의 시위는 점점 격해지는 대도 '서울 시위'는 잠잠했다. 무려 34일이나 지나서야 고려대학생이 나선 뒤에야 혁명의 완성일인 4월 26일까지 이어진 것이다. 오죽했으면 중고등학생들이 '선배들은 각성하라', '선배들은 썩었다'는 구호를 외쳤을까. 서울에 포진하고 있던 유명대학생들은 4·19 혁명의 주역이 절대 아니었음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이승만 정권의 최대 업적을 꼽으라면 연평균 10%에 해당하는 예산을 '교육 부문'에 쏟아부은 것이라 한다. 1인당 GNP가 100달러도 안 되는 나라의 살림으론 높은 비중이다. 그로 인해 '문자해득률'도 45년 22%에서 59년 78%로 증가했단다. 이를 긍정적으로만 평가한다면 분명 이승만 정권의 최대 치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워낙 무능하였기에 보여줄 가치조차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조차 오로지 이승만 정권의 공으로 보기에 무리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지닌 '교육의 한(恨)'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근대교육이 시작되면서 얼마나 교육열이 불타올랐던가? 조선 시대 폐쇄적인 신분제로 인해 '양반이 못된 한'을 뜨거운 교육열로 불태웠다. 일본제국주의로 인한 조선인 차별에 의해 '교육열'을 다시 불타올랐다. 해방이 된 후에도 교육열은 식을 줄 몰랐다.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 처단'에는 소극적이면서도 '빨갱이 소탕'에는 적극적인 것도 한 몫 했다. 이른바 '고학력'과 '저학력'을 나누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전쟁터에 끌려가는 기준도 '고학력'은 면제, '저학력'은 징병이었을 정도다. 이런 시국이니 교육열이 높지 않을 이유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단 서울명문대에 입학하고 졸업만 하면 출세는 보장된 사회에서 뜨거운 교육열을 불태우지 않으면 이상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그 훌륭한 학력을 소유한 이들을 포섭해서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 요인'으로 채용할 뿐이었으니, 이조차 최대 업적으로 삼을 수 없는 까닭이다.

허나 뜨거운 교육열 속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배운 중고등 학생들의 정의감이 '한국전쟁'의 승패를 가를 진정한 힘이었고, '4·19 혁명'에서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서양의 이데올로기'였고, 그것이 '미국 숭배'에서 비롯된 점이 옥에 티일 수는 있겠으나, 그럼에도 우리가 옳다고 여긴 것이 '민주주의'였고, 이를 '실천'으로 옮길 능력이 충분했기에 대한민국은 오늘날 전세계의 민주주의 모범으로 극찬 받은 것이 틀림없다. 이런 엄청난 업적이 '이승만 정부의 무능' 덕분(?)이라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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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질서 - 의도를 벗어난 모든 현상에 관한 우주적 대답
뤼디거 달케 지음, 송소민 옮김 / 터닝페이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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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질서 : 의도를 벗어난 모든 현상에 관한 우주적 대답>  뤼디거 달케 / 송소민 / 터닝페이지 (2025)

[My Review MMCLXIX / 터닝페이지 2번째 리뷰] 제목에 끌려서 읽고 싶은 책이었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를 움직이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경제학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조언'대로 경제를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가급적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잡는 역할만 할 뿐, 인위적으로 규제를 하고 가혹한 형벌로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면 잘 굴러갈 수 있었던 경제도 폭망에 이르게 된다고 한결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제전문가들이 애덤 스미스를 거들먹거리며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는 만능치트키라고 말한다면 경제 비전문가일지라도 그를 한물 간 사람 취급할 것이다. 왜냐면 세계경제는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고, '경제위기'도 더욱 고차원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제대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학기술적인 예를 하나 더 들자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구한 '페니실린(항생제)'이 21세기인 현재에는 아무 짝에도 효험을 보이지 않는 '낡은 항생제'로 전락한 것을 잘 알 것이다. 질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가 기존의 항생제에 면역이 생겨서 페니실린보다 훨씬 더 강한 새 항생제가 아니면 효험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항생제에 면역기능을 가진 '슈퍼 박테리아'가 존재한다고 밝혀지지 않았는가. 이런 슈퍼 박테리아에 의한 감염으로 생긴 질병이라면 현재의 의료진은 더는 치료를 할 수가 없다. 오직 '자연적인 면역력'을 증가시켜서 스스로 치유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수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 책 <보이지 않는 질서>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뭐라 할 수 있을까? 십수 년간 심리학 치료를 해온 독일의 정신요법 의사인 뤼디거 달케가 쓴 책인데, 애초에 기대했던 '인문교양책'에서는 많이 벗어난 책이었다. 그렇다고 '종교책'으로 보기에도 그렇다. '과학책'은 더더군다나 아니고 말이다. 굳이 한 가지 콕 집어서 말한다면 '의학책'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가운데 '심리치료'에 핵심을 두었고, 우리에게 '위약 효과'로도 잘 알려져 있는 '플라시보 효과'의 아주 긍정적인 처방에 관한 깊은 조예를 선보여준 책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픈 현대인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는 책이라고 소개하면 딱 좋을 듯 싶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대립의 법칙'이 있다고 말이다. 서양인들에게는 좀 낯선 개념일 수 있지만, 동양 문화권에서는 널리 알려진 '음양 이론'으로 이해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는 것처럼, 여자와 남자가 각각 '음'과 '양'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이렇게 '대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서문을 열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긍정적인 생각'이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딱히 질병이 있는 것 같지도 않는데 실제로 아프다고 느끼는 까닭은 바로 이렇게 한 쪽으로 치우친 '극단적인 입장'을 고집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부정적인 생각 자체가 질병을 부르지 않지만, 각각의 대립하고 있는 '위치'를 고집하고 한 번 정한 '생각'을 바꿀 생각도 못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고인물이 썩는 것처럼 질병에 걸린 듯 아플 수밖에 없다는 이치와 맥을 같이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럼 이런 아픔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다음에 전하는 메시지에 그 해법이 있다. 바로 '공명의 법칙'이다. 음과 양으로 대립하고 있는 세상이지만, 두 개념은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공명'하는 것이 대원칙이라는 것이다. 낮이었다가 자연스레 밤이 되는 것처럼, 빛과 그림자는 서로 한 쪽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서로 변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럼 '선과 악'도 바뀐단 말인가? 우리는 하루동안에도 '착한 마음'만 품지 않는다. 때로는 악당보다 더 '나쁜 마음'을 품기도 하고, 때로는 변태처럼 심하고 이상한 '나쁜 마음'을 품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정말 범죄자이기 때문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일지라도 '정상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나쁜 마음을 품었을 때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 범죄를 저질러 나쁜 사람임이 밝혀지기도 할테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내면의 도덕법칙'에 해당하는 착한 마음이 작동하여 죄를 뉘우치고 진정으로 반성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이럴 경우에도 우리는 '대립 법칙'을 고집하게 되면 단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른 사람조차 평생 범죄자로 낙인을 찍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공명의 법칙'을 잊어선 안 된다. 이게 중요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공명의 법칙'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음양의 조화'를 닮았다. 넘치는 곳이 있으면 덜어내고, 부족한 것이 생기면 채워주는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풍수지리'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의 저자가 서양사람인 독일인이라 그런지 '프로이트 무의식 이론'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 같다. 남녀의 조화를 위해서, 아니 '공명'을 위해서 섹스를 수차례 본보기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하릴없이 자세하게 '성적인 묘사'를 하거나 '지나치게 외설적(?)인 설명'이 들어가 있어서 옥에 티로 보인다. 뭐, 책을 읽다가 지루하다 느껴질 즈음 '야한 이야기'로 교실의 분위기를 집중적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점잖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실제로 고통과 아픔을 겪는 삶을 살고 있는 환자가 이 책을 읽기에는 부적절하게 보이는 대목이다.

자, 이제 '대립'과 '공명'을 이해했다면 이 책의 내용은 다 읽은 것과 마찬가지다. '음양의 조화'를 실천으로 옮기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이 책을 잘못 읽으면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일 수도 있으니 주의 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몸과 마음이 아픈 현대인들이 '통증'을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비결을 애둘러서 설명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헷갈릴 수 있는 까닭은 여기서부터 '고대'와 '현대'의 지혜를 오르내리는 롤러코스터를 타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과학적'으로 판명된 고대의 자연철학자들의 주장도 곧이 곧대로 인용하고 있어서 그렇다. 그냥 다 무시해도 좋다. 그저 비유적인 표현이라도 봐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 '플라시보 효과'다. 의료진도 포기한 말기암 환자가 '가짜약(위약)'을 복용하고,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됐다는 의사의 말만 믿고 기적처럼 완치가 되는 사례가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전원이 꺼진 냉동창고에 갇힌 선원이 '영상의 온도'속에서도 극한의 냉기에 오랫동안 노출된 듯이 꽁꽁 얼어죽은 일도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 긍정'만이 만병통치약이고,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춘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 책의 저자가 가장 강조한 내용은 '자연스러움'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원활하게 잘 돌아가는 궁극적인 비결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극단적으로 강조를 하다보니 '남녀 간의 섹스'를 비교 우위적으로 강조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허나 이를 '사랑'으로 치환해서 읽으면 '보이지 않는 질서'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사랑'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절대 '섹스'뿐이라고 읽으면 안 된다. 그럼 '사이비 종교'에서 강조하는 그것과 다를 바가 없고, 잘못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광신도'만 양산할 뿐이다.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르면 안 된다. 예술과 외설이 '한 끗' 차이인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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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4)

[My Review MMCLXVIII / 인물과사상사 27번째 리뷰] 얼마 전 너튜브 채널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설문 조사'를 했는데, 한국 전쟁의 발발 날짜는 많이 알고 있는 편인데, 정전일(휴전) 날짜는 잘 모르고 있다는 결과를 보여주면서 우리 나라 MZ세대의 '역사 관심도'가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는 걱정을 했더랬다. 하지만 이는 꼭 MZ세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도 한국 전쟁이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라는 것은 숱하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휴전 날짜는 1953년이라고 년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휴전 날짜'를 명확히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고, '휴전'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분위기였고, 오직 '북진통일'만이 옳은 일이라고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나이 50살이 넘은 나도 이럴진데 요즘 MZ세대의 '무관심'을 탓할 수 있겠는가? 참고로 한국전쟁 휴전 날짜는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9분이라고 한다. 나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요즘에야 '검색'을 하거나 '챗GPT'에게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새로 알게 된 것은 한국전쟁에도 '핵무기 사용'이 될 뻔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내용도 얼핏 알고는 있었는데, 핵무기 사용을 강하게 주장한 사람이 '더글러스 맥아더'였고, 이에 핵무기 사용을 불허한 이가 '트루먼 미 대통령'이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는 너무 단편적인 내용이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애초에 맥아더는 전쟁의 승기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핵무기 26발'을 중국의 주요 거점에 촘촘히 투하하려고 계획했었단다. 중공의 주은래(저우언라이)가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한국군만 38선을 넘는다면 중국군은 관망하겠지만, 미군(유엔군)이 넘어온다면 우리도 참전하겠다"고 공언을 하고 있었기에 맥아더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뒤바뀌지 않게 하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트루먼은 핵무기 사용이 자칫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을 불러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영국(처칠)의 경고를 받아 들여 맥아더의 승인 요청을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에는 오직 미국만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정적 한 방이 될 것은 자명했다. 허나 이는 자칫 중공의 참전을 잠시 뒤로 미루는 것에 그칠 우려가 있었고, 아직 참전의사를 확실히 밝히지 않은 소련의 참전을 부를 수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 소련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는 '미 항공전단 기지'가 영국에 있었던 탓에 소련이 영국내에 있는 '미군'을 공격할 위기를 불러 올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이 발빠르게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소련의 영국 타격은 곧 유럽 전체로 확전되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핵무기 사용'은 쉽게 꺼낼 수 없는 카드였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4 후퇴 이후 치열한 '톱질 전쟁' 양상으로 전황이 흐르자 미군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단다. 한국전쟁 참전 이전까지 미군은 언제나 승리만 했었는데, 북한군과 중공군을 상대로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확고한 승리를 예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까지 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미공군이었다. 그래서 낮에는 북한 전역을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수의 B-29폭격기를 띄웠고, 네이팜탄과 소이탄을 비롯해서 수많은 폭탄을 투하해 모조리 파괴를 일삼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시야확보'를 할 수 없어 출격하지 못했고, 해가 지면 북녘에서는 땅속에서 난쟁이가 기어나오듯 꿈틀거렸다고 목격담이 전해지곤 했다. 암튼 미공군의 활약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은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전쟁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밤만 되면 인민군과 중공군의 꽹과리 소리와 피리 소리로 혼비백산한 '육군'들이 애써 차지한 진지를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낮에는 '대한민국', 밤이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단다. 그로 인해 미군이 보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고 말이다.

그러자 미군은 다시 '핵무기 카드'를 꺼내 들었단다. 애초에 핵무기를 사용하자는 맥아더는 이미 사라졌는데 말이다. 그럼 누가 꺼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트루먼 미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일찍이 일본의 항복을 끌어냈던 두 방의 핵폭탄처럼 한국전쟁도 그렇게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을까? 허나 한국전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이대로 핵무기 사용은 절대 쓰이지 않을 것 같았는데, 또 꺼낸 이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트루먼'이 끝내지 못한 한국전쟁을 자신이 확실히 끝내겠다면서 말이다. 비록 '휴전'일지언정 더는 미군의 피해를 감당할 수 없었고, 미국내 여론도 '한국전쟁'에 대해서 그리 곱지는 않았다고 한다. 결국 전쟁은 '피와 돈'을 펑펑 쓰는 소모전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미국은 돈을 펑펑 써도 될 정도로 엄청난 부자 나라였다. 당시 미 함정에서 쏘는 함대지 함포 1발의 가격이 약 1만 달러였다고 한다. 이 값이면 미국에서 '캐딜락 1대' 값과 맞먹었기 때문에 함정에서 함포를 발사할 때 수병들에게 "캐딜락 1대 날아간다"를 외치게 했을 정도란다. 이렇게 값비싼 무기를 미국인의 세금을 들여 '한국전쟁'에 쏟아 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군이 3년간 한국전쟁에서 쏜 포탄의 가격만 따지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쐈던 포탄 가격과 맞먹을 정도고, 휴전을 일주일 남기고 미군이 평양에 쏟아부은 포탄과 폭탄의 수량이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이 쐈던 수량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라고 한다. 미국은 이런 어마어마한 비용을 치르며 '한국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을 대신해서 미국이 싸워준 것만 같아 고마워 해야 할 것만 같다. 실제로 이승만 시절부터 '친미'를 넘어 '숭미'를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전국민이 이런 생각을 갖게끔 강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은 그렇게 많은 무기를 퍼부으면서 '인명살상'을 비롯해서 '전국토를 유린한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은 조금이라도 없었을까? 만약 '한반도'가 아니라 '자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었더라도 이런 무차별적이고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을까? 미국이 이런 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인종차별'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 눈에는 '아시아인'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핵무기 카드'를 그렇게 쉽게 입에 오르내리며, 저들이 궁지에 몰릴 때면 만지작거렸던 것이다. 무려 26발이 넘는 핵무기를 말이다.

이런 까닭에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을 '반공(反共) 전쟁'이 아니라 '반한(反韓) 전쟁'이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포가튼 워)'이라고 부른단다. 미국이 어마무시한 비용과 군사의 손실을 본 전쟁인데도, 승리하지 못했기에 기억하지 않고 싶어하는 전쟁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어떤 전쟁인가? 우리는 '한국전쟁'을 잘 기억하고 잘 알고 있는가? 솔직히 나도 잘 몰랐다. 그러나 이제라도 제대로 알고자 한다. 정말이지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너무 많고 너무 비참해서 미처 리뷰에 담지 못한 내용이 너무 많다. 어떻게 담아내야 할지 감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이야기로 정리해낼 거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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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4)

[My Review MMCLXVII / 인물과사상사 26번째 리뷰] 웬만하면 <한국 근대사 산책>을 마무리하고 <한국 현대사 산책>을 리뷰하려 했는데, 중간에 일이 꼬이는 바람에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단 '한국전쟁'이 몹시 궁금해졌기에 순서를 무시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리뷰할 예정이다. 혹시라도 '나의 역사리뷰'에 기대를 품으신 분이 계셨다면, 얼른 큰 기대를 하지 마시길 간절히 앙망한다. 암튼 이전에도 밝혔지만, 한국의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아진 외국인들이 점차 늘고 있는 시점에 '한국사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역사리뷰를 구상했더랬다. 그래서 그 첫 번째로 '강준만의 역사 산책' 시리즈를 선택했는데, 주욱 훑어보다 내가 '한국전쟁'에 대해서 기본 상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닌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반공교육'은 기본이었다. 그리고 '현대사'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역사적 의식이 있으신 선생님들 덕분에 뭔가 깨어있고, 남다른 역사수업을 듣긴 했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런 '수업 밖의 이야기'를 들었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 '역사적 이해'가 태부족했던 탓에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과거 독재시절의 무도한 정치세력에 대한 진실을 들춰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시절에도 그저 막연한 정의감에 들떴었을 뿐,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 없었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다 나름대로의 역사인식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에 '3당 합당'을 지켜보고, '5공 청문회'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형 판결을 받는 것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저들이 우리 나라의 대통령씩이나 했음에도 '사형 판결'을 받게 된 것은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후로도 오랫동안 '대한민국 민주제'는 몸살을 앓았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부터 6월 항쟁까지 대략적인 흐름을 살펴볼 기회가 생겼지만, 내 또래 세대에게는 이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내가 93학번에, 이듬해 '군입대'를 하고, 제대한 뒤에 졸업을 하니 세상은 'IMF 시대'를 맞이했더랬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했다. 어찌어찌 취직을 하긴 했지만 '비정규직'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한 번 비정규직은 '정규직 전환'이 되기 힘들어 자금 밑천을 모아서 '자영업자의 길'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돈 버는 재주는 없었던 관계로 큰 돈을 벌지도 못하고 그저 입에 풀칠만 하며 살면서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내게 '역사'는 아이들에게 희망찬 미래를 심어주는 근본으로 다가왔다. 헌데 그게 쉽지 않았다. 막상 독서논술로 '역사'를 가르치다보니 대한민국 역사에 자긍심을 심어줄 것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거대한 영토'를 정복한 적도 없고, '강력한 힘'을 만방에 떨쳐본 적도 없으며, 수천 번이 넘는 '외세의 침략'을 당하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엄청난 침략에도 꿋꿋하게 지켜낸 우리 조상들의 숭고한 업적에 자긍심을 가질 만도 하지만, 근현대사 부분에만 들어가면 아이들의 눈빛이 빛을 잃어갔기 때문이다. 바로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으로 처참할 지경으로 전락해버린 한국사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 어릴 적에는 이 부분을 공부할 때 '공산당 때려 잡자'는 프로파간다(?)를 강요받으며 초등학생에게 맹목적으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이승복 어린이를 본받자는 것으로 모든 근현대사를 퉁쳐버리곤 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와 박정희 대통령은 각각 '한국의 독립'과 '구국의 영웅'으로 세뇌(!)를 당하며 일본놈과 북한괴뢰는 무조건 나쁘다는 교육을 받을 뿐이었다.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가르치기보다는 '적개심'을 강조하며, 우리가 못 살고 힘 없는 까닭은 다 '일본과 북한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가르칠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금의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못하겠더란 말이다. 그게 '사실'일지언정 우리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이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일본이 무슨 나쁜짓을 했고, 북한을 왜 미워해야 하는지 이유라도 정확히 가르쳐야 될 것이 아니냔 말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 그런 '위기와 고난'조차 잘 극복해내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을 자랑 삼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외국인들도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고 말이다.

자, 각설하고, 한국의 1950년대를 살펴보자. 해방이 되고 미군정 시절을 지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루어졌다. 50년 당시에는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집권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했다. 이승만은 뭘하고 있었을까? 전쟁이 개시하기 직전까지 '북진통일론'을 부르짓으며 공갈(!)을 치고 있었단다. 우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으로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를 빼버린 것을 지목하면서 미국의 실책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보았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왜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면서 변변한 무기조차 남기지 않고 싹 가져가버렸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미국의 안보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시켜 버렸던 것일까? 그건 이승만이 공공연하게 '북진통일론'을 내세우며 전쟁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왜? 미국은 이승만에게 '미국의 무기'를 제공하거나, 전쟁 발발시 '미국의 자동 참전'이 확정된다면 한반도는 곧바로 전쟁이 발발할 거라고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소간의 냉전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다. 더구나 미국은 중국의 장개석을 팍팍 지원했다가 중공의 모택동에게 허무하게 패배하는 일까지 당했더랬다. 그랬기에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생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소련의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아직 회복을 장담하기엔 이른 시기였다. 더구나 적대국이었던 미국은 '핵무기'까지 보유하고 있었기에 전면전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미소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 뻔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미국이 '남한의 공산화'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미국에는 '메카시 광풍'이 불 정도로 반공 정서가 대단했기에 대놓고 순순히 한반도가 완전한 공산화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전쟁은 부담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연일 '북진통일'을 외치며 전쟁이 벌어지길 원했고, 승리에 자신감이 넘쳤으며, 전쟁만 벌어진다면 '통일'은 식은 죽 먹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럼 이승만이 전쟁 준비를 철저히 했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변변한 무기도 없어서 북한의 남침 개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만 것을 다 알지 않느냔 말이다. 그럼 이승만은 왜 전쟁 운운했던 것일까? 오로지 '미국 참전'만을 염두에 두고서 공갈을 서슴지 않았었다고 낱낱이 밝혀졌다. 정말이지 무능력한 지도자였다. 망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로 말이다.

이순신 장군의 말마따나 '천운'이었다. 북한이 남침을 한 지 불과 한 달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오자 미국은 부랴부랴 '유엔안전보장 이사회'를 열었고, 한국전쟁 참전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였던 '소련의 불참'이 없었더라면 유엔의 참전은 속단할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오직 미국의 '단독 참전'이 있었을 순 있겠지만, 미국 혼자만의 '독박'을 뒤집어 써야 했기 때문에 남한에 전폭적인 군사지원, 물량지원, 원조보급 등등에 '한계'가 분명했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16개국 유엔참전국' 가운데 90% 이상을 미국이 비용을 대는 것에는 기정사실이었다. 당시 자유진영 가운데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나라는 오직 미국 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을 하였고, 부산에 집결해 있던 미군 병력은 38선 이남까지 빠르게 북상할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전개는 '한국군'의 북진을 시작으로 '미군'도 38선을 넘어 평양과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는 것까지는 성공하게 된다.

그런데 7월, 8월, 9월, 석 달 동안 북한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 남아..아니, 남을 수밖에 없었던 남한 주민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이승만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한강다리 폭파'를 지시하고, 자신은 빠르게 대구까지 도망을 간다. 아직 서울시민들이 피란을 가지도 못한 상황인데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서울을 벗어나 대구까지 도망간 상황에서 '자신의 육성'이 담긴 녹음방송을 하면서 서울을 지켜낼 거라고 '공갈'을 쳤고, 남한 주민들에겐 '생업 종사'에 매진하며 '안심'하라고 말했다. 이 방송을 할 때가 이승만이 '대전'에 잠시 머물 때라고 한다. 대구까지 도망갔다가 "각하, 너무 멀리 가셨습니다"라는 조언 한마디에 어찌어찌 대전까지 올라가 방송을 했지만, 그 방송을 한 뒤에 곧바로 또 도주를 했고, 그렇게 남한 전역을 하룻밤이 멀다하고 분주하게 도망(?)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도 9월에 서울 수복을 한 뒤에 '공산 치하'에 살아남아 국군과 미군을 열렬히 환영하던 서울시민들에게 '사상검증'을 하며 '부역자 검거'에 열을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억울할 일인데 이승만을 쫓아 일찌감치 '한강'을 넘어 도망갔던 이들은 '애국자' 대접을 하면서, 이승만의 육성 방송을 믿고 북한인민군의 무도한 폭력을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남은 '잔류파'에 대해서는 사상검증을 들이대며 '사형판결'을 내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모욕적인 처사에 불만을 표출이라도 할라치면 '빨갱이 낙인'을 찍고 또 죽여버리니, 이승만을 믿고 따르는 사람일지라도 그 참상과 염치 없음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도 외신들은 '한국의 교육열'이 매우 높다고 추켜세우는 일도 있었다. 전시인데도 부산, 대구, 광주 등등 지붕도 없는 곳에 '흑판(칠판)' 하나 덜렁 걸어놓고 맨 바닥에 앉아 선생님의 가르침에 집중하는 모습이 외국기자들의 눈에는 신기했던 모양이다. 교과서도 몇 권 없어서 1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고작 몇 권의 책을 함께 보면서 수업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도 이 내용은 '진학시험'에 꼭 나오는 내용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했다고 한다. 부모들도 아무리 굶어죽을 판이어도 자식들을 학교에는 꼭 보냈다고 한다. 이들 아이들 가운데 '이북 출신'들도 많았는데, 이들을 '삼팔따라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놀음에서 유래한 명칭인데, 이들이 월남을 할 때 가지고 내려온 것이 오직 '맨몸' 하나 뿐이었기 때문에 '3+8=한끗'에 불과한 처지와 다를 바가 없었기에 그리 불렸다고 한다. 전쟁통에 이리저리 피란하다 보면 몸에 지닌 것이 전부인데, 그마저도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다 팔고 나면 남은 것이라고는 '머릿속에 든 지식'밖에 없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을까? 남다른 교육열의 진실은 바로 '이승만의 무능'이 단단히 한 몫 했을 거라는 역사학자들의 지적이 일리가 있다. 왜냐면 이승만을 따라 도망갔던 이들이 대부분 '가진 것 많은 부자들'이고, '권력을 지닌 자들'이었으며, 군대나 경찰 등 '관리직에 몸담고 있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들의 자식들은 징집 대상에서 제외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시에도 대학은 열었고, 졸업생을 배출할 정도였단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진실은 '대학생 신분'이 확인이 되면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 참전'과 함께 여지없이 밀려버렸다. 장진호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한 미군은 '흥남 철수'를 지시했고, 궤멸당한 북한군을 대신해서 중공군의 노련한 유격전술에 의해 미군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연이은 패배를 했던 것이다. 물론 중공군의 전략전술(심리전)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전혀 예상 못한 '동장군'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시기가 7월, 8월의 '삼복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남쪽 지역이었다. 그런데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을 때가 11월이었고, 맥아더를 비롯해서 거의 대부분의 유엔군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 전쟁은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이렇게 빠른 진격에 의해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고, 대다수의 참전 유엔군(대다수 미군)은 '월동장비'도 없이 홑겹의 얇은 군복을 걸치고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맹추위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공군의 요란한 꽹과리와 피리 소리도 사방팔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심리전술'에 휘말려서 다들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그렇게 1월에는 서울까지 다시 내주게 된다. 이른바 1·4 후퇴다. 이렇게 대전까지 밀렸다가 다시 전황을 회복하고 밀고 올라가는 전형적인 '톱질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런 밀고 밀리는 '톱질 전쟁'에서 쉽게 벌어지는 양상이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런 전황에 북한의 김일성, 중공의 모택동, 그리고 미국의 트루먼은 '정전'을 떠올리고 '휴전'을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의 스탈린, 미군의 맥아더, 그리고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며 끝장을 보려고 했단다. 이런 와중에 죽어나가는 것은 참전했던 '병사'들이다. 이런 병사들이 '톱질 전쟁'으로 인해 갈려서 사라지듯 죽어나간 것이다. 돈 많은 부자들, 권력자들, 관리직에 올라 한 자리씩 해먹던 자칭 '애국자'들의 자식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전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무능한 이승만은 힘 없고 '빽' 없는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의 자식들을 전장의 소모품으로 써먹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한국군은 죽을 때 "어머니"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빽"이라고 외치고 죽는다는 얘기가 떠돌았을까? 뒷배를 봐줄 변변한 빽도 없는 설움에 하나 뿐인 목숨을 잃게 된 것이라며 그런다는 웃지 못할 우스개소리가 나돌고 있던 시절에 '뜨거운 교육열'의 원인을 무엇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할까?

휴전 회담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전쟁은 계속 되었다. 미군은 회담에서 유리한 조항을 얻기 위해 북한 전역을 '공습'으로 파괴했고, 북한에는 남아 있는 건물이 없을 지경이었고, 낮에는 '움직이는 모든 것'이 표적이었고, 네이팜탄, 소이탄, 고폭탄을 가리지 않고 아낌없이 투하했다고 한다. 회담 초기에는 '개성'에 회담장을 열어서 유엔측 대표가 '백기'를 차량에 걸었기에 북한은 이를 '선전용'으로 이용하며 "저들이 항복을 하러 우리측을 찾아왔다"는 소문을 퍼뜨려 이득을 챙겼다고 한다. 허나 곧이어 미 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인해 압록강의 '수풍댐'까지 파괴가 되는 지경에 이르자 김일성조차 '휴전'을 서둘러 진행하고자 했다고 한다. 한편 남한에서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험준한 지리산을 대대적으로 수색했는데도 일거에 소통할 수 없게 되자 인근 주민들을 '빨갱이 부역자'로 몰아서 모조리 학살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통에 건장한 남자들은 죄다 전선에 끌려가고, 빨치산에게 협조하지 않아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남은 주민이라고는 노인과 여자, 그리고 어린이 뿐이었는데도, '빨치산 토벌'을 지시한 군경의 고위부가 하달한 '목표달성'을 위해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하고, 심지어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시체를 쌓아두고 불을 지르거나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서 '빨치산의 소행'이라고 허위보고를 일삼았다고 한다. 심지어 사살한 주민들이 너무 많아 '대통령 재선'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축소 보고'를 했는데, 그렇게 수백 명이 넘는 무고한 주민을 학살하고도 흉흉한 소문이 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런 만행을 접한 남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승만 독재'에 아주 잘 활용 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이승만에 '반(反)'하는 행위를 하면 곧바로 '빨갱이'로 찍히고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시에 무슨 짓을 당한들 어디에 항변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힘 없고 빽도 없는 이들이 말이다.

이런 정황은 '야당 의원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했고, 이승만의 무능과 무도함을 지적하며 이승만의 '재선'을 막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모든 시도는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국회의원들에게 인기가 추락하자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하기 위해 개헌을 시도했고, 이를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야당 의원들과 의식 있는 여당 의원들을 협박과 회유를 하며 '개헌'에 성공했다. 심지어 '이승만 암살미수 사건'까지 벌어졌다. 의열단 출신 유시태가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의원 김시태의 암살 모의에 가담해서 '권총'을 준비했고, 이승만의 등뒤에서 격발을 했지만, '불발탄'이어서 총알이 발사가 되지 않아 현장에서 검거가 되어 사형선고를 받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거제도에서는 '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무려 360만 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전체 포로 수는 17만6000명으로 '전쟁포로' 뿐만 아니라 '민간인 억류자 5만 명', '중국군 2만 명', '여자 포로 3000명'이 포함된 숫자라고 한다. 근데 엄청난 숫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제대로 분류'하지 못하고 '정규 인민군 출신', '비공산주의자로 동원된 인민군 출신', '남한 출신 공산주의자 의용군'과 '비공산주의자 의용군', '중국군 포로', '피난민 포로', '민간인 억류자' 등등이 한데 섞여서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제대로 분류되지 않아 '서로' 싸우는 일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포로수용소를 관리하는 주체인 '미군'에 의한 폭력과 학살이 더 큰 문제였다. 왜냐면 휴전회담이 마지막 사항이 바로 '포로석방'이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론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포로들은 '자동석방' 되어야 한다. 그런데 미군은 '도덕적 우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반공 포로'의 경우에는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남한에 잔류시키겠다고 '자원 석방'을 제시하고, 이를 고집한 것이다. 어쩌면 미국으로서는 전쟁에서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해서 '공산주의'보다 '자유주의'를 선택하는 포로들이 더 많음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 우위'를 얻기 위해서 자행한 일이 포로들에게 '반공교육'을 강요하고, 전향을 하지 않은 포로들에게 린치를 가하며, 저항하는 포로들은 폭력으로 진압하거나 심하면 학살시켜 버리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수차례  지휘관이 바뀌었지만, 포로들을 향한 만행은 사그라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외신은 열악한 환경(한반도 전역이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속에 취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도 51년에 '한국의 내정'을 취재하고 간 외국 기자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격"이라고 혹평을 했단다. 이 말은 영국 런던 <타임스>가 51년 10월 1일자 사설에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는데, 52년 휴전 회담 말미에 벌어진 '거제도 포로 학살'을 자행한 미군을 보았을 땐 어떤 기사를 쏟아냈을지 궁금하다. 암튼 한국전쟁은 안팎에서 자행된 만행과 학살 때문에 더욱 비참한 일만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랬던 대한민국이 70년 뒤에는 '민주주의의 교과서'라는 극찬을 받고 있으니 역사의 평가를 어찌 내려야 할까? 기적일까? 필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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