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로 매니악 3
이우혁 지음 / 미컴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파이로 매니악 3>  이우혁 / 미컴 (1999)

[My Review MMLXXI / 미컴 3번째 리뷰] 결론부터 말하자면, 26년 전에 '4권에 계속'이라고 발표했지만 아직까지 '미완성'한 작품이다. 당시 <퇴마록 : 세계편>을 완결하고 <퇴마록 : 혼세편>을 한창 연재하던 시절이었고, <퇴마록 : 말세편>을 예고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치우천왕기>도 '연재중'이었고, <왜란종결자>도 '집필중'이었던 시절이었을텐데, 왜 <파이로 매니악>을 연재 중단했던 것일까? 뭐, 알 수는 없다. 하긴 <치우천왕기>도 얼마 뒤에 '연재 중단'을 했다가 2010년이 넘어서야 새로운 출판사에서 '완결'을 했기 때문에, <파이로 매니악>의 팬들도 얼마간은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파이로 매니악>의 출간 소식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읽게 된 거라 분통을 터뜨릴 정도는 아니지만, 당시에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한 채 무작정 기다렸다면 꽤나 분노했을 거라 여겨진다. <치우천왕기> 때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암튼, 지금에 와서는 <뉴 퇴마록(가제)> 연재를 공표한 상태이니, 뭐든 기대하고 있다. <퇴마록 : 외전 3>에서 장준후가 세상을 구하고서 얻은 '권능'으로 '두 개의 지구'를 만들어서, 원래의 지구에는 '퇴마사'를 비롯해서 영능력자들의 모든 능력을 싹 제거한 뒤에 '현세적인 힘'으로 대결과 갈등을 벌이는 세계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 했고, 새로 만든 지구에서는 '퇴마사'들을 되살아나서..정확히 말하자면, '퇴마사'들을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서 '징벌자와 구원자'가 모두 태어나게 한 뒤에 벌어질 새로운 이야기를 '뉴 퇴마록'에 담을 거라고 예고했다. 그렇다면 <파이로 매니악>도 이야기 선상에서 다시 올려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엿장수(!) 맘대로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퇴마사'들이 등장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파이로 매니악>에서 펼쳐진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를 저질러 놓고서도 그에 상응하는 죄값을 달게 받기는커녕 호의호식하며 법망을 조롱(?)하며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나쁜놈들(일명 '죄수'들)을 처단하는데 앞장서는 행동파 유영이 있고, 화약 때문에 불우한 과거를 갖고 있지만 화약을 멀리할 수 없는 운명(?)적인 '파이로 매니악(화약전문가)' 민동훈이 있는 지구에서 펼쳐질 이야기가 다시금 쓰여질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비록 3권을 끝으로 '연재'를 더는 진행시키지 않았지만, '뉴 퇴마록'도 쓰여질 거라면 <파이로 매니악>도 다시 쓰여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영과 동훈이 죄수들에게 벌이는 단죄는 속이 시원하기 때문에 반드시 '완결'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방된 지 8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활개를 치며 '대한민국'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려는 이런 나쁜놈들을 곱게(?) 놔둬선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어떻게 독립을 하고,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 이만큼이나 발전을 시켰는데, 고생이란 고생은 '온 국민'이 다 겪고, '나쁜놈들'은 단물만 쪽쪽 빨아 먹고 나라를 홀랑 말아먹으려 드느냔 말이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놈들이기에 '파이로 매니악(P.M.)'의 부활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허구적인 소설 속에서라도 깨끗한 대한민국으로 탈바꿈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그러기에는 너무 과격한 설정이라는 점에서 우려스럽기 그지 없긴 하다. 아무리 죽일 놈이라고 하더라도 '사제폭탄'으로 팔다리를 날려버리거나 온몸을 화르륵 불태워버려 온전한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한 줌의 '고깃덩이'로 만들어버리는 잔혹함은 너무 심한 처사라는 지적이 있다면, 그에 마땅한 반론조차 대거리하지 못할 지경인 것은 솔직히 인정한다. 허나 자신들의 이익에 최선을 다한 '이기주의자'에 대한 처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였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에 이어 무능의 극치였던 노태우 정권, 김영삼 정권,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 그리고 윤석열 정권까지 대한민국을 '비정상'으로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하마터면 '나라꼴'을 파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할 뻔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제대로 된 죄값'을 달게 받은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말이다. 대한민국의 법치는 한마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였고, 소위 '보수세력'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권력을 쥐게 되면, 그들을 호위하는 '엘리트 집단'이 총동원이 되어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등에 빨대를 꽂고서 '제 잇속'만 무한하게 챙기는 짓거리를 서슴지 않고, 염치도 없이 자행했더랬다. 그런데도 훗날 '들통'이라도 나면 그들은 충분한 죄값을 받았던가? 그런 적 없다. 도리어 그들의 죄를 밝히려던 사람들에게 '불똥'을 튀게 만들어서 없던 죄도 새로 만들어서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게 만들었고, 손이 있어도 글도 쓰지 못하게 분질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서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진실'을 감추고 '거짓선동'을 세뇌(?)시키는 역할은 대한민국 언론이 도맡아서 처리(?)하곤 했다. 이렇게 80년 동안이나 나라를 틀어쥐고서 국민들에게 '진실'을 외면하게 만들려 하다가 '윤석열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과 맞물려서 그동안 저질렀던 온갖 추한 짓거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정말이지 구정물에 똥물을 섞어서 마시게 해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었다. 그래서 <파이로 매니악>은 나쁜 놈들을 하나하나 '고깃덩이'로 산산조각 낼 때마다 후련해지는 맛(!)이 있는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우혁 작가도 너무 시원시원하게 나쁜 놈들을 날려버리는 것에 심취하다보니 좀 막나갔던(?) 모양이다. 드디어 나쁜 놈들을 처단하던 P.M.의 소재파악을 마친 '검사팀(씨저)'이 처음으로 조우하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연재 중단'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직 P.M.의 뱃속에 있는 '시한폭탄'의 시간은 8개월이나 남은 상황이다. 그러니 이제 겨우 4개월 남짓한 분량(총 3권)만 쏟아냈을 뿐, 남은 분량은 그 두 배에 해당하는 6권의 분량만큼이나 이야기가 남은 셈이다. 딴에는 빠른 진행을 선보여서 총 5~6권 정도로 마무리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중단된 연재를 되살려 내놓으란 말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이재명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니, 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기에 딱 좋은 시기가 아니겠느냔 말이다. 이왕지사 '김대중 정부'때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으니 이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물론, 20여 년이나 지난 시점에 '핸드폰'도 없던 시절의 옛날 이야기를 새삼스레 꺼내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이우혁 작가가 <파이로 매니악>을 집필할 당시에도 영과 동훈을 그냥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짐작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단서를 많이 남겼다.

바로 '김중위의 입'을 통해서 P.M.의 폭탄제조 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그냥 썩히기엔 아깝다는 이야기를 언급했고, 또한 '정소희의 입'을 통해서도 P.M.의 정신분석을 통해서 정상참작(?)이 가능하다는 뉘앙스를 풀풀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윤영대 검사'의 윗선으로 보이는 그분의 정체가 아무래도 <퇴마록>에 등장하는 '검사 백호의 그분'과 동일한 인물(!)일 거라는 짐작이 들기 때문이다. 이우혁 작가는 대한민국의 정의는 올바른 사법시스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 '검사 출신'이 등장하는 것으로도 짐작케 하며 <퇴마록>의 검사 백호가 법체계의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로 보여주지 못햇으니, <파이로 매니악>에서 등장하는 윤영대 검사가 그런 인물로 등장하게끔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다만 이야기 초반에는 P.M.을 검거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독사'같은 인물처럼 보여주지만, 윤 검사의 윗선에 있는 그분의 영향력으로 '퇴마사'들이 대한민국을 세계 만방에 위력을 떨치게 만들었던 것처럼, '파이로 매니악'들을 검거한 뒤에 어떡해서든 살려내어 전세계의 위협을 받는 대한민국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현실판 영웅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이야기로 확장시켜 나가길 바란다. 그렇게 <파이로 매니악 : 세계편>, <파이로 매니악 : 혼세편>, <파이로 매니악 : 말세편>을 선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겨우겨우 무기를 채워나가기에도 버거운 나라였지만, 불과 20여 년도 지나지 않아서 '방산업체의 수출호황'을 맞을 정도로 강력한 국방력을 자랑하며 무시무시한 무기체계를 '국산화' 시켜버리는 위엄을 선보이지 않았느냔 말이다. 여기에 민동훈 같은 '파이로 매니악'이 활약을 한다면 첨단 무기체계를 더 빨리 개발하는데 실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고, 국외의 테러리스트들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는 영웅으로 활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유영은 언론개혁의 선봉장 역할을 주면 잘해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언론이 제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정말이지 천추의 한이다. 그렇기에 P.M.이 윤 검사와 손을 잡고 나쁜 놈들을 발본색원하여 일망타진(?)한 뒤에 제대로 된 언론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다. 비록 소설 속의 허구라 할지라도 그런 속시원한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 그걸 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파이로 매니악>이 아닐까 싶다.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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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 건축 너머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질문과 성찰 서가명강 시리즈 17
김광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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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명강 17]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 건축 너머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질문과 성찰>  김광현 / 21세기북스 (2021)

[My Review MMLXX / 21세기북스 40번째 리뷰] 듣고 보니 그렇다. 우리는 정말 '건축'에 대해서 배워 본 적이 없다. '건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얼마짜리냐?'이고, 다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내 집이냐? 남의 집이냐?'를 떠올릴 뿐이다. 정말 이런 생각이 '건축'에 관한 전부일까? 서울대학교 김광현 교수는 말한다. '건축은 우리 모두의 미래다'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집값(아파트)'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서민들은 평생을 벌어도 '내집 장만'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집값 안정'은 절실하다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게 이 책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의 내용일리 없지 않겠는가. 김광현 교수는 단적으로 말한다. '건축'을 말하면서 '부동산'을 떠올리지 말라고 말이다. 하긴 그런 것밖에 떠오르지 않은 까닭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어릴 적부터 '건축'에 대해서 거의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외국 고등학생이 한국으로 '교환학생' 자격으로 유학을 왔더란다. 그 학생은 '유럽의 건축 양식'에 제법 관심이 많았는데, 동양의 건축에 대해서도 공부할 겸 한국에 왔노라고 자기 소개를 했더란다. 그때 많은 학생들이 그 외국인 학생을 많이 반겼다고 한다. 그래서 외국인 학생도 자신이 알고 있는 '서양의 건축'에 대해서 알려주고, '동양의 건축', 그리고 '한국의 건축 양식'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해보겠다고 다짐을 했더란다. 근데 그런 다짐은 단 하루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한국의 학생들 가운데 단 한 명도 '한국의 건축'은커녕 '동양의 건축 양식'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과거 양반들이 살았던 '기와집'과 가난한 서민들이 살았던 '초가집'을 구분해줄 정도였으며, 경복궁과 민속촌에 있는 여러 한옥을 관람하면서도 '처마'와 '단청', '주춧돌' 따위의 유래와 이유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몹시 실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한옥'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을 여쭤봤지만, 선생님도 자세한 내용은 거의 모르고 있었으며, 부랴부랴 다른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러 진땀을 흘렸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 이야기가 2010년 즈음에 있었던 일이지만, 벌써 10년도 넘은 지금이라고 그닥 달라진 것은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외국의 경우에는 고등학생임에도 '건축 양식'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상당할 정도로 일찍부터 배운다는 사실이다. 그에 반해 대한민국에서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 전통적인 '건축 양식'에 대한 상식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거의 없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러 도시를 점령한 '아파트'를 왜 이렇게 많이 짓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저 '새집'이라고 지었으니 '돈'을 지불하고 살면 그뿐이지, 그 이상의 정보를 묻거나 궁금증을 가질 정도의 '호기심'도 갖고 있질 못한다. 그러니 우리가 '건축'이라 쓰고도 '부동산'으로 읽는 세태가 판을 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감도 잡지 못한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김에, '좋은 학교'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자. '좋은 집'이라고 물으면 '비싼 집'이라고 답할 게 뻔하니까 말이다. 설마 '좋은 학교'라고 물었는데, 강남 8학군(?)을 거들먹거린다면 정말이지 실망이다. 적어도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학교라는 대답 정도는 나와야 정상일테니 말이다. 맞다. 학교란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곳이기에 좋게 만들려면 '잘 가르칠 수 있는 학교'여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학교의 조건'을 꼽는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이야기하겠는가? 아이들 '성적'을 올려줄 수 있는 실력 있는 선생님을 꼽을 것인가?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게 딴 생각과 딴 짓하지 않고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고려한 학교일까? 기왕 우리가 '건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니, 건축과 관련 있는 답을 내놓자. 첫째는 그 학교를 방문하지는 않을 거지만 멀리서 그 학교를 바라만 봐도 '공부'하고 싶게 만든다면 좋은 학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둘째는 역시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그 학교'에 반해서 학교 담장을 넘어서라도 안을 들여다 보려고 기웃기웃 거리게 만든다면 좋은 학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학교의 교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 '학교 내부의 모습'을 보고, 만지고, 각각의 교실에 들어가서 책상에 앉으니 저절로 '공부'가 하고 싶어지는 학교가 아닐까 싶다.

이건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칸'이 말한 '좋은 건축물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우리는 '좋은 학교'라는 질문에 건축에 대한 생각을 쏙 빼놓고서 그 학교 안에서 공부에 집중하고, 명문대에 입학할 정도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에만 매몰된 생각을 할 뿐이다. 왜냐면 대한민국 곳곳에 있는 학교들이 거의 대부분 '거의 똑같은 구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애초에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00년 동안의 대한민국을 살펴보면, 나라를 빼앗긴 치욕을 당했고, 어렵사리 해방이 되었지만 곧이어 전쟁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고, 겨우 전쟁이 끝났지만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먹을 것'조차 남의 나라의 원조가 없었다면 굶어죽을 판이었는데, 팔자 좋게 '좋은집 타령'을 했겠는가. 더구나 '공공시설'에 들어가는 학교건물은 '디자인'과 '편리성'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적은 비용으로 효율을 높이는 방향'이면 그냥 오케이였을 것이다. 그렇게 '개발독재 시절'을 지나 '민주화시대'를 열었는데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 그리고 21세기 들어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이지만 여전히 '건축'에 대해서는 걸음마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건축의 미래'도 그래야만 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건축'에 대해서 생각을 달리해야 할 때다. 조금은 서둘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건축'을 하기 위해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김광현 교수는 우리 모두가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건축은 결코 돈으로 처발처발해서 지은 집이 아니라, 앞서도 말했지만, 바라만 봐도 아름다워야 하며, 직접 살아봤을 때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급지고 럭셔리한 고층아파트'만 짓자는 얘기가 아니다. 제발 '부동산'이라는 생각을 좀 떨쳐내자. 우리가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집'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내부에 들어가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남은 여생'을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소리 지르는 집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바로 그런 집을 우리 손으로 짓자는 말이다.

그런데 '건축'은 혼자서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건축'은 시골 변두리에 집을 짓고 사는 것처럼 '제멋대로' 지어서도 곤란하다. 왜냐면 '내가 봤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남이 봤을 때도' 아름다운 집을 지어야 도시 전체가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건축가'가 될 정도로 건축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아름답고 행복하게 거주할 수 있는 '아름다운 건축'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릴 적부터 '건축'에 대한 교육을 시작해야 하는 필요성과 함께, 100년이 지나도, 2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답고 살고 싶어지게 만들어진 건축을, 우리 모두의 힘으로 이룩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건축'은 필수인 세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새로 지어지는 건물'에 대해서 '가격'만 따지지 말고, 우리 동네에 딱 어울리는 멋지고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건축전문가'가 다 만들어놓고 정작 우리 맘에는 들지 않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건축에 대한 지식'이 곧 '상식'이 되어야 한다. 건축은 우리 세대 모두의 '관심'을 반영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동안에는 '비싼 집'만을, 아니 더 정확하게는 '싸게 샀는데, 값이 정말 많이 오를 것'으로 기대되는 마음만으로 '건축'을 대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그런 집들만 수두룩 빽빽하게 된 셈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뻔한 마음 대신에 '우리 동네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름다운 도시, 쾌적한 도시,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건축'에 담을 수 있다면,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점점 '그런 건축'들로 점점 더 많이 채워지게 되리라는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서가명강'답게 서울대에서 <건축학개론>를 듣는 것처럼 재미없는 이야기만 가득 담겨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핵심포인트만 따로 읽어낸다면 꽤나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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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의 일생 - 오늘이 소중한 이야기 (양장본), 2024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 수상작 오늘을 산다 1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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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산다 2] <누구나의 일생>  마스다 미리 / 박정임 / 새의노래 (2024) [원제 : ツユクサナツコの一生]

[My Review MMLXIX / 새의노래 2번째 리뷰] 이 책은 2024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마스다 미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소개도 있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내 취향'은 아니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감동의 여운...아니 '여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 듯 싶다. <누구나의 일생>은 30대 독신 여성으로 일러스트레이터이지만 생계를 위해서 도넛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쓰유쿠사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책 제목에 '일생'이란 표현이 있어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주인공 쓰유쿠사는 32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곧바로 끝나지 않는다. 쓰유쿠사가 남긴 '만화'가 유작처럼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가 쓴 '만화 속' 주인공이 그린 '만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설정이다. 교과서에서 흔히 다루는 '액자식 구성'의 만화(?)일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글은 '여성 독자'들에게 감정을 건드리는 묘한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남성 독자인 나에게도 아주 옅지만 '전해지는 그 감정'이 있긴 한데, 그 감정이 남자인 내 마음을 건드려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30대, 또는 40대 독신여성 독자에게는 그것이 그저 그렇고 그런 감정이 아니라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나마 짬을 내서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묘한 매력을 선사하는 것 같다. 의도치 않게 몇몇 '마스다 미리' 팬이라는 여성 독자들과 우연히 마주하고 몇 마디 나눠 봤는데, 모두 그런 뉘앙스의 감상평을 전해주었다. "깊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짬이 날 때마다 읽는 편이라서...그냥 좋은 느낌이다. 뭔가 꽉 채운 듯한 감동을 전해주는 책은 아니지만, 잔잔하고 조용한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여백'같은 책, 그런 느낌이라서 좋았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마스다 미리' 작가가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였으면 싶었다. 30대 독신여성이 뭐 어떤데? 40대 독신여성이 연하남과 데이트를 하는 게 문제라도 되나? '임신, 출산, 육아'는 여성의 사회적 '의무'가 아니라 여성만이 가진 고유의 '특권'이라고! 그리고 자신이 가진 특권이라면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여자 나이 '마흔'이 뭐가 어때서? 그 나이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여성의 매력'을 풍기며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니 박수라도 치고, 응원해야 하는 것이 더 '당연한 것' 아니겠어? 그런데 왜 뒤에서 수근수근 거리는 건데? 여성 인권이 어쩌고, 양성 평등이 저쩌고 떠들기에 앞서, 그렇게 비겁하게 뒤에서 속닥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딴죽을 걸어보라고! 그런 얼토당토 않은 딴죽을 걸은 다리몽둥이를 똑 분질러 놓을 테니 말이다!! 라면서 말이다. 잔잔한 여백과 담백한 여운이 가득한 글이 아니라 톡톡 쏘는 사이다 같은 청량한 목소리가 좀 더 낫지 않겠는가 하고 바랐을 뿐이다. 물론, 그런 '사이다 맛'과 같은 글이었다면, 그건 '마스다 미리'의 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인정하는데 무려 26권의 책을 읽어야만 했다. 굳이 '내 취향'도 아닌 책이었는데 말이다. 아주 미약하게 전해지던 '그 감성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이 더욱더 내 취향이 아니었던 점은 쓰유쿠사가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했던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을 배경으로 쓰인 작품이라 쓰유쿠사의 어머니도 죽은 것으로 나오고 쓰유쿠사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사인은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코로나19'가 원인인 듯 싶지만..아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닌 듯 싶다. 제목 <누구나의 일생>처럼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족적을 뒤쫓다 보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도 싶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 책의 특색이지만, '아니어도' 상관 없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누구든 아무런 상관 없이 '저마다의 일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 가볍게 툭하고 '강조'할 뿐이니까 말이다.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가볍게 생각하거나,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거나, 그건 마음 가는 대로다.

그건 우리가 '여백'을 감상하는 방법과도 일치한다. 여백에는 대개 아무런 그림도, 색깔도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을 채울 뿐이다. 그렇지만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그 '빈 공간'은 절대로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저마다 취향대로 그 '여백'을 채워나갈 뿐이다. 이런 감상법에 재미를 붙인다면 마스다 미리의 책들에도 정말 재밌는 '재미'를 채워나갈 수 있게 된다. 나처럼 '여백의 감상법'을 별로 즐기지 못한다면 재미도 별로 느끼지 못할 것은 당연지사고 말이다.

그건 그렇고, 여백을 정말 잘 채우지 못하는 나도 이 책 <누구나의 일생>에서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와 딸'이 한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색한(?) 풍경 말이다. 보통은 '남자'가 먼저 죽고 '엄마와 딸', 또는 '엄마와 아들'이 사는 풍경이 결혼을 하지 않는 요즘 흔한 풍경일텐데, 이 책에선 '아버지와 딸'이 엄마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대화도 별로 없고, 서로의 인생을 존중(?)하듯 서로의 '공간'도 서로 겹치지 않으며 '한 집'에서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하룻동안의 안부를 묻고, 저녁을 함께 하며, 밤인사를 하며 헤어지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면서도 딸은 아버지를 위한 '주전부리'를 챙겨주고, '코로나 백신 접종'을 맞고나서 후유증은 없는지 안부를 물으며, 아버지를 그런 착한(?) 딸을 위해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딸의 일상에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기 일상'에 심취하고 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혼기도 놓치고 홀로 생계를 책임지는 바쁜 딸이 자신을 위해서 '수발'까지 들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이 아닌 '딸의 죽음'을 먼저 경험해야 했다.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을까?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하는 장면이라도 나오련만...일본에는 그런 문화가 없는 모양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그 누구도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는 '그런 장면'조차 통 보여주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란 무엇일까?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생이건만 왜들 그리 열심히들 살아가는 것인지...죽고 난 뒤에 가져가는 것도 하나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쓰유쿠사는 '만화'를 남겼다. 마침 맞게 한 출판사에서 쓰유쿠사가 연재하던 만화에 관심을 가지고서 '출간'을 약속하기도 했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쓰유쿠사의 삶이 먼저 '마감'하고 말았다. 그래서 정식출간이 아닌 '자비출간'이란 방법을 모색했지만, 그마저 비용면에서 여의치 않아 결국 '소책자'로 쓰유쿠사의 유작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딸이 살아 있을 때에는 질색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도 꿋꿋하게 훔쳐보던 아버지는 느닷없는 딸의 죽음에 보지 않았던 딸의 만화를 '유작'으로 남겨진 소책자로 마주하게 된다. 그 속에서는 딸이 '할머니가 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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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 견문록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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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 견문록>  마스다 미리 / 권남희 / 알에이치코리아(RHK) (2021) [원제 : かわいい見聞録]

[My Review MMLXVIII / 알에이치코리아(RHK) 2번째 리뷰] 내 이상형을 꼽으라면 섹시한 여성도 아니고, 아름다운 여성도 아니고, 품위 있고 우아하고 단아한 여성은 좀 좋아하지만, '귀여운 여자'에게 엄청 홀리는 경향이 강하다. 혹시라도 귀여운 여자가 내게 다가와서 "옵빠~ 나 이거 사줘"라고 말한다면 그냥 다 사...쿨럭쿨럭. 암튼 이런 나이기에 이 책 <귀여움 견문록>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뽑아 들어 읽었다. 뭐, 걱정하실 것은 없다. 경제력이 매우 높은 편은 아니지만 워낙 씀씀이가 헤프지 않아서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살고는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여유를 누리는 이유도 간단하다. 아직까지 솔로이며, 내 맘을 홀릴 정도의 '귀여운 여자'는 만난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나름 '차도남'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내 앞에서 '까부는 여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럴 정도로 시크했냐고? 음..그건 아닐 거다. 그냥 못 생겨서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테니 말이다.

각설하고, 마스다 미리의 '귀여움'에 관한 에세이다. 이 책에 대한 총평을 한마디로 하자면 말이다. 그리고 그 귀여움에 대한 나름의 까닭을 마스다 미리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해서 밝혀내는 내용이 이 책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텐데, 어쨌든 그 '의견'에 깊이 공감을 하지는 못하겠다는 것이 '내 소감'이긴 하다. 물론, 성호르몬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며, 기본적으로 '생각의 흐름'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마스다 미리가 소회를 밝히는 '귀여움에 대한 나열'에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는 색다른 재미(?)에 빠질 지경이라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도토리나 체리처럼 작고 귀여운 것에 '귀여워(가와이~)'를 연발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특정한 '일본어 발음의 귀여움'을 피력할 때에는 어떻게 공감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도 궁금해서 '파파고'의 도움을 받아 '일본어 발음'을 듣는 수고(?)까지 했지만, 그것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오사카 사투리의 귀여움'을 말할 때에는 뭐랄까? 표준어로 '그 사람의 성씨가 가 씨가 맞니?'를 부산 사투리로 '가가 가가 가?'라고 할 때, 이를 '일본어'로 뒤치고 '오사카 사투리'로 뒤쳐 내서 펴낸다고해서 일본 독자들이 '부산 사투리'를 이해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귀여움의 느낌'까지 공감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상상력까지 발휘해야 하는데, 이걸 상상한다고 해결할 일인지 자못 궁금해질 정도였다.

이런 '답답함'은 지난 번에 읽었던 <오사카 사람의 속마음>이란 제목의 책을 읽을 때에도 느꼈던 것인데, 아무리 인기 작가의 책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유의 책은 가급적 '원서'로만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애써 '뒤치는(번역하는) 수고'를 했는데, 애쓴 보람이 무색해지고 독자들도 읽는 보람도 없고말 그런 책들은 좀 지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전부'는 아니고 '일부'라는 점에서 책을 즐기는 것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긴 하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이런 꽉 막힌 느낌'이 드는 부분을 만나고 난 뒤에는 '어떤 내용'이라도 큰 실망감에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만다. 뭐랄까? 감흥이 떨어지고 빈정이 상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좀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제목에는 내가 환장(?)하는 '귀여움'이라고 적혀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래서 그 실망감은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감하는 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눈사람'의 경우에 우리 나라의 '2단 눈사람'이 훨씬 더 정감이 가고 '먹을거리'가 아닌 '일상의 것'들을 활용해서 눈코입팔 따위로 삼고, 모자와 목도리로 마무리하면, 서양의 '3단 눈사람'보다 훨씬 더 귀엽게 느껴진다는 점에는 크게 공감했다. 또한 '민들레꽃'도 귀엽지만, '민들레 홀씨'도 마주할 때면 너무 귀엽게 느껴진다. 그런데 마스다 미리는 '민들레'의 일본어 발음인 '탄포포(タンポポ)'가 귀엽단다. 포포라는 발음이 귀엽긴 하다. 그런데 나는 '파페'와 '포포'의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던 <파페포포>가 떠올랐다.

암튼, 책의 내용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읽는 내내 '딴 생각'만 가득했다. 나만의 '귀여움 견문록'으로 말이다. 그런데 막상 나이 든 아저씨가 되고 나니 '귀여운 것'을 보아도 '귀엽다' 말 못하고, '귀엽다' 하며 만지지 못하며, 심지어 '귀엽다'라고 할 정도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서러움을 느끼는 요즘이다. 더구나 나는 못 생긴 남자다. 절대 '차은우'처럼 생기지 않았고, '공유'나 '현빈' 같은 멋진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다. 이렇게 못 생기고 잘난 것 없는 '아저씨'는 절대로 허락되지 않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귀엽다'라고 말하면 못 생긴 주제에 '보는 눈'은 있네라며 흘겨보기 일쑤고, '귀엽다'라고 쓰다듬기라도 할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성범죄자 취급하며, '귀엽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기라도 하면 변태 취급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귀여운 것'을 정말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티'는 내지 않는다. 수십 년을 그런 취급(?) 당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실례'를 저지르지도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저 속으로만 좋아할 뿐이고, 아주 잠깐 스치듯이 바라볼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게 불편을 끼치기 싫기 때문이다. 뭐, 아는 사람은 다 알지 않은가.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못 생긴 주제에 감히 대놓고 '페미'라고 광고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함께 있는 것조차 불편해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에게 '귀여움'은 거리를 두어야 할 대상이다. 저 멀리서 바라만 보면서 흐믓해 할 대상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귀여운 것'과 '못 생긴 나'를 한 컷에 같이 담으면 전혀 귀엽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좋아하는 연예인과 우연히 마주칠 경우에도 '함께' 찍은 사진 같은 것은 없다. 팬서비스 차원에서 '함께' 찍자고 말을 건내곤 하지만, 나는 잘 안다. 그 '프레임' 안에 내가 같이 있으면 '귀여움'이 귀여움으로 보이질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귀여움'을 좋아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나와 '정반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질감'과 '대비감'이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무엇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모양이다.

그런 '이질감'은 내가 쓰는 글에서도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내 글만을 읽고서 나를 '귀여운 성격의 여성'이라고 오해를 하시기도 하고, 또는 아주 '까칠하고 도도한 여성'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내 글'에서 '남성'임을 커밍아웃(?)하는 대목을 읽고서야 뒤늦게 '남자분이셨군요. 몰랐어요'라고 댓글을 달고서 깜깜 무소식이 되는 일도 참 많았다. 또는 '비밀 댓글'로 내게 전화번호를 물으며 은근 슬쩍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도 참 많았고 말이다. 하긴 '필명'으로 '이지아'라는 닉네임을 오랫동안 써온 탓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처음 채팅을 시작할 때 '후리지아'라는 닉네임을 썼다가 고민 따위는 '후~'하고 날려버리자는 의미를 담아 '리지아'만 남겼고, 두음법칙을 적용해서 '이지아'가 되었고, 여기에 '한자'로 뜻을 담아 '異之我...또 다른 나'라는 닉네임으로 리뷰어 활동을 꽤나 오랫동안 지내왔기에, 더욱 오해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뭐, 어쨌든 그런 이질감 덕분에 나는 '또 다른 나'의 정체성으로 '이런 나'와 '저런 나' 등등 솔직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나의 본질'에 대해서도 나름 깊이 통찰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를 통해서도 '또 한 번의 고찰'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른 책을 통해서 이야기를 이어 가도록 하겠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리뷰'에 쓰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수필'에는 아무런 형식이 없는 '무형식'이란 형식의 글이라는 특성이 따라 붙는다. 그렇기에 '수필리뷰'도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내용조차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리뷰를 쓰게 되었다. 뭐, 굳이 변명을 늘어놓자면 조이스의 <율리시스>처럼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리뷰라고나 할까. 아무려면 어떠랴. 내가 쓴 형편없는 리뷰를 몇 명이나 읽는다고 그런 걱정을 할 것인가. 그저 내가 쓰고 싶어서 쓸 뿐이다(--)뻔뻔 (이것도 오랜만이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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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 매니악 2
이우혁 지음 / 미컴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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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 매니악 2>  이우혁 / 미컴 (1998)

[My Review MMLXVII / 미컴 2번째 리뷰] 괴물과 맞서 싸우려면 '선한 의지'만으로는 역부족인 경우가 허다하다. 악에 물든 세력들은 규칙도, 제약도 없이 온갖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해 대는데, 그에 맞서 싸우는 선한 세력은 온갖 제약과 규칙을 다 지키며 싸우다가는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처 맞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물 같은 놈들과 맞서 싸울 때에는 점잖은 방법만으로는 대항하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정의의 편에 섰더라도 종종 '괴물과 맞먹는 가공할 힘'을 발휘하여 괴물을 때려 잡는 강한 힘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러다 괴물 때려 잡은 힘으로 인해서 '스스로 괴물'이 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괴물을 잡으려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법이다.

<파이로 매니악>에서 동훈과 영은 한국사회에서 '암적인 존재'를 타겟으로 삼아 정교하게 만든 폭약으로 '천벌'을 내리는 일을 한다. 2편에서는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고서 신도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으면서 대외적으로는 '사회부적응자'들에게 갱생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홍보하는 김석명을 처단하는 내용을 골자로 보여주었다.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서도 폭로 되었던 내용이기도 하고, '형제복지원 사건'도 그렇고, '사이비교주'들이 판을 짜고서 우리 사회에서 정말 파렴치한 행태를 많이 보여주었는데, 이 책에서도 바로 그런 '나쁜 놈'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 정말이지 죽여야 속이 시원할 정도로 나쁜 놈이었기에 '잘 죽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우혁 작가는 그런 나쁜 놈을 처단하는데에도 속시원하고 통쾌하게 죽이는 장면은 연출하지 않았다. 98년이면 IMF로 온 나라가 침울하던 시기였고, 많은 국민들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며 나라 살리기에 여념이 없을 때에도 '환차익' 같은 옳지 않은 방법으로 '제 잇속'만 챙기는 나쁜 놈들과 정부의 경제정책을 악용해서 공공의 이익을 해치고 '고급 정보(?)'를 빼돌려서 개인적인 이득으로 착복하거나, 뇌물과 다를 바 없는 금품과 향응을 제공 받고서도 '고위공직자'로 떵떵거리며 잘 살던 나쁜 놈들이 판을 치던 시기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러니 그런 놈들을 좀 '허구적인 상황속'에서나마 속시원하게 처벌을 받고 처단을 해버렸으면 얼마나 통쾌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이우혁 작가는 그런 '나쁜 놈'을 죽이고서도 개가를 올렸다며 기뻐하지 않고 끔찍한 방법으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다면서 부끄러워하는 주인공을 만들었다. 이게 정말이지 <파이로 매니악>의 수준을 높여주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독자적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고구마'를 먹다가 목이 메이는 장면을 마주한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렇다면 정반대로 '(폭탄)방화 전문가'인 주인공이 죽어 마땅한 '사회의 악'을 통쾌하고 시원하게 천벌을 내리는 장면으로 묘사했다면 어땠을까? '종교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복지가가 '보육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을 노예보다 못한 처우를 하며 노동착취를 하며, 어두운 밤이 되면 그렇게 수용된 사람들 가운데 예쁘장하고 반반한 어린 소녀들을 희롱하고 집단성폭행을 일삼던 놈들을 잡아내어서 팔다리를 절단 내고, 아가리에 폭탄을 물게 하고서 대가리가 곤죽이 되어 날려버리고, 시신조차 남지 않게 한데 묶어다가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서 산 채로 불을 질러 고통스럽게 죽여버린다고 쓴다면 말이다. 그렇게 나쁜 놈만 골라서 싹 다 죽여버리고 피해자들을 구출을 해서 유유히 법망을 피해서 사라지는 장면을 연출한다면 당장은 속시원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스토리를 써나갔다면 이 책은 그야말로 '스포츠신문 연재소설'에 불과한 B급 취급을 받고 말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퇴마록>도 악령을 퇴치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고 때려 죽이는 것에만 열중했더라면 그저 그런 'B급 퇴마소설' 취급을 받거나 '좀비 소설'로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퇴마록>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파이로 매니악>도 괴물을 잡기 위해서 스스로 괴물이 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대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훈과 영은 정말로 나쁜 놈들을 죽이는 '영웅적인 일'을 했음에도 사람을 죽였다는 무거운 죄책감에 빠져들며 스스로를 '죄인'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죽어 마땅한 죄를 범한 '죄수'들을 처단했다는 옳은 일을 했음에도 사람이 사람을 죽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죄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보여준 '구토감'과도 궤를 같이 한다. '구토'를 해야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실존 문제를 다룬 것처럼 <파이로 매니악>에서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폭탄방화'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구토를 할 수밖에 없는 '역겨움' 일이 분명하며, 영웅 심리에 도취되어서 저지른 일이라고 자부하기에도 너무나 파괴적인 살인에 불과하기에 스스로를 '죄인'처럼 대하면서 너무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뱃속을 깨끗이(?) 비우는 구토를 하고 만 것이다. 물론, 비록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죄수들'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앗아 죽게 만든 장본인이면서 '삶의 연장'하겠다는 먹는 행위를 할 수는 없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그런데도 너무 과한(?) 죄책감 표출에 '고구마' 같은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어떻게 조금만 가벼울(?) 수는 없었던가?

한편, 'P.M.'을 쫓는 추격팀인 윤 검사, 박 실장, 닥터 정, 김 중위로 이루어진 '시저(가위)팀'은 점점 수사의 포위망을 좁혀 간다. 처음엔 범인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모습만 보여주더니, 드디어 'P.M.'이 세 남녀로 이루어졌으며, '실종자' 가운데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까지 '확정'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제 3편에서 'P.M.'을 체포하는 결과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수사종결'이 되면서 이야기가 끝을 맺게 될 것인가? 아니면 '체포'까지는 성공하지만, 그 이후에 '공공의 적들'을 처단하기 위한 새로운 팀을 구성하는 것으로 열린 결말을 맞을 것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P.M.'의 뱃속에 든 시한폭탄이 있기 때문에 그 결말에 대해서 궁금증이 솟아난다.

이렇게 '소설의 결말'에 대한 궁금증은 생기는데 반해서 범인을 잡으려는 '수사팀'에 대한 애정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정의의 세력인데도 크게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윤 검사'라는 이름부터 '내란우두머리 윤석열'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름도 전혀 다르고, 수사하는 스타일도 전혀 다르지만 '독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장면에서 '검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우선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박 실장이라 불리는 '공무원'도 일하는 스타일이 '안기부 직원'을 연상케 한다. 철두철미하고 용의주도한 일 잘하는 성실한 공무원 역할을 맡았을 뿐인데, 그게 '무고한 사람'을 강제구금하고 수사하던 스타일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거기다 '닥터 정'은 정신분석학을 연구한 의사인데 '여성도 얼마든지 일 잘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혼'도 불사할 정도의 당당한 커리어우먼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게 20세기말에는 멋진 여성을 보여주는 행동일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리 멋져 보이지 않고 '독단적이고 고집불통'의 출세지향적인 워커홀릭 여성처럼 보여서 아쉬웠다. 더구나 '윤 검사'의 전 부인이기도 했다. 이혼 사유는 가부장적인 '윤 검사'의 여성에 대한 고지식한 인식이 원인이었지만, 정작 윤 검사는 그런 '닥터 정'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설정이 좀 구태의연했다. 그리고 김 중위도 '출세지향적인 인물'로 등장하는데, 어릴 적 보육시절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낸 탓에 자격지심이 좀 강한 타입인데다, 우연한 사고(?)이긴 했지만 '화약공장 사장'을 죽여버린 과거를 숨기고 있으며,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종종 등장하고 있어, 정신분석학적으로는 환청이 들리는 '조현병 증세'로 추정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캐릭터다. 뭐, 이런 수사팀인데...좀 뭐랄까? 캐릭터들에 애정이 생기지 않아서 그저 관망하고 있을 뿐이다. 과연 'P.M.'은 체포가 될 것인가? 다음 편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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