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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의 일생 - 오늘이 소중한 이야기 (양장본), 2024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 수상작 ㅣ 오늘을 산다 1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평점 :
[오늘을 산다 2] <누구나의 일생> 마스다 미리 / 박정임 / 새의노래 (2024) [원제 : ツユクサナツコの一生]
[My Review MMLXIX / 새의노래 2번째 리뷰] 이 책은 2024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마스다 미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소개도 있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내 취향'은 아니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감동의 여운...아니 '여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 듯 싶다. <누구나의 일생>은 30대 독신 여성으로 일러스트레이터이지만 생계를 위해서 도넛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쓰유쿠사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책 제목에 '일생'이란 표현이 있어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주인공 쓰유쿠사는 32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곧바로 끝나지 않는다. 쓰유쿠사가 남긴 '만화'가 유작처럼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가 쓴 '만화 속' 주인공이 그린 '만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설정이다. 교과서에서 흔히 다루는 '액자식 구성'의 만화(?)일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글은 '여성 독자'들에게 감정을 건드리는 묘한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남성 독자인 나에게도 아주 옅지만 '전해지는 그 감정'이 있긴 한데, 그 감정이 남자인 내 마음을 건드려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30대, 또는 40대 독신여성 독자에게는 그것이 그저 그렇고 그런 감정이 아니라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나마 짬을 내서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묘한 매력을 선사하는 것 같다. 의도치 않게 몇몇 '마스다 미리' 팬이라는 여성 독자들과 우연히 마주하고 몇 마디 나눠 봤는데, 모두 그런 뉘앙스의 감상평을 전해주었다. "깊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짬이 날 때마다 읽는 편이라서...그냥 좋은 느낌이다. 뭔가 꽉 채운 듯한 감동을 전해주는 책은 아니지만, 잔잔하고 조용한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여백'같은 책, 그런 느낌이라서 좋았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마스다 미리' 작가가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였으면 싶었다. 30대 독신여성이 뭐 어떤데? 40대 독신여성이 연하남과 데이트를 하는 게 문제라도 되나? '임신, 출산, 육아'는 여성의 사회적 '의무'가 아니라 여성만이 가진 고유의 '특권'이라고! 그리고 자신이 가진 특권이라면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여자 나이 '마흔'이 뭐가 어때서? 그 나이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여성의 매력'을 풍기며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니 박수라도 치고, 응원해야 하는 것이 더 '당연한 것' 아니겠어? 그런데 왜 뒤에서 수근수근 거리는 건데? 여성 인권이 어쩌고, 양성 평등이 저쩌고 떠들기에 앞서, 그렇게 비겁하게 뒤에서 속닥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딴죽을 걸어보라고! 그런 얼토당토 않은 딴죽을 걸은 다리몽둥이를 똑 분질러 놓을 테니 말이다!! 라면서 말이다. 잔잔한 여백과 담백한 여운이 가득한 글이 아니라 톡톡 쏘는 사이다 같은 청량한 목소리가 좀 더 낫지 않겠는가 하고 바랐을 뿐이다. 물론, 그런 '사이다 맛'과 같은 글이었다면, 그건 '마스다 미리'의 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인정하는데 무려 26권의 책을 읽어야만 했다. 굳이 '내 취향'도 아닌 책이었는데 말이다. 아주 미약하게 전해지던 '그 감성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이 더욱더 내 취향이 아니었던 점은 쓰유쿠사가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했던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을 배경으로 쓰인 작품이라 쓰유쿠사의 어머니도 죽은 것으로 나오고 쓰유쿠사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사인은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코로나19'가 원인인 듯 싶지만..아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닌 듯 싶다. 제목 <누구나의 일생>처럼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족적을 뒤쫓다 보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도 싶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 책의 특색이지만, '아니어도' 상관 없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누구든 아무런 상관 없이 '저마다의 일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 가볍게 툭하고 '강조'할 뿐이니까 말이다.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가볍게 생각하거나,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거나, 그건 마음 가는 대로다.
그건 우리가 '여백'을 감상하는 방법과도 일치한다. 여백에는 대개 아무런 그림도, 색깔도 그려지지 않은 '빈 공간'을 채울 뿐이다. 그렇지만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그 '빈 공간'은 절대로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저마다 취향대로 그 '여백'을 채워나갈 뿐이다. 이런 감상법에 재미를 붙인다면 마스다 미리의 책들에도 정말 재밌는 '재미'를 채워나갈 수 있게 된다. 나처럼 '여백의 감상법'을 별로 즐기지 못한다면 재미도 별로 느끼지 못할 것은 당연지사고 말이다.
그건 그렇고, 여백을 정말 잘 채우지 못하는 나도 이 책 <누구나의 일생>에서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와 딸'이 한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색한(?) 풍경 말이다. 보통은 '남자'가 먼저 죽고 '엄마와 딸', 또는 '엄마와 아들'이 사는 풍경이 결혼을 하지 않는 요즘 흔한 풍경일텐데, 이 책에선 '아버지와 딸'이 엄마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대화도 별로 없고, 서로의 인생을 존중(?)하듯 서로의 '공간'도 서로 겹치지 않으며 '한 집'에서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하룻동안의 안부를 묻고, 저녁을 함께 하며, 밤인사를 하며 헤어지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면서도 딸은 아버지를 위한 '주전부리'를 챙겨주고, '코로나 백신 접종'을 맞고나서 후유증은 없는지 안부를 물으며, 아버지를 그런 착한(?) 딸을 위해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딸의 일상에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기 일상'에 심취하고 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혼기도 놓치고 홀로 생계를 책임지는 바쁜 딸이 자신을 위해서 '수발'까지 들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이 아닌 '딸의 죽음'을 먼저 경험해야 했다.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을까?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하는 장면이라도 나오련만...일본에는 그런 문화가 없는 모양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그 누구도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는 '그런 장면'조차 통 보여주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란 무엇일까?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생이건만 왜들 그리 열심히들 살아가는 것인지...죽고 난 뒤에 가져가는 것도 하나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쓰유쿠사는 '만화'를 남겼다. 마침 맞게 한 출판사에서 쓰유쿠사가 연재하던 만화에 관심을 가지고서 '출간'을 약속하기도 했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쓰유쿠사의 삶이 먼저 '마감'하고 말았다. 그래서 정식출간이 아닌 '자비출간'이란 방법을 모색했지만, 그마저 비용면에서 여의치 않아 결국 '소책자'로 쓰유쿠사의 유작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딸이 살아 있을 때에는 질색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도 꿋꿋하게 훔쳐보던 아버지는 느닷없는 딸의 죽음에 보지 않았던 딸의 만화를 '유작'으로 남겨진 소책자로 마주하게 된다. 그 속에서는 딸이 '할머니가 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