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에 관한 온갖 헛소리 북클럽 자본 시리즈 9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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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홉 번째 책은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과연 제대로인지 검증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은 여러 가지 교묘한 꼼수를 써가며 '노동자의 몫'을 가로채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고 있는 현장을 급습하는 듯 까발렸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교묘한 수법은 오늘날에도 '정당한 방법'인냥 많은 이들의 '상식'처럼 깔려 있어서 노동자 스스로는 자신들의 몫이 착취 당하는지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다. 그런데 이런 '착취의 현장'을 마르크스는 오래 전에 '고발'했으며, 노골적으로 자본가들의 편에 선 '정치경제학자'들도 싸잡아서 비난하곤 했다.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이 '가장 읽고 싶은 책'으로 <자본론>을 꼽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마르크스는 정말 대단하다.

 

  마르크스는 '존 스튜어트 밀'을 비판했다. 왜냐면 '노동자도 일종의 자본가다'라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다. 밀이 말하길, "이윤은 생계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물건을 만들어내는 노동의 신비한 생산력에서 나온다"고 했고, "교환이 없어도 노동을 하면 이윤이 생겨난다"고도 말했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 필요 이상의 '잉여생산'을 해냈으므로 노동자는 스스로 부를 쌓아나가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고, 이렇게 남아돌도록 생산을 해냈으니 '교환'을 하지 않아도 노동자는 '이윤'을 챙긴 셈이니, 노동자는 노동을 할수록 부유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 셈이다. 또한 "노동자가 노동을 한 뒤에 임금을 받는 것은 노동을 한 뒤에 대가를 챙긴 것이니 일종의 '투자'를 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도 말을 한 밀을 마르크스는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현실적으로 노동자가 부를 쌓은 적이 없는데도 밀은 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학자의 양심에 앞서서 그도 '자본가 계급'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신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해석을 내놓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에도 그러지 않느냔 말이다. 허나 마르크스의 눈에는 '대학자의 지성이 이토록 저렴할 수는 없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경제학자라면서 '노동의 현실'을 너무나 모르는 처사라면서 말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동의 형태'와 '임금 지급'에 관한 분석을 자세하게 풀어놓았다. 그리고 또 강조한 것이 바로 '형태'의 차이점을 유심히 바라보라고 했다. '형태'만 달라져도 자본가는 앉아서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시간급제'에서 '성과급제'로 임금 지급 형태를 바꾸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시간급제'에서는 노동을 한 '시간'만큼 임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든, 농땡이를 부리며 일하든 '일정 시간'만큼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물론 농땡이를 피우면 감독관에게 걸려 해고를 당할 것이다. 허나 '성과급제'로 바꾸기만 했는데, 노동자 스스로 열심히 일하게 만들 수 있다. 주어진 노동시간 동안 누가 더 많은 양을 만들어냈느냐에 따라 '임금'에 차등을 주기만 해도 노동자들을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해 누구보다 더 열심히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 인해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가는 건 사실이다. 허나 자본가가 챙기는 '잉여생산량만큼의 이윤'이 더 많이 생기기 때문에 결코 자본가가 손해볼 일은 없다.

 

  또한 '성과급제'에서는 호황이든 불황이든 상관없이 자본가는 이윤을 챙길 수 있다. 호황은 말할 것도 없고 불황일 때는 '생산량'을 일방적으로 줄여버리기 때문에 더 적은 임금을 주어도 노동자들이 할 말이 없다. 도리어 쫓겨나지나 않을까 적은 임금을 받고도 버티기 모드로 들어가기 일쑤다. 또 '성과급제' 아래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감시를 하기 때문에 별도의 감독이 필요없을 정도로 편리하게 '이윤'을 챙길 수 있다. 단지 '생산량'이 얼마큼인지 결과만 확인하면 되기 때문에 더욱 편리하게 '착취'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처럼 '형태'를 유심히 관찰하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역설한다.

 

  이렇게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유능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착취를 잘 당하는 것'과 통한다. 재주가 뛰어나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자본가에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전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자칫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챙긴다는 속담과 딱 들어맞는 경우다. 이를 테면, 빵 공장에서 1시간에 평균 100개를 만드는데 비해, 같은 시간에 200개를 만드는 노동자가 있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칭찬하는 약간의 수고만으로도 엄청난 이윤을 챙기기 때문이다. 물론 '보너스'와 같은 단맛을 느끼게 해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보다 더 많은 이윤을 자본가가 고스란히 챙긴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또한 훌륭한 작가란 좋은 글귀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가가 아니라 더 많은 책을 팔아 돈을 더 많이 벌게 해주는 작가라는 점도 자본가가 파놓은 '함정'이다.

 

  어찌보면 '훌륭한 리뷰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꽁짜책을 받고 글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리뷰어가 직접 책을 사서 읽고 일정한 독서시간을 할애한 뒤에 정성껏 리뷰를 남기게 된다. 대부분은 리뷰를 쓰고서 '돈 한 푼' 받지 못한다. 물론 작가를 지망하거나 취미생활의 일환이라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아도 보람을 느끼며 뿌듯해 하지만, 정작 '온라인 서점'에서는 그런 리뷰어들 덕분에 '공짜 책홍보'로 이득을 챙기며, 출판사들도 덩달아 판매고를 올리는 이득을 챙긴다. 그렇게 수고한 '리뷰어'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온라인 서점'과 '출판사'가 얼마나 있을까? 리뷰어가 '노동자'라면 당장에 조합을 꾸리고 소송을 벌여야 마땅할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기 힘든 구조다.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더 많은 착취를 당하기 때문이다. 또 그만큼 '노동의 가치'도 저평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아름다운 일'이 일어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유능한 재주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인정받은 만큼 '댓가'도 정당하게 받아야만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자본가의 꼼수'에 걸려들어서 노동자가 받아야 할 정당한 몫을 빼앗기지 말자는 것이다. '월급명세서'만 봐도 상당히 복잡하다. 내가 받아야할 '기본수당'에 '추가수당'을 더해서 한 달치 월급이 딱 이 정도다..라고 쓰여진 명세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받아야 할 '기본수당'은 깎고, '추가수당'을 항목별로 세분화해서 이름도 요상한 명목의 명세서를 받기 일쑤다. 그 결과 '내가 받아야 할 액수'는 얼추 맞는 것 같은데, 회사로서는 '내야할 세금'을 깎을 수 있는 꼼수를 부린 셈이다. 그렇게 기업이 내야 할 세금이 줄어들면 '유리지갑'을 갖고 있는 월급쟁이들이 내야 할 세금이 늘어나게 된다. 그런데도 정부는 상대적으로 세금을 더 많이 낸 '월급쟁이'에게 유리한 정책보다는 '기업'에게 유리한 정책을 내놓곤 한다. 그래도 '월급쟁이'는 아쉬운 소리를 내지 못한다. 잘 다니던 회사에서 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바로 이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아름다울 수 없는 진실'을 알고서도 불평 한마디 내뱉을 수 없는 노동자의 처지를 말이다. 마르크스가 100여 년전에 이미 지적한 사실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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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쫌 아는 10대 - 우린 모두 사회가 준 유산의 상속인 사회 쫌 아는 십대 6
오준호 지음, 신병근 그림 / 풀빛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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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말했다. "한 달에 500만 원씩 수입이 생긴다면 지금 다니는 직장을 그만 두겠다"고 말이다. 이는 '마음의 소리'로 해석하면, 한 달에 500만 원의 소득이 생긴다면 아무런 걱정없이 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500만 원을 벌게 되어도 일을 쉬지는 않을 것이 틀림없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끝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이 벌어도 더 벌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 탓이다.

 

  그런데 진짜로 매달 500만 원씩 따박따박 내 통장에 임급이 된다면 어떨까?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던져버리고 씀씀이를 조금 줄이더라도 평소에 '하고 싶은 일'인데도 일에 쫓겨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며 즐겁게 살지 않을까? 나라면 그럴 것이다. 난 지금 한 달에 100만 원도 제대로 못 벌고 있기 때문에 500만 원이 아니라 200만 원만 줘도 알뜰살뜰 아껴쓰며 살아가고 싶다. 이처럼 걱정을 떨쳐내고 즐겁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실제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전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 '실현'될 가능성도 매우 높은 편이다. 물론 첫 시행부터 500만 원을 줄 수는 없고, 적게는 매달 20~30만 원부터 많게는 200만 원까지 챙겨주는 시범을 하고 있는 나라들이 꽤 많다. 우리 나라도 경기도 성남시에서 '청년수당'이라는 이름으로 성남시에 거주하는 만24세 청년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1년간 100만 원씩 지급한 일이 있었다. 시행한 결과는 매우 만족한다는 의견이 절대다수였으며, 곧이어 '경기도 전역'으로 시행범위를 넓혀 시행했고, 서울시에서도 만 19세 ~ 34세 미취업청년을 대상으로 6개월간 50만 원씩 시범사업을 시행하기도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대체로 '꽁돈'이 생긴다며 반기는 의견이 많았지만, 대상자가 아닌 분들의 목소리에서는 부정적인 의견도 나왔다.

 

  물론 '기본소득'은 '선별적복지'와 달리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구에게나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소개한 사업은 엄연한 의미에서 '기본소득'과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지급대상자'를 상대로 이렇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도움이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다수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본소득'으로 인해 세금이 인상된다고 하더라도 괜찮겠습니까? 라는 질문에도 과반 이상이 찬성이라고 답변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답변한 이유는 간단하다. 기본소득으로 받은 돈을 꽤나 유용하게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처음 몇 달은 허투루 썼더라도 다음달에 또 같은 액수가 지급될 것이기 때문에 '소득이 불안정한 젊은이들'에게는 안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갑자기 일이 생기거나 아파서 알바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도 '기본소득'이 있기 때문에 당분간 쉬면서 일을 처리하고 몸을 회복하면서 안정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사업을 시작하다가 실패를 하더라도 '기본소득'이 있기 때문에 일단 먹고 살 걱정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기본소득'을 받는 주민들은 이런 장점을 이야기하곤 한단다. 미국의 알래스카 주민들이 매년 '배당금'을 기본소득처럼 받고 있는데, 알래스카에서 채굴하는 유전으로 생긴 이득을 알래스카 주민들에게 '배당금' 형식으로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배당금이 지급되고부터 알래스카 주민들의 '행복의 질'이 매우 높아졌다고 한다. 적게는 180만 원에서 많게는 230만 원까지 지급받고 있다는데, 알래스카 주민이라면 아무 조건없이 매달 지급받는 '기본 소득'이다.

 

  이렇게 좋은 정책인데 왜 전세계적으로 시행을 하지 않는 걸까? 그건 '재정부담'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그보다는 부자들이 세금을 내기 싫어하기 때문이라는게 정설이다. 왜냐면 온 국민이 '기본소득'을 지급받기 위해선 정부가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상위 1%의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부자들도 '기본소득'을 지급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부자들만 [기본소득 < 세금]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서 먼저 시행한다고 하면 부자들의 이민 발생률이 급격히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처럼 '세금'을 더 많이 낸다고 해도 기꺼이 내겠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부자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지금도 부자들의 '조세저항'은 일반서민들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을 시행하기에 앞서 '선별적 복지'를 시행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다시 말해,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소득의 일정부분을 보장해주어 생계에 보탬이 되도록 말이다. 허나 '선별적 복지'에는 엄청난 함정이 숨겨져 있다. 지금 우리 나라도 시행하고 있는 '선별적 복지'는 가장 가난한 '최극빈계층'에게만 복지혜택을 받게 하고 있다. 그래서 당장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면 '차상위계층'이 되어 혜택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최극빈계층'이나 '차상위계층'이나 우리 사회에서 도움이 절실하기는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둘 사이를 가르는 기준을 '월 50만 원 수입'이라고 정했다면, 월 49만 원 버는 이는 복지혜택을 받아 '월 50만 원씩' 지급받아 총 수입이 월 100만 원이 되지만, 일을 구해서 월 51만 원의 수입을 스스로 벌 수 있게 되면 한 푼도 혜택을 받지 못해 '최극빈계층'보다 더 못사는 '차상위계층'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점은 또 있다.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보편적 시행 vs 선별적 시행'을 두고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다. 만약 '무상급식'을 선별적으로 시행했을 때에는 학생들이 '자신의 가난'을 직접 증명해야만 한다. 그리고 '가난 라이센스'를 발급받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매번 증명해야만 한다. 이럴 때 얼마나 자괴감에 빠지게 될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주위의 '차가운 시선'일 것이다. '우리 아빠엄마 세금으로 밥 빌어 먹고 사는 찌질이'로 낙인을 찍게 될 것이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는 허울 좋은 도덕심으로는 왕따를 결코 이겨낼 수 없다.

 

  이렇게 '선별적 복지'에는 큰 문제점이 있다. 헌데 '보편적 복지'를 하게 된다면 어떨까? 자신의 가난을 증명할 일도 없다. 또, 기본적 생계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주게 된다면 우리 사회에서 '가난'을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생계형 범죄' 같은 일은 확연히 줄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더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그래도 부정적인 목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일 할 의욕'을 사라지게 만들어서 게을러진다고 말이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 실현된 세상에서는 '노동'을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인간의 노동'이 필요없는 세상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동이 사라진 세상에서 '게으름'을 평가할 기준은 무엇으로 정할 수 있겠냔 말이다. 온 세계 사람들이 '지금의 기준'으로 게을러질 것이다. 앞으로의 세상은 '노동의 종말'을 고하게 되고, 인간은 놀고 먹는 일에만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기본소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모두 굻어죽고 말 것이다. 날마다 폭동이 일어나 불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본소득' 정책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시행될 가능성은 없다. 인간의 노동이 소멸되는 시점에 자연스럽게 정착될 것으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앞선 시대에 차츰차츰 시행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혹시나 조금 이른 시기에 시행되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보편적 복지'를 실행하며 앞서나가면 어떨까? 분명 '기본소득'은 꽤나 장점이 많고 불편함보다는 유용함이 더 많게 될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기본소득'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한 번 더 고려해보고 심사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면 '기본소득 정책'은 앞으로만 전진할 수 있고, 뒤로 후퇴했을 때에는 엄청난 반감이 생길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기본소득' 논술 수업을 진행해보니, '꽁돈'이 생기는 건 좋지만, '세금'을 더 내야하는 건 싫다는 의견이 많았다. 재벌도 아닌 아이들인데, 의무보다 혜택을 더 누릴 아이들인데도 "세금 내는 건, 싫어요. 차라리 안 받을래요"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에 상당히 놀랐다. 물론 '기본소득'에 대한 개념이해가 부족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마키아벨리가 지적했듯이 "받는 것보다 빼앗긴 것에 더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심리는 진리라는 걸 새삼 느꼈다. 뭐, 아이들에게는 마키아벨리즘을 설명하는 것보다 '조삼모사'를 설명하는 것이 더 빠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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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할 교양 : 공정무역, 왜 필요할까? 내인생의책 세더잘 시리즈 1
아드리안 쿠퍼 지음, 전국사회교사모임 옮김, 박창순 감수 / 내인생의책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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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재팬'의 열풍은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일본불매는 하겠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시작된 일본제품 불매운동은 '일본제품' 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를 향해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잡으라고 외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일본은 지난 잘못에 대한 사죄는커녕 사과나 반성도 없다. 그저 버틸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버팀'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행여 '오래' 가면 갈수록 더욱 불리한 것은 일본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은 바로 '소비자의 힘' 덕분이다. '공정무역'이라는 것도 바로 이런 '소비자의 힘'이 없다면 시작도 할 수 없다. 그럼 공정무역이란 무엇일까?

 

  무역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상품을 사고 파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공정하다'는 뜻을 달았으니 '무역'을 공정하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누구에게 공정하다는 것일까? '공정함의 대상'은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노동자(생산자)'를 향한다. 노동자가 땀 흘려 열심히 생산한 물품을 '정당한 대가'를 주고서 사오자는 운동인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역'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다. 커피농장에서 커피를 따는 어린 노동자에게 하루동안 일하고 버는 돈이 고작 우리 돈으로 100~200원에 불과하단다. 축구공을 한 개 만들기 위해서 수백 번의 바느질을 거쳐야만 한단다. 그런데 이를 기계화된 공장에서 만들지 않고 어린 소녀의 손끝을 수없이 찌른 뒤에야 만든단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계를 들여서 만드는 것보다 소녀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이 소녀가 축구공 하나를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1시간 남짓 한 개를 만들 때마다 받는 임금은 고작 1000원에 불과하단다. 이 고급 축구공을 선진국의 소비자가 사려면 10만 원이 넘게 드는데 말이다.

 

  바로 여기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생산자에서 소비자까지 상품이 전해지면서 가격의 차이가 너무난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축구공을 살 때는 10만 원인데, 소녀의 손에 쥐어진 돈은 고작 1천 원이다. 나머지 차액은 누가 갖게 되는가? 바로 '중간 상인(기업)'의 몫이다. 물론 기업들이나 중간 상인들도 억울한 소리를 하게 마련이다. 상품이 나라와 나라 사이를 오가게 되면 '운송비'가 들게 되고, 상품이 수출상인과 수입상인을 거칠 때마다 '이득'이 붙게 마련이라 '노동착취'와 같은 비난이라도 할라치면 억울할 법 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린 노동자들이 '노동착취'를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왜냐면 너무나 적은 대가를 받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그건 소비자들이 현명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대형마트'에서 더 싼 상품을 소비하려는 욕구가 커질수록 기업이나 중간상인들도 더 싼 상품을 찾게 되고, 그렇게 싼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어린 노동자들의 몫을 줄이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소비자의 욕구'가 어린 노동자들을 '착취'하게 만든 셈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비싼 상품을 소비해야 할까? 그렇더라도 어린 노동자들의 몫이 커질 거라는 보장은 없다. 중간에 거치는 단계가 워낙 많기 때문에 이때에는 '중간상인들'만 큰 이득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착한 소비'가 노동자들의 삶까지 윤택하게 만들 수 있도록 '공정무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시하고 지켜보는 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가 착한 소비를 한 것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공정무역 마크'를 보면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허나 '공정무역'에도 문제점은 있다. 일부 기업들이 '공정무역 마크'를 다는 것을 홍보마케팅으로 이용하며 그 홍보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기도 한 사례도 있고, 애초에 소비자를 속이고 거짓으로 마크를 도용해서 착한 소비자를 우롱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수많은 무역상품을 일일이 검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적지 않게 적발하고 있음에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소비자의 힘'은 세다. 단 한 차례라도 신용을 잃는 행위를 하거나 갑질횡포와 같은 일이 발생하면 소비자들은 불매운동을 꺼내들며 기업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줄 수 있음을 기업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설령 기업이 아닌 '하청업체', '도급업체'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도 원래의 기업에게 '소비자의 힘'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왜냐면 커다란 기업이 흔들리면 밑에 있는 중소기업들도 자연스레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비자는 기업을 믿고 소비를 하되 '공정무역'을 속이거나 하면 본때를 보여주면 된다.

 

  허나 '공정무역'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 관건이 되었다. 세계 경기가 들쭉날쭉 할수록 기업들은 '공정무역'을 부담으로 느끼고 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소비자'들이 줄어든 소득만큼 소비를 줄인 탓이다. 하지만 '착한 소비'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고용이 된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노동자들을 외면하면 노동자들은 설자리가 없게 된다. 비록 머나먼 곳이라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내가 '소비하는 상품'을 만드는 또 다른 노동자의 노고를 생각해서 '합리적인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착한 소비를 멈추면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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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선 자본주의 - 미국식 자유자본주의, 중국식 국가자본주의 누가 승리할까
브랑코 밀라노비치 지음, 정승욱 옮김, 김기정 감수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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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중 간의 갈등이 심화 될수록 중간에서 낀 우리 나라는 참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지정학적으로는 중국의 영향권에 속하면서도 이념적으로는 미국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경제 또한 중국과 미국 두 나라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 선택하라는 숙제가 주어진다면 결코 풀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더구나 경제력의 대부분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모쪼록 미중 갈등이 하루 빨리 진정세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허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두 나라를 보면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 두 나라 모두 '패권국가'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도 바람직한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힘쎈 두 깡패국가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고, 우리 나라는 그 두 깡패 사이에 낑겨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분단국가'인 우리는 정치든, 경제든, 그 어떤 관점으로 보아도 갈등의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대견하다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은 '하나의 경제체제'로 자리잡은 자본주의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자본주의'와 중국으로 대표되는 '국가자본주의'로 분화하고 있는 현재를 맞이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럼 '공산주의'는? 물론 스스로의 모순으로 망했다. 아직까지 북한, 쿠바 등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나라들의 경제는 바닥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니 경제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 지 오래 되었다. 중국조차 '공산주의'에서 일찌감치 선회하여 자본주의에 안착한 마당에 나머지 공산국가들도 결국엔 자본주의화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에는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 바로 '부의 불평등'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이 사회주의 사상과 공산주의 체제가 등장했지만 오늘날에는 이미 실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북유럽 국가들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복지국가'로 거듭났지만, 이들 나라들도 부의 불평등으로 인한 고민이 점점 심해지고 있단다. 암튼 여기선 '미국식'과 '중국식'만 비교하고자 한다.

 

  허나 책의 내용이 너무 자세한 탓인지 번잡스런 내용이 많고 거추장한 주장들이 많이 자칫 산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두 '부의 불균형'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안을 내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으나 좀 깔끔하지 못해서 설명은 생략하려 한다. 핵심적인 내용은 '미국식 자본주의'가 성공할 것인지, '중국식 자본주의'가 안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다. 물론 이 책에서도 뚜렷한 결론은 없다. 심지어 두 방식의 '절충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부의 불균형'을 어떻게 극복해야만 하는지가 관건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는 잊어도 내 재산을 빼앗은 원수는 꼭 갚는다고 말이다. 부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꼭 말하는 것이 '세금 징수'인데, 특히 '고수익자'에 대한 세금에 대해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다. 왜냐면 이들의 '납세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미국식'은 불리하고 '중국식'은 유리한 편이다.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한 만큼 자율에 맡긴 합의보다 국가정부가 밀어붙이는 방안이 더 결정내리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대한 반발은 정반대로 거셀 테고 말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세금은 많이, 그리고 확실하게 걷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래야 나라 살림도 안정되고 복지정책과 같은 것도 효율적으로 빠르게 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부의 불평등'도 점점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를 세금 확보로만 해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 나라의 방식이 어떻게 '부를 형성해 가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 형성과정에 대한 기나긴 부연설명은 책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부의 불평등이 극대화되어 가는 원인도 파악할 수 있지만...너무도 뻔한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를 테면, 부자들끼리만 결혼을 하는 방법과 같은 것 말이다. 과거에는 가난한 남자 또는 여자와 결혼을 하는 부자들도 있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부자들이 쌓아놓은 부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부의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확실히 그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암튼,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귀결'이다. 과연 수많은 문제점들을 자율적으로 극복하고 '미국식'으로 안착할 것인가? 아니면 엘리트적 관료주의 아래서 권력이 부를 만드는 '중국식'으로 결말을 낼 것인가? 아니면 '미국식'과 '중국식'의 장점만 따온 새로운 방식의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될 것인가? 언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이 책에 수록된 기나긴 부연설명을 읽고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우리에겐 '미국식 자본주의'만 익숙해보이지만 우리도 알게 모르게 '권력중심적'인 '중국식 자본주의'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 우리 사회도 중국 못지 않게 권위적이며 관료중심적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런 방식에 크나큰 문제점이 '부패한 권력'이라는 점이다. 분명 중국은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며 매우 높은 성장률을 보여왔지만, '중국식 자본주의'에는 청렴결백함이란 전제조건이 절실한 셈이다. 그렇다고 '미국식 자본주의'가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엄청난 문제점을 드러내며 2008년 이후 경제적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미국의 위상 또한 엄청나게 추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귀결이 가장 좋을까? 이 책은 슬며시 두 체제의 '공진화'를 선보이고 있다. 두 가지 방식의 절묘한 조합과 장점만 따서 '또 다른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뉘앙스를 마구 풍긴다. 딴에는 강아지조차 '순종'은 병약하고, '잡종'이 건강한 편이니 두 체제가 하나의 체제로 융합할 수만 있다면 더 나은 체제가 만들어질 거라는 점에는 수긍을 한다. 또, 과거 일본의 경제발전이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 특수'였기에 거품이 빠지고 나서는 '잃어버린 20년'이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자기 고집'만 부리다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없는 추락만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새로운 경제체제가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다다르게 된다.

 

  이제 '자본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과거에 '공산주의'가 대안으로 등장했다가 야멸치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젠 자본조의 스스로 변화를 맞이해야만 한다. 현재로서 가장 경제적으로 성장한 두 나라인 '미국'과 '중국'의 방식을 엿보며 새로운 모색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해 보인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미국식'과 '중국식'은 정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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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1 - 개정판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낭만'은 고정된 형식을 벗어나서 자유를 만끽하며 즐기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풍조다. 그래서 '낭만'의 반대말이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고전적인 아름다움도 우리는 함께 느끼곤 한다. 먼 옛날의 일상을 바로 눈앞에서 펼쳐보인 것 같은 생생함이 색다른 감흥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두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로맨스 소설'이라고 부른다. 그 로맨스가 바로 '로망'이고, 로망을 일본식 한자음으로 '로망(浪漫)'으로 쓴 것을 우리식 한자발음으로 '낭만'이 된 것이다. 여기 정은궐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하 <성균관>)은 바로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를 우리의 '고전적인 역사'로 투영시켜서 세련될 필체로 우리에게 읽힌 책이다.

 

  가끔 '책읽기 슬럼프'에 빠졌을 때 <로맨스 소설>을 읽곤 하는데, 이번엔 대차게 빠졌기에 이 책을 꺼내 들었다. 벌써 네 번째 읽는 책인데도 여전히 질리지 않고 재미나게 읽는 낭만 소설이다. 정은궐의 매력이 물씬 나는 책이 이것뿐이 아닌데도 유독 이 작품만 줄창 읽어댔다. 왜 그랬을까?

 

  첫째, 소재가 재미났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그 때문에 '반상의 법도'뿐만 아니라 '남녀의 분별'도 대단히 엄격했다. 다시 말해, 남자가 할 일과 여자가 할 일이 따로따로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가득했던 시대란 뜻이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재주가 많은 여인이라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무대가 전혀 없었다. 여자는 '칠거지악', '삼종지도', '남녀유별' 등등 온갖 족쇄를 달아놓고 집밖으로 함부로 나다닐 수조차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플 지경이었다. 근데 <성균관>에서는 '남장여자'를 등장시켜 그 여인의 재주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이 어찌 신 나고 재미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둘째, 금녀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야릇한 상상이 결코 선을 넘지 않는다. 여타의 '낭만 소설'이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를 다루다보니 입맞춤 정도는 시시하고, 키스와 스킨십, 애무와 섹스를 넘나드는..일명 '선을 넘는 묘사'가 차고 넘치는데 반해서, <성균관>에는 그런 묘사를 최대한 절제하고 있다는 점이 독자를 더욱 감질나게 만든다. 물론 두 남녀 주인공에 한해서만이다. 대물과 가랑 사이에서만 절제될 뿐이고, 걸오에게선 검약, 여림에게선 넘쳐나다 못해 주체하지 못할 정도 과낭비하는 묘사를 해서 더욱 묘한 대비를 이룬다. 거기다 천하일색 기생인 초선과 규중가인 부용화까지 등장하며 여섯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나름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읽는 맛을 더욱 살려준다.

 

  그리고 마지막은 역사적 고증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이는 '사극'을 다루는 소설에서 '선택' 사안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소설이 '허구의 세계'를 다룬다고 하여도 '역사적 사실'을 배격하거나 없는 사실을 억지로 껴맞춘다면 그 어색함이 단박에 눈에 띄어서 독자들의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그런 까닭에 요즘에는 '사극 소설'이나 '사극 드라마/영화'를 통해 역사공부를 한다고 할 정도로 철저한 고증을 요구하는 독자가 더 많아졌다. 여기에 딱 맞는 작가가 바로 정은궐일 것이다.

 

  <성균관>은 조선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펼쳐낸 소설이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으로 '성균관'을 선보였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 국립대학' 격이지만 서울 명지동에 '성균관대학'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소설을 재미나게 읽은 독자라면 실제로 방문하여 '잘금 4인방'이 공부하던 곳을 직접 견학하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이다. 물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드라마가 나오기 훨씬 전에 성균관대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외부인도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90년대면 너무 옛날인가...

 

  이 책의 색다른 묘미는 '사색당파 싸움'이 주인공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조정관료들의 당색이 그 자식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서 대를 이어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라는게 겉에서 본 '당파 싸움의 전부'이지만, 당파 싸움의 원인인 '해석의 차이'를 들여다보면 당시 조정관료들의 고심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노론, 소론, 남인으로 갈라져 허구헌날 싸우기만 했지만, 각자 나름의 이유와 고집은 있었던 셈이다. 허나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한낱 '명분'에 사로잡혀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조선을 우물 안의 개구리로 만들어버린 안타까움이 더할 뿐이다.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할 때, 조선에서는 장희빈이 사약을 한샷으로 먹네, 투샷으로 먹네하며 구중궁궐 다툼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낭만 소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금녀의 공간인 '성균관'에 여인의 몸으로 상유가 되어 조선 당대의 수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점에 충실하면 이야기는 더할나위 없이 재미지게 읽혀진다. 한마디로 '역사적 고증'까지 완벽하지만, 그딴 거 몰라도 이야기가 재밌게 흘러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1권에서는 아픈 동생을 대신해서 과거를 본 윤희가 덜컥 생원과 진사에 합격해 성균관에 '거간수학(임금의 명령으로 성균관에 기숙하며 공부함)'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여인의 몸으로 남정네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 걱정이 되면서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미남자인 가랑 이선준과 '한 공간'에서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뜨게 된 대물 김윤희는 또 다른 미남자인 걸오와 여림을 만나면서 여성독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된다. 하지만 윤희는 생각 밖으로 '남자 행세'를 잘하게 된다. 천하일패 기생 초선의 도움으로 여인이라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별호 '대물'도 받게 되고, 미남자들과 어울리다보니 웬만한 남정네들이 훌러덩훌떡 벗어젖힌 맨몸을 보는 것도 '면역'이 빠르게 생겨버렸다. 그렇게 '성균관 생활'에 잘 적응하나 싶더니만 '남장행세'를 하였는데도 어쩔 수 없이 '여인의 마음'으로 질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바로 가랑 이선준에게 '부용화'라는 미인 처자가 들러붙은 것이다. 선준은 성균관 신방례 때 신세를 진 부용화의 부탁을 아니 들어줄 수가 없었는데, 윤희는 그것조차 마음이 아파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런가? 대물 김윤희와 가랑 이선준의 사랑 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여기에 여림은 대물이 여자임을 확인하는 마지막 함정을 파놓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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