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4)

[My Review MMCLXVII / 인물과사상사 26번째 리뷰] 웬만하면 <한국 근대사 산책>을 마무리하고 <한국 현대사 산책>을 리뷰하려 했는데, 중간에 일이 꼬이는 바람에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단 '한국전쟁'이 몹시 궁금해졌기에 순서를 무시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리뷰할 예정이다. 혹시라도 '나의 역사리뷰'에 기대를 품으신 분이 계셨다면, 얼른 큰 기대를 하지 마시길 간절히 앙망한다. 암튼 이전에도 밝혔지만, 한국의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아진 외국인들이 점차 늘고 있는 시점에 '한국사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역사리뷰를 구상했더랬다. 그래서 그 첫 번째로 '강준만의 역사 산책' 시리즈를 선택했는데, 주욱 훑어보다 내가 '한국전쟁'에 대해서 기본 상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닌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반공교육'은 기본이었다. 그리고 '현대사'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역사적 의식이 있으신 선생님들 덕분에 뭔가 깨어있고, 남다른 역사수업을 듣긴 했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런 '수업 밖의 이야기'를 들었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 '역사적 이해'가 태부족했던 탓에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과거 독재시절의 무도한 정치세력에 대한 진실을 들춰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시절에도 그저 막연한 정의감에 들떴었을 뿐,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 없었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다 나름대로의 역사인식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에 '3당 합당'을 지켜보고, '5공 청문회'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형 판결을 받는 것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저들이 우리 나라의 대통령씩이나 했음에도 '사형 판결'을 받게 된 것은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후로도 오랫동안 '대한민국 민주제'는 몸살을 앓았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부터 6월 항쟁까지 대략적인 흐름을 살펴볼 기회가 생겼지만, 내 또래 세대에게는 이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내가 93학번에, 이듬해 '군입대'를 하고, 제대한 뒤에 졸업을 하니 세상은 'IMF 시대'를 맞이했더랬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했다. 어찌어찌 취직을 하긴 했지만 '비정규직'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한 번 비정규직은 '정규직 전환'이 되기 힘들어 자금 밑천을 모아서 '자영업자의 길'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돈 버는 재주는 없었던 관계로 큰 돈을 벌지도 못하고 그저 입에 풀칠만 하며 살면서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내게 '역사'는 아이들에게 희망찬 미래를 심어주는 근본으로 다가왔다. 헌데 그게 쉽지 않았다. 막상 독서논술로 '역사'를 가르치다보니 대한민국 역사에 자긍심을 심어줄 것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거대한 영토'를 정복한 적도 없고, '강력한 힘'을 만방에 떨쳐본 적도 없으며, 수천 번이 넘는 '외세의 침략'을 당하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엄청난 침략에도 꿋꿋하게 지켜낸 우리 조상들의 숭고한 업적에 자긍심을 가질 만도 하지만, 근현대사 부분에만 들어가면 아이들의 눈빛이 빛을 잃어갔기 때문이다. 바로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으로 처참할 지경으로 전락해버린 한국사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 어릴 적에는 이 부분을 공부할 때 '공산당 때려 잡자'는 프로파간다(?)를 강요받으며 초등학생에게 맹목적으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이승복 어린이를 본받자는 것으로 모든 근현대사를 퉁쳐버리곤 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와 박정희 대통령은 각각 '한국의 독립'과 '구국의 영웅'으로 세뇌(!)를 당하며 일본놈과 북한괴뢰는 무조건 나쁘다는 교육을 받을 뿐이었다.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가르치기보다는 '적개심'을 강조하며, 우리가 못 살고 힘 없는 까닭은 다 '일본과 북한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가르칠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금의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못하겠더란 말이다. 그게 '사실'일지언정 우리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이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일본이 무슨 나쁜짓을 했고, 북한을 왜 미워해야 하는지 이유라도 정확히 가르쳐야 될 것이 아니냔 말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 그런 '위기와 고난'조차 잘 극복해내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을 자랑 삼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외국인들도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고 말이다.

자, 각설하고, 한국의 1950년대를 살펴보자. 해방이 되고 미군정 시절을 지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루어졌다. 50년 당시에는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집권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했다. 이승만은 뭘하고 있었을까? 전쟁이 개시하기 직전까지 '북진통일론'을 부르짓으며 공갈(!)을 치고 있었단다. 우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으로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를 빼버린 것을 지목하면서 미국의 실책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보았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왜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면서 변변한 무기조차 남기지 않고 싹 가져가버렸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미국의 안보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시켜 버렸던 것일까? 그건 이승만이 공공연하게 '북진통일론'을 내세우며 전쟁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왜? 미국은 이승만에게 '미국의 무기'를 제공하거나, 전쟁 발발시 '미국의 자동 참전'이 확정된다면 한반도는 곧바로 전쟁이 발발할 거라고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소간의 냉전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다. 더구나 미국은 중국의 장개석을 팍팍 지원했다가 중공의 모택동에게 허무하게 패배하는 일까지 당했더랬다. 그랬기에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생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소련의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아직 회복을 장담하기엔 이른 시기였다. 더구나 적대국이었던 미국은 '핵무기'까지 보유하고 있었기에 전면전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미소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 뻔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미국이 '남한의 공산화'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미국에는 '메카시 광풍'이 불 정도로 반공 정서가 대단했기에 대놓고 순순히 한반도가 완전한 공산화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전쟁은 부담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연일 '북진통일'을 외치며 전쟁이 벌어지길 원했고, 승리에 자신감이 넘쳤으며, 전쟁만 벌어진다면 '통일'은 식은 죽 먹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럼 이승만이 전쟁 준비를 철저히 했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변변한 무기도 없어서 북한의 남침 개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만 것을 다 알지 않느냔 말이다. 그럼 이승만은 왜 전쟁 운운했던 것일까? 오로지 '미국 참전'만을 염두에 두고서 공갈을 서슴지 않았었다고 낱낱이 밝혀졌다. 정말이지 무능력한 지도자였다. 망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로 말이다.

이순신 장군의 말마따나 '천운'이었다. 북한이 남침을 한 지 불과 한 달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오자 미국은 부랴부랴 '유엔안전보장 이사회'를 열었고, 한국전쟁 참전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였던 '소련의 불참'이 없었더라면 유엔의 참전은 속단할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오직 미국의 '단독 참전'이 있었을 순 있겠지만, 미국 혼자만의 '독박'을 뒤집어 써야 했기 때문에 남한에 전폭적인 군사지원, 물량지원, 원조보급 등등에 '한계'가 분명했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16개국 유엔참전국' 가운데 90% 이상을 미국이 비용을 대는 것에는 기정사실이었다. 당시 자유진영 가운데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나라는 오직 미국 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을 하였고, 부산에 집결해 있던 미군 병력은 38선 이남까지 빠르게 북상할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전개는 '한국군'의 북진을 시작으로 '미군'도 38선을 넘어 평양과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는 것까지는 성공하게 된다.

그런데 7월, 8월, 9월, 석 달 동안 북한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 남아..아니, 남을 수밖에 없었던 남한 주민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이승만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한강다리 폭파'를 지시하고, 자신은 빠르게 대구까지 도망을 간다. 아직 서울시민들이 피란을 가지도 못한 상황인데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서울을 벗어나 대구까지 도망간 상황에서 '자신의 육성'이 담긴 녹음방송을 하면서 서울을 지켜낼 거라고 '공갈'을 쳤고, 남한 주민들에겐 '생업 종사'에 매진하며 '안심'하라고 말했다. 이 방송을 할 때가 이승만이 '대전'에 잠시 머물 때라고 한다. 대구까지 도망갔다가 "각하, 너무 멀리 가셨습니다"라는 조언 한마디에 어찌어찌 대전까지 올라가 방송을 했지만, 그 방송을 한 뒤에 곧바로 또 도주를 했고, 그렇게 남한 전역을 하룻밤이 멀다하고 분주하게 도망(?)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도 9월에 서울 수복을 한 뒤에 '공산 치하'에 살아남아 국군과 미군을 열렬히 환영하던 서울시민들에게 '사상검증'을 하며 '부역자 검거'에 열을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억울할 일인데 이승만을 쫓아 일찌감치 '한강'을 넘어 도망갔던 이들은 '애국자' 대접을 하면서, 이승만의 육성 방송을 믿고 북한인민군의 무도한 폭력을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남은 '잔류파'에 대해서는 사상검증을 들이대며 '사형판결'을 내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모욕적인 처사에 불만을 표출이라도 할라치면 '빨갱이 낙인'을 찍고 또 죽여버리니, 이승만을 믿고 따르는 사람일지라도 그 참상과 염치 없음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도 외신들은 '한국의 교육열'이 매우 높다고 추켜세우는 일도 있었다. 전시인데도 부산, 대구, 광주 등등 지붕도 없는 곳에 '흑판(칠판)' 하나 덜렁 걸어놓고 맨 바닥에 앉아 선생님의 가르침에 집중하는 모습이 외국기자들의 눈에는 신기했던 모양이다. 교과서도 몇 권 없어서 1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고작 몇 권의 책을 함께 보면서 수업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도 이 내용은 '진학시험'에 꼭 나오는 내용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했다고 한다. 부모들도 아무리 굶어죽을 판이어도 자식들을 학교에는 꼭 보냈다고 한다. 이들 아이들 가운데 '이북 출신'들도 많았는데, 이들을 '삼팔따라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놀음에서 유래한 명칭인데, 이들이 월남을 할 때 가지고 내려온 것이 오직 '맨몸' 하나 뿐이었기 때문에 '3+8=한끗'에 불과한 처지와 다를 바가 없었기에 그리 불렸다고 한다. 전쟁통에 이리저리 피란하다 보면 몸에 지닌 것이 전부인데, 그마저도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다 팔고 나면 남은 것이라고는 '머릿속에 든 지식'밖에 없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을까? 남다른 교육열의 진실은 바로 '이승만의 무능'이 단단히 한 몫 했을 거라는 역사학자들의 지적이 일리가 있다. 왜냐면 이승만을 따라 도망갔던 이들이 대부분 '가진 것 많은 부자들'이고, '권력을 지닌 자들'이었으며, 군대나 경찰 등 '관리직에 몸담고 있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들의 자식들은 징집 대상에서 제외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시에도 대학은 열었고, 졸업생을 배출할 정도였단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진실은 '대학생 신분'이 확인이 되면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 참전'과 함께 여지없이 밀려버렸다. 장진호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한 미군은 '흥남 철수'를 지시했고, 궤멸당한 북한군을 대신해서 중공군의 노련한 유격전술에 의해 미군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연이은 패배를 했던 것이다. 물론 중공군의 전략전술(심리전)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전혀 예상 못한 '동장군'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시기가 7월, 8월의 '삼복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남쪽 지역이었다. 그런데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을 때가 11월이었고, 맥아더를 비롯해서 거의 대부분의 유엔군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 전쟁은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이렇게 빠른 진격에 의해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고, 대다수의 참전 유엔군(대다수 미군)은 '월동장비'도 없이 홑겹의 얇은 군복을 걸치고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맹추위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공군의 요란한 꽹과리와 피리 소리도 사방팔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심리전술'에 휘말려서 다들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그렇게 1월에는 서울까지 다시 내주게 된다. 이른바 1·4 후퇴다. 이렇게 대전까지 밀렸다가 다시 전황을 회복하고 밀고 올라가는 전형적인 '톱질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런 밀고 밀리는 '톱질 전쟁'에서 쉽게 벌어지는 양상이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런 전황에 북한의 김일성, 중공의 모택동, 그리고 미국의 트루먼은 '정전'을 떠올리고 '휴전'을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의 스탈린, 미군의 맥아더, 그리고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며 끝장을 보려고 했단다. 이런 와중에 죽어나가는 것은 참전했던 '병사'들이다. 이런 병사들이 '톱질 전쟁'으로 인해 갈려서 사라지듯 죽어나간 것이다. 돈 많은 부자들, 권력자들, 관리직에 올라 한 자리씩 해먹던 자칭 '애국자'들의 자식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전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무능한 이승만은 힘 없고 '빽' 없는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의 자식들을 전장의 소모품으로 써먹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한국군은 죽을 때 "어머니"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빽"이라고 외치고 죽는다는 얘기가 떠돌았을까? 뒷배를 봐줄 변변한 빽도 없는 설움에 하나 뿐인 목숨을 잃게 된 것이라며 그런다는 웃지 못할 우스개소리가 나돌고 있던 시절에 '뜨거운 교육열'의 원인을 무엇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할까?

휴전 회담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전쟁은 계속 되었다. 미군은 회담에서 유리한 조항을 얻기 위해 북한 전역을 '공습'으로 파괴했고, 북한에는 남아 있는 건물이 없을 지경이었고, 낮에는 '움직이는 모든 것'이 표적이었고, 네이팜탄, 소이탄, 고폭탄을 가리지 않고 아낌없이 투하했다고 한다. 회담 초기에는 '개성'에 회담장을 열어서 유엔측 대표가 '백기'를 차량에 걸었기에 북한은 이를 '선전용'으로 이용하며 "저들이 항복을 하러 우리측을 찾아왔다"는 소문을 퍼뜨려 이득을 챙겼다고 한다. 허나 곧이어 미 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인해 압록강의 '수풍댐'까지 파괴가 되는 지경에 이르자 김일성조차 '휴전'을 서둘러 진행하고자 했다고 한다. 한편 남한에서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험준한 지리산을 대대적으로 수색했는데도 일거에 소통할 수 없게 되자 인근 주민들을 '빨갱이 부역자'로 몰아서 모조리 학살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통에 건장한 남자들은 죄다 전선에 끌려가고, 빨치산에게 협조하지 않아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남은 주민이라고는 노인과 여자, 그리고 어린이 뿐이었는데도, '빨치산 토벌'을 지시한 군경의 고위부가 하달한 '목표달성'을 위해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하고, 심지어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시체를 쌓아두고 불을 지르거나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서 '빨치산의 소행'이라고 허위보고를 일삼았다고 한다. 심지어 사살한 주민들이 너무 많아 '대통령 재선'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축소 보고'를 했는데, 그렇게 수백 명이 넘는 무고한 주민을 학살하고도 흉흉한 소문이 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런 만행을 접한 남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승만 독재'에 아주 잘 활용 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이승만에 '반(反)'하는 행위를 하면 곧바로 '빨갱이'로 찍히고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시에 무슨 짓을 당한들 어디에 항변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힘 없고 빽도 없는 이들이 말이다.

이런 정황은 '야당 의원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했고, 이승만의 무능과 무도함을 지적하며 이승만의 '재선'을 막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모든 시도는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국회의원들에게 인기가 추락하자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하기 위해 개헌을 시도했고, 이를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야당 의원들과 의식 있는 여당 의원들을 협박과 회유를 하며 '개헌'에 성공했다. 심지어 '이승만 암살미수 사건'까지 벌어졌다. 의열단 출신 유시태가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의원 김시태의 암살 모의에 가담해서 '권총'을 준비했고, 이승만의 등뒤에서 격발을 했지만, '불발탄'이어서 총알이 발사가 되지 않아 현장에서 검거가 되어 사형선고를 받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거제도에서는 '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무려 360만 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전체 포로 수는 17만6000명으로 '전쟁포로' 뿐만 아니라 '민간인 억류자 5만 명', '중국군 2만 명', '여자 포로 3000명'이 포함된 숫자라고 한다. 근데 엄청난 숫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제대로 분류'하지 못하고 '정규 인민군 출신', '비공산주의자로 동원된 인민군 출신', '남한 출신 공산주의자 의용군'과 '비공산주의자 의용군', '중국군 포로', '피난민 포로', '민간인 억류자' 등등이 한데 섞여서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제대로 분류되지 않아 '서로' 싸우는 일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포로수용소를 관리하는 주체인 '미군'에 의한 폭력과 학살이 더 큰 문제였다. 왜냐면 휴전회담이 마지막 사항이 바로 '포로석방'이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론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포로들은 '자동석방' 되어야 한다. 그런데 미군은 '도덕적 우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반공 포로'의 경우에는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남한에 잔류시키겠다고 '자원 석방'을 제시하고, 이를 고집한 것이다. 어쩌면 미국으로서는 전쟁에서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해서 '공산주의'보다 '자유주의'를 선택하는 포로들이 더 많음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 우위'를 얻기 위해서 자행한 일이 포로들에게 '반공교육'을 강요하고, 전향을 하지 않은 포로들에게 린치를 가하며, 저항하는 포로들은 폭력으로 진압하거나 심하면 학살시켜 버리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수차례  지휘관이 바뀌었지만, 포로들을 향한 만행은 사그라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외신은 열악한 환경(한반도 전역이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속에 취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도 51년에 '한국의 내정'을 취재하고 간 외국 기자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격"이라고 혹평을 했단다. 이 말은 영국 런던 <타임스>가 51년 10월 1일자 사설에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는데, 52년 휴전 회담 말미에 벌어진 '거제도 포로 학살'을 자행한 미군을 보았을 땐 어떤 기사를 쏟아냈을지 궁금하다. 암튼 한국전쟁은 안팎에서 자행된 만행과 학살 때문에 더욱 비참한 일만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랬던 대한민국이 70년 뒤에는 '민주주의의 교과서'라는 극찬을 받고 있으니 역사의 평가를 어찌 내려야 할까? 기적일까? 필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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