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4)

[My Review MMCLXVIII / 인물과사상사 27번째 리뷰] 얼마 전 너튜브 채널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설문 조사'를 했는데, 한국 전쟁의 발발 날짜는 많이 알고 있는 편인데, 정전일(휴전) 날짜는 잘 모르고 있다는 결과를 보여주면서 우리 나라 MZ세대의 '역사 관심도'가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는 걱정을 했더랬다. 하지만 이는 꼭 MZ세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도 한국 전쟁이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라는 것은 숱하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휴전 날짜는 1953년이라고 년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휴전 날짜'를 명확히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고, '휴전'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분위기였고, 오직 '북진통일'만이 옳은 일이라고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나이 50살이 넘은 나도 이럴진데 요즘 MZ세대의 '무관심'을 탓할 수 있겠는가? 참고로 한국전쟁 휴전 날짜는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9분이라고 한다. 나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요즘에야 '검색'을 하거나 '챗GPT'에게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새로 알게 된 것은 한국전쟁에도 '핵무기 사용'이 될 뻔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내용도 얼핏 알고는 있었는데, 핵무기 사용을 강하게 주장한 사람이 '더글러스 맥아더'였고, 이에 핵무기 사용을 불허한 이가 '트루먼 미 대통령'이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는 너무 단편적인 내용이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애초에 맥아더는 전쟁의 승기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핵무기 26발'을 중국의 주요 거점에 촘촘히 투하하려고 계획했었단다. 중공의 주은래(저우언라이)가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한국군만 38선을 넘는다면 중국군은 관망하겠지만, 미군(유엔군)이 넘어온다면 우리도 참전하겠다"고 공언을 하고 있었기에 맥아더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뒤바뀌지 않게 하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트루먼은 핵무기 사용이 자칫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을 불러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영국(처칠)의 경고를 받아 들여 맥아더의 승인 요청을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에는 오직 미국만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정적 한 방이 될 것은 자명했다. 허나 이는 자칫 중공의 참전을 잠시 뒤로 미루는 것에 그칠 우려가 있었고, 아직 참전의사를 확실히 밝히지 않은 소련의 참전을 부를 수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 소련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는 '미 항공전단 기지'가 영국에 있었던 탓에 소련이 영국내에 있는 '미군'을 공격할 위기를 불러 올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이 발빠르게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소련의 영국 타격은 곧 유럽 전체로 확전되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핵무기 사용'은 쉽게 꺼낼 수 없는 카드였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4 후퇴 이후 치열한 '톱질 전쟁' 양상으로 전황이 흐르자 미군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단다. 한국전쟁 참전 이전까지 미군은 언제나 승리만 했었는데, 북한군과 중공군을 상대로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확고한 승리를 예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까지 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미공군이었다. 그래서 낮에는 북한 전역을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수의 B-29폭격기를 띄웠고, 네이팜탄과 소이탄을 비롯해서 수많은 폭탄을 투하해 모조리 파괴를 일삼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시야확보'를 할 수 없어 출격하지 못했고, 해가 지면 북녘에서는 땅속에서 난쟁이가 기어나오듯 꿈틀거렸다고 목격담이 전해지곤 했다. 암튼 미공군의 활약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은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전쟁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밤만 되면 인민군과 중공군의 꽹과리 소리와 피리 소리로 혼비백산한 '육군'들이 애써 차지한 진지를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낮에는 '대한민국', 밤이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단다. 그로 인해 미군이 보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고 말이다.

그러자 미군은 다시 '핵무기 카드'를 꺼내 들었단다. 애초에 핵무기를 사용하자는 맥아더는 이미 사라졌는데 말이다. 그럼 누가 꺼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트루먼 미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일찍이 일본의 항복을 끌어냈던 두 방의 핵폭탄처럼 한국전쟁도 그렇게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을까? 허나 한국전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이대로 핵무기 사용은 절대 쓰이지 않을 것 같았는데, 또 꺼낸 이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트루먼'이 끝내지 못한 한국전쟁을 자신이 확실히 끝내겠다면서 말이다. 비록 '휴전'일지언정 더는 미군의 피해를 감당할 수 없었고, 미국내 여론도 '한국전쟁'에 대해서 그리 곱지는 않았다고 한다. 결국 전쟁은 '피와 돈'을 펑펑 쓰는 소모전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미국은 돈을 펑펑 써도 될 정도로 엄청난 부자 나라였다. 당시 미 함정에서 쏘는 함대지 함포 1발의 가격이 약 1만 달러였다고 한다. 이 값이면 미국에서 '캐딜락 1대' 값과 맞먹었기 때문에 함정에서 함포를 발사할 때 수병들에게 "캐딜락 1대 날아간다"를 외치게 했을 정도란다. 이렇게 값비싼 무기를 미국인의 세금을 들여 '한국전쟁'에 쏟아 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군이 3년간 한국전쟁에서 쏜 포탄의 가격만 따지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쐈던 포탄 가격과 맞먹을 정도고, 휴전을 일주일 남기고 미군이 평양에 쏟아부은 포탄과 폭탄의 수량이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이 쐈던 수량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라고 한다. 미국은 이런 어마어마한 비용을 치르며 '한국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을 대신해서 미국이 싸워준 것만 같아 고마워 해야 할 것만 같다. 실제로 이승만 시절부터 '친미'를 넘어 '숭미'를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전국민이 이런 생각을 갖게끔 강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은 그렇게 많은 무기를 퍼부으면서 '인명살상'을 비롯해서 '전국토를 유린한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은 조금이라도 없었을까? 만약 '한반도'가 아니라 '자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었더라도 이런 무차별적이고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을까? 미국이 이런 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인종차별'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 눈에는 '아시아인'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핵무기 카드'를 그렇게 쉽게 입에 오르내리며, 저들이 궁지에 몰릴 때면 만지작거렸던 것이다. 무려 26발이 넘는 핵무기를 말이다.

이런 까닭에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을 '반공(反共) 전쟁'이 아니라 '반한(反韓) 전쟁'이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포가튼 워)'이라고 부른단다. 미국이 어마무시한 비용과 군사의 손실을 본 전쟁인데도, 승리하지 못했기에 기억하지 않고 싶어하는 전쟁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어떤 전쟁인가? 우리는 '한국전쟁'을 잘 기억하고 잘 알고 있는가? 솔직히 나도 잘 몰랐다. 그러나 이제라도 제대로 알고자 한다. 정말이지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너무 많고 너무 비참해서 미처 리뷰에 담지 못한 내용이 너무 많다. 어떻게 담아내야 할지 감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이야기로 정리해낼 거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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