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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질서 - 의도를 벗어난 모든 현상에 관한 우주적 대답
뤼디거 달케 지음, 송소민 옮김 / 터닝페이지 / 2025년 12월
평점 :
<보이지 않는 질서 : 의도를 벗어난 모든 현상에 관한 우주적 대답> 뤼디거 달케 / 송소민 / 터닝페이지 (2025)
[My Review MMCLXIX / 터닝페이지 2번째 리뷰] 제목에 끌려서 읽고 싶은 책이었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를 움직이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경제학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조언'대로 경제를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가급적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잡는 역할만 할 뿐, 인위적으로 규제를 하고 가혹한 형벌로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면 잘 굴러갈 수 있었던 경제도 폭망에 이르게 된다고 한결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제전문가들이 애덤 스미스를 거들먹거리며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는 만능치트키라고 말한다면 경제 비전문가일지라도 그를 한물 간 사람 취급할 것이다. 왜냐면 세계경제는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고, '경제위기'도 더욱 고차원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제대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학기술적인 예를 하나 더 들자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구한 '페니실린(항생제)'이 21세기인 현재에는 아무 짝에도 효험을 보이지 않는 '낡은 항생제'로 전락한 것을 잘 알 것이다. 질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가 기존의 항생제에 면역이 생겨서 페니실린보다 훨씬 더 강한 새 항생제가 아니면 효험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항생제에 면역기능을 가진 '슈퍼 박테리아'가 존재한다고 밝혀지지 않았는가. 이런 슈퍼 박테리아에 의한 감염으로 생긴 질병이라면 현재의 의료진은 더는 치료를 할 수가 없다. 오직 '자연적인 면역력'을 증가시켜서 스스로 치유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수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 책 <보이지 않는 질서>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뭐라 할 수 있을까? 십수 년간 심리학 치료를 해온 독일의 정신요법 의사인 뤼디거 달케가 쓴 책인데, 애초에 기대했던 '인문교양책'에서는 많이 벗어난 책이었다. 그렇다고 '종교책'으로 보기에도 그렇다. '과학책'은 더더군다나 아니고 말이다. 굳이 한 가지 콕 집어서 말한다면 '의학책'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가운데 '심리치료'에 핵심을 두었고, 우리에게 '위약 효과'로도 잘 알려져 있는 '플라시보 효과'의 아주 긍정적인 처방에 관한 깊은 조예를 선보여준 책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픈 현대인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는 책이라고 소개하면 딱 좋을 듯 싶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대립의 법칙'이 있다고 말이다. 서양인들에게는 좀 낯선 개념일 수 있지만, 동양 문화권에서는 널리 알려진 '음양 이론'으로 이해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는 것처럼, 여자와 남자가 각각 '음'과 '양'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이렇게 '대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서문을 열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긍정적인 생각'이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딱히 질병이 있는 것 같지도 않는데 실제로 아프다고 느끼는 까닭은 바로 이렇게 한 쪽으로 치우친 '극단적인 입장'을 고집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부정적인 생각 자체가 질병을 부르지 않지만, 각각의 대립하고 있는 '위치'를 고집하고 한 번 정한 '생각'을 바꿀 생각도 못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고인물이 썩는 것처럼 질병에 걸린 듯 아플 수밖에 없다는 이치와 맥을 같이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럼 이런 아픔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다음에 전하는 메시지에 그 해법이 있다. 바로 '공명의 법칙'이다. 음과 양으로 대립하고 있는 세상이지만, 두 개념은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공명'하는 것이 대원칙이라는 것이다. 낮이었다가 자연스레 밤이 되는 것처럼, 빛과 그림자는 서로 한 쪽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서로 변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럼 '선과 악'도 바뀐단 말인가? 우리는 하루동안에도 '착한 마음'만 품지 않는다. 때로는 악당보다 더 '나쁜 마음'을 품기도 하고, 때로는 변태처럼 심하고 이상한 '나쁜 마음'을 품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정말 범죄자이기 때문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일지라도 '정상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나쁜 마음을 품었을 때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 범죄를 저질러 나쁜 사람임이 밝혀지기도 할테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내면의 도덕법칙'에 해당하는 착한 마음이 작동하여 죄를 뉘우치고 진정으로 반성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이럴 경우에도 우리는 '대립 법칙'을 고집하게 되면 단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른 사람조차 평생 범죄자로 낙인을 찍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공명의 법칙'을 잊어선 안 된다. 이게 중요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공명의 법칙'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음양의 조화'를 닮았다. 넘치는 곳이 있으면 덜어내고, 부족한 것이 생기면 채워주는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풍수지리'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의 저자가 서양사람인 독일인이라 그런지 '프로이트 무의식 이론'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 같다. 남녀의 조화를 위해서, 아니 '공명'을 위해서 섹스를 수차례 본보기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하릴없이 자세하게 '성적인 묘사'를 하거나 '지나치게 외설적(?)인 설명'이 들어가 있어서 옥에 티로 보인다. 뭐, 책을 읽다가 지루하다 느껴질 즈음 '야한 이야기'로 교실의 분위기를 집중적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점잖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실제로 고통과 아픔을 겪는 삶을 살고 있는 환자가 이 책을 읽기에는 부적절하게 보이는 대목이다.
자, 이제 '대립'과 '공명'을 이해했다면 이 책의 내용은 다 읽은 것과 마찬가지다. '음양의 조화'를 실천으로 옮기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이 책을 잘못 읽으면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일 수도 있으니 주의 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몸과 마음이 아픈 현대인들이 '통증'을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비결을 애둘러서 설명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헷갈릴 수 있는 까닭은 여기서부터 '고대'와 '현대'의 지혜를 오르내리는 롤러코스터를 타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과학적'으로 판명된 고대의 자연철학자들의 주장도 곧이 곧대로 인용하고 있어서 그렇다. 그냥 다 무시해도 좋다. 그저 비유적인 표현이라도 봐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 '플라시보 효과'다. 의료진도 포기한 말기암 환자가 '가짜약(위약)'을 복용하고,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됐다는 의사의 말만 믿고 기적처럼 완치가 되는 사례가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전원이 꺼진 냉동창고에 갇힌 선원이 '영상의 온도'속에서도 극한의 냉기에 오랫동안 노출된 듯이 꽁꽁 얼어죽은 일도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 긍정'만이 만병통치약이고,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춘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 책의 저자가 가장 강조한 내용은 '자연스러움'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원활하게 잘 돌아가는 궁극적인 비결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극단적으로 강조를 하다보니 '남녀 간의 섹스'를 비교 우위적으로 강조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허나 이를 '사랑'으로 치환해서 읽으면 '보이지 않는 질서'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사랑'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절대 '섹스'뿐이라고 읽으면 안 된다. 그럼 '사이비 종교'에서 강조하는 그것과 다를 바가 없고, 잘못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광신도'만 양산할 뿐이다.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르면 안 된다. 예술과 외설이 '한 끗' 차이인 것과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