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무의식의 저널 Umbr(a)
슬라보예 지젝.가라타니 고진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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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식의 저널 Umbr(a)' 시리즈는 우리에게 익숙한 저자의 '낯선 글모음집'의 성격을 띤 책이다. 이름만 들어도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등등 세계 명문대학의 교수들이 집필진(?)으로 활약하기에 이 시리즈는 읽어봄직한 책이기도 하다. 거기에 'umbra'라는 단어가 지닌 뜻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보통은 '천문학'에서 일식이나 월식 때 지구, 또는 달의 '본그림자'를 뜻할 때 쓰는 단어이지만, 고대 로마에서는 '동반자'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함께 한다'는 뜻의 환영받는 뜻이 아니라 '초대객이 데리고 온 손님'이란 뜻으로, 한마디로 '불청객'이란 뜻이다.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손님에게 묻어서, 또는 묻혀서 딸려왔으니 얼마나 불편하겠냔 말이다. 그래서 난 이 시리즈의 본래 의도가 바로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라고 짐작한다.

 

  딴에는 '무의식'이 그렇다. 정신분석학에서도 '무의식'은 의식세계의 저편에 있어서 우리의 '의도'에 관여받지도 않고 받을 수도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저변에 깊숙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마치 초대한 적은 없지만 불현듯 찾아와 어느새 함께 자리하고 있는 '불청객'처럼 말이다. 이 책, '무의식의 저널'이 바로 딱 그렇다. 우리의 깊은 관심 '밖'에 있는 책임에 분명하지만 우연히라도 '읽는 순간', 손에서 책을 땔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갖고 있는 책으로 소개하면 딱 맞을 것 같다. 이 책 <유토피아>도 그랬으니, 다른 'Umbr(a)'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김에 '무의식의 저널' 시리즈를 탐독해보려 한다. 시간이 좀 걸려도 해보려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가 쓴 책일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기에 가장 완벽히 이상적인 곳을 모어는 '유토피아'라고 표현했다. 허나 '유토피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가장 완벽한 곳인데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런 곳'이 유토피아라니 말이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유토피아'의 반대말인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상상하는 가장 암울한 곳인데도 현실속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의 진정한 뜻은 '없는 곳'이 확실하다. 그 반대말인 디스토피아가 확실히 '있는 곳'이니 말이다. 아니 너무 흔해서 굳이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눈앞에 펼쳐지는 까닭에 더욱 짜증날 따름이다.

 

  이렇게 짜증이 나는 '디스토피아' 말고 우리가 찾고 싶어하는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을지 정신분석학적으로 나름 분석한 책이 바로 이 책의 골자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를 보여줄 생각은 저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세상에 없음직한 '유토피아'가 왜 확실히 '없는지'만을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유명 대학의 교수님들이 짜고서 그런 글들만 써낸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까닭인 즉슨, 학문적 관점에서 '유토피아'에 관한 내용을 써내려가다보니 꽤나 '형이상학적인 내용'의 글잔치를 펼쳐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각의 저자들은 이 책에서 '유토피아'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이 세상에 '없는 곳'을 지향하는 '무엇'에 대한 주제를 담론으로 삼아, 그 '무엇'이 이 세상에 없을 수밖에 없는 까닭을 진솔하게 나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딴에는 당연한 소리를 뭘 그렇게 어렵게 꺼내서 어렵게 마무리하시나 싶지만, 원체 교수님들이 하는 말발이 원래 그런 식이니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상식적인 선'에서 유토피아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역자 서문'에도 영화 <아일랜드>의 예를 들어 이 책 '유토피아'를 소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굳이 라캉, 파스칼, 프로이트와 마르크스가 언급된 '유토피아'에 심취하고 싶다면 이 책을 탐독하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난, 나만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꼭 존재했으면 더 바랄나위가 없는 그런 '유토피아' 말이다.

 

  내게 그런 유토피아의 이름은 바로 '대한민국'이다. 현실속의 대한민국은 많이 해묵어서 낡아빠진 이데올로기를 애써 끄집어내서 나라를 통째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미국의 노예'로 만들고도 자신이 한 짓을 자랑삼아 떠벌리는 반푼이 30% 국민과 함께 '동반자(umbra)'로 품고 살아가야 하는 후진국 지향국가지만, 내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선진국을 훨씬 넘어서서 이 세상 모든 국가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선도국가'이다. 우리는 잠시나마 그런 대한민국을 경험해봤었다. 다들 알지 않은가.

 

  그런데 그랬던 나라가 불과 1~2년 만에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고, 정치는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외교는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는지 '국익'을 외치면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그런데도 잘했다고 스스로 성적을 매겨버리는 요상한 일들이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국외순방을 나갈 때마다 온국민들이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소원을 빌지경이다. 나갔다하면 사고를 치고 돌아와서는 천연덕스럽게 '또 다른 사고'를 저질러 덮어버리려고만 하니 정말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또 사고를 쳤다. 이웃나라에서 '오염수'를 대놓고 바다에 방류하겠다는데 반대는커녕 '잘 버리는지, 과학적 감시'만 하겠단다. 핵폐기물을 그냥 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니 '잘 처리해서' 버리는지, '허용기준치'를 넘어서면 방류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버려달라, 요청'하는 말만 하겠다면서도 어찌나 당당한지 말이 안 나올 정도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바다에 '오염수'를 버려서 오염을 시켜서 발생한 '일본어민들의 피해보상'을 비롯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비용처리'를 한국정부가 대신 부담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아니, 바다오염의 '가해자'는 일본인데, 그 피해당사국인 '한국정부'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단 말인가? 이게 '호구짓'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거기다 대한민국 총리라는 작자가 '오염수'를 '오염 처리수'라고 명칭을 바꿔 '괴담(?)'에 맞서 대한민국 어업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앞장서겠다고 한다. 이건 또 뭔 짓거리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팩트는 간단하다. '방사능에 피폭되면 뒈진다'는 것이 가장 과학적인 진실이다. 알프슨지 히말라얀지 현대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아무리 '핵오염수'를 걸러도 '방사능물질'을 모두 다 거를 순 없다는 것도 '과학적 팩트'다. 이걸 아무리 희석한다고 해도 '방사능 수치'가 내려갈 뿐, '방사능 물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적은 양이라해도 '방사능 물질'은 방사능을 뿜어내며 이 방사능에 '피폭'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는 일본에 투하된 '원폭피해자들의 데이타'가 거의 전부다. 그렇게 피폭된 생존자들의 2세, 3세, 그리고 4세들까지 '방사능피폭'에 따른 원인모를 희귀질환에 시달리는 것을 일본정부는 생생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도 기시다 일본정권은 전세계가 공분할 '오염수방류 만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향후 30년간 오염수를 버린 다음, 완벽히 '핵폐기'를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온다는 가정이 따라야 하겠지만, 그 다음에 오염수 수도꼭지를 잠글지는 미지수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하루에 500톤 이상을 방류하고, 30년 동안 방류하면 오염된 바다는 어찌 될 것이냔 말이다. 바다에 '검은 잉크 500톤'을 뿌려댄다고 상상해보잔 말이다. 아무리 '희석'을 한들, '검은 잉크'는 30년 이상 계속 버려지고 바다생태계 모두에 '검은 잉크'가 축적되고, 해양지층에 퇴적되고, 더 나아가 갯벌을 비롯해서 육지생태계까지 '검은 잉크'는 침범해서 결국 온지구가 '검은 잉크'로 얼룩지고 말 것이라는 '디스토피아'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시다 정권'의 유토피아를 짐작할 수 있다. 당장에 처리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니 가장 값싼 방법으로 '핵오염수의 부담'을 걷어내고, 넓고 넓은 바다에 아주 적은 양으로 희석시켜서 버릴 뿐이니 바다생태계가 견뎌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일본수산물'을 날것 그대로 먹어도 안전...아니 별탈은 일어나지 않겠...그래도 행여 안심이 되지 않으니, "기시다는 쬐끔 불안하니까. 노르웨이산 연어스테이크를 먹어줄꺼예요. 서민들은 안심하고 후쿠시마 앞바다 생선 많이 먹어서 삼중수소 박멸할 때까지 흡입해주세요. 그래야 기시다 베이비들은 미래에도 안심하고 스시 먹을 수 있을테니까. 다이죠~부"라고 가장 완벽한 '유토피아'를 상상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 윤석열정부의 '유토피아'는 궁금하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얘들이 상상한 '유토피아'는 상상불가다. 당췌 '국익'이라는 것이 없는 '핵오염수 방류사건'으로 대한민국이 얻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자신들의 빵빵한 호주머니 정도일까? 고작 그딴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면 정말 실망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는 알든 모르든 '무조건' 반복(?)된다면서 '120년 주기설'을 내세웠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120년 전을 살펴보니, '친일개화세력'이 나라를 팔아먹기 일보직전이었다. 윤석열정권이 2022년에 집권했으니 120년 전은 1902년이었다. 곧 러일전쟁이 벌어질 참이었고,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걍 내주고, 나라를 통째로 일제에 넘겨버린 주역들이 한창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단 말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딱 그 꼴인듯 싶어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어난 일도 아니고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우리고 꿈꾸는 '유토피아'가 불확실 할수록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디스토피아'가 닥쳐올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또 다시 '일제의 식민지', '미국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최선도 우리는 익히 경험했다. 이명박 정권때도 물대포를 맞아가며 '촛불'을 들었다. 박근혜 정권때도 엄동설한에 어묵국물로 추위를 달래며 '촛불'을 들었다. 윤석열 정권이라고 다를 건 없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위해 촛불을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시들하다. 촛불의 주역들이 촛불을 들 생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시들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걸까?

 

  이명박 때의 촛불들은 '광우병'으로부터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라를 꿈꿨다. 박근혜 때의 촛불들은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진실이 은폐되고 거짓을 선동하는 부정한 세력을 내몰고 깨끗한 국정을 꿈꿨다. 그런데 윤석열 때로 접어들자, 국민들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진실은커녕 온갖 거짓선동만 퍼나르며 '과학'이라고 우기는 거짓선동꾼들만 가득한 나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참에 바른소리, 옳은소리, 뼈아픈소리를 외치던 지사들마저 두문동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냔 말이다.

 

  총선 때를 기다려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방식은 가장 소극적인 방식으로 큰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도 '여소야대의 정국'인데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할 때다. 한동훈 장관은 '사형집행' 운운하며 칼부림을 참지(?) 않을 것이라 겁박하는 형국이다. 이럴 때 무엇을 기다리냔 말이다.

 

  우리는 3·1만세혁명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4·19혁명으로 부정선거를 용납치 않았으며, 5·18혁명으로 부당한 정권을 하나 뿐인 생명을 내놓고 부정해봤고, 6월혁명으로 그 정권을 작살냈었다. 그 이후에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서 우리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를 꿈꿨었다. 당신은 그때 꿈꿨던 우리의 유토피아를 잊었단 말인가? 그건 아니 된다. 비록 우리가 꿈꿨던 '유토피아'가 실제로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지언정 '유토피아'를 꿈꾸길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꿈꾸길 포기하냔 말이다. 어쩌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120여 년전 나라를 팔아먹어도 좋다는 '매국노들의 후예'가 지금 본색을 드러내고 저들의 세상이 온것마냥 나대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들을 소통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경일에 '일장기'를 내걸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저들을 싹쓸이할 기회가 '바로 지금'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이 땅의 매국노들을 싹 쓸어버린 '뒤'의 대한민국을 말이다. 또다시 흐지부지 끝날 '그날 이후'를 미리 걱정할 필요따윈 없다. 그래서 난 즐겁다. 날이면 날마다 '망국의 앞잡이들'이 목을 길게 늘이고 나불대고 있는 지금이 말이다. 얼마나 좋으냔 말이다.

 

  이렇듯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비-존재의 대상'으로 삼아 무궁한 고찰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 <유토피아>가 얘기하고 있는 골자로 생각한다. 각각의 저자들이 나름의 '전문분야'에서 나름의 '유토피아의 개념'을 풀어냈지만 말이다. 정신분석학에 걸맞게 '유토피아'와 '정신병'에 유사한 점을 분석한 저자도 있었다. 따라서 과거의 '광기어린 인물'들이 종종 '천재성'을 발휘하여 모든 인류에게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고도 말한다. 꽤나 신선한 풀이가 아닐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도 광기어린 천재들(장승업 등)이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예가 있어 솔깃한 내용이었다. 허나 나는 한 술 더 떠서 '한 사람의 정신병자'가 나라를 거덜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의식의 저널'은 무한한 상상의 재미를 선사하는 책이라 마음에 흡족했다. 다음 책도 무진 기대가 된다.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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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aladin.co.kr/728876216/14744562


와우~ 알라딘에서 첫 당선이라니

선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책을 사야할까?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드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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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구원자들 - 금융회사의 수익을 투자자의 몫으로 돌려준 월가 괴짜들의 위대한 유산
로빈 위글스워스 지음, 고영태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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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투자를 잘 모른다. 그래서 '주식'과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예금과 적금'과 같이 '원금손실'이 거의 없고 아주 적은 이자에 만족하며 차곡차곡 돈을 모아나가는 방식으로 자산을 불려나갈 뿐이다. 물론 주식이나 코인 등에 투자해서 일순간에 일확천금의 수익을 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귀가 솔깃해지기도 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럴 때마다 늘 '주식으로 흥한자, 주식으로 망한다'는 말을 되뇌이며 투자상품에 대한 관심을 애써 억누르곤 한다. 반백살을 살면서 '눈먼돈' 같은 건 한 번도 얻은 적이 없으며, 잠시라도 그런 욕심을 품었을 때는 거의 대부분 돈을 '잃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한때 욕심을 부려 딴에는 '큰돈'을 걸었다. 한 방에 날려버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철저히 결심했던 것이 바로 '욕심에 눈 멀지 말자'는 것이었다. 나에게 딱 맞는 자산증식의 방법은 '차곡차곡' 뿐이라고 말이다.

 

  암튼, 이런 '투자 무식쟁이'의 눈에도 이 책에서 말하는 '패시브 투자'라는 용어가 들어왔다. 흔히 말하는 '장기투자'를 일컫는 말인데, 반대의 뜻을 지닌 용어는 '액티브 투자(공격적 투자)'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궁극적으로 '액티브 투자자'라면서 적극적인 투자가 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유효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공격적인 성향의 소유자'가 '패시브 투자'를 유치하려고 한단다. 이유인 즉슨, 장기적인 안목의 투자자가 공격적인 투자자보다 '안정적인 수익'과 '더 많은 수익'을 보장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런 '패시브 투자'는 주식시장을 교란시키고 금융시장의 본질을 흐릴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지향해서는 안 된다고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도 투자자의 안정적인 수익을 위해서 '패시브 투자(장기투자)'를 권한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투자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막대한 손실'을 감안하고서라도 공격적인 투자(액티브 투자)를 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면서 주요 종목에 '공격적인 투자'로 금융시장의 본질을 회복시켜 긍정적인 방향으로 경제를 변화시켜야 바람직하다는 말인가? 결국엔 '둘 다 맞다'는 뻔한 소리이고, 자신의 투자성향에 알맞게 적절히 분배해서 균형잡힌 투자를 하는 건강한(?) 투자자가 많아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흔히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주식시장의 바이블과 같은 격언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한데, 그보다는 투자는 결국 투자자의 몫이니 어떤 결과를 맞더라도 자신의 책임이니까 '결과'에만 집중하라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결론을 마무리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많은 투자자들은 '공격적인 투자' 기법에 대단한 매혹을 느끼기 마련이다. 매우 빠른 결과를 맞이할 수 있고, 성공하면 '막대한 수익'을 얻어낼 수 있는 짜릿함을 만끽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단기적인 공격적인 투자로 인해 '막대한 손실'도 비일비재하지만, 그런 실패담은 애초에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오직 '대박', '떡상'만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공격적인 투자로 제법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산'으로 투자를 하는 거물들에게나 통하기 마련이다. 개미 투자자가 이런 식의 거액의 수익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액티비한 투자'로 큰 수익을 얻기 위해선 아홉 번의 잔잔바리 손실을 커버할 단 한 번의 '떡상'에 배팅하는 큰손들에게나 어울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종목 하나하나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개미들에게는 요원한 투자방식인 셈이다.

 

  이에 비해 투자 수익율이 '지수변동'과 유사한 '패시브 투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확실한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안정적인 투자기법인 셈이다. 워렌 버핏과 존 리도 이런 식으로 '안정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막대한 수익을 챙겨 '부자의 대열'에 오른 만큼 수없는 투자자들의 '교과서'라 불릴 정도다. 허나 저자는 이런 식의 '안정적인 수익'이 오히려 금융시장을 위축시키고 나아가 교란시킬 수 있는 방식이라고 지적하며 공격적인 투자만이 주식시장의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단다. 물론, 이런 공격적인 방식만이 '대박신화'를 터뜨릴 수 있고 말이다. 이 책에서도 수없이 많은 예를 선보이며 이런 '공격적인 투자자'들이 금융시장의 위기를 구해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패시브 투자'를 권한다고 한다. 대형주, 민감업종 등이 투자자에게 확실한 수혜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란다. 또한, 어설픈 공격적인 투자로 인해 손해가 막심해져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도 부지기수라면서 '장기투자'로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경향을 내비추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까지나 '안정적인 수익'을 바탕으로 투자자의 건전성을 회복하는 수준까지만이었다. 근본적으로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선 '액티브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이를 테면, 해지펀드 같은 것으로 워렌 버핏과의 내기에서 승리한 이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패시브 투자는 금융 위기 대응에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리먼 브라더스 사태'처럼 잘못된 종목을 아무런 위기의식도 없이 그냥 가지고만 있다가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일이 발생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적절한 '액티브 투자'는 꼭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현명한 투자자일수록 주식종목과 금융시장에 대해 연구하고 도전하는 경향이 크며, 그 자체로 '시간'과 '투자'를 즐기는 일이기 때문에 액티비한 투자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세상은 이런 '또라이'들이 있기에 금융의 역사가 바뀔 수 있었다면서 말이다.

 

  결국 투자의 결과는 투자자 본인에게 있는 법이다. 아무리 훌륭한 투자조언가가 할지라도 투자의 결과에 책임지는 것은 '투자 당사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수익과 처절한 손실, 그 어느 것이라도 '자신의 책임'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투자자는 현명해야 한다. 남의 말에 흔들리는 팔랑귀가 우연히 수익을 얻을 수는 있어도, 그 수익이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얻은 것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력 없이 얻는 수익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고, 위험천만한 '행운'일 뿐인 셈이다. 행운이 위험한 까닭은 언제 얼마큼의 손실을 가져올지 아무런 장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자란 말 그대로 '돈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던진 돈이 다시 되돌아올지 영엉 돌아오지 않을지, 어찌 노력도 하지 않고 운에 맡길 수 있느냔 말이다. 그런 방식의 투자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제목 <투자의 구원자들>이란 금융위기 사태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투자에 성공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투자에 관해 문외한에 가깝기 때문에 정확한 묘사를 하기에 이해가 안 되는 것들 투성이였지만, 그럼에도 바람직한 투자자가 가져야할 덕목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노력형 투자자'들이었다. 기존의 투자방식으로 안정성을 추구하다가 금융위기가 찾아오면 폭삭 망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위기의 순간에 '새로운 투자방식'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해내는 투자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복잡한 금융시장을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도 바로 이런 노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의 틈새를 비집고서 위기를 극복하고 막대한 수익을 창출해내는 이런 '노력형 투자자'들만이 새로운 금융시장에서 살아남기 마련이다. 당신도 그런 현명한 투자자가 될 수 있다. 세상을 구원하는 새로운 방식의 투자자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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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 카프카 단편선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85
프란츠 카프카 지음, 한영란 옮김 / 더클래식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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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의 <변신>을 수업한 적은 많았지만, 리뷰로 쓰게 된 것은 이번에 처음이다. 내가 결정지은 '해석'이 그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변신>은 수업을 할 때마다 '주제'가 달라지는 묘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내가 강의를 하면서도 강의내용이 매번 달라지는 것이 참 재밌고 흥미진진할 정도니까 말이다. 아마도 '카프카에 대한 리뷰'도 매번 달라지게 될 것이다. 뭐, '나의 리뷰'는 늘 그런 식이지만 말이다.

 

  <변신>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단편소설이기에 간단할 수밖에 없지만, '카프카'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이야기는 '느닷없이'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 잠자의 당혹스러움으로 시작한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잠자가 잠자다가 별안간 '벌레'가 된 까닭 말이다. 카프카는 이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무슨 단서라도 던져줄까 샅샅이 뒤져봐도 '그런 것'이 없다. 보통 '판타지소설'에서는 현실세계와 환상세계 사이를 연결해주는 '통로'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해리 포터도 킹스크로스역 '9와 3/4 승장강'을 통해 마법학교로 가게 되고, 앨리스도 토끼를 따라서 나무굴속으로 한없이 떨어져 '이상한 나라'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카프카'는 그런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 그저 어느날 갑자기 '벌레'가 되었다는 신선한 충격을 독자들에게 안겨줄 뿐이다.

 

  암튼, 잠자는 '벌레'가 되어 출근도 하지 못하다 '단 한 번의 지각'으로 회사에서 짤리게 된다. 그토록 성실하게 일했던 직장인데도 회사는 '일할 능력을 상실한 사원'에게 가차없이 퇴직 통보를 알린다. 그리고 잠자의 가족들도 '더는 돈을 벌어올 수 없는 가족'에게 애정이 빠르게 식어감을 보여주었다. 이런 정황 묘사는 카프카가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아주 적확하게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회구성원에겐 매몰차게 '소외'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완벽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삐걱거리면 '무한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체적 장애나 정신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는 더할나위없이 비정하게 굴며, '경제적 무능력'을 입증(?)한 구성원에겐 더욱더 가혹한 냉담함을 취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그렇게 잠자는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어 버리고, 가족 안에서도 철저히 고립되어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잠자'가 소외된 상황에서도 회사는 잘 굴러가고, 잠자의 가족들도 나름 잘 적응하며 살아가게 된다. 다시 말해, 누구보다 성실하던 '회사원'이었고,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이었음에도 '잠자의 빈자리'는 금방 채워지고 흔적조차 사라지게 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무능력'이 증명되는 순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을 빠르게 지워나가고 만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거대한 대기업을 잘 굴러가게 만드는 '부속품'에 불가한 것이 아닐까?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자 그토록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숙명을 살펴보잔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냔 말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물질의 풍요로움'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가치'는 오직 실적과 결과로만 증명하게 되고 '목표치'를 채우지 못한 인간은 인간취급조차 받지 못하고 도태되고 내쫓기고 만다. 그 '빈자리'는 빠르게 다른 누군가가 채우게 되어 애초에 '빈자리'가 있었는지 티도 나지 않게 된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인공지능로봇'이 개발된다고 하는데, 그때가 되면 '인간 노동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애초에 티도 나지 않는 '빈자리'는 모조리 로봇이 대신하게 될 것이다. 과연 그런 미래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결국, 잠자는 다시 인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골칫거리만 제공하던 잠자가 죽어버린 것이 '행복의 시작'이란듯이 나머지 가족들도 활기를 되찾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쓸쓸한 죽음이다. 끝내 자본주의적 인간이 맞이할 '종말'로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최고의 능력을 보여주며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만 기억하는 세상이지 않느냔 말이다. 시쳇말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할 것이다. 이런 세상에선 '2등'도 '패배자'일 뿐이다. 꼴등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뭔가 보완해야 할 것이 많다.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절실할 것이다.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들은 없는지 '관심'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순간에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대책도 충분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력'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계급화'하는 사회적 풍토도 전환시켜야만 할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나고 돈 낳지, 돈나고 사람 낳냐?'라면서 물질만능주의를 질타하며 인간의 가치회복에 지대한 관심이라도 있었다. 허나 이제는 '돈(경제)'이 모든 것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가 되어버린 듯 싶다. 돈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고, 할 수조차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자가 딱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저 돈지랄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만족하는 아주 저렴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듯 싶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이렇게 <변신>은 이야기의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수업을 한 번 시작하면 좀처럼 끝맺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풍요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그렇고,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도 딱히 만족스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불만족의 시대', 만족이란 느낌을 느끼며 살지 못하는 '불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소설이기도 하다. 당신은 무엇에 만족하며 살아야겠는가? 라고 '카프카'는 되묻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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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를 다시 만나다 - 윤동주 | 소강석 詩 평설 나무평론가선 11
김종회 지음 / 문학나무 / 202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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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윤동주를 '어떻게' 기억해야만 하는가? '시인'이라고 온국민이 떠올릴테지만, 그는 '살아생전'에 시집을 발표한 적이 없다.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그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고 사망한 이후에 그가 쓴 시들을 모아서 펴낸 '유고시집'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선보여진 '시인'으로서의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아름답지만 유약한 청년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시를 연구하고 분석한 이들은 윤동주를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펼친 '저항시인'이라고 말한다. 그가 일본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도 <참회록>이라는 시를 쓰며 배움이라는 핑계를 대고 '남의 나라'에 가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배움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가슴 한 켠으로 '성씨'를 바꾼 아픔을 달랠 길이 없음을 토로하며, 비록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일본유학이지만, '일본제국의 개'가 되지는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되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학시절에도 '교련과목'은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붙잡혀 온 죄목도 '독립운동'이었다고 밝혀졌다. 그렇게 윤동주는 한용운, 이육사, 이상화 등과 같은 '저항시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윤동주를 일제를 향해 총이 아닌 펜을 든 '저항시인'으로만 기억하는 것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시, 별 헤는 밤>이란 시집을 펴낸 '소강석'이란 목회자 겸 교육자 겸 현역시인이자, 윤동주 詩 연구가라는 분은 "시인은 예언자다"라고 말하면서 윤동주의 시는 '독립운동'만 한 것이 아니라 독립이후의 사해평등한 세상을 꿈꾼 '이상가'로 기억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의 시에는 '저항의 불길' 너머에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란다. 그 어린 청년의 가슴속에 그토록 깊고 넓은 세계가 담기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토록 감명 깊은 시를 써낸 시인이기에 우리 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적국이었던 일본인도, 중국인도 윤동주 '기림시 비'를 제작해서 아낌없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나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윤동주 시인은 과연 '한국사람'인가? 우리는 그를 '한국인'이라고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가 나고 자란 곳은 만주 길림성에 위치한 '용정(룡정)'이라는 곳이다. 현재는 중국 조선족자치지구에 속한 곳이고, 그곳에 '윤동주의 생가'를 비롯해서 윤동주에게 반해서 찾아오는 수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관광지'로 거듭나 있는 상태이며, 중국에서는 그를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소개하며 자랑스럽게 '중국인'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소위 '동북공정'의 결과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우리는 맞닥뜨리게 되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중국의 논리는 예상밖으로 견고하다. 중국은 '소수민족' 또한 자국의 영향 아래 놓인 '중국인'이므로,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연변지역'도 당연히 중국의 경계 안에 있는 '중국영토'가 명백하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여기까지는 어느 나라나 내세우는 주장이기에 반박하기 힘들다. 그런데 중국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조선족'이 중국인이므로 '조선족의 문화'도 당연히 '중국문화'라는 억지주장을 펴고 있다. 이런 억지주장에 따르면 '한국의 문화'는 조선족의 문화와 일맥상통하므로 '대한민국의 전통문화, 모든 것'도 중국의 것이라는 논리를 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동북공정의 핵심'이기도 하다.

 

  허나 이런 논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는 '같은 논리'로 한국내 '차이나타운'에 살고 있는 '화교'들도 한국 국적을 갖고 있으니 '화교의 문화'도 당연히 '한국의 문화'로 이해될 수 있고, '화교의 문화'가 '중국의 문화, 모든 것'과 일맥상통하니 중국의 모든 것은 자연스레 '대한민국의 것'에 속하게 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서로 막무가내로 억지논리를 펴게 되면 종국에는 '힘의 대결'로 결판을 짓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한민국이 '최강의 강대국'이 되어 중국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서 '정상화'를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식의 해법은 단순명쾌해 보일 수는 있지만,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정정당당한 외교력을 바탕으로 '대화'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고 상호존중의 자세로 '협상의 테이블'에 마주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물론, 땅덩이는 커다래서 '대국'이라 부름직하지만, 자그마한 소갈머리를 갖고 있어 '소국'이라 불러도 시원치 않으나, 애매할 때는 대충 '중간값'을 부르는 것이 편하니 '중국'이라 불러 마땅한 애들과는 적당히 비위 맞춰주고 달래가면서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렇게 '한국 것' 빼앗으려다가 모든 중국인들이 '한복' 입고, '김치' 먹고, '한글'까지 쓰다가 끝내 '한국 것'만 남고 몽땅 다 사라지게 되고 말 것이라고 점잖게 타일러도 좋을 것이다.

 

  암튼, 윤동주 시인이 '독립운동'을 한 저항시인이었고, 한국적인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한국을 넘어 세계인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우리의 소중한 '윤동주'를 중국의 조선족이 낳은 유명인으로 전락하게 만들 수 없음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으면 바랄 것이 없겠다.

 

책드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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